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안경수 가는 길

밀리미터 밀리그람_이태원 5.11~31

함성언 갤러리 버튼 대표

풍경을 그리는 작가가 쏟아져 나오는 중에도 안경수는 여전히 풍경을 그린다. 딱히 어느 시점부터라 말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미술시장의 침체 때문이 아닐까 예측은 해보지만) 정확한 이유나 영향 관계를 찾을 수 없는 풍경 그림이 전시장마다 한 번씩은 걸린다. 대체로 ‘심상의 풍경’ 같은 말로 엮을 수 있는 이 풍경 그림들의 공통점은 같은 풍경이라도 누가 어떤 상태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읽히기 때문에 그것은 온전히 한 사람을 위한 풍경이 된다는 설명이 덧붙는다는 것이다. 생의 한 시점을 관조하는 자세가 젊은 작가들에게서 종종 발견된다면 그들이 그만큼 여물었거나, 아니면 반대로 급하게 무엇인가를 흉내 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안경수는 여전히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여전한 안경수’가 지금 한국 회화 작가군에서 어떤 포지션을 점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알려진 바와 같이 동양화를 전공한 안경수는 아크릴을 이용한 회화작업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데, 대체로 얇게 발라 올린 것처럼 보이는 그의 작업은 의외의 깊이를 갖고 있다. 특히 밤의 먼 풍경을 그린 작업들에서 자주 발견되는 안경수의 깊이는 작업의 진행 방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밑작업부터 차곡차곡 색을 올려 전체적인 톤을 만들고 다시 먼 곳부터 가까운 곳으로 오며 눈에 걸리는 모든 구조물과 자연물을 그려 올리는 작업 방식은 비단 안경수만의 것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동양화의 작업 방식이나 철학에 익숙한 그는 얇은 화면에 풍경의 깊이를 충실하게 재현한다. 사진을 찍어 풍경을 재현하는 회화의 작업 방식 역시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는 다양한 시간대에 여러 각도로 피사체를 찍고, 각각의 톤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평면예술인 회화에 시간성을 덧입히기도 한다. 특히 저녁 어스름이나 한밤중, 먼 곳에서 빛나는 도시의 불빛을 여러 색을 겹쳐 올려 표현한 <Glow the factory>나 <Bright night 1, 2>와 같은 작업들은 앞서 말한 안경수 작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안경수를 단순히 동양화의 심도가 구현되거나 시간성을 더한 회화작업을 하는 작가로 평하는 것으로는 다른 풍경화 작가들과의 차별점이 구체화되지 않는다. 안경수의 작업을 이해하고 읽어내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풍경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가 한 장소 사진을 여러 장 찍고, 가까이 보이는 풍경을 주로 그리는 까닭은 그것이 단순한 관조의 대상이거나 개인의 심정을 투영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업에서 자연 풍경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유 역시 이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에게 풍경은 먼 데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 만져볼 수 있어야 하며 인간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여야 한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SNS 계정에는 종종 그의 작업실 주변과 버스 안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들이 게시되는데, 이 중 몇몇이 작업 대상이 되곤 한다. 그가 들어가 볼 수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또한 풍경들은 질감이 강조되거나 실제처럼 재현되는 경우가 있는데 굳이 질감이 느껴지도록 재현하는 이유 역시 그것이 사람의 흔적이기 때문이고, 그것이야말로 안경수가 오랜 풍경작업을 통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조하고, 자의적으로 해석된 풍경 작업을 ‘심상의 풍경’으로 부를 수 있다면 안경수의 작업은 ‘촉각적 풍경(tangible landscape)’으로 구분하여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한국 현대회화의 흐름에서 자리 잡은 지점은 이것으로 확고해진다.

위 안경수 <Glow of factory>(맨 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2015

CRITIC 백남준의 작품 이 던지는 화두들

김지훈 중앙대 영화·미디어연구 교수

2013년 3월 나는 스미소니언 미술관의 백남준 아카이브를 방문했다. 단 하루의 짧은 체류기간 동안 그곳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기록물은 수십 장의 천공카드(punched card)와 초기 컴퓨터 언어인 포트란(Fortran) 연산명령의 프린트물들이었다. 이것들은 백남준이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벨 전화연구소(Bell Telephone Laboratories)에서 방문예술가로 일하면서 수행한 컴퓨터 실험의 성과들이었다. 나는 이 기록물들이 지금까지 국내외 백남준 연구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벨 연구소에서의 작업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가설을 갖고 미술관을 떠났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스미소니언 미술관은 아카이브에 보관된 백남준의 초기 컴퓨터 작업 3편이 기존의 작품목록에 등재되지 않은 작품들이라는 점을 공식화했다. 이 작품들 중 하나는 내가 백남준 아카이브에서 살펴보았던 천공카드와 프린트물들이 포함된 <에튀드 1(Etude 1,1967~1968)>이었다.
<에튀드 1>은 백남준이 벨 연구소의 아날로그 컴퓨터 GE-600을 사용하여 프로그래밍한 포트란 언어로 생성된 전자 드로잉을 포함한 미완성 작품이다. 백남준은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포트란 언어로 팩스용지에 네잎클로버처럼 생긴 네 개의 동심원을 그렸다. 이 네 개의 동심원은 “God” “Dog” “Love” “Hate”라는 네 개의 단어로부터 생성된 형상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이 작업이 백남준의 잘 알려진 비디오 및 인터미디어 작업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향후 연구의 몫으로 남지만 몇 가지 접근경로(access point)들은 확실히 눈에 띈다. 우선 백남준 본인의 의도를 따르자면 <에튀드 1>은 퍼포먼스와 비디오를 통해 현대음악을 혁신하고자 했던 그의 아이디어가 연장된 결과다(1960년 퍼포먼스 <에튀드 포 피아노 포르테(Etude for Piano Forte)>를 함께 떠올릴 수 있다). 백남준은 벨 연구소 방문을 위해 록펠러 재단에 보낸 편지에서 “음악사에서 최초의 컴퓨터 오페라를 작곡하는 것이 나의 야망”이라고 쓴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에튀드 1>의 동심원은 비록 무성이자 미완성이지만 백남준이 구상한 컴퓨터 오페라의 악보라는 의미를 갖는다.
또 다른 접근경로는 백남준의 벨 연구소 작업을 컴퓨터에 기반을 둔 실험 애니메이션과 확장영화(expanded cinema)의 맥락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내부에 필름 프로젝터와 드로잉 시스템을 구비한 아날로그 컴퓨터는 알고리즘에 근거한 컴퓨터 언어의 시각적 표현 가능성을 탐색하던 당대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도구였다. 1960년대의 벨 연구소는 바로 이 예술가들의 실험을 후원했다. 케네스 놀턴(Kenneth Knowlton), 스탠 반데르비크(Stan VanDerBeek), 마이클 놀(A. Michael Noll), 릴리안 슈워츠(Lillian Schwartz)는 바로 벨 연구소에서 컴퓨터의 코드를 추상적이고도 복잡한 형태들로 변환시키는 작업들을 만들어냈다. <에튀드 1>의 동심원은 바로 이들의 작품들과 닮아있다. 실제로 이 작품은 백남준이 컴퓨터의 숫자와 점들로 작업한 애니메이션인 <벨 연구소에서의 디지털 실험(Digital Experiments at Bell Labs, 1966)>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이 두 경로보다 더 중요한 접근경로는 미디어 고고학적인 관점에서의 질문이다. 무의미해보이면서도 고도의 시각적, 언어적 유희를 포함한 이 동심원 형상은 백남준이 상상했던 컴퓨터와 디지털에 대한 관념들을 담고 있다. 이 관념들은 오늘날 컴퓨터 문화의 가능한 과거들에 대한 암시를 전해준다. 단순함과 복잡성을 함께 표현한 동심원 형상은 오늘날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과거를 비춰준다. 그러면서도 언어와 시지각의 유희를 표현한 이 형상은 백남준이 상상한 컴퓨터가 표준적인 컴퓨터와는 달랐음을 시사한다. <노베르트 위너와 마르셀 뒤샹>과 같은 글에서 백남준이 제시한 우연과 불확정성의 논리를 구현한 컴퓨터(즉 위너의 사이버스페이스보다는 뒤샹의 아이디어가 구현된 컴퓨터)라는 관념이 <에튀드 1>의 작업과정과 결과물에 표현되어 있다. 실제로 <에튀드 1>의 동심원이 뒤샹의 영화적 실험인 <빈혈증 영화 (Anémic Cinéma, 1926)>와 닮았다는 점도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에튀드 1>은 백남준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일련의 과제들을 제기하는 동시에 그의 비디오아트 및 퍼포먼스 작업들과의 새로운 접점을 마련한다. 이런 시사점들을 밝히기 위해서는 국내와 미국을 종횡하는 초국적이고 교차학제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이 연구가 실현될 환경은 불행히도 충분치 않다. 스미소니언 미술관에 백남준의 작업들과 문서들을 기증한 Nam June Paik Estate와 국내 백남준 관련기관과의 불편한 관계가 이런 사정을 낳았다. 국내 연구자들의 방문연구와 해외 연구자들의 국내 방문연구가 활성화될 때 백남준에 대한 연구가 현재진행형이 될 것이다. <에튀드 1>을 발견한 조지아공대의 그레고리 진먼(Gregory Zinman) 교수는 현재 존 한하르트(John Hanhardt)와 백남준의 글들을 모은 모음집을 MIT출판사에서 출간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국내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위 백남준 <에튀드 1> 1967~1968

