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ART SPACE

가나_이이남 (7)

이이남 개인전
2014.12.16~2.8   2014.12.16~1.31
<다시 태어나는 빛>으로 명명된 이이남의 개인전이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와 가나아트 부산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애니메이션 작업과 더불어 오브제를 영상과 혼합하고 동서양 명화를 적용한 작업을 선보인다.
사진 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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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중 (2)
김근중 개인전
고려대학교 박물관 2014.12.8~1.11
김근중의 개인전 <꽃, 이전 이후>는 탈형상을 선언했던 작가의 근작을 선보이는 자리다. 고려대학교박물관과 금산갤러리가 공동으로 펼치는 <한국화 예찬 시리즈>의 포문을 여는 전시. 생명을 잉태한 씨앗부터 화려한 꽃을 피우기까지의 모든 요소가 캔버스를 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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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2)
AIA: 개인으로부터의 정치전
김해문화의 전당 윤슬미술관 2014.12.17~2.28
한국, 대만, 홍콩, 마카오, 중국, 일본 아시아 6개국 작가가 참여한 <AIA(Asia Independent Art): 개인으로부터의 정치전>은 각국에서 10여 년 동안 활동한 독립적인 미술단체가 모인 전시다.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진 아시아 국가 단체의 네트워크를 위한 새로운 대화법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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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1)

강경구 개인전
스페이스 K_서울 2014.12.4~1.22
10여 년 전 인도를 여행한 작가는 갠지즈 강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해 떠다니는 광경을 목격했다. 작가는 그 사유의 결과물이 바로 개인전 <浮游(부유)하다>라고 밝힌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그저 부유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역사주의적 맥락에서 조명한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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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미술관
왕칭쑹 정연두 2인전
대구미술관 2014.9.20~2.1
아시아 현대사진의 단면을 조망하는 전시로 한국의 정연두와 중국의 왕칭쑹의 작업을 선보인다. 정연두는 서울의 한 아파트에 사는 32가구의 가족사진을 비롯해 97점을 왕칭쑹은 개방 이후 자본주의의 거센 풍파를 맞고 있는 중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작업 16점을 출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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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권
김준권 개인전
아라아트센터 2014.12.10~29
작가의 30년 목판화 화업을 정리하는 전시로 <나무에 새긴 30년>이란 타이틀 아래 300여 점을 아라아트센터 전관에서 선보였다. 홍익대 회화과 재학 중이던 작가는 1980년대부터 목판화에 천착했다. 또한 동명의 화집이 출간되어 전시의 의의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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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첸웬링 개인전
표갤러리 2014.12.19~2.13
이른바 ‘차이니즈 아방가르드’ 1세대 작가로 불리는 첸웬링의 개인전은 로 명명됐다. 중국의 역사와 전통에서 소재를 끌어오는 그의 작품에는 돼지,소, 물고기 등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공통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게끔 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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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1

모바일홈 프로젝트
송원아트센터 2014.11.21~2014.12.19
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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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관두비엔날레
국립타이베이예술대학 관두미술관 2014.9.26~2014.12.14
국립타이베이예술대학(國立臺北藝術大學)의 관두(關渡)미술관이 주최하는 <2014 관두 비엔날레>의 주제는 ‘識別系統(식별계통, Recognition System)’.
이번 비엔날레는 타이완을 비롯,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의 커미셔너 10명이 각각 1인의 작가를 추천하여 진행됐다. 한국에서는 설원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작가 장석준과 함께 참여했다. 타이베이=황석권 수석기자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이른바 ‘세계 미술계’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2015년 새해를 맞아 《월간미술》은 변화에 주목한다. 우리가 미술현장이 ‘변화했다’고 하는 이유는 근래 미술계와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서 변화의 물결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변화는 생각처럼 단순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작가는 그저 작업실에 처박혀 작업만 하는 이로 정의되지 않고, 비평은 미학적 언어를 쏟아내는 것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 문화, 사회, 사상 등 주변 환경은 급격한 변화의 흐름을 탔으며 따라서 미술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고정돼 있지 않다. 변화의 흐름을 추적하며 우리가 주목한 것은 국가가 아닌 도시다. 즉, 각국을 대표하는 미술계 거점 도시를 일컫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가 작품을 전시하고 비평이 그것에 대해 말하고, 그리고 시장market이 형성됐다.
아시아에서는 서울을 비롯 가장 뜨거운 미술시장으로 정의되는 중국 베이징, 상하이 그리고 홍콩을, 지긋하지만 최근 뚜렷한 변화가 감지되는 일본 도쿄 미술계의 변화 양상을 살펴본다. 또한 전통적으로 미술계 중심지를 자임하는 유럽에서는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오스트리아 빈, 그리고 독일 베를린의 동향에 주목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세계 미술의 수도 미국 뉴욕을 살펴본다.
‘변화’와 ‘발전’이 항상 등가적 의미를 갖진 않는다. 따라서 이번 기획은 방향을 살피되 결론을 예단하지 않는다. 지금 미술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말이다.

침범侵犯당한 인사동 미술에서 글로벌화된 탈脫장소적 미술까지
심상용  동덕여대 교수

오늘날의 글로벌 현대미술은 전시를 통해 양육되지 않는다. 프랑스의 갤러리스트 조르주 필립 발루아Georges Philippe Vallois에 의하면, 이 시대는 경매의 젖꼭지를 빨며 자란 작가들의 시대다. 글로벌 단일시장화된 미술은 장소에 귀속되지도, 시간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다만 시공을 넘나드는 자본에 의해 발육이 결정된다. 도쿄에서 태어난 독일 작가 조나단 메세 Jonathan Messe의 그림은 그의 나이 32세에 24만 유로(한화 약 3억2000만 원)에 팔린다. 자본의 속도다.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김동유의 회화 1가 3억2000만 원에 낙찰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2007년 같은 경매에서 홍경택의 회화는 7억7000만 원에 낙찰되었다. 한국작가의 해외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2
이 경매 건들은 한국현대미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글로벌 무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는 ‘예술적 성장’의 결정적인 신호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비유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성과없는 ‘인사동 미술’의 밖으로 빼내야만 하는 근거로 채택되었다. 2014년 10월 29일 동일한 경매사가 김동유와 홍경택을 포함하는 ‘엄선된’ 한국 작가 5인전을 제임스크리스티룸에서 열면서 “표현과 혁신의 관점에서 한국현대미술의 현주소”를 보여주겠노라 선언했다.3
2008년 홍콩 크리스티에서 임동식의 회화 두 점이 각각 4920만 원과 5720만 원에 낙찰된 사건은 고스란히 “작품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와우! 하긴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나 브뤼겔Pieter Brueghel의 작품들조차 경매회사가 키운 젊은 현대작가의 작품에 훨씬 못 미치는 값으로 팔리는 게 오늘날의 상황이다.
앞서 언급한 발루아에 의하면, 정말 놀라운 것은 “경매장에서 도출되는 결론의 힘”이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비평가나 미술관 큐레이터, 미술사가의 견해를 압도한다.” 경매에서 정해진 고가 낙찰이 예술성의 부동의 판명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경매의 낙찰가격 순위와 이론가들이 침이 마르도록 상찬하는 작가들의 순위 목록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경매장에 오르지 않은 작품이 비평가의 주목을 받는 경우는 갈수록 드문 사건이 되고 있다. 큐레이터들이라고 경매장 바깥 작품이나 작가들로 자신의 전시를 꾸미고 싶어 하랴. 비평담론도 전시공학도 고가 거래가 성사되는 곳에서 꽃핀다. 발루아는 말을 잇는다.

“비엔날레에서 보았던 작가들을 다음 달에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가 사실이다. 크리스티의 망치를 바쁘게 만들었던 작가들을 이듬해 비엔날레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 이것이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시스템이다. 상인으로서 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그 속도다.” 4

글로벌 단일체계화된 미술의 작가들은 경매의 망치소리와 함께 급속하게 성장한다. 오랜 기간에 걸친 긴 전시 목록으로 구성되곤 했던 과거의 커리어는 불필요하다. 질 프슈Gilles Fuchs에 의하면, 1960, 1970년만 해도 작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예술은 미술관이 아니라, 예술이 돈벌이의 기제로 전락하는 경매장에서 형성된다. 전시와 장소성은 더 이상 현대미술의 핵심적인 사건이 아니다. 지리적 경계는 중요한 요인이 아니다. 뉴욕 미술이라고? 순수하게 ‘미학적 정체성’으로서 그런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런던미술이나 베를린미술, 파리미술의 시대는 지나갔다. 다만, 프랑수아 피노나 베르나르 아르노의 미술이 작동할 뿐이고, 가고시안의 라벨이 붙었거나 찰스 사치의 색인을 지닌 미술이 지구촌의 도처에서 출몰할 뿐이다. 그러므로 단지 덜 속기 위해서라도 순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베니스에서 만들어진 작가를 바젤이 마케팅하는 것이 아니다. 바젤에서 급조된 예술을 베니스가 바코팅, 곧 각각의 것에 코드를 붙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침범당한 시스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에 대한 회의적 시각 또한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게다가 신화화된 고도성장으로 은폐된 글로벌 경제체계의 거품이 조만간 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이 시스템을 비춰볼 수 있는 다른 거울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연대를 1980, 90년대쯤으로 조정하기만 하면, 이는 ‘전적으로’ 글로벌화의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겨온 한국미술의 상황이다. 인사동이 미술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담당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1970년대에 그 형체를 드러내면서 한때 인사동은 욕망이 들끓던 장소였다. 한국현대미술을 주도하는 흐름이 그곳을 관통해 흘렀다. 하지만 오늘날 그곳은 경유지로서의 의미조차 희미하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미술은 세계 5대 비엔날레 가운데 하나를 개최하고, 틈만 나면 아시아미술 선도론을 입에 올릴 만큼 외형적으로 커졌다. 한국미술은 중심을 잃은 적 없이 이 성공으로 간주되는 노선을 내달릴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만들어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도화되고 경직된 인사동 미술의 미래적 대체를 선언한 이 미술은 중심이 부재하기 때문에, 집중에 대한 부담도, 상실에 대한 성찰도 원천적으로 봉쇄된, 기형적으로 경쾌하고 더욱 욕망하는 미술이다. 하지만, 안으로부터 전해오는 공복통空腹痛은 사라지는커녕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크리스티 경매가 곧 예술성의 궁극적 원천’으로 간주되는 지경이고 보니, 그 실체적 토대의 빈곤에 대한 인식을 외면하고 언제까지 도망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현재는 해석 및 담론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실상 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장소와 함께 장소 이상의 것을 누락했기 때문이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린 것처럼.

