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 칼 안드레 : 장소로서의 조각, 1958 – 2010
서구 미니멀리즘의 태두 칼 안드레(Carl Andre, 1935~). 그를 정의하는 말은 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지난해 5월 개막한 그의 대규모 회고전 <칼 안드레: 장소로서의 조각, 1958~2010(Carl Andre : Sculpture as Place, 1958~2010)>이 뉴욕 디아: 비컨에서 3월 9일까지 계속된다. 여타 미니멀리스트와 확연히 구별되는 시적인 그의 작업이 전시공간과 어우러져 그 자체의 물성을 한껏 드러낸 자리였다.
살아있는 미니멀리즘의 전설을 만나다
서상숙 미술사
칼 안드레의 작품은 심플하다.
바닥에 깔린 사각형 동판들의 규칙적인 반복, 낮은 담처럼 쌓여 있는 벽돌들의 소박함, 무심하게 뿌려진 듯한 금조각들의 빛남…. 그리고 고대의 문화 유적처럼 묵직하게 서있는 목재들. 그의 작품이 전시된 공간은 늘 침묵한다.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작품들이 남겨 놓은 텅 빈 공간, 자연에서 발굴된 원재료에서 읽히는 시간성, 단순한 선과 면이 이루어내는 직설법의 리듬. 미니멀리즘의 선구자 칼 안드레Carl Andre, 1935~의 50여 년에 걸친 작업을 모은 뉴욕주 디아:비컨의 전시장을 걷고 바라보며 떠오른 단상들이다.
이 미술관에 장기 전시 중인 도널드 저드, 댄 플래빈, 솔 르윗, 로버트 스미드슨 등 그와 동시대의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철저히 공업적인 차가운 작품들과 달리 안드레의 작품은 시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허드슨 강변의 나즈막한 언덕 위 나무숲에 둘러싸인 디아:비컨 미술관은 1960년대 미니멀리즘 작업과 그 후의 현대미술품을 소장 전시하는 곳이다.
뉴욕시 맨해튼에서 북쪽을 향해 자동차로 한 시간쯤 올라가다 보면 이르게 되는 작은 도시 비컨에서 디아 미술재단 Dia Art Foundation이 운영하는 디아:비컨은 2003년 문을 열었다.
칼 안드레의 회고전 <장소로서의 조각Sculpture as Place, 1958–2010>은 지난해 5월 개막해 오는 3월 9일까지 진행된다. 올해 80세의 그는 미술사에 기록되는 미니멀리즘의 거장이지만 미술관 규모의 서베이전으로는 처음이고 미국에서는 1970년 구겐하임에서의 회고전 이후 45년만이다. 1985년 부인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고 그 사고와 관련해 범인으로 지목되어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그후 자신의 전시 오프닝은 물론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은둔자의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미술계에는 그의 유죄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 회고전이 시작된 지난해 5월에 뉴욕시 첼시의 디아갤러리 앞에서 벌어진 작은 시위가 화제가 되었다. 이들은 길바닥에 플래카드를 붙이고 (마치 안드레의 조각처럼) 시를 읽은 후 (안드레의 시 작품처럼) 피가 흐르는 닭의 내장을 바닥에 쏟아 붓고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러나 뉴욕에서의 전시는 지속되었고 미국에서는 그의 딜러인 파울라 쿠퍼 갤러리를 통해 작품을 발표해왔다. 1958년부터 2010년까지—안드레는 몇 년 전 공식적으로 은퇴했다—작업한 조각품 45점과 160여 점의 구조주의 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만든 종이작업 등이 그가 직접 만든 전시상자에 넣어져 전시되었다. 특히 지금까지 소개된 적이 거의 없는, ‘다다 모조품’이라고 불리는 아상블라주 작품, 사진 등이 함께 선보여 흥미롭다.
“내 작품의 주제를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가지는 엄청난 잠재력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는 안드레는 작업에서 재료의 물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번 전시 카탈로그에는 그가 쓴 재료를 금속, 광석, 자철광, 합성재료, 나무, 풀 등 유기재료로 나누어 도표를 만들었는데 무려 100여 종에 달한다. 안드레는 1960년대 전시포스터를 화학기호표처럼 만들 정도로 초기부터 한 가지 재료의 물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이같은 작업을 그는 “물질을 물질화한다matter mattering”고 축약한 바 있다.
안드레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작업실을 가져본 적이 없다. 전시할 곳에 도착해 전시공간을 확인한 후 주변을 돌아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물건을 줍거나 누군가의 소유라면 얻기도 하고 전시가 끝난 후 돌려주기로 하고 빌리기도 한다. 아니면 그 지역의 철공장이나 목공소 등에 벽돌, 나무, 철판, 스티로폼, 금 혹은 은 등을 사각형이나 원 같은 가장 단순한 형태, 특정한 크기로 잘라달라고 주문한다. 이렇게 구해진 재료들을 그 물성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색도 칠하지 않고 변형시키지 않은 채 그가 직접 하나 하나 전시장 바닥에 배열하거나 쌓는다. 따라서 주문하는 재료의 크기는 그가 직접 옮길 수 있는 크기와 무게이며 전체 완성된 작업도 작가가 신체적으로 움직여 닿을 수 있는 크기에 한정된다. 못이나 접착제 등은 전혀 사용하지 않아 전시가 끝나면 쉽게 수거해 다시 되돌려주거나 차곡차곡 쌓아 보관할 수 있다. <조인트Joint>는 1968년 작으로 건초더미 183개를 길게 한 줄로 늘어놓은 작품이다. 167m 길이의 이 작품은 이번 전시를 위해 디아 비컨 미술관 야외에 재현되었는데 10개월에 걸친 전시 중 짐승들에 의해 옮겨질 수도 있고 먹힐 수도 있으며 날씨에 따라 썩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전시가 끝나면 쓰레기로 처분된다.
