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수 없는 문장들을 엮어내는 일

유리

Special Feature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을 엮어내는 일
유리

아티스트 북 작업의 근원을 찾아가 보자면 아주 어릴 적 나의 비뚤어진 욕망부터 들춰보아야 한다. 어린 나이부터 책의 형태를 가진 종이 뭉치에 욕심이 많았다. 특히 마음에 드는 형태의 노트를 온전히 마음에 드는 상태로 유지하는 것에 집착했다. 늘 새 노트에 욕심을 냈고 그 안에는 꼭 나의 글과 그림을 얹었는데, 내 손의 흔적이 혹여나 그 종이 뭉치의 미감을 조금이라도 해치게 되면 참지 못하고 그 즉시 망친 페이지를 찢어버렸다. 그러면 또 찢어진 흔적으로 인해 노트의 완결성에 흠이 가게 되고, 그렇게 그 불쌍한 노트는 내 눈 밖에 나 어딘가의 구석에서 영원히 잠들게 되는 것이다. 이 연유로 학창 시절 부모님께 많이 혼났던 기억이 있다.

유치원 때는 친구의 다이어리를 욕심내어 몰래 집으로 가지고 왔던 적도 있다. 부모님께 발각되어 경찰서 앞까지 끌려가 훈육을 받고 돌아온 기억은 평생의 웃음거리다. 다행히도 따끔한 교육으로 바로 손을 씻었지만, 책의 형태를 가진 존재들에 대한 욕망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먼 훗날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노트와 책에 욕심을 부리면서 아트북을 수집하고, 다이어리와 전시방명록을 수제본으로 제작하고 있다. 심지어 북바인딩 클래스를 직접 개설하여 작업실과 외부에서 제책 방법들을 알려주는 일도 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작업으로까지 책 매체를 다루게 되었으니, 낱장들이 모여 만드는 이 덩어리에 대한 사랑은 끊이지 않고 쭉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더미〉 유화지에 유채, 하드커버 북
32×24.2×4.5cm 48쪽 2021

나를 이렇게까지 매료되게 만든 책의 힘은 뭘까(여기서 책이란 일반적인 도서 혹은 책의 형태로 묶여있는 노트 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흔히 ‘책’이라고 일컬어지는 매체의 가장 흔한 형태를 떠올려보면, 아주 얇은 낱장의 종이들이 켜켜이 쌓여 꽤나 단단한 한 덩어리를 이룬 모양새다. 아티스트 북, 즉 책 매체에 대한 나의 도취는 이 결집되는 특성에서 나오는 특유의 덩어리감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한 장 한 장 아주 나약해 보이는 종이들이 여러 겹 모이고 쌓여서 만들어지는 단단한 뭉치의 힘과 모양새, 한 덩어리를 이루게끔 하는 제책의 방식 혹은 그것들을 감싸고 있는 겉 피부 등 책이 주는 시각적 자극에 대하여 엄청난 매력과 흥미로움을 느낀다.

형태적 측면에 대한 기본적인 호감에 더하여, 종이들이 물리적으로 엮이고 책 속의 내용들이 개념적으로 묶이게 되는 이 ‘연결성’의 특징은 회화 작가로서 아티스트 북을 작업적 매체로 도입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회화 작업을 구상할 때 여러 개의 이미지를 동시에 떠올리거나, 연속적으로 이미지를 상상하고 나열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들을 한데 모으는 방식이 필요했고, 또 그들이 함께 모여 존재할 때만 가질 수 있는 의미들을 풀어내기 위해 책이라는 매체를 자연스럽게 끌어오게 되었다. 하나의 화면 안에서 종결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밖으로 이어나가고, 연속성을 가지면서도 하나의 공통적인 구조로 묶어 줄 수 있는 매체로서 아티스트 북 작업이 기능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티스트 북은 내게 어떤 의미로 작동하는가. 아주 명확하게 구분 짓기는 어렵지만 “아트북”이 넓은 범위의 아트 콘텐츠를 다루는 포괄적 의미의 ‘책’이라면, “아티스트 북”은 제작/유통/판매 등 책과 관련된 모든 과정에 작가의 개입이 크게 작용하고 작가적 태도가 가장 중심이 되는 책 매체의 ‘아트’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아티스트 북 작업에서는 책 매체를 다루되 기존의 형태와 개념을 그대로 차용하기보다는 작가적 해석을 통해 또 다른 책 형태와 개념을 만들어내는 태도를 중시하고, 직접 핸드바인딩으로 제책하여 책을 만드는 것을 추구하며 전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우선시하고 있다.

