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무지개 위에서
근본적으로 미적 현상은 단순하다. 끊임없이 생생한 유희를 볼 수 있고 줄기차게 정령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 있는 능력만 가져보라.(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비극의 탄생, 읻다, 2017) 니체는 자신의 저작에서 독일 고전주의 극작가 실러(Friedrich von Schiller)가 괴테에게 보낸 편지를 언급하며 예술 활동은 사고의 인과질서로 정돈된 일련의 영상이 아니라 하나의 ‘음악적 분위기’ 가 창작자 앞에, 그리고 그 안에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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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nd Over the Rainbow 》 전에 참여한 이선근의 작품에는 꿈속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듯한 ‘환시’가 깃들어 있다. 독특한 시선으로 니체가 말하는 ‘정령들을 보는 유희적인 시점’을 엿볼 수 있다. 꽉 쥐어짜면 물에 헹군 빨래처럼 양손 가득 물감이 묻어나올 것만 같은 색채 감각 또한 특징이다. 이선근은 시각장애인으로, 유년기 어느 날 한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양쪽 시각을 잃는 두려움을 극복하며 작업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그러나 한쪽 눈으로 보았다는 걸 그 누구도 알지 못할 정도로 그가 마음을 담아 표출한 색은 또렷하다.
하지만 잠시,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건넨다. 장애인 예술가는 여느 예술가와 다른가? 창조성 앞에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은 없다. 다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구분과 편견이 예술에서도 배어 나올 뿐이다. 2017년, 특수학교 건립 반대에 부모들이 무릎을 꿇는 시위를 벌였던 서진 학교 사건처럼 우리는 장애인을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발현된 사건을 종종 마주한다. (구정우, 인권도 차별이 되나요?, 2019) 장애인에 대한 혐오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 자체도 역사성을 가지며 사회 맥락 속에 서서히 형성되었기 때문에 불편한 시선을 도덕 잣대로만 단정해서는 안 된다. 장애인에 대한 두려움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다. 공공장소에서 돌발행위를 하는 발달장애인을 보면 당연히 두렵고 불안하다. 대다수 비장애인은 장애인과 함께 생활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발달장애인의 행동이 낯설고 당황스럽다. 하지만 발달장애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지라 비장애인의 시선이 아닌 ‘그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돌발 행위에도 나름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는 사회적 약자가 공공시설이나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그들의 입장에서’ 걸림돌을 제거하는 조치를 뜻한다. 일상에서 접하는 배리어 프리에는 점자 안내문, 수화 동시통역, 휠체어 경사로 등이 있다. 위 영상은 디즈니 영화 캐릭터들이 시각장애인 여자아이와 수화로 소통하는 모습을 담았다. ‘모두를 위한 꿈의 나라’ 디즈니랜드는 장애인과 노약자 등 막론하고 모든 이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배리어 프리에 앞장서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비장애인이 당연하게 누리는 문화예술 프로그램과 교육을 장애인도 편히 누릴 수 있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재능이 있지만 전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아 적합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사회적으로는 인적 자원을 놓치는 것이며 개인적으로는 삶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전제되는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관현맹인’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시각 장애인을 국가 차원에서 육성하고자 세종이 시행한 제도다. 고종 때에도 장악원에 5명의 관현맹인이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조선 500년 동안 시각장애인이 왕실의 장려 하에 자신의 재능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방귀희, 장애인예술론, 2019, 솟대) 근대 초기 경성 시대에도 시각장애인의 특출한 능력을 높이 평가한 기록이 있다. 다음은 1930년 경 개최된 경성맹인음악단의 납량음악회 소개 글 중 일부다. “단순한 호기심만을 가지고 이 맹인음악회를 구경하러 온다면 큰 잘못이다. 맹인에게는 오히려 음악적 재질이 더 풍부한 것이다. 즉 그들은 보지 못하는 대신에 음악가의 생명이라고 할 청각이 어느 감각보다도 가장 예민하게 발달한 까닭에 그들에게 한 번 음악 공부를 시켜준다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멜로디’를 표시하는 것이다.” (정창권, 근대 장애인사, 사우, 2019)
“복지관이 끝나고 집으로 옵니다. 아파트에 불이 켜집니다. 앗! 아파트마다 불 색깔이 다 다릅니다. 왜? 사는 사람이 다르니까…” -이규재 작가 노트 중- 너무나도 해맑은 작가 노트를 접하고 깜짝 놀라 바르게 읽은 건지 의심했다. 본능에서 표출된 이규재의 작품은 너무나 감각적이고 매력적이다. <아파트 불빛은 다 다르다> 아파트 창 사이사이 거친 붓질은 보는 이의 시선 흐름을 유도한다. 붓질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창에 칠한 색이 무심한 듯 주변에 찍혀 있는데 거기에서 시선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흐른다. 창에서 새어 나오는 빛 또한 흔히 생각하는 빛의 색깔이 아닌 파란 계열. 이규재는 자폐성 발달 장애인으로 신비로운 색감과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자신이 보는 세상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술인이 장애인임을 알 때 전문성 평가 항목의 평균 점수는 낮았는데 이는 장애 예술인을 전문 예술인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방귀희, 장애인예술론, 2019, 솟대) 장애 예술인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식은 장애 예술인의 창작 활동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저해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더 낮게 사지도 않고 높이 평가하지도 않는 ‘동등한’ 평가다. 예술적 재능이라는 특별함과 장애라는 특성을 면밀히 구분해 예술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진정한 감상과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
신체적 우월함이 ‘정상’ 혹은 ‘옳은 것’은 아니며 장애가 ‘열등’이 되어서도 안 된다. 장애는 정의하기 나름이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지난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8년 뉴질랜드의 장애인 출현율은 24%, 오스트리아는 23.5%인데 반해 한국의 장애인 출현율은 5.4%이다. 장애의 정의가 사회문화적으로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무엇보다 예술을 감상하고 평가하는데 장애와 비장애의 사회적 편견을 붙잡고 있지 않기를 바라며 12명의 장애 예술가가 참여한 《 2nd Over the Rainbow 》전시 덕분에 잠시나마 ‘특별한 대우’를 하려 했던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앞으로 개개인의 네러티브와 창조성, 그리고 독특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을 더욱 자주 만날 수 있기를.
“장애인예술은 장애인의 소일거리를 위한 취미가 아니다. 그리고 치료도 아니다. 장애인예술은 그냥 예술이다.” -영국 장애인 예술가 Suth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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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nd Over the Rainbow 》
2019. 6. 28 ~ 8. 4
KT상상마당 홍대
● 글 : 김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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