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리뷰] 김인배-몸으로 눈을 보다

이선영│미술비평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리는 김인배의 <점 선 면을 제거하라 전>은 근대의 시각중심주의 문화에 대한 몸의 반란이라 할 만하다. 이 전시에서는 눈이 몸을 보기 보다는, 몸이 눈을 보는 역전이 일어 나기 때문이다. 점 선 면은 인간의 시각적 관념 속에만 존재할 뿐, 자 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을 점적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메를로 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현실의 시공간은 점이나 선을 지니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고에서 ‘a=a’일 뿐인 근원적인 이성의 진리, 그 동일률은 사라지고, 모든 지 각은 운동으로 간주된다. 김인배에게도 선은 하나의 매체이며, 점 은 힘들의 중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의 오감 중 가장 관념적이 고 추상적인 감각인 시각은 점 선 면이라는 기하학적 요소를 좌표축 으로 설정하곤 한다. 이러한 좌표축이 사변철학의 바탕이다. 사변 철학은 ‘우리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낼 수 있는, 일반적 관념들 의 정합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인 체계를 축조하려는 시도'(화 이트헤드)이다. 변화에 무력한 사변철학은 다원론적 실재들을 거 부하며, ‘유일한 가능성일 뿐인 필연성'(메를로 퐁티)을 신봉한다. 김인배의 작품에서 관념에 의해 고정된 시각을 교란하고 상대화 하는 몸은 코드화할 수 없는 자연의 대표로 호출되었다. 그의 작품 에서 몸은 대우주의 질서를 반향하는 소우주가 아니라, 뫼비우스 띠처럼 유동하는 피부 또는 살이다. 반인반수의 존재를 표현한 (2001~2011)나 남근적 여성상을 표 현한 (2009~2011) 등에 나타나듯이, 약간의 변형을 가해서 종(種)과 성(性)이 불확실해지는 존재는 김인배의 작품에서 자주 발견된다. 몸은 태어난 본질 그대로 고정되지 않으며, 매번 다른 힘 이 관철되고 다른 규칙에 의해 배치되는 계열일 뿐이다. 그는 “분류, 이해, 논리는 정지시키기 위한 음모이다”(작가노트 중, 2011)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정점에 놓인 얼굴은 침해될 수 없는 신성한 질서가 아니라, 몸의 연장으로 간주되며 변화무쌍하게 취급 된다. 몸으로 대변되는 자연은 정지되어 있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타는 불확정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그러나 관념과 시각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몸이라고 해서, 경계를 넘나드는 살이나 체액들, 또는 사 물화와 파편화가 만연한 무정부주의적 향연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작품은 점 선 면으로 대표되는 관념적 시각을 해체하지만, 제의적인 공간이 연상될 만큼 엄격하고 정적이다. 어둑한 공간 속에 제단처럼 배치된 조상들은 관객을 바라보고 있지만, 자신의 얼굴 (정체)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여러 방향에서 관객을 주시하는 눈 없 는 얼굴들은 편재하는 신처럼 두려움과 경외감을 자아낸다. 어떤 강 력한 힘에 의해 늘어나고 갑작스레 잘린 조상들은 장기판의 말처럼 배치된다. 작품들은 어떤 조합에 의해 다양한 서사와 상상이 가능한 전략적 배열을 취한다. 인체라는 조각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벗어나 지 않는 그의 작품에는 정지 속에 움직임이, 정렬 속에 어긋나는 질 서들이 잠재한다. 첫 개인전 <차원의 경계에 서라>(2006)는 물론, <진심으로 이동하라>(2007)에도 드로잉과 조각 간의 호환성이 활 발했고, 드로잉을 조각화할 때 그 차원의 간격 속에서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 2010년 뉴욕과 2011년 천안에서 발표한 처럼, 금속선으로 연속 동작 중의 인물들을 표현한 선조는 공간에 드로잉을 하는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 조각적 중간 과정 없 이 발포수지를 직접 쏘아 만든 하얀 조상 역시 회화적이다.
점 선 면을 제거한다고 하지만, 김인배의 작품들에 그것들이 없 지는 않다. 반(反)종교가 종교의 연장이듯, 금기의 위반이 성스러움 의 또 다른 측면이듯, 기하학적 공리로부터의 탈주는 또 다른 규칙 으로 대치될 뿐이다. 지하 전시장은 중심에 군림하는 거대한 좌상 좌우로 안면이 잘린 날카로운 상들이, 맨 앞쪽에는 얼굴 한가운데 모서리가 있는 상이 배치된다. 쨍하게 갈라진 이 ‘얼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낯선 각도뿐이다.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부위에 가해진 변형이 충격적이다. 여기에서는 일상적 차원에서는 들릴 수 없는 소리도 들려오는 듯하다. 날카롭게 변형된 머리가 두드러지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은 거대한 집게처럼 가로로 죽 눌린 얼 굴의 조상이다. 그것의 양 손목은 잘린 채 둥근 구(球)가 대신한다. 전시장 한켠에 놓인 무채색 톤의 둥근 구들이 시계를 상징함을 염 두에 둘 때, 손 부위의 구는 불구라기보다는 시간을 지배하는 전능 한 존재자의 표시에 가깝다.