REVIEW

크리스틴 아이 추 개인전
송은아트센터 4.28~6.20

강렬한 색채와 추상적 형태의 페인팅 작업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인도네시아 여성작가 크리스틴 아이 추의 국내 첫 개인전.
종교적 해석과 뛰어난 색채가 돋보이는 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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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Y DSC

박철 개인전
다도화랑 4.24~5.9

오랜 기간 형상적 부조작업을 해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부조와 드로잉을 조합하여 ‘작가의 손맛’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부조 끝부분에 여백을 두어 자연스러움의 미감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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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H

홍석창 개인전
갤러리 H 5.20~6.16

거침없는 운필과 분방한 화면 표현으로 문인화를 그려온 홍석창의 개인전이 개관전으로 열렸다. 작가는 선명한 원색과 천진난만한 유희가 있는 화면 구성으로 자신만의 동양화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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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옥션 (2)

이정규 개인전
통인옥션갤러리 4.22~5.11

미술평론가 박영택은 작가에 대해 “사람 중심의 인간애를 표현하며 감성을 전달한다”고 표현했다. 자연풍경을 담은 그의 작품은
자연의 본질과 생명의 에너지를 표현하며 자연의 숭고미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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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아이지 (2)

상처 바라보기
LIG아트스페이스 한남_STUDIO L 5.7~30

용도 폐기된 질료를 재발견해 새롭게 탄생시키는 작가 정현과 연평도 사건의 참화 현장을 담은 사진을 선보인 홍상현의 2인전.
<힐링 모자이크전>의 1부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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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_열화당 (1)

이석우 개인전
열화당 갤러리로터스 4.1~5.31/6.1~7.31

겸재정선기념관 관장이자 역사학자인 이석우의 그림전. <책 사이에 그림을 걸다> 이후 4년 만에 열린 전시로 이번 전시의 제목은 <옛것에서 오늘을 찾다>다. 전시는 1부와 2부로 나눠 열리며 일부 작품이 교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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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진 (1)

최익진 개인전
갤러리 자인제노 4.15~30

재료와 기법상의 실험정신을 작품에 구현해 한국화의 외연을 넓혀 온 최익진의 개인전. 작가는 실크 천 위에 검은색 잉크를 풀어 스퀴즈로 당겨 유리 뒷면에 착색하는 기법을 사용해 수묵화 같은 효과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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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터에고

Something Happend
알떼에고 5.7~6.19

Khai Kim, 훗한나, 고등어란 필명으로 활동하는 작가 3인의 전시로, 불안 부재 트라우마 등 살면서 느끼는 내밀한 감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각 작업의 알레고리 사이에 맞닿은 지점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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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규

조승규 개인전
수원문화재단 기획 전시장 5.9~16

작가는 평면, 입체,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한다.
이경모 미술[section_title][/section_title]평론가는 조승규를 “빛의 파동 및 색채의 연속성, 형상의 해체와 조합, 형태의 실험과 질료의 탐구를 거듭한 작가”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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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예지 (3)

류예지 개인전
토포하우스 5.13~19

일상의 오브제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작가만의 톡톡 튀는 상상의 세계를 펼친다. 작가는 단순한 대상 표현과 아름다운 색감, 재치있는 작품 제목을 통해 대중에게 미술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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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정 개인전

문혜정 개인전
갤러리 파비욘드 5.19~30

<Time and Tide>란 타이틀의 작가 문혜정의 제17회 개인전이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암시하는 여러 조각의 조합된 풍경화에는 화가로서 자신의 삶과 작업에 대한 반추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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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석 (1)

홍찬석 개인전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5.13~19

작가는 자연의 위대함, 신비로움, 희망적인 에너지에 매료됐다. 새와 나비, 나무, 태양 등이 화면을 채우며 생명의 에너지를 화폭 가득 담았다. 자연의 순환을 그린 그림을 통해 자유로운 상상력을 자극한다.

PREVIEW

잉카 쇼니바레
대구미술관 5.30~10.18

나이지리아계 영국인으로 날카로운 주제의식으로 주목받고 있는 작가 잉카 쇼니바레의 아시아 첫 대규모 개인전. 작가는 폭넓은 인문학적 통찰력으로 역사와 문학, 미술사와 음악사를 넘나들며 역사의 이중성, 문화적 혼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프리카적인 소재를 주로 사용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사유는 보편성을 지닌 채 시대를 반영하며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아프리카 식민주의 역사를 풍자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서구중심적 사고체계에 의한 차이, 차별, 배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생물학적 ‘다름’을 이유로 야만적 침탈을 서슴지 않았던 강자들에 대한 비판이 숨어있다. 많은 노력에도 해결되지 않는 ‘흑’과 ‘백’의 비극적 상흔을 웃음과 깊은 여운을 통해 전한다. 침략을 통한 역사적 단절과 정신적 약탈을 통한 정체성의 상실이 빈번해진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번 전시는 조각, 평면, 설치, 영상작업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87점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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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스테판바토리

폴란드, 천년의 예술
국립중앙박물관 6.5~8.30

쇼팽과 코페르니쿠스의 고향, 폴란드의 국보급 예술작품들이 국내로 반입돼 한 자리에 모인다. 폴란드의 역사와 예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대규모 기획 전시로 19-20세기 회화와 조각 등 폴란드 예술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이 소개된다.
얀 마테이코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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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우리가 알던 도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5.19~10.11

주거환경으로서, 사회시스템으로서의 도시에 오랫동안 관심을 보여온 강홍구와 박진영 두 작가의 시선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도시에 대해, 그리고 도시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마련한다.
박진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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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아

함경아
국제갤러리 6.4~7.5

사회 속에서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는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들을 개인적 삶의 실천적 문제로 보고 상관성 규명에 천착해 온 작가 함경아의 개인전. 이번 전시는 대규모 신작 자수회화 시리즈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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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카렐

니나 카넬
아르코미술관 5.29~8.9

물질의 성질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드는 스웨덴 출신의 조각가 니나 카넬. 이번 개인전 <새틴 이온>에서 에너지의 변환 과정을 아름답게 가시화한다. 전통적인 ‘조각’의 개념을 넘어서 물질의 의미와 개념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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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훈

성동훈
사비나미술관 6.12~7.12

지난 25년 동안 공업용 특수시멘트와 금속을 이용해 고유한 물성을 드러낸 거대한 규모의 조각작품을 제작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5년간 대만, 중국, 인도 등 국내외에서 제작한 작품 20여 점을 총망라해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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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

김준
박여숙갤러리 5.22~6.21

‘문신작가’로 잘 알려진 김준의 개인전. 이번 전시에서는 국내에서 발표되지 않은 신작 ‘Somebody’ 시리즈의 디지털프린트 및 영상 작업을 선보이며 가짜 살덩어리 오브제 위에 문신을 새긴 초기작들도 함께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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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지 우에마츠

케이지 우에마츠
아라리오갤러리 천안 5.26~8.23

신체와 오브제, 오브제와 환경, 혹은 그 모든 것 사이의 관계와 역할에 대한 관심을 중력, 만유인력, 천문학적 관점 등으로 작품에 표현해 온 케이지 우에마츠의 개인전.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1970년대 사진작품에서부터 최근 설치작업까지 광범위하게 펼쳐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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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GA-03

한국근현대미술특별전
대전시립미술관 5.23~8.23

20세기 한국 근현대기의 문화사적 관점에서 한국미술을 재조명한다. 19세기 후반의 장승업과 그의 제자들로부터 출발하여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나타난 예술작품을 60여 명의 작가의 대표작을 통해 압축해 보여준다.
권진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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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김윤숙

mind-scape
닻미술관 5.10~7.12

많은 요소들이 일으키는 감정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모았다. 이번 전시는 감정의 요소와 정서를 각각의 방법으로 담아내는 5명의 여성작가 김미경 김윤숙 미니리 아만다 이진원이 작품을 통해 마음의 풍경을 소개한다.
김윤숙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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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권기범

옅은 공기 속으로
금호미술관 5.27~8.23

흑과 백을 중심으로 공간과 대상의 유기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전시. 회화, 영상, 사운드 등으로 구성된다. 무채색의 미감과 조형성에 대한 작가의 실험 결과를 확인하는 자리로 권기범 김상진 김수영 김은주 박기원 이기봉 카입+김정현 하지훈 홍범이 참여한다.
권기범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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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칼로

프리다 칼로
소마미술관 6.6~9.4

초현실주의 작가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이번 전시는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 당대 멕시코 작가 10인의 작품을 비롯해 사진 및 영상물, 장신구, 서신 등 다양한 자료 50여 점 등 총 100여 점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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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강경구
갤러리 소소 5.30~6.28

한국화가 강경구의 목판화 50여 점을 선보인다. 운필의 탄력적이고 자유스러운 흐름과 먹을 다루면서 체득한 흑백구성, 그리고 전각으로 다져진 사각형 화면처리와 칼의 맛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매력을 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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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희, Night Blossom, 2014, 캔버스에 유채, 162x130cm, 작가, 갤러리현대 제공

