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2

이혜림
금산갤러리 4.27~5.20

컴퓨터로 제작된 여성 사이보그 캐릭터 TOKI를 통해 여성성, 성형수술, 욕망의 투사, 통제, 기술적 조작과 같은 주제들을 탐구하는 이혜림의 개인전. 3D 애니메이션 미디어 설치 작품들과 C프린트의 에디션 작품을 통해 사이버 문화와 현대 미디어에 대한 양가적인 비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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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옥이

박옥이
대구 봉산문화회관 5.3~8

물감을 반복적으로 덧입히는 과정에서 자유롭게 형성되는 질감에 주목하는 박옥이의 개인전. 작가는 단순해 보이는 작업에 치열한 사유와 노동의 흔적, 침묵의 깊이를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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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모기홍

In Flower
부산 갤러리 아인 4.20~5.20

‘꽃길을 거닐다’라는 부제로 국내외 15명 작가 강주영 곽수연 권옥연 김덕기 김명식 김은기 모기홍 안미선 오순환 이대원 장혜원 최은숙 Airy Britto Sara Sanz가 각자의 개성을 담은 꽃그림을 선보인다.
모기홍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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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모

양태모
천안 예술의 전당 5.20~29

닥섬유를 우드 평면에 꼴라주하거나 산업 폐기물에 닥섬유를 입히는 작업을 통해 일상, 노동, 기억, 풍경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온 양태모의 개인전.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단순한 빛의 표현이 아닌 빛의 발산을 목표로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작품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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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아갤러리- 김산

비평가의 시선을 사로잡은 작가
최정아갤러리 5.17~6.1

비평가 김정현 김재도 장원이 각각 추천한 김산 김태연 정해진의 3인전. 사진과 회화, 동양화 안에서 각기 다른 동시대 미술에 대한 해석을 펼쳐 보이며 미술 비평적 담론을 제시한다.
김산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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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아래-발세르리에주 사본

마음이 시키는 일 2
이유진갤러리 5.18~6.18

미니멀리즘 조각이나 단색화 사조의 회화를 연상하게 하는 가구를 모았다. 스위스 디자이너와 건축가가 디자인한 가구를 중심으로, 디자인과 가구의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실비오 쾰레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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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판화작품홍보

34회 성신판화전
대전 갤러리 쌍리 5.1~31

34주년을 맞이한 성신대학원의 판화과 소품전으로 28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판화라는 틀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매체 실험과 주제, 양식의 다변화를 통해 독창적인 기법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김민정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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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춘(누끼부탁드려요)

나무 _ 연장된 삶
갤러리 보고재 4.20~6.10

나무와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들의 철학적 사고가 녹아든 현대 장신구를 소개한다. 국내작가 8명과 해외작가 6명이 참여했다. 상이한 문화적, 지리적 배경이 드러나는 다양한 현대 장신구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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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박광빈

경계를 넘어
마가미술관 5.21~7.21

유연한 섬유재료 또는 단단한 재료를 써서 평면성을 탈피하거나 입체와 평면을 자유롭게 병치한 삼차원의 형태로 공간을 연출하는 박광빈과 문선영의 2인전. 섬유의 조밀성과 혼합성을 이용한 독특한 예술적 표현과 집합성의 반복 등으로 창조적인 기법을 만들어낸다.
박광빈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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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숙

김선숙
에이블파인아트갤러리 서울 4.27~5.15

분명 존재하지만 언어로는 명료하게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를 평면의 캔버스 위에 실현하고자하는 김선숙의 개인전 <붉은 지붕>. 작가는 ‘그리기’, ’뭉개기’, ‘지우기’를 통해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을 캔버스에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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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정운

류정운
도원미술관, 통영시민문화회관 4.16~5.5, 5.7~14

중국의 발전상과 이면의 갈등이 자아내는 사회적 심리적 불안을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표현하는 9명의 중국작가를 모았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중국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중국의 오늘을 짐작해 보고 우리의 현재모습을 비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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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진

김남진
부산 미광화랑 4.23~5.6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지속적으로 진행해오던 <The Actress> 시리즈를 발전시킨 <mise-en-scene on Frame>을 선보인다. 영화기법인 미장센을 활용하여 인물, 인물의 심리상태, 소품, 조명, 의상, 구도, 동선 등의 조형적 요소를 고려한 화면을 제작하며 영화 속 이야기를 화면 밖으로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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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시작_김미라개인전

김미라
갤러리 시작 5.18~29

캔버스 위에 개인의 기억 공간을 구축하며 시간에 따라 퇴색하거나 사라지는 기억을 ‘흔적’으로 남기는 김미라의 개인전. 작가는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지만 어느 순간 낯설게 느껴지는 시간의 경계를 기록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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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복순

윤복순
마음갤러리 5.1~31

자전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그림을 그려온 윤복순이 모성을 주제로 하는 2번째 개인전 <Motherhood>를 연다. 작가는 거울 속 자신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며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때의 모성에 대입해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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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_Multiple_Existence_키시오_스가_보도자료_이미지

키시오 스가
대구 갤러리 신라 4.30~5.31

1970년대 일본 모노하운동을 이끈 작가 키시오 스가의 개인전. 작가는 물질과 공간 사이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표현함으로써 물체의 존재 자체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며, 연관성, 차이, 대립성 등 물질 상호 관계를 통해 설치된 전시 공간에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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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권

문병권
미술세계갤러리 5.4~9

<못의 변주곡-못에 대한 편견을 깨다>라는 제목으로 펼쳐지는 문병권의 10번째 개인전. 작가는 ‘못’을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는 기능이 아닌 그 자체에 미적 의미를 결부시킨 조각작업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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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_이승혜75X150cm수정

이승혜
갤러리 파비욘드 5.10~21

“일기”와 같은 사적인 관념의 세계가 타인에게는 독특한 이미지 “읽기”의 경험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한스 안데르센’의 동화 『그림 없는 그림책』에서 제목을 차용해 <글 없는 그림책>으로 작품의 역할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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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밈김태호_IMG_1656

New Drawing
갤러리 밈 5.12~6.7

<New Drawing>이라는 주제로 김태호 오원배의 전시가 각각 열린다. 미술의 본질적 개념을 날 것으로 드러내는 드로잉에 대한 탐구와 실천, 더 나아가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드로잉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김태호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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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진

사랑과나눔
부산 갤러리 조이 5.11~31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세 명의 작가가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작품을 펼쳐보인다. 부처와 닮고 싶은 욕망을 그린 임상진, 연꽃 조형물과 생활자기를 선보이는 홍주혜, 어린아이의 천진한 미소를 그리는 이혜형이 참여한다.
임상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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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_류영신_작품=_Forest-Black_hole,_182_X_228cm,_mixed_media,_2015,ⓒADAGP__R~

류영신
갤러리 라메르 5.4~10

존재에 대한 단상을 나무로 표현하는 류영신의 개인전. 작가는 실제 자연 속에서 나무 등걸을 매만지며 관찰하던 기억을 바탕으로 폭발적으로 뻗어나가는 진실을 찾아 치밀하게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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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기

김은기
진주 금륜문화원 4.19~5.19

3차원의 가상세계를 캔버스에 구현하는 김은기의 9번째 개인전. 작가는 어떤 사물의 세밀한 구조를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물감 붓질 그자체로 자족되는 회화를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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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조은진

정용일&조은진
대전 이공갤러리 5.26~6.1

부부로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작업이라는 같은 길을 걸어가는 정용일과 조은진의 2인전. 두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서로의 작업세계를 꺼내보이며 작가로서의 삶을 되돌아보고 숨을 고르는 의미의 장을 마련한다.
조은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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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오_Seungo_Lee_Layer-Love_Heart_71x71cm_Paper_Stack_2013_FB

이승오
핑크갤러리 4.18~5.9

종이의 단면을 이용해 스컬처럴 페인팅에 가까운 회화작업을 20여 년간 꾸준히 해온 이승오의 개인전. 작가는 한국미술의 상황에서 팝아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인식이 지속적으로 수정되는 현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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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병

육근병
갤러리JJ 4.29~6.19

역사와 사람 관계에 주목하여 이를 디지털 이미지의 영상과 사운드, 설치를 아우르며 총체적으로 풀어내는 육근병의 개인전 <Angelus Novus>. 작가는 특히 ‘시선’을 매개로 기억과 기록, 역사와 삶, 나아가 우주의 근원적 문제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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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우
갤러리 미 4.6~5.7

빛과 소리를 그려내는 사공우 작가의 개인전 <POWER>.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유연함과 힘이 넘치는 파워 시리즈의 8개 신작을 선보이며 한지와 음표로 구성된 역동적인 이미지를 통해 삶의 긍정적 에너지를 표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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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4498999

