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돈과 의지의 결합

특집기사로 아라리오를 다루자는 제안에 기자들마저 처음엔 시큰둥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별히 뭐 나올게 있냐는 반응도 있었고, 특정 갤러리를 너무 빨아주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을 거라고, 걱정 말라고 큰소리쳤다.
사실 개인적으로 아라리오에 대한 관심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돌이켜보니 그 존재를 처음 접한 건 1990년대 중반, 지금은 폐간된 《가나아트》에 실린 광고를 통해서였다. 당시로서는 이름도 생소했고, 게다가 서울이 아닌 천안에 있는 갤러리가 미술전문지에 광고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꽤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2002년 갤러리를 새로 오픈하고 데미안 허스트를 비롯한 yBa 주요작가 작품을 대거 컬렉션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후에도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갤러리 마케팅과 특히 컬렉터이며 작가인 김창일 회장의 행보는 국내외 미술계 인사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뉴스 메이커로서 아라리오와 김창일 회장의 존재감에 정점을 찍은 사건은 건축가 故 김수근의 ‘공간空間’ 사옥 매입과 제주도 뮤지엄 개관. 그 규모나 소장품의 수준은 접어두고라도, 아무리 성공한 사업가라고는 하지만 순수하게 개인의 역량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 자체가 국내에선 유례를 쉽게찾을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스위스의 화상畵商 에른스트 바이엘러Ernst Beyeler, 1921~2010가 연상된다. 소규모 화랑에서 출발해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고 영향력 있는 아트페어 <아트바젤>를 만들었고, 나아가 재단을 설립해 뮤지엄으로 화상의 꿈을 완성한 전설적 인물 말이다. 오늘도 바젤-바이엘러미술관을 찾는 관람객 발길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보잘 것 없던 작은 도시 바젤은 명실공히 세계미술의 메카로 자리매김 했다. 맨해튼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 넘게 가야하는 거리에 있는 디아:비컨 역시 마찬가지다. 미술관 하나 때문에 비컨Beacon이라는 작은 마을은 전 세계 미술순례자의 성지聖地가 됐다. 우리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창덕궁 옆 담쟁이로 뒤덮인 작은 벽돌 건물이나 지방 소도시 시외버스터미널, 제주도 구도심 미술관을 보기위해서 제 돈 들여 멀리서 비행기타고 날아 온 노랑머리 관람객을 보는 일도 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돈 많은 사람은 미술에 의지意志가 없고 반대로 의지는 있는데 정작 돈이 없는 미술인이 많더라. 당연히 나는 후자에 해당한다. 아무쪼록 돈과 미술에 대한 의지, 이 둘을 두루 갖춘 인물이 더 많이 등장하길….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bold_title]CONTRIBUTORS[/bold_title]
ML-CO이규현
이앤아트 대표
《조선일보》 미술담당 기자를 거쳐 현재는 전시기획과 전시 홍보마케팅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 ‘이앤아트’를 운영한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 《그림쇼핑》 《그림쇼핑2》 《안녕하세요? 예술가씨!》 《미술경매이야기》 등 미술전문책을 썼다. 연세대 국문과, 중앙대 예술대학원 박물관미술관학과, 뉴욕 크리스티 에듀케이션 대학원 과정을 졸업했고, 뉴욕 포댐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 전공으로 MBA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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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SI신현진
미술비평
마감 직전 ‘작가보수제’에 관한 정부 발표 내용을 확인해 원고를 수정하는 순발력을 발휘해주었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시카고예술대학 대학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했다. 뉴욕 아시아 아메리칸 아트센터 프로그램 매니저, 쌈지스페이스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해 현재 신자유주의와 현대미술에서의 제도적, 존재론적 관계를 고찰하는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며, 현대미술 비평 작업으로 소설 쓰기에 관심을 두고 있다.

COLUMN 강수미의 공론장 1

세대 미학, 미술주체의 문제

지금부터 내가 다루려는 최근(2013~2014년, 그리고 현재) 한국 미술계의 특정 현상은 분명 차이, 변화, 단절, 대립의 계기로서 ‘세대’ 문제를 품고 있고, 누군가 어떤 의도로든 촉발만 시키면 논쟁과 갈등이 확 불붙을 폭발력을 가졌다. 아직은 잠복 상태거나 미결정 상태라는 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 추이를 보자면 일단 사건의 불씨는 점화됐으며 어느 쪽으론가 양상이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해서 우리 앞에는 그 잠복 혹은 미결정의 상태가 내부에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형태로 마름되어야 할지, 혹은 어떤 방향과 가치를 좇아 바로 잡히고 정교해져야 하는지 고민할 과제가 놓였다. 요컨대 사회 어느 영역이나 마찬가지 듯 미술계에도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고, 그 세대의 새로운 일과 자리와 존재가치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그것이 기성세대 및 체제와 어떻게 관계 설정을 하고, 제 위치를 잡으며, 어떤 기제들과 더불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립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 지면에서 나는 그 문제를 크게 ‘세대 미학’이라 명명하고, 앞으로 몇 차례의 글쓰기를 통해 미술주체, 미술경향, 미술정치학, 미술제도, 미술비평 등 세부 논제에 따라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여기서는 미술의 주체가 관건이다.
요 근래 한두 달 사이 한국 미술계의 특정 지점에서 세대 갈등이 살살 불 지펴지는 모양새다. 앞서 지나가듯 언급했지만 사실은 좀 수상스러운 상태다. 그 양상이 세대 간 삶의 지향적 차이나 미학적 충돌로써가 아니라, 일부의 사람들 사이에서, 어딘가 배타적인 방식으로, 묘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때문에 일정 규모 이상의 사회 집단을 상정하게 되는 ‘세대’,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물리적・심리적 마찰이 떠오르는 ‘갈등’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주저되기는 한다. 일단 갈등이라고 해도, 그 직접적 원인이나 소기의 목적이 분명치 않으며, 구도가 명확히 설정돼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대 갈등이라면 익은/기성세대와 젊은/신진세대, 이 두 진영의 당사자들 간 대립과 쟁투가 문제일 텐데 실제로 일의 전개는 전자가 후자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이슈를 주도하고 행동을 자극한 데서 시작됐다. 그 점에서 전도(顚倒)의 징후도 보인다. ‘청년’의 이름을 내세워 정작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기성’이라고나 할까.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고전적이면서 언제나 이미 급진적인 세대 갈등의 양상은 아방가르드의 친부 살해, 즉 전복의 의도를 가진 신참자가 반미학・반미술의 저항을 통해 기존의 미술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미술의 시작을 요구하는 식이다. 그에 비춰볼 때 지금 여기의 양상은 관계가 묘하게 꼬여있고, 제기하는 내용이 빈약하며, 요구사항은 보수적이거나 소시민적이다. 팩트 체크를 하자면, 지난 해 말 SNS 상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일명 ‘청년관’을 신설하라는 요구가 미술세대 간 갈등의 이슈로 제기됐는데, 이를 처음 제기한 이는 기성 미술계에 자리를 잡은 선배세대 중 한 명인 비평가 임근준이다. 나아가 그는 온오프라인을 이용해 그 이슈를 붐업 시켰다(좌담회 ‘안녕 2014, 2015 안녕?’, 《한겨레21》 2015. 1.9). 그리고 한겨레 기자 노형석이 이를 이어 받았다.
즉 대안공간 루프 디렉터 서진석, <청춘과 잉여전>(커먼센터 2014.11.20~2014.12.31) 기획자 안대웅, 대안공간 이포 디렉터 박지원을 초대한 대담에서 그들의 주된 논의가 “자생성을 고민한 창작활동”(박지원), “여기를 발판으로 제도권에 들어가자, 작가 키우자는 식의 목표는 없다”(안대웅), “청년관 얘기는 숲보다 나무만 보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서진석) 등으로 이루어졌음에도 기사 제목을 “국공립미술관에 ‘청년작가들의 공간’을 허하라”(한겨레, 2015.1.18)로 뽑음으로써 논점을 선정적으로 좁힌 것이다. 그들은 제도권 내 청년 공간의 확보라는 이슈를 후배세대가 지금 여기서 풀고 획득해야 할 최우선 욕망의 과제로 설정해줌으로써 기성세대 vs. 신진세대, 기득권미술제도 vs. 청년작가의 갈등 구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실제로 그에 동조하는 측은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의 한 필자가 쓴 것처럼 “팬덤층이 아닐까 의심”(배세은, indienbob.tistory.com/914)이 들 만큼 젊은 미술인 중 일부이며 사회적 집단성보다는 배타성을 가진 이들이다. 대담에서 안대웅이나 서진석이 각자의 뜻으로 말한 ‘미술계의 88만원세대’ 대다수가 아니라, 예컨대 트위터의 ‘팔로우’나 페이스북의 ‘좋아요’를 통해 서로 물고 물려 있는 그룹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재 이슈 속의 ‘청년작가들’은 기성세대 미술을 낡고 진부한 것으로 격하시켜버릴 만한 어떤 전위적이거나 혁신적인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가? 혹은 상상컨대 국가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청년관을 어느 날 떡하니 개설해주면 당당히 거기 들어갈, 그간 자신들의 은밀한 그룹 안에서 비아냥거렸던 기성작가들의 미술을 부끄럽게 할 만한, 독자적인 예술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인가? 혹시 선배가 제시해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청년관 신설’이라는 이슈를 복창하면서 정작 미술은 손 놓고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이 형국은 아들(딸, 청년, 청춘, 젊은, 신진 등 그 지시어가 무엇이든)이 자신의 의지 대신 아버지(어머니, 중년, 노년, 늙은, 중견, 원로, 기득권 등등)의 욕망에 이끌려 아버지의 목을 치는 체 하면서 아버지의 사랑 받는 옆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노파심에서 부연하건대, 여기서 아버지는 라캉의 ‘대타자’ 혹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개념과 같다). 현재 한국 미술계에서 미술의 새로운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사회에서 말하는 의미의 잉여가 전혀 아니다. 그런 자기 욕망의 당사자 말고, 정작 발화도, 행동도, 무엇보다 세대 너머 체재를 전복할만한 야심 찬 작업도 직접 수행하지 못한 채 이슈로 서로를 묶는 이들이 잉여 상태에 빠져 보인다. 게다가 그런 이들은 정작 자신이 속한 세대의 대다수 구성원들과 공감 및 연대는 고사하고 말하자면 스스로를/ 그들을 ‘왕따’ 시킴으로써 세대교체의 동력조차 없애버린 것 같다. 이를테면 특정 미술대학 출신이 아니고, 미술계의 누구와 어디가 영향력이 있는지 뒤쫓는 것보다 우선 미술을 계속할 것인가부터 해결이 안 나 고민이며, SNS 상에서마저 제 목소리를 낼 틈을 못 찾고 있고, 특정 취향 그룹의 크고 작은 위세를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떠안고 있는 대다수 침묵하는 예비/무명/주변 미술가들이 진짜 청년세대의 실체다. 유행하는 퍼포먼스아트나 리서치 기반 미술과는 거리가 멀고, 요즘 대세인 협업을 하려 해도 스타일 좋은 디자이너 친구도 수완 좋은 기획자 친구도 없는 전국 곳곳에 박힌 미대 졸업생들이 우리가 고려해야 할 청년세대 전체다. 그 청년세대 구성원들의 진정한 욕망이 평소 튀는 언변과 취향의 동년배 일부가 모창 하듯 따라 외치고 있는 “그럴듯한 기회와 장소”(《한겨레21》 위와 같음)는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상황이 이렇게 흘렀던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한국 현대미술 지형과 지세에 어떤 변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느낀 2013년경으로 시계를 돌려보면 분명 새로운 주체가, 자신들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사고, 감각, 취향, 판단에 따라 만든 자신들의 환경에서 새로운 미술을 시도했다. 예컨대 ‘시청각’과 ‘커먼센터’는 기성미술제도에 편입하는 대신 독립된 전시공간을 꾸려 자신들의 미적 지향 및 취향에 부합하는 미술을 기획전 형태로 제시했다. ‘문래동창작예술촌’이나 ‘남서울예술인마을’은 문화예술의 핫스팟 대신 공장지대나 변두리동네 안에 자리 잡은 채 삶과 예술의 실증적 공존가능성을 보여줬다. 일군의 아티스트, 큐레이터, 디자이너, 엔지니어 등이 공동 창업하고, 공간을 공유하며 다원적이고 집합적으로 창작-생활하는 형식으로서 그 사례들은 청년미술세대의 특성과 성과를 예표 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청년미술세대의 실체는 자신들이 나서서 미완/미생으로 평가 절하하거나, 제도권 미술관의 구성원 또는 “한국 미술계를 빛낸” 인물 등으로 전이하면서 보다 현실적인 목표가 설정됐다. 그것이 앞서 살핀 바 기성미술제도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서 일정 지분(쿼터)을 얻어낸다는 것이다. 불과 2년이 채 안 되는 이전에, 리슨투더시티의 작가 박은선은 다음 인용문처럼 당당하게 독립적 창작 시스템을 제시했다. 그런데 어떻게 분명 이 작가와 같은 세대에 속하는 젊은 세대의 일부는 오늘 여기서 시니컬하게 자신을 ‘잉여’라고 부르며, 공적 제도에 자신을 의탁하려 하는 것일까.
“독립적인 기금의 구축은, 국가와 기업의 패러다임에 휘말리지 않는 방법은 가능한가를 묻는 존재론적 실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실험은 개인의 우수함보다 집단적으로, 지역을 기반으로 실험해야 한다. 설사 그 방법과 규모가 보잘 것 없이 작다 하더라도 국가내부의 담론 안에 안주하는 큰 기관보다 다양하고 단단한 기반을 다질 수 있다.”-리슨투더시티 박은선, <미술 독립기금 구축하기>, 《미술생산자 모임 자료집》, 2013, p.49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HOT PEOPLE 《나의 미술기자 시절》 출간한 1세대 미술 언론인

