[월드 리포트] 고기와 케이크가 있는 풍경

박진아│미술사

오스트리아의 중세 무역도시 크렘즈(Krems)에 위치한 포룸 프로너 현대미술 전시관(Forum Frohner)에서는 <미술 속의 음식: 쾌락과 덧없음(Eating in Art: Pleasure and Transience)전>(2013.10.20~ 3.23.)을 열어 현대미술 속에 음식거리와 요리가 어떻게 표현되어 오늘날 우리의 일상을 반영하고 있는지 조명하고 있다.
지난 몇 년 구미권에서는 텔레비전 전파를 타고 불기 시작한 쿠킹쇼 유행에 힘입어 음식과 요리를 주제로 미술작품을 탐색해 보는 시도가 눈에 띄었다. 2009~2010년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할레에서 기획돼 여러 도시를 순회한 <우주를 먹다(Eating the Universe)전>을 시작으로, 2011년 뉴욕 로버트 맨 화랑(Robert Mann Gallery) 기획의 <생각거리(Food for Thought)전>, 2012년 시카고대 스마트 현대미술관(Smart Museum of Art)에서 열린 <잔치 후대(Feast: Radical Hospitality in Contemporary Art)전>, 그리고 최근인 2013년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열린 <미술과 식욕: 미국회화로 본 요리와 문화(Art and Appetite)전>은 20세기부터 현재까지 음식과 요리, 식사문화를 창조적 모티프로 삼은 현대미술 작품들을 연대적 흐름으로 정리한 전시회들이다.
최근 기획되는 전시나 문화이벤트는 음식과 요리를 21세기적 소비문화학 관점에서 보다 경고성 짙은 논조를 띠는 추세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음식거리가 양적으로 풍족해진 과잉 풍요의 글로벌 21세기, 과연 음식은 현대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진화해왔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관객에게 던지고 음식을 둘러싼 과잉 대 부족, 포식 대 기아, 맛좋음 대 역겨움이 공존하는 역설적 현실을 숙고해 보라고 권유한다. 예컨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아리아나 박물관은 유엔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12년에 <푸드(FOOD)전>을 기획해 2015년까지 전 세계 순회전시를 앞두고 있다. 현재 오스트리아 크렘스 쿤스트할레 포룸 프로너관에서 전시 중인 <미술 속의 음식: 쾌락과 덧없음>은 한층 더 깊은 철학적 논조를 띤다. 음식이란 인간의 육신에 자양분을 주고 미각에 쾌락을 안겨주지만 결국 일시적이고 부질없는 생(生)에 대한 은유일 뿐이라며 관객에게 자기성찰과 겸손을 제안한다. 과잉 풍족의 시대인 21세기 오늘, 현대인이 ‘희귀’한 먹거리도 쉽게 구하고 무심하게 버리는 ‘일용품(commodity)’ 정도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냐고 넌지시 꼬집는다.
음식거리가 서양미술에 모티프로 등장한 것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과음과 과식을 7대 죄악의 하나로 보았던 기독교 사상에 근거해,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정물화는 육체적 쾌락에 쉽게 유혹받는 인간 무리를 쉽게 상하고 벌레먹어 썩는 음식거리에 빗대어 인생무상(vanitas)을 경고했다. 그 연장 선상에서, 에덴의 동산에서 지식의 열매 사과를 따먹은 후 원죄의 타락에 빠진 인간상을 일관적으로 그려온 오스트리아 화가 아돌프 프로너(Adolf Frohner)는 이번 전시에 <식료품(Das Lebensmittel)> 칸막이 그림 시리즈를 선보여 재조명받고 있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고 마시고 소화하고 배설한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는 육신과 외부 세계, 자아와 타자 사이의 물리적 간격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며, 한걸음 나아가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인간에게 생명을 멈추지 않고 돌아가게 도와주는 매개물이기도 하다. 이 전시 <미술 속의 음식: 쾌락과 덧없음>은 1960년대 빈 행위주의 (Wiener Aktionismus)야말로 바로 이 철학적 착상에 근거하여 음식재료나 잔치 의례를 퍼포먼스적 요소로 적극 도입한 대표적인 미술운동이었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돼지 도살장에서 죽은 동물의 피와 내장을 갖고 펼친 헤르만 니치(Hermann Nitsch)의 난교극장(1962~1998), 장황한 테이블세팅과 요리를 활용해 벌인 루돌프 슈바르츠코글러(Rudolf Schwarzkogler)의 <결혼피로연>(1965), 온몸에 음식물을 뒤범벅시키는 난장판을 연출했던 오토 뮐(Otto Muehl)의 <푸드 테스트(Nahrungsmittel Test)>(1966)는 모두 음식물에 빗대어 인간의 생로병사와 원초적 성욕을 은유한 강력한 퍼포먼스였다.