홍지애
광주 우제길미술관 4.28~5.4

선인장을 주요 모티프로 삼아 작업을 지속해온 홍지애의 7번째 개인전. <공명 共鳴> 지난 몇 년간 반복적인 소재로 작가의 주관적인 감성을 회화작품과 판화로 표현하였으며, 선명하고 따뜻한 기억을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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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순

김희순
운현궁갤러리 5.1~15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해 화폭에 담아내는 김희순의 개인전 <화류동풍>. 작가는 민화 특유의 장식적인 색감과 독특한 깊이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재해석한 수묵이나 단색조의 화면에 자신의 의도나 정서를 자유롭게 표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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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홍규

문홍규
조선일보갤러리 5.11~16

고달픈 창작의 길을 넘어 칠순이 된 작가의 오랜 세월을 들여다본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창작의 길>이란 제목의 이번 전시는 작가만의 고유한 기법으로 제작한 300여 편의 작품을 4개의 섹션으로 나눠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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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관진

오관진
갤러리 마레 5.2~30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회화영역을 연출하는 오관진 작가의 전시. 비움과 채움이라는 주제로 달 항아리의 신비로움을 극사실적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초현실의 세계를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HIBITION & THEME 〈Under My Skin〉& 〈누구에게나 시선은 열려있다〉

젊은 작가로 구성된 그룹전이 비슷한 시기에 열리고 있다. 하이트컬렉션에서 계속되는 〈Under My Skin〉(2.26~5.21)과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열리는 〈누구에게나 시선은 열려있다〉(3.4~5.15). 이 두 전시는 작가 뿐 아니라 기획자의 개성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월간미술》은 이 전시를 기획한 이성휘(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와 이관훈(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을 만나 각 기획의 초점을 짚어보았다. 또한 그들이 추구하는 큐레이팅과 젊은 작가들에 대한 인상을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다른 듯, 닮은 두 기획자의 분위기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미술현장에서 살아남기

이성휘 각자 큐레이터로서 현장 경험과 전시 방향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관훈 저는 미술사나 미학, 예술학 등의 미술이론 전공자가 아녜요. 큐레이터로서 첫걸음은 1990년대 초 미술현장 밑바닥에서부터 내디뎠어요. 처음에는 막막했죠. 전시기획의 의미도 모르고 몸을 막 던지면서 겁 없이 행동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렇다 보니 백지에 글을 쓰듯, 현장에서 만나고 교우하는 작가들 하나하나가 기획을 구상하는 뼈대 역할을 했어요. 그 위에 책, 잡지, 영화, 인터넷 등에서 얻은 지식과 자연체험을 통한 감성을 올려서 자연스레 직관이 생겨난 거죠. 동아갤러리에서 8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이하 사루비아다방)에서 18년을 보냈네요. 생리 구조가 너무나 상반된, 표정 없는 냉정한 화이트 큐브와 표정 많은 날것의 시멘트 공간을 모두 경험하면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삶의 형태를 변모시켰고, 큐레이터로서 폭넓은 경험을 갖게 됐어요. 하지만 작가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죠. 그들과 작업실에서, 길거리에서, 뒤풀이와 카페에서 그리고 전시장에서 거침없는 대화와 논쟁, 삶의 에피소드를 나누고 공감하며 수많은 시간을 보냈네요. 그 속에서 작가들의 감성언어를 배웠고,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진실한 아름다움을 찾았어요. 조형의 낱낱이 어떻게 언어화되는지, 드로잉적인 사고와 사유로 작가적 태도를 견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당위성을 깨달았지요. 그리고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만의 기획과 연출방식을 체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하는 기획의 모토는 기성 작가들의 성향과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젊은 작가들의 창작 흐름을 주시하며, 내 성향에 맞는 ‘관계 짓기’를 하는 거예요. 그 속에 여러 가지 현상이 얽히고 설킨 ‘태’의 모습을 들여다보는데, 이는 텍스트보다 직관으로서 이미지를 그려낸다고 볼 수 있어요.
이성휘 전 제 기획의 방법론을 논할 만큼 경력이 오래지 않아요. 하이트컬렉션에서 3년 반, 그전에 사무소에서 1년 남짓 근무했으니 전시기획 경력이 겨우 5년 정도 됩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후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늦게 미술계에 입문했지만 중간에 휴식기가 있었기 때문에 동년배 기획자에 비해 경력은 짧은 편이죠. 반면 저랑 비슷한 시기 현장에서 활동한 작가들과 비교하면 나이는 많아요. 어중간한 위치죠. 그렇다 보니 저는 아직까지 어느 세대를 대변할 만한 큐레이터는 아닙니다. 전시 기획 횟수도 많지 않으니 제 스스로 기획의 방향에 대해 말하기 어설프지만, 돌아보면 마음속에 뭉쳐있던 것(예컨대, 〈쭈뼛쭈뼛한 대화〉(2013)), 또는 크든 작든 어떤 반발심이 기획의 동력이었습니다. 마음이 내키는 걸 하는 편인데, 방법론까진 아니지만 전시 만들 때 취하는 태도입니다. 한편으로 바로 이해가 안 되는 작업이나 작가는 오래 지켜보는 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답답할 정도로 생각만 하면서 시간을 끄는 편이에요. 아무튼 제게 별다른 방법론이 없기 때문에, 전시를 만들 때는 작가와 그들의 작업을 최우선에 두려 합니다. 그러나 연륜이 쌓이면 제가 어느 순간 오만해질 수도 있겠지요? 두렵습니다. 평생 초짜여야겠어요.
이관훈 작가의 움직임과 그들의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곳에서 기획의 소스를 추출한다는 면에서 저와 비슷하네요.
이성휘 기획의 불씨는 제 안에서 지펴지는 편이지만, 전시를 만드는 단계에 들어서면 기획의 목소리보다 작가와 작업이 전면에 부각되길 원합니다. 그때부터 저는 뒤로 숨는 편이죠. 하지만 크게 보면 저도 (주변에서 접하는)작가의 움직임과 그들의 생각에서 기획의 소스를 뽑는 거지요. 기획 소스에 대한 말씀을 하셨으니, 이 선생님이 이번에 기획하신 〈누구에게나 시선은 열려있다전〉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사실 이 전시 참여 작가가 지난해 사루비아다방에서 진행해 공모 기획한 〈제3의 과제전〉에서 선보였던 작가와 겹치는 면이 있어서 그 프로젝트부터 이번 전시를 염두에 두신 것은 아닌지 궁금했어요.
이관훈 화이트블럭으로부터 전시기획 제안을 받고 2012년부터 3년간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멘토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만난 작가들,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린 2014년 〈지역네트워킹프로젝트-시선의 차이〉와 2015년 〈제3의 과제전〉에서 소개한 작가들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평소 관심 있게 본 작가들과 어떻게 엮을 지를 염두에 두었죠. 이들을 어떤 의미로 공간에 그려야 할지 고려할 때 공간 특성을 캔버스 혹은 생성소로 생각하고 주어진 공간의 크기, 부피, 재질, 동선의 흐름 등을 고민했지요. 머릿속에 작가들의 작품이 놓일 공간이 그려진 후 전시제목을 자연히 떠올렸어요. <누구에게나 시선을 열려있다>란 제목은 전시 주체인 작가와 타자인 관객의 시선이 엇갈릴 수밖에 없는 양면성을 ‘창(프레임)’이라는 개념에 비유한 거예요. 창은 인식을 전환시키는 경계지점으로 볼 수 있는데, 작가가 창작할 때 주어진 캔버스 앞에서 끊임없이 화두를 던지고, 관객은 그 결과물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지점이 인식의 창으로서 각각 자리한다고 여겼죠. 막연할 수 있지만, 저는 이런 시점의 다양성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성휘 저희 전시는 하이트컬렉션에서 젊은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예요. 올해 3회를 맞았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미술계를 바라보며 느낀, 1980년대 중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출생, 이른바 포스트 인터넷 세대 작가들에 대한 생각을 풀어보고자 했어요. 저는 우리 미술계가 종종 이들을 표피적인 세대로만 뭉뚱그려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들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고 싶지 않았어요. 물론 이러한 점을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이용하는 작가도 있지만 이들이 모두 동색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미지를 표피, 살갗이라고 한다면, 그 밑에 있는 지방, 핏줄 등이 있겠다 생각했고, 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을 보여줄 방법을 고민하다가 “스토리텔링”을 생각했어요. 내러티브와 구조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잖아요. 기성작가 중에서 스토리텔링에 탁월한 분들-김범, 김성환, 박진아, 양혜규, 함양아-에게 작가 추천을 부탁했어요. 그리고 그분들이 추천한 8명의 작가-양희아, 윤형민, 염지혜, 이동근, 이솝, 이혜인, 전혜림, 함혜경-는 이제껏 그랬듯이 무조건 수용하고 파악해야 했습니다.
이관훈 참여 작가를 추천받은 이후부터 모든 전시 연출은 이성휘 큐레이터의 몫 아닌가요?
이성휘 물론 연출은 작가와 상의해서 같이 했죠. 연출에 추천인은 일절 관여하지 않아요. 다만 추천인과 피추천인이 상하관계로 비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추천인에게 의무적으로 인터뷰나 리뷰 글을 부탁해요. 기성세대가 그들이 추천한 젊은 세대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죠. 그리고 젊은 세대도 기성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소통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 이번 전시를 만들며, 유명한 작가 5인의 이름을 큐레이터로서 너무 쉽게 가져가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들었어요. 작가 선정은 사실 큐레이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냐는 거죠. 추천인들과 저는 위치와 역량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견해가 가능하죠. 그러나 작가들을 위해서는 추천제가 낫겠다 싶어요. 좀 더 멀리 내다봤을 때 작가들 간의 연결과 상호 이해도 중요하거든요. 예를 들어 김성환 작가는 이혜인 작가의 작업을 뉴욕에서 잠깐 봤을 뿐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건 아녜요. 그러나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꿰뚫어본 것이 있었으니 저희 전시에 추천한 거죠. 아마 두 사람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졌을 거예요.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예요. 피추천 작가들이 지금은 신진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4~5년만 흐르면 선배 작가들과 같은 전시에서 동등하게 활동하게 되니까요.
이관훈 어떤 평자는 전시할 작가들을 추천받으면 기획자의 정체성이 결여될 수 있다고 보는데, 저는 좀 달라요. 넓은 의미에서 추천인들도 작가들과 같은 의미로 다가와요. 기획자가 그리는 큰 그림에서 형식이 다를 뿐, 결과적으로 주제는 기획자가 제시하고 추천된 작가들 전체적으로 작업을 들여다보며 논의하고, 연출하고, 글 쓰고, 진행하는 형식으로 이뤄지잖아요.
이성휘 그렇다면 선생님의 경우에는 전시 연출에 큐레이터의 자의식을 많이 반영하는 편인가요? 작가들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전 작가에게 양보하고 제 자의식을 최대한 누르려는 편이거든요.
이관훈 꽤 많이 투영하는 편이라고 볼 수 있죠. 제1의 창작자인 작가는 작업실 안에서 빈 여백에 모든 에너지를 집결하여 응축시킨 창작물을 내어놓았다면, 제2의 창작자인 큐레이터는 제도 공간인 전시장에서 작가와 논의하여 또 하나의 캔버스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작품 선정도 작가와 논의해서 결정하는데 전체의 흐름을 그리고 있는 큐레이터 입장에서 주도한다고 봐요. 이런 의미에서 전시 연출은 기획의도 및 개념과 동일선상에 있으며, 전시라는 총체적인 방향에서 50% 정도 차지하죠. 현대미술이 1970년대 이후 전시사로 쓰인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보면 연출된 작품은 작가를 비평 혹은 평가하거나 담론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수단이 되는 거죠.