‘인사동 미술’의 실체
일제강점기 말 일본인이 경영하는 골동품상들이 입지하면서 고미술거리가 형성된 것이 오늘날 전통문화의 거리 인사동의 시초였다. 몰락한 세도가들의 집과 골동품, 고서화와 도자기 등이 유입되면서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고미술품 상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채 반 세기가 안 된 2000년 현재 고미술 관련 화랑, 표구점, 필방업소 등의 절반 이상이 인사동을 떠났거나 사라졌다. 그 빈자리는 한류스타의 조악한 사진이나 중국산 짝퉁 민속공예품이나 잡화들로 채워졌다. 2012년 40%가 넘는 상점들이 설치한 가판대에서 판매되는 품목의 평균가격은 2.000원 내외로 양말 티셔츠, 스카프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이제라도 유무형의 역사적 자산을 정비해 한류의 밑바탕이 되었던 우리 문화의 이야기들을 찾아내자”,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문화특구이자 한류의 재생산기지로 만들자” 등의 담화가 난무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장소의 복원과 관련된 그러한 구호들에는 복원해야 할 실체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거나 왜곡돼 있다.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라는 인식은 정작 1980년대 들어서면서 관광특화구역에 대한 국가 차원의 요구로부터 비롯되었다. 국가적 이벤트 성황에 부응하려는 정치적 기획은 1983년 ‘제5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문화예술부문 계획’이나 1986년 ‘제6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 문화예술부분 계획’ 등을 통해 실행되었다. 제5공화국은 전통문화 및 민족문화 관련 사항을 헌법에 명시하고, 7년(1980~1988)의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문화에 관한 중장기 계획을 4번 발표할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5 하지만 그것은 헌법에 문화, 특히 전통문화의 창달에 대한 조항을 편입시키는 자체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극히 이례적이라는 점 등에서 드러나듯, 문화를 통치술의 일환으로 편입시키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6 전통문화를 이용한 은폐의 정치, 곧 문화와 예술을 국민을 회유하거나 관심을 정치로부터 멀어지도록 함으로써 7 정치적 과오를 덮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의도는 예컨대 ‘국풍 81’같은 국가주도 이벤트에서 이미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냈다. 8
전통의 거리만큼이나 문화와 예술의 거리로서 인사동의 실체도 미심쩍다. 인사동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야 뒤늦게 문화예술과 결부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상업화랑 입점이 그 직접적인 계기였다.(현대화랑) 상징적 읽기가 가능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1974년 문헌화랑, 1976년의 경미화랑과 동산방화랑이 개관했으며 1977년에는 선화랑, 1983년에 가나화랑이 개점하면서 화랑가로서의 면모를 다져나갔다.9 이후로 화랑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현재 인사동에서 가장 많이 분포하는 업종이지만, 10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참담한 측면이 없지 않다. 2013년 현재 인사동에 자리한 120여 개의 크고 작은 갤러리의 65% 이상은 여전히 ‘대관貸館화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머지 가운데서도 18%는 대관과 작품 판매를 병행하고, 소위 ‘상업화랑’으로 운영되는 17%의 상당수조차 작품 판매에 비중을 두는 정도다.
예나 지금이나 ‘대관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인사동 미술의 한 실체다. 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임대 화랑들에 작가나 작품성에 근거한 선별, 미학적 신념이나 노선에 대한 존중, 전시의 실질적인 수준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상황이 더 열악하던 시절, 임대 화랑들이 젊은 작가들에게 해방구가 돼주기도 했던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고가의 대관료를 지불할 여력이 있는 소수를 그렇지 못했던 다수로부터 선별하는, 억압적인 자본의 검증을 실행해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설상가상 2002년 정부가 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대관 임대료가 급격하게 상승했는데, 이는 인사동이 자본의 굴락화化로 치닫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작가에게 대관료의 벽은 창작을 접거나 현대미술 장을 떠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인사동 미술의 성황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은 높은 대관료에서 전시 카탈로그 제작비와 오프닝 세리머니 비용까지 지불할 여력이 있는 젊은 작가들이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대 화랑을 기반으로 하는 인사동 미술의 이러한 하부구조는 오히려 한국미술 잠재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한 구조적 기반 위에서 인사동은 향후 “고급문화로서 특권화되어 갈”  또 하나의 인사동 미술, ‘한국적 미니멀리즘으’로 명명되곤 하는 제도화된 미술을 위한 요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것이 인사동 미술의 양분화된 작동 패러다임이었다.
고급주택화gentrification된 현재의 인사동에서 양극화된 두 예술의 우생학적 생존 여건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았다. 고가의 대관료를 지불할 여력이 있는 아마추어 미술과 고도의 지대상승률을 앞지를 만큼의 수익률을 담보하는 ‘글로벌 블루칩 미술global bluechip art’ 또는 ‘아트스타의 아트art of art star의 양극 사이에 정작 인간을 위한 내적 토대는 여전히 찾아보기 어렵다. 인사동이 조선조 도화서가 있었던 자리라 하여 미술과 결부시키는 것은 낭만적 소설에 가깝다. 전통거리로서 인사동은 일제강점기 말기의 산물이며, 인사동 미술은 고작 1970년대의 소산물일 뿐이다. 변하지 않는 토대, 어떤 본질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문화예술의 장소로서 인사동의 실체는 미미하다. 인사동 미술은 역사 만들기와 회유와 은폐의 정치술과 초상업주의의, 침범당한 근현대사의 거울이자 우리 미술의 내적 빈곤과 마주하는 장소다. 인사동의 향수를 논하고 복원을 주장하는 담론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대목이다. 그곳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니라, 넘어 나가야 할 곳으로서의 거울이다. ●

비엔나 (12)

빈 크리스틴 쾨니히갤러리

뉴욕 덤보의 흑백벽화

뉴욕 덤보의 흑백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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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낙찰된 작품은 <마릴린먼로 vs 마오주석>이었다.
홍경택의 작품은 2013년 홍콩 크리스티 이브닝 세일에 재등장, 663만 홍콩달러(약 9억6000만 원·이하 수수료 포함 가격)에 낙찰되며 다시 한 번 기록을 경신했다.
3  ‘홍경택·김동유 등 5인展…28일 크리스티홍콩 개막’, 이향휘 기자, 기사입력 2014.10.9
  Marie Maertens, L’Art du Marche de l’Art, ed. QUE, 2008, Espagne, p.104.
네 번의 중장기 문화정책은 다음과 같다. 1981년 : ‘새 문화 정책’ 1983년 : ‘제5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문화예술부문 계획’
1984년 : ‘지방문화중흥 5개년 계획’ 1986년 : ‘제6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문화예술부문 게획’
구광모, <우리나라 문화정책의 목표와 특성-80년대와 90년대를 중심으로>,  《중앙행정논집》, 제12권, 중앙대학교 국가정책연구소 중앙행정학 연구회, 1988
7   동아일보 1985년 2월 19일자. 참조
  장승백이 지신밟기, 풍년기원제, 민속제, 전통에술제, 국풍장사씨름판, 팔도굿, 남사동놀이 등의 행사가 ‘국풍81’의 중심에 있었다.
9  김종근, <현대미술의 메카, 인사동>, 《인사동 가고 싶은 날》, 디자인하우스, 2002, p.140.
10 전체점포수 대비 화랑의 비중은 1998년 이전 21.6%에서 2002년에는 34.3%로 증가했다.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北京

베이징 (2)

위 798예술구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UCCA 전경, 아래 798예술구 골목 전경. 독일식 건물의 공장지대였던 이곳의 과거를 보여준다

명불허전名不虛傳 798예술구
권은영  예술학

중국 팔대 고도八大古都 중 하나인 베이징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면, 외국인보다 절대 다수의 중국 내국인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자금성과 톈안먼 광장을 기억할 것이다. 국내총생산량(GDP)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14억 인구 다수를 구성하는 소시민에게 950만km2의 대륙을 횡단하여 ‘중국 꿈中國夢’의 도시, 베이징을 찾는 것은 여전히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이다. 중국인들이 과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감흥에 심취하는 반면, 외국인에게는 오늘의 중국 역시 매력적인 호기심의 대상일 것이다. 그들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베이징 동북쪽에 위치한 798예술구로 향한다. 1960년대 ‘신중국 전자 공업의 요람’이라 불리던 국영 공업단지가 베이징을 대표하는 예술구이자 관광지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낡은 공장지대가 문화예술의 명소로 변신하는 것은 이미 예술계의 클리셰가 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그 가치는 유효하며 지금도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등 공신이다. 베이징 곳곳에 예술가들이 틔운 문화의 싹을 추적해보자.
30여 년의 중국 동시대미술 역사에서 베이징의 예술구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작가 작업실 중심의 작가촌 개념의 예술구이며, 다른 하나는 전시공간 중심의 화랑가 개념의 예술구이다. 물론 전자와 후자 모두 작업실과 전시공간이 혼재해 발전하는 것이 다반사이며, 초지일관 하나의 특징으로 규정되는 지역은 드물다.
초기 중국 동시대미술 발전에 촉매제가 된 것은 ‘85 미술운동’으로 대표되는 전위예술운동이었다. 당시 이들이 폭발적인 양의 작업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일정 지역에서 동고동락했기에 가능했다. 작가들의 생활 터전이자 작업실이 모여 있는 작가촌은 순간의 미학, 행위예술과 소규모 전시로 가득했기에 그곳이 곧 가장 뜨거운 미술현장이 되었다. 1990년을 전후해 비슷한 시기에 베이징의 동쪽과 서쪽 외곽에 각각 두 개의 작가촌이 형성된다. 하나는 다산쯔大山子 인근에 장환張洹, 마리우밍馬六明, 창씬蒼鑫 등 행위예술가를 주축으로 형성된 동촌, 다른 하나는 18세기 청나라 황실의 정원이었던 원명원 일대 푸루먼福綠門촌과 과이자둔挂甲屯을 중심으로 딩팡丁方, 팡리쥔方力鈞, 웨민쥔岳敏君 등 아방가르드 회화 작가들이 운집한 서촌이었다. 이들이 베이징의 동쪽과 서쪽 외곽지역에 모이게 된 것은 물론 당시 두 지역 모두 폐허나 다름 없었으며, 임대료가 저렴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국의 특수한 상황에 주목하고자 한다. 신중국 건설 이후, 중국 정부는 엄격한 호적제도를 시행해, 출생지를 벗어나는 것이 출국 절차와 비견될 만큼 까다로웠다. 하지만 개혁ㆍ개방 이후 1986년 국무원이 발표한 <국영기업 실행 노동계약제 임시 시행 규정>과 1992년 노동부가 발표한 <전원 노동 계약제 확대 시행에 관한 통지> 등을 통한 노동자를 중심 인구의 이동을 점진적으로 개방하면서 작가들도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흡수될 수 있었다. 폐허나 다름없던 지역이 동촌과 원명원 화가촌으로 발전하는 동안, 농민공을 비롯한 소외 계층도 모여들어 작가들은 작가촌과 슬럼의 경계에 서게 된다. 일찍이 들어왔던 팡리쥔 등 몇몇 작가가 안정된 작업 환경을 찾아, 1994년 베이징 퉁셴通县의 쑹좡宋庄으로 이주해 ‘쑹좡예술가촌’을 건설한다. 실제로 동촌과 원명원 화가촌뿐만 아니라, 당시 베이징 외곽 지역에 맹목적으로 상경한 농민공들로 구성된 저장浙江촌, 신장新疆촌 등이 형성되고 있었다. 정부는 1995년 가을, 베이징 일대 무허가 판자촌 정리에 들어가고, 결국 동촌과 원명원 화가촌도 해체된다.
1990년대 중반 방황하는 작가들을 흡수한 곳이 쑹좡과 718연합창 일대다. 오늘날 798예술구가 기타 예술구에 비해 성공적으로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미술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718연합창과 멀지 않은 곳으로 이전하여 작가들을 끊임없이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중국 팔대 미술학원 중 하나인 중앙미술학원이 베이징 중심 왕푸징王府井에서 망경望京과 다산쯔 사이 화가디花家地로 이전을 시작하면서, 다산쯔 전자공장 부지에 1995~1998년까지 중앙미술학원 조소과 작업실이 꾸려지고, 당시 조소과 교수와 학생들이 모두 그곳에서 작업을 했다. 이전이 완료된 2000년, 중앙미술학원 조소과 교수 쑤젠궈隋建國를 시작으로 718연합창 공장지대로 속속 작가 작업실이 유입된다. 1990년대 말, 왕징 지역 아파트로 장샤오강張曉剛, 추즈제邱志杰, 쑹융훙宋永紅, 예융칭葉永青, 마리우밍, 잔왕展望 등이 작업실을 옮겼다.  이로서 왕징, 중앙미술학원, 718연합창에 이르는 베이징 동북부에 풍부한 인프라가 구축된다. 저렴한 임대료 외에도, 1950년대 동독의 설계로 지어진 바우하우스풍 공장들이 즐비한 718연합창은 작가들에게 넓은 작업공간을 제공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화랑에도 매력적인 전시공간이었다. 2002년 도쿄화랑의 프로젝트 공간인 BTAPBeijing Tokyo Art Projects 개막전은 718연합창이 798 예술구로 승화하는 전환점이 됐다. 2000년대 초반, 798예술구는 작가촌과 화랑가 두 가지 성격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발전한다. 낡은 공장지대가 문화예술 중심지로 재탄생한 798사례는 중국 정부가 주관하는 국제문화창조기업박람회에서 2006, 2007년 2회 연속   ‘중국 최고 창의적 공원中國最佳創意园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798예술구의 성장은 임대료의 상승을 불러왔고, 작가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다.
실제로 1990년대 말부터 798예술구 외곽에 작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전략적인 예술구도 만들어졌다.   1999년 도예 디자이너 출신의 웨이강韋崗이 페이자费家촌 지역의 장아찌 공장을 개조한 ‘샹그리라香格里拉예술공사’ 작업실이 문을 열면서, 페이자촌에 자연적으로 작가 중심의 예술구가 형성된다. 반면 차오창디草場地 예술구는 2002년 ‘베이징 차오창디 문화예술센터’가 투자해서 건설한 계획 예술구이다. 이렇게 베이징에는 자연 발생적인 혹은 계획적인 예술구가 십수 개에 달한다. 경제 발전 속도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베이징 미술계의 현장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두 전문가에게 들어봤다. 왕춘천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학술부 부장과 마쉐둥馬學東 예술시장분석연구센터(AMRC) 디렉터를 통해 중국 학술계와 시장의 시각을 비교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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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베이징 (11)왕춘천王春晨
중앙미술학원 미술관 학술부 부장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중국관 큐레이터)