‘거북이 기자’의 미술 인생

 

이구열의 《나의 미술기자 시절》이 지난해 말 출간됐다. 이구열에 대한 설명으로 ‘한국 최초의 미술기자 이구열의 취재 노트’란 부제는 더할 나위 없다. 회고록을 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주위의 권유로 소일거리 삼아 기자 시절 쓴 기사와 이후 저작의 중요부분을 발췌해 묶었다. 또한 각 글이 쓰인 배경과 이후의 상황 묘사를 덧붙여 기사와 관련된 미술계의 논의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매일같이 사무실에 출근해 자료를 정리하고 ‘독수리 타법’으로 틈틈이 써온 글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번 책이 오래전 일들을 회고하며 적어 내려간 글임에도 불구하고 필력이 생동하는 까닭은 고령에도 글쓰기를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구열은 기자시절부터 기사 말미에 자기 이름 중간 글자를딴 ‘龜’를 넣어 종결지으면서 일찍이 ‘거북이 기자’, ‘거북 씨’로 불렸다. 1959년 미술기자 활동을 시작해 1973년 기자 생활을 마감하면서 연구소를 차리고 미술비평을 해온 ‘거북 씨’의 글은 한 사람의 인생이자 한 시대의 증언으로 읽힌다.
“미술 전문기자 1세대”라는 타이틀은 늘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지금이야 미술계의 원로로서 명성을 갖지만 미술 저널리스트로서 첫발을 내디딜 당시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선배 세대의 모델이 없기 때문에 그의 모든 행보는 늘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미술 전문기자가 전무하던 시기에 그의 기사는 미술 전문가와 애호가들에게 단비와 같아서 자연히 기사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미술계의 좌표가 서서히 다져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기자, 비평가, 연구자의 일에 뚜렷한 구분이 없었다. 각자의 직업에 따라 기록의 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미술에 대한 기록자이자 연구자로서의 사명감과 전문성에는 차이가 없었다. 저널리스트로서 이구열은 기사에 전문성을 부여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또 기록했다. 그는 현장에서 작가, 이론가들과 만나며 보고 들은 것을 사소한 부분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에는 미술인들의 흔한 일상적 대화였지만 이렇게 모인 기록은 현재 한국 근현대미술의 귀중한 아카이브 자료가 됐다. 또한 국내 미술전문 매체가 전무한 상황에 해외 미술의 경우는 아쉬운 대로 신문사에서 구독하는 잡지 《타임》, 《뉴스위크》, 《라이프》 등에 간간이 실리는 예술기획기사를 면밀히 살피는 것으로 대신했다. 타고난 정보욕과 자료욕으로 자료를 필기하고 기사 스크랩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2001년 설립된 삼성미술관 리움의 ‘한국미술기록보존소’는 그가 기증한 약 4만여 건의 자료와 책을 근간으로 삼았다고 할 정도다. 1975년부터 그가 운영하고 있는 한국근대미술연구소도 귀중한 자료가 겹겹이 포개져있는 정보의 보고다. 미술평론가 이일의 사라진 원고에 대한 일화는 그의 넘치는 자료를 반증한다.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미술을 전담하던 시절 그는 편집 진행부터 디자인까지 전 과정을 혼자 담당하는 미니 미술잡지 《미술》을 창간했다. 제2호를 준비하면서 미술평론가 이일이 파리에서 유학 중이란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는 일면식도 없던 이일에게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 미술계 동향을 정리한 글을 청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어렵게 원고를 받았으나 애석하게도 《미술》은 5·16군사정변 이후 위태로워진 출판사의 경영난으로 더 이상 지원을 받지 못했다.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사무실에 두었던 이일의 원고는 수많은 자료와 뒤섞여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2007년 우연히 사무실의 한 캐비닛에서 사라졌던 원고가 발견되었다. 그 원고는 같은 해 《미술평단》의 ‘이일 추모 호’에 게재됐다. 40년이 훌쩍 넘은 후에야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일의 자료에 얽힌 사연만큼이나 《미술》 자체는 큰 의미를 지닌다. 비록 창간 즉시 사라지는 비운의 숙명을 맞았으나 우리나라에서 미술 전문잡지를 시도한 첫 사례로 볼 수 있다. 주목되는 부분은 잡지의 구성이다. 최순우, 김원룡, 이경성, 조희룡 등 당대 최고 전문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했고 고미술부터 현대미술, 해외미술 동향을 기사화했다. 특히 인상적인 기획으로 이구열은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화를 그린 춘곡 고희동과의 인터뷰를 꼽는다. 열흘 가까이 진행된 특별 인터뷰는 고희동의 살아생전 유일한 증언으로 남았다. 한국미술사의 중요한 아카이브인 것이다.
그는 미술기자를 그만둔 이후 지금까지 미술 언론인이자 비평가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미술에 대한 안목은 선택의 문제다. 그 선택은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인정받고 평가 받을 수 있는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설사 동의하지 않는 독자가 있더라도 감수하고 기자 개인의 뚜렷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끝없이 공부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보충해 나아가야 한다”며 미술 전문 언론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언했다. 비단 미술기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미술계의 모두에게 전하는 원로의 충고다.
임승현 기자

이 구 열 Lee Guyeol
1932년 태어났다. 1959년부터 1973년까지 민국일보사, 경향신문사, 서울신문사, 대한일보사에서 미술기자로 재직했다. 예술의전당 전시사업본부장, 문화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근대한국미술의 전개》 《한국문화재수난사》 《나혜석-그녀, 불꽃같은 생애를 그리다》 등 활발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2014년에는 《나의 미술기자 시절》을 발간했다. 1975년 한국근대미술연구소를 세우고 약 40년 동안 미술계와 문화재 발굴 현장의 중요내용을 기록해왔다.