하이트 (4)

이동근 < Trace of Flight > 207×150cm 혼합재료 2015

하이트 (11)

양희아 <눈의 밤>(왼쪽) 종이에 수채 76×56cm(각) 2014

젊은 작가를 말하다
이성휘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큐레이터로서의 고민이 있었어요. 바로 ‘젊은 작가전’이라는 화두를 꺼내는 자체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이에요. “과연 4번째 시리즈 전시를 이어갈 수 있을까”하는 회의감도 있었죠. 막상 전시를 오픈하니, 3회째 지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체의 이야기가 생기더라고요. 결국 좀 더 반복하되 보완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젊은 작가라는 표현은 처음 이 시리즈 전시를 열 때 상대적으로 젊은 연령대의 작가를 통칭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에요. 상대적인 개념으로 정의 내렸지만 여전히 젊은 작가란 말을 모호하게 두어야 할지 고민됩니다. 단 이번 전시 참여 작가가 앞선 두 전시보다 연령이 높은 (30대 중반 이상이 다수)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봐요. 첫째는 추천을 의뢰받은 5명의 작가에게 더 어린 작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일 수 있겠죠. 둘째는 20대에게 이야기를 구조화하고 풀어내는 것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할 수 있겠단 생각도 했어요.
이관훈 이성휘 큐레이터가 말한 것처럼 ‘젊은’, ‘신진’ ‘중견’작가라는 말에 회의감이 분명 있죠. 저도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서두에 ‘신진’, ‘젊은’ 등의 표현을 쓰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려요. ‘젊다’는 표현은 시대적인 문화 현상의 가치에 대해 피드백이 되어 생겨나오는 요소라고 생각해요. 1980년대, 1990년대에도 젊은 작가는 존재했어요. 제가 기획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젊은 작가들과 늘 함께 활동해왔는데, 세월이 흐르며 저도 모르게 나이든 기획자가 되버렸네요. 미술계 현장은 시스템 측면에서 2000년대를 기점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 즈음인 1999년에 대안공간도 등장했지요. 1950~1960년대 즈음 미술계에 대략적인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 이래 50여 년간 변화한 내용보다 2000년 이후 10여 년간 일어난 변화가 훨씬 크고 급진적이죠. 거칠게 예를 들자면, 이전에는 작가들이 추상, 모던 등의 거대 담론이라는 프레임을 넘지 못할 미술사적 벽으로 바라본 측면도 있어요. 그러나 거대 담론에 대한 비판과 자의식으로 2000년대 이후 작가들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내러티브적 요소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로 ‘기억, 사건, 현상’을 들고 싶어요. 덧붙여 변화의 주기가 더욱 가속화됐어요. 2000년대에 등장한 젊은 작가들과는 또 다른 변모로 2010년대에 등장하는 젊은 작가들이 번역되거든요. 이러한 변화로 다양성과 해체론이 계속 전개되는 것을 저는 긍정적으로 봐요.
이성휘 ‘젊은’ 작가만큼 ‘기성세대’의 위치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전시 추천인을 선정할 당시 ‘스토리텔링’이라 하면 일단 영상작업이 다수를 차지할 것 같았어요. 그러나 매체가 다양했으면 하는 마음에 추천인에 화가를 포함시키고자 했죠. 평소 스토리텔링 부분이 강점이라고 생각한 모 화가에게 먼저 부탁했어요. 그분이 처음에는 흔쾌히 응했지만 이후 다른 추천인 명단을 말했더니 부담스럽다고 사양하더라고요. 전 추천과 비추천인을 신·구세대 작가로 획일적으로 나누거나 경력을 계량하듯이 접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나 경력이 그다지 중요치 않았는데 말이죠.
이관훈 최근 세대론이 대두되잖아요. 2000년대 세대라고 하면, 1980년대는 국내에서 대학을 다니고 유학 간 세대가 꽤 많았어요. 당시 유학에서 돌아온 이 젊은 세대가 대안공간의 출발점을 함께 했어요. 시간이 흘러 지금은 미술계에서 하나의 문화적인 지형을 이루는 작가가 되었죠. 2010년도가 되니 젊은 세대 중에 유럽을 중심으로 유학한 작가가 활발히 활동하는 듯 보여요. 2014년 사루비아다방의 운영체제 변환도 이 시기와 맞물리죠. 특히 작년 3월부터 황정인 큐레이터와 함께 하면서 젊은 작가, 비평가들의 네트워크가 생겼어요. 관객에도 변화가 있고요. 2011년 1월 전시공간을 인사동에서 창성동으로 옮긴 후에 유독 젊은 세대가 전시장을 많이 찾아요.
이성휘 저는 세대 간 불통이 심화되고 있는 지점이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제 또래들은 자기가 먼저 작업을 하고 그 결과물로서 작가 또는 큐레이터로 인정을 받느냐 아니냐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반면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생 작가나 큐레이터는 자기 정체성을 먼저 작가로 혹은 큐레이터로 규정한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해요. 현 사회와 시대가 생존을 위해 버티려고 아등바등하게 만들고 있잖아요. 젊은 세대는 생존을 위해 자기 규정을 우선시하는 것 같아요. 물론 어떤 순서가 옳고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녜요. 단지 이 시대가 자기에게 스스로 정체성을 부여해야 생존할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런 길을 택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관훈 과거와 현재 세대가 가진 감성도 다르죠. 최근 미술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키워드가 ‘재생과 반복’이 아닐까 싶어요. 소비문화시대에서 답습되고 쌓인 내용이죠. 재생과 반복이란 면에서 완전한 창작의 자유로움도 새로운 창작도 없죠. 요즘 젊은 작가들이 이를 인식해서 수용하기보다 무의식적인 흐름에서 본인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 같아요. 하지만 몇몇 작가에게서 비상적인 모습이 보이기도 하죠. 재생과 반복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저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봐요.
이성휘 물론 모두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 젊은 작가들 또래에게는 ‘팬덤’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아이돌에 열광하는 대중문화에 익숙한 세대가 가진 특징일 수도 있겠네요. 작가들 사이에서도 팬덤이 존재해서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호불호가 갈리는 현상은 조금 불안해 보이는 요소예요. 모든 개인이 각자의 판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휩쓸려가는 모습을 보면 아슬아슬하죠. 반면, 작가 혹은 큐레이터로서 자기 정체성을 먼저 부여하는 것에 의문을 품는 같은 또래 작가를 보기도 해요. 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눌 수 없겠죠.
이관훈 긍정적인 편견은 여러가지 양상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좋아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몸짓까지 포함한다는 거죠.
이성휘 충분히 공감해요. 그럼에도 세대론으로 작품을 규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또래 작가라고 해서 전부 공감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물론 세대들의 공통분모도 있지만 집단보다 개인으로 파고들려고 해요.