중국 동시대미술은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난 30년간 베이징 미술현장의 중심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간단히 설명해달라.
1980년대 중국에는 현대적인 개념의 예술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진정한 의미의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작가’들도 대부분 교편을 잡고 있었고, 보편적으로 자신의 집 혹은 직장에서 작업을 겸했을 뿐, 작업만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현대적인 의미의 첫 예술구라면 둥춘東村을 꼽을 수 있다. 1990년대 둥춘을 시작으로 위안녕위안圆明园, 쑹좡宋庄에 작가들이 모여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베이징 변두리 여기저기에 예술구들이 생겨난다. 베이징에 본격적으로 예술구들이 등장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라고 할 수 있다. 798예술구를 비롯하여, 지우창酒廠, 추이거좡崔各庄, 페이자춘费家村, 이하오디一號地국제예술구 등이 비슷한 시기에 생겨났다. 이어서 헤이차오黑橋, 차오창디草場地, 다산쯔환태大山子環鐵국제예술성 지역에 예술구가 형성되었고, 비교적 최근에 스산링十三陵, 창핑昌平, 샤오탕싼小唐三 등지에 작가들이 모이고 있다. 작가들이 공간을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고, 작가들이 모이는 곳에 자연스럽게 예술구가 형성되는 분위기이다. 대부분의 예술구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에 반해, 정부가 주도하여 정책적으로 개발한 예술구도 있다. 베이징 남쪽에 위치한 관인당觀音堂 예술구가 대표적인데, 관인당 예술구는 실패했다고 본다.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구도 모두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2010년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이던 정양正陽 예술구는 정부 개발 정책에 의해 사라진 곳 중 하나다. 당시 몇몇 예술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부의 도시관리정책하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13년 가을, 몇몇 화랑이 798예술구를 떠나면서 매체에서 798예술구 상업화를 우려했다. 798예술구가 여전히 베이징을 대표하는 예술구라고 할 수 있나?
798예술구는 하루가 다르게 번화해졌고, 사람들로 붐볐지만 이곳을 꽉 채운 사람들이 모두 미술작품에 관심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결국 화랑 입장에서 798이 번화해진다 해서 꼭 작품 판매량 증가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 798 땅값은 오르고,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화랑은 안정적 운영 안정을 위해 798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798의 주요 화랑들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고, 몇몇 화랑의 이동이 798 전체 위상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본다. 결국 건강한 생태계를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예술구는 798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상하이로 몇몇 기관이 이동했지만, 여전히 주요 예술 관련 기구와 대표 예술가들은 비록 경쟁이 치열하지만 여전히 베이징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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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SONY DSC마쉐둥馬學東
AMRC 예술시장분석연구센터 디렉터

지난 30년 중국 동시대미술의 변화에서 예술구와 시장의 관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달라.
베이징 최초의 예술구 개념은 예술가 집성촌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예술구는 예술산업구 개념으로 화랑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가 작업실과 기타 기관들도 공존한다. 하지만 문화 및 디자인 방면에 편중되어 있다. 전통 서화시장을 제외한다면, 대표적인 곳이 798예술구이다. 2013년 통계에 따르면 베이징에는 523개의 화랑이 있다. 그중 중국화 교역을 전문으로 하는 유리창에 255개 전통 화랑이 집중되어 있으며, 798예술구에 157개의 화랑이 모여 있다. 그리고 차오창디 예술구에 28개, 지우창예술구에 7개, 싼리둔三里屯 지역에 9개, 융허궁雍和宫 주변에 4개, 쑹좡에 37개, 22위안제22院街 예술구에 11개, 관인당에 15개 화랑이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예술구 개념의 변화는 실제 예술환경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국 예술산업 발전의 변화를 이른다. 예술시장이 발전한 지금의 예술구는 화랑가의 의미가 강하다. 작가 작업실도 공존하지만, 화랑이 중심이 되고 음식점, 카페, 예술 상품점, 디자인 전문점 등 창의적인 문화산업 기구들이 함께하면서 ‘산업’ 성격이 가미되었다.

현재 대륙 미술계 발전에 베이징 예술구가 어떤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 12월 12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5회 중국 예술품시장 최고 논단’에서 베이징시 문화국 관위關宇 부국장은 베이징이 대륙에서 예술가, 화랑, 경매회사, 미술관, 박물관 등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문화예술의 도시라고 강조한 바 있다. 특히 베이징의 예술구는 대륙 미술현장의 중심으로서 중국 동시대미술 발전의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대륙 미술계를 선도하고 있다. AMRC 통계에 따르면, 현재 베이징시에는 총 520여 개의 화랑이 운영되고 있으며, 115개의 경매기관이 2013년 한 해 26만6957점을 거래했다. 동시에 21개의 예술품산업박람회(아트페어) 덕분에 베이징은 매달 풍성한 예술행사들로 가득하다. 더욱이 베이징시 한 해 경매 낙찰총액은 약 280억 위안(한화 4조9862억 원)으로, 전국 낙찰총액의 64%를 점유하고 있다. 여기에 각종 박람회, 화랑, 인터넷 거래량 등을 합산하면, 베이징시는 작년 한 해 미술품 거래액이 약 450억 위안(한화 8조136억 원)으로 산출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798예술구가 있다. 798예술구는 베이징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화랑, 작가 작업실, 비영리 기구 등을 갖춘 예술 환경이 매우 풍부한 단지이다. 대형 유명 화랑도 많을 뿐만 아니라, 유동 인구를 흡수하며, 동시대예술을 전파하는 기지로 그 영향력도 상당하다. 798예술구는 이미 베이징의 문화를 상징하는 명함과도 같은 존재이다. 베이징시 분포 화랑 중 30%에 해당하는 157개의 화랑이 798예술구에 집중되어 있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베이징=권은영 통신원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香港

2014년 5월 열린 에 전시된 마이클 린의 작품

2014년 5월 열린 <아트바젤 홍콩>에 전시된 마이클 린의 작품

잘 키운 아트페어 하나가 가져온 홍콩 미술시장의 변화
황희경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홍콩 아트페어가 막 성장하던 때만 해도 사람들은 홍콩을  일러 아시아 미술시장의 허브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 홍콩은  런던과 뉴욕에 이어 세계 미술시장의 3대 허브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그 중심에는 지금은 <아트바젤 홍콩>으로 이름을 바꾼 <아트 HK>가 있다.
미술 분야를 취재하면서, 그리고 홍콩에서 3년간 지내며 지켜본 <아트바젤 홍콩>의 변화는 놀라웠다. 2008년 <아트 HK>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지 불과 5년 만에 급성장했고 그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켜본 바젤 아트페어에 인수되면서 거래 금액에서나 참여 갤러리 면면, 관람객 수 등에서 세계 수준의 아트페어로 위상을 확고히 했다. <바젤 아트페어>가 1970년 설립돼 4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행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채 10세도 안 된 <아트바젤 홍콩>의 성장은 대단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아트바젤 홍콩>의 성장은 연쇄적으로 홍콩 미술시장의 확대로 이어졌다. <아트바젤 홍콩>을 전후한 기간은 ‘아트 위크art week’로 불리다가 이제는 ‘아트 먼스art month’로 불릴 정도로 각양각색의 미술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최근 몇 년간 홍콩에서는 <아트바젤 홍콩> 개최 기간에 맞춰 열리는 위성 아트페어가 속속 생겨났다. <아트바젤 홍콩>이 처음 열린 2013년 5월에만 아시아 컨템포러리 아트 쇼와 홍콩 컨템포러리, 스푼 아트페어 등 4개의 아트페어가 열렸다. <아트바젤 홍콩>의 높은 진입 장벽과 비싼 부스 임대료에 부담을 느낀 갤러리들은 나름대로 특색을 갖춘 위성 아트페어에 참가해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자리를 잡은 아트페어들은 이제 <아트바젤 홍콩>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일정으로 개최되기도 한다.
<아트바젤 홍콩> 기간엔 경매도 풍성하게 열린다. 크리스티 홍콩 봄 경매는 <아트바젤 홍콩>을 찾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가 됐고 서울옥션을 비롯해 여러 경매사도 <아트바젤> 기간을 전후해 경매를 연다. 중국 고미술품을 많이 내놓는 중국 경매사들의 프리뷰 장에서는 마치 시장처럼 출품작들이 빼곡하게 전시된 가운데 중국 컬렉터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광경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아트바젤 홍콩>은 이처럼 홍콩의 미술시장 활성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홍콩에서 벌어지는 대형 미술판은 ‘그들만의 잔치’일 뿐 정작 홍콩 작가들과 홍콩 대중은 소외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이런 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눈에 띈다. 홍콩 정부는 미술시장이 아닌 미술 전반을 키우려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홍콩 주룽九龍 반도 서부 지역에서 진행되는 ‘웨스트 까우룽 문화지구West Kowloon Culutre District’에 들어설   ‘M+ 시각문화미술관’(이하 ‘M+미술관’)이다. 사실 웨스트  주룽 문화지구는 사업이 계속 지연되고 비용 부담이 늘어나면서 홍콩에서는 상당한 비판을 받는 사업이다. 그러나 M+미술관이 2017년 완공돼 본격적인 전시를 시작하면 사실상 제대로 된 미술관이 거의 없는 홍콩의 미술지형에 변화가 예상된다.
영국 테이트모던의 초대 관장을 지낸 라르스 니트브를 총디렉터로 영입하고 한국 출신의 큐레이터 정도련 씨를 수석큐레이터로 영입한 M+미술관은 꽤 공격적으로 컬렉션에 나서고 있다.
2012년에는 중국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컬렉터로 평가되는 스위스 컬렉터 울리 지그로부터 중국 미술품 1640여 점 기부를 이끌어냈다. 그가 기부한 미술품들은 약 13억 홍콩달러 (약 1억6800만 달러)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평소 소장품을 중국에 돌려주겠다고 말했던 지그는 중국 당국의 미술품 검열을 우려해 중국 영토지만 상대적으로 독립성이 있는 홍콩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M+미술관은 또 중화권 ‘큰손’ 기부자들 덕분에 <아트바젤 홍콩>에서도 작품들을 사들이는 한편 홍콩 작가를 비롯한 중화권 작가 미술품은 물론 다른 아시아 지역 미술품 소장에도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콩 화랑협회는 2013년부터 ‘갤러리 위크Gallery Week’ 행사를 시작해 아직 갤러리 방문이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한 홍콩에서 홍콩인들이 갤러리를 가까이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올해 11월 26일부터 12월 5일까지 열흘간 열린 두 번째 갤러리 위크에는 50여 개의 크고 작은 갤러리가 참여해 작가와의 대화, 오픈 스튜디오, 워크숍 등 100여 개 행사를 소화했다.
과거 갤러리들이 홍콩섬의 금융 중심지인 센트럴 주변 지역에 집중됐던 것에서 벗어나 홍콩의 외곽 지역에 새롭게 둥지를 틀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갤러리들의 이동에는 홍콩의 살인적인 도심 임대료를 견디지 못한 측면이 크긴 하지만 홍콩 작가들을 위주로 개성 있는 프로젝트를 펼치면서 홍콩의 미술판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특히 홍콩섬 동부의 차이완柴灣은 최근 홍콩의 개성 있는 미술가, 디자이너, 음악가들이 모이는 새로운 예술지구로 각광받고 있다. 옛 공장 창고를 개조해 만든 전시공간과 작업 스튜디오 등이 속속 들어서면서 일부 평론가들은 이곳이 제2의 ‘뉴욕의 첼시’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上海

상하이 (15)