HOT PEOPLE 2015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 문경원&전준호

두 작가가 보는 예술의 미래

올해로 56회를 맞이하는 <베니스비엔날레>가 5월 9일부터 11월 22일까지 열린다. 1895년 첫 대회를 개최한 이후 비엔날레의 꼭대기에서 한 번도 내려온 적 없는 <베니스비엔날레>에 전 세계 미술인의 시선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한국관 출품 작가로 선정된 문경원 전준호 작가에게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
두 작가를 만나기 위해 통의동 작업실을 찾았다. 당장 다음 주부터 촬영을 앞두고 있어 두 작가는 물론 스태프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느껴졌다. 커미셔너와 비엔날레 개막 전에 작품에 대해 함구하기로 협의한 바가 있어서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말할 수 없다고 기자에게 양해를 구한 두 작가는 그래도 출품작의 큰 맥락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카셀도쿠멘타>(2012)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의 작품이 나올 겁니다. 카셀 때는 분리된 두 개의 화면이 예술의 탄생과 종말, 그 사이를 증거했다면 이번에는 예술행위를 통해 자아를 깨닫고 존재를 증명하고 창의성을 갈망하는 내용을 담을 예정입니다.” 큰 틀은 카셀 때와 맥락을 같이하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과 형식은 큰 차이를 보일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또한 타 분야 인사들과 협업했던 방식은 시나리오에 녹여서 보여줄 예정이라고. 따라서 영상 안에 두 작가의 예술에 대한 인식이 이벤트처럼 숨어 있다고 귀띔했다. “주인공이 자기의 존재를 전혀 모르다가 창의의 발현에 의해 기쁨을 느끼게 되죠. 이로써 자신이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 증명하면서 미래를 기약하는 내용입니다.”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은 개관 20주년을 맞이했다. 이에 따라 두 작가의 참가가 더욱 주목받는다. 커미셔너를 맡은 이숙경 테이트모던 큐레이터는 “미술의 영역을 확장하고 많은 관객과 소통이 가능한 장점을 잘 살려내는 작업을 기획할 것”이라고 두 작가 선정 배경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두 작가는 “카셀 때 시도한 협업이 어떤 결과를 향해 가는 단계였다면, <베니스비엔날레>에서는 지금까지의 결과를 보고 다음 단계를 기대하는 큐레이터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8년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가 총감독을 맡은 이번 <베니스비엔날레>는 ‘All the World’s Futures’를 주제로 내걸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안한 양상에 대한 작가들의 인식을 듣는 자리가 될 것이다. 주제가 발표되기 전에 이미 ‘미래’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던 두 작가는 자신들의 작업 콘셉트와 연결되는 주제라 반가웠을런지도.
그들은 개인작업에도 몰두해야 한다. 현재 비엔날레를 준비하고 있지만 최근 개인전을 열었거나 진행 중이다. 흥미롭게도 이 두 작가는 상대의 전시와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느낀 바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문 작가는 지금 YCAM(Yamaguchi Center for Arts and Media, 2014.11.1~ 1.11)에서 <Promise Park>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붕괴된 사회문명, 남아 있는 자들이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고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프로젝트입니다”(전준호) “지난번 개인전(<그의 거처전>, 갤러리 현대, 2014.8.29~2014.9.28)에서도 발견했지만 전준호 작가는 자기 성찰과 고민을 작업뿐만 아니라 글에서도 굉장히 명료하게 드러내죠. 수공(手功)을 들여 이룩한 작업을 통해 예술적 실천을 실현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문경원) 의견이 충돌하면 서로 말도 안한다고 하지만 이렇듯 협업뿐만 아니라 각자의 작업을 통해서도 서로에게 자극을 주는 두 작가다. “문 작가는 삶을 보고서처럼 보고, 전 작가는 소설처럼 봅니다”라고 농담처럼 서로를 비평한다. 그러면서 서로를 통해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볼 수 있었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는 덕담도 잊지 않았다. 6년여 협업을 지속할 수 있었던 동력에 대해 “운 좋게도 계속 그럴 수 있게 계기가 마련돼서”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두 작가는 시카고와 취리히 등지에서 온고잉(ongoing) 형태의 프로젝트를 지속한다. “저희의 의지로 그만두자고 할 상황이 아닙니다. 마치 물에 따라 흘러가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그들의 협업과 개인작업 이 삐걱대지 않고 지속되는 이유는 바로 부지런함에 있다.
오는 5월. 그들의 작품을 베니스에서 보게 될 전세계 관람객은 무슨 질문을 받을지 궁금하다.
황석권 수석기자

전준호  나무 거울 책 31(H)×70(W)×116(L)cm, 35(H)×480×415.6cm(좌대), 2012~14

전준호 <마지막 장인> 나무 거울 책 31(H)×70(W)×116(L)cm, 35(H)×480×415.6cm(좌대), 2012~14

 문경원  YCAM 전시광경 2014

문경원 < PROMISE PARK > YCAM 전시광경 2014

문 경 원 Moon Kyungwon
1969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의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석사학위를, 연세대 영상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을 비롯 일본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국내외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 준 호 Jeon Joonho
1969년 태어났다. 동의대와 첼시 미술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 일본,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10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국내외 주요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내일의 작가상’(성곡미술관, 2001), ‘올해의 작가상’(국립현대미술관, 2012), ‘눈 예술상’(광주비엔날레재단, 2012), ‘멀티튜드 아트 프라이즈’(UCCA 베이징, 2013) 등을 수상했다.

HOT ART SPACE

백남준 개인전
학고재갤러리 1.21~3.15
<W3>로 명명된 이번 전시는 2014년 하반기에 열린 항저우 삼상현대미술관과 학고재상하이 전시에 출품된 12점의 작품을 모았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인 <W3>은 ‘World Wide Web’에서 따온 것으로 1974년 이미 전자 초고속도로를 제시한 백남준의 예언과도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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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이프_플로베르 (1)

플로베르의 침묵
갤러리 스케이프 1.7~2.24
고명근 김승영 유영진 이혜승이 참여한 이 전시는 모호하고 비서술적인 시각성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분명하게 표명하기 어려운 이면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 자체로서 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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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60

the SEOUL
가회동60 1.16~27
권인경 박능생 박영길 조풍류 4인의 동양화가가 그린 서울의 풍경 작품을 모았다. 특히 서울의 산에서 바라본 도시 풍경을 4인 각각의 파노라마 형식으로 담아내 작가별 시선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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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모색 (4)

젊은모색 201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12.16~3.29
18회를 맞은 <젊은모색전>의 출품작가는 권용주 김도희 김응용 김하영 노상호 윤향로 오민 조송이다. 오늘날 피폐한 환경에 놓인 젊은 세대의 고민과 현실이 각 작가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작품에 반영됐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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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 (1)

2014 금호 영 아티스트
금호미술관 2014.12.19~1.25
곽이브 백승현 장종완 황지윤이 참여한 이번 전시는 각 작가의 개인전 형태로 꾸며졌다. 2004년부터 시작된 ‘금호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은 공모 형식으로 작가를 발굴, 소개하는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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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블럭 (3)

2015 Portfolio for Future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12.19~2.22
김병진 김승민 김유나 김현수 윤여선 이민영 정진아 지혜진 진철규 호상근 황효덕 Gemma Hisataka가 참여한 신진작가전. 평면, 조각, 영상, 설치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오늘날 젊은 작가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SIGHT & ISSUE Hello! 2015 Good Bye! 2014

2015년을 시작하며 2014년 미술계를 정리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주목해야할 전시’와 ‘젊은 세대’, ‘미술 시장’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본다. 먼저 2015년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가 발표한 전시 라인업을 통해 올해 눈에 띄는 이슈와 전시를 짚어본다. 이어 지난해 연말부터 대두되고 있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예술활동과 공간 문제 관련 새로운 움직임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2014년 미술시장의 흐름을 결산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2015년 주요 전시 길라잡이

