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으로 붙잡은 시간, 강원제 < Running Painting >
시간의 결정을 퍼뜨린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가? 강원제의 작업에서 ‘시간’은 캔버스 위에 켜켜이 달라붙어 있었다. 작가는 지나가는 시간을 여러 색 붓질로 잡아 캔버스에 쌓았다. 그리고 그 캔버스들을 나란히 포개 걸었다. 그간 작가가 물감으로 붙잡은 시간이 빼곡히 겹쳐진 캔버스에 드러났다. 캔버스를 겹쳐 설치한 <부차적 결과> 작품은 ‘무엇을’, ‘어떻게’ 그렸는지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작품은 작가의 행위를 증명하는 ‘대리인’으로서 시간을 증명하는 시간의 결정체였다.
오랜 기간이 쌓였다. 두터이 쌓였다. 나무에 나이테가 그려지듯, 작가의 작품에는 지나간 시간의 무늬가 남았다. 작품 위, 노이즈처럼 지글거리는 수많은 선택과 포기도 보였다. 캔버스에 쌓인 물감에는 고뇌와 갈등이 담겨있었으며 작가가 대면한 노이즈적 갈등은 ‘차이’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반복과 차이가 공존하는 행위로 예술가는 작업에서 ‘연속적인 틈’을 만들어나갔다. 4년 동안 그리는 행위를 매일 지속하며 강원제는 자신의 그간 예술 행위를 그 자리에 ‘있게’ 했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의 표현방식을 빌리자면, 그는 ‘시간의 결정을 퍼뜨리며’ 지나간 시간과 행위를 전시장으로 끄집어왔다.
펠릭스 가타리는 < 세 가지 생태학 >이라는 저술에서 새로운 생태학적 실천을 주창한다. 가타리가 말하는 세 가지 생태학 중 ‘사회생태학’ 실천은 예술가의 존재 방식과 비슷하다. ‘생태학적 실천은 각각의 부분적인 실존적 근거지에서 주체화와 특이화의 잠재적 벡터를 찾아내려고 노력한다.’(펠릭스 가타리, 세 가지 생태학, 동문선, 2003) 예술가는 신체로 생생하게 체험하는 작업 경험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연속적인 그림 그리기 행위(혹은 각종 예술 활동)를 통해 예술적 자아를 형성해 존재를 특별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작업 행위’라는 공회전하는 특이성을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유지한다. 반복되며 수행적인 ‘작업 활동’을 지속하여 예술가는 ‘주체적’인 존재로, ‘특이한’ 존재로 자신의 위치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강원제의 전시를 통해 가타리를 언급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개인이 만들어내는 반복과 차이가 예술뿐 아니라 사회에 만연하기를 희망하며. 각자의 개성적인 ‘틈’에서 발산되는 리듬을 존중해 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며. 바람은 항상 분다. 나뭇잎은 바람을 만나면 언제 어디에서나 흔들린다. 하지만 나뭇잎은 반복적인 진동에도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곡선을 그리면서 자신만의 춤과 유희를 이어 나간다. 당신이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며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손에 붙잡고 있는 그것이 스스로의 호흡이자 행위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란다. 더해, 개인이 만드는 개성적인 틈을 ‘사회적 약속’으로 메워버리지 말고 지속되고 충분히 반복되어 호흡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특이한 실존자의 리듬’을 지지해 주기를. 전시는 갤러리 이알디에서 4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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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민경
● 사진제공 : Galerie E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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