(사진 앞) FRP 가변설치 2013 (사진 뒤 왼쪽부터) 황동 0214

<빛>(사진 앞) FRP 가변설치 2013 <무거운 빛은 가볍다–폐허, 왕관, 기둥>(사진 뒤 왼쪽부터) 황동 0214

시선과 응시의 분열

죽음 같은 정지 속에도 분명한 시간성은 작가로 하여금 잠재적인 움직임을 보유한 도상(=구)을 끌어들이게 했다. 작가가 좋아한다 는 영상이나 음악은 그 자체가 시간성을 향유한다. 고전적 조각으 로부터 현대조각으로의 추이에서 주요 요소인 시간성은 2011년 천 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린 <요동치는 정각에 만나요(Turbulent O’clock)전>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이 전시에서는 작품 처럼 투수의 연속 동작을 하나의 포즈에 압축시 키는가 하면, 작품 처럼 국부가 점점 붉어지는 발광체의 모 습으로 남성 토르소들을 정렬시키기도 했다. 시간의 축을 타고 벌 어지는 사건은 다름 아닌 변형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간적(그 래서 신적)인 두 부분인 얼굴과 손이 상상을 초월하는 형태로 변형 된다. 거칠게 만들어진 거대한 몸뚱이는 가장 민감한 인간의 경계 를 폭력적으로 환기시킨다. 날을 드러내는 위협적인 상들 사이에 놓인 작은 황동 인체 한 쌍은 빛과 어둠을 대비시킨다. 어두운 공간 속 검은 조상들은 무의식의 풍경 같다. 이 깊은 암흑의 공간에서 황 동 빛은 흔들리는 작은 촛불 같은 위상을 가질 뿐이다. 무의식의 세 계에서 인간 이성은 극도로 상대화된다.
김인배의 작품은 정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스케일이나 밝기에 급 격한 차이를 두어 잠재적인 운동감을 부여한다. 어둠의 조상들에 둘러싸인 작은 황동색 인체들이나, 황동색 조상들의 따가운 시선에 검은 점으로 녹아버리는 듯한 인체가 그 예다. 후자에서, 머리와 팔 이 없는 인체는 크기가 매우 작아 침대가 거대하게 보인다. 침대 맞 은편에 놓인 황동색 두상들은 3위 일체를 이룬다. 왕관 모양의 머리 를 중심으로 들쑥날쑥한 기암괴석을 이고 있는 듯한 양쪽의 조상들 은 성스러운 색채와 숫자, 배치에도ㅁ불구하고 어떤 기관은 없고 어떤 기관은 과도하게 많은 괴물이다. 빛의 현현이기도 한 황동색 조상들은 머리 위 과도한 무게에 짓눌려, 흡사 무질서한 폐허 같다. 그러나 이 빛나는 괴물 트리오에는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언어적 상징 같은 성스러운 질서의 면모가 있다. 검은 우주 속에 갇힌 작은 인간은, 위협적으로 쏟아지는 빛의 세례 때문에 공포와 성스러움이 공존하는 이 존재의 본모습은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눈이 없는 그 조상들은 보이기만 할 뿐 보지는 않는다. 심술궂은 이성과도 닮은 이 맹목적 시선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소원한 존재가 된 인간을 암흑 속의 작은 얼룩, 또는 <절대적인 소(素, prime)>(화이트헤드), 즉 점으로 축소시키려 한다.
마치 태양처럼, 인간에 앞서 존재하는 기호들의 스크린은 점 선 면처럼 인간의 관점을 앞서 규정한다. 인간은 이 외재적인 것들에 의해 결정되는 의미의 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황동 조 상들과 검은 인체의 만남은 응시(gaze)와 시선의 분열을 표현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배열은 응시를 유도하는 빛줄기 속에서 대상을 명 확히 바라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자크 라캉은《시선의 응시와 분열》 에서 응시가 시선에 앞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라캉에 의하면 응시 는 시야에서 우리가 발견할 것을 상징하며,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 로 갑작스럽게 접하게 되는 경험이다. 