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그림/그림자_ 오늘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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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 사부 <댐의 그림자>(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유채 146×123cm 2008 ⓒSerban Savu, Courtesy David Nolan Gallery, New York (위)세르반 사부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캔버스에 유채 135×180cm 2011 ⓒSerban Savu, Courtesy David Nolan Gallery, New York Serban%20Savu_The%20Card%20Players.jpg

답이 없는 질문이 있다. “회화란 무엇인가?”
역시 그런 질문이 아닐까? 그것은 어쩌면 답을 찾는 과정에 있음을 증언하는 것일지 모른다.
3월 19일부터 6월 7일까지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리는 <그림/그림자_ 오늘의 회화전>도 그러한 부류의 질문에 다름 아니다. 국내외 작가 12명의 작품 35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에서 회화의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기획된 전시다. ‘회화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회화의 기원’으로 보는 역설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다수의 중심이 넘실대는 그림

이선영 미술비평

뭔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면서 자극적인 표현에 탐닉하는 이들은 ‘OO는 죽었다’는 식의 수사법을 자주 구사한다. 그렇게 선정적이고 요란하게 종언이 고해지는 대표적 항목으로 신, 인간, 역사, 모더니즘 등을 꼽을 수 있으며, 회화 역시 이 대열의 단골메뉴에 끼어든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끝은 나지 않았고, 종언의 역사만 수백 년 이어가게 생겼다. 하기야 ‘내 그림이 마지막 그림일 것이다’라는 정도의 야심도 없이 작업을 한다는 것도 싱거운 일이다. 마지막을 생각한다는 것은 주목 끌기에 불과한 사이비 청산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진지한 태도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명확한 답이 없는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식의 물음은 마치 ‘OO란 무엇인가’로 요약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질문—논리실증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답이 없는 우문—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질문은 계속 그리면서 또는 쓰면서 답을 찾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다. 만약에 결정적인 대답이 있다면 회화는 정말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그림이 제의나 종교로부터 자율화되던 순간부터, 사진이나 영화 같은 다른 경쟁적인 시각매체가 부상한 이후부터 회화의 종언에 대한 담론이 많아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각 분야의 자율성이 확립되던 시기에, 즉 이미지의 오랜 역사 중 결정적 국면에 해당되는 순수예술의 탄생 시기에 회화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자의식적으로 묻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종언의 가능성 역시 떠올랐을 것이다. 회화의 종언은 근대에 탄생한 회화의 몸체에 속해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몰라도 회화가 죽은 것 같지는 않다. 이전시대와 달리 이미지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수많은 복제매체가 편재하며, 장르 구별이 와해된 지금도 가장 많은 미술인이 하고 있으며, 대중이 미술에 대해 가지는 대표 이미지 역시 그림이다. 공정한 눈으로 돌아보면, 재능 있는 수많은 화가가 매진하고 있는 이 오랜 역사의 예술이 가지는 보편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회화의 건재를 알리는 중간점검 식의 전시가 열리곤 한다.
플라토에서 열린 <그림/그림자전> 역시 왜 회화인가 자문하는 맥락이지만, 그림의 기원을 그림자로 보는 관점을 통해서 현대회화의 특징을 가늠해보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주류였던 창이나 거울로서의 비유를 넘어서, 비주류의 역사로 그림을 다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에른스트 크리스와 오토 쿠르츠가 쓴 《예술가의 전설》에 의하면, 실물이 드리운 그림자의 윤곽선을 베낀 것으로부터 시작된 그림자 그림은 실물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그림과 실물을 동일시하는 것은 주술적인 사고이며, 이러한 경향은 종교분야에서 유서가 깊다. 저자들에 따르면 주술적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림이 실물을 얼마나 닮았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고대에 이러한 신화를 처음 기록한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는 그림자 그림이 떠나갈 애인을 기념하기 위해, 부재중인 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보조물 구실을 했다고 전한다.

빌헤름 사스날  캔버스에 유채 180×220cm 2009 ⓒWilhelm Sasnal, Courtesy Sadie Coles HQ, London

빌헤름 사스날 <무제(캐스퍼와 앙카)> 캔버스에 유채 180×220cm 2009
ⓒWilhelm Sasnal, Courtesy Sadie Coles HQ, London

백현진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매체 172×230cm 2014 Courtesy of the artist

백현진 <평상심>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매체 172×230cm 2014 Courtesy of the artist

비주류 역사로서의 그림
같은 기원을 공유하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빅토르 스토이치타)도 거울과 대조되는 그림자의 속성을 강조한다. 타자에게 속해있으며 타자를 닮은 그림자 그림은 동일자가 아니라 타자, 존재가 아니라 부재를 알린다. 플리니우스가 묘사한 재현은 그림자의 이미지에 대한 재현이었기 때문에, 최초의 회화는 복사물에 대한 복사물 이상은 아니었다. 그림자로서의 그림은 원본/복제에 근거한 이원론적 사유가 아니라, 차이와 반복의 유희에 의한 허상simulacres에 속한다. 모상이 아닌 허상으로서의 속성이, 그림자/그림의 신화와 현대회화가 연결되는 부분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허상은 무한히 반복되는 사물들의 순환을 보여주며, 이 반복은 우연한 것, 다양한 것, 생성을 긍정한다고 말한다. 두뇌기관의 한 연장으로서의 시각이 체계적인 광학적 사유를 발전시키며 이상적인 원형idea의 재현으로 귀결된다면, 그림자 그림은 우연하고 다양한 것이 생성되는 바탕의 자유를 선포한다. 그래서 그림자 그림은 촉각적이다. 이러한 촉각적 시선에 눈이 있다면 뇌의 말단이 아니라 손의 끝에 있을 것이다.
떠나가는 연인을 기념하기 위해 탄생한 그림자 그림은 이성적인 시선의 냉정한 거리감이 아니라, 전신의 피부에 와 닿는 끈적끈적한 것이며 몸과 무의식에 호소한다. 한국을 포함해 영국, 미국, 중국, 루마니아, 폴란드 등 다양한 국적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물감의 물성과 붓질이 직접 드러나는 회화적painterly 경향을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조세핀 할보슨의 화면은 공사장 같은 데서 흔히 보이는 널빤지 같은 거친 모양새로, 사물과 물감의 물성을 하나로 수렴한다. 케이티 모란의 작은 작품들은 예측 불가능한 기후적 현상과 폭풍같이 몰아치는 붓질을 하나로 만든다.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모호한 것들을 통해 재현의 투명성에서 그리기의 불투명성으로 이동한다. 어둡고 칙칙하며 두꺼운 화면을 보여주는 질리언 카네기는 무대의 커튼으로 시작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오마주하면서 재현주의를 끝장내려는 의도에 동참한다. 이곳과 저곳 사이를 구별하는 무대적 환영의 거리감은 질척거리는 회화의 대지로 재탄생했다.
물웅덩이에 비친 그림자를 보여주는 빌헬름 사스날의 작품에서는 반영된 세계가 실제보다 더 실감나는 역전이 일어난다. 회화는 사진을 포함한 다른 매체의 경험을 종합할 수 있으며, 그것이 현대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일순간 지나가는 일상의 한 장면을 포착한 박진아와 셰르반 사부, 보도사진에서 소재를 취한 리송송李松松의 작품에는 사진적 시각이 있다. 사진과 그림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그림자의 지표index적 특성을 지적한다. 플리니우스는 그림자를 사람의 흔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 역시 도상적 유사물이자 지표로 여겨진다. 다수의 스냅샷을 한 화면에 결합시키는 박진아, 흐릿한 역사의 기억을 불러내는 셰르반 사부와 리송송의 작품에는 잠재적인 혹은 명시적인 다수의 틈이 있다. 직선적 전망이 아니라 미로처럼 얽혀있는 이곳에서 새로움은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 위에 있는 인과론적인 것이 아니라, 균열과 간극으로부터 예기치 않게 생성된다. 빛을 모범으로 하는 계몽적 의식의 세계와 달리, 그림자의 세계는 무의식적이다.
이 의식 하부의 불연속적인 세계에 출몰하는 인물들은 대개 낯선 타자들이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백현진의 그림들은 자유분방한 회화적 터치로 조증과 우울증을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무의식적 흐름을 보여준다. 데이나 슈츠의 <싱어 송 라이터>는 입체파적으로 조각난 파편으로 활달한 인물을 구축한다. 브라이언 캘빈의 팝적인 초상화는 현실의 누구와도 닮지 않았으며 그리기를 위한 방편일 뿐이다.
소수자 또한 타자의 형상을 취한다. 헤르난 바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하얀 흑인, 그리고 서양미술사의 전형적인 초상화 구도에 흑인들을 집어넣은 리넷 이아돔-보아케의 작품엔 작가의 자의식이 투사된다. 그들의 작품은 주류 사회에 의해서 그림자로 취급받는 성적, 인종적 소수자나 아프리카계 영국 여성 작가의 자의식을 반영한다. 정글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촉각적 우주 속 인물(동시에 ‘괴물’)들은 하나의 태양만이 빛나는 지배적 질서에 포착되지 않으려 한다.●