미술, 음식문화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다

오스트리아의 실험주의 영화가 페터 쿠벨카(Peter Kubelka)는 요리란 자연상태의 식재료에 열과 조리술을 가해 자연과 문화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임을 넘어서 자연(식재료)을 예술적 조형물(완성된 요리)로 구현하는 고도의 창조과 정이라 정의했다. 그런가 하면 요리란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있는 생명을 죽여야만 하는 잔인함을 내포한다. 사진가 하인츠 치불카(Heinz Cibulka)는 가축 도살 장면을 촬영한 <사진 퍼포먼스> 시리즈를 통해서 요리란 “죽이고, 먹고, 살아가고 잉태하는” 순환과정의 은유라고 정의하면서 동시에 먹이사슬 최상단에 놓인 인간조차도 결국 그 같은 생사의 대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기억하라고 촉구한다.
음식(飮食)문화는 시대마다 변천하면서 호모 소셜리스(Homo Socialis) 즉, 사회적 인간의 단면을 보여주는 바로미터 노릇도 했다. 태곳적부터 오늘날까지 문화권을 막론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 술과 조리된 먹을거리를 나누고 먹고마시는 식사 관행은 인간 사회 속의 여러 기능을 윤활하게 촉진시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종교적・사회적 의례(ritual)였다. 인류의 모든 종교는 제각각 음식과 관련된 독특한 상징체계와 섭생규칙을 가르친다. 전투에 임했던 장군과 병사들은 잔치를 거나하게 열어 먹고 마시면서 사기를 북돋웠고, 고위 정치가나 중대한 계약을 앞둔 사업가는 성찬을 베풀어 손님을 극진하게 대우하는 것으로써 신뢰를 다졌다. 예나 지금이나 구애는 남성이 여성을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것에서 출발하며, 혈연과 혼인으로 구성된 가족이란 함께 살면서 한솥밥을 나눠먹는 식구(食口)들을 뜻하게 되었다.
이 ‘사회적 의례로서의 식사’ 라는 범인류적 주제에 착안해 음식과 미술를 교접한 음식미술의 선구자로 미술계는 스위스의 조각가 다니엘 스푀리(Daniel Spoerri)를 꼽는다. 1960년부터 1970년대까지 계속된 스푀리의 이른바 ‘이트 아트(Eat Art)’는 요리한 음식을 잘 차려낸 밥상에 둘러앉아 여럿이 나눠먹는 식사 의례란 개인과 개인, 나아가서 세대와 세대 간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의 순환(life cycle)을 뜻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는 “인간은 낯선 그 무엇을 잡아 잘게 썰고 뒤섞고 꾸며 담아내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값싼 석유에 의존한 물류 및 운송력, 첨단 포장과 보관기술, 세련된 식품가공기술 덕택에 슈퍼마켓만 가면 원산지나 제철과 무관하게 사실사철 먹거리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초간편의 시대 21세기, 현대 인류는 음식물이 어디서 어떻게 제조되어 우리 곁으로 오는지 모른 채 점점 더 자연과 멀어져가고 있다. 이를 환기시키려는 듯 요제프 보이스의 <내게 꿀을 다오(Gib mir Honig)>는 인간과 자연 간 깨지기 쉬운 공생(symbiosis)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꿀벌과 벌꿀통에 빗대어 표현한 개념주의 설치물이다. 디터로스(Dieter Roth)는 초콜릿 덩어리를 깎아 만든 자화상 조각 <사자로서의 자아(Lowenselbst)>(1967년)에서 재료에 내재된 부패와 사멸의 운명을 작품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서 생산되는 식품 중 3분의 1이 소비되지 못한채 폐기된다. 이에 대한 논평으로 오스트리아의 사진작가 클라우스 피힐러(Klaus Pichler)는 <3분의1(One Third)> 시리즈에서 바로크 정물화풍을 빌려서 식품산업계가 그토록 집착하는 유통기한제의 진정한 의미를 재고한다. 탈가족화 추세 속에서 전에 없이 1인가구가 많아진 요즘, 마르쿠스 하나캄과 로즈비타 쉴러(Markus Hanakam & Roswitha Schuller) 2인조팀은 플라스틱과 인조가죽을 삼각형으로 잘린 조각 케이크로 형상화해 대량 생산된 기계가공식품으로부터 영양을 섭취하는 현대인의 식생활 양태를 지적한다.
미술 속의 음식을 인류문화사를 이해하기 위한 문화적 자취로만 이해하는 단계는 지났다. 예컨대, 태국의 리르크릿 티라바냐(Rirkrit Tiravanija)는 전시장에서 커리를 요리해 관중에게 나워주는 퍼포먼스(뉴욕 모마, 2012년)를 통해서 요리, 미술, 외교를 연결했다. 2012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한 아트 프로젝트는 젊은이들이 슈퍼마켓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을 구제해 파티요리를 만드는 단편영화 <쓰레기 속에서(Days in Trash)>를 제작해 소비주의의 병폐를 창조적으로 극복할 것을 제안했다. 빈에 있는 티센-보르네미자 아트 컨템포러리(Thyssen-Bornemisza Art Contemporary)가 운영하는 서퍼클럽(Supper Club) 이벤트는 미래의 연회 메뉴와 식사문화를 탐색해보는 문화실험소다. 이제 현대미술은 음식을 인간 행동을 변화시키고 미래 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문화적 실험 도구이자 적극적인 참여 수단으로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