이슬비 기자

지난 2014년은 세월호 사건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침체된 가운데 미술계에서도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았다. 먼저 짝수연도인 비엔날레 해를 맞아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성격의 비엔날레가 동시 다발적으로 열렸다. 특히 테이트 모던 큐레이터 제시카 모건이 이끈 <광주비엔날레>와 작가 박찬경이 기획한 <미디어시티 서울>의 경우 감독의 특성이 잘 반영된 전시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비엔날레의 전시의 질을 떠나 행사 운영 및 진행에 따른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광주비엔날레의 경우 창설 20주년 특별전에서 작가의 작품이 철거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이 일은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 사퇴로 이어졌다. 부산비엔날레의 경우 감독 선임 문제를 둘러싸고 우여곡절 끝에 ‘제도개선위원회가’ 발족돼 장기적인 개선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또한 지난해는 국공립 미술관 관장 자질론이 유난히 많이 거론되었고 결정적으로 정형민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직위 해제되는 불명예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2011년 최고경영자 출신 배순훈 관장이 돌연 사퇴한 데 이은 정 관장 직위 해제 사태를 계기로 한국 대표 미술관 수장 자질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가 공론화될 필요성이 제기됐다.
올해는 국내 비엔날레가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간다. 비엔날레 측은 전시 수준뿐 아니라 행사 운영 방식에도 힘을 쏟아야 할 시기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 해가 지나가고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에서 2015년 미술관과 갤러리 주요 전시 라인업이 발표되었다.
현재까지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공개한 전시 라인업을 살펴보았을 때 단연 눈에 띄는 이슈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남북한 문제와 분단 현실을 다룬 전시들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는 야심 차게 <북한(가제)전>(7.21~9.27)을 준비하고 있다. 북한을 주제로 작업하는 국내외 작가들과 북한 출신 작가들의 작품, 북한의 우표, 포스터, 선전물 등의 수집품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미술관 측은 “현재 북한 측과 직접적인 교류채널을 확보하려고 노력 중이며 제대로 성사된다면 만수대창작사 소속 북한 작가들의 작품을 공식적으로 선보이는 최초의 전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공석으로 남아있는 관장 선임 문제로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은 덕수궁관에서 7월부터 10월까지 월북작가 <이쾌대전>을 개최한다. 초기 습작부터 6・25전쟁 포로수용소 시절까지 대표작을 망라해 리얼리즘 미술의 대가 면모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2011년부터 해마다 <리얼 DMZ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는 아트선재센터는 올해에도 8월부터 10월까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또한 분단 이후 60년간 남북한 건축의 양상을 다방면으로 조명한 건축가 조민석 기획의 <한반도 오감도전>이 3월부터 5월까지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다. 이 전시는 2014년 제14회 베니스건축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의 쾌거를 이룬 바 있다.
상반기에는 미디어아티스트 거장들의 전시가 연이어 개막해 꼭 보아야 할 전시들로 손꼽힌다. 2016년 10주기를 앞두고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1932~2006)을 제대로 조명하려는 추모 열기가 벌써부터 뜨겁다. 1월 21일부터 3월 15일까지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는 백남준전 <W3>을 시작으로,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1월 말부터 백남준 추모 9주기를 맞아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텔레비전이라는 키워드에 맞춰 소장품 중심으로 구성한 전시 <TV는 TV다>와 백남준의 실험적인 예술 정신을 계승하는 국내 신진작가의 신작 전시<2015 랜덤 액세스>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11월 영국 테이트모던에서는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로 선정된 이숙경 큐레이터가 기획한 소장품 중심의 백남준전이 열려 세계적인 주목을 받을 예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는 국내 비디오아트 선구자인 박현기(1942~2000)의 개인전(1.27~5.25)이 열려 그의 예술세계를 총망라한다. 2012년 미술관에 기증된 박현기 아카이브 약 2만 점 중 상당 부분이 미술계에 최초 공개되는 만큼, 그의 미술사적 위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국제갤러리에서는 백남준의 제자이자 현대미술의 영상 시인이라 불리는 빌 비올라 전시가 3월부터 5월까지 준비돼 있다. 11월 말에는 혁신적인 영상으로 20세기 최고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미국의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전>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 열린다.
지난해 남성 원로 작가와 중견 작가들의 활약이 돋보였다면 올해에는 여성 작가들의 굵직한 전시와 페미니즘 전시가 다수 포진해 있다. 선두주자는 국내외에서 활발한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 양혜규의 전시(2.12~5.10)이다. 2012년에 열린 서도호의 전시 이후 삼성미술관 리움이 두 번째로 마련한 한국 현대미술가의 대규모 개인전이다. 초기작부터 인조 짚을 재료로 한 신작까지 국내에서 활동이 뜸했던 양혜규의 작업 전반을 살펴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 열리는 한국 여성주의미술의 대모 윤석남의 개인전(4.21~6.28)은 초기작과 대표작을 비롯해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성 위인을 주제로 한 최신작을 소개한다. 버려진 파편으로 도자기 조형물을 만드는 작가 이수경은 올해 2월부터 5월까지 대구미술관과 9월부터 11월까지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두 번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12월에는 플라토에서 한국 역사의 상처를 재조명하는 작가 임민욱의 개인전이 잡혀 있다. 이밖에 국제갤러리에서는 6월 북한 주민의 수공 자수회화 신작으로 구성된 함경아의 개인전과 yBa 멤버이자 미술계 악동으로 잘 알려진 트레이시 에민의 개인전을 12월에 개막한다. 그리고 6월 소마미술관에서 열리는 <프리다 칼로전>도 기대해볼 만 하다. 코리아나미술관에서는 5월부터 7월까지 규범과 경계를 가로지르는 저항적 제스처로서, 위계와 권위 해체하는 급진적 행위로서의 페미니즘 퍼포먼스에 관한 국제 기획전 <Radical Gestures>를 연다. 국내외 여성 안무가 및 퍼포먼스 아티스트 15여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9월에는 동아시아 지역 페미니즘 미술의 현재와 의미를 조명하는 <FANTasia : 아시아 페미니즘전>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 소개된다.
또한 올해에는 국외 유명 작가들의 전시가 즐비하다. 먼저 이탈리아 조각의 거장 노벨로 피노티의 대규모 회고전(2.28~5.17)이 서울미술관에서 개막을 앞두고 있다. 놓치지 않고 봐야 할 전시로 철학·문학·영화·연극·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에 기반을 두고 조형적 실험을 펼쳐온 작가 윌리엄 켄트리지의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12.1~2016.2.28)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준비 중이다. 2012년 양현미술상 수상자이자 멕시코의 대표적 개념미술 작가인 아브라함 크루즈비예가스(4.18~8.2)와 2014년 백남준미술상 수상자인 파키스탄계 영국인 작가 하룬 미르자(10.15~2016.2.14)의 개인전이 각각 아트선재센터와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다. 대구미술관에서 준비한 나이지리아계 영국인 작가 잉카 쇼니바레의 개인전(5.30~10.18)도 눈여겨볼 만하다. 2014년 런던 프리즈 마스터즈에서 주목을 받은 일본 작가 우에마쓰 게이지의 개인전이 4월부터 6월까지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에서 개최된다. 성곡미술관에서는 재중교포 최헌기(추이셴지)의 국내 최초 회고전(3.6~5.31)을 기획하고 있으며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는 4월에 인도네시아 출신 여성작가 크리스틴 아이 추의 개인전을 선보인다. 이들 대부분은 국내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으로, 국제적으로 활발한 행보를 보였으나 그동안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서구권 작가들의 개인전이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한편 고미술 분야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전시가 많다. 용산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지 올해 10주년을 맞는 국립중앙박물관은 불교미술에 집중한 전시를 대거 선보인다. 그 중에서 기획특별전으로 준비한 전시는 <고대불교조각대전>(9.24~11.15)이다. 불상의 탄생부터 시작해 한국, 미국, 유럽, 일본, 중국의 18개 기관에 소장된 불교조각 명품 150여 점을 공개한다. 리움에서도 두 개의 고미술전이 마련돼 있다. 한국미술의 정수 가운데 세밀함의 특징을 지닌 작품들을 내세운 <세밀가귀細密可貴 한국미술의 품격전>(7.2~9.13)과 한국전통건축을 관련 사진과 영상, 고미술, 관련모형, 도면, 아카이브 등을 통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국전통건축예찬전>(11.12~2016.2.7)이 그것이다. ●

양혜규  2011 (Courtesy of Kukje Gallery)

양혜규 <성채> 2011 (Courtesy of Kukje Gallery)

윌리엄 켄트리지  2012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인전 예정)

윌리엄 켄트리지 <시간의 거부> 2012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인전 예정)

맨위 우고 론디논 <Where Do We Go From Here> 1999(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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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감소의 시대를 맞은 ‘잉여’의 집단 대응

안대웅 유능사 일원

연초 벽두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전시공간의 기지개가 심상치 않다. 1990년대 후반 대안공간 설립 붐 이후 실로 오랜만에 감지되는 활기다. 사실 그 사이에도 수없이 많은 전시공간이 생성과 소멸을 겪었다. 하지만 작금의 사정이 조금 달리 보이는 건, 비단 공간 운영자의 평균 연령이 대폭 낮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28일 유능사(안대웅, 최정윤) 주최로 교역소에서 열린 촤담회 ‘안녕 2014, 2015 안녕?’은 새롭게 짜이는 판형을 약소하게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자리였다. 이 좌담회에서 흘러 나온 이야기를 토대로 어떤 점이 이런 새로운 공간에 특이성을 부여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들의 계획은 무엇인지 점검해보자.
이날 가시화된 젊은 공간의 제 모습은 확실히 익숙한 성격의 것이 아니었으며, 형태적으로도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형태의 공간이 이른바 ‘기대감소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불황의 국면에 어떻게든 반응한 결과라는 점은 분명했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미래보다 현재 주어진 현실적 상황에 충실하자는 태도–즉 지속적인 공간의 운영보다, 당면한 사태가 문제시되는–역시 대략 공통적이었다.
가령 상봉동에 위치한 ‘오픈베타’ 공간 반지하는, 관리자1 돈선필에 따르면, “어떤 작업공간이 부재하다”는 상황 인식으로부터 탄생한 공간이라고 한다. 따라서 반지하는 작업실과 전시장의 중간 형태를 표방하며, 간섭을 최소화해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내 작업실 같은 환경’을 조성/공유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돈선필에 따르면, 부담을 극소화하기 위해서 모든 작가를 익명 처리한다고 한다.) 반지하가 일견 기대감소의 시대에 완벽히 적응한 코쿤형 공간으로 보인다면, 그 인근에 위치한 교역소의 ‘이벤트’는 한 순간을 불태우는 카니발이라 할 만하다. 총 33개의 팀이 4일간의 공연과 상영, 강연을 릴레이식으로 이어간 오픈 이벤트 <상태참조>는 SNS상의 타임라인 모습을 실제 공간에서 의태하고 반복하며, 공통의 세대적 감각을 확인하는 시간성을 순간적으로 직조/창출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역소의 운영자 중 한 명인 정시우는 “주어진 공간과 시간, 경제적인 제약 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려는 노력”이라고 그들의 기획을 설명했다. 이런 독특한 방식의 미술-사건 존재론을 미술평론가 임근준은 “기회 특정성”이란 말로 해설하기도 했다.
한편, 황학동 벼룩시장에 위치한 케이크갤러리의 경우, 낙후한 중앙상가 건물 주인이 건물 두 개 층을 예술가에게 레지던시로 내준 것이 발단이 되어, 전시공간으로 변모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큐레이터 윤민화는 레지던시가 전시장으로 바뀐 이유 중 하나로 “젊은 큐레이터를 위한 오픈 플랫폼”의 필요성을 꼽았다. 그에 따르면 작가와 마찬가지로 요즘은 기획자 또한 공모전이란 관문 없이는 전시가 불가능한데, 케이크의 경우,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 기획안을 펼치고 싶은 큐레이터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2013년 이후 케이크의 전시를 맡게 된 윤민화는 신진작가 개인전 기획과 함께, 황학동의 장소특정성을 유의미하게 활용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여러 방면으로 실험 중이다.
시청각과 커먼센터는 젊은 세대의 새로운 입지점으로 이미 잘 알려진 공간이다. 현시원과 함영준은 공통적으로, 전시할 마땅한 공간을 찾는 일에 어려움을 겪던 중, 우연한 기회에 공간을 얻은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오게 됐다고 한다. 두 공간은 전시장 컨디션의 제약(시청각의 한옥, 커먼센터의 대규모 폐허)을 제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하며, 기존에 흔히 볼 수 없었던 콘셉트의 기획전을 개최해 관심을 끌어 왔다. 특히 <오늘의 살롱전>(커먼센터)과 <구동희전>(시청각)은 당대의 시각(간)성에 관해 질문을 던진 전시로 호평을 받았다.
올해의 계획으로 빠르게 넘어가자. 반지하는 (지금까지 하던 대로) 2015년 10월까지 스케줄이 꽉 잡혀있다고 했다. 또 교역소는 4월쯤 <상태참조> 이벤트와 비슷한 종류의 릴레이전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케이크갤러리는 상반기에 압구정 코너아트스페이스 등 생경한 장소에 위치한 미술 공간들과 연합전시를 준비하고 있으며 하반기에 작가 김민의 개인전과 큐레이터 노해나의 기획전이 예정되어 있다고 전했다. 한편 시청각은 상반기에 학교를 주제로 한 기획전과 잭슨홍의 개인전을 준비 중이며, 하반기에는 외부 기획전이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커먼센터는 2월 말경 경향하우징페어에 맞춰, 가구를 주제로 큐브 아트페어를 오픈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또한 젊은 작가 집단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밝히는 데이터베이스 지도 작업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좌담회에서 언급되진 않았지만, 그밖에 다양한 움직임이 존재한다. 한남동에 자리 잡은 구탁소는 예술가와 일반 직업인이 협업하는 형태의 프로젝트를 1월 말부터 가동하고 있으며, 창신동에 위치한 사진전문 갤러리 지금 여기는 3월에 ‘높이’를 주제로 개관전을 열 생각이다. SNS상에서는 모이고 흩어지며 컬렉티브형 모임, 전시/이벤트, 좌담 등을 조직하고 공유하는 움직임이 심심찮게 포착되곤 한다.
한편 이런 공간들의 현존은 그 자체로, 현 미술 제도의 가시권에서 무엇이 배제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기 마련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좌담회에 참관한 로커 오도함과 미술애호가 구슬의 제안에 힘입어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으로 구체화되었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 미술 제도 개선에 관한 다양한 의제가 광범위한 층위에서 계속 논의되고 있다. 트위터 검색란에 ‘#청년관을위한예술행동’을 쳐보자. ●