박진아 (사진 왼쪽) 캔버스에 유채 220×182cm 2015   캔버스에 유채 135×183cm 2010  Courtesy of the artist

박진아 <여름 촬영>(사진 왼쪽) 캔버스에 유채 220×182cm 2015
<수평재기> 캔버스에 유채 135×183cm 2010 Courtesy of the artist

헤르난 바스  린넨에 아크릴 182.9×152.4cm 2014  Courtesy of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and Hong Kong

헤르난 바스 <달빛 정원의 알비노> 린넨에 아크릴 182.9×152.4cm 2014
Courtesy of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and Hong Kong

 

 

EXHIBITION FOCUS BILL VIOLA

시간을 물질적 경험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독보적인 영상세계를 구축한 비디오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대규모 개인전(3.5~5.3)이 국제갤러리에서 열린다. 세간의 주목과 동시에 논쟁적인 이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것은 빌 비올라가 지속적으로 보여준 영적세계, 종교적인 상징성과 비디오 미학의 관계 설정에 관한 것이다. 빌 비올라의 작업세계를 조명한 필자 두 명의 글을 통해 이번 전시를 둘러싼 비평적 관점을 주목해본다.

비디오가 사라진 상징과 은유에 대한 경계

김지훈 중앙대 영화·미디어연구 교수
국제갤러리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갖는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2000년대 이후 작업들은 매 번 상반된 반응을 낳았다. 시간을 비디오의 미적 질료로 삼아 삶과 죽음, 영혼과 자연에 대한 초월적 스펙터클을 주조하고 변주하는 그의 작품들은 국내외의 일반 관람객과 주류 언론의 취향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이에 호응하듯 이 전시를 소개하는 주류 언론의 기사들은 “고통을 견디는 인간의 모습 선보여”(《조선일보》 허윤희), “뭉클한 성화를 보는 느낌”(《한겨레》 노형석), “위로가 필요한 세상에 어울리는 전시”(《중앙일보》 문소영) 같은 문구들을 부각시켰다(물론 이 문구들 중 어떤 것들은 비올라가 기자회견에서 한 말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반면 매체의 물질성과 기법에 대한 탐구와 예술에서의 성찰적 시선을 중요시하는 비평가와 저널들은 비올라의 최근 작품들의 형식과 미적 체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옥토버》의 한 대담에서 할 포스터Hal Foster는 비올라의 작품이 유도하는 경험을 “강렬한 미디어 몰입immersion을 통한 영적 직접성immediacy의 경험이자 마법적 신비주의bewitched mysticism”라고 비판한 바 있다. 실제로 비올라의 2000년대 이후 작업인 <수난Passions>, <사랑과 죽음: 트리스탄 프로젝트LOVE/DEATH: The Tristan Project>, <해변 없는 바다Ocean without a Shore> 연작을 망라하는 이 작업들은 포스터의 비판을 어느 정도 확증해주는 듯하다. 이 연작들에서 비올라는 필름과 고화질high-definition 비디오에 힘입어 회화적 도상성과 영화적 생생함을 특징으로 하는 환영적이고 몰입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했다. 그 이미지들은 인간의 감정과 고통, 영적 모험과 같은 친숙한 종교적 모티프를 구현하는 데 충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이번 세 번째 개인전에 소개된 작품들은 어떤가.
이번에 소개된 7편의 작품 대부분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제작된 것이지만 지난 2008년 같은 갤러리에서 개최된 두 번째 개인전 작품들(즉 <트리스탄 프로젝트>, <해변 없는 바다> 연작에 속한 작품들)의 형식과 테마를 반복하고 변주한다. 어머니와 아들이 사막을 걷는 모습을 담은 <조상들Ancestors> (2012)과 황야에서 각자 다른 길을 가던 두 여자의 만남을 보여주는 <조우The Encounter>(2012)를 비롯한 3편의 무성 작품은 ‘트리스탄 프로젝트’의 한 작품인 <밤으로의 여로Passage into Night>(2006)와 동일한 공식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오랜 시간 동안 아지랑이 피어오른 풍경을 가로질러 조금씩 화면을 향해 다가온다.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의 이행, 탄생과 죽음, 이승과 저승, 무와 유, 현실과 기억의 문턱을 체험하게끔 하는 이러한 도식은 비올라의 대표적 모티프인 물과 불을 관통하는 작품들에서 반복된다. 검은색을 비롯한 여러 색깔의 물을 뒤집어쓰는 남자의 모습을 느린 역재생reverse play으로 장대하게 보여주는 <도치된 탄생>(2014), 밧줄에 묶여 거꾸로 매달린 남자가 물벼락을 맞으며 정지하고 승천하는 모습을 담아낸 <물의 순교자>(2014)는 <해변 없는 바다> 연작을 이루었던 “물의 벽을 통과하면서 가시화되고 사라지는 인간 존재들”과 닮아 있다.
그렇다면 이 작업들, 나아가 비올라의 2000년대 이후 작업들은 포스터가 말하는 “마법적 신비주의”의 결과인가? 포스터에 따르면 비올라의 작품들은 오늘날 미디어문화의 부정적 징후들인 가상화와 비물질화에 호응하는 것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공간과 장치 자체에 대한 의미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퇴행적이다. 나는 이 비판이 공간과 장치의 반영적 탐구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점에서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관람객들은 비올라의 작품을 중세 성화聖畵와 같은 아우라를 느끼며 관조한다. 전통적인 회화성에 호응하는 듯한 이러한 관람 태도에는 작품의 공간과 장치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그렇지만 나는 비올라의 작업이 비디오 이미지를 ‘비물질화’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시간을 명백한 물질로 경험한다”는 비올라의 말은 그의 1970년대 작업부터 견지된 원칙이었다. 현실은 물론 필름으로도 불가능한 시간성인 시간의 미묘한 감속과 역행은 비올라의 작품에 대한 미적 경험의 핵심이다. 이 경험은 비디오의 기술적 특정성들(전자적 신호의 흐름으로 좌우되는 비디오 이미지의 탄력성, 필름보다 자유로운 시간의 감속과 가속, 고화질 비디오로 표현할 수 있는 회화적이고 영화적인 시각성)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는 비디오의 물질성을 직접적이거나 왜곡된 모습으로 노출하는 방향을 취할 수도 있고, 물질성 그 자체와는 다른 상징과 은유들의 표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것들은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의 역사를 규정지은 동시에 공존하고 때로 서로 대립하던 두 가지 경향으로 여기에 어떤 확정적 위계를 둘 수는 없다. 비올라는 1970년대부터 명백히 후자의 길을 탐색해왔다. 그의 2000년대 이후 작품을 특징짓는 정지에서 미묘한 운동으로의 이행, 아지랑이와 물결로 상징되는 흐름에 대한 감각, 점에서 인간으로 변형되는 형상의 가변성 등은 이미지의 시간성과 표면을 미묘하게 조작할 수 있는 디지털 비디오의 기술적, 미학적 특징들을 물질화한 결과다. 이러한 기술적이고 미적인 특징들이 인간의 감정과 의식, 지각에 대한 빌 비올라의 주제적 키워드들과 연결될 때 감상의 회로가 완성된다.
중요한 것은 비올라의 작품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열어주는 이러한 회로를 마련하지 못한 채 영적 세계의 탐구, 종교적 상징의 형상화 또는 심지어 ‘힐링’의 체험으로 규정짓는 비평적 시선들에 대한 경계다. 이러한 시선들은 비올라의 작품을 형상화하고 그에 대한 체험을 낳는 데 필수적인 비디오의 물질적, 기법적 국면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결여하고 있다. 이 시선들을 통해 걸러진 비올라의 작품세계는 비디오가 사라진 상징과 은유들의 세계다. 이 상징과 은유들을 가능케 하는 가시성과 흐름, 지속을 고려할 때만이 그의 작품에 대한 찬반양론이 의미 있을 것이다.●