화이트 (25)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2층 복도에 설치된 류민지의 작업 전경

화이트 (20)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전시 전경 최지원(왼쪽), 이은새(오른쪽)

큐레이터로 살아가기
이관훈 대안공간은 존재 자체가 당위성보다는 척탄병처럼 일선에서 움직여야 하는, 그래야만 가치와 역할이 생기죠. 그래서 저는 항상 촉수를 세우고 작가를 살피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국내 미술계의 작가 및 전시 시스템은 매번 새로운 것을 보이고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어떤 정신적인 병리현상에 걸린 느낌이 강해요. 60세에 그동안 했던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첫 개인전을 연 작가 사례가 있었는데, 가슴 뭉클하게 하는 존경심이 자연스레 우러났어요. 현 시대적 속성인진 몰라도 작가들, 아니 미술현장의 시스템은 창작물을 너무도 빠르게 보여주려 해서 작가들의 작업실과 창고에 방치된 것이 너무 많아요. 시대가 지났다고 계속 새로운 것을 해야 하고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요. 현 시대는 새로운 창작도 사고를 증폭시키는 전환의 계기로 삼지만, 예전의 기억 속으로 묻혀버린 존재도 다시 여기에서 재편집하여 좋은 전시를 엮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다고 봅니다. 저는 현시점에서 ‘기억과 낭만’이 예전보다 더 중요한 세대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흐를수록 작가와 작품은 쌓이고 있잖아요. 개인전을 다루더라도 재기획 차원에서 달라진 혹은 더해진 문화의 층위에서 재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작가의 담론과 재평가가 이뤄져야하지 않을까요. 시대가 지나면 다시 아이콘이 형성될 수 있어요. 비평·미술사적 측면에서 어떻게 편집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에요. 대중문화에서도 복고 열풍이 불어 기억에 대한 복원을 통해 희열과 감동을 느끼잖아요. 큐레이터들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에요. 현장에서 보이는 것은 결국 작가들이 힘들게 가꿔온 영혼을 머금은 잔영물이죠. 큐레이터들은 나침반과 같이 작가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하며, 모든 사회관계 안에서 그들을 밖으로 연결해야 하는 네트워크로 작용해야 합니다. 네트워크는 정보의 흐름이며, 신뢰의 흐름이며, 자본의 흐름이며, 시스템의 흐름일 뿐 아니라 끊임없는 조력자의 역할을 지닙니다. 말하자면 무형의 존재인거죠.
이성휘 저는 전시의 여러 형식 중에서 개인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개인전에서 작가만 보려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개인전에도 큐레이터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작가-큐레이터 간의 긴장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전이 작가의 역량도 고스란히 보이는 것이지만, 큐레이터의 역량도 고스란히 보인다고 보고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큐레이터로서 잘 버텨야 앞으로 최장 10년이 한계일 거 같아요. 저는 대체로 허송세월하며 살아왔어요. 그러나 어릴 때부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이 먹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그 10년을 위해 5년을, 또 그 5년을 위해 올해 1년을 잘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어요.
이관훈 ‘버티기’란 말이 인상적이네요. 지금 사회의 키워드가 아닐까 해요. 사회에 희망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버틸까 하는 생존의 문제가 중요한 화두인 것 같아요. 작가도 공간도 큐레이터도 모두 마찬가지죠. 작가의 경우, 사실 어떻게 작가가 되느냐는 것은 막연하거든요. 버티는 게 답일까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이성휘 ‘잘’버텨야겠지요. 저는 유한한 시간 동안 잘 버티려고 노력하려해요.
진행 정리•임승현 기자

EXHIBITION TOPIC Пен Варле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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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쉬코토프스키> 에칭 49×91.4cm 1964 아래 <화가 표트르 포민의 초상>(맨 왼쪽) 캔버스에 유채 80×60cm 1973

냉전과 분단에 가려 제대로 조명조차 받지 못한 러시아 국적 한인 화가 변월룡(1916~1990)의 작품이 국내 첫선을 보였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변월룡의 삶과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대규모 회고전(3.3~5.8)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마련되었다.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 미술계에서 활동했던 그는 1953년 북한을 방문해 북한 미술의 토대를 세웠지만 이후 정치적 이유로 입국이 거부됐고, 남쪽에선 그 존재조차 몰랐던 ‘숨은 거장’이다. 이번 전시에는 초상화와 풍경화, 드로잉 200여 점과 아카이브 70여 점이 소개되어 특정 이데올로기를 넘어 한 작가의 풍부한 작업세계를 선보인다.

향수(鄕愁)가 기억으로 : 변월룡의 특별한 귀향

조은정 미술비평

유화, 드로잉, 판화, 포스터 등 다양한 유형과 인물초상, 풍경, 정물, 역사화와 선전화 등의 작품은 리얼리즘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변월룡은 도구와 감상, 의무와 창작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림 그 자체의 모습, 날것으로의 회화를 펼쳐낸다.
러시아의 한 전시실에서 한눈에 한국인의 그림임을 알아보고 변월룡이라는 화가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연구자 문영대의 저서 《러시아 한인화가 변월룡과 북한에서 온 편지》(2004)의 발간은 답보 상태에 있던 월북 미술인과 북한 미술계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후 간간이 변월룡이 제작한 초상화 몇 점이 전시되곤 했고, 그때마다 그의 사실적인 묘사력은 대중의 관심을 붙잡아두기에 충분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미술 100년전>에 김용준, 이기영의 초상화가 소개되었고, 이 두 점의 그림은 광복 이후 북한 미술계의 형성을 파악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후 2013년과 2014년에 전북도립미술관의 <한국의 초상미술, 기억을 넘어서전>에서 한상진, 원홍구, 이기영, 어부 한슈라 등의 초상화와 최승희 드로잉, 동판화 <북한 어부>가 소개되어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한 변월룡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변월룡의 작품 세계를 가늠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정보였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보레이(Borey)화랑에서 그의 딸 올가의 기획에 의해 성립된 전시마저 <펜 봐를렌 에칭전>이란 제목의 판화 전시였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변월룡의 작품세계 전모를 추정할 수 있는 최초의 대규모 전시이자 형상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한 그가 조국에 전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디아스포라의 미술인이 경험한 북한에서의 배신이 뼛속 깊었기에 생전에는 결코 잘 알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조국에 그가 작품이나마 돌아오는 상황을 그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카레이스키’라 불리는 이역에서 떠도는 한국인들, 그 쓸쓸한 연해주에서 태어나 미술인으로 살아간 변월룡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사의 압축판이자 디아스포라의 삶 자체를 축약하여 보여준다. 그의 할아버지는 가솔을 이끌고 연해주로 이주하였고 변월룡은 그곳에서 태어났으므로 이주 3세대이다.
1916년 9월 29일 쉬코토프키구 유랑촌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의 미술 재능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 미술학교에 입학하는 데 기꺼이 마음과 돈을 보태게 하였다. 3년 과정의 미술학교를 마친 후 그의 뛰어난 실력을 알아본 교수는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레핀미술대학 진학을 추진하였고, 레핀에서의 졸업작품 <조선의 어부들>로 그는 대학원 진학을 권유받았다. 1951년 예술학 박사학위 취득과 함께 모교인 레핀미술대학 데생과 교수가 되었으니 그는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한계를 넘어섰던 것이다. 그리고 1953년 변월룡은 평양미술대학 고문 겸 학장으로 추대되어 커리큘럼을 재구성하고 교재를 손수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지도하고 여러 화가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전후 북한 미술계가 그의 손에 의해 재편된 것이다.
1년 정도 평양에서 활동하던 그는 곧 평양을 다시 방문할 것이라 믿으며 부인이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북한에 귀화를 거부했고 연안파를 숙청한 북한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변월룡에 대한 기억을 지워갔으며 그는 조국이라고 생각한 어떤 땅도 밟을 수 없었다. 그는 방학 때마다 연해주를 방문하여 풍광과 소나무를 그렸다. 농경지를 개간하고 삶의 자리를 구축했던 고려인들이 소련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모두 떠난 황량한 곳이지만, 그곳은 그에게 조국의 대체장소였던 것이다. 연구자 문영대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74년이란 삶 중 단 1년 3개월 남짓의 고국생활을 제외하면, 소련 땅에서 그것도 온전히 냉전시대만을 겪다 생을 마감”하였다. 그에게 조국이란, 구체적인 장소로서의 국가가 아니었다. 정겨운 사람들의 움직임과 산천에 대한 그의 시선을 좇다 보면 마치 복숭아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이 그런 것처럼 소나무가 위치한 언덕, 그곳에 조국이라는 이름의 이상향이 펼쳐지고 있다.