 2014년 12월 교역소에서 열린  행사광경

2014년 12월 교역소에서 열린 <상태참조> 행사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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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미술시장 결산: 회복의 청신호

서진수 강남대 경제학과 교수, 미술시장연구소 소장

2014년 미술계와 미술시장은 봄의 세월호 참사로 전시와 행사가 연기되거나 중단되었지만 가을 들어 주요 행사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국내외에서 유명 작가 전시가 빛을 발한 한 해였다.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리움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전 등 국내의 대형 미술행사가 한꺼번에 열려 안복도 누렸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잠깐 조명이 밝았던 2010년을 제외하고는 6년 내내 조도도 낮고 노면도 고르지 못했던 미술시장도 긴 침체의 터널에서 빠져나와 오랜만에 햇빛을 보았다.
화랑에서는 중견작가와 원로작가 전시가 재개되고 해외작가 초대전도 하나둘씩 늘어났다. 화랑들이 역사보다 판매 규모가 크고 역동성이 높은 아트페어를 선택하여 참가하고, 비용 부담으로 주저하던 해외 아트페어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근현대미술품 전문 경매시장은 6월 메이저 경매부터 시장의 호조를 상징하는 낙찰총액 40억 원대에 진입해 연말까지 그 추세를 이어갔다. 2014년은 대형 미술행사가 몰리고 미술시장이 서서히 회복 징후를 보인 한 해였고, 그 중심에는 단색화 열풍이 자리 잡고 있었다.
판매 실적에 대한 부담으로 가격이 높은 중견작가와 원로작가 전시를 미뤄온 화랑들이 서서히 초대전과 기획전을 열기 시작했다. 미술시장 주체들이 양도소득세 과세에 적응하면서 불황기의 사업 재정비와 불황 탈출을 위한 자구책 시도 등 적극성을 보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2014년 문화계 전반에 걸쳐 확산된 ‘복고’열풍과도 맞아떨어진 <한국근현대회화 100선전>과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 등이 미술시장의 회복을 도왔다.

1차시장 화랑의 중견・원로 작가 전시 재개, 아트페어의 재편
주요 갤러리들이 백남준, 오승윤, 이승택, 김구림, 정상화, 곽인식, 윤명로 등 원로 생존작가와 작고작가 기획전, 초대전을 개최하여 미술시장 부활을 선도했다. 그리고 조현화랑의 단색화 작가 전시인 <Working with Nature>, 리안갤러리의 키키 스미스, 노화랑의 오치균, 페이지갤러리의 안창홍, 아트사이드의 오원배, 그리고 페리지갤러리의 김기라, 권오상, 홍경택 등 중견・청년·해외 작가의 전시가 미술시장 회복에 힘을 실어주었다. 화랑의 판매가 크게 체감할 정도로 호전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5년간에 비해 전시에 대한 의지가 살아난 것은 확연히 드러났다.
2014년 아트페어 역시 활기를 띠었다. 결과가 공개된 8개 아트페어를 관람한 인원이 30만 명에 달하고, 판매총액도 446억 원을 넘어 2010년대 들어 300억 원대에 머물러있던 한계를 뛰어넘었다. 이외에도 <G-Seoul>, <마니프>, <서울아트쇼>, <대전국제아트쇼>, 부산의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
<BFAA 국제아트페어>, <부산국제아트페어>, 그리고 대학생들이 참가하는 <아시아프>와 <카우지> 등 20개가 넘는 아트페어가 전국적으로 개최되어 2014년 한 해 많은 관람객이 미술시장을 찾아 미술품을 구매했다.

경매시장도 회당 낙찰총액 40억 원 넘어
집계된 7개 경매회사의 낙찰총액이 918억6,600만 원을 기록하는 등 경매시장이 완만한 U자를 그리며 회복세를 보였다. 미술품 경매시장 규모는 2010년과 2011년의 900억 원대에서 2012년과 2013년 내리 하락세를 보였다가 2014년 다시 900억 원대로 상승했다. 서울옥션의 국내경매가 낙찰가 기준 2013년 243억8,661만 원에서 2014년 279억8,046만 원으로 15% 증가하고, 해외경매가 149억3,075만 원에서 138억752만 원으로 8% 감소해 전체적으로 6% 증가했다. K옥션의 국내경매는 2013년 188억1,713만 원에서 2014년 303억6,013만 원으로 61%나 증가했다.
고미술 전문회사인 마이아트옥션은 288점 낙찰에 낙찰총액이 83억4,590만 원에 달했고, 아이옥션은 1,568점 낙찰에 낙찰총액이 56억9,376만 원에 달했다. 두 회사 모두 낙찰총액이 2013년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그리고 에이옥션은 1,486점 낙찰에 낙찰총액이 23억3,280만 원, 온라인 경매를 주로 하는 아트데이옥션은 823점 낙찰에 낙찰총액이 17억2000만 원, 옥션단은 662점 낙찰에 낙찰총액이 16억2,538만 원에 달했다.
양대 메이저 경매회사인 서울옥션과 K옥션의 여름경매가 1회당 낙찰총액 40억 원을 넘었고, 가을경매가 70억 원대, 그리고 겨울경매가 60억 원대를 넘어 경매시장의 회복세를 보여주었다. 경매회사들은 지난 5년간 비용 절감을 위해 온라인 경매를 확대해왔으며, 그 결과 2014년에 온라인 시장이 크게 확대되었다.
국내 작가들이 10년 이상 참가하고 있는 크리스티 홍콩 경매의 우리 작가 낙찰총액도 커졌다. 봄경매에서는 45점 중 36점이 팔려 낙찰률 80%, 낙찰총액 44억3,635만 원을 기록했고, 가을경매에서는 31점 중 28점이 팔려 낙찰률 90%, 낙찰총액 65억5,664만 원을 기록했다.

단색화 열풍의 무한 질주
2014년 미술시장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1970~1980년대에 등장한 단색화였다. 7월 한 달간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정상화전>과 8월 말부터 50일간 계속된 국제갤러리의 <단색화의 예술전>은 2014년 전시 중 단연 핫이슈였다. 단색화 열풍은 아트페어에서도 나타났다. 9월에 열린 국내 최대 미술품 장터 KIAF에서 9개 화랑이 선보인 단색화 작품은 박서보 13점, 윤형근 9점, 정상화 6점, 정창섭 5점, 하종현 3점 등 총 36점이었으며, 공급가액만 32억 원에 달했다. 아트바젤, 프리즈 마스터즈, 피악 등 해외 아트페어에서도 단색화 작품의 판매가 호조를 보였다.
단색화 열풍을 수치로 확연히 볼 수 있는 곳이 경매시장이다. 서울옥션과 K옥션에서 낙찰된 단색화 작품이 3월과 6월 경매 때는 각각 12점과 10점에 불과했는데, 9월 경매에서 20점, 그리고 12월 경매에서는 35점으로 급증하고 12월의 낙찰총액은 9월 경매의 4배에 달했다. 낙찰률을 보면 정상화가 94%, 윤형근 84%, 박서보 81%, 그리고 하종현과 정창섭의 작품이 모두 팔려 단색화 작가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정상화의 거래가 급증하며 낙찰총액이 상승했는데, 국내뿐만 아니라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도 3점이 8억9,352만 원에 팔렸고, K옥션이 참가한 홍콩 UAA경매에서도 3점이 2억2,746만 원에 팔렸다.
크리스티 홍콩 가을경매에서도 이우환을 포함한 단색화 섹션이 신설되어 열기가 대단했다. 정상화와 윤형근의 낙찰액 합계가 7억6,261만 원에 달했다. 단색화 작가들의 국내외 전시가 잡혀 있고, 전속화랑 간, 그리고 경매회사 간 경쟁이 가열되고 있어 2015년에도 단색화 열풍과 변화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미술품 수출입은 전년대비 감소
미술품의 수출입은 2013년에 비해 다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관세청 미술품 수출입 통계에 따르면 2013년보다 수출이 39% 감소하고, 수입 역시 5% 감소했다. 총액만 발표하기 때문에 세부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전년에 비해 회화와 판화의 수출은 줄고 조각은 증가했다. 그리고 회화의 수입은 줄고 판화와 조각의 수입은 증가했다.