도윤희
갤러리 현대 6.12~7.12

개인의 실존을 탐구해온 도윤희의 개인전 <Night Blossom>.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작가는 연필과 모필로 진행하던 기존 작업의 스타일을 버리고 손을 이용해 표현한 새로운 느낌의 신작 회화 20여 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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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발데사리

존 발데사리
pkm갤러리 6.3~7.12

대중매체에서 차용한 이미지들을 해체하고 재조합함으로써 새로운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찾는 존 발데사리의 개인전. 이번 전시에서는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제작된 작품 중 존 발데사리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작품과 신작 등 20여 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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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천

낙타를 삼킨 모래시계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5.22~8.16

그림과 글, 미술과 문학, 시각예술과 언어를 함께 볼 때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온전히 다가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임승천의 ‘낙타’와 현미의 ‘모래시계’를 통해 서사성, 우화성 등 두 작가의 전반에 흐르는 공통성을 어우른다.
임승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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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우

한성우
스페이스비엠 5.20~6.20

사물이나 풍경을 ‘보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를 시각화하는 방법을 모색해 온 한성우의 개인전. 총 12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 <풍경의 뒷모습>을 통해 작가가 치열하게 고민해온 재현이라는 문제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고 있음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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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묵

김양묵
미광화랑 6.2~20

다양한 작업을 통해 자연과 사람을 다각도로 바라보는 김양묵의 개인전. 이번 전시에서는 절제된 색조로 은은하고 담백하게 표현한 찻사발을 통해 외형이 아닌 내면에 집중하며 욕심 없는 선비와도 같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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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원_인생7_Life7_199×148cm_광목천_위에_한지_아크~

양대원
갤러리 담 5.27~6.10

사회에 반항적 태도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양대원 작가는 이번 전시 <검은 별>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검은색을 통해 이상적인 세계를 그려내며 권력, 돈, 명예만을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PREVIEW 2

피스마이너스원 : 무대를 넘어서
서울시립미술관 6.9~8.23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션 지드래곤과 국내외 예술가들의 협업을 통해 현대미술과 대중문화의 수준 높은 접점을 만들고,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고취시키고자 기획된 프로젝트. 지-드래곤이 보여 왔던 가시적 퍼포먼스를 넘어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그의 음악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현대미술 작품들을 통해 팝뮤직과 시각예술의 창의적 키워드를 제시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특히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마이클스코긴스 파비앙베르쉐 유니버설에브리띵 다비드콰욜라 소피클레멘츠 제임스클라 이외에도 한국작가 6명이 참여한다. 미술관과 대중문화 아이콘의 만남이라는 이색적이고 실험적인 기획 시도를 통해 상대적으로 현대미술과 거리가 멀었던 청소년과 대중음악 팬들을 미술관으로 유도하여 관람객 저변을 확대시키고 동시대 한국미술을 해외에 알리는 기회를 마련한다.
유니버설에브리띵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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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징맨

시징의 세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5.27~8.2

삶과 제도의 모순을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김홍석, 첸 샤오시옹, 츠요시 오자와가 결성한 그룹 시징맨의 전시. 작가들은 시징(西京)이라는 가상의 도시를 만들고 동시대 삶의 허위에 대해서 비판적이지만 황당한 희극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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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근

권혁근
이유진갤러리 6.11~7.9

동양적 감수성을 포착해 작품에 드러내는 평면 추상작가 권혁근의 개인전. 작가는 이번 전시 <바람이 손을 놓으면>에서 여러겹으로 쌓인 물감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물성을 강하게 표현한 추상작업 20여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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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여주]

남여주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6.3~8

자연과 생명체들의 이미지가 투명한 물에 비치거나 담겨 만들어지는 잔상을 캔버스에 담아온 남여주의 개인전 <물, 생명, 자연의 궤적을 좇는 순례>. 작가는 이번전시에서 ‘Reflective’라는 일관된 주제의 작품세계를 견지한 연작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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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러므로
가나아트스페이스 6.24~29

북아트와 수학기호가 만났다. <∵ ∴>는 사단법인 한국북아티스트협회의 9번째 전시로, 20여 명의 북아티스트가 각자 수학기호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책을 해체하고 변형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회화, 조형, 일러스트 및 디자인의 영역을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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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헌)박민준

박민준
두가헌갤러리 5.27~6.28

작가가 상상해낸 라포르 서커스단이라는 가상의 공간과 그 안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전시. 전시에 출품된 28점을 통해 박민준의 더욱 자유롭고 유연해진 표현력과 작가의 풍부한 내러티브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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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진,_수집한_열대식물을_각목으로_조~

조혜진
케이크갤러리 5.30~6.28

우리의 생활방식, 문화현상 안에서 열대식물의 소비 방식과 보이지 않는 형태로 존재하는 ‘열대’에 대한 사회적/집단적 환상을 드러내는 <한시적 열대>. 열대식물을 중심으로 나열된 방대한 리서치 자료와 작가에 의해 가공된 사회적 식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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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희

임철희
갤러리 가비 6.13~7.3

특정 상황 속에서 감정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방인’을 주제로 작업하는 임철희의 개인전. 작가는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인물의 초상을 그리며 인물의 형체가 변형, 손상되거나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인물을 정의하는 본질은 오히려 더욱 생생해짐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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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훤

홍진훤
스페이스 오뉴월 5.29~6.20

사회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풍경사진’으로 나타내온 홍진훤의 개인전. 작가는 이번 전시 <마지막 밤(들)>에서 고속도로 휴게소 풍경을 담았다. 고속도로의 공식적 쉴 곳인 휴게소에서도 휴식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쉴 곳이 아닌 낯선 공간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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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민성식_Swimming_pool_2015_Oil_on_canvas_80.3x116.7cm

회화, 시간을 멈추다
아뜰리에 아키 6.10~7.10

다양한 매체가 공존하는 현대미술계에서 회화의 속성과 내러티브의 성격에 주목한 전시. 각기 독자적인 화풍으로 미술계에서 자리를 굳히고 있는 민성식 서상익 정보영 등 3인의 작품을 통해 회화적 조형언어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민성식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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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록

강경록
김제 벽골제 아리랑문학관전시실 5.30~6.5

도시라는 소재로 작업을 진행하는 강경록의 12번째 개인전. 작가는 도시가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를 <도시연가>라는 타이틀 아래 담아낸다. 한정된 재료의 물성 속에서 자유스러운 화풍으로 매력적인 작업을 보여주며 회화 본래의 의미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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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보

금영보
갤러리 두 6.1~20

갤러리 두 개관 5주년 기념으로 열리는 금영보의 <매혹>. 작가는 한국 전통 민화처럼 친숙한 대상이나 풍경을 작가 고유의 감성으로 표현하며 따뜻하고 재치있는 그림을 통해 관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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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웅]

박현웅
여니갤러리 6.11~29

박현웅의 작업은 우리에게 허락된 상상을 구현하는 이미지와 사건들을 생산하는 상상력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처럼, 메마르고 각박한 삶에서 상상 속의 찰라들을 따라 시간의 경험을 통과하지 않은 신세계로 진입하게 하는 일탈의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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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리에)허남준

허남준
아트리에갤러리 6.12~25

얼굴을 기호처럼 표현하는 허남준의 개인전. 작가는 인간의 두상을 고착된 이미지가 아니라 자발적인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 덩어리들이라고 생각하며 그림 안에서 유기적인 생명체들이 부단히 증식하며 나타나는 새로운 익명의 얼굴을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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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김수자
서울도서관 6.2~27

동화책을 통해서 대중에게 역사적 의미를 환기시키고 동시에 아름다운 우리 문화의 모습을 알리는 김수자의 원화전시회. 서울의 주요 장소, 문화의 거리 인사동, 자연과 어우러진 창덕궁, 서울 성곽길의 과거와 현재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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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애

최미애
갤러리 조이 6.12~7.12

눈에 보이는 것 이면의 진실을 화면에 그려내는 최미애의 작품을 모았다. 그가 그려낸 투명한 진실과 소통하는 숨결을 통해 화면의 순수한 자유로움과 가공되지 않은 이미지의 무한한 암시성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마음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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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아2015_연두나비,차원이_되다.