 캔버스에 유채 115×200cm 1955

<조선의 모내기> 캔버스에 유채 115×200cm 1955

기억되는 사람들, 환기되는 장소
4개의 공간으로 구성된 덕수궁미술관의 구조에 맞추어 전시는 ‘레닌그라드 파노라마’, ‘영혼을 담은 초상’, ‘평양기행’, ‘디아스포라의 풍경’의 4개 주제로 구성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구소련 명칭인 레닌그라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사회주의 프로파간다 작품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암시한다. 계급투쟁 혁명을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중요시하는 행복과 평등은 비참한 노동자와 농민의 모습과 대비된 환한 웃음으로 무장한 사람들 그리고 노동자 영웅으로 상징된다. 전형화한 포스터나 레닌을 주제로 한 일련의 판화는 그가 구소련에서 얼마나 활발히 활동한 작가였는지를 증명하는 듯하다.
위대한 예술가에서부터 학교 동료 교수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긴 인물 초상화는 묘사력뿐만 아니라 그의 인물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사람의 앞모습을 보고 뒤통수를 그릴 수 있는 그의 데생실력은 인물에서 만개한다.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자상의 현실적인 변주, 행복한 공간에 거주하는 소녀와 수많은 사회적 영웅은 그가 그린 집단 인물화들이 공공기관에 컬렉션된 이유를 알게 한다. 인물의 사회적 업무와 활동을 관계된 지물이나 그림 속 그림을 통하여 나타내는 아주 오래된 방식에 충실한 초상화는 그가 경직된 사회에서 활동하였음을 눈치 채게 한다. 그럼에도 작가의 다양한 변주는 인간 그 자체의 내면 표현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닥터 지바고》의 저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책상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데 한 손은 글을 쓰던 펜과 종이 위에 그리고 다른 한 손은 책을 지시하고 있지만 표정에서 우리는 고뇌를 감지한다. 석고상을 배경으로 하거나 파레트와 붓을 든 인물은 화가들이지만 그들을 표현해내는 변월룡의 붓질은 다양하고 표면의 마티에르는 더 이상 대상 인물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길을 고정시키는 것은 휘슬러가 자신의 어머니를 그렇게 했던 것처럼 흰색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힌 그의 어머니를 화면 한가득 위치시킨 화포이다. 그럼에도 발길을 붙들고 변월룡이라는 작가에 대해 집중하게 하는 것은 그가 만난 월북 문화인들의 초상화들이다. 서울에 있는 아들인 원병오 박사와 북방 쇠찌르레기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조류학자 원홍구 박사는 박제된 새를 앞에 둔 채 다른 곳을 응시한다. 훈장을 주렁주렁 단 그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깊은 곳에서 쏟아져나오는 회한이 화포를 넘쳐 나온다.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한설야, 생각에 잠긴 이기영, 한상진이나 이기영 모두 그 내면의 고독이 감지되는 것은 감상자의 센티멘털한 감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월북한 화가들 또한 더불어 귀향하였다. 황금색 스카프를 두른 채 그림을 들어 보고 있는 유화 속 김용준과 드로잉 안에서 파이프를 문 배운성에 이르기까지 분단된 조국에서 한쪽에서는 숙청되고 한쪽에서는 잊힌 그들이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유리진열장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화가 변월룡의 귀향에는 진심으로 그를 존경했던, 근대 잊혀가던 화가들이 동행했다. 파편화한 미술사의 어느 부분의 봉합이 이루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변월룡이 그려낸 조국의 모습이 그저 조국이라는 환상적 어느 장소인 것처럼 그들 또한 그렇게 미의 세계를 헤매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넘치는 사진자료와 꼭꼭 눌러쓴 정갈한 편지지 사이 공간에서. ●

사진(노란색파일)_08

변월룡은 1916년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의 후손으로 연해주 쉬코토프스키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최고 미술교육기관인 레닌 예술아카데미를 거쳐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51년부터 35년간 모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3년 북한을 방문해 15개월간 평양미술대학 학장 및 고문을 역임하며 북한 미술교육 체계의 초석을 다졌다. 북한에서 소련파가 숙청된 이후 다시 북한 땅을 밟지 못했으며, 1990년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했다.

 

NEW FACE 2016 윤병주

거리 두고 다가가기

영화 ‘마션’은 주인공 마크 와트니가 화성 탐사 중 혼자 화성에 남아 고군분투하는 생존기를 담았다. 영화는 지구에서 가장 ‘화성스러운 곳’ 요르단 와디럼(Wadi Rum)사막에서 화성의 모습을 촬영해 스크린으로 옮겨와 관객의 눈을 속였다. 영화 ‘마션’이 화성(火星) 재현의 극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화성과 유사한 분위기를 내는 지역을 선택했다면, 작가 윤병주는 경기도 화성(華城)을 가장 화성(火星)답게 덧입혔다. 〈화성 연작〉은 화성(火星)을 탐사하는 방식으로 기록한 경기도 화성(華城)의 모습을 담은 작업이다. 뒤늦은 나이에 미대에 진학한 작가는 대학 입학 후 4년간 다양한 변주를 통해 이 연작을 이어갔다. 작가에게 경기도 화성은 살인 사건으로 얼룩진 위험한 이미지, 도시개발로 파헤쳐진 공사 현장이 주는 삭막한 분위기로 짙은 어두움이 드리운 듯 느껴졌다. 그는 ‘화성’이라는 동음이의어로 언어·시각적 유희의 옷을 덧입혀 경기도 화성의 장소적 맥락을 잘라냈다. ‘쿨한’ 접근법으로 시작한 이 작업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를 거듭했다. 헬리캠을 이용해 화성 공사 현장을 촬영한 〈The Face〉는 공사장을 일순간 화성(火星)의 표면으로 보이도록 했다. 실시간 영상 〈Mark on Hwaseong〉은 전시장 빈 벽에 화성을 탐사하는 작가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실존의 공간을 가상의 공간으로 꾸미고, 허상으로 변환한다. 카메라의 눈을 통하면서 작가의 위치는 자신이 경험한 일상의 공간에서 점차 멀어지고 감정적 개입은 최소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지역을 표현하면서도 일상의 면면은 다큐멘터리처럼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작업으로부터 거리 두기를 시도하는 작가의 태도는 〈우사단〉에서도 나타난다. 이태원은 이슬람사원을 중심으로 중동아시아 사람이 다수 거주하면서 자주 오가는 곳이다. 이국적인 인상의 사람들에게 사회는 낯섦으로부터 비롯한 선입관을 갖고 대한다. 그러나 해외 생활과 잦은 이주를 경험한 작가는 ‘다름’에 대한 내성이 있는듯하다. 사진에 콘트라스트를 강하게 주고,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속에서 관객은 익숙한 사회적 감정을 극적으로 느끼게 된다. 작가는 “그러한 감정적 동요를 느끼는 순간 언론매체의 영향으로 어떠한 정보도 없는 사진 속 인물에 과도하게 동정어린 감정을 부여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묻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기를 터부시하면서도 만연한 사회적 편견을 몽타주로 극대화해서 자조적인 질문을 유도한다. 작가가 사진으로부터 거리를 둘수록 보는 이는 사진 속 인물과 거리를 좁힐지도 모른다.
작가는 지난 3월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화성과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작업을 향해 내딛는 첫발이다. 아르헨티나 역시 작가가 거주했던 곳이다. 그곳에서 어떤 작업을 펼칠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현장에서 부딪치면서 그만의 ‘쿨함’으로 풀어낼 내용이 ‘핫’하게 기다려진다.
임승현 기자

윤병주
1984년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사진과를 졸업했고 서울과학기술대 조형예술대학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2014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과 송은아트큐브에서 개인전을 열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3년 박건희 문화재단 미래작가상을 수상했고, 2014년 제26회 중앙미술대전, 송은아트큐브 전시지원 작가에 선정됐다.