상하이, 예술신천지
민은주  (주)비핸즈 ArtN 사업부 부장

와이탄外滩은 상하이를 상징하는 지역으로, 상하이의 역사와 현장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지역이다. 황푸강을 경계로 서쪽으로는 19세기 말 유럽 각국의 건축 양식에 따라 지어진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20세기 말 국가적 개발 프로젝트에 따른 건축물들이 지금도 한창 건설 중이다. 명실상부 상하이는 국제도시로 빠르게 발전하면서 중국의 경제 수도로 자리를 잡았지만, 상하이가 ‘중국’을 대변하는 도시라 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매우 특별한 역사와 중국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특수한 환경 때문이다. 국제적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상하이에서는 매년 국제적인 예술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그 현장을 주목하고 있지만, 이를 오늘날 중국미술의 현장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하이에서 방문할 만한 미술 현장이라고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모여 있던 런민人民광장과, 모간산루莫干山路, 타이캉루泰康路, 훙팡紅坊, 그리고 도축장을 개조한 1933 라오창팡老場坊 정도였다. 한때는 방직공장으로 사용되다가 공장 철수 이후 예술지구로 탈바꿈한 M50 모간산루는 뉴욕의 소호나 베이징의 798처럼, 산업공간이 예술공간으로 활용된 유사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M50이 그들 지역과 다른 점이 있다면, M50은 예술가나 갤러리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겨난 지역이라기보다는, 초기부터 예술지구로 계획해 예술가, 디자이너, 출판사, 갤러리 등 문화 관련 업종 입주자들을 유치했던 점이다. M50보다 훨씬 이후에 조성된 훙팡예술구와 라오창팡도 상황은 비슷하다. 단지가 조성되고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면서부터 예술 문화지구를 목표로 두고, 문화 인구를 유입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콘텐츠 부족과 비접근성, 유지 비용 증가 등의 이유로 초기에 자리 잡은 예술인들과 문화 관련 업체들은 그곳을 떠나거나 상업적인 업종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했다. 재개발 계획 안에 포함되어 철거 위기에 놓였다가 예술가들과 원주민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문화지구로 자리 잡은 타이캉루泰康路의 톈즈팡田之坊은 상하이 안에서도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으나, 이 또한 순수한 예술지역이라기보다는 대중적인 문화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타이캉루가 다른 예술지역과 달리 방문객들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이 지역 고유의 상하이 건축양식인 스쿠먼石庫門식 건물들이 한몫을 했다. 거주자 5명 중 1명이 외국인이라는 상하이는 중국에서도 외국인 거주율이 가장 높다. 나머지 4명 중 2명 이상이 외지인이다. 그렇다 보니, 그들과 그들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상하이의 특징을 담은 건축물과 젊은 디자이너들의 개성있는 아트숍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예술지구는 아니지만, 개발 초기부터 이러한 요소들을 염두에 두고 조성된 대표적인 지역이 신톈디新天地와 쓰난공관思南公館 같은 곳이다. 타이캉루는 이들 지역과 함께 상하이의 대표적인 관광지로서 상하이의 고건축 양식과 트렌디한 디자인숍들로 일년 내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초기 예술지구를 꿈꾸며 조성된 몇몇 대표적인 예술구가 흥행의 맛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해서, 상하이의 예술활동이나 미술시장이 침체되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선, 상하이에는 수십 개의 소규모 예술지역이 있다. TOP라 불리는 타오푸창이위안桃浦創意圓에는 Shangart gallery에서 후원하는 작가들이 모여서 작업을 하고 있으며, 스위스의 Swatch사가 지원하는 상하이 스와치아트피스호텔 레지던시Shanghai Swatch Art Peace Hotel Residency에는 전 세계에서 온 예술가 20여 명이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모사화가들과 지역화가들이 모여 있는 상하이화가거리上海畵家街에는 장식미술품을 판매하는 수십 개의 화랑이 모여 있으며, 2577 창이다위안2577創意大院, 둬룬루문화거리多倫路文化街 등과 같이 알려지지 않은 수십 개의 이름 없는 예술 지역이 존재한다. 이뿐만 아니라, 상하이에서는 대규모 국제 예술행사부터 소규모 단체의 전시 오픈까지, 매주 크고 작은 문화행사가 일상처럼 열리고 있다. 한마디로 자유롭고 다양한 형태의 예술활동이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상하이의 다양한 예술현장에 실제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최근 몇 년 동안 설립된 대규모 사립미술관들이다. 상하이 시정부市政府는 시립미술관에 예산을 들이기보다는 기업을 통한 대규모 사립미술관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상하이의 예술현장에 자본 유입을 도모했다. 현재 상하이를 대표하는 몇몇 대규모 사립미술관은 ‘자본의 꽃은 예술’이라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미술관의 건축부터 소장품 가치까지 그 규모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현재 상하이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PSAPower Station of Art, 上海當代藝術博物館는 1897년에 세워진 난시南溪발전소가 1955년에 황푸강 남쪽으로 이전하면서 세워진 건물이다.  165m 높이의 굴뚝이 상징인 이 발전소 건물은 2007년까지 전력 발전소로 사용되다가 2010년 상하이엑스포 당시 미래관으로 사용되었으며, 2012년 10월에 PSA라는 이름으로 중국 현대미술의 혁신과 발전을 상징하는 미술관으로 재개관했다. 상하이시의 중심 런민광장에 위치한 MOCA Shanghai(상하이당대미술관)는 홍콩의 쿵밍광재단龚明光基金의 기금으로 설립되었으며, 아라타 이오자키Arata Isozaki가 설계한 독특한 건축물로 주목을 받은 히말라야喜瑪拉雅미술관은 2012년 상하이 쩡다그룹增大集团의 투자로 재설립 되었다. 독립된 커미티로 운영되는 상하이 록번드 현대미술관RAM, Shanghai Rock Bund Art Museum과 와이탄3호미술관, 와이탄18호 아트센터는 19세기 말에 건축된 유산을 보전하는 동시에 현대미술을 보급한다는 역사와 문화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2012년에 개관한 룽龍미술관과 2014년에 개관한 YUZMYuz Museum Shanghai은 각각 류이첸劉益謙 부부와  부디탁Budi Tek이라는 개인 컬렉터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미술관의 규모와 소장품의 가치는 타 공립 미술관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이와 같이 기업들과 컬렉터들이 상하이에 대규모 미술관을 설립하게 된 배경은 이미 언급했던 것과 같이 상하이 시정부의 지원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중국 제1의 경제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그 경제 기반이 중국의 부끄러운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상하이시는 오랫동안 문화적인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푸둥개발과 대도시 프로젝트로 자본이 집약된 상하이에서 문화적 열등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은 현대미술과 컬렉션에 투자하는 일이었다. 더불어, 상하이의 개발프로젝트로 거대한 수익을 얻게된 기업과 투자자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공익적인 활동 의무를 갖게 되었는데, 가장 효과적으로 시정부와 시민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미술관 설립이었다.
도시 전체가 개발계획 안에 놓인 상하이는 이미 개발된 곳이나, 현재 개발이 진행 중인 곳, 혹은 계획 중이거나 보존구역으로 지정된 곳, 어느 곳에서도 예술가들을 위해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못하고 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그 순수한 예술의 자리를 자본이 차지하고 있는 것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기다리며 지켜봐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상하이의 유수한 미술관이 순수한 예술을 지원하고, 교육하며, 보급하는 긍정적인 역할로 그 임무를 다하기를 모두가 기대하고 있으며, 상하이라는 도시가 매우 특수한 배경과 환경 아래 발전하고 있듯이, 예술과 문화의 성장도 다른 도시와는 다른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음은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

 

훙팡조각센터 외부전경
2, 3  상하이에 진출한 학고재갤러리 상하이(왼쪽)와 아라리오갤러리 상하이
4  타이캉루 거리 전경
5  락번드 아트스트릿 전경
6  난시발전소 자리에 세워진 PSA(Power Station of Art) 외관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とうきょう

도쿄 (16)

구로세 요헤이가 기획한 카오스*라운지의 2014년 전시 <캬라 크래쉬!character+ crash!> 전시광경. 구로세 요헤이 제공

동시대미술이라는 의식이 머무르는 장소
마정연  미술사/미술비평

이제 젊은 세대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지만, 긴자를 걸어다니며 구경한다는 의미의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긴자는 특권적인 장소다. 본지와 같은 이름의 일본잡지 《월간미술》이 창간 400호 기념으로 기획한 보존판 갤러리 가이드(2009년 1월호)가 여전히 긴자 화랑가의 이야기로 시작하듯, 불황 속에서도 긴자의 화랑가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렇지만 현대미술을 대상으로 생각할 때는 사정이 다르다. 현대미술의 선구적 거점이었던 긴자의 두 화랑, 도쿄 화랑(1950~)과 미나미화랑(1956~1979), 그리고 전후 그곳에서 활동한 전위예술 작가들에게 현대미술이란 모던아트라는 외래어의 번역어이기 이전에 일본화 대 서양화로 분류되는 당대 미술계와 자신들이 추구하는 동시대의 새로운 예술을 차별화하려는 의식을 표현하는 용어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 기사에서는 긴자를 벗어나 동시대미술이라는 의식이 머무르는 장소를 중심으로 일본 현대미술 거점 변화를 소개하려 한다.

일본 최초의 대안공간
‘세이부/세존 문화’란 말에 익숙하지 않은 국내 독자에게도 친숙한 브랜드 MUJI의 창설에 관여한 크리에이브 디렉터인 고이케 가즈코가, 도쿄 동부 지역의 사가란 곳에 위치한 오래된 식량창고 건물(1927년 준공)을 개조해 1983년 개관한 비영리 전시공간 사가쵸는 일본 최초의 대안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2,30대의 젊은 작가가 국공립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던 시절, 오타케 신로, 모리무라 야스마사, 스기모토 히로시를 비롯한 약 400명의 국내외 작가가 이곳을 거쳐갔다.
흥미로운 것은 사가쵸 전시공간이 입주해있던 이 식량창고 건물에 몇몇 신진세대의 기획 화랑이 모여들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갤러리스트 사타니 슈고는 2000년 부친의 사타니화랑에서 독립해 자신의 갤러리 슈고아츠ShugoArts를 설립하기 전부터 이곳에서 자신과 동세대 작가들의 전시를 수차례 기획했다. 그 후, 1996년 도미오 고야마갤러리Tomio Koyama Gallery, 1998년 타로 나수TARO NASU가 이 건물 2층에  문을 열었다. 3층에 위치한 사가쵸 전시공간은 2000년에 활동을 마감하고, 이전부터 스태프로 활동해 온 고야나기 아츠코의 갤러리 고야나기가 공동 운영한 RICE Gallery by G2가 2001년 이 장소를 물려받았다. 이듬해인 2002년 11월, 마지막 전시 <Emotional Site>를 끝으로, 아름다운 건물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아무런 특징도 없는 고급 맨션이 세워졌다. 그렇지만, 긴자의 화랑가처럼 특정 지역의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장소를 함께 만들어내는 현대미술 갤러리들의 협업 단서가 일본 최초의 대안공간과 맞닿아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할 역사로 남았다.