장선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6.5~11

나비, 나무, 씨앗, 꽃별, 우주 등 생명과 존재를 상징하는 소재들을 크고 작은 색면으로 나타내는 장선아의 개인전. 작가는 삶의 중심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에게 감각적인 치유의 시간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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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평예

임평예
부천 소로로갤러리 6.1~30

숲과 나무는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온 현대인에게 편안한 휴식을 주는 공간이다. 작가는 숲에서 어린시절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 꿈을 주고 행복을 주던 자신만의 풍경인 숲을 그리고 그 안에 자리 잡은 새와 나비, 꽃을 통해 동심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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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홍

모기홍
갤러리 아인 6.11~7.10

점묘로 자연을 표현하는 작가 모기홍의 개인전. 이번 전시에서는 이전의 겹겹이 쌓인 산등성이를 조금 벗어나 넓은 바다, 양평의 강줄기가 함께 하며 더 넓어진 느낌을 주는 따듯하면서도 편안한 작품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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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락

임현락
갤러리 분도 6.8~18

수묵화와 설치 작업에 꾸준히 매진해온 임현락의 개인전. 작가는 먹과 한지를 재료로 풀을 소재로 삼아 전통 화초도 양식을 현대적으로 이어가며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지속적으로 실험하며 한국화가 나아가야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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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철_lonely+walk,_440x260cm,_캔버스에_유화_2015

황우철
아트스페이스펄 6.10~30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인생의 여정에서 예술가가 살아가는 이유와 목표에 대해 고민하는 황우철의 개인전. 이번 전시 <One Way Ticket>에서 예술가로서 진지한 질 문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기나긴 여정의 단편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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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신

싱그러운 조각
갤러리 파비욘드 6.2~13

한국의 여류조각가 4인이 네 가지 색채로 여름을 맞이한다. 다양한 재질과 형식으로 여성의 감성과 내면의 이야기를 담은 조각작품들 약 20여점이 펼쳐진다. 자연과 인간, 생명이 계절의 푸르름과 어울려 따듯한 울림을 준다.
지연신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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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영

행복이 가득한 집
갤러리 마레 6.8~25

우리가 추구하는 삶과 꿈의 원천인 사랑, 건강, 행복이 모든 드림의 시작인 ‘행복한 집’을 테마로 다시금 소중한 집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을 펼쳐보이는 전시. 마음 따뜻하고 기분좋은 작가의 작품들로 구성된다.
황미영 작

EXHIBITION FOCUS YUN HYONG-KEUN 2

〈Burnt Umber& Ultramarine〉oil on linen 91.8×115.2cm 1981~1984 (Courtesy of 윤성렬and PKM Gallery)

한국 추상 회화의 거장 윤형근(1928~2007)의 개인전이 4월 15일부터 5월 17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PKM갤러리가 개관 14주년을 맞아 삼청동에 새 공간을 마련하고 연 첫 전시다. 군더더기 없는 전시공간과 사색의 깊은 울림을 주는 회화의 만남으로 주목 받고 있다. 개관전으로 윤형근의 회화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 고유의 표현양식과 예술세계를 집중적으로 주목하고자 한 것으로 읽힌다. 그의 회화를 최근 회자되는 ‘단색화’라는 개념을 넘어 ‘윤형근’이라는 인물을 집중 조명하여 살펴본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는 은은한 농담(濃淡)과 서정적 정취를 느껴보자.

윤형근 미술에 구현된 담(淡)의 정신

홍가이 문화비평

최근에 자생적 한국 현대화를 표방하는 전시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 한국적 현대화를 ‘단색화’라 하는데, 이는 개념적 내용이 결여된 명명이라 하겠다. 인상파니 큐비즘이니 이런 이름들이 그냥 아파트 3동, 4동이라고 지칭하듯 지어진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언어철학에서는 이름 붙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 20세기 후반의 천재 철학자 솔 크립키의 철학적 업적이 담긴 책 제목도 바로 《명명과 필연성(Naming and Necessity)》이다. 필자는 2013년 8월 싱가포르 ICA에서 개최된 <담화전(淡畵展)> 도록에서 단색화라는 용어에 대해 개념 없는 언어유희라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요점만 정리하고자 한다.
인류 역사상 서양문명의 진행 속에서 역사적 단절이 처음으로 야기된 상황을 ‘현대성(modernity)’이라 칭할 때 모노크롬 회화로 명명되는 스타일의 회화는 예술분야에서 일련의 현대주의 또는 전위라는 이름의 양식적 유행의 하나로 나타났다 이 서양 모노크롬 회화(monochrome painting)의 출현은 서구 현대미술사의 역사 변증법적 행군 속에서 역사적 필연성의 논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문명이 겪은-현대성(modernity)이라는-역사적 단절의 트라우마를 내부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외부 서양문물로부터 자극 받아 그것을 흉내 낸 서구화를 통해 비로소 현대화를 꾀하면서 서구와 똑같은 역사 변증법적 논리에 근거하려는 방법으로는 단색화의 필연성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 즉, 서구 현대미술에서는 결국 ‘예술의 죽음(End of Art)’을 향해 가차없이 진군하는 과정에서 모노크롬 회화가 임시방편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지, 그것이 무슨 새로운 회화의 문법을 또는 새로운 예술세계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탠리 카벨이 지적했듯이,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서구의 작가, 화가, 작곡가 등은 자기들이 계승한 예술행위를 지속하는 데 전제되어야 하는 사회적 규범 (또는 게임의 법칙, 또는 문법)이 붕괴되어, 더 이상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술행위인지를 규정해줄 판단의 잣대가 없어졌다고 믿었다. 어떤 문장이 문법에 맞는지 아닌지를 판단해 줄 형식적 규정이 없다면, 그 언어는 소통의 도구로서는 무용지물인 것인데, 19세기 중반 서구의 예술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카벨은 현대예술의 상황을 특정 짓는 것은 항상 산재한 사기의 가능성이라 했다. 19세기 중반부터 재현적 서구회화의 전통이 역사적으로 해체(historical deconstruction of representational painting)되기 시작하여 1960년대 중반 프랭크 스텔라의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로 귀결되면서 소위 미니멀아트라 칭해진 이 모노크롬 회화는 일련의 서구 현대미술사 속에서 재현적 회화의 역사적 해체 시기에 나온 양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노크롬 회화는 아무런 개념적 콘텐트가 전무한 것이 실체다.
한국에서 1970년대에 출현한 형상 없는 단순한 색상의 서양화만 단색화이며 전통 동양화의 수묵화는 단색화가 아닌가? 왜 한국 ‘서양화가’가 그리는 추상회화만 ‘단색화’란 말인가? 1970~1980년대엔 단색화 대신 ‘평면화’를 유행어 삼아 ‘한국적 현대추상’이라는 이론적으로 설득력 없는 담론이 펼쳐졌었다. 이 글의 주목적은 최근 ‘한국적 모노크롬 회화’로서의 ‘단색화’를 주제로 한 기획 전시마다 윤형근의 작품들이 포함됨으로써 윤형근의 작품세계가 자칫 편협하게 곡해되는 것을 우려하며 그 부당함을 바로잡고자 함이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단색화’라는 한국 미술용어의 개념 없는 분류의 카테고리에 윤형근을 가둬두기에는 그의 작품세계가 훨씬 깊고 독창적이며 현재 허무주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서구 중심부의 현대예술 담론을 거부하는 동시에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대안적 예술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윤형근 미술이 구현하는 통찰력 깊은 대안적 예술철학이 무엇이냐에 대해 국내 처음으로,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윤형근 예술세계를 여는 두 가지 명제
“우선 사람이 되어라.”
“내 그림은 추사 김정희의 쓰기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예술계 종사자 대다수는 서구 중심부에서 흘러 내려오는 담론의 소화에 급급해서, 그 담론의 개념에 생소한 다른 패러다임의 아이디어를 새롭게 창출해낼 필요성을 못 느꼈고 사실상 그렇게 할 지적(知的) 여유도 없었다. 반면에 전통 동양화의 맥을 보전하는 예술 종사자들은 고답적이고 기술적인 전통 동양화론(論)의 디테일에 매몰되어 현대에도 전통에도 속하지 않은 새로운 예술의 경계를 그려내려는, 윤형근 같은 창의적인 작가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담론화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용어의 개발에 무기력했다. 이 글에서는 이 두 가지 명제를 시작으로 윤형근이 추구하는 예술 정신을 드러내보려고 한다. 그중 두 번째 명제인 “내 그림은 추사 김정희의 쓰기에서 시작되었다”에 대해서는 《월간미술》 2008년 3월호에서 상세하게 기술한 바 있어서, 본고에서는 주로 첫 번째 명제를 중심으로 윤형근의 예술세계를 풀어나가겠다.
“우선 사람이 되어라.” 윤형근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늘 이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이 예술가가 되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라면, 여기에는 어떤 예술 철학이 암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선 이런 질문을 해야 된다. ‘사람이 되어라’가 무슨 말이냐? 먼저 이 질문에 대한 가설적 답변(hypothetical answer)을 제시하면서 가상의 예술철학 이론을 구축해가 보자. 그렇게 구축한 예술적 담론 구조가 설득력이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설득력의 유무는 물론 독자들(동료학자, 예술인, 일반 독자 등등)의 판단에 맡기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사람이 되어라’는 ‘너다운 사람이 되어라’의 준말이라고 가정하고 시작해 보련다.
참나(眞我)란 무엇일까? 우리는 일상 언어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런 논평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참 그 사람답다” 라고. 그렇다면 혹시 그를 그 사람답게 만드는 그 무엇이 바로 숨겨진 참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참나를 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일상에서 벗어나는 장소에서 홀로 조용히 반성하는 시간 없이는 참나를 발견할 다른 길은 없을 것이며, 이런 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이 바로 명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머릿속은 수만 가지의 생각으로 혼탁해져 있다. 그러나 물결이 잔잔해지고 물위에 떠돌던 것들이 바닥에 가라앉게 되면, 수면은 맑고 투명해져서 바닥이 보이게 되듯이 명상은 이와 같은 이치인 것이다. 마음을 조용히 하여, 여러 일상의 잡다한 생각들과 감정을 가라앉히면 담담해진다. 그렇게 담담해진 상태가 되면 머리가 명료해지면서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명상이란 생각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여 담담한 평정심을 찾는 방법이라고 보면 된다.