세계가 응시를 촉발시키는 그 순간 생소함 역시 시작된다. 나는 한곳만을 바라보지만 나는 모 든 방향에서 보인다.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의해 시각의 영역에 충 동이 나타난다. 환상에 불과한 궁극적인 응시의 지점들은 끝없는 욕망을 일으킨다. 전체적으로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정적인 구도 속에서, 또 다른 황동 빛 인체상은 특정 종교의 도상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입방체 모양의 두상에 벌린 양팔의 손목은 절단된 채 바 비 인형의 작은 손으로 대체되었고, 남성의 성기는 다리 뒤로 빠져 있는 상태다. 눈이 없음, 팔목 잘림, 남근의 은폐 등은 거세를 연상시 킨다.
이 전시 속의 인체들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있지만, 불완전하다 못해 치명적으로 손상된 인간(=남성)은 기본적으로 가부장적 질 서, 이성, 시각 등을 문제 삼는다. 그것들을 대변하는 점 선 면 같은 공리적 체계는 자연의 법칙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규칙이다. 규칙인 한 그것은 변형될 수 있고 변형되어야만 한다. 한시적 진리인 형식 적 체계는 절대적인 자기충족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는 논증될 수 없는 불확실한 것이다. 불확실성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인간의 시각은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키곤 한다. 이러한 추상적 분 리에서 요동치는 육안의 차이와 다양한 시각성의 작동은 억제된다. 몸으로부터 분리된, 몸을 초월하는 시각적 인식론은 르네상스 시대 의 원근법부터 카메라의 시점까지 이어지며, 기계 눈의 시점이 일 반화된 현재에 이른다. 조너선 크래리는《 시각의 근대화》에서 이러 한 시각이 세계를 체계화된 불변적 상수들에 따라 구성하며, 또 그 러한 약호들로부터 어떤 불일치나 불규칙성도 축출한다고 지적한 다. 독특한 인체상을 통해서 몸의 명시적, 잠재적 움직임을 강조하 는 김인배의 작품들은 눈 없이, 또는 몸으로 본다. 몸이라는 불투명 한 층은 시각성에 내재된 가상적 투명성을 변형시킨다. 이 작품들 이 가지는 미술사적 의미는 ‘탈신체화된 시각성에 반대하여, 시각 적인 것을 육체화하려는'(로잘린드 크라우스) 현대조각의 흐름과 함께하는 것에 있다.●

왼쪽· 황동 Brass 60×16×45(h)cm 2014 오른쪽· FRP 130×75×138(h)cm 2013

왼쪽·<당기지 마시오> 황동 Brass 60×16×45(h)cm 2014 오른쪽·<겐다로크(Gendarloake)> FRP 130×75×138(h)cm 2013

김인배는

197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지금까지 총5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또한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체 출품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