롯폰기의 새로운 이미지
여섯 그루의 나무라는 뜻의 롯폰기 지역 내에서도 ‘감자 씻기 언덕’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이모아라이자카. 이곳에 아트 컴플렉스 빌딩이 자리하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갤러리 고야나기의 고야나기가 부동산업계의 대기업 모리 빌딩의 사장이자 모리미술관 창설자인 모리 미노루에게 직접 건의해, 미술 관계자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5년간 대여한 것은 모리미술관이 개관하기 약 반년 전인 2003년 4월의 일이었다. 지진에 취약한 건물의 특성 때문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이곳에는 OTA FINE ARTS, TARO NASU, Roentgenwerke 등과 현재는 에비스로 이전한 아트 바 TRAUMARIS가 입주해있었다. 이 시기에 이모아라이자카는 갤러리 고야기, 도미오 고야마갤러리, 다카 이시이갤러리가 모인 시카와의 창고, 다카하시 컬렉션 가구라자카 야마모토 젠다이, 고다마갤러리 등이 모인 가구라자카의 인쇄공장 등과 더불어 2000년대 현대미술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그 후, 국립신미술관과 리뉴얼해 이전한 산토리미술관이 2007년에 개관하여, 모리미술관과 더불어 ‘롯폰기 아트 트라이앵글’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모리미술관의 개관은 사회 일반에 현대미술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받는데, 문화예술지역으로서의 롯폰기라는 자기 이미지를 그려내고자 했던 모리빌딩의 전략 역시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리적인 거점에서 네트워크 속으로
개관 20주년을 앞둔 도쿄도현대미술관이 들어선 곳은, 1995년 당시에는 좋은 입지조건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도쿄도현대미술관 주변에 디자인 사무소, 미술관계 서점, 작은 갤러리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두 개의 지하철 노선이 지나가는 기요스미시라카와역이 개통되고, 2005년 신카와의 갤러리들이 기요스미로 이전해 같은 창고 건물에 둥지를 틀면서부터 기요스미시라카와 지역은 한때 ‘도쿄의 소호’라고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슈고아츠, 다카 이시이 갤러리, 도미오 고야마 갤러리 등 현재 입주해있는 7개의 갤러리 가운데 3개의 갤러리가 2014년 12월을 끝으로 이 장소를 떠나고, 2015년 봄 무렵에 건물 자체가 철거될 예정이니, 2015년 도쿄의 갤러리 지도는 또다시 변화될 전망이다.
2004년부터 이 지역의 변천 과정을 지켜봐 온 도쿄도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야부마에 도모코는, 결과적으로 도쿄의 현대미술 중심처럼 보인다고는 해도, 이러한 변천은, 어디까지나 미술관이 더 이상 중심이 아닌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강조했다. 지금은 미술관의 헤게모니보다는, 크고 작은 이벤트를 함께 기획하고, 허물없이 소규모 스터디 모임을 하거나, 트위터상에서 대화를 주고받으며, 거주 공간 안에 마련한 아틀리에에서 인터넷 중계 방송을 하는 등, 다양한 형식의 자발적인 정보발신과 상호 교류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말이다. 2014년 발간된 저서 《예술에 있어서 가치란 무엇인가》에서, 인터넷 공간을 포함한 작가와 작품의 노출 형태 전체를 갤러리로 생각하는 개념 전환이 필요한 시대라고 한 미즈마 아트 갤러리의 미즈마 스에오씨의 견해 역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직후, 일본의 중심이 오사카와 교토 등 서일본 지역으로 이동하리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2014년 현재도 경제, 문화, 정치의 중심이 도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지리적으로 한국에 가까운 세토우치 내해 지역의 존재감이 높아졌다고 《REALTOKYO》, 《REAL KYOTO》의 발행인 겸 편집장 오자키 데쓰야는 지적한다. 후쿠타케 재단이 운영하는 Benesse Art Site Naoshima 및 동 재단이 중심이 되어 2010년에 시작된 아트 세토우치, 의욕적인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히로시마시 현대미술관, 유서 깊은 사립 미술관인 오하라미술관, 젊은 기업인 컬렉터가 등장한 오카야마 지역 등이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동력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한편, 옛 수도인 교토에서도, 최근 국제무대예술제 KYOTO EXPERIMENT, 현대미술 이벤트 NUIT BLANCHE KYOTO, 국제사진페스티벌 KYOTOGRAPHIE 등이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다. 그리고 교토 교외에서 도심으로 재이전이 결정된 이래, 교토시립예술대학 주최의 다양한 준비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 미술시장의 중심이 아직 도쿄에 있다고는 하나, 흥미로운 움직임은 서쪽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오자키의 견해다.
2010년대 일본 현대미술의 중심거점은 어디일까. 본 기사의 취지를 넘는 대답이지만, ‘후쿠시마’여야만 한다고, 젊은 아티스트 컬렉티브 카오스*라운지의 미술가, 미술평론가 구로세 요헤이는 말했다. 물론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의 트라우마를 일컫는 개념으로서의 후쿠시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후쿠시마를 의식하지 않은 작품 제작과 비평은 불가능해졌다는 견해는, 구로세 이외에도 실로 많은 이가 공유하는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구로세는 “시대란 자신들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지만 ‘포스트 후쿠시마’가 보다 구체적인 부흥과 재건의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다.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서울

미술시장 변화가 인사동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황석권  본지 수석기자

최근 10년 동안 서울의 미술현장은 지리적으로 이합집산 현상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다양화되었다. 그간 우리 미술판의 터줏대감으로 인정받았던 인사동은 주축을 이루던 갤러리가 주변 사간동이나 통의동으로 이전하면서 그 지위를 잃었다. 반면 여타 신생 갤러리와 대안공간 등이 홍대 주변 그리고 청담동과 신사동 등 강남지역에서 개관해 예술 거리가 형성됐다. 따라서 미술현장의 중심은 와해되고 분화되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인사동은 근래까지 100여 년간 서울의 갤러리가를 대표하던 곳이다. 최열 인물미술사학회 회장은 “인사동은 1930년대 이래 1990년대 중반까지 서화골동을 아우르는 미술시장의 중심지였다. 대한제국기인 1897년 이래 1910년대 식민지 시절 북촌 양반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서화골동품을 광통교나 19세기에 성행하던 남대문 밖 자기전磁器廛에 보내지 않고 별도의 거간居間을 통해 안국동이나 관인방(인사동)에서 매매하였던 까닭이 바로 그 장소의 차별화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차별화된 신분 계급에 맞춰 예술품에도 가치의 차별성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개입됐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인사동 갤러리가의 역사는 짧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서울의 갤러리가는 점차 분화되고 주변으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최근 가장 각광 받는 미술거리라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선 사간동과 삼청동 등 북촌 일대다. 서울관은 2008년 건립계획이 발표됐고 2013년 11월에 개관했는데 이를 계기로 이 일대의 유동인구가 급격히 증가했고 갤러리도 속속 들어섰다. 그중 눈에 띄는 곳이 바로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갤러리 스케이프 등이다. 또한 이곳과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있는 통의동에도 갤러리가 꾸준히 들어섰다. 팔레 드 서울을 비롯해 인사동에 있던 아트사이드, 신사동에 있던 갤러리 시몬이 이곳으로 이전했다. 대구의 유력 갤러리인 리안갤러리도 이곳에 분점을 냈다. 소규모 공간도 들어섰다. 사진 전문 갤러리 류가헌이 그 대표적인 곳이다. 또한 이와 가까운 곳에 복합문화공간에무도 개관했다.
강남지역은 2008년 우리 미술시장이 정점을 찍을 무렵을 전후해 갤러리가 들어서기 시작해 그 수가 증가했다. 2005년 청담동에 건립된 네이처포엠 빌딩이 대표적인 예다. 많은 갤러리가 이곳에 입점해 운영에 들어갔다. 이외에 신사동도 가로수길과 도산공원 등을 중심으로 갤러리가가 형성됐다.  또한 스페이스 K, 송은아트센터, 갤러리 로얄,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 등 기업체가 설립한 갤러리와 미술관이 속속 들어섰다. 이제 서울의 미술거리는 인사동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우리 미술시장과 미술문화를 수용하는 태도의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서진수 강남대 교수는 “미술품을 매매하는, 이른바 미술품 유통시장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유서 깊은 인사동과 황학동과 신흥시장인 강남 지역을 들 수 있다. 전자는 공급자가 다수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도시 재개발로 인해 구매력 있는 수요자가 몰려있는 강남지역 등으로 중심이 다변화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서울은 인사동을 중심으로 주로 강북에 갤러리가가 형성되었다가 강남의 신수요층, 즉 미술품을 소장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부자 동네에 갤러리가 생겨나면서 지역적 분화가 시작됐다.
그렇다면 인사동이 예전 같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며 미술품 거래에서 한발 밀려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는 시장의 속성과 연결된다. 서 교수는 “갤러리가 밀집해 있으면 마케팅에 도움이 되고, 또한 그곳을 방문한 고객이 발품을 많이 팔지 않아도 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근래 인사동은 입지여건이 변화했다. 전통적인 미술거리나 갤러리가라기 보다는 관광지로 변한 것이다”라며 “입지조건이 관광객을 상대하는 업종에 유리하게 변화한 것이 지금의 인사동 쇠락을 야기했다”고 진단했다. 이런 현상은 중국의 798예술구도 마찬가지라고.
편익을 중요시하는 고객의 성향도 한 원인이다. 서 교수는 “인사동은 현재 주차문제를 비롯해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고객의 편익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다. 고객은 편하게 전시를 관람하고 작품을 구매할 수 있는 지역을 선호하게 마련”이라며 갤러리가가 분화된 원인을 분석했다. 고객의 편익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쇠락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입지의 패러다임이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비슷한 업종이 몰려있을 때 작용하는 ‘집적의 경제’ 효과가 당장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작품의 생산자인 작가를 프로모션하여 판매로 연결하는 갤러리 문화가 정착되지 못한 것도 인사동의 쇠락을 가져온 계기라고 서 교수는 지적한다. “대관전이라는 기형적인 갤러리 문화가 부동산 임대업과 무엇이 다른가?” 반문하는 서 교수는 “수없이 많은 비평, 자본의 투입, 마케팅을 동원해 궁극적으로 미술사에 남게 하여 리세일을 할 능력을 가진 곳이라야 온전한 갤러리라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갤러리 운영 패러다임의 변화는 개인화된 삶의 패턴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최근 활발한 1인 창업은 우리 사회가 시스템이 개인을 움직이던 시대를 벗어나 역전이 시작됐다는 방증이라고. 이전에는 갤러리를 운영하는 데 꽤 많은 자본과 인력이 소요되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아웃소싱할 수 있는 다양한 여건이 구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운영과 관리 등은 비용을 지불하면 얼마든지 외부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서 교수는 “현재 젊은 세대는 IT와 컬처테크놀로지가 결합한 이른바 ICT분야에 매우 관심이 많다. 공학에 문화를 합쳐놓으니 즐거움과 품위는 물론 경제적인 이득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갤러리 운영 방식의 변화는 세상의 변화와 맞물려 있는 셈”이라며 현상를 분석했다. 또한 서 교수는 젊은 컬렉터들에 대해 “정보력을 갖추고 교육받은 안목으로 작품 구매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 층”이라며 “이들은 갤러리의 위치에 대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 여기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변화한 시장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최근 우리 미술계에서는 특정한 장소에 모여 집단을 이루던 과거와는 다른 면모를 보이는 비상업 공간도 생겨나고 있다. 상봉동의 반지하, 교역소, 영등포의 커먼센터, 통의동의 시청각 등이 그곳이다. 이들에게 전시를 보려 찾아오는 관람객의 접근성이나 번듯한 시설이 주는 안락함 등은 심각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대부분 공간은 현실적인 문제로 비교적 임대료가 저렴한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 공간들은 대부분 지향하는 목표를 강한 어조로 공표하고 있지 않다. 다만 개인의 만족감에 더 집중하는 듯 보인다.  함영준 커먼센터 멤버는 “이전에도 담론을 생산하는 공간은 집결해 있지 않았다”며 “그저 형편에 맞춰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기존 논리에 포섭되는 활동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상봉동의 반지하 돈선필 ‘관리자’는 “젊은 작가들이 접근할 공간이 부재하다는 점이 이곳에 온 이유”라며 “이곳은 내가 운영하는 곳이 아니라 작가가 제안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가는 공간”이라고 밝혔다. 또한 “특정한 사명감은 없다”며 “소비되는 공간이라면 폐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들의 실험이 어떻게 전개될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다만 “젊은 기획자와 작가들의 열정과 실험은 중요하지만, 결국 제도와 자본에 대한 또 다른 신자유의적 연착륙 전략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공간의 역량은 기획만큼 운영의 대안이 없다면 결국 국가자본과 개인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더욱 그러하다”라는 항간의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London

영국 (6)

영국 (7)

SLAM 페캄 투어 현장_보스앤바움갤러리BOSSE AND BAUM(왼쪽)_credits Bethany Lloyd, 한나배리 갤러리HANNAH BARRY _credits Bethany Lloyd