〈Ultramarine Umber〉oil on linen 259.5×181.5cm 1976 (Courtesy of 윤성렬and PKM Gallery)

〈Ultramarine Umber〉oil on linen 259.5×181.5cm 1976 (Courtesy of 윤성렬and PKM Gallery)

담(淡)의 조건
도대체 참나의 정체는 무엇일까? 먼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의 결을 찾아야 하는 데, 인간도 연꽃의 씨앗 같은 그만의 결을 확보해주는 DNA의 구조로 설명할 수 있을까. 육체적인 특성의 경우 그가 어떤 종류의 질병에 약한가 등의 정보까지 유전적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성품, 그다운 독특한 영혼의 소유자로서의 참나는 뇌 구조나 유전적 특성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20세기 후반의 인지 과학적 발견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인간의 언어 능력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한 노암 촘스키의 이론일 것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우주의 원리를 내재적으로 습득한 채 태어난다. 하나의 돌도 우주의 역사를 관통한 그 돌의 역사에 의해 그만의 독특한 결이 결정지어지듯이, 한 인간 역시 그만의 유일한 잠재 능력을 갖고 태어났고, 명상 같은 담담함의 상태에 도달하여야 비로소 자신의 그 능력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참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자아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언급했는데, 도대체 ‘자아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선 담담한 상태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필자는 그것을 ‘담(淡)의 정신’이라 부르고자 한다. 담담(淡淡)함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음으로써 조용히 고요하게 하여 생각과 감정의 파고를 가라앉히는 상태를 말한다. 고요히 가라앉아서 담담하게 되면 명료함이 따르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며 흐려졌던 눈과 마음과 귀가 밝아진다. 그렇다면 동양적 사유는 정녕 개념적으로 모호한 사유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는가? 왜 동양적 인문학을 운운하는 식자층에서는 사려 깊게 탐색하지 않은 애매한 개념들을 마치 무슨 심오한 내용이라도 들어있는 것처럼 늘어놓는가? 그 한 예가 공(空)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동양 지혜의 진수처럼 되어버린 채, 동양적 현대화(現代畫)를 표방하는 미술인들이 ‘여백의 미학’이라는 용어를 즐기며 작품 속에 심오한 예술철학이 담긴 것처럼 주장하고 대중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미술용어로서의 ‘단색화’라는 명명작업처럼 이런 단어들도 무(無)개념의 단어들을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현대 물리학은 절대 진공(vacuum) 상태를 부정한다. ‘마음을 비워’서 명상(冥想)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음을 공(空)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모든 소프트웨어가 지워진 상태에서는 그 컴퓨터의 재부팅이 불가능하듯이, 엄밀히 말하자면, 명상 상태에 들어간다함은 이미 설치된 여러 소프트웨어의 작동을 일시로 중단시켜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작동이 중단됨으로써 잠재력(potential force) 또는 하나의 잠복상태(latency)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완전히 지워져서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언제나 재부팅의 가능성이 온전히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명상의 상태는 공(空)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상념을 내려놓은 상태, 또는 가라앉힌 상태를 말한다. 그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는 한국말이 바로 ‘담담(淡淡)함’이다. 세상과 인간사를 모두 하나 같이 담담하게 대할 수 있음을 바로 담(淡)의 정신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윤형근의 지인들이 그를 ‘태산 ’같다고 말할 때 바로 그런 담(淡)의 정신에서 나오는 의연함을 일컫는 말이라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담(淡)의 정신은 결국 명상 같은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아서 세상과 인간사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세계관이자 인생 철학으로서, 윤형근의 작품은 이러한 동양적 수행문화의 산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수(修)는 닦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서양철학은 몸과 정신 분리의 이분법을 전제로 하지만, 동북아 문화권에서는 몸을 닦으면 동시에 마음도 닦인다고 이해한다. 동·서 사유의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행(行)은 행한다, 실천한다는 뜻으로 수행(修行)은 닦고 행하여 자연의, 대우주의 순환 기류에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이 잘 되려면 완전히 깨어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쉬고 있어야 하며 바로 그런 상태가 ‘담담함’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담(淡) 정신은 궁극적으로 우주와의 합일을 추구하며 이 우주와의 합일이야 말로, 인간 정신성(human spirituality)의 발현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만년의 이마누엘 칸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우주와의 합일의 추구를 인간 정신성의 핵심이요, 그것에 대한 영원한 추구의 표현이 바로 인간의 예술성이라 강조했다.

전통과 혁신-동시대성과 보편적 가치
동양 전통서예에서 ‘쓰기’란 한지 위에 미리 선택해 놓은 특정 한자 또는 한자의 군(群)을 먹물 묻힌 붓으로 획 하나 하나를 그어 나가는 것이다. 한자의 여러 획이 어떤 상관관계로 구조를 이루고 그 안에 내재된 힘 또는 가상의 기세(virtual force or potential force)를 작가 자신이 몸으로 느끼게 됨으로써 이에 대한 자동적 반응으로 붓을 든 손이 움직이는 순간 바로 그 힘으로, 그 속도로 획을 긋는다. 즉, 미리 선택된 구도의 가상의 기세를 몸으로 읽고 작가 자신의 당시 기운에 따라 붓 운동으로 획을 그어 이미 잠재하는 그 가상의 기세를 한지 위에 구현해주는 것이다. 윤형근의 작품 역시 이러한 ‘쓰기’의 과정을 통해 잠재한 기운을 발현해낸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가 택하는 모든 재료는 분명히 서구미술 규범 속에서 사용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윤형근은 자신이 그림에 대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추사와 마찬가지로 ‘쓰기’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동양의 전통적 재료인 한지 위에 먹물을 갈아서 서예용 붓으로 획을 그어 작품을 만드는 대신, 캔버스와 오일컬러 및 브러시 등 서구의 현대적 재료들을 사용한다. 먹을 갈아 전통한지에 붓으로 획을 긋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단순한 검정색이 아닌 갈색(umber)과 청색(ultra-marine blue) 물감을 섞고 테레핀에 희석시켜 표면처리 하지 않은 리넨 또는 면 화폭 위에 번지는 효과를 냄으로써 동시대인이 크게 공감할 수 있는, 수묵 빛깔과도 같이 한없이 깊은 그만의 독창적 팔레트를 만든 것이다. 이것은 기술적 차원에서 수묵과 서예의 예술행위를 서구적 재료인 캔버스 위로 옮겨와 이행한 것으로 동양 전통서예/수묵화의 문화적 경계 지형도를 넘어선, 가히 범세계적인 혁명적 쇄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 단색화 작가들에 대한 국내외 미술계의 반응이 뜨겁고 그중 윤형근에 대한 관심도 매우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만 윤형근의 활동 시기가 다른 단색화 작가들과 겹치고 그의 작품 색상이 표면적으로 단순하다 하여 그를 단색화 작가 집단에 가둬두고 평가하는 것은 그의 담(淡)의 정신에 바탕한 삶과 예술에 대한 태도 및 그가 전통과 혁신을 한 화폭에서 아우르며 독창적이고 기운과 기품 넘치는 결과물을 탄생시킨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얕고 편협한 접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근거 없이 표피적이고 가벼움과 허무주의가 팽배한 작금의 세계적 미술 기류에서 오는 피로함 속에서 거대한 뿌리와 정신성을 계승하며 동시에 혁신성을 추구함으로써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윤형근의 작품은 충분히 21세기의 보편적이고 대안적인 미술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필자의 해석이 틀리지 않았다면 향후 20세기 후반부 미술을 재론할 때 윤형근은 세계 미술사 차원에서 재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EXHIBITION TOPIC MARK ROTHKO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초기작부터 타계 직전까지의 작품 50점을 소개하는 <마크 로스코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3.23~6.28)이 열린다. 알려진 바대로 로스코의 작업은 신비로움을 넘어 종교적 차원의 감흥을 일으키는 힘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성당을 연상시키는 전시장을 거닐면서 작품이 주는 ‘숭고함’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추상의 의미와 유효성

