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TOPIC | NEW YORK | WHITNEY BIENNIAL 2019
5월 8일 개막한 베니스 비엔날레에 이어 9일 뒤인 17일 관객을 맞은 2019 휘트니 비엔날레. 뚜껑을 열어본 두 개의 주요 비엔날레에서 괄목할만한 점은 참여작가 중 주류가 아닌 비주류라 불리던 작가들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 이번 휘트니 비엔날레 역시 역대 최다로 유색인종과 여성작가가 전시에 참여했다. 또한 다양한 연령대의 작가들을 선정함으로써 미국사회가 떠안고 있는 정치사회적인 현안을 폭넓게 다루고자 했다. 그 어느 대회보다 신랄하고 과격한 현실 고발의 현장이란 평을 받고 있는 휘트니 비엔날레를 만나본다. 전시는 9월 2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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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긴장 속에 요동치는 미국의 혼란상: 인종, 정치, 젠더 그리고 아이덴티티
글: 서상숙 | 미술사
2019 휘트니 비엔날레에 등장한 핵심 키워드는 ‘흑인’이다. 그리고 정치적 코드와 젠더, 아이덴티티가 뒤따르는 키워드다. 미술관 5,6층과 테라스를 주 전시장으로 3층, 1층의 로비 갤러리, 1층 레스토랑 유리벽, 미술관 건물 밖 홍수방지 시스템까지 장악한 작가들은 형식적으로는 절제된 미를 추구하고 보수적인 재료를 쓰면서도 그 내용에서는 현 정치와 사회적 불합리를 고발하는 현실적인 메시지를 품고 있다.
이번 휘트니 비엔날레는 외부 인력 영입 없이 휘트니 미술관에 재직 중인 흑인 여성 루제코 호클리(Rujeko Hockley)와 백인 여성 제인 파네타(Jane Panetta) 두 명이 큐레이팅을 했다.
사진, 특히 흑인작가 사진작업 단독 전시인 것처럼 흑인작가 사진작품을 다수 선보였고, 조각과 회화, 장소특정적(site-specific)인 설치작업을 비롯해 3명의 큐레이터가 투입된 필름과 퍼포먼스 작업도 선보였다. 75인의 참여작가 중에서 75%가 유색인종으로 역대 휘트니 비엔날레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했다. 그중 3분의 2가여성, 그리고 75%가 40대 이하, 그중 20명은 33세 이하다. 한편 시카고에서 활동해온 84세의 조각가 다이앤심슨(Diane Simpson, 1935~)이 최고령 참여작가로 두 큐레이터에 의해 발굴됐다.
한국계 작가 4인이 참여한 것도 1932년 휘트니 비엔날레가 시작된 이래 처음이다. 또한 2017년태풍 피해를 크게 입은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의 작가가 다수 포함되어 화제가 됐다. 젊고 세련된 이번 비엔날레 작가들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으면서(단 한 번 언급됐다) 그 정권이 새롭게 야기하는 미국의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조용히, 지성적으로, 그러나 과격하게 고발했다.
2019 휘트니 비엔날레에서도 어김없이 정치사회적 이슈가 발생했는데, 예년과 달리 작가들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최루탄을 제조하는 무기회사 사파리랜드 소유주인 워런 캔더스(Warren B. Kanders)가 작가들의 요구로 휘트니 재단 부이사장직에서 사임한 것이다. 그는 전시 개막 이후 미술관 앞에서 지속된 사퇴 촉구 시위에 침묵을 지키다 7월 중순에 이르러서야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대형작 〈 행렬(Procession) 〉의 작가,니콜 아이젠만 외 8인이 작품을 철수하겠다고 하자 7월 25일 사퇴를 발표했다. 선정작가 중 마이클 라코비츠(Michael Rakowitz)는 전시가 시작되기 전 출품을 거부했으며, 이번 비엔날레의 큐레이터 호클리를 비롯해 95명의 휘트니 비엔날레 직원이 그의 사임을 촉구하는 성명서에 서명한 바 있다.