 비디오/사운드 설치 18분6초 2005/2009

<밤의 기도> 비디오/사운드 설치 18분6초 2005/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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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비올라_06_Water Martyr 2

<물의 순교자> 비디오/사운드 설치 107.6×62.1×6.8cm 7분10초 2014 자료 제공: 국제갤러리

비디오 작가는 무엇을 말하는가?

김백균 중앙대 한국화학과 교수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국내 세 번째 전시가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대규모 미술관 전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술 애호가와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올해 기대되는 전시 중의 하나로 그의 전시를 손꼽는 이가 많았다. 현대미술의 변방인 서울에서 빌 비올라 정도의 유명세를 지닌 작가의 전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백남준의 조수로 일한 적 있다는 인연을 들어 백남준과 그를 ‘스승과 제자’라는 한국식 아름다운 미담으로 치장해 언론홍보에 활용한 데 힘입은 바도 컸다.
그러나 막상 전시를 보면서 “인간 내면을 어루만지는 영상시인”이라는 빌 비올라에 대한 세간의 호의적 평가와 백남준과 그의 관계를 미화해 인구에 회자되는 ‘뻔한’ 인연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작품안에서 백남준에게 사사 혹은 영향을 받았을 어떠한 사유나 표현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의식에 대한 예술적 탐색이나 성찰도 발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와 백남준의 연결고리는 작품 안에 흐르는 의식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백남준의 작업을 도운 조수라는 느슨한 외적 유대에만 있고, 단순한 직업적 역할을 스승과 제자 관계로 확대 해석한 것은 백남준 신화에 사로잡힌 한국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감정적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일었다. 국제갤러리의 빌 비올라 전시와 짧은 기간 겹쳐 열린 학고재갤러리의 백남준 전시를 참조해 보면서 이러한 생각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백남준은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어떻게 사유하고 무엇을 표현하는지 형식을 통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낼 줄 아는 작가였다. 학고재갤러리의 백남준 전시는 그의 예술세계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핵심 작품들이 출품된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그가 TV를 통해서 사유한 탐색의 결과로써 세계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 하나하나는 TV의 속성을 가지고 ‘논’ 결과, 감각을 통해 세계와 삶에 대한 인식의 확장을 가져온 것들이다. 백남준은 우리가 TV의 속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원리를 상징과 비유를 통해, 세계란 인식의 틀 안에서 의식화된 것들이고, 인식이란 가변적인 허상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것을 우리 몸으로 느낄 수 있게끔 시각적 장치들을 통해 그려냈다.
<흰 잔재에 대한 발판 스위치 실험>을 예로 들어보자. TV란 전원이 들어갈 때만 화상을 보여주며,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TV라는 제한된 틀 안에서만 화면이 보인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 발판을 발로 누를 때만 화면에 화상이 나타나는 <흰 잔재에 대한 발판 스위치 실험>은 이와 같은 TV의 속성을 하나의 메타포로 보여준다. 우리의 인식이란 외부의 세계가 내부에 남긴 잔상이다. 그런데 그 잔상은 우리의 감각과 사유의 틀 속에서만 인식된다. 우리의 인식이 이와 같은 TV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우리는 백남준이 보여주는 감각과 인식 확장에서 오는 쾌감을 맛볼 수 있다. 백남준은 이처럼 자신이 감각을 통해 느끼고 사유한 그 과정을 시각적 장치를 통해 관객도 느껴볼 수 있도록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에 반해 빌 비올라는 자신이 느낀 세계의 ‘당위’를 말한다. K3관에 설치된 <도치된 탄생Inverted Birth>는 탄생의 반대 지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말하자면 죽음이다. 죽음을 도치된 탄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면 빌 비올라는 죽음을 생명의 소멸이 아닌 새로운 탄생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첫 화면에 검은 오물을 뒤집어쓴 남자가 어둠 속에 고요히 서 있고 물과 함께 그 검은 오물도 위로 솟구쳐 올라간다. 검은 오물 다음에는 빨간색의 액체가, 그 다음에는 우윳빛의 하얀 액체가, 마지막으로 모래 같은 고체가 올라가고 화면에 남자만 꼿꼿이 선 채 8분22초의 영상은 끝을 맺는다.
이것을 죽음의 과정을 묘사한 알레고리Allegory로 보면, 죽음 후에 시간의 경과에 따라 육신의 외피를 덮고 있던 검은 오물이 사라지고, 그 다음 빨간 피가 사라지고, 그 다음 우윳빛 살이 사라지고, 그 다음 모래 같은 고체의 뼈가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고 순수한 영혼만 남는 과정으로 유추할 수 있다. 빌 비올라에게 죽음은 육신이 사라지고 순수한 영혼만 남는 탄생 같은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폭포 같은 물줄기 속에서도 강건히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은 이미 주어진 주변의 환경에서 오는 어찌할 수 없는 삶의 고통에 대한 겸허한 수용과 각성을 그린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서 항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의 답일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거나, 신념이라고 하거나 이로부터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가 생겨났다 할지라도 굳이 그의 생각에 대해 시비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자유다. 그러나 그것이 예술이라는 형식으로 읽히고 공공의 장소에서 보인다면 그것을 가치로 평가할 자유가 우리에게도 있다. 우리가 왜 그것을 봐야 하는지와 같은 의미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신념이라면 신념 그 자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신념을 형성하게 된 또 다른 배경을 이해해야 그 신념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고, 그 신념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될 때만이 그 신념을 지지하거나 환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빌 비올라의 작품에서 내가 볼 수 없는 것은 빌 비올라가 왜 어떻게 그런 생각과 느낌을 지니게 되었는지 하는 과정이다. 화면에 감각과 정신을 집중하고 보고 있다하더라도 어느 순간 어떻게 나의 감정을 작가의 감정에 이입해야 하는지 그 감정 이입의 단서를 화면에서 찾을 수 없었으므로 감정이입은 불가능했다. 영상 속의 남자가 어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할지라도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단서가 화면 안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영상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현실의 시간보다 느리게 가는 듯한 환상 같은 느낌,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주는 시원함 같은 감각적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감각적 쾌감이란 예술작품이 주는 감각을 통해 인식의 확장에서 오는 쾌감이 아니라, 우리가 시원한 폭포 물줄기를 보면서 느끼는 쾌감처럼, 더운 여름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주는 청량감의 시각화와 같은 것이다.