전통 중심지의 해체 위기
지가은  골드스미스 대학 비주얼 컬처 박사과정

런던 미술계의 공간적 지형도는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런던 시내의 서부지역West End과 동부지역 East End 그리고 남부 지역South이다. 이 세 지역을 중심으로 한 미술계 움직임은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환경 변화를 반영하면서 각 지역의 특성에 부응하는 예술문화를 형성했다.
먼저, 전통적으로 화랑가가 형성돼 있던 중심가는 서부지역의 메이페어Mayfair이다. 런던의 도심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국제적인 대기업의 본사들과 각국 대사관을 비롯해 각종 명품 브랜드 매장이 즐비한 번화한 상업지구 중 하나이다. 코크 스트릿Cork Street에서 듀크 스트릿Duke Street, 알버메르 스트릿Albemarle Street, 본드 스트릿Bond Street까지, 주로 부유한 개인 대표가 운영하는 상업 갤러리들이 일찍이 둥지를 틀었고, 오랜 기간 이름난 딜러와 컬렉터들의 주무대였다. 1925년 개관해 코크 스트릿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어 갤러리The Mayor Gallery나 말보로 갤러리Marlborough Fine Art Gallery와 같은 터주대감 격 갤러리들과 티모시 테일러 갤러리Timothy Taylor Gallery, 가고시안Gagosian, 화이트 큐브White Cube, 하우저 앤 워스Hauser & Wirth, 블레인 서던Blain Southern 등 뉴욕, 베를린, 홍콩 등지에도 지점을 둔 국제적 규모의 갤러리들도 모여 있다. 더불어 이 지역은 현대미술뿐만 아니라 유럽 올드마스터 회화나 조각작품을 집중적으로 거래하는 역사가 유구한 갤러리도 많은데, 콜나기Colnaghi나 애그뉴Agnew처럼 대를 이어 가족 사업으로 운영되는 곳이 대표적이다.
서부지역과 달리 동부지역은 런던에서 가장 낙후한 빈민가였다. 산업혁명 이후 도심의 일자리를 찾아온 이주 노동자들과 각국의 이민자들로 이 지역은 인구 과밀 상태에 이르렀고, 19세기 말까지 가난과 범죄로 악명 높았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지역 간 빈부 격차와 문화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지역재생사업에 착수했고, 그 일환으로 1901년 화이트채플 갤러리Whitechapel Gallery를 설립했다. 갤러리는 특히 1940~1960년대 유럽과 미국의 새로운 미술을 영국으로 유입하는 진보적인 통로가 되었고, 동부지역의 다문화적 배경과 공생하는 전시 및 교육 프로그램 기획에 힘쓰면서 대표적인 공립미술관으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독dock이 폐쇄되고 여러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쇠퇴한 동부지역에는 점차 임대료가 저렴하고 공간이 넓은 작업실을 원하던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부지역의 주류 갤러리들이 주도하는 미술의 고급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혹스톤Hoxton 지역을 중심으로 쇼디치Shoreditch, 마일 엔드Mile End 그리고 해크니Hackney까지 자신들만의 독특한 사회 비판적, 반항적 문화를 형성했다. 이후 실험적 시도를 하는 프로젝트 공간이나 신생 갤러리들도 속속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는 지역 경제 자체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지금은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디자인, 건축 등 다양한 분야 예술가들이 밀집한 덕분에 관련 사무실과 상점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팽창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갤러리로는 빅토리아 미로Victoria Miro,  매츠 갤러리Matt’s Gallery, 다문화 시각예술연구소 이니바INIVA 및 비영리 사진예술단체 오토그라프Authograph ABP의 터전인 리빙톤 플레이스Rivington Place, 치젠해일 갤러리Chisenhale Gallery, 셀 프로젝트 스페이스Cell Project Space 등이 있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와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사라 루카스Sarah Lucas 등 일명 ‘yBaYoung British Artists’라 불리는 스타 군단의 에너지가 배태된 곳도 이 동부지역이다. 긴축재정으로 영국의 경기침체를 극복한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장기 집권하면서 예술 분야에 대한 정책적, 재정적 지원이 현저하게 떨어진 시기, 이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소개할 자구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창고를 빌려 전시회를 개최하고 사기업의 후원과 대중매체 친화적인 태도로 자발적인 홍보에 임한 이들은 충격적인 형식과 내용의 작품으로 변두리에 있던 영국 현대미술을 국제 무대로 옮기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동부에서 정점을 찍은 현대미술의 실험성과 열기는 남쪽으로 이어졌다. 테이트 모던Tate Modern과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에서 시작하는 템스강 이남 지역은 특히 골드스미스 대학Goldsmiths College과 캠버웰 미술대학 Camberwell College of Arts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2000년 뱅크사이드Bankside의 테이트 개관을 신호탄으로 남동부 지역의 계획적인 재개발 착수는 동부의 예술적 분위기와 에너지를 버몬지Bermondsey, 페캄Peckam, 데포드Deptford, 그리니치Greenwich로 이끌었다. 이 지역에는 가스웍스Gasworks, 사우스 런던 갤러리South London Gallery, 한나 배리 갤러리Hanna Berry Gallery, 플랫 타임 하우스Flat Time House 등 다양한 성격의 레지던시 및 전시 공간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신진 작가와 큐레이터들이 기획한 크고 작은 전시와 관련 이벤트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 갤러리들은 보다 효과적으로, 조직적으로 관객의 발길을 남쪽으로 돌리기 위해 2010년 ‘사우스 런던 아트맵South London Art Map (이하 SLAM)’이라는 네트워크를 발족했다. 주요 갤러리 위치를 안내하는 온라인 지도 서비스를 운영하며 서로 긴밀한 협력 관계 아래 전시 개막일이나 행사 날짜를 조정하고 권역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전시 공간을 소개하는 투어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SLAM이 본격 가동되면서 이 지역 갤러리 수가 2배 이상 증가했고 새로운 미술 중심지로서의 활기에 가속도가 붙었다. 주목할 만한 변화 중 하나는 동부의 최전성기를 함께했던 화이트 큐브가 1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혹스턴 스퀘어를 떠나 2011년 버몬지 길목으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동부지역이 상권 팽창으로 진부해져 예전같지 않자 새로운 기운이 움트는 남부지역으로 눈길을 돌렸다는 뜻이다. 한때 갤러리 밀집가로 많은 사람이 찾았던 동부의 바이너 스트릿Vyner Street은 대부분의 갤러리들이 빠져나가 한창때의 열기가 식었고, 예술가들과 영세 갤러리들은 지속적으로 오르는 임대료 시세를 피해 좀 더 깊숙한 동쪽으로,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또 하나의 흥미로운 변화는 오히려 갤러리들이 동부에서 서부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30년 넘게 올드 스트릿Old Street에서 입지를 굳힌 빅토리아 미로도 얼마전 메이페어에 따로 지점을 열었고, 터너 프라이즈 우승자를 배출하는 등 동부에서 성장해 명성을 얻은 MOT 인터내셔널MOT International도 뉴 본드 스트릿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런던에 들렀다 작품을 구매하고 바로 떠나는 컬렉터들의 발길을 잡기 위한 갤러리들의 선택과 집중 전략이기도 하다. 이들이 동부지역까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뉴욕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갤러리 세 곳, 데이비드 즈위르너David Zwirner와 마이클 워너Michael Werner, 페이스 갤러리Pace Gallery가 모두 2012년 메이페어에 새 지점을 열었다. 다시금 예전의 서부지역 부흥기를 연상시키는 움직임이다. 그러나 그 양상은 조금 다르다. 서부지역의 핵심가였던 코크 스트릿마저 거대 외국 자본의 부동산 투자 개발 압박에 못이겨 많은 갤러리가 떠났고, 대신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메이페어보다 근처 피츠로비아Fitzrovia 지역을 선택하는 갤러리가 늘어나고 있다. 2008년 이후 이 곳에 생긴 갤러리는 30곳이 넘는다. 서부의 전통적인 미술 중심지는 해체될 위기에 처한 반면 근접한 지역에서 새로운 움직임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지역성을 가진 런던의 각 미술 중심지는 이렇게 시기에 따라 주도권을 주고받으며 변화의 역사를 거듭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지역 간 빈부 및 문화 격차, 정부 차원의 문화예술 정책 등 여러 요인이 얽혀 있겠지만, 서부에서 동부로, 동부에서 남부로 이동하는 런던 미술 지형도의 움직임에도 어김없이 상업 자본의 흐름이 두드러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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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줄리아 알바레즈는 아트 딜러이자 큐레이터. 2001년 골드스미스 대학을 졸업하고 2005년부터 런던 남부지역의 데포드 하이 스트릿Deptford High Street에 위치한 베어스페이스Bearspace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남부지역의 미술 협력 네트워크인 ‘사우스 런던 아트맵South London Art Map’과 그 전신인 ‘데포드 아트맵Deptford Art Map’의 창립자이자 디렉터이다.
사우스 런던 아트맵 www.southlondonartmap.com
베어스페이스 www.bearspace.co.uk

영국 (3)줄리아 알바레즈Julia Alvarez
사우스 런던 아트맵(South London Art Map – SLAM) 디렉터

“런던 남부의 미술지형도가 변화하고 있다”

SLAM의 전신인 ‘데포드 아트맵Deptford Art Map’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이를 SLAM으로 확장하게 된 과정은?
데포드 지역 갤러리 대표들에게 보다 많은 관객 유치를 목표로 서로 협력해 아트맵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일단 데포드 지역 갤러리들의 연대를 바탕으로 아트맵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고, 관객들도 몰렸다. 지역 갤러리들이 저녁 늦게까지 전시를 오픈하는 ‘데포드의 밤Deptford Lates’을 진행하는 등 공동의 프로그램이 효과를 본 것이다. 《타임아웃TimeOut》, 《가디언Guardian》 같은 주요 매체에서도 아트맵에 주목했다. 그제서야 예술위원회 측이 이를 남부지역 전체로 확장해보자는 제안을 역으로 해왔다. 그래서 뱅크사이드와 페캄의 주요 갤러리 및 스튜디오까지 참여하게 되었고 지금은 버몬지와 그리니치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처음 70곳 남짓했던 참여 갤러리가 4년 사이 180곳으로 늘었다.

갤러리는 10년, SLAM은 4년차 운영에 접어들었는데 그간 남부지역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일차적으로 갤러리 수와 관객 수가 늘었고 거주 예술가 수도 마찬가지다. 10년 전 함께 일한 작가가 모두 동부 지역에 살았다면 지금은 대부분 남부에서 작업한다. 남부에도 ACME나 ASC 같은 대형 스튜디오 건물이 많이 생기면서부터다. 그러나 여전히 갤러리와 아트맵 운영에 여러모로 지원과 생존전략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남부는 앞으로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띠게 될텐데, 여기에는 긍정적, 부정적 측면이 모두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그리니치 지역의 대규모 주택 개발에 투자한 중국계 업체는 단지 내 갤러리를 신설하고 SLAM의 그리니치 아트맵 확장을 지원했다. 단순히 지역 내 예술 인프라를 이용하기보다 이에 능동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지역에 유입되는 자금의 흐름이 남부의 아트맵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새로운 예술 허브로서 남부지역의 강점은 무엇인가? 남부지역만의 예술적 특색도 머지않아 동부지역처럼 상권에 밀려나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없나?
동부지역의 미술 지형도는 화이트 큐브나 데이비드 리즐리David Risley 같은 개인의 영향력을 중심으로 성장한 측면이 많다. 이들이 떠나면 그 영향력도 줄어든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남부 지역에 이런 규모의 미술 네트워크가 생길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 이 네트워크 뒤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사람과 지역 공동체, 예술 사이에 진정한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고 서로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도 있다. 이러한 상호 협력이 이 지역의 중요한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부가 앞으로 어떤 변화를 겪으며 성장할지 기대도 된다. 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다져놓은 SLAM이라는 토대가 보다 장기적으로 지속성을 가지고 변화에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런던=지가은 통신원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Paris

프랑스 (7)

페로탱갤러리Galerie Perrotin 본관

파리 갤러리, 수면 아래 백조의 발
심은록  미술비평

오랫동안 여행을 다녀와도 파리는 변하지 않고 늘 그대로인 것 같다. 서울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파리의 갤러리들도 호수 수면에서 유유자적 노니는 백조처럼 그렇게 고상하고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적어도 겉모습만이라도 그렇게 보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파리의 갤러리들은 수면 아래 백조의 발처럼 거칠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패션만 유행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BMW 아트카 등의 모드에 일조하는 슈퍼스타 아티스트의 동의어가 ‘브랜드 아티스트’라는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첨단적 감각을 미처 쫓아가지 못하면, 비록 단단했던 갤러리일지라도 문을 닫아야 한다. 이는 파리 갤러리만이 아니라 전 세계 갤러리의 대부분 상황이기도 하다. 불과 5년 전후로 프랑스의 현대미술 갤러리 지형도가 다시 그려진다. 우선 프랑스 전체의 갤러리 지형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13년 6월, 프랑스 문화부에서 발표한 통계(《Culture Etudes》)에 따르면, 2012년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대미술 갤러리는 총 2191개이다. 그중에 1000개가 넘는 갤러리(48%)가 파리에 집중되어 있다. 갤러리들은 파리의  20개 구區 중에서 대부분 3구, 6구, 8구에 위치해 있다. 예술구로 유명한 3구에는 퐁피두센터(국립현대미술관)와 마레지역이 있다. 이곳에는 206개의 현대미술 갤러리가 있으며 젊은 갤러리도 많다. 갤러리의 연평균 매상고는 115만 유로이며, 역사는 평균 16년 정도 되었다. 6구에는 189개의 갤러리가 생제르망 데 프레Saint-Germain-des-Prés, 생쉴피스Saint-Sulpice, 케 데 그랑조귀스탱quai des Grands-Augustins의 전통적인 삼각지대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국립미술대학과 2차 세계대전 이후 갤러리 덕분에 유명해진 거리들(뤼드 센, 뤼드 생페르, 뤼드게네고 등)이 있다. 이곳 갤러리들의 연평균 매상고는 190만 유로이며, 이 지역의 갤러리는 평균 23년 정도 되었다. 8구에는 152개의 갤러리가 있다. 이곳에는 특히 고가품 부티크이 많이 들어서 있다. FIAC과 아트 파리Art Paris가 열리는 그랑팔레, 세계적으로 중요한 옥션인 크리스티, 소더비, 아르퀴리알 등도 이곳에 있다. 이곳 갤러리들의 연평균 매상고는 107만 유로이며, 갤러리 역사는 평균 22년이다.
파리의 갤러리들은 프랑스 전체 매상의 86%를 담당하고 있으며, 4분의 3정도(72%)의 갤러리가 1차시장(작품이 갤러리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 및 거래)에 관여하고, 나머지 4분의 1정도의 갤러리가 2차시장(경매와 같은 재거래 시장)에 참여한다.