최근 미술계의 트렌드인 핸드메이드성 작업이 이번 전시에도 대량 선보였다. 오랜 시간과 노동력이 요구되는 민속품 및 공예품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핸드메이드 작업은 대부분 작가들이 주변에서 주워 온 생활물건들을 재사용하고 있어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를 연상케 한다. 이들의 작업은 서로 다른 재료와 성질을 조합한 형태와 디테일에서 감탄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21세기에 성장한 젊은 작가들이 손으로 직접 자르고 붙이며 색칠해 재료와 형태를 변환하는 방식의 수공 과정에 몰두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3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푸에르토리코를 초토화시킨 허리케인의 이름을 딴 대니얼 린드-라모스(Daniel Lind-Ramos, 1953~)의 조각〈 마리아, 마리아(Maria, Maria) 〉(2019)는 미국 재난대책본부가 파손된 집들을 덮어놓았던 푸른색 비닐로 만든 옷이 입혀져 6층 전시장 유리벽 앞에 세워졌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허드슨 강을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은 가톨릭의 자비로운 성모 마리아라기보다 언뜻 불교에서 극락세계를 표현하는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1층 로비 갤러리에 따로 전시된 다이앤 심슨의 조각작품은 여성복과 건축물의 특정 부분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기하학적 패턴이 눈길을 끈다. 이집트에서 태어나 베를린과 뉴욕에서 작업하고 있는 이만 이사(Iman Issam 1979~)의 시리즈 작업〈 Heritage Studies 〉(2016)은 마치 미국의 1960년대 미니멀리즘으로 돌아간 듯 기하학적인 선과 매끄러운 공산품 표면을 가진 심플한 형태로 5층 바닥에 놓여 전시장을 압도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리면 커다란 화면의 애니메이션 작업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움직이는 화면 배경음악으로 미국의 국가가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코타 이자와(Kota Ezawa, 1969~)의 작품 〈 미국의 국가(National Anthem(Buffalo Bills)〉(2018)로 미국의 풋볼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국가가 나오는 동안 흑인들을 향한 경찰의 폭력을 고발하면서 꼿꼿이 서서 한손을 가슴에 얹고 경의를 표하는 대신 무릎을 꿇은 실제 사건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이다.
마커스 피셔(Markus Fisher, 1977~)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전날 자신이 참여하고 있던 로버트 라우센버그 레지던시 참여작가들을 초대해 정치적 상황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녹음 편집한 작품을 출품했다. 이 전시에서 유일하게 트럼프라는 이름이 적시된 작품이다. 1960년대 오픈 릴(reel-to-reel)식의 나그라(Nagra) 녹음기를 바닥에 놓고 릴을 천장까지 끌어올린 작품으로 나즈막하게 대화가 흘러나온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11분짜리 비디오, 〈 Triple-Chaser〉(2019)는 최근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최루탄가스를 제조하는 무기회사 사파리랜드를 고발한다. 컬렉티브 그룹인 포렌식 아키텍처(Forensic Architecture)는 전 세계에서 최루탄이 발사된 현장을 찍은 5000여 점의 이미지를 다이어그램, 지도 등으로 꾸며 최루탄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를 내레이션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관객들은 이 비디오를 보기 위해 무심코 커튼을 걷고 들어갔다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이들은 캔더스의 사임을 요구하며 작품을 철수하겠다고 미술관에 통보한 작가들 중 한 그룹이다.
한국계 작가도 4명이나 이번 비엔날레에 선정되었다. 청각장애를 타고났음에도 소리를 이용한 사운드 아티스트로 잘 알려진 크리스틴 선 킴(Christine Sun Kim, 1980~)은 장애로 인해 생기는 일상생활의 불편함을 파이도표로 나타낸 차콜 드로잉 시리즈를 출품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네팔에서 성장했으며 현재 뉴욕에서 작업 중인 마야루스 리(Maia Ruth Lee, 1983~)의 조각작품 〈 밴디지 배기지(Bandage Baggage Prototype 4) 〉(2018)는 네팔 카트만두 공항에서 중동으로 일하러 갔던 네팔 근로자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짐들을 그대로 다시 제작한 것이다. 이 작품은 이번 비엔날레의 여름프로그램 가이드 팸플릿 표지화로 선택되었다. 뉴욕에서 작업하는 사진작가 신혜지(Heji Shin, 1983~)는 출생하면서 산도(産道)를 빠져 나오는 아기의 머리를 확대한 시리즈를 전시하고 있다. 갈라 포라스-킴(Gala Porras-Kim, 1984~)은 아버지가 콜럼비아인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멕시코 고고학에 기초한 작업을 출품했다.
니콜 아이젠만(Nicole Eisenman, 1965~)이 6층 테라스에 설치한 대형 스펙터클〈 행렬 〉(2019)은이번 비엔날레를 기가막히게 압축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거대한 인간상이 힘겹게 무리를 이끌어 가고 그 뒤로 두 팔과 두 다리가 땅에 끌린 채 실려가는 사람 등 크고 작은 형상들이 이어진다. 연기가 솟아오르고 빈 참치 깡통들이 바람에 굴러 땡그랑거리는데 흰독수리는 머리를 떨어뜨리고 죽어있다. 힘겹게 발을 떼려는 한 형상의 발밑에는 씹던 껌이 붙어 있다. 그러한 군상 속에 딱 한 사람이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거들먹거리고 있다. 과연 그는 누구인가, 그가 상징하는 일군의 사람들은 누구일까?●
● < 월간미술 > vol.416 | 2019.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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