빌 비올라의 신념과 의미
이처럼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일방적으로 발산해버리고 마는 방식은 그의 모든 작품에 동일하게 작동한다. K2관의 <내면의 통로Inner Passage>에서는 사막을 배경으로 나지막한 산이 있고, 산 앞에 한 그루 나무가 있다. 이윽고 저 멀리서 카메라를 향한 쪽으로 한 남자가 걸어온다. 그 남자가 화면의 끝, 즉 카메라가 찍고 있는 끝에 다다랐을 때 화면은 격하게 수없이 변화하는 여러 이미지를 보여주고, 희미한 불빛이 길을 비추며 다시 조용한 사막 화면으로 바뀐다. 남자는 뒤돌아서 출발했던 곳을 향해 다시 걸어간다. 그 출발했던 곳이 처음과 다른 점은 한 그루의 나무가 여러 그루의 나무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17분12초의 긴 영상은 그 자체로도 지루하다. 더욱 허무한 것은 그것을 다 보고 난 다음 찾아오는 빌 비올라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 대한 환기이다.
영상에서 한 그루의 나무로부터 걸어 나오는 남자를 유기적 생명을 지닌 하나의 존재로 비유해 보면 우리는 하나의 일자로부터 생명을 부여 받아 이 세상에 나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그는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고 감정을 맛보고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올 때는 하나에서 왔지만, 이 세계에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떻게 살았느냐는 인과율에 따라 돌아가는 곳은 여러 곳이다.
<조우The Encounter> 역시 단순히 화면상의 두 여인이 평행하게 걸어오고 한 순간 만났다가 무엇인가를 전해주고 다시 뒤돌아서 다른 길로 평행하게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혼자서 인생을 살아간다. 삶 속에서 조우는 우연한 것이다. 그리고 단 한 번의 그 조우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받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아니라 왜 그런지 그러한 이유가 형식을 통해 화면에서 보여야 관객이 그 느낌과 생각에 공감하고 찬사를 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빌 비올라의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실망을 안겨준 것은 <물의 순교자Water Martyr>이다. 발목이 묶인 순교자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물을 견디며 점점 팔을 벌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식을 드러내고, 불굴의 의지와 인내로 죽음에서 빛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펼쳐 보인다. 자신의 생각을 선언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까지는 여타의 작품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작품의 출품으로 인해 빌 비올라의 작가 의식과 삶의 태도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에 맞닥뜨린다.
이 작품은 본래 런던 세인트 폴 성당의 의뢰를 받아 제작되었다. 중세 사회도 아닌 오늘날, 성당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작품은 성당에 모셔놓고 기도를 하면 될 뿐이다. 과녁 없이 맞히는 것이 예술이라는 장-뤼 낭시의 언급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제작한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전시에 선보인다는 것은 한국 관객이나 미래의 소장가를 얕보았거나, 아니면 원래부터 예술이 무목적적인 것이라는 자각이 없는 작가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의 말대로 삶은 고통이거나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 할지라도, 그 말 자체로는 그것 이외에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하며, 그것의 이유를 작품 안에서 형식으로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빌 비올라는 비디오라는 매체를 사용한다는 공통점 이외에 백남준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 스스로가 하나의 유기적 언어가 되는 백남준의 작품과, 작품 이외의 배경을 다시 말해야 하는 빌 비올라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왜 영상이라는 매체로 표현해야 하는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포괄한다.
영상을 미디어로 이용하는 예술행위는 1920년대 말 살바도르 달리가 <안달루시아의 개>(1928)와 <황금시대>(1931)와 같은 전위영화를 선보인 적이 있지만, 본격적인 비디오 영상 예술시대는 1960년대 소니 포타팩portapak의 발명과 더불어 등장했다. 1965년 백남준이 당시 뉴욕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해 ‘카페 오 고고Café au Go Go’에서 그 영상을 방영한 것이 공식적인 비디오아트의 시작이다. 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 소니 포타팩의 발명은 당시 회화에 식상함을 느끼던 예술가들의 열광적인 지지에 힘입어 ‘뉴미디어아트’를 출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회화의 한계를 자각하고, 회화의 죽음을 예견했다. 그들이 포타팩에 주목한 것은 포타팩이 단순히 영상을 화면에 구현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비디오는 영화의 번거로운 필름 촬영과 인화, 상영의 과정을 편리하게 해준 것만이 아니라 비디오가 자신이 의식하지 않은 바를 관찰하고 성찰하는 유용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비디오는 자신의 행동이지만 자각되지 않은 행동, 즉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카메라라는 의식 없는 타자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도구로 쓰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비토 아콘치, 리처드 세라, 브루스 나우먼 등과 같은 초기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작업에는 카메라와 모니터 사이에서 반복되는 피드백을 통한 반사적이고 자기반영적인, 마조히즘과 지루함이 투영돼 있다.
여기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세계는 ‘세계와 나’, 그리고 인식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끈질긴 근대적 예술의 과제가 지닌 문제의식의 연장선 위에 있다. 국제갤러리의 빌 비올라 전시에서 ‘나’에 대한 천착이라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예술의 과제를 근대 이전으로 되돌린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즉 비디오라는 매체는 새로우나 말하는 방식은 구태의연하다는 것이다. 그가 작품을 통해 평소의 소신대로 ‘죽은 이’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를 말하고, 죽은 이가 현실 세계로 발을 내디딘 후 다시 돌아가는 순간의 망설임, 떨림 혹은 슬픔을 표현한 것이라면, 또 불교의 윤회를 믿는다면 그 세계를 ‘선언’할 것이 아니라, 비유나 상징을 통해서라도 ‘묘사’하여 관객도 그 세계를 느끼거나 상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물의 순교자> 비디오/사운드 설치 107.6×62.1×6.8cm
7분10초 2014
자료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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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 양혜규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