〈 Mark on Hwaseong _Live Broadcast 〉 싱글채널 비디오 36분 45초 2014

〈 Mark on Hwaseong _Live Broadcast 〉 싱글채널 비디오 36분 45초 2014

 

CRITIC 김정헌 생각의 그림·그림의 생각: 불편한, 불온한, 불후의, 불륜의, … 그냥 명작전

아트스페이스 풀 3.17~4.10

홍지석 단국대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교수

한 작가의 작업을 회고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통시적 축에서 그 작가 작업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피는 것이다. 초기-중기-후기의 형식/양식 변화의 관점에서 작가를 다루는 방법 말이다. 다른 하나는 공시적 축에서 작가의 작업 양상을 분류하는 것이다. 해당 작가의 전체 작업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양상을 범주화하는 접근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김정헌의 작업을 역사적으로 정리한 연구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미완의 상태로 미술사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상태다. 마침 이번 전시와 더불어 화가 자신이 그간의 작업을 화집, 문집 형태로 정리해 출판했으니 향후 김정헌의 작업에 접근하는 미술사가나 비평가들에게 유용한 자료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정작 그 화집을 일별해보건대 김정헌의 전체 작업을 시간의 흐름에 따른 형식이나 양식 변천이라는 수준에서 접근하기는 역시 수월치 않아 보인다. 그간 이 작가는 산동네, 도시, 농촌(또는 흙), 한국 현대사 등 여러 주제를 다뤄왔지만 그 진행 과정에서 작품의 형식, 양식의 결정적 변화를 포착하기가 매우 어렵다. 김정헌의 작업에서 역사의 변화는 형식이나 양식보다는 내용, 곧 그림에 포함시킨 당대의 사회상에서 좀 더 잘 드러난다. 특히 작품 안에 포함된 단어나 문장들, 이를테면 ‘럭키 모노륨’ ‘그 해 5월 광주의 푸르름’ ‘백조의 아몰랑 꿈’ 등 해당 작업의 역사적 위치를 지정해주는 지표들이다.
하지만 공시적 축에서 김정헌 작업의 특징적인 양상을 범주화하는 작업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김정헌의 작업을 다룬 논자들은 대부분 김정헌이 자신의 화폭에 포함시킨 이질적인 요소들, 곧 글자(문자 텍스트)와 그림(이미지), 추상과 구상,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들이 작품 안에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럭키 모노륨…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1981)을 전후로 한 시기에 그의 작품에 등장하여 이후 그의 화면에 가시적으로 부각된 문자/글자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이에 대해서는 먼저 작가의 개입으로 작품 안에 공존하게 된 이질적인 것들이 적대적인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는 양상에 주목하는 논의들이 있다. 이를테면 <럭키 모노륨…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에서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이라는 문장은 그림의 다른 이미지들(가령 허리를 숙인 농부의 뒷모습)과 격하게 충돌하며 이 충돌은 문장의 메시지를 산산조각내는 결과를 빚었다. 김정헌 자신도 이렇게 한 공간에 결합된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를 갉아먹거나 오염시킬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과거 어떤 자리에서 “경박스러운 회화성, 스티커나 반짝이는 큐빅으로 무거운 주제를 전복할 수 있지 않을까”(1997)라고 물었다. 과거에 박모(박이소)는 김정헌 작업에서 내러티브가 파괴되고 분열된 단어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양상에 주목해 그의 전체 작업을 “마치 산낙지의 잘린 다리, 몸체 등이 각자 꿈틀대는 형상”(1997)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박찬경(1997)은 데리다를 참조하여 김정헌이 의미의 유보, 또는 지연을 도모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질적인 것의 결합에 더해 김정헌 특유의 “대충 그리거나 못 그리거나 그리다 말거나 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유보를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 당시 박찬경의 판단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방향의 논의들이 있다. 여기서 김정헌의 작업에 개입된 이질적인 것들은 적대적으로 상호 작용하기보다는 즐겁게 화합하여 어떤 긍정적인 메시지들을 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2004년에 발표한 <김정헌論>에서 심광현은 김정헌 작업에 개입된 글자들(문장들)이 “침묵하고 있는 그림을 작동하게 하는 ‘의미론적 끈’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친숙한 어조로 말을 거는 제목들” 때문에 “관객은 벽면에 걸린 그림과 대화를 시작하며” 그 결과 다양한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같은 해에 백지숙도 글과 그림이 결합된 김정헌의 작업을 상호텍스트성의 사례로, 즉 일종의 이야기 그림(narrative painting)으로 다룬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롤랑 바르트가 말한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정박’과 ‘중계’라는 개념은 김정헌 그림에 개입된 단어/ 문장들의 기능을 설명하는 적절한 개념으로 부각되었다. 심광현과 백지숙의 논의에서 김정헌의 작업은 조선시대의 ‘시서화 삼절’ 또는 ‘문인화’처럼 글(書)과 그림(畵)이 평화롭게 상호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백지숙의 주장대로라면-만약 21세기에도 문인화가 가능하다면-김정헌은 “동시대적 문인화를 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양자 사이에서 김정헌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내가 보기에 김정헌은 일종의 취사선택의 방식으로 두 방향을 모두 취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부정하는, 또는 적대하는 것을 다룰 때 그림에 개입된 이질적인 것들의 적대적 공존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그가 긍정하는 것, 옹호하고자 하는 것을 다룰 때 그림에 개입된 이질적인 것들은 서로 화합한다. 2016년 전시 작품 가운데 <이상한 풍경> (1999)은 전자에 속한다. 분단된 양자의 한쪽에 이리저리 흩어진 ‘쭉쭉’ ‘흑흑’ ‘낄낄낄’ ‘꿀꺽꿀꺽’ 같은 단어들은 그려진 이미지들과 적대적으로 기능하여 전체적으로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반면에 <희망도 슬프다>(2015)에서 그림에 포함된 ‘희망도 슬프다’는 문장은 어두운 바다, 푸른 하늘 흰 구름, 노랗게 빛나는 창문과 더불어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의미 창출에 기여한다. 하지만 그림에 개입된 이질적인 것들이 언제나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기능하거나 작동하지는 않는다. 부정에는 언제나 긍정이, 긍정에는 언제나 부정이 깃들어 있다. 파괴가 있다면 건설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2016년 전시는 어쩌면 이런 자신의 애매한 위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시도일지 모르겠다. 작가는 이 전시에 “생각의 그림?그림의 생각”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 제목이 아우르는 양방향이 나로서는 야릇하게 느껴진다. 그 양방향을 포괄하는 것이야말로 “이 작가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전략이 아니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친 까닭이다.

위 김정헌 <국가를 향해 쏴라>(맨 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2015

CRITIC 문성식 얄궂은 세계

두산갤러리 3.9~4.2

정신영 서울대학교 미술관 책임학예연구사

전시장에서 4m가 넘는 구상 회화를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문성식이 이번 전시에서 제시한 <숲의 내부>(2015~2016), <밤>(2015~2016)과 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는 획들로 나뭇가지, 나뭇잎을 묘사하여 숲의 파노라마를 펼쳐가는 대형 세밀화 양식은 무엇보다 그 노동집약성에 감복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스마트폰의 작은 세로형 인터페이스를 일일 평균 3시간 이상 쳐다본다는 우리의 시각 활동을 생각할 때 이 대형 화면은 쉽게 일망(一望)되지 않는다. 숲 속에 그려진 동물이나 사냥꾼을 발견하면 스마트폰으로 찍기에 바쁜 관객들의 반응처럼 모처럼의 넓은 화면은 환경이나 공간으로서 관객을 에워싸기보다는 파편화된 정보로 접수된다.
몽환적 사건들이 우거진 숲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고전 <한여름 밤의 꿈> 처럼, 위의 두 작품에서도 숲을 배경으로 짐승들의 약육강식의 사투와 먹이사슬의 맨 위를 차지하는 인간의 온갖 ‘얄궂은’ 행위들이 자행된다. 숲 속 나무 사이사이에 서로를 뜯어먹는 짐승들의 무리나 멀리서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사냥꾼의 모습, 캔버스 상단에는 <폴리베르제르의 바>의 공중 무용수처럼 나무에 목매단 자살자의 다리가 걸쳐 있다. 이러한 장치들은 마치 부활절 달걀 찾기처럼 있을 법한 곳에 기대했던 것이 숨어 있는 기시감이 있어 다소의 진부하다.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얄궂음’의 기호들이다.
작가의 인간 삶에 대한 관심은 대담한 흑백 드로잉 시리즈에서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남녀가 사랑하고 싸우고 늙어 죽어가는 일장 드라마가 마치 현대판 십계를 보는 것처럼 미묘한 불편함을 주는 것은 표현의 지나친 솔직함 때문만은 아니고, 마치 우리가 이들의 슬픔과 늙음, 욕정과 분노를 이해함과 동시에 그 윤리적 책임마저 떠안고 설교당하는 듯한 동질감에 말미암은 것 같다. <늙은 아들과 더 늙은 엄마>(2013)는 목각인형처럼 작고 경직된 어머니와 그녀를 무릎에 얹은 노년의 아들과의 역-피에타이다.
한 획, 한 획 붓으로 짜 엮은 듯이 흑백의 농담 차이만으로 그린 이 작품은 시간의 공포와 다가오는 죽음, 그리고 생의 기원인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담아 그 어느 누구도 편하게 쳐다볼 수 없는 이미지이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유난히 눈물을 흘리는 어른들의 모습이 많이 있다.
그중 <사람. 눈물. 파리.>(2015~2016)로 불리는 4명의 초상화 연작에서는 눈을 감고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는 중년이나 얼굴을 손으로 에워싼 여인, 눈감고 누운 노인의 눈초리에서 눈물이 막 떨어지는 모습 등 표준적 일상에서는 익숙지 않은 장면들이 담겨있다. 이 어른들의 표현 역시 세밀화적으로, 구슬처럼 흐르는 눈물은 물론 피부의 질감이나 주름, 기미나 실핏줄까지 비춰, 그 앞에서 몸둘바를 모르게 되는 대형작품보다도 화면을 쳐다보는 재미가 있다. 극사실적인 표면처리에 비해, 인물의 이목구비나 골격의 표현에는 위의 드로잉과 같은 캐리커처적 왜곡이나 형상의 추상화가 약하게 남아있어 실존하는 인물의 모습이기보다는 캐릭터화된 존재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각각의 초상에는 파리가 한 마리씩 붙어 있는데, 정물화에 그려 넣어진 파리라면 꽃이나 과일들의 유혹하는 달콤한 향을 떠올리거나 죽음으로 향하는 부패가 진행됨을 상징할 법한데, 인물에 얹혀진 파리들은 다시 한 번 이들이 회화적 존재이며, 이들의 슬픔도 수사(修辭)적 차원임을 상기시킨다. 대형회화에서부터 흑백 드로잉, 그리고 갤러리 밖에 걸린 굵은 먹선의 누드 크로키들까지 작가의 매체에 대한 감수성과 순발력, 동시에 다양한 회화적 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느끼게 한다.