“재료의 물성만이 나의 관심사”
1966년에는 한 컬렉터가 작품을 사겠다고 하자 작품값만큼의 네모 반듯한 금괴 하나를 주문해주었다. 0.37×67.6cm 크기의 이 작품의 제목은 <금밭Gold Field>
이었다. 그가 국제적 명성을 얻은 첫 작품, <520 오래된 도시의 사각형들Altstadt Rectangles>은 1967년 독일 뒤셀도르프의 콘라드 휘셔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으로 100장의 얇은 철판Hot–rolled Steel, 열간압 연강을 타일처럼 갤러리 바닥 전체에 깐 것이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긴 통로처럼 생긴 전시장에 들어와 벽에 걸린 작품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이 작품을 밟고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관람객이 작품을 밟도록 한 것은 그때까지 조각의 개념을 뒤바꾼 것으로 마르셀 뒤샹이 가게에서 산 변기를 그대로 전시한 이래로 현대미술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도전이었다. 이 때문에 일부 이론가들은 안드레의 작품을 개념주의 작업으로 보기도 했으나 작가 자신은 “재료의 물성만이 나의 관심사”라며 부정했다.
안드레가 작품에 관람객을 포함시킨 이후 현대미술은 장소특정적site-specific, 퍼포먼스, 인스톨레이션(설치), 프로세스 아트 등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장르가 무너지고 만드는 이와 보는 이의 경계도 없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1960년 여름 뉴욕의 그린갤러리에서 열린 마크 디 수베로Mark di Suvero의 작품전에서 전시대를 없애고 바닥에 직접 놓은 조각을 보고 감명받은 안드레는 이렇게 말한다. “프랭크 스텔라가 조각의 개념을 바꿀 전시가 있으니 꼭 봐야 한다며 나를 데려갔다. 그 이후 더이상 작품대에 올려놓는 조각bench–top sculpture은 할 수 없었다. 그 전시는 나에게 바닥에서 직접 솟아 올라오는 조각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새로운 시도가 언제나 그렇듯 안드레의 작품 또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게 미술이냐?”는 아직까지도 그의 작품에 따라다니는 의문이다.
1976년에는 영국의 일간 《데일리 미러》가 테이트 미술관이 구입한 벽돌 120장으로 이루어진 <등가 V III Equivalent V III>(1966/1969)에 대해 “이런 쓰레기 더미를!”이라는 제목으로 예산 낭비의 대표적 예로 들어 1면에 실었다. 안드레는 일명 ‘벽돌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다. 960장, 8개의 단위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팔린 작품에 쓰인 벽돌 120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벽돌공장에 돌려 주었다고 한다. 칼 안드레는 어디를 가든 트레이드 마크인 가슴받이와 멜빵이 달린 블루진 작업복을 입고 다녀 공사장 인부를 연상케 한다. 매사추세츠 주 퀸시 출신인 그는 할아버지가 벽돌공이었고 아버지는 해군 조선소에서 배를 고치는 일을 했으며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철판과 나무조각, 그리고 연장을 가지고 놀던 어린시절, 현 뉴욕철도사 암트랙의 전신이던 펜실베이니아 레일웨이의 보수공으로 일한 경험들이 자신의 작업 원천임을 누누이 밝혔다.
그는 명문 사립교인 필립스 아카데미를 장학금을 받아 다녔는데 대학을 가지 않은 안드레에게 이곳에서 받은 교육은 정규 미술교육의 전부다. 뉴욕에서 고교 동창인 작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1936~와 아방가르드 영화감독 홀리스 프램프턴Hollis Frampton, 1936~1984 등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가의 길을 가게 된다. 특히 그의 작업은 프랭크 스텔라의 스튜디오를 함께 쓰면서 스텔라의 초기 블랙페인팅에 영향을 받았다. 스텔라가 그의 조각되지 않은 나무의 단면을 가리키며 “이것도 조각”이라고 말한 것에 아이디어를 얻어 현재의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50여 년이 지난 후에도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세련되어 보인다. 마치 미술의 법칙을 일깨우고 나아가 삶의 정곡을 찌르는 듯한 단순함의 힘이 그 어느때보다 강렬하게 다가온다.
안드레는 2010년 미니멀리즘의 메카인 텍사스의 치내티 재단Chinati Foundation 건물과 건물 사이의 야외공간에 그의 마지막 작품인 <Chinati Thirteener>을 설치했다. 또 이번 디아 비컨전과 2013년 파이돈에서 출판된 모노그래프 책 발간을 계기로 30년의 침묵을 깨고 오랜만에 인터뷰에 응하고 전시를 준비 중인 디아:비컨을 직접 방문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매일 밤 술에 취해 있던 나를 구해준 사람”이라고 부르는 4번째 부인이자 작가인 멜리사 크레취머Melissa Kretschmer, 1962~와 뉴욕대학 근처 아파트에 살고 있다. 2013년 《인터뷰》지에 실린 친구이자 미술비평가인 바바라 로즈와의 대담에서 안드레는 노자의 말을 인용했는데 격동적으로 살아 온 그의 인생에 대한 담담한 소회를 듣는 것 같아 흥미롭다.
“훌륭한 여행자는 정해진 계획이 없으며 도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자이다.” ●
맨위 <Breda>(사진 앞, The Hague) 97개의 석회암 , 1986 Courtesy the artist and Konrad Fischer Galerie, Düsseldorf <Neubrückwerk>(사진 가운데, Düsseldorf) 19개의 나무 1976 Musée d’Art Contemporain, Montr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