삼성미술관 리움 2.12~5.10

블라인드 설치작업을 통해 일찌감치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아온 양혜규 작가의 이번 삼성미술관 리움 전시는 필자를 기대감으로 부풀게 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어떤 식으로든 블라인드 구조물을 발견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블라인드 구조물인 <솔 르윗 뒤집기 – 23배로 확장된, 세 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 작품은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미니멀리즘 작가인 솔 르윗의 작품 자체가 주변 환경에 쉽게 동화되듯 양혜규의 블라인드 작품 역시 리움의 현대적 공간 구조물과 함께 작품이라는 인상을 깊이 심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혜규의 작품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거나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심코 지나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어떤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시의 도입부에 <솔 르윗 뒤집기>를 설치함으로써 작가는 그 제목과 마찬가지로 ‘현대문명 뒤집기’를 시도하고 있음을 강력히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뒤집기는 또다시 기획전의 전체 제목과 의도인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와 정확히 일치한다. 양혜규가 조지 오웰과 로맹 가리의 소설에서 차용한 코끼리의 의미는 현실에서는 연약하지만 주인공의 상상 속에서는 강인한 존재로서 자연 생태계를 의미하고, 자연으로부터 괴리된 인간 윤리를 호소하는 매개체와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전시의 큰 목적은 자연과 야생을 현대문명 속에 부활시키고, 자연과 함께 사라져버린 인간들의 공동체적 관계의 회복과 소외와 고립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함이다. 이러한 전시 의도를 읽으며 전체 전시를 다시 보면 독립적이고 이질적으로 보이는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공명하며, 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처럼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시장으로 내려가면 짚풀로 제작된 설치물들이 한눈에 들어오며 전반적으로 농경사회로 이뤄진 과거의 한 시대로 우리를 인도한다. 농경사회는 공동체의 가치가 분명히 존재하고 이웃과 동일한 종교와 삶의 의미를 갖춘 사회였으리라. 그래서 지금 이 전시를 감상하는 모든 관람객은 일시적이나마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중간 유형>이라 명명된 짚풀 건축물들은 고대 마야의 피라미드, 인도네시아의 불교 유적 보로부드르, 피어나는 튤립이라 불리는 러시아의 이슬람 사원 라라 툴판을 참조한 구조물과 인체를 연상시키는 개별 조각 6점으로 구성된다. <중간 유형>은 다양한 출처의 문명들을 대변하는 문명의 파편들이다. 더 나아가서 전시장의 기둥은 마치 고대 신전들의 그것처럼 짚풀로 감싸져 있다. 작가 양혜규는 어쩌면 ‘문화 순례자’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구조물들 사이에 놓인 인물상 같은 입체물에는 민속적 상상력이 깃들어 있다. 짚풀은 천연 짚이 아니라 인조 짚이다. 이러한 인조 짚의 사용은 모든 것이 시뮬라크르로 화한 현대문명에 대한 작가의 이중적 태도를 엿보게 해준다. 현대의 기술문명은 자연적인 것, 역사적인 것, 상상적인 모든 것을 진짜인 것처럼 복원할 수 있다. 사라진 자연, 사라진 공동체, 사라진 민속적 유물들이 엄밀한 과학기술과 고고학적 발견과 고증을 통해 실제보다 더 실제적으로 복원되고 전시된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영혼이 삭제된 피상적인 복원이 창궐한다. 따라서 양혜규는 자신의 작품을 통한 부활이 이러한 피상성 속에 함몰되는 것을 극히 경계하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그중 첫째가 <VIP 학생회>라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관람객들의 쉼터이다. 이것은 서울의 외교사절들과 정치인, 화가, 문학가들이 사용하던 의자와 탁자들로 관람객이 전시 감상 중 잠시 앉아 휴식하면서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장소이다. 여기서 작가는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이래로 내려온 창작의 분업을 제안한다. 작가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대여자들은 대상을 제공하며, 미술관은 예술작품임을 인정하는 전시장을 제공하고, 관람객들은 실제로 휴식을 취함으로써 작품 제작에 참여한다. 그리고 작품 구입을 통해 다시 한 번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창작에 직접 행동으로 참여함으로써 양혜규 작가의 창작 공동체가 완성된다.
다음으로 작가는 영감의 부활을 위해 무속 신앙적인 요소를 다분히 가감한다. 작가가 관람객의 참여를 유발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사실 관람객이 전시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요구된다. 즉 관람객은 전시장 입구에 준비된 <소리 나는 의류>라고 하는, 실제 착용 가능한 황금색의 금속 방울들로 엮어진 작품을 착용하고 방울 소리를 울리며 전시장에 입장한다. 대부분의 종교와 무속에서 방울은 영혼과 신성에 관계된 중요한 요소이다. <상자에 가둔 발레>도 인물 조각 6점의 표면 전체를 방울로 뒤덮었으며, <바람이 도는 궤도 – 놋쇠 도금>에도 선풍기 날개 대신 방울을 달아 청아한 방울 소리를 내게 한다. 이와 같이 이번 전시 작품들의 대부분은 종교적 색채를 짙게 풍기는데, 수공예 기법을 이용하여 정성들여 짠 <삼세번 희부연이>도 이슬람 문화권의 기하학적 문양에서 출발했고, 중앙 정면의 높은 벽면에 그려진 대형 벽화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자춤 – 신용양호자 #240> 역시 바위산에 새겨진 토템을 연상케 하며 개인 정보를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나타난다. 또한 <정지(井地)>의 귀목도 기이한 동물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마치 영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종교적 분위기는 긴 벽을 뒤덮은 <만국애도실>로 이어진다. 위아래가 뒤집혀 강이 하늘 같고, 하늘이 강 같은 히로시마의 풍경 위에 거꾸로 선 작가의 작품 뿌리 공예, 묘비석 등의 이미지가 둥둥 떠다니는 초현실적 풍경은 원폭으로 희생된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함으로써 사라질 현대문명에 애도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블랙박스’의 블라인드 설치작품 <성채> 역시 컴컴한 분위기 속에서 고해성사실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여기서는 끝없는 고해성사가 이뤄지는 것처럼 계속 중얼거리는 소리가 반복된다. 고해성사와 기도문을 중얼거리고 염불을 외는 듯한 소리는 아래층의 <창고피스> 안에서도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작품에 현실성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공감각의 활용을 들 수 있다. 양혜규의 작품세계는 시각, 청각 혹은 촉각 등 하나의 감각에 제한되지 않는다. 전시장 깊은 곳에서는 각종 소리와 음악, 해설 등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며 공간을 채우고, <성채>에서는 빛과 어둠, 그리고 여덟 가지의 향을 분사하도록 해서 이미지에 현실감을 부여하고자 한다. 인위를 통해 인위를 극복하고자 하는 모순을 보이지만 말이다.
양혜규 작가는 이번 기획전을 통해 극히 복합적인 작품세계를 제시하고자 한다. 문화적・종교적 복합성, 모든 예술 장르를 포함한 장르의 복합성, 그리고 다양한 소재의 복합성이 그것이며, 여기에 시간과 역사, 장소의 다양성이 더해진다. 나아가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수용,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 역시 그 두께가 느껴지며 복합적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시도들이 예술작품으로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는지 여부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대예술에서는 작가는 제안하고 관람객과 공동체가 그것을 성공적인 예술작품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양혜규 작가는 자신이 의도한 바를 훌륭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수균 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양혜규 <상자에 가둔 발레>(가운데) 2013/2015

양혜규 <상자에 가둔 발레>(가운데) 2013/2015

 

CRITIC 미묘한 삼각관계

서울시립미술관 3.10~5.10

역사에 대한 기억과 망각의 정치학은 국가 간의 정신적 차이와 습성을 낳는다. 정신은 한 사회의 제도를 형성하고 그 제도를 통해 세대가 구성되며, 이러한 거시사적 틀 안에 위치한 한 사람은 또한 미시사를 생산한다. 서울 시립미술관의 <미묘한 삼각관계展>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세 작가, 양아치, 쉬전, 고이즈미 메이로의 미시사와 거시사가 교차하는 지점 위에 서 있다. ‘시간’은 이 전시의 매우 중요한 테마로, 같은 세대의 세 작가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각기 다른 시기를 재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형적 시간을 동시적 관계, 즉 ‘미묘한 삼각관계’로 풀어내고자 한다.
그런데 전시가 시작되자마자 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서울 한복판에서, 가미카제의 영상뿐 아니라 역사에 대한 궤변을 늘어놓는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에 대한 거북함이 그것이다. 더욱이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립미술관에서, 피해자 담론을 옹호하는 일본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언어들이 관객의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미술 작품이 어떤 이유로 거센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일은 흔히 있지만, 고이즈미의 작업에 대한 비판은 한국이 역사에 접근하는 태도의 단면 또한 함축하는 흥미로운 해프닝으로 보인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도쿄 이야기>에서 착하고 아름다운 둘째 며느리로 유명한 배우 하라 세츠코는 쇼와시대, 친절과 미소의 대표 이미지로 굳어졌다. 이렇게 고착된 이미지는 개인의 영혼이나 진실과는 상관없이 박제처럼 한 시대와 권력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고이즈미 메이로의 <알터피스 #6, 2014>에서 점점 일그러지는 하라 세츠코의 초상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을 통해 각인되고 왜곡되는 역사와 현실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이는 <어린 사무라이의 초상, 2009>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미카제로 분한 배우는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부추김에 도취해 결국 흐느끼고 마는데, 비평가 가토 슈이치(加藤周一)가 추신쿠라(忠臣藏)증후군이라 부른 일본의 이 독특한 정신이 실체도 없는 국체(國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파시즘으로 고조되고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일본의 근대화가 근대적 합리화의 핵심인 탈주술화에 성공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병리적 상태였으며, 이것이 현재까지 유효함을 드러내는 짧은 서사이다.
또한 아버지가 천장에 그리는 검은 비행기(<기억술>(아버지)2011)나 공습의 순간을 증언하는 갖힌 기억(<갇혀진 말> 2014)은 실체없는 우상에 눈멀었던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광기의 결과로 제시된다. 그럼에도 <오랄 히스토리 – 1900년부터 1945년 사이 일본과 그 주변에서 일어난 일>(2015)에서 역사에 대한 망각과 무지의 현재를 가감없이 보여줌으로써, 그의 작품 <시각적 결함>처럼 일본의 새로운 세대 역시 여전히 먼 눈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음을 직시하도록 한다.
직접적이며 강렬한 방식으로 자국의 근현대사에 접근하는 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들은 동시대 일본 미술에서 찾아보기 힘든 메타적 역사인식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는다. 따라서 일본의 기형적 근대화 과정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관객은 강력한 피해자의 기억을 호출하며 어린 사무라이나 오랄 히스토리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작업들이 제시하는 직접성을 무조건 역사에 대한 불경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미술작품이 제시하는 진지한 역사적 성찰에 대한 외면이며, 과거를 냉정히 직시하는 태도와도 어긋난다. 요컨대 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은 서울뿐 아니라 도쿄, 베이징에 전시하더라도 불편할 것이며, 이 불편함의 이유는 세 도시 각기 다르다. 동일한 불편함과 서로 다른 이유, 이것이 한중일 세 나라의 미묘하다면 미묘한 삼각관계의 현재이다.
구나연 미술비평