위 문성식 <사람. 눈물. 파리.> 캔버스에 아크릴 2015~2016

CRITIC 박혜수 Now Here Is Nowhere

송은아트스페이스 2.23~4.9

이수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박혜수의 개인전 <지금 여기는 어디에도 없다>는 작가가 2년 가까이 네덜란드와 영국 두 군데의 레지던시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서 오랜만에 연 전시다. 기나긴 시간의 흐름을 자연물(나무 둥치)에 남기는 초기작을 선보인 <시간의 깊이전>이나 <깊이에의 시간전>을 통해 우리가 삶 속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시간을 자연을 소재로 하여 표현한 작가는 각종 전시, 레지던시, 공모전 등을 겪어가면서 작업 영역을 확장해왔다. 그는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조건을 파고들면서 연구와 실험을 병행한다. <Meet the Lost>나 <잃어버린 꿈> 등은 경쟁적인 현대 사회에서 고유의 꿈이나 희망을 버리거나 포기당한 상태에서 사회에 무난히 적응하여 살아가는 우리의 우울한 자화상을 대면하도록 권유하고 자각을 일깨우는 작품이었다. 소중한 것들을 다 잃어버린 채,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리 바쁘게 살아가는 거냐고 묻는 목소리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이번 전시 역시 우리가 모두 집착하듯 매달리는 ‘보통’의 삶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는 이전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서’라지만, 사실상은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이 ‘남보다 낫게’ 살기를 바라며, 한편으로 ‘남보다 못하게’ 살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우리의 복합적인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한국과 영국 신문에서 보도된 우울한 기사에 펀칭을 하여 소리가 나도록 만든 오르골 <Gloomy Monday>에 위험한 사건사고에 휘말리지 않고 제발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영돼 있다면, 기러기 아빠의 수집품에는 자녀만큼은 제발 남들보다 낫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남보다 못한 삶을 선택하는 쓸쓸한 모습이 담겨 있다.
메차닌 공간의 대형 설치작품 <World’s Best>에는 무조건 달성해야 할 목표처럼 세계 최고를 추구하는 방향 없는 욕망이 그려져 있다.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최고, 일등이 되기를 요구하고, ‘세계 최고’라는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목표가 절대적인 목표로 제시되는 우리 사회의 기형적인 모습이 풍자되어 있다. 맨 아래칸의 사람은 위의 풍경이 보이지 않고, 맨 위칸에서는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외되고 단절되어 있다. 전시실에는 책으로 걸려 있지만 이번 전시의 중요한 배경은 작가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보통’의 의미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시인 겸 미술가인 태이 요헤가 쓴 시집 <통섬> 이다. ‘평균’과 달리 ‘보통’은 중간치라는 의미 외에도 ‘정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사실상 정의 내리기가 어려운 단어이다. 작가는 언제나처럼 ‘보통의 삶’이라는 게 대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관객을 맞이하지만, 질문을 던지는 태도는 과거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작가가 생각하는 정답 혹은 모범 답안이 있음직했지만,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그러한 선-판단을 제시하지 않는 것 같다. 이는 ‘보통’이라는 단어가 가진 복합성도 원인이 되겠지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서로 다른 층위에서 던지고 있다는 데서도 그렇다. 하나의 명징한 내러티브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불가지론에 가까워진 셈이랄까. 그 변화의 이유가 무엇일지는 다음 행보를 통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작가가 질문을 하는 태도는 여전히 치열하지만, 명쾌히 이해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양상을 더 많이 보고 지금 여기, 여러모로 피로한 한국 사회로 귀환한 작가는 쉽게 정리할 수 없는 삶의 조건들을 글로, 사진으로, 오브제로 보여준다.

위 박혜수 <가변적 평균대> 금속 구조물, 레이저 수평계 2016

CRITIC 이정배 이미-항상

SONY DSC

서대문형무소역사관 2015.6.25~6.25

김최은영 미학

연약한 식물이다. 간신히 유리창에 매달린 씨앗은 뿌리가 깊지 않다. 그러나 생명이다. “볼품없는”(신현진, <볼품 없음에 대하여…> 이정배 개인전 서문) 그것에서도 싹이 텄고, 잎이 달렸다. 이젠 제법 풍성한 인공의 식물은 여전히 생존 중이다. 자유와 평화, 평등과 박애가 아직 죽지 않았단 뜻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무동 유리벽에 이정배의 <이미-항상>은 비역사적 단어를 선택 후 역사적 공간에서 다루어 과거, 역사 속 연약한 정의들이라는 교집합을 도출한다. 동시에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시간에 매몰되었던 그 시절 명제에 자라는 식물을 통해 현재와 진행이라는 시간성을 부여한다. 이렇듯 자유, 평화, 평등, 박애가 작가가 상정한 역사성과 시간성 속에 다뤄지면 일상의 용어에서 벗어나 미래(“고통의 씨앗이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상징의 언어”(이정배의 작업 노트))를 지닌 서사적 구조를 띠게 된다. 때문에 씨앗을 단어 모양으로 배열하는 인위적 행위는 단순한 가독을 통해 노골적 이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자라는 식물을 연출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추가로 잎을 붙여 나가는 행위를 진행한다. 시트지로 만들어낸 인공의 식물은 작가의 작위가 선행되어야만 싹이 트고, 자라나는 순환의 생명력을 획득할 수 있다. 행위, 즉 실천을 통해야만 얻어지는 가치에 대한 작가의 의도다. 씨앗프로젝트가 1년이라는 시간과 한 달에 한 번이라는 작가적 행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유기적 관계성과 진행성이라는 명분이기도 하다.
작업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목격한 여러 관람객과의 소통 여부가 본 설치작업에서 제안된 또 하나의 프로세스다. 아직 현재의 시간성은 여백의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유리벽에 자라는 풀들은 보는 사람들의 지금일 뿐이다. 이정배는 그 지점을 예민하게 직감했다. 내가 목격하지 못한 과거에 대한 막연한 오늘, 그리고 의식 없는 나의 행위로 비롯될 미래의 가치 변화에 대한 물음을 자라나는 식물로 대변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에 따른 시각적 결과물은 식물의 진위 여부와 공간성, 시간성에 지배되지 않고 작가의 의도를 수행하는 도구로 읽히며 충분한 역할을 수행한다.
유리벽에 꽂힌 듯 서있는 풀들은 마치 의도된 하나의 구조물 같다. 깊게 뿌리내릴 수 없는 차가운 속성과 투명하지만 분리를 위한 막음이 분명한 벽의 속성은 잘 버티고 있는 긴장감처럼 보인다. 식물의 뿌리가 조금 더 자라면 견고한 유리벽은 깨어질 것이다. 유리벽이 깨진 후 식물이 무성하게 영역을 확장하면 굳이 자유와 평화, 평등과 박애를 목격하고 인식해야 할 만한 의식행위가 필요 없을 지도 모를 일이다. 더 이상 연약한 식물이 아니다.
“씨앗 프로젝트는 국가의 과거사 중 고통의 기억을 씨앗으로 비유한다. 이 고통의 씨앗이 현재와 다가올 미래에 희망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고통의 씨앗이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상징의 언어로 표현되고, 그 씨앗으로 형성된 언어에서 싹이 트고 잎이 나고 무성한 여름을 맞이한다. 열매를 맺으며 겨울을 맞이해도 씨앗은 사라지지 않는다. 또 다른 씨앗이 자라나 미래를 희망의 것으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 이정배
예술이 사회에 개입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소란한 웅변과 적나라한 고발도 쉽게 목격된다. 오늘 이정배 작가의 <이미-항상> 프로젝트는 어쩌면 지금 막 불붙은 뜨거운 감자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쉽게 잊기엔 너무도 중요한 문제다. 광복70주년 기념 씨앗프로젝트. 광복이 낡은 감상이 되지 않길 바라는, 역사와 그 역사 속 자유와 평화가 철지난 의식으로 치부되지 않길 바라는 작가의 제의가 조용히 담겨 있다. 날카롭지 않지만 예리하고, 유연하지만 견고하다.

