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재율(Internal Rhythm) 2020  - 67〉(사진 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291.5×218.5cm 2020 〈내재율(Internal Rhythm) 2015  - 25〉 캔버스에 아크릴 259.5×182.5cm 2015

KIM TAEHO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는 김태호의 개인전 〈내가 본 김태호, Balance〉(7.22~9.26, 스튜디오 끼)가 열린다. 작가는 평면 위에 격자의 구획을 이룩한 뒤 층위를 세우고 이를 다시 깎아내는 수행의 과정을 통해 색의 방이라는 소우주를 창조한다. 이로써 그의 캔버스는 회화로 시작하여 조각적 요소가 결합한 다양한 층위의 중첩이라는 세계관을 드러내는 일종의 고고학적 발굴 현장으로 탈바꿈한다. 김태호가 작업이라는, 수행의 다른 말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독자적 ‘물성’의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형상과 내재율, 그리고 물성과 그 주변

김노암 | 오브제 서울 디렉터

“캔버스에 격자의 선을 긋는다. 선을 따라 일정한 호흡과 질서로 물감을 붓으로 쳐서 쌓아간다. 보통은 스무 가지 색면의 층을 축적해서 두껍게 쌓인 표면을 끌칼로 깎아내면 물감 층에 숨어있던 색 점들이 살아나 안의 리듬과 밖의 구조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축적 행위와 중복으로 짜인 그리드 사이에는 수많은 사각의 작은 방이 지어진다. 벌집 같은 작은 방 하나하나에서 저마다 생명을 뿜어내는 소우주를 본다”

김태호 인터뷰 중

김태호 작가는 광복과 6·25전쟁 이후 한국미술문화의 현대화 과정에 성취한 문화적 자산을 수용하며 한국 모더니즘 1세대 작가들과 인연을 맺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세대에 속한다. 작가는 1977년 첫 개인전 〈형상에서 형태로〉 이래 다양한 재료 실험을 통해 ‘형상’을 화두로 한 평면 대형 회화를 제시하며, 추상과 모노크롬으로 대표되는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표현양식을 만들어왔다. 청년시기 작가는 세련되면서도 완성도 높은 대형 평면작업 연작으로 미술계의 큰 기대를 받으며 작가 활동을 이어갔다.

〈내재율(Internal Rhythm) 2019  - 79〉
캔버스에 아크릴 100.5×100.5cm 2019

초기 작업은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모호하게 어른거리는 이미지를 표현한 연작에 집중됐다. 초저녁 은행의 셔터가 내려진 후 셔터 뒤에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은행원들의 바쁜 움직임에서 영감받은 작업들이다.① 1970년대 고도 성장기 활기차면서도 동시에 우울하고 세련된 도시의 한 신(scene)을 옮겨놓았다. 빛과 인체가 만들어내는 음영만으로 현실을 벗어나 부드럽게 어떤 차원으로 이동한다. 이후 스프레이 기법을 사용해 인체와 빛의 음영을 표현한 연작에서 형태가 사라지고 추상이미지가 들어선 평면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점차 작가의 고유한 표현양식인 물감층이 쌓이며 깊이 있는 색층과 마티에르를 마치 회화와 조각이 융합된 듯한 방식으로 구성해왔다.
작가는 캔버스, 물감, 붓과 다양한 도구들, 지속적이며 정교한 계획과 체계, 재료의 풍부한 가능성과 효과적인 표현방식, 그리고 그 과정들을 통해 성취해낸 결과물에 대한 점진적인 변화와 전개를 보여준다. 작가의 주요 키워드인 ‘형상’과 ‘물성’이라는 개념은 그의 작업 전반부와 후반기로 나눠볼 수 있다. 1980년대 이전 작업이 ‘형상’을 화두로 삼은 추상회화였다면 1990년대 이후 작품은 ‘내재율’을 키워드로 삼아 현재에 이르는 모노크롬 시기를 형성한다. 비평가 유진상은 작가의 세계를 전반부 20년간의 ‘형상’의 시기와 후반부 20년간의 ‘내재율’의 시기로 나누기도 한다. 작가는 창작 과정에 수반하는 물성과 지속적으로 접촉을 시도함으로써 성취하려고 했다. 그의 작품은 형상과 물성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두꺼운 물감층을 끌칼로 긁어내면 드러나는 여러 겹의 물감층은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견하기 위해 수백만 년간 형성된 지층을 탐색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김태호 작가의 중심 키워드인 ‘내재율’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비평가 김영순은 작가의 ‘내재율’을 ‘표상’과 ‘실재’ 사이를 매개하고 통합하는 원리로 보았고, 유진상은 형태와 형상 사이에서 작품이 아니라 보는 이의 정신 현상이 되는 작동원리로 보고 있다. 일본 미술비평가 치바 시게오(千葉成夫)는 작가를 한국 모노크롬파의 2세대로 보면서도 동시에 여기서 이탈해 ‘내재율’을 화두로 삼아 평면성의 회화를 벗어나 회화와 부조와 조각이 융합된 새로운 형상의 회화를 모색한다고 보고 있다. 세계 또는 실재의 은폐된 그러나 본질적인 리듬으로서 ‘내재율’을 통해 우리는 김태호 작가의 작품이 지향하는 ‘형상’과 ‘물성’의 정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화면구성의 패턴은 기본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수직과 수평의 배합, 곡선과 직선의 대비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배합과 대비는 근작에 와서는 한결 내면화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 요소가 화면 속에서 서로 침투하여 완벽한 통합을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미술비평가 이일, 10회 개인전 서문 중