정무정 덕성여대 교수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2차 대전 이후 국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추상표현주의를 대변하는 작가다. 로스코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작품들은 대체로 커다란 수직의 캔버스에 몇 개의 사각형이 배치된 형태를 취한다. 전반적으로 그의 작품에선 정면성과 대칭성이라는 형태적 특성상 정적인 느낌이 지배적이지만, 동시에 표면의 섬세한 회화적 터치로 그 정적인 공간을 채운 미묘한 파장이 감지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일찍부터 신비적, 종교적 차원의 감정과 정서를 환기시킨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예컨대 미술사가인 존 캐너데이(John Canaday)는 1961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전시리뷰에서 그의 회화에 보이는 색채의 무게감과 사각형의 거대함이 원시적 종교의 제의적 상징을 시사한다고 주장했고, 197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을 보며 미술비평가 힐튼 크레이머(Hilton Kramer)는 그의 작품세계를 ‘종교적 신념의 미술’로 규정지었다. 깊은 공명을 자아내며 많은 관람자를 작품 앞에 멈춰 서게 하거나 눈물 흘리게 만드는 로스코 작품의 이러한 특성은 깨달음의 순간처럼 단숨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부단한 탐색과 도전과 변화의 결과로 얻어진 산물이었다.
주요 추상표현주의자들 중 가장 연장자였던 로스코는 라트비아 출신으로 1925년 뉴욕시의 비공식미술학교인 미술학도연맹에 등록해 미국 초기 모더니스트인 막스 웨버(Max Weber)를 사사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초기 작업은 주로 피카소를 연상시키는 구상작품이나 존 마린(John Marin)이나 밀턴 에이버리(Milton Avery)와 같은 미국 1세대 모더니스트의 영향을 보이는 작품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작업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38년부터로 이 시기에 시작된 신화적 주제의 반추상 작업은 194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다. 이들 작품에서는 고대 미술, 그리스 도기회화, 건축 장식에서 유래된 수평적 띠로 화면이 구획되고, 구획된 공간에 고대미술의 잔재나 파편을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채워져 고대 그리스의 종교적, 신화적 장면이 연상된다. 특히, <안티코네>, <독수리의 전조>, <시리아의 황소>, <이피케니아의 희생>과 같은 이 시기 작품의 제목은 로스코의 고대 미술과 신화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주는 데, 1943년 10월 아돌프 고틀리브와 함께 출연한 라디오 방송(WNYC)에서 그는 신화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는 신념을 피력했다. “우리의 제목이 익숙한 고대의 신화를 연상시킨다고 할 때, 우리가 그러한 것을 다시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기본적인 심리적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의지해야 할 영원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원시적 공포와 욕구의 상징으로 그리스, 아즈텍, 아이슬란드 또는 이집트 등 어느 지역,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오직 세부에서만 변화할 뿐 그 실체는 변하지 않는다. 현대심리학은 삶의 외적인 조건이 모두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우리의 꿈과 일상 언어와 미술에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본다.”
1943~44년에 이르러 로스코는 이러한 신화적 구체성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한정시킨다는 생각에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주로 수채로 작업하며 세부 묘사보다는 일반화된 형태를 선호하고 수용성 물감이 자아내는 유동적 붓터치에 집중했다. 이들 종이작업에서는 대체로 명도가 낮은 색이 넓은 부위에 다소 투명하게 채색되고 그 위에 무정형의 형태가 배치된다. 이 무정형의 형태는 인간 존재를 암시하면서 동시에 원초적 유기체를 연상시킨다. 바탕색이나 수평선으로 구획된 얕은 공간 속에서 부유하는 듯한 이 연약한 형태는 면도칼 같은 날카로운 도구나 붓의 나무 손잡이 등으로 갓 칠한 물감을 긁거나 문지르고 물감을 뿌려 점묘적 효과를 내는 등의 새로운 기법을 통해 획득된 것이다. 이 시기 로스코의 자유로운 실험은 미로, 클레 등의 작품과 같은 유럽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이해와 마타, 에른스트, 마송과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의 회화, 드로잉에 구사된 정신적 자동기술법의 영향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캔버스에 유채 236.6×211.5cm 1956 © 1998 Kate Rothko Prizel and Christopher Rothko/ARS, NY/SACK, Seoul

<무제> 캔버스에 유채 236.6×211.5cm 1956 © 1998 Kate Rothko Prizel and Christopher Rothko/ARS, NY/SACK, Seoul

“나는 추상주의자가 아니다”
이 시기부터 미국 미술계도 로스코를 비롯한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새로운 작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45년 3월에 열린 <비평가의 문제(A Problem for Critics)전>을 통해 하워드 퍼첼(Howard Putzel)은 “1940년 이래로 회화에서 새로운 변형을 향한 추세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며 그 ‘새로운 변형’의 근원으로 아르프, 미로(Joan Miró) 그리고 피카소를 꼽았다. 추상표현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운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도 퍼첼의 주장에 공감했지만, 미국 미술가들의 작품을 아르프나 미로와 연관시키지 않았고, 1948년에 이르러서는 큐비즘의 쇠퇴를 선언함과 동시에 큐비즘의 개념적 토대와 구조에서도 벗어난 비위계적이고 전면적인 구성을 통해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반면 당사자인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유럽미술과의 관계 속에서 추상표현주의 작품의 기원과 새로운 형식적 발전을 설명하는 퍼첼이나 그린버그의 주장을 반박했다. 예컨대 바넷 뉴먼은 자신의 의도가 미술에 형이상학적 내용을 부여하는 ‘숭고’의 표현임을 강조했고, 로스코도 퍼첼의 분석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고 1945년 6월 1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신화창조자이다. 따라서 실재에 대한 호불호의 선입관을 갖고 있지 않다. 모든 신화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회화는 기꺼이 실재의 파편을 ‘비실재적’이라 간주되는 것과 결합하고 이러한 통합의 타당성을 강조한다”고 주장했다.
1946년부터 로스코의 작품은 보다 추상적으로 변화하였다, 화면에 분산된 형태가 더 거칠어지고 가장자리가 회화적으로 처리되는 과도기를 거쳐 형상과 배경이 완전히 통합된 전체 화면에 부유하는 듯한 부드러운 사각의 형태가 활기를 부여하는 양상으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로스코가 추상으로 완전히 전환한 것은 다양한 기법에 의해 획득된 그의 합성적 형상조차 매우 제한적이고 구체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제목을 붙이는 것도 포기하고 숫자로 대체했다. 이러한 그의 성숙기 작품은 너무 추상적이고 이야기와 모방을 거부한다는 점 때문에 많은 의심과 비판을 받았지만 로스코는 계속해서 그의 성숙기 회화가 추상적이라는 평가에 반론을 제기하며 오히려 사실적이며 진정하고 구체적이며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주제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추상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색채나 형태 또는 다른 어떤 것의 관계가 아니다. 나는 기본적 인간의 감정—비극, 엑스터시, 운명 등—을 표현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많은 사람이 내 그림을 대면하면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은 내가 이 기본적 인간의 감정과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내가 그 작품을 그릴 때 느낀 것과 동일한 종교적 경험을 갖는 것이다. 만일 색채의 관계에만 감동을 받는다면 중요한 점을 놓치는 것이다.”(Seldon Rodman, <Conversations with Artists>, New York: Capricorn, 1961, pp. 93~94)
이러한 주장은 로스코의 추상적 형태가 가시적 경험과 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그의 초기 작업에 보이는 유기적 형상에 내포된 원리와 의지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원시, 고대미술과의 정신적 유대감을 공언하고 비극적이고 영원한 주제만이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로스코에게 그의 성숙기 추상작업은 추상적 사고와 경외심의 살아있는 매개물이었던 셈이다. 여전히 로스코의 작품 앞에서 무언가에 홀린 듯 멈춰서는 관람객은 로스코의 진정성을 웅변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로스코의 작품이 대거 한국에 들어와 꾸려진 이번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는 그의 진정성을 확인할 좋은기회가 되리라 본다.

 캔버스에 아크릴 152.4×145.1cm 1970

<무제> 캔버스에 아크릴 152.4×145.1cm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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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마크 로스코전〉같은 의미있는 전시는 계속 열려야”

㈜코바나컨텐츠 대표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 김건희

전시를 개최하게 된 계기에 대해 알려달라.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작가다, 작품평가액이 매우 높은 데다가 미국의 국립미술관인 워싱턴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이 해외반출을 안하기로 유명한 터라 감히 들여올 엄두도 내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그런데 미술관의 리노베이션 덕분에 대규모 마크 로스코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로스코의 어떤 면모를 드러낼 수 있을지 설명을 부탁한다. 마크 로스코는 양차 세계대전을 겪고 미국으로 망명한 작가로, 랍비교육까지 철저하게 받은 유대인 출신이다. 신화, 철학, 성서의 본질을 학습한 그는 이후 인간을 철저히 연구하면서 고유의 정신세계를 구축했다. 당연히 작품 또한 깊고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와 호흡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그의 초기부터 중기 전성기 말기에 이르는 작품을 총망라해 한 작가의 위대한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다.
이번 전시를 관람할 때 흥미를 더욱 돋울 수 있는 팁을 알려준다면? 전문가를 제외한 대중은 사실 유명한 인상파 작가인 고흐의 진짜 가치도 잘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시에서 그 기본개념을 제대로 설명하느냐 여부는 중요한 문제다. 유명해서 보러 오고, 식별할 수 있는 소재라서 그림을 이해한다. 본 전시는 더 어려운 추상이다. 추상을 통해 오히려 그 전 시대의 인상파나 입체파를 이해할 수 있는 이해의 장을 마련하려 했다. 조용한 공간, 침묵의 공간, 명상의 공간 그림과의 거리 45cm, 어두운 조명 등등 까다로운 전시 관람조건을 제시한 로스코의 전시장은 모든 걸 떠나 뭉클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누구나 마음이 움직이고 눈물이 나는 특이한 경험을 미술을 통해 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종교적인 경험까지 제시한 로스코의 특별함은 이 전시가 주는 강한 감동이다. 로스코 전시장에 오면 눈물 흘리는 사람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문화 기업을 운영하면서 경영 방향과 그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세우고 있는가? 마크 로스코 전시를 결심했을 때 내 가족을 포함 아무도 지지하지 않았다. 역시 대중성이 문제였다. 그래서 더욱 외로운 결정을 해야 했다. 손해를 결심했다는 게 솔직한 대답이다. 그만큼 국내 최초 마크 로스코 전시는 가치 있다는 판단에는 지금도 물러섬이 없다. 결정을 하고 나서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접근하기 쉬운 전시를 만드는 게 나의 관건이었다. 기획의 문제였다. 기획이 실패하면 장기적 경기불황에 총체적 난국인 국내 정세에 마크 로스코라는 대중성 없는 전시는 큰 실패로 끝날 것임이 분명한 일이었다. 전문가들과 사명감 있는 분들을 찾아가 절실한 도움을 요청했다. 기획에서부터 마케팅까지 정말 그분들의 도움으로 한국에 이런 좋은 콘텐츠를 선보이게 되어 뿌듯하다. 이처럼 의미있고 가치있는 전시는 반드시 되풀이되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국립미술관 소장품이 대규모 소개되는 최초 전시 <마크 로스코>는 대한민국 전시계에 큰 영향을 줄 것임은 분명하다.
황석권 수석기자