위 이정배 <이미-항상> 아크릴, 시트지, 벽화 2015~2016

CRITIC 나를 바라보는 너를 바라본다

아마도예술공간 3.1~25

조선령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

독일의 매체이론가 빌렘 플루서는 1974년에 쓴 <텔레비전의 현상학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세 가지 모델을 구분한다. 첫째는 메시지를 주관적으로 전달하는 태도모델, 즉 광고와 같은 방식이고, 둘째는 메시지를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인식모델, 즉 뉴스와 같은 방식, 셋째는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체험모델, 즉 영화와 같은 방식이다. 플루서에 따르면 태도모델은 명령법, 인식모델은 직설법, 그리고 체험모델은 함축적이다. 그런데 곧이어 플루서는 이렇게 말한다. “텔레비전 분석에서 나온 결과는 송신된 메시지의 모든 인식모델과 체험모델의 뒤에는 항상 태도모델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프로그램은 본질적으로 광고이다. 광고가 흔히 수용자에게 숨어 있다는 사실은 그 효과를 강화시킨다. 광고는 ‘잠재의식’ 에 작용한다. 세계는 수용자에게 텔레비전을 통해 그에게는 부분적으로 숨겨진 명령법으로서 나타난다.”(빌렘 플루서, 김성재 옮김, 《피상성 예찬》, 커뮤니케이션북스, p.195)
플루서의 이 글은 텔레비전의 인식적/체험적 외양에 숨어있는 명령적 속성을 인지할 것을 촉구하면서 텔레비전의 새로운 가능성을 진단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플루서가 구분한 세 가지 모델의 경계선이 오늘날에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영상은 합성의 가능성으로 인해 항상 그 진위를 의심받으며, 감시 카메라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포획할 타깃을 찾는 도구이다. 웹캠은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세계를 바라보는 창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플루서가 말한 태도모델의 ‘잠재성 혹은 무의식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의 태도모델 개념은 결국 모든 장치가 단지 기록이나 조작의 매체가 아니라 어떤 프레임, 틀, 세계 자체를 만들어내는 명령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세계를 만들어내는’ 명령의 기능은 숨겨져 있다. ‘미디어아트’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영역이 끊임없이 문제 제기해야 할 지점 중 하나는 그것의 가시화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작가 5명과 프랑스 작가(팀) 11명이 참여한 아마도예술공간의 전시 <나를 바라보는 너를 바라본다>(유진상, 에릭 마이어 기획)는 우리 일상 매체에 숨은 명령어들을 가시화하는 작품을 다수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웹캠, 스트리트 비디오, 감시 카메라, 스카이프, 내시경, 구글링, 음향감지장치, 비디오 게임 등 미술이 잘 수용하지 못했던 것들까지 망라한 동시대적 매체/장치들이 골고루 등장한다.
몇몇 작품은 온라인과 전시장에 동시에 존재한다. (어쩌면 그러한 작품들이 전시의 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1999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발전해온 제롬 조이의 웹 프로젝트인 <nocinema.org>는 전 세계 곳곳에 설치된 웹캠이 보여주는 실시간 영상들과 영상에 랜덤으로 덧입혀지는 음향/음악으로 구성된 일종의 ‘영화’이다. 순전히 무작위적이고 서로 연관성도 없는 이 영상/음향의 복합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내러티브를 구성하게끔 유도하면서 ‘다른 세계’가 새롭게 생성되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또한 세계 각국의 도시를 촬영하고 그 장면을 ‘스캐닝’하여 화면에 ‘데이터화’해서 보여주는 얀 부가레와 아르노 미르망의 <somethingismissing.tv>(2016)는 컴퓨터 게임과 감시 카메라를 합친 듯한 인터페이스를 보여주며 이미지를 객관적으로 정보화하는 듯하지만, 화면에서 볼 수 있는 정보는 사실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지표가 기묘하게 혼합되어 있다(danger, memory의 비율과 CPU, GPU의 비율 등이 동시에 등장한다). ‘동시대’를 구성하는 명령어는 여기서도 또 다른 방식으로 가시화된다.

위 플뢰리퐁텐느(FleuryFontaine) <Lose or draw>(오른쪽) 영상 설치 2015

REVIEW

홍승혜 개인전
윌링앤딜링 3.18~4.7

‘나의 개러지 밴드’로 명명된 개인전에 작가는 영상과 사운드, 그리고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음악이 재생됐을 때 박자와 함께 화성 및 음색의 변주를 작가의 기본 작업의 형식인 픽셀로 시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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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림 (1)

최봉림 개인전
갤러리 룩스 3.10~27

T.S. 엘리엇(Eliot)의 시 <The Waste Land>(1922)에서 주제 전개를 따왔다는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아름다운 미망인의 봄’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삶의 추동력을 잃고 나락으로 빠진 심적 상황을 이야기하듯, 실망스러운 삶의 반복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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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서영 (3)

배서영 개인전
영은미술관 3.5~4.17

지난해 서울 문래동에서 71/2과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새로운 작업을 선보인다. ‘문래동 철공소’의 지역적 특수성을 드러내는 철판을 사용해 사회적 관념에 부딪히며 재구성되는 작가의 정체성과 자존감의 문제를 새롭게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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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

윤희수 개인전
길담서원 한뼘미술관 3.3~4.2

‘사그라지는 사물에 대한 애도’를 표현한 작가의 개인전. 버려진 나무의자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나무의자, 다시 나다>를 포함해 세월호를 생각하면서 그린 <날개 접힌 고요 속의 새> 등 사물과 사람에 대한 애도를 그만의 방식으로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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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

잉고 바움가르텐 개인전
아뜰리에 아키 3.4~4.9

현재 홍익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작가는 자신이 살던 곳 주변의 광경을 특정하여 작업한다. 이번 개인전 타이틀은 ‘Perception’. 특히 건축물의 일부를 주제로 자신이 머물던 곳의 인류학적 고찰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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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선

장인선 개인전
서울시청 하늘광장 갤러리 3.9~5.8

갤러리가 주관한 작품 공모에 선정된 작가는 이번 전시에 재개발을 소재로 다양한 욕망의 층위를 담아내려 했다. ‘서울의 바람’으로 명명된 이번 전시는 옛 서울의 모습을 수묵화로, 그리고 현재의 서울 모습을 노랑색 선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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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앤제이

처음보는 공원
원앤제이갤러리 2.25~3.25

김혜나 박민하 이정민 3인의 작가가 참여한 그룹전. 낯선 공간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예측할 수 없기에 긴장감을 높이는데 이러한 감정을 시각화해 각각의 작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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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범,신선주_리나 (6)

There
리나갤러리 3.8~4.19

신선주 하태범의 2인전으로 두 작가는 실재하는 풍경을 심리적 감성으로 재구성해 비현실적 공간을 창조했다. 블랙과 화이트로 대비되는 이들의 작업세계는 보는 이에게 간접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주고 상상의 장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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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랑 (2)

이정지 개인전
선화랑 3.16~4.5

50여 년 동안 화업을 이어온 이정지 화백의 개인전. 작가는 롤러를 이용해 캔버스에 채색한 후, 나이프로 긁어 동그라미의 흔적을 구현해낸다. 이를 통해 작가의 의식이 시간과 행위의 흔적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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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울

별별수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생활미술관 3.15~5.15

2013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을 지낸 박남희 씨가 초청큐레이터로 참여한 전시다. 3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해 ‘수저’에 대한 ‘별의별’ 관심사를 작품에 펼쳐내며 인식의 확장을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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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마

김기성 개인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3.17~27

지식 변화의 거대한 층위를 사유하는 전시다. 그간 작가는 아날로그적 사유와 디지털 사이의 틈을 은유적으로 이미지화한 작업을 선보인 바, 백과사전으로 상징되는 지식이 디지털화된 시대에 단순한 오브제(장식품)화하는 과정을 펼쳐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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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연

김호연 개인전
갤러리 라우 3.1~31

동국대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작가의 개인전. 한국 무속 신화와 자연을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는 최근 그를 엄습한 병마와 싸워가며 이번 개인전을 준비했다. 근본적인 재료, 즉 진흙과 물 등을 이용하여 가장 순수한 형태를 구축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