〈내재율(Internal Rhythm) 2021- 35〉 캔버스에 아크릴 66×163cm 2021

세계는 실재(Reality)의 세계이며 언어 밖의 세계이다. 언어로는 설명하거나 표현할 수 없다. 물성은 곧 실재의 다른 말이다. ‘실재’는 이마누엘 칸트의 ‘물자체’와 비유되기도 한다. 법과 규칙의 세계를 우리는 상징계라고 부른다. 이 세계는 과거로부터 전승된 세계이며 사회의 약속이며 체계 속에 존재한다. 라캉의 아이디어에 따르면 상상계는 그 밖에 있으며 실재(Realty)란 이 두 세계(상상계와 상징계)를 모두 아우른다. 이 실재계는 언어로도 또는 이미지로도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다.③ 우리는 아주 잠깐 그 세계들이 긴장하고 운동하고 있는 어떤 상태를 알아챌 뿐이다. 그리고 작가들은 그 찰나의 경험을 제공한다. 또 그것을 위해 평생을 수련하고 수행하듯 작업을 반복한다. 그것은 바로 언어를 넘어서는 것 또는 세계를 표현하려는 것이다.
개념미술가 조지프 코수스(Joseph Kosuth)는 예술가의 역할은 예술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술의 본성 또는 본질은 실재로서의 예술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술가마다 무엇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느끼는지에 따라서 저마다 예술 탐구의 방식은 무한히 다양하며 예술가들 사이의 예술의 본질과 형식이란 별나라만큼 멀고 제각각이다. 그러나 대체로 현대미술가들이 예술의 본질을 추구하는 과정은 예술 그 자체의 문제로 환원되며 그 과정에 ‘추상’과 ‘물성’이 중요한 화두로 제시된다. 좁게는 양식으로서의 추상뿐만 아니라 미적 인식의 전체 과정으로서 넓은 의미의 추상이 포함된다. 예술가들의 추상은 창작의 방법이자 목표가 된다. 물성은 추상의 전 과정에 결합되어 중요시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작품은 두뇌가 인식한 시각정보들이 구성한 이미지이다. 실재 자체가 아니다. 실재로서의 작품과 그것을 이미지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관객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물성이란 이 두 세계를 넘나들고 포함하는 세계를 일컫는다. 상호주관성의 세계이다. 작품의 본질과 관객의 감상과 인식 그리고 감각과 경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어떤 한계가 있다. 예술가들의 도전은 그 간극을 넘어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다. 예술가들이 더 멀리 보고 더 깊이 사유하고 더 몰입하는 것은 면벽수도자의 수행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수행이란 미술가가 자기 고유의 조형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전 과정을 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태호 작가의 작품세계를 통해서도 우리는 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처럼 추상과 물성, 욕망과 실재가 뒤엉키고 끝없이 새롭게 재구성되며 운동의 방향과 경로가 유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知)와 무지(無知), 의식과 무의식, 실재와 가상의 혼재 속에서 거대한 풍차를 향해 돌진하듯 큰 비전과 강렬한 의지를 지닌 현대예술가들이 궁극의 실재, 신비의 끝을 향해 맹렬히 전진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사태이다.④
김태호 작가의 세계에서도 물성이란 말이나 언어 논증으로 얻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유일한 체험자는 작가 자신인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체험도 이내 탈각되고 망각된다. 현대미술가는 그것을 ‘물성’이라는 형태의 언어로 표현한다. 물성이란 언어가 아닌 어떤 신호거나 지표에 불과하다. 물성 그 자체로는 우리에게 물성에 대해 완전한 정보를 줄 수 없다. 마치 동양사상의 ‘도(道)’나 ‘기(氣)’, ‘이(理)’처럼 하나의 거대한 화두이자 위대한 여정으로 남는다.

“왜 구조를 만들고 또 파괴하는가? 그리고 왜 회화가 그것의 흔적으로, 잔해로 남겨지는가? 우리가 회화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것의 전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상상해야만 한다. 관객의 시선은 회화를 완성시키는 결정적 요소로서의 ‘바깥’이다.”