미술시장 회복기 펀더멘털 강화, 정부와의 협력 필요
2014년은 중견작가와 원로작가, 그리고 해외 유명작가를 중심으로 화랑 전시가 재개되고, 기존의 아트페어와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후원하는 신설 아트페어가 증가하여 경쟁 양상을 보였다. 미술시장에서 가장 먼저 경기 변동을 느낄 수 있는 경매시장이 낙찰률과 낙찰총액에서 모두 호전되어 미술시장의 회복을 알렸다.
2015년 미술시장 관계자들은 오랜 침체 후에 찾아온 경기 회복을 더욱 가열하고 호황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시장의 체계화, 전속작가제와 작가 관리 정착을 통한 신뢰성 제고, 작가와 딜러 육성, 비평 구축, 세계화, 시장 질서 준수, 그리고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나타난 작가 재조명과 단색화 이외의 미술운동 및 개별 작가 연구에 대한 투자와 출판 등을 통해 펀더멘털을 강화해야 한다. 투자 확대와 장기 투자를 위해 문화융성을 내세운 정부와의 협력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

서울옥션 경매 광경. 서울옥션과 더불어 한국 양대 경매회사인 K옥션의 회당 낙찰가 총액이 40여억 원을 넘었다. 사진 서진수

서울옥션 경매 광경. 서울옥션과 더불어 한국 양대 경매회사인 K옥션의 회당 낙찰가 총액이 40여억 원을 넘었다. 사진 서진수

 

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아라리오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아라리오의 실체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다양하기 때문이다.아라리오는 서울과 천안 그리고 중국 상하이엥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엔 아주 의미 있고 특색 있는 미술관을 연이어 개관함으로써 국내외에서 다시 이목을 끌고 있다. 아라리오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건축가 고 김수근의 옛 ‘공간’  건물을 매입해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라는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고, 제주도 구도심인 탑동 일대를 핫한 아트타운으로 재생시키는 뮤지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1989년 처음 갤러리 문을 연 이래 2002년 재개관하면서 거칠것 없이 진화하며 무한증식해 온 아라리오의 중심에 김창일 회장이 있다. 그는 현재 1인 4역의 삶을 살고 있다. 이와 같은 아리리오의 행보에 대해 이제 섣불리 개인의 호사스러운 취미 혹은 돈을 벌기 위한 갤러리 비지니스라고 단순하게 규정지을 수 없다.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그 존재감이 너무 커진 까닭이다
아라리오,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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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RIO MUSEUM jeju

탑동 시네마

이 건물은 1999년 제주에 처음으로 문을 연 복합영화상영관이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이 극장은 2005년 폐관된 이래 9년 동안 빈 건물로 방치돼왔다. 천장이 높은 극장 건물의 특성을 최대한 유지하는 동시에 콘크리트 구조의 건물 뼈대를 그대로 살려 대형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장환 Zhang Huan (왼쪽) 혼합재료 160×1070×520cm 2009

장환 Zhang Huan <영웅 No.2>(왼쪽) 혼합재료 160×1070×520cm 2009

수보드 굽타 Subodh Gupta   혼합재료 설치 110×2135×315cm 2012

수보드 굽타 Subodh Gupta<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What Does the Vessel Contains)> 혼합재료 설치 110×2135×315cm 2012

동문모텔 Ⅰ

제주 구도심의 상징인 동문시장과 제주항에 인접해 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뱃사람들이 머물던 여인숙과 여관, 모텔 같은 숙박업소가 밀집해 있던 지역이다. 항공교통 발달과 신도심 개발과 맞물려 이 일대 상권이 쇠퇴했다. 1996년 개천을 복개하고 생태환경을 복원하면서 서서히 활력을 되찾고 있다. 5층 규모의 모텔 객실과 부대시설 흔적을 간직한 채 다양한 현대미술 작품이 연중무휴로 상설 전시된다.

 Antony Gormley  206×88×77cm 동문모텔 1층 안내 데스크 옆에 놓여있다

Antony Gormley <우주의 신체들 I> 206×88×77cm 동문모텔 1층 안내 데스크 옆에 놓여있다

토니 아워슬러 Tony Oursler   2002

토니 아워슬러 Tony Oursler <제거(Eliminations)> 2002

탑동 바이크샵

탑동 시네마 바로 뒷골목에 위치한 이 건물은 이름 그대로 자전거 매장과 분식집 등이 있던 건물이다. 개관전시로 한국 실험미술의 산 증인인 원로작가 김구림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 이어서 올봄 사진조각으로 유명한 권오상 작가의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앞으로도 이 공간은 개인전 중심으로 운영된다.

김구림 (왼쪽) 1973

김구림 <걸레(닦여진 바닥과 걸레)>(왼쪽)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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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RIO GALLERY Cheonan

시외버스터미널과 신세계백화점 충청점 바로 옆에 있는 아라리오 갤러리 앞마당은 천안시에서 선정한 ‘천안 12경’ 가운데 하나로, “학생, 청소년 등 하루 7만여 명이 찾는 젊은이의 광장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조각품 63점과 백화점 갤러리 등이 있음”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서있다. yBa 대표작가 데미안 허스트를 비롯해 아르망, 수보드 굽타, 코헤이 나와, 김인배, 성동훈 등 국내외 유명 작가의 대형 조각작품이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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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ien Hirst  브론즈에 도색 700 x200cm 2000

Demien Hirst <cksrk(Hymm)> 브론즈에 도색 700 x200cm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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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RIO GALLERY Shanghai

일찍이 중국 베이징과 미국 뉴욕에 진출했던 아라리오는 현재 아시아 아트허브로 성장한 상하이에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중국 본토 작가와의 협업을 비롯해 새롭게 급부상하는 아시아 동시대미술의 최신 경향을 소개하는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2월 8일까지 차세대 중국작가로 주목받는 가오 레이의 개인전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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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 레이 Gao Lei   330×120×180cm 2012

가오 레이 Gao Lei < M-275.> 330×120×180cm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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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RIO GALLERY Seoul

그동안 서울 청담동 옛 카이스갤러리 자리와 아트선재센터 옆 골목 옛 목욕탕 건물에 있던 갤러리는 2014년 3월 소격동 현재 위치에 문을 열었다.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바로 옆에 자리 잡아 인근 국제갤러리와 학고재 등과 어우러져 명실공히 한국 현대미술의 메카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2월 22일까지 사진작가 한성필의 개인전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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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까지 열리는 사진작가 한성필의 개인전  전시광경

2월 22일까지 열리는 사진작가 한성필의 개인전 <지극의 상속(Polar Heir)> 전시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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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RIO MUSEUM in space

등록문화재 제586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한국 현대건축사의 거장 故 김수근(1931~1986)의 철학이 깃든 유서 깊은 장소다. 건축사무소의 경영난으로 궁중분해될 위기에 처한 이 건물을 매입한 아라리오는 건축물 원형의 특성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공간과 조화를 이룬 신개념의 미술관 모델을 제시한다. 건축예술과 만난 현대미술품은 예상치 못한 시너지 효과를 발산하며 관람객에게 신선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함에 부족함이 없다.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옆 건물은 한옥카페와 베이커리, 일식, 이태리식, 프랑스식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사진은 4층 일식당에서 내려다보이는 창덕궁 광경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옆 건물은 한옥카페와 베이커리, 일식, 이태리식, 프랑스식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사진은 4층 일식당에서 내려다보이는 창덕궁 광경

최욱경 Choi Wook-kyung  (왼쪽) 캔버스에 오일 96.5×79.5 cm 1961 변관식 (오른쪽) 29.5×165cm 1963

최욱경 Choi Wook-kyung <여인좌상>(왼쪽) 캔버스에 오일 96.5×79.5 cm 1961 변관식 <춘경산수>(오른쪽) 29.5×165cm 1963

 

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의 어제와 오늘

배혜경 크리스티 한국사무소 대표

“I have a dream~” 그룹 아바Abba의 경쾌한 노래가 들리면 나는 항상 조건반사처럼 김창일 회장을 떠올린다. 그 노래는 아주 오랫동안 김창일 회장의 휴대전화 컬러링이었다. “나는 꿈이 있고 어두움을 헤치며 때가 되면 비상하리라”는 가사처럼 그는 늘 꿈을 품고 사는 ‘청년’이다.

# Dream
어린 시절 비 온 뒤 갠 하늘의 무지개를 보고 황홀경에 빠지던 소년이 있었다. 무지개는 소년에게 막연하지만 한 가지 꿈을 건넸다. 그 무지개처럼 누군가의 영혼을 정화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이었다. 소년 창일은 장년이 되어 미술관을 견학하고 미술품 수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 그 꿈을 멋지게 구체화했다. “LA 현대미술관 MOCA와 디아:비컨 Dia:Beacon을 보면서 나는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미술관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느꼈다”는 그는 전 세계의 좋은 작품들을 수집해서 미술관을 통해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2000년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천안에 미술관을 지을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고 외국의 건축가와 이미 설계를 진행한 상태였다. 김 회장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가장 놀라운 점은 평생을 간직해온 그의 화두인 꿈에 대한 놀라운 집중력과 자기 최면, 자기 암시이다. 보통 사람은 꿈을 꾸더라도 모든 일상이 일관되게 그 꿈을 향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를 하면 끊임없이 “ 꿈, 운명, 아름다움, 예술” 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그는 실제로 일상에서 잔가지와 군더더기는 다 쳐내고 매우 단순한 삶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꿈에 선택, 집중한다. 3년 전쯤부턴가 그의 휴대전화 컬러링은 들국화 전인권이 절규하듯 부르는 “하지만 후회 없어~ 찾아 헤맨 모든 꿈 , 그것만이 내 세상~”으로 바뀌었다. 그가 꿈꾸던 미술관이 가시적으로 풀리지 않았고 뉴욕 아라리오, 베이징 아라리오의 철수 등으로 인해 힘든 시절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소격동과 상하이에 갤러리를, 그리고 옛 공간사옥을 매입해 꾸민 뮤지엄 인 스페이스와 제주도에 세 개의 뮤지엄을 지속적으로 개관했지만 그 모든 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 35년간 축적된 그의 땀과 노력이 이루어낸 꿈의 결실이라 하겠다.