CRITIC 두렵지만 황홀한

하이트컬렉션 2.27~6.5

중견 화가들이 추천한 후배 화가들로 구성된 만큼, 회화의 현재를 확인하는 자리일 듯싶어, 필자가 출강하는 미대 수강생들에게 토론 과제로 내준 전시가 <두렵지만 황홀한>이다. 한 학생이 전시 제목 ‘두렵지만 황홀한’의 뜻이 전시를 통해 파악되지 않으며, 출품작들의 공통점이 뭔지 모르겠다고 지적하길래, 전시 제목은 우연적으로 선택되었을 것이고 기획의 초점은 중견작가들이 추천한 후배 화가들의 면모를 확인시키는 데에 있다고 답해줬다. 또 추천자 6인의 회화관이 상이한 만큼 피추천된 13명 사이에 작품이 균질하지 않고 다변화된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덧붙였다. 추천인 6명과 피추천인 13명의 공통점이 없진 않다. 이들의 대화록을 살피면 회화의 위기라는 해묵은 자문자답이 자주 읽힌다. “저는 가끔씩 스스로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내가 하는 작업, 즉 회화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요”라는 전현선의 고민이나, “이렇게 강하고 자극적인 것만을 원하는 … 시대에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도 나지 않는 정물화라는 진부한 제목의 평면 그림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과 기능이란 있기나 한 것인가?”라는 자의식이 밴 12년 전 작가노트를 이번 대화록에 재수록한 김지원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창작과는 거리를 둔 평론가로서, 화가만이 공유하는 미적 질감이 있음을 인정한다. 완성작의 우열을 좌우할 때 화가들이 흔히 의존하는 색감의 선택, 안료의 물성, 붓질의 재질감 등이, 평론에선 곧잘 간과되는 사실 역시 잘 안다. 그래선지 회화의 가치를 다룬 대화에서 홍승혜는 “요즘은 회화의 개념을 확장시키는 추세이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의 회화란 여전히 작가의 몸이나 정신을 드러내는 붓질, 색채의 선택 등이 중요”하다는 경험을 털어놓았고, 이번 전시 제목에 인용된 카툰풍 작업을 하는 유한숙마저 “회화만이 가지는 특유의 촉감, 정서”를 신뢰하다고 밝힌다. 전적으로 회화에 집중한 이 기획을 추동한 배후에 무엇이 있을까? 화단의 주 무대를 다매체 예술이 장악한 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것 같다. 때때로 미심쩍은 공감마저 일으키지 못하는 다매체 예술의 선전 앞에서, 누적된 피로감이 미술의 원형인 회화의 현재를 검토하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럼에도 <두렵지만 황홀한>에 피추천된 주목할 화가 13명 사이에 평면이라는 장르적 공통점 외에 교차점을 찾긴 어렵다. 13명이 지향하는 미감도 다분히 차이가 있다. 파악하기 어려운 작품의 맥락이나 합의하기 힘든 작품의 우열까지 치면, 다매체 예술에 버금갈 만큼 회화의 현재는 친숙했던 예전의 바로 그 회화가 더는 아니다. 그래선지 우열을 가르는 합의점도 얻기 힘들다. 전시를 본 학생 일부가 정은영의 작업을 저평가했는데 실물 케이크를 닮지도 않았으며 시각적으로 근사하지도 않아서란다. 안료로 케이크와 김밥을 만든 정은영에게서, 회화를 가둔 프레임 밖에서 물감으로 동서양의 음식이라는 뜻밖의 결과물을 낳은 재치를 높게 산 나와는 차이가 컸지만 내 생각을 털어놓진 않았다. 학생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고, 물감을 케이크와 김밥으로 둔갑시킨 정은영의 태도에서 작가적 자의식을 읽은 내 해석이,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낮은 편”이어서 안료로 입체 조형을 택했다는 작가의 의중과 달랐던 탓도 있다. “그림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 자체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풍겨야” 한다는 왕선정이나, “좋은 그림을 보면 자세한 내용이나 무슨 맥락인지 잘은 몰라도 그냥 좋은 게 느껴지잖아요?”라는 최수연이나, “텍스트가 비주얼의 쾌감을 증폭시킨다(회화가 이제는 많다)”는 홍승혜의 견해는 서로 다른 주장이지만 공존한다. 그것이 다매체 예술의 선전과 다변화된 회화가 뒤엉킨 속에서, 화가가 찾는 어려운 길이다.
반이정 미술비평