유진상 〈김태호: 구조와 그 바깥〉 중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김태호조형연구소 내 전시장 광경.
사진 오른쪽과 정면 벽 설치작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발표한 〈Form〉 연작으로 수평의 기하학적 선 구조에 인체의 이미지를 투사했다. 왼쪽 벽면은 1985년 이후 작업한 〈Form〉 연작으로 한지를 짓이긴 매체 실험시기 작업이다.

〈내재율(Internal Rhythm) 2020 - 11〉(부분, 사진 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195×260.5cm 2020

대우주와 소우주, 다차원의 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다공성의 세계, 다원적 다중성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 들고 있는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 우리는 서로 알 수 없는 것을 들고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려 한다. 은폐되고 망각된 것들은 개시되는 순간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변이하며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 대부분의 예술적 대화나 소통, 상호주관적 체험이란 이런 풍경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모두 서로 자신만의 고립된 체험과 그 체험에 기반한 언어와 문법에 갇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모하거나 무의미한 헛수고를 반복하게 된다.⑤ 우리는 불가피하게 언어의 감옥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서로 공감과 소통을 시도한다.
요컨대 김태호 작가의 세계는 평면성과 모노크롬이 아닌 다공성과 물성이 만나는 내재율을 통해 다가갈 수 있다. 다만 ‘물성’이란 자연인으로서의 생활과 예술가로서의 삶 사이에 벌어진 희극과 비극의 운동 속에서 오랜 시간 쌓이고 숙성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물성을 둘러싼 논의는 철저하게 주관적이고 사적체험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가설과 논증을 통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갇힌 체계의 세계가 아니다.
김태호 작가의 세계에서 ‘형상’과 ‘내재율’은 한국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물성’과 연동하며 표현되었다. 현대미술에서 ‘물성’의 의의는 무엇보다 20세기 중반 이후 동서양 미술가들의 창작과 미적 성과에 대한 중요한 가교 구실을 했다는 것과 그 과정에 높은 수준의 미적 담론을 끌어냈다는 데 있다. 물성 그 자체가 일으킨 무수한 설명이나 이해의 곤혹에도 불구하고 ‘물성’을 키워드로 김태호 작가의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의 캔버스 속 사태와 사실을 더 많이 더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김태호 작가가 한국 단색화의 계승자에 머물지 않고 그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의 ‘물성’에 기반해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모색해왔다는 관점에서 서야 비로소 그의 회화가 하나의 실재로서 존재한다는 사태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것은 보다 감각적이고 동시에 보다 정신적인 만남일 것이다.

  1. 1977년은 우리나라가 사상 처음 해외수출 100만 불을 달성한 해로 가난을 벗어나 근대국가를 만들려는 희망이 솟는 시기였다. 한국미술계도 국제적인 비엔날레에 다수 참여하며 젊고 열정적인 신예 미술가들이 등장하는 역동적인 시기였다. 작가들이 도시를 주제로 많은 영감을 받은 시기다.
  2. 치바 시게오(千葉成夫), 유진상 등 다수의 평론가는 대체로 그의 작업시기를 1980년대 이전과 1990년대 이후로 나눈다. 이후 점진적인 진화과정을 통해 현재의 형식을 완성했다.
  3. 라캉에게 실재란 칸트의 물자체와 유사하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는 언어의 세계(상징계)에 들어서서    형성된다. 언어적 질서, 법과 규제의 세계에 굴복하고 편입되었을 때 비로소 주체가 형성된다. 동시에 상상계의 욕망을 포기한다. 이렇게 포기한 욕망은 억압되어 무의식세계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하여간 언어와 언어의 밖을 모두 아우르는 실재계를 주체의 자리에서는 결코  완전히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4. 물성은 마치 욕망처럼 결코 완전히 경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지 욕망의 주체가 아니다. 내가 욕망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영원히   결핍을 동반하며 그렇게 욕망의 대상으로서 물성을 지향하거나 어떤 경로를 통해 물성과 접촉한다 5 .
  5. 만들어진 가짜문제라고 주장했다. 예술계의 문제라고 다르지 않다. 이미 왜곡된 언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문제가 많다. 그에 따르면 언어의 구조가 세계의 구조와 동일하기 때문에 언어로 세계를 그림처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태호는 1948년 태어났다. 홍익대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동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국내와 일본, 미국, 독일 등지에서 40여 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국내외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부일미술대상(2003), 공간판화대상전 대상(1982), 미술협회전 금상(1977) 등을 수상했다. 홍익대 회화과 교수(1987~2016)를 지냈다. 현재 파주에서 작업하고 있다.

《월간미술》8월호 작가 리뷰 – 김태호

글: 김노암
사진: 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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