주요 갤러리의 확장 혹은 소멸
프랑스는 2010년 이래, 갤러리 지형도가 많이 바뀌었다. 2010년 미술계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래리 가고시안의 파리 입성이었다. 파리에는 이미 많은 외국 갤러리가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기에, 또 다른 미국 갤러리가 지점을 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래리 가고시안은 ‘미술계 최대 거상’이자 ‘미술계 파워 1인자’로 그 영향력이 지대하며, 제프 쿤스, 리처드 프린스, 데미안 허스트 등과 같은 현대 블루칩 작가들을 발굴하는 데 일조했다. 가고시안갤러리(Gagosian Gallery, 4, rue de Ponthieu, 파리 8구)는 프랑스의 중요한 미술 이벤트 중의 하나인 FIAC의 오프닝과 같은 날인 10월 20일 파리 샹젤리제 지척에, 그것도 크리스티 옥션 바로 옆에 갤러리를 개관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2년 뒤, 2012년 10월 FIAC 기간에 미술계의 두 가지 커다란 이벤트가 있었다. 가고시안갤러리와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 갤러리가 각각 지점을 낸 것이다. 새로운 두 지점에는 공교롭게도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두 지점은 비슷한 시기에, 같은 파리 외곽 93지역(Seine-Saint-Denis)에서 개관하고 첫 초대작가로 안젤름 키퍼를 초청했다. 로팍은 4,700㎡의 새로운 갤러리를 팡탱 (Galerie Thaddaeus Ropac Pantin, 69, av du Général Leclerc, Pantin)에, 가고시안 갤러리는 1,650㎡의 갤러리를 르부르제(Galerie Gagosian, 800, av de l’Europe, Le Bourget)에 열었다. 이 두 지점은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공항인 샤를 드골 공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특히 가고시안은 FIAC이나 중요한 행사를 위해 외국에서 오는 슈퍼리치 컬렉터 전용기들이 이용하는 사설공항인 르 부르제에 있다. 바쁜 컬렉터들은 그들의 전용기로 르 부르제 공항에 착륙해 파리까지 들어갈 필요 없이 작품만 보고 바로 이륙할 수 있다.
물론 평범한 일반 관람객이 자동차 없이 이곳을 방문하기란 쉽지 않다. 가고시안과 로팍의 새로운 두 지점은 파리 본점보다 훨씬 거대하기에 규모가 큰 스케일의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으며, 웬만한 미술관을 능가하는 좋은 전시가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큰 규모의 작품을 살 수 있는 컬렉터는 슈퍼리치 컬렉터, 미술관, 부자 재단들이다. 최근 바젤 아트페어에서는 갤러리 부스가 있는 메인 섹터를 좀 더 줄이고, 대신 거대한 설치작업을 보여주는 ‘언리미티드Unlimited’ 전시가 주목 받고 있다. 갤러리의 역할이 중요한 아트페어의 언리미티드 전시나 파리 외곽의 거대한 갤러리들은 대형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중국이나 아랍 미술관들, 슈퍼리치 컬렉터들을 겨냥하고 있다.
‘프랑스의 가고시안’이라고 불리는 에마뉘엘 페로탱은 17세부터 갤러리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는 파리에 세 개의 갤러리를 소유한 것을 비롯해 뉴욕, 홍콩에 각각 갤러리를 가지고 있다. 무라카미 다카시나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같은 국제적인 작가를 세계적으로 알렸으며 소피 칼, 장 미셀 오토니엘 등이 이 갤러리에 속해 있다. 가고시안이나 로팍과 달리 페로탱 갤러리는 올해 5월, 두 번째 지점(60 rue de Turenne, 파리 3구)을 본점과 지척인 곳에 열었다. 프랑스 대중매체는 이 오프닝 전시 <GIRL>의 참여 작가보다 큐레이터에 관심을 집중했다. 미국 대중가수 퍼렐 윌리엄스가 특별 큐레이터였고, 신디 셔먼,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소피 칼, 무라카미 다카시 등이 참여 작가였다. 카멜 므누르Kamel Mennour도 본갤러리 지척에 지점(47, rue Saint-André-des-Arts et 60, rue Mazarine, 파리 6구, 2007년 오픈)을 냈다. 아니시 카푸어, 다니엘 뷔랑, 이우환 등 역시 국제적인 작가들이 이 갤러리에 속해 있다.
이처럼 확장을 거듭하는 갤러리도 있지만, 문을 닫는 곳도 있다. 이본 랑베르는 19세에 베니스에서 자신의 갤러리를 처음 열고, 1977년 파리 퐁피두센터 지척에 갤러리(108, rue Vieille-du-Temple, 파리 3구)를 오픈하여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전파에 주력했다. 60여 년간 갤러리스트로 일한 이본 랑베르는 2014년 12월, 아델 압데세메드Adel Abdessemed의 전시를 끝으로 은퇴한다. 이본 랑베르는 은퇴하는 형식을 취했기에 아쉬움은 있어도 커다란 반향은 없었다. 하지만, 1년 전, 젊고 잘나가던 제롬 드 누아몽 갤러리(Galerie Jérôme de Noirmont, 38, avenue Matignon, 파리 8구)가 문을 닫을 때는 미술계에 충격을 주었다. 제롬 드 누아몽과 에마누엘 드 누아몽 부부는 “갤러리를 운영하기에는 오늘날 프랑스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이 열악하다”고 한탄했다. 일례로 프랑스 현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가 그의 대선공약을 지켜 2012년 5월부터 부유세(연간 100만 유로 수익의 고소득자에게 수입의 75%를 과세)를 시행했다. 이에 따라 많은 부자가 부유세 압력을 피해 가까운 외국으로 국적을 옮기는 리치노마드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부유세가 시행된 2012년, 벨기에 국적을 신청한 프랑스인 수는 4만7000명에 달했다.
<아트바젤> 디렉터를 역임한 사무엘 켈러는 “예술은 자본이 있는 곳에서 발전한다”고 말한 바 있다. 컬렉터들이 있는 곳으로 갤러리가 이전하거나 분점을 내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다니엘 템플랑 갤러리스트(30, rue Beaubourg, 파리 3구)의 부인 나탈리 오바디아 갤러리스트는 1993년 그의 갤러리를 파리에 열고, 2003년 퐁피두 지척에 분점(3, rue du Clotre-Saint-Merri, 파리 4구)을 낸 데 이어 2008년 브뤼셀에 지점을 냈다. 이처럼 프랑스 갤러리 다수가 브뤼셀에 지점을 내거나, 아니면 아예 브뤼셀로 옮겨간다. 프랑스 미술시장은 항상 세계 10대 주요 시장에 속하면서도, 정치경제적으로 복합적인 요소가 예민하게 작용하기에, 그 크기나 전통에 비하면 프랑스 현대미술의 판도는 약한 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루이비통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벨기에 국적취득을 취소한 것과 프랑수아 피노(프랑스 국적)가 여전히 프랑스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프랑스 현대미술의 든든한   양 축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현재 퐁피두센터는  제프 쿤스의 회고전(2014.11.26~4.27)을 개최하고 있음에도,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그의 작품을 한 점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고 관장 베르나르 블리스텐Bernard Blistène은 말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중요 미술관, 뜻있는 갤러리, 훌륭한 예술가가 아니라, 슈퍼리치 컬렉터나 상업적 갤러리가 예술의 축이 되는 것은 프랑스뿐만 세계 전반적인 안타까운 현실이다. ●

퐁피두센터 앞에서 벌어진 거리 공연

퐁피두센터 앞에서 벌어진 거리 공연

 

 

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Wien

 

Skulpturen im öffentlichen Raum, Viertel 2, 1020 Wien

마르코 룰리치Marko Lulic <토털 리빙Total Living> (사진 뒤) 2012 Courtesy: Gabriele Senn Galerie, Vienna과 한스 바이간트Hans Weigand의 <파도막이 Wellenbrecher> 2013 Courtesy: Gabriele Senn Galerie, Vienna. 가브리엘레 젠 화랑과 부동산 개발업자 미하엘 그리즈마이어 Michael Griesmayr가 빈 제2구역의 경제・문화환경 및 공공공간 삶의 질 개선이라는 주제로 협력한 <피어텔 츠바이Viertel Zwei> 조각공원 프로젝트에 출품된 작품들

오픈 스튜디오 데이 2014년 열린 빈 아트 위크 페스티벌 중에서 작가들이 화랑이나 개인 아틀리에에서 직접 관객들을 만나 전시를 하거나 작품을 설명하는 모습. Photos: Florian Rainer. Courtesy: Vienna Art Week 2014

오픈 스튜디오 데이 2014년 열린 빈 아트 위크 페스티벌 중에서 작가들이 화랑이나 개인 아틀리에에서 직접 관객들을 만나 전시를 하거나 작품을 설명하는 모습. Photos: Florian Rainer. Courtesy: Vienna Art Week 2014