CRITIC 아무도 모른다

인사미술공간 2.6~3.8

<아무도 모른다전>은 인사미술공간의 2014년 큐레이터 워크숍 1차 성과보고전으로써 김보현, 김리원, 김태인, 정시우(이상 4인)가 공동기획했고, 석수선, 최수연, 서평주, 한정우, 000간(신윤예+홍성재), ETC(이샘, 전보경, 진나래), 다다수 다카미네(이상 7팀)가 참여했다. 기획자들은 8개월 동안의 인큐베이팅 과정과 워크숍을 거쳐 ‘괴담’이라고 하는 사회적 징후를 ‘괴담의 탄생과 은유’, ‘언술 전략으로서 재구성’, ‘실재하는 공포와 불안’이라는 세 가지 맥락 속에서 전시 형식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어느 시대, 사회에서도 괴담은 존재해왔으나 이 전시는 특히 괴담이 동시대의 병적 징후를 환기하는 통로로 쓰이는 것으로 보았고, 사회가 지니는 공포와 불안을 이미지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기획자들의 현실감각을 보여주려고 했다.
전시는 각 작품이 개별적으로 읽히기보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로 보이게끔 서사 구조(앞서 언급한 3가지: 괴담의 탄생과 은유, 언술 전략으로서 재구성, 실재하는 공포와 불안)를 갖추었다. 이는 대형 주제전이 종종 취하는 방식인데 <아무도 모른다>의 경우 각 섹션이 2-3편의 작품으로만 구성된 만큼 소수의 작품으로 섹션별 주제를 깊이 파고들기는 어려워 보였다. 여기에는 일부 밀도가 떨어지는 작업들도 한몫했다. 그래도 전시가 괴담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맥락을 짚어주었기 때문에 좀 더 쉽게 읽히는 것도 사실이다. 석수선은 에볼라 창궐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확산되는 것을 타이포그라피 연작으로 보여줌으로써 괴담의 탄생을 은유했다. 무속인의 신당을 그린 최수연의 <용궁>은 괴담의 진원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물 아래에 대한 공포일 뿐임을 보여준다. 한정우, 000간, 서평주의 작업은 언뜻 한 작업으로 읽힐 만큼 괴담이 재생산(000간), 재구성되어(한정우) 전달되는(서평주) 과정이 이어지듯 연출되었다. 즉, 카더라를 수집하고, 진술서와 알리바이를 제시하고, 미디어로 도배하는 언술 전략이 연결된 듯하기에 관람하면서 잠시 혼돈에 빠질 수도 있다. 다다수 다카미네는 원전사고 이후 안전한 삶을 더욱 욕망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일시적 합의기업 ETC는 전시장에 시판 생수인 양 강남수를 가져다 놓았다. 두 작업은 상품이 안전한지 질문할수록, 또 상품이 안전하다고 강조할수록 이미 우리 일상에는 불안이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말한다. 한편, 기획자들은 인터넷에서 수집한 각종 이미지와 글을 전시작품과 함께 실은 괴담집을 전시장에 비치하여 이를 본 관람객들이 괴담의 새로운 가담자이자 유포자가 되길 바랐다. 전시 자체가 괴담의 발원지로 작용하기를 의도한 것이다. 그러나 우비 살인마와 빨간색 크레용같이 유년기에나 혹할 이야기가 아니라, 좀 더 정교한 이중의 비틀기를 시도했으면 어땠을까? 결과적으로 이 괴담집은 작가들이 나름 의뭉스럽게 만든 전시장의 알리바이를 마치 ‘괴담은 괴담이다’에 그치도록 흐트러뜨린 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성휘 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

CRITIC 이슬기 분화석!

미메시스아트뮤지엄 3.7~4.19

파주 미메시스 미술관에서 진행중인 작가 이슬기의 전시 <분화석!>은 전시장의 실내 구조에 따라 <안>과 <밖>으로 설정된 두 공간에서, 두 가지로 구분되는 형태의 작업들로 이뤄진다. <안>의 공간에는 10장의 커다란 누비이불이 바닥면에 놓인 하얀 좌대 위에 가지런히 펼쳐져 있고, <밖>의 공간에는 진흙으로 쌓아 올린 ‘분화석’ 조각 다섯 덩어리가 섬처럼 놓여 있다. 선명한 색감의 명주로 만든 <안>의 작업들과, 두껍고 어두운 진흙으로 투박하게 자리한 <밖>의 작업들은 그 색과 형태에서 크게 대조를 이룬다.
장인의 손바느질로 섬세하게 만들어진 <안>의 이불들은 각각이 하나의 속담과 연결된다. 붉은 바탕에 초록색 원이 들어간 작업은 ‘수박 겉핥기’, 세 개의 선으로 나뉜 ‘새발의’의 한쪽에는 동그란 ‘피’ 자국이 형상화돼 있다, ‘빛 좋은 개살구’는 정말 탐스러운 진분홍의 타원형이다. 전통적 공예작업의 형식에다 단순한 선과 형태의 디자인을 담은 이 작업은, 고급스러운 외형과는 달리 속담 제목을 통해 그 구성 요소와 의미를 쉽게 연결하도록 한다.
분화석은 동물의 배설물이 굳어져 화석이 된 것을 뜻한다. 배설물 그 자체는 거부감을 일으키는 물질이지만 분화석은 동물의 식생과 생태를 가늠해볼 수 있는 분석의 재료이기도 하다. 긴 시간은 이렇게 물체의 본질을 바꿔버리기도 한다. 하얀 전시장의 검은 덩어리들은 뾰족한 탑처럼 솟아 있거나, 둘둘 말려 올려진 형태로 운반용 팔레트 위에 앉아 있다. 물론 이것은 파주의 강가에서 퍼올린 진흙 덩어리이지 진짜 배설물은 아니다. 설명서에 쓰여진 것처럼 프랑스어 “메르드(Merde)!”는 똥이라는 뜻이자 욕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걷다가 개똥을 밟았을 때 무심코 입에서 튀어나오는 의성어 같은 단어이다. 여기서 형상화된 분화석은 ‘똥의 화석’이자 ‘욕의 화석’이다. 욕설, 분노의 순간들이 퇴적되고 굳어져 무덤덤해진 상황들을 환기시키면서, 똥에서 유물로, 작품에서 똥으로 오가는 형상과 의미 사이의 메타모포즈를 보여준다.
이 <안>과 <밖>을 관통하는 것은 작업의 유희적 측면이다. 전통 이불이 가진 형태의 단아함을 속담의 가벼운 단어들로 용해하고, 다소 심각한 수사로 해석할 수도 있을 법한 진흙 조형물들은 분화석이라는 의미로 속내를 드러낸다. 이슬기 작가의 유희는 그것이 놓인 공간에 따라 사물들에 발생하는 의미에 의외의 연결점들을 집어 넣고, 그로 인해 생기는 위상 변화를 뜻한다. 안과 밖, 겉과 속이 다른 사물들에게서 “내가 이럴줄 몰랐지”라는 키득거림이 들린다. 공간의 바닥에 놓인 <안>과 <밖>의 작업들과는 그 결과 형태를 달리하는 두 개의 작업에 시선이 간다. 하나는 작은 탈 모양의 조형물이고, 다른 하나는 벽에 걸린 흑백의 이불 <가위에 눌리다>이다. 동그란 눈을 뜨고 있는 작은 탈은 못본 척 입을 닫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이불 속의 형상은 갸우뚱하며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는 까마귀의 표정을 닮았다.
김해주 독립큐레이터

CRITIC KDK P

페리지갤러리 3.12~5.9

KDK(김도균)의 사진은 공간이든 사물이든 일정량의 심리적 거리를 유추하게 한다. 실제 존재하는 대상을 담았음에도 실체적 모습을 짐작하기 힘든 시각 결과물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작가적 인상을 우발적인 감정에 의존하지 않고 예민하고 내밀한 파악이 선행된 포착으로 기록해낸다. 관찰이 아닌 포착은 우발과는 다른 작가적 시각이고 직감이며, 학습이나 숙고로 해결되지 않는 절대치에 해당한다. 이렇게 선택된 대상은 사유의 틀을 거쳐 모순된 실존을 부여 받는다.(포장상자 같지 않은 포장상자<P>) 사물의 앞뒷면도 양가성도 아닌 서로 다른 가치를 한 컷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방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작가의 시선 혹은 감각 때문으로 보인다. 그 첫 번째 방향은 기본 구조에서 전혀 다른 면모를 유추해내는 상상력이다. 포장재의 주인공 격 상품을 들어낸 후 포장상자의 구조를 클로즈업하여 마치 제3의 공간으로 보이게 하는 전이는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이 된다. 상상력과 상반되는 두 번째 방향성은 존재의 근원으로 파고들어가 원초적 핵심을 들여다보는 행위다. 살피지 않고 인식으로만 잔재한 경계 면, 포장재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모서리, 틈새 구조는 KDK로부터 제품 포장재라는 제품의 주변이 아닌 목적성이라는 전혀 다른 존재 가치를 부여받는다. (Package, Perigee, Pure) 화면의 색감 역시 불필요한 생각을 유발할 원소들을 배제한 흰색의 모노톤 위에 그라데이션이 주는 느낌이 이전 KDK의 작품에 비해 따뜻한 감상에 들게 하여 조금 더 친숙한 느낌의 일상을 만나도록 해준다.
결국 <P>는 아름답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며, 예술특구가 아닌 일상 영역의 과자, 휴대전화, 호박죽, 치킨의 포장상자들이다. 그러나 <P>는 굳이 본래의 목적과 처지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고 상상할 필요도 없는 온전한 예술작품이다.
“가장 풍부한 사건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흔히 그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보이는 것 위에 눈을 열기 시작할 때, 이미 우리는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것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ㅡ D’ Annunzio 《죽음의 명상》 중에서
예술의 일상성. 필자는 ‘일상’이라는 소박하고 친숙한 이름 아래 여전히 어렵고, 불친절한 조형언어를 남발하여 예술과 일상, 예술가와 대중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고 유지한 수많은 시각예술작품을 보아왔다. 때문에 합목적의 예술이 차라리 정직하다고 생각해왔다. <P>를 만난 오늘, 합목적의 예술이 어떻게 일상과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교집합을 보았다. 게다가 의도보다는 우연에 가깝지만-KDK의 <P>는 2~3년간 일상생활에서 모은 포장지나 포장용기 일부 또는 전체를 찍은 사진 중 75개를 고른 전시이기 때문에-전시공간인 Perigee(근지점)갤러리의 의미와 모기업인 KH바텍(휴대전화 케이스 제작업체)의 기업 특성이 매우 잘 만난 선례가 될 전시로 보인다.
김최은영 미학

