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옥상 : 바람 일다
8.23~9.17 가나아트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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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상의 전시회 〈바람 일다〉에 갔다. 전시를 관람하러 가기 이전부터 광화문 촛불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촛불은 무엇이었을까? 아주 많은 날을 촛불의 의미를 찾아 고민하며 지냈다. 촛불의 의미를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 정부 출범만으로 한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일이었다. 협소한 정치의 의미를 넘어선 어떤 사유가 필요한 지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공간1’의 가면무도회와 ‘공간2’의 여러 작품을 지나 ‘공간3’에 도착하였다. ‘공간1’과 ‘공간2’의 여러 작품에 대해서는 유홍준이 충분히 설명했다. 다만 〈상선약수〉를 보고 다음 작품을 고민하고 있는 임옥상에게 〈삼계화택〉이라는 화두를 던진 사람은 나였다. ‘물’을 그렸으니 ‘불’을 그리라고 조심스레 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 작품의 매체인 ‘흙’에 대해서는 비평가 김홍희가 충분히 말했다. 이번 전시회에 대한 김홍희의 평가에 더하고 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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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3’에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임옥상의 자화상이 있다. 자화상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돌면 바로 옆벽에 〈여기, 무릉도원〉이 펼쳐져 있다. 다시 왼쪽으로 돌면 〈광장에, 서〉가 있다. 다시 왼쪽으로 돌면 〈물밑 창조경제〉가 있다. ‘공간3’의 중심에 서 있으면 임옥상의 자화상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마치 VR의 공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VR은 가상현실인데 최근에는 여러 대의 카메라를 이용하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1차원의 세계를 한꺼번에 겹쳐 보여주는 기술을 의미하기도 한다. VR은 결코 4차원의 세계를 보여주진 않는다. VR은 1차원의 세계를 겹치거나 연속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릉도원〉에 살기를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물밑 창조경제〉의 세계로 존재하고 있다. 서로 얽히고 설킨 아수라의 세계를 물밑에 갖고 있으면서 물 위에서는 권력의 정점에 선 자들이 다들 선하게 웃고 있다. 이 현실은 ‘테바이의 세계’이기도 하다. 왕이었던 ‘라이오스’가 갑자기 죽자 테바이는 대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여기에 구원자로 등장하여 테바이의 최고 지도자가 된 사람이 바로 오이디푸스였다. 수많은 오이디푸스들이 촛불을 들고 모여든 곳이 〈광장에, 서〉다. 선왕 ‘라이오스’를 살해한 자를 찾기 위해 진리의 불을 든 오이디푸스. “누가 살해자인가?” 오이디푸스는 살해자를 찾기 위하여, 정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어둠으로 가득 찬 세계의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그때마다 어둠 깊은 곳에서 문득문득 드러난 얼굴이 있었다. 그 얼굴은 바로 오이디푸스 자기 자신이었다. 임옥상이 자화상에 써넣은 한 문장, “넌 누구냐”는 그런 의미에서 질문이며 동시에 수수께끼였다.
〈광장에, 서〉는 108개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 지난겨울 광장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백팔 번뇌의 오이디푸스였다. 가장 정의로운 자였으나 범죄자였고, 도시를 구원한 자였으나 몰락시킨 자였고, 용기 있는 자로 추앙받았으나 사실은 비겁자였고, 사랑의 이름으로 색욕에 빠진 자였고, 정의를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불의와 부정으로 살찐 자였고, 배려와 존중을 말하고 있으나 독선에 빠져 있는 자였고, 검은 개에 쫓겨 다녔으나 사실은 본인이 검은 개였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광장에 모여 ‘살해자를 찾아 단죄하기 위하여’ 촛불을 들었던 것이다. 이 땅의 흙을 살해한 자는 누구인가? 살인범을 찾아 나선 수사관이 살인범인…. 여기에 촛불의 수수께끼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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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는 마침내 살해자가 자기 자신인 줄 알게 되고, 테바이에서 추방당한다. 그가 가는 곳은 ‘콜로노스의 숲’이다. 임옥상의 〈여기, 흰꽃〉이 바로 오이디푸스가 마침내 도착한 그곳 ‘콜로노스의 숲’이며 ‘바라밀다의 세계’이다. 〈여기, 흰꽃〉은 〈물밑 창조경제〉와 대립하고 있는 〈광장에, 서〉와 그리고 욕망으로 가득 찬 〈무릉도원〉을 동시에 품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비워버린 피안의 세계이다. ‘흰꽃’은 텅 빈 세계로 바라밀다를 상징한다. 그 피안의 세계에서마저 임옥상은 스스로를 향해 “넌 누구냐”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임옥상의 이 질문은 오이디푸스적이다. 임옥상은 자신의 자화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바로 박근혜와 최순실이었으며 이재용이었으며 ‘공간1’의 가면무도회에 걸린 가면의 존재들”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뼈아픈 질문 앞에서 나는 당황했고 많이 아팠다. 내가 바로 박근혜였으니 말이다. 그 질문과 수수께끼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임옥상의 이번 전시회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이번 〈바람 일다전〉에서 촛불 이후에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읽었다. 임옥상은 촛불을 정치적 상징으로 천박하게 이해하지 않았다. ‘공간3’에 배치된 5점의 그림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동시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세계는 이제 4차 산업혁명으로 치닫고 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스마트 네트워크의 혁명 속에서 인간은 참으로 왜소한 그 무엇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나는 촛불 이후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임옥상의 ‘공간3’에서 어렴풋이 발견하였다. 오이디푸스가 자기 눈을 찌르고 떠돌다 도착하게 되는 바라밀다의 세계, 콜로노스의 숲으로 가는 길을,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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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정도상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