CRITIC 한반도 오감도

아르코미술관 3.12~5.10

 

강성원 미학
<제14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한반도 오감도> 귀국전이 열렸다. 귀국전만을 보고 이 전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은 부족할 수 있지만, 한반도의 ‘근대적 일상’과 관련된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실제 살아가는 당사자들에게는 오히려 낯선 전시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아쉬워 글을 써보고자 한다. 귀국전을 보고 제14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어서 다른 국가관과 비교할 순 없지만 귀국전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중요 지점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이번 건축전 총감독인 렘 쿨하스가 국가관을 통해 보고자 한 것은 건축에서의 ‘근대성의 흡수:1914~2014’ 문제였다. 이 주제로 그는 “우리는 어떻게 살기 원하고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국관 커미셔너인 조민석은 “계속 앞만 보고 질주하는 줄 알았는데, 실상 공회전하고 있는 현재의 전 지구적 문화상황에서는 매우 시기적절한 장치였다”며, “동족상잔의 한국전쟁과 계속되는 반목 정치는 해묵은 망령과 편견,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낳았다. 너무 많은 경우 남북한이 극적으로 과장되거나 단순하게 편향된 모습으로 그려져 한반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내재한 가능성과 복합성을 보지 못하게 했다. 한국관은 건축의 눈을 통해 남북한의 일상적인 공간과 영웅적인 기념비들을 새로이 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조민석은 이 전시 또한 공회전으로 그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것이 바로 렘 쿨하스가 던진 과제이기도 했기에, 이 전시를 정치적으로 야심찬 기획전이 되게끔 구상했다. 그러면서 ‘근대성의 흡수’ 문제를 남북한 공동전시로 풀고자 했다. 하지만 준비과정에서 북한의 참여가 불가능하다는 최종 결정이 났고 전시는 다르게 준비됐다. 결국 시인 이상의 <오감도>처럼 “건축관 구성도 얼기설기 파편적일 수밖에 없는 자료들을 통해” 하게 된다. 큐레이터들은 미친 듯이 북한 건축 자료를 리서치할 수 밖에 없게 됐는데, 어찌됐건 배형민 큐레이터의 냉철함으로 리서치의 광기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북한문화에 대해 특별한 공감으로 지속적 관심을 가졌던 전 세계 북한 연구자들의 자료를 거의 전부 리서치했고, 의도한바 전시내용을 얼마만큼 풍부히 할 수 있느냐에 대한 큐레이터들의 종합평가를 거쳐 자료가 전시 구성물로 들어왔다. 이들 큐레이터의 자료에 대한 평가, 공감 능력이 이 전시의 백미인데, 북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보편적인 지성의 수준에서 볼 때 타당하다고 판단되는 연구들에 대해 편견 없이 제대로 된 분별력으로 구분해냈고, 자료들 하나하나가 전시 전체에 다양하면서도 통일된, 일정한 ‘의미화’로 매개될 수 있도록 최선의 협업과 판단의 구체성, 집중력을 발휘해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기왕의 자료로 부족할 경우 새롭게 전시 콘텐츠들을 주문, 제작했는데, 이때도 큐레이터들이 요구한 정치적 문화적 가이드라인이 동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시 내용은 이중의 서사층위로 구성돼있다. 2개의 층위 모두 패치워크(깁기)로,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는 방식이며, 하부 층위는 남북한의 일상적 공간(건축)에서 근대성 흡수를 향해 나아가는 ‘사건’들에 대한 조감적 서사이다. 상부 층위는 남과 북이 지녀온 근대성의 고민들을 시선의 동일 지평에서 보고자 하는 ‘노력’의 서사로 구성했다. 이 이중의 층위 속에 북한 건축가의 부재를 대체할 패치워크로 수집, 제작된 자료들이 우연적으로 연계돼 있지만 ‘리서치 인 액션’(Research in Action)이라는 심사평에서도 보이듯 연대기적 서술이 아닌 남북한의 ‘근대적 생활의 고투에 담긴 진정성’이 새로운 ‘의미의 성좌’를 구성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남북한이 각각 다른 설계로 근대적 삶을 계획했지만, 이 삶들은 각각이 고투의 진정성을 지니고 헤쳐 온 삶이며, 이것이 한반도 근대의 얼굴이었다는 ‘공감적 사고’에 대한 요청이 이 전시가 담아낸 비전의 의미로 나타난다.
전시물 각각의 상징성과 알레고리는 전시 구성에 메타포로 얽혀들며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콘텍스트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그래서 남북한이 근대성을 흡수해온 모양새 (생활의 요구와 의미)는 각 자료들 속에서 개인의 특별한 경험으로 어른거리거나 동시에 전체가 하나인 ‘근대라는 강가의 삶’이 그려져 한반도의 근대적 삶이 표현된다.
<한반도 오감도전>에는 이러한 역사가 향하는, 이 강의 양안에서 내달리는 인간의 삶의 애끓는 목적에 대한 비난도, 삶의 목적이 진정 무엇이어야 할지에 대한 강경한 언급도 없다. 하지만 전시는 남북한 각각의 삶에 대한 조감적 공감에 바탕해 ‘근대적 인생’의 이름으로 남한과 북한이 서로 용서할 수 있는 ‘인간적 근거’를 찾아 나섰다. 남북한의 다름은, 한국전쟁은, 근대성의 흡수라는 거대한 동아시아적 혼란한 역사의 일부요, 거기서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각자의 터전에서 과제가 있었고, 이런 특수한 역사적 경험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전 세계와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의지’를 읽도록 했다. 이 의지가 전시미학으로 적정하게 제대로 표현됐다.
“이러한 거대한 역학 속에서 남한과 북한은 각각 현대사의 신화를 창조했다. 북한은 외부세계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지구상 최후의 공산국가이며, 이상사회임을 자처한다. 남한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강국으로 눈부시게 도약한 지난 세기 최고의 성공신화를 일궈냈다고 자부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에 분명 모종의 진실이 있다.”
배형민 큐레이터의 이 말대로 <한반도 오감도전>은 모종의 ‘진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전시는 특정한 정치적 해석을 주입하지 않고, 근대성의 역사가 울림으로, 마음으로 전달되도록 우리 삶의 심금의 저 밑바닥을 두드리며, 거기 희뿌옇게 가라앉은 진실을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드러내는 방법으로 우리의 공감능력을 일깨운다. 이 전시의 가장 중요한 ‘이상하지만 담대한’ 미덕이다. 전시 공간 한가운데 배치된, 전시도록 맨 중간 페이지에 들어간, 도쿄 UIA 콘퍼런스(1980) 후 열린 남북한 건축가들의 합동 송별파티 사진 한 장은 이 전시구성과 전시물의 서사가 추구하는 ‘의미’를 응축한다. 배형민은 “<한반도 오감도>는 이상의 <오감도>와 한국관의 탄생을 통해 미완의 역사를 이어가려고 한다. 이상에서 김수근, 김석철, 그리고 조민석까지 건축에 대한 열망의 고리를 이어 모종의 역사적 의식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전한다.
전시 ‘프롤로그’에서 ‘삶의 재건’, ‘모뉴멘트’ 그리고 ‘경계’에 이르는 길은 근대성을 향한, 근대성의 흡수로 인한 한반도에서의 생활상의 동경과 인간적 고뇌의 오감도요, 남북한에서의 저 지난 삶에 대한 그저 단순한 인간으로서의 공감을 위해, 근대성에 내재된 메커닉한 추상성과 죽음 같은 긴장관계들이 ‘리서치 인 액션’으로 탐색됐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제대로 말하고 싶은 큐레이터들의 ‘의지’의 강렬함과 진정성으로 인해 인간이 집요하게 목적을 실현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서블라임’(Sublime)의 후광이 전시 자료들 위로 떠오른다.
큐레이터들의 이런 정신은 그간 남북한의 공동체적 삶을 위해 노력해왔던 다양한 국내외의 관심과 탐구, 행동의 역사를 전시 콘텐츠의 중심축으로, 즉 근대 문화사의 내밀한 중심계보로 성공적으로 연계하고 있으며, 확고하고 탁월한 안목에 의해 ‘사건’(남북한의 역사와 문화에 관련된 사실들, 결과물들)의 성격이 지닌 역사철학에 대한 공감적 구별을 하고 있으며, 그러면서 출품된 문훈의 <샤면 해체주의>에서 보듯 실제로는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사실들 간의 일종의 연금술적 미학적 조화도 이끌어냈다. 내용과 형식에서 절합적이되 정신에서 일관된 비전을 놓치지 않고 전시 전체에 투영한, 그래서 클래식한 전시였다.
총감독이 “비엔날레라는 새 기계를 통해서 새 가치를 만들자”라고 밝혔듯, 비엔날레라는 대형 행사의 인류사적 의미는 어떠한 구체적 이해관계도 전제하지 않은, 대규모의 자본과 기술의 지원과 정치적 배려가 공공선의 발전을 위해 주어진다는 점에서 나온다. 이때 비엔날레의 기획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전시 조직자의 인문적 자질과 전시내용의 공공적 질이다. 그래야 비엔날레는 성공한다. 비엔날레와 비엔날레 기획은 그 자체로 예술이요 인문학이다. 이번 <한반도 오감도>는 이러한 비엔날레 전시가치를 정공법으로 계승한 유니크한 전시이다.