# Destiny
김창일 회장은 본인이 유학 간 것도 아니고 미술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컬렉션을 하게 된 것은 기적이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예술은 곧 운명이다. 운명은 그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중 하나가 공간사옥이다. 어느 날 그가 예고도 없이 우리 사무실에 들러 상기된 표정과 들뜬 목소리로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공간사옥을 인수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던 기억이 난다. ‘낡고 침침하고 오밀조밀한 건물에 어떻게 미술관을?”이라는 세간의 우려가 적지 않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멋진 미술관으로 공간사옥을 살려냈다. 역사성과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컬렉션을 직접 큐레이팅하여 전혀 새로운 형태의 현대 미술관을 만들어낸 것이다. 현대미술을 전시하기 쉽지 않은 공간 구조인데도 신디 셔먼, 바바라 크루거, 앤디 와홀, 마크 퀸, 트레이시 에민등과 백남준, 강형구, 최병소, 이동욱 , 수보드 굽타, 권오상 등의 작품들이 마치 ‘바로 여기가 내 자리야’라고 웅변하고 있는 듯한 미술관…. 참으로 진지한 컬렉션임에도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전시된 이 미술관이 있어 나는 요즘 외국 방문객이 와도 마음이 놓인다. 그들에게 한국 개인 컬렉터의 실험적인 현대 미술관을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passion
한 남자가 티셔츠에 갇혀 마구 버둥대고 있다. 한 팔을 소매에 끼었는데 다른 한 팔은 소매 구멍이 영 찾아지질 않는다. 너무 허둥대는 바람에 티셔츠는 더 엉키고 만다. 딱 학교에 지각한 소년 같은 이 사람은 바로 김창일 회장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작품을 어떻게 만들지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나와 빨리 작업장으로 달려가려 서둘다가 벌어지는 풍경이다. 이처럼 그에게 창작은 간절한 소망이며 운명 같은 신내림이다. “나는 한때 죽을 만큼 어려운 시절을 겪은 사업가다. 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꿈이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을 나의 예술로 표현하겠노라, 결심했다.”
예전에 그를 보면 솔직히 뜬구름을 잡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고 에너지가 지나치게 넘치는 무모한 사람. 나처럼 평범한 세상 사람의 잣대로 보기에 그의 열정은 왠지 부담스러웠고 그가 과연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적잖이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 16년간 그 어떤 전업 작가보다 더 치열하게, 더 많은 시간을 쏟으면서 다양한 기법과 주제의 실험을 통해 계속 발전된 그만의 독창적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그가 작품을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그러지 말았으면…’ 했다. 그냥 취미로 그림을 그리다가 괜히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 시간 가족과 떨어져 스스로 고독한 환경 속에 침잠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열정을 작품에 쏟아 부었다. 그림을 그릴수록 자신이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또 어떻게 그릴지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워하며 고민했다는 그는 오늘도 하루의 반은 작품 구상과 작품을 만드는 데 보내고 있다. 그에게 누가 감히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누구보다 더 투철한 작가 정신으로 무장한 그다. 요즈음의 그를 보면 소년처럼 눈이 맑아진 느낌이 물씬하다. 15년 전에 느꼈던 사업가의 풍모보다는 예술가의 아우라가 더 강하다.

# Arario Brand, Collection Brand
“나는 내 가슴을 울리는 작품을 산다.” 김 회장이 컬렉션을 할 때 선택하는 기준은 그 자신의 ‘필feel’이다. 그의 컬렉션은 대부분 커팅에지cutting edge 작품들이다. 매우 실험적이고 이슈가 되는 작품들을 과감하게 컬렉션함으로써 아라리오만의 특별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냈다. 그에겐 시대를 앞서가는 그만의 직관과 필이 있다. 특히 영국의 yBa 작가들과 독일의 라이프치히 화파 작품을 그들이 글로벌 미술계에서 막 부상하기 시작할 때 수집했고, 나아가 아시아의 떠오르는 신진 작가들에 주목하고 컬렉션해왔다. 마크 퀸의 <셀프>나 채프먼 형제의 작품처럼 매우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작품들까지도 수용할 정도로 그는 열려있으며 또한 많은 한국의 동시대 작가도 후원해왔다. 그 동안 동시대 미술시장은 급성장을 했고 키스 해링, 시그마르 폴케, 라이프치히파 작가들, 신디 셔먼, 데미안 허스트, 마크 퀸, 채프먼 브라더즈, 안소니 곰리, 앤디 워홀, 바스키아, 장환 등 등 이미 국제 시장에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작품을 일찌감치 수집해온 그의 안목은 결과적으로 아라리오 컬렉션의 정체성이 되었다.
용도 폐기되고 버려진 영화관과 바이크숍 그리고 모텔. 제주도에 있는 이 건물들을 미술관으로 만든다? 우리는 이 건물들이 헐리고 그 위에 번듯한 현대식 미술관 건물들이 우뚝 서게 될 줄만 알았다. 그런데 김 회장은 그 특유의 역설과 예측불허의 감성으로 건물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남겨둔 채 멋진 현대 미술관으로 재창조해냈다. 서구에서는 이미 용도폐기된 건물을 미술관이나 갤러리로 재창조한 경우가 많지만 이렇게 한국적 상황에 절묘하게 접목시킨 것은 그동안 해외의 여러 미술관을 견학하면서 머릿에서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거친 김 회장 개인의 내공에서 기인한다. 아라리오 제주 뮤지엄의 콘셉트는 죽은 도시를 재생시키고 활성화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관이다. 이렇게 그는 서울의 뮤지엄 인 스페이스와 일관된 컨셉의 미술관으로 아라리오 뮤지엄만의 새로운 실험적인 브랜드 콘셉트를 만들어 냈고 이는 지역 문화의 가치 향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은 아라리오 아이덴티티의 정점에 있다. 그는 사업가, 컬렉터, 예술가로서 아라리오란 브랜드에 스토리를 입히는 사람이다. 그중 어느 하나를 빼면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듯이 그 셋은 삼각대처럼 김창일이라는 개인 브랜드의 균형을 잡아준다. 그가 회사명을 ‘아라리오”로 채택한 것도 재미있다. 한국적 고유성을 가지면서 외국인도 쉽게 발음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에서 “아라리오”란 참으로 기발한 이름을 추출해냈다. 이처럼 그는 매우 단순 명쾌하게 핵심에 집중한다. 그는 영원한 청년이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가 입에 붙었고 꾸벅 인사도 잘하며 항상 배우는 학생처럼 스스로를 낮춘다. 그러한 젊은이의 기질은 그로 하여금 남과 다르게 세상을 보고 남과 다르게 세상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매우 소탈하고 다혈질인 그는 만날 때마다 기발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행동으로 주위를 무장해제시키며 행복바이러스Happy Virus도 전파한다. 하지만 겉으로 굉장히 외향적이고 사교적으로 보이는 그에게 실제로는 매우 내성적이며 예민하고 상처도 쉽게 받는 소년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인간 김창일의 매력이 아라리오에 색깔을 부여하는 근본 원인이 아닐까?
사람들은 김 회장의 승승장구를 보면서 ‘꿈을 실현한 행운아’라며 부러운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그에게도 동트기 전의 어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 성공은 그의 과거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 경험의 산물이다. 특히 뉴욕 아라리오와 베이징 아라리오를 닫으면서 그는 많이 슬퍼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는 많이 배웠고 성장했고 단단해졌다. 성공이 너무 일찍 왔다면 그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그의 꿈은 실현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의 머릿속에는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소용돌이치고 있을 것이기에 앞으로 아라리오가 가는 길에 또 어떤 의외와 역설이 튀어나올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한 시골 사업가의 꿈이 천안이라는 문화적 변방을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생동하는 풍요로운 문화도시로 변모시킨 이변을 보았다. 또 서울과 제주의 문화 지형도가 어떻게 바뀌어가고 있는지보고 있다. 앞으로 김 회장은 제주에 6개의 미술관을 더 만들어 그가 지난 35년간 모은 3700점의 컬렉션을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늘려나갈 계획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그의 행보는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된다. 그가 ‘그것만이 내 세상’을 외치면서 어떻게 세계적으로 한국 문화의 위상을 높여갈지는 그대로 의문형으로 열어놓기로 하자. ●

 