CRITIC 임소담 Eclipse

갤러리 스케이프 3.4~4.10

작가 임소담은 회화작업을 하면서 대상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특정위치에 주목하는데, 이를 이번 개인전의 제목 ‘Eclipse’와 같이 일식 현상에 비유한다. 작가 노트를 통해 그녀는 “행성은 자신이 돌던 궤도를 지속적으로 돌 뿐이지만 관찰자가 특정 위치에 있을 경우 일식과 같은 기묘한 현상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말한다. 또한 “관찰자의 시점이 중요한 반면 작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작가에게 회화의 실천은 화가와 세상 사이의 우연적이고도 필연적인 사건이 화면에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시장에 배치된 회화작업은 언뜻 스냅사진처럼 어떤 장면을 포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전선줄과 나뭇가지가 엉켜있는 장면, 감나무와 그 뒤로 손을 뻗어 감을 따려는 희미한 사람, 시선의 전면을 가로막은 철조망과 어두운 배경, 평범한 도심의 자투리 공간,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새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의 모습 등이다.(주로 고양이가 등장하고, 관찰자와 적당한 긴장관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화병에 담긴 꽃가지이나 화환 등과 그 외에도 다양한 식물 이미지들, 정물 등을 무심하게 늘어놓은 것들도 있다.
이러한 장면들의 대부분은 여행이나 일상 경험을 기록한 사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며, 작가의 기억과 손을 통해 다시 회화로 재현된 것이다. 사진으로 채집된 대상을 옮기는 것이지만 그리는 과정에 무의식적으로 기록된 배경이나 불필요한 사물 등의 요소는 제거되기도 한다. 그리고 작가가 작업을 진행할 때 밑그림 없이 시작하기 때문에 화면은 더욱 자유롭게 재구성되고 배치될 수 있다. 심지어 캔버스 전체를 물감으로 다 채우지 않거나, 흰색바탕의 테두리가 남겨져서 작업을 보는 사람에게도 열린 공간을 내어주게 된다.
비교적 자유롭게 구성된 화면을 보면 속도감 있게 칠한 붓자국의 과감한 색면 처리와 이와 대비되게 섬세한 여백의 라인, 캔버스의 질감이 느껴지는 얕은 붓질과 자연스럽게 번지고 흐르는 물감, 흰 여백으로 비워서 만든 이미지와 이것과 상반되는 어둡고 깊은 색의 배경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등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러한 회화적 수단은 작가가 그린 이미지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오히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몇몇 작품 속에는 여러 시간이 공존하는 것과 같은 색조를 동시에 사용해 우리를 낯설게도 한다.
임소담의 이러한 회화적 시도는 익숙한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작가의 경험과 기억에 우리의 눈과 마음을 열어놓는 일과 관계될 것이며, 그 사이에서 무엇을 이루었는지에 대해 생각을 가다듬어볼 만하다.
임종은 독립큐레이터

CRITIC 이윤엽 남풍리 판화통신

트렁크갤러리 3.5~31

이윤엽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부터 지금까지 주로 민중의 투쟁 현장에 참여했고 그것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 온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이 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작업과는 사뭇 다르다. 실제로 그는 “주먹 불끈 쥐고 머리에 띠 두른 것 말고 정말 민중이란 걸 형상화해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김규항, <민중의 싸움터에 힘을 주는, 나는 파견 미술가>, 《한국현대미술선 25: 이윤엽》 (서울: 핵사곤, 2015), p128.) 여기에서 우리는 민중의 아픈 현실과 그에 대한 저항을 그린 1980년대 민중미술을 전화시키려는 의도를 보게 된다. 그에게 이제 민중의 형상화는 그들의 일상적 삶, 그리고 그 삶 속에서 그들의 시선에 비친 자연을 그려내는 것을 의미한다.
트렁크갤러리에서 3월 5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이윤엽의 “남풍리 판화통신”에 소개된 판화들은 남풍리의 굽이굽이난 길을 따라 산책하며 볼 수 있는 풀덤불과 엉겅퀴, 집 지키는 똥개들과 감나무 그리고 풍성한 여름 밭 등의 풍경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그리고 이 풍경에는 봄이 다가오면 농사일로 몸과 마음이 바빠지고, 여름 장마철에는 비닐우비를 입고 나와 논밭을 살피는 농부의 이야기도 있다.
그의 주변에 대한 애정과 발견의 기쁨은 무엇보다도 작품의 매체와 형식적인 면을 통해 잘 표현된다. 그가 창안한 ‘합판나사접합판화’ (목판 대신 파편합판을 못을 이용해 이어 만든 목판)와 ‘소멸식 다색판화’는 다른 매체보다 소형인 판화를 큰 이미지로, 컬라 판화로 만들 수 있게 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새로운 판화형식이 판화와 다른 매체 사이의 경계를 흔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관객이 작품의 조형요소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작품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게 하고 재현하는 대상을 여러 층위로 드러나게 한다.
장마철에 우비를 입고 삽을 가지고 나온 농부의 모습을 재현한 <비오는 날>은 ‘합판나사접합판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보통 목판은 판화칼로 깎기 때문에 칼 맛과 함께 양각과 음각의 조화, 선과 면 사이의 관계 등 “판” 안에서 생성되는 여러 시각적 요소 사이의 관계성이 중요시된다. 그에 반해 <비오는 날>은 여러 합판을 나사못으로 연결해 구축적인 목판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목판은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대체로 접합판화 형식을 썼지만 한 인간의 삶이 잘 드러나는 얼굴과 손은 판화칼로 묘사했다. 주름진 얼굴과 옆으로 긴 눈, 입가의 팔자주름, 그리고 밭일을 많이 해서 벼알이 여문 것처럼 탱탱하면서도 딱딱한 손의 현실성과 서술성은 기하학적 추상 같은 농부의 우비와 대비되어 더욱 강렬하다.
이와 같이 그의 작품은 판화와 조소, 평면과 입체, 양감과 표면 등 여러 경계를 가로지르며 자신의 주변과의 관계를 시각적 언어의 다양한 표현을 통해 보게 한다. 아마도 그가 생각하는 민중미술이란 단순히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술적 표현 안에서 이웃들의 시선과 삶의 방식을 보여주며 작가 자신이 그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구체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유혜종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