책이 가지는 형태와 상징성을 해석하고 활용하는 방식은 아티스트 북 작업이 가지는 특징이 된다. 책 속에는 무수한 관념과 이야기들이 다양한 문자로 새겨져 종이 위를 횡단하고, 글이 새겨진 각각의 페이지들은 차곡차곡 쌓여 일정 부피만큼 공간을 종단한다. 인류가 쌓아온 방대한 정보들이 문자라는 언어로써 집합되어 책이라는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언어의 집합체라는 이 중요하고 고유한 책의 상징성을 역설적으로 활용하여, 나의 아티스트 북 작업 속에는 해석 가능한 문자언어를 배제하고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이미지들을 시각언어로서 등장시킨다. 그렇게 읽을 수 없는 책을 만들어서 언어와 시각적 이미지 사이의 관계성 혹은 간극에 대해 실험해 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주 어릴 때 여러 종류의 종이들을 자르고 모으고 나름의 방식으로 묶어서 엄마의 생신 날 선물한 적이 있는데, 이것을 생애 첫 아티스트 북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본격적으로 ‘Handcrafted artist’s book’이라는 이름을 붙여 만든 초기 작업들은 여러 장의 그림을 모아 인쇄하고 그것들을 손으로 묶어 만든 책의 형태로, 주로 독립서점에 유통하여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20부 정도의 에디션을 수작업으로 만들고, 카페나 서점에서 책을 전시하고 판매하거나 아트북 페어와 아트 마켓에서 직접 작업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에는 ‘책’이라는 매체성 자체에 몰입하여 책이 유통되고 보이는 방식을 스스로 한정 짓거나 회화 작업과는 다른 맥락에 놓인 것으로 해석했던 것 같다. 서점과 북 페어에서의 아티스트 북은 출판물로서 취급되며 여러 측면에서의 한계와 아쉬움을 마주했고, 그 과정에서 책의 형태를 닮은 작업이라고 해서 책이라는 이름 안에만 가둬놓지 않고 하나의 작업 맥락 속에서 개별적인 작품으로 존재하게 할 방법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매대에 조용히 놓여있는 책보다 전시장에서 뛰어노는 책의 모습을 보고 싶어 이 매체를 전시장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아티스트 북은 출판물로서의 인쇄나 유통의 구조에서 보다 자유로워졌고, 그 존재로서 하나의 작업이 되었다. 회화 작업과 병행하면서 아티스트 북 작업이 가지는 당위성과 매력을 함께 보여주고 싶어, 책 작업의 모양새, 개념과 더불어 그것이 놓이고 설치되는 방식, 전시장에서 다른 작업들과 어우러지는 형식 등 더 넓은 범위의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시작점에 있는 아티스트 북〈더미(Dummy)〉는 2020년 시작되어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는 작업으로, 아티스트 북이 하나의 작업으로 발전하는 초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작업이다. ‘더미’는 많은 물건이 모여 쌓인 큰 덩어리라는 뜻도 되고, ‘Dummy book’은 가제본 한 책을 의미하기도 한다.〈더미〉는 책의 형태를 모방하고 있지만 유화지에 그린 유화 그림들을 쌓고 엮어 만든 읽을 수 없는 책으로, 그림 원본을 손으로 엮어 책으로 만듦으로써 복제 가능성은 사라지고 낱장의 회화 작업들이 모여 또 다른 덩어리가 되는 것, 읽을 수 있지만 읽을 수 없는 책이 되는 것, 관람객이 직접 책을 넘겨보며 자연스레 그림과 접촉하게 되는 것, 입체와 회화 사이에 존재하는 작업이 되는 것, 이 지점들을 관찰하며 추후 이어질 작업들을 위한 실마리를 얻었다.

〈작은 관〉 종이에 색연필과 파스텔, 석분점토, 나무에 유채 11.5×27×14.5cm 2023
제공: 작가

2023년 을지로의 포켓테일즈에서 진행된 전시 《Double Bind》는 ‘아티스트 북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책 작업의 여정에 중요한 전시였는데, 그간 진행했던 책 매체의 작업들을 갈무리하며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 프로젝트였다. 특히 ‘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서부터 다시 하나하나 톺아보며 책이 가지는 주요 특성 중 하나인 ‘연결성’을 견고히 하거나 느슨히 풀어보며 책에 대한 작업들을 펼쳐보았다. 얇은 종이 위에 가벼이 글자가 새겨진 책이 아닌 무거운 단어들이 침잠한 듯 나무에 깊게 이미지가 새겨진 책〈무거운 낱말들〉, 보는 이가 관 형태의 상자에 입체 오브제로 이루어진 페이지들을 차곡차곡 담아냄으로써 바인딩이 되는 책 〈작은 관〉, 혹은 책등이 묶이지 않고 해체되어 나열된 책 〈절반의 기억〉 등 ‘책’이라는 고정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매체적 경계를 흐려보는 실험을 하였다. 그 이후로도 재료적으로도, 형태적으로도, 또는 설치의 방식에서도 다양한 시도들을 해보며 확장된 개념의 책 작업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그림들을 실과 바늘로 꿰매거나 풀로 붙이고 엮어 책을 만들고 있으면 이미지와 매체를 이어주고, 나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 짓고, 결국에는 나와 타인을 혹은 세상을 연결 짓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물리적인 엮음의 행위로부터 비가시적인 연결고리들까지 상상하게 되는 이 작업은 내게 다양한 방향으로 감각이 닿게 하고, 회화로 채우지 못하는 지점들을 메워주며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한다. 앞으로 또 어떤 페이지들을 펼쳐내고, 뜯어내고, 넘겨볼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을 엮어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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