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우리 미술계가 아라리오를 주목하는 이유

이규현 이앤아트 대표

세계 미술사의 변화 뒤에는 언제나 뛰어난 딜러와 컬렉터가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은 교회와 메디치 가문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19세기 파리의 인상파 미술은 폴 뒤랑-뤼엘이라는 딜러의 눈이 있었기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반 파리에서 전위적 작가로 ‘실험 단계’에 있었던 피카소와 마티스는 이들을 일찍 알아본 거트루드와 레오 스타인 남매라는 컬렉터가 있어서 클 수 있었다. 20세 후반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가 세기를 바꾼 새로운 예술로 자리 잡은 데에는 리오 카스텔리 같은 뛰어난 딜러가 있었다. 미국 현대미술작품의 값이 치솟은 뒷 배경에는 물론 자국의 미술품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던 미국의 부자 컬렉터들이 있다. 중국 현대미술이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각광 받는 위치에 오른 데에도 당연히 중국의 미술시장과 중국 컬렉터들의 힘이 있었다.
전 세계의 역사까지 거창하게 가지 않더라도, 한 나라의 한 시대에서 예술 트렌드를 만드는 데에 딜러와 컬렉터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21세기 현대미술계에서는 어떤 딜러, 컬렉터가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아라리오의 김창일 회장을 빼놓고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미술계가 변화해온 모습을 생각하면, 중요한 포인트마다 김창일 회장과 그의 ‘아라리오’가 있었다.
시외고속버스터미널, 백화점, 아라리오 갤러리가 나란히 들어서 있는 충남 천안시 신부동 일대는 전부 김창일 회장의 소유이면서 서울에서도 보기 힘든 재미있는 미술거리다. 코헤이 나와의 높이 13m 폭 16m 대형 작품을 중심으로 김인배, 수보드 굽타, 키스 해링 등의 작품들이 거리에 전시되어 있고, 그 옆 아라리오 갤러리에는 김창일 회장의 가장 유명한 컬렉션인 데미안 허스트의 <찬가>를 비롯해 아라리오가 소장하거나 전시하는 동서양의 첨단 미술작품들이 교체되며 보여 진다.
그는 천안의 얼굴을 바꿨고, 이를 통해 천안이라는 우리나라의 작은 도시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천안에서 시외고속버스터미널, 백화점, 외식사업, 갤러리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처음엔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로 시작해 딜러 겸 컬렉터로 점점 이름을 알렸다. 세계적인 미술잡지 《아트 뉴스》가 뽑은 세계 컬렉터 200명에 들어간 유일한 한국인으로 유명한 그는 ‘미술 사업’ 영역을 확장해 작년에는 서울과 제주도에 ‘아라리오’ 이름의 미술관을 지었다.
김창일 회장의 미술 컬렉션은 좋다 나쁘다를 떠나, 우선 우리나라에서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김창일 회장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미술컬렉터나 미술관 설립자라면 으레 재벌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특히 재벌가의 며느리로 대표되는 ‘여성 컬렉터’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컬렉션은 해외미술의 경우 유럽과 미국의 근현대미술 대가들에게만 초점을 두었다. 김창일 회장의 ‘아라리오 컬렉션’은 이런 세상에 나타난 참 새롭고 다른 컬렉션이었다.
김창일 회장이 등장하기 전에 국내에서 세계적인 현대미술 컬렉터로 꼽힐만한 사람은 삼성미술관 리움 홍라희 관장이 유일했다. 그런데 홍 관장의 리움 컬렉션만해도 이미 서양미술사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전통적인 대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유명 작가들의 대표작이 골고루 갖춰진 교과서적이면서 ‘아트뱅크’에 가까울 정도로 투자가치 있는 작가들로만 형성되어 있다. 이에 비해 김창일 회장은 소위 가장 ‘핫’한 지금 현재의 미술에 집중한 새로운 개념의 컬렉팅을 보여줬다. 예컨대 2000년대 초에는 데미안 허스트, 마크 퀸, 트레이시 에민 등 영국의 yBa작가들을 수집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곧이어 중국현대미술 작가들과 우리나라의 독특한 젊은 작가들을 수집하고 후원하기 시작했다. 흔히 재벌가와 부자들의 컬렉션은 당장 내일이라도 경매회사에 들고 나가면 비싸게 값 매겨질 환금성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라리오 컬렉션은 비싼 작품도 있고, 잘 팔리지 않을 실험적인 작품들도 있다. 그가 꼭 투자에 연연해 작품을 모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 이유다.
한마디로 아라리오가 한국 미술계에 등장한 이후 많은 게 새로워졌다. 김창일 회장이 설립한 아라리오 갤러리가 2006년 여름에 〈중국의 현대미술과 시대정신〉이라는 제목으로 그룹전시를 열었을 때만 해도 장 샤오강, 위에민 준, 팡리 준, 왕 광이 등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중국 현대작가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우리나라에 온 것은 처음이었고, 매우 신선했다. 그는 일찍이 중국 현대작가들과 친분을 쌓아놓았기에, 세계 미술시장이 아시아에 눈을 돌리던 2000년대 중반에 이들을 한 번에 한국으로 몰고와 전시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한국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을 일약 중국현대미술로 끌고 갔다.
좋은 컬렉션에는 뚜렷한 ‘테마’가 있다. 이런 점에서 김창일 회장의 ‘아라리오 컬렉션’은 뚜렷한 테마 아래 수집한 표가 난다. 그는 특히 한국과 중국의 현대미술에 일관된 관심을 가졌다. 중국현대미술이 이렇게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기 전에 일찍이 중국에 가서 중국작가들을 직접 작업실에서 만나면서 작품을 보고 소장했다. 작품 크기는 소장하고 팔기 쉬운 작은 사이즈에서부터, 실내에는 전시가 불가능한 어마어마 큰 것까지 다양하고, 회화뿐 아니라 조각, 설치, 미디어까지 장르도 다양하게 수집해왔다. 어떤 작품은 투자가치가 있지만 어떤 작품은 투자가치를 불분명하되 그냥 신선한 충격을 주는 작품들이다. 뭔가 고집이 있고 의도 자체가 남다르게 보인다.
두번째로,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공개해 대중에게 보여주는 방법이 색다르다. 그가 서울 종로에 있는 옛 공간사 사옥을 사서 개조한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를 방문해본 사람들은 안다. 건물을 요리조리 뚫고 헤집고 다니면서 그 작품들을 감상하는 동선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는 지. 더군다나 “외국 여행 갔을 때 미술관이 문을 닫으면 슬프다”며 미술관을 365일 무휴로 열고 있다. 작품 수집하는 방법이나 그 작품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방법과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대중에게 자기 모습을 늘 훤히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우리나라 다른 컬렉터들과 참 다르다. 전시 오프닝 리셉션에서는 사회자 역할을 자청하고, 오프닝을 자축하는 ‘고성방가’에 가까운 노래를 부르곤 한다. ‘자기 갤러리에서 자기가 전시한다’는 미술계의 눈총을 받아가면서도 벌써 개인전을 6번이나 가진 아티스트가 아닌가. 사업가로서 아트딜러로서 컬렉터로서 유명한 그이지만, 어딘가에 있는 그런 아티스트 기질 때문에 모험적이고 고집스러운 컬렉션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해외에는 이렇게 대중 스타급의 컬렉터들이 꽤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김창일 회장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한테도 이렇게 색다르고 재미있고 역사에 남을 컬렉터가 있다는 점, 열정과 고집으로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미술 컬렉션이 결국 성공한 ‘미술사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점에서 우리 미술계는 그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

아트숍 전경

아트숍 전경

안토니 곰리 Antony Gormley   191×68×137cm 2001

안토니 곰리 Antony Gormley < Reflection > 191×68×137cm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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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러티(Charity))> 브론즈에 도색 680×200×200cm 2002~2003

 

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씨킴에게 선물 받은 행복한 외로움

강형구 작가

언젠가 친하게 알고 지내던 기자가 내게 물었다. “아라리오 씨킴 회장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그 질문은 씨킴 회장이 직접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상이 전제된 것이었고, 사업가의 개인적 취미에 불과하지 않냐는 비아냥거림이 강하게 풍겼다.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유명하지만 게으른 작가보다 그가 훨씬 작가답다고 생각한다”고. 이런 나의 반응에 그는 당연히 머쓱해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기자는 나와 친하다는 생각에 그 비아냥거림에 내가 동조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지금 제주도 성산 하도리라는 아름다운 마을에 자리 잡은 아라리오 스튜디오 ‘생각곳’에서 작업하고 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씨킴 회장의 작업장에는 그의 작업 흔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씨킴 회장은 평소 “I have a Dream,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슬로건을 입버릇처럼 자주 말한다. 그의 말처럼 꿈을 실현하고 있는 결과물과 그 과정은 앞선 기자의 질문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증거인 셈이다. 그는 이렇게 꿈을 꾸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욕망이 큰데 세속의 요구에만 충실한, 그래서 꿈을 포기한 소위 잘나가는 작가가 많은데 비해 이런 점에서 그는 정말 훨씬 더 작가다웠다. 나는 여기서 씨킴 회장의 꿈에 대한 실천과 결과물에 대해 언급하려는 게 아니다. 그 작품에 대한 실천은 바로 작품 외적인 부분에서 예술을 향한 그의 유별난 애착을 검증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말하려 함이다.
이런 씨킴의 열정으로 지금의 이 스튜디오가 만들어졌고 나는 지금 여기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비록 제주도가 고향은 아니지만, 지금 나는 마치 낙향한 선비처럼 내 마음의 세속성과 서울이란 중심에서 일탈해 있다. 대인관계가 없는 외로움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내가 세상에 소위 이름이 알려지기 전, 이와 비슷한 외로움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당시 미술의 시장성은 아예 고려조차 않고 확대된 얼굴을 200호 크기로만 그려댔던 무모함 속의 외로움은 공포였지만 그 순수성 속의 내가 생각난 것이다. 감상자들의 고마운 사랑을 받으며 아라리오와 함께한 지난 10년은 영광의 시간이었다. 이제는 세속의 굴레를 벗어나 새로운 절제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고 나는 제주 스튜디오를 택했다. 나는 요즘 젊을 때 꿈속으로 다시 들어와 있음을 느낀다. 아라리오와 씨킴 회장은 내게 그 꿈을 다시 꿀 수 있도록 기회를 줬다. 뿐만 아니다. 나는 그의 진취적 엉뚱함에서 뜻밖의 에너지를 얻는다. 누군가는 내게 외롭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나는 다시 스스로 외로움을 선택했다. 나는 지금 행복한 외로움을 즐기고 있다. 나는 행복할 때 외롭기를 각오한다. 가끔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야, 강형구! 너 요새 잘나가더라?” 나는 답한다. “아냐! 요새도 작업실에서 잘 안 나가!”라고. ●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제주도 하도리 해변에 있는 아라리오 창작 스튜디오 외관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제주도 하도리 해변에 있는 아라리오 창작 스튜디오 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