고로古老파 화랑과 신세대 화랑이 공존하는 현대미술 그린하우스
박진아  미술사

지난 4, 5년 간 빈은 런던, 파리, 로마에 이어 세계인에게 인기 있는 관광도시로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영국 시사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0위’ 랭킹 최상위를 놓치지 않을 만큼 ‘삶의 질이 높은 도시’이다. 그 같은 정평에 걸맞게 빈 도심 핵심권의 부동산 가격은 부르는게 값이 됐을 만큼 천정부지로 뛰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내벽을 드러낸 채 방치되었던 역사주의풍 고건축물들은 오늘날 말끔히 복원되고 산뜻하게 도장돼 시민들과 관광객들을 반기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빈을 찾은 해외 관광객이나 문화 순례자는 음악회와 무대공연 극장은 즐겨 찾지만 화랑가를 찾는 일은 별로 없다. 화랑가라고 부를 만한 거리나 구역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일찍이 근대기 이전 합스부르크 황실 시절부터 빈은 고전음악과 무대예술의 중심도시인 반면, 시각미술 분야는 그에 비해 덜 주목받았던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최근 빈의 미술계는 그 어떤 문화영역보다 큰 순풍을 받고 앞으로 항해 중이다. 예컨대 2003년 발족한 디파처departure 예술후원에이전시를 비롯해, 2009년 창설돼 빈 시정부와 은행이 후원하고 디파처가 조직하는 연례 화랑계 페스티벌인 큐레이티드 바이 빈curate by_vienna, 빈 갤러리 주말Vienna Gallery Weekend, 빈 아트 위크Vienna Art Week, 빈페어 현대미술 박람회Viennafair 같은 행사들을 통해 빈 시는 시각미술 분야에 취약한 도시라는 과거 인식을 불식하고 앞선 현대미술 도시라는 인상을 널리 알리려는 노력에 한창이다. 그 결과 특히 1960~1970년 빈의 화랑들은 근현대 미술사조와 문화정책 변천과 더불어 외양적 변화를 거쳤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직후 빈에서 문을 연 최초의 아방가르드 화랑은 갤러리 넥스트 상크트 슈테판Galerie nächt St. Stephan이다. 이는 전설적인 화랑업자 오토 니렌슈타인이 개업한 노이에 갤러리(1923년)의 후신 격으로 오토 마우어Otto Mauer가 1954년에 설립했다. 빈 최초의 여성화랑주이자 근대 빈 화랑계의 대모인 로제마리에 슈바르츠벨더Rosemarie Schwarzwälder가 지금도 운영하고 있는데 이 화랑은 종전 직후 유럽 앵포르멜계 회화와 빈 행위주의 퍼포먼스에 주력한다.
빈 도심의 이른바 ‘제1구역 빈 화랑계’는 1970년대 초 소수의 선구적 화랑이 개업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도시 전체에 약 70군데가 운영 중이다. 1971년, 빈 화랑계의 여족장 우르술라 크린칭어가 크린칭어 화랑Galerie Krinzinger을 정부부처 건물들이 앞뒤로 들어차 있는 도심 제1구역 남서쪽과 빈 응용미술대학 사이 자일러슈테테Seilerstätte 거리 16번지 건물 2층에 차렸다. 역시 빈 화랑계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엘리자벳 & 클라우스 토만 화랑Galerie Elisabeth & Klaus Thoman(본점 인스브루크)은 같은 거리 7번지에, 그리타 인삼 화랑Galerie Grita Insam이 암 호프 거리에 둥지를 틀었고 이어서 1976년 마이어 카이너Meyer Kainer 화랑이 개업했다. 이 두 화랑 주변과 사이사이로 난 골목에 크로바트 갤러리Galerie Krobath, 갤러리 슈타이넥Galerie Steinek, 갤러리 메차닌Galerie Mezzanin, 갤러리 카림Galerie Charim,  갤러리 힐거Galerie Ernst Hilger, 갤러리 후베르트 빈터Galerie Hubert Winter(7구역으로 이전)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1998년, 자유 큐레이터 겸 기획자로 일하던 4인방이 기존 자일러슈테테 화랑판과 차별화하자는 뜻에서 의기투합해 새 화랑가 구축을 선언했다. 게오르크 카르글Galerie Georg Kargl, 크리스티네 쾨니히Galerie Christine König, 젠Galerie Gabriele Senn, 엥홀름Galerie Kirstin Engholm 네 곳 화랑이 개업하자 이 거리서 50년 넘게 장사해 온 안첸그루버 카페Café Anzengruber는 미술인, 작가, 지성인들이 모여 차와 대화를 나누는 예술가 아지트로 유명해졌다. 나슈마르크트 재래시장과 세세션Seccession 미술관 근처 한산한 제4구역에 허름하던 슐라이프뮐Schleifmühl 이 거리는 오늘날 레스토랑, 카페, 바, 부티크들이 들어선 ‘트렌디’한 거리가 되었다.
2000년 슐라이프뮐 거리의 탄생과 국제현대미술 붐이 본격화하자 제1구역 자일러슈테테 거리를 중심축으로 흩어져있던 기존 화랑들은 저마다 재편성 전략에 바빠졌다. 자일러슈테테파 화랑들은 슐라이프뮐 거리 새 화랑가로 대거 이주하기보다는 저마다 색다른 아이덴티티 전략을 취했는데,  그 전략은 대략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본래 화랑 자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른 구역에 프로젝트 전시 용도로 분관 공간(7구역)을 차리는 전략인데, 크린칭어 프로예테, 힐거넥스트와 힐거브롯쿤스트할레(10구역)가 그런 예다. 둘째는 본래 자일러슈테테 거리 인근 화랑 자리를 버리고 새 자리로 이동하되 원 화랑 위치와 슐라이프뮐 거리 중간의 절충 지점(1구역과 7구역 경계)인 에센바흐 거리로 이전한 전략으로 슈타이넥, 메차닌, 크로바트가 그런 예다. 셋째는 제1구역 선구화랑의 본산지로서 자일러슈테테의 브랜드를 활용해 자일러슈테테 인접 골목으로 이전한 경우로 그리타 인삼, 마리오 마우로너Mario Mauroner Contemporary(본점 잘츠부르크)나 에마뉘엘 라이르Emanuel Layr 화랑이 그러하다.
이렇게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맞춰 지난 10년 사이 이합집산을 거친 빈의 화랑가는 뉴욕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나 소호, 런던의 메이페어나 세인트 제임스 화랑구역 같은 집중된 영미식 화랑가에 비하면 느슨하고 비상업적인 인상을 준다. 종전 직후 화랑은 국립미술관, 컬렉터, 국가급 대표인사들의 문화적 동반자 겸 협력자 역할을 담당했고, 전시 기획 및 작가 후원에 정책을 반영하는 일이 이윤추구보다 급선무였다. 정부 차원에서 현대미술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게된 후 빈의 미술계는 많이 달라졌다. 지난 2010년 8월호 독일의 월간 《아트Art》는 “빈은 새로운 베를린?”이라는 제하에 오스트리아 수도의 미술계를 진단하는 기사를 실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연방정부와 빈 시정부는 2000년대 초엽부터 빈 미술계의 세계화와 역동성을 장려하기 위해 현대미술가 지원책을 펴왔다. 부동산 개발업자 겸 미술컬렉터인 마르틴 레니쿠스 같은 인물은 아예 정부부처나 일부 화랑과 협력해 미술인용 공동거주 아파트를 지어 저가에 제공하고 있고, 빈 쿤스트할레는 5년에 한 번씩 <빈에서 살며 작업하기Lebt und arbeitet in Wien전>(2000년 10월, 2005년 5월, 2010년 3월, 2015년 예정)을 기획해 국제 수준의 현대미술 창조 도시로서 빈을 점검해왔다. 과거 빈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국경이 인접한 동유럽권 국가에서 온 미술가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스위스, 러시아, 불가리아, 터키, 미국 출신 작가 수도 증가하는 추세다.
빈의 화랑계는 경쟁적인 실험주의 분위기로 미술가들을 압박하는 베를린과도, 그렇다 해서 냉철한 돈의 원리가 지배하는 상업지상주의적 뉴욕이나 런던과도 다르다. 빈의 미술시장은 소규모인데다가 오스트리아에서 거래되는 미술작품 수의 80%는 해외 기성 작가 작품들이 차지한다. 반면에 신진 작가들이 화랑의 높은 문턱을 넘어 전시 기회를 얻기란 여전히 쉽질 않다. 한시바삐 전시 경력을 쌓아야 할 젊은 미술가들은 클럽, 창고, 지하실 같은 버려진 공간서 게릴라 전시회나 아틀리에 오픈하우스를 연다. 그만큼 그들의 마음은 조급하다. 이 모두 아랑곳없이 예나 지금이나 빈 미술계와 화랑가는 언제나 그랬듯 느긋하고 한산하다.
빈은 유럽 근대기 프로이트 심리분석학의 고향이다.  미술 창조의 동기와 결과물로서의 작품은 억압된 인간의 무의식세계가 시각화돼 외부로 표출된 인간의 몸부림이며,  그 같은 미술은 하루아침에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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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마르틴 프리츠는 법학을 전공하고 빈에서 활동하고 있는 큐레이터, 문필가, 미술 컨설턴트다. 본래 1980년대에 빈의 무대공연예술 제작 활동을 시작했으나 시각미술 분야로 관심을 전향해 미술관 및 정부부처 미술기관과의 협력으로 다수의 공공 미술프로젝트 조직 운영을 담당했다. 뉴욕 MOMA P.S.1 재개관 운영부 디렉터, 2000년 독일 하노버 엑스포 아트 프로젝트, 2002년 마니페스타 유럽 현대미술 비엔날레,  빈 퀸스틀러하우스에서 미술과 미술제도권을 비평적으로 조망한 전시를 운영했다. 마니페스타 조직 상임위원회(2001~2007), 버외스터라이히 지역 페스티벌Festival of Regions 디렉터(2004~2009)를 역임했으며, 현재 빈 쿤스트할레 감사위원과 빈포헤WienWoche 이사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현대미술시장에 대한 이모저모를 분석비평하는 ‘causeries du lundi’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마르틴 프리츠Martin Fritz와의 인터뷰

“빈 미술계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운영”

전 세계 대표적인 미술 중심 도시의 화랑계와 비교할 때 미술 도시로서 빈의 특징이라면?
글로벌화라는 배경에서 볼 때 글로컬적 빈 화랑계는 이 도시의 지리적 배경과 연관이 깊다. 첫째,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시대를 거치면서 빈은 근대기 빈 문화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유대계 문화인사들을 잃는 막대한 문화적 상실을 겪었다. 둘째, 빈의 미술계는 시장주도적이기보다는 국가주도적이라는 구조적 특성을 지녔다. 국가 차원의 예술가 후원제도patronage는 일찍이 합스부르크 왕정 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으로 과거 음악과 무대예술 분야에 치중되었으나 20세기 종전 이후부터 오스트리아 정부는 시각미술 분야를 집중적으로 후원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1980~1990년에 빈에서는 뮤지움스쿼르티에MuseumsQuartier 같은 공공 종합 미술관 단지가 개설되어 지역적 차원에서 미술붐이 일기 시작해 오늘날 빈 미술에 대한 대외인지도가 향상되었다고 본다.

당신은 1980년대부터 줄곧 빈 화랑계와 미술계를 관찰해왔는데 20세기를 거쳐 문화의 글로벌화・세계화가 만연한 현재에 이르기까지 빈 화랑계의 특징이라면?
빈의 화랑계는 종전 직후 빈 제1구역에서 로제마리에 슈바르츠벨더의 갤러리 넥스트 상크트 슈테판을 초대 화랑으로 해 크린칭어, 마이어 카이너, 페터 파케시 같은 몇몇 선구적인 미술딜러가 주축이 돼 형성되었다. 특히 지난 10여 년 사이 제4구역 슐라이프뮐 거리가 생겼고 인근 구역에 여러 화랑이 들어섰다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 국제급 수준으로 자리잡은 빈 화랑은 15~20군데로 꼽는다. 제1구역에 선구적으로 개업한 설립자들이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고 그렇다보니 빈 화랑계의 중심 세력은 변함없이 제1구역에 집결되어 있다.

지난 몇 년 큐레이티드 바이 빈, 빈 갤러리 주말, 빈페어 등 오스트리아 연방정부와 빈 시정부가 유독 시각예술, 특히 현대미술을 국가적 차원에서 활발하게 후원하는 목적은? 21세기 국제관광업, 도시환경 개발사업 같은 경제적 의도도 있는가?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 정부가 문화예산을 할당하여 거행되는 미술행사들은 시민의 의식수준을 높인다는 교육적인 목적과 사회 공공문화 수준 개선이라는 공리적인 목적이 우선이다. 물론 리처드 플로리다식 창조도시론 선상에서 도시 미술을 통해 정체된 도시 일부 지역이나 거리를 활성화하려는 노력은 지난 몇 년간 제2구역(전통적으로 유대인 게토 구역이었다)과 최근 제10구역(전통적으로 공장이 많아서 육체노동자들과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구역)에서 시도된 바 있다.

최근 베를린 화랑계가 주춤하면서 빈을 새로운 현대미술 중심지로 보고 잠재력을 평가하기도 하는데?
베를린과 빈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하는 미술인은 일찍부터 많았다. 특히 여행이 쉽고 값싸진 요즘, 임대료가 싸고 박진감 있는 도시 환경에서 영감을 받아 베를린과 빈을 오가며 작업하는 미술인이 많다. 베를린은 최근 급속한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은 반면, 빈은 그 같은 무자비한 부동산 개발과 그로 인한 임대료 상승 현상이 덜하고 일반적인 생활환경이 안정적이다. 창조활동을 위해서 도시환경적 충돌과 자극적 영감도 필요하지만 안정성이 중요하다.

한국을 비롯해 최근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창조산업 및 창조경제론을 국가 및 도시 핵심정책으로 내세워 추진하고 있다. 빈의 경우는 어떠한가?
오스트리아 연방정부와 빈 시정부 차원 미술후원제의 65%는 여전히 합스부르크 황실부터 해 오던 전통적 국가주도식 후원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창조산업 분야 후원을 위해 2003년 발족한 빈 시립 디파처 에이전시는 지난 몇 년간 지속해온 부터 미술과 디자인 분야 비영리 단체 후원을 그만두고 그 대신 우수한 예술적 창조력과 상업적 잠재력을 겸비한 미술가 혹은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전략으로 방향선회했다. 최근 국제 미술시장 붐에 힘입어 빈 화랑계도 국가 후원을 받는다. 그 결과, 빈의 화랑계 현황은 ‘강한 제도권 대 미약한 시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대다수 인구가 미술 구매자가 아니다보니 빈페어 현대미술박람회의 경우 이 행사만의 독특한 틈새시장을 개척했으나 출품작들은 여전히 저가대가 주를 이룬다.

미래 빈의 화랑계, 더 나아가 빈과 국제 미술시장에 대한 당신의 전망은?
고가와 저가 미술의 가격 차이가 한층 더 벌어질 것이라고 본다. 현재 국제 현대미술시장 전개 양상을 보건대 현대미술의 상품화에 따라 고급화/고가화된 인기 미술품과 이른바 예술지향적/콘셉트 및 지성지향적 미술품은 초저 가격대를 형성하며 극과극 가격대를 이룰 것이라 본다. 물론 오늘날 저가 현대미술품이 훗날 값진 미술품으로 인정받아 초고가 대열로 지위 전환할 수 있겠으나 미래 스타를 미리 점치기는 매우 어렵다. 미술품 가격대의 양극화 현상은 화랑계에 던져진 결정적인 도전거리가 될 것이다.
빈=박진아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