위 사진가 신경섭(왼쪽 벽면)이 촬영한 전후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 오른쪽페이지 사진, 회화, 영상, 건축모형 등 다양한 자료가 전시됐다

CRITIC 최헌기 CUI XIANJI 1994-2015

성곡미술관 3.20~5.31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작업을 볼 때 작가의 개인사를 얼마나 고려해야 하는가. 이때 작가의 삶에 미치는 사회, 정치적 영향은 어떠한가. 사회의 체제에 따라 개인에게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에 큰 차이가 있음은 당연하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서는 체제가 개인의 삶에 개입하는 정도가 크다. 중국 작가의 경우, 작가의 삶을 정치와 멀리 놓고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그 작품에는 작가의 개인적 표현 및 취향보다 사회에 대한 내용이 많다.
1962년 태생의 최헌기는 중국 작가이나 한국인이기도 한 이산(離散) 작가이다. 두 문화 사이의 ‘경계인’으로서 자신의 체험을 표현한다. 소수민족이 겪는 정체성 갈등, 보이지 않는 구조적 불이익과 그에 대한 저항, 사회주의 교육과 그 이념적 혼란, 전통에의 향수와 급변하는 현재,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 등이 작품에 그대로 보인다. 한마디로, 체제가 강요하는 가치와 전통의 기준에 반발하는 저항정신과 도전의식을 거침없이 뿜어내는 작품들이다.
199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그가 전시에서 다루는 작업의 스펙트럼과 재료는 놀랄 정도로 다양하다. 중국의 다변하는 정치상황과 다름없다. 그러나 나는 그를 전형적인 화가라 본다. 1990년대 추상화는 그가 가진 화가로서의 진면모를 잘 보여준다. 풍경에 기반을 둔 그의 추상화는 강렬하면서도 정제된 색채감, 대담한 마티에르, 그리고 역동적 필력과 함축된 시적 공간을 표현한다. 체제에 억압된 작가의 저항력과 대륙적 기질이 서구 모던아트의 새로운 기운을 만나 벌이는 격렬한 몸부림인 듯하다. 유화의 표면은 격정과 희열, 그리고 갈등과 화합을 무겁게 담아낸다.
이렇듯 회화의 물리적 조건을 지키던 작가가 그 한계를 전격 벗어난 것은 대략 2007년경부터다. 그림의 평면과 프레임을 이탈하는데 그 방식이 무척 저항적이며 공격적이다. 회화의 추상적인 붓터치는 직설적인 말 낙서(‘狂草’기법)가 되었고, 그림의 은유적 공간은 액자를 벗어난 실제 공간으로 확장됐다. 그림의 틀과 면을 탈출한 광기를 보듯, 그가 화가로서 지켜왔던 ‘감각 논리’가 자체 발동한 셈이라 할 수 있다. 대형 설치작인 <붉은 태양>(2013)에서 그는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의 형상을 조각으로 만들고 낙서와 광초(狂草)를 허공에 갈겨놓았다.
그러한 일련의 실험적 설치작업은 본업이 화가인 최헌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림을 둘러싼, 그림에 대한, 그림을 위한 그의 발언일 뿐이다. 고전 액자를 오브제로 활용, 여러 겹의 투명 사천으로 감싸고 그 위에 물감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이렇듯 반투명한 초상화를 통해 그가 보여주는 것은 난독의 정체성이다. 문화와 문화 사이, 체제와 개인 사이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관계는 그 작업이 나타내는 난독과 불통의 내용이다.
그렇기에 대규모의 작품 <설국>(2015)에서 회화로 돌아온 작가의 ‘발언’을 본다. 작가의 실험적 광기는 다시 회화 면에서 안정을 찾은 듯, 평면을 이탈한 뜻모를 광기의 낙서는 무채색의 함축적 붓질에 잦아들었다. 시끄러운 몸부림과 질러대던 고함은 회화의 평면공간에 안착해 묵직한 음성으로 공명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납득하려는 작가의 분투는 이제 미적 평안을 찾은 듯하다.

최헌기 <위대한 광초(Great Cursive Writing)> 혼합재료 2013

CRITIC 잭슨홍 Cherry Blossom

시청각 3.19~4.26

방혜진 미학
<Cherry Blossom>의 천태만상 인물들은 다양성과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이라기보다는 일련의 유형으로 재빨리 분류된다. 구분점은 노동과 여가, 생산과 소비의 행동 양식. 철저히 차별주의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의 위용은 이 소박한 한옥 내에도 어김없이 무차별적이다.
그러나, 인형 눈을 붙이고 있는 뒷방 할아버지에게 애틋함이나 경의를 품고, 만화책을 끼고 누운 남자에게 분노나 경멸을 품을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화의 현대판이라 할 이 군상을 도덕적 메시지로만 해석하는 것은 (어쩌면 이 전시가 벗어나고자 하는) 폐쇄적 시야일 것이다. 단적으로, 이 일련의 인물 묘사는 명백히 노동의 경건함만큼이나 빈둥거림의 유쾌함을 예찬하고 있다.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왁자지껄 펼쳐진 이들을 공간 내 위치로 분류해보면 어떨까.
1) 한옥 실내에 자리 잡은 셋(할아버지, 슈퍼맨 복장 아이, 속옷 차림 남자), 2) 마당과 마루에 걸쳐, 즉 실내/실외의 전이 공간에 위치한 셋(야쿠르트 아줌마, 발버둥치는 아저씨, 운동복 차림의 여자), 3) 실외에 선 택배기사와 선녀. 여기에 번외로, 우리의 현실을 관망하고 있는, 저 높이 걸린 ‘조상님’의 사진.
시선의 문제는 사진 속 인물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이 공간을 재분배하는 것은, 언뜻 무작위처럼 보이지만 정교하게 인물들을 가로지르는 시선 교량술이다. 1)의 시선은 각자의 물건에 집중돼 있다. 세상은 그 물건 속에 매개된다. 2)의 시선은 실내/실외의 교차로 요약된다. 실내에 머무르려는 남자와 그를 끌어내려는 아줌마의 힘겨루기(어쩌면 그녀는 노인과 더불어 이 집안의 생계를 짊어진 어머니일지도 모른다)가 그렇듯. 또한 이 소동에는 무심히도, 다만 외부에서 당도할 상품을 반기는 젊은 여성이 그렇듯. 3) 한편 그녀의 시선을 받고 있는 택배기사는 정작 옥상에 강림한 선녀에 홀려 있다. 선녀의 눈길은 이 실외의 바깥, 한옥 너머로 향한다.
오래된 주택가 한옥에 터를 잡은 시청각은 그간 휴먼스케일의 건축물이 갖는 조건을 활용하거나 희석시키는 전시를 펼쳐왔다. 공간의 특성은 부득불 작품의 물리적 크기와 배치는 물론, 높낮이가 각기 다른 댓돌과 문지방을 통과하는 관객의 호흡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역과 건축물이 환기하는 역사성은 장소특정성을 시청각 전시의 전제이자 제한처럼 만들기도 했다. 바로 여기, 잭슨홍은 장소성을 확인하고 확장하여 역으로 공간을 회복시킨다. 최근 에르메스 매장의 디스플레이 작업에 주력해온 그는 (납작한 쇼윈도와 대구(對句)를 이루듯) 과장된 부피와 조야한 색채의 인물들을 시청각 공간에 디스플레이한다. 과도하게 구체적인 인물들이 진입하자, 즉 거주지로서의 성격이 극단에 이르자, 과밀한 공간은 도리어 여백의 추상성을 복구한다. 쇼윈도 디스플레이가 매장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위치한 채 외부의 행인들을 내부로 유인하거나 적어도 욕망하도록 만든다면, <Cherry Blossom>의 인물상은 시청각을 한옥 주택으로 읽으려 드는 관객에게 장소의 내밀함 너머를 그리도록 이끈다.
결국 관객으로 하여금 전시장 입구에 선 택배기사의 뒷모습으로부터 관람을 시작하게 만든 것은 중요한 전략이었다. (노동/여가의 분류 역시, 그의 작업복이 출발점이었다.) 박스 하나를 들고 허겁지겁 들어선 외부인, 이 한옥의 일상이 낯선 이를 따라 집안 풍경을 둘러본 관객은 그의 시선이 머문 옥상으로 향한다. 바깥을 조망할 수 있는 곳. 바로 시청각의 첫 번째 전시에서 비가시적 인왕산을 향해 잭슨홍이 배를 띄웠던 그 장소 말이다.
<Cherry Blossom>이 구축하는 인물과 공간 역학은 현실과 미술계를 재조망하려는 시도가 되며, 잭슨홍과 시청각의 지정학이 된다.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치열한 망상이다.

위 시청각에서 열린 잭슨홍 개인전 <Cherry Blossom>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