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정수진-다차원 존재의 출현

정수진  __  다차원 존재의 출현
갤러리 스케이프 4.8-5.18

<입체·나선형 변증법>이란 제목을 세운 3년 전 개인전에도 허공에 둥둥 떠 있거나 가지런히 나열된 두상이 자주 보였지만, 정수진의 올해 개인전에선 유독 기호로 처리된 얼굴 형상이 크게 각인됐다. 유사성을 빌미로 도형들이 유기적으로 반복되고 나열된 화면들의 총합. 인간 두뇌를 닮은 호두의 나열(일부는 진짜 두뇌처럼 보인다), 게임 캐릭터 팩맨Pac Man처럼 생긴 도형, 팩맨과 유사한 토끼 두상의 출현, 토끼 두상은 다시금 오리처럼 보인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현실’을 설명하려고 비트겐슈타인이 인용한 오리와 토끼를 나란히 닮은 ‘오리-토끼 환영’ 도상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줄넘기 소녀의 줄은 우연히 얼굴 형태를 구성하고 있으며, 마주한 거석 두 개 사이로 얼굴 윤곽이 보이는 듯도 하다. 이런 얼굴 형상은 ‘오리-토끼 환영’ 공식처럼, 필연적인 결실이기보다는 보는 사람에 따른 임의적인 발명품에 가깝다.
그래서 화면을 둥둥 떠다니는 두상은 어느 때보다 화면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처럼 느껴졌고, 균질한 화면으로 기억되는 <뇌해> 이후 정수진 스타일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최소 단위들로 구현된 화면’이라는 제작 공식에 훨씬 역점을 둔 전시회라고나 할까. 때문에 <뇌해>처럼 화면 속으로 나른한 유영을 시도하게 되기보다는, 작가의 이론 앞에 얼어붙을 수도 있겠다. 경직된 불투명 채색 모자이크로 구성한 인물상의 출연도 그 이론을 따르는 것일 테다.
정수진의 이번 개인전은 신작과 더불어 <부도(符圖)이론>이라는 단행본을 함께 선보인 자리였다. ‘의식세계를 가시화하는 시각이론’으로 소개된 이 책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의식을 그림을 통해 해독하려는 작가의 오랜 의지가 반영된 이론서다. 지문을 살펴보면 부도가 부호와 그림을 모두 의미하는 점, 신체 감각과 의식을 나란히 대상화시키는 점 등 시각정보 일반에 관해 답을 내줄 이른바 시각이론의 통합모델을 부도이론에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창작의 근간을 이론으로 정립하려 한 1세기 전 현대예술가를 우리는 안다. 칸딘스키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피라미드에 빗대어 피라미드의 정점에 도달하는 걸 예술가의 고차원적 임무로 믿은 그는 관련 이론을 세웠고, 그 후 화면을 구성하는 기하학적 요소를 분석한 이론서까지 집필했다. 그렇지만 칸딘스키의 이론은 객관적인 과학 이론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전적으로 주관적 사유의 산물’로 평가되기에 칸딘스키의 이론과 그의 작품이 유기적으로 일치한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시각예술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 한 그의 진정성과 학구열이 높게 평가받는 것이다.
연관성 낮은 파편들의 총합처럼 보이는 정수진의 고유한 화면에는 도형과 이와 어울리기 어려운 유기체가 나란히 마주보며 나타난다. 데페이즈망 기법이 자주 동원되는 이유다. 그렇지만 이런 화면이 사물의 우연적 배열이 아닌 부도이론에 입각한 결과라면 감상자의 태도는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으리라. 부도이론이 전적으로 자의적 발명품은 아니어도 작가가 원하는 주장을 선취해서 구성한 자기이론화의 결실일 공산이 크다. 부도이론이 타당하다면 이론의 확산력은 커지고, 작품과 이론 사이의 유기성 때문에 감상의 질도 확장될 게다. 이론의 타당성이 낮다면 이론의 확산력은 감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되 작가의 창작 동력으로 한정될 게다. 칸딘스키의 경우도 그랬지만.

반이정・미술비평

 

[Review] 액체문명

액체문명
서울시립미술관 3.20-5.11

이 전시에서 가장 먼저 우리의 눈길을 잡아채는 작업은 ‘액체문명’이라는 전시 명명 자체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모더니티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키워드 ‘liquid’에서 큐레이터가 착안했다는 이 전시 콘셉트는 관람자들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으면서 머릿속을 호기심으로 가득 채운다. 액체문명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증을 안고 다가간 전시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한국과 중국 현대작품들의 다양한 면면들이 그 ‘액체성’에 대해 조금씩 감을 잡게 해준다.
중국 작가들의 작품은 대체로 직설적이다. 표면에서 읽히는 의미들. 그에 비해 한국 작가들의 작품 의미는 중층으로 결정되어 있거나 은유적이다. 이면 탐색을 요청한다. 이원호의 동냥그릇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껴야 할까. 한진수의 기계장치들의 그 기이함은 작품에 대한 이해 여부에 앞서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어두운 벽면을 동식물들의 빛나는 이미지들로 채워 우리의 눈을 잡아끄는 이창원의 작품은 멀리서 볼 때는 사뭇 아름답지만, 다가가 그 빛의 근원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그처럼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참담한 기사들로 우리의 마음을 묵직하게 한다.
단순하기 짝이 없었던 표면적 감상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꽃으로 중무장된 이용백의 탱크처럼 선명하게 말을 거는 작품도 있지만,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은 성조기 이미지가 구성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그 진의가 드러나는 한경우의 작품처럼 시간차를 두고 곱씹어야 한다. 작품들은 신형섭의 뿌리 형상들처럼 기묘하게 의미를 뻗어나가며 머릿속의 물음표를 지우기보다는 더해간다. 그러나 이 물음표야말로 액체성의 원동력이다.
그에 비하면 중국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들에 선명한 마침표를 찍어둔 듯 보인다. 물론 장샤오타오의 애니메이션처럼 시간을 들여 그 마침표를 찾아야 하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흐릿해진 이미지를 통해 현대인이 겪는 정체성 혼란의 문제를 드러낸 쉬융의 초상들, 바니타스나 바쿠스 등의 미술사 모티프들을 차용하고 변용하여 현대문명의 무상함을 지적하려는 먀오샤오춘의 회화와 영상작업들, 마구잡이로 유입된 서구문명에 압도된 우스꽝스러운 추종자들을 보여주는 왕칭쑹의 작품들에서 현대문명 비판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의식의 선명함이 작품의 매력을 앗아가는 것은 아니다. 전시장과 전시장 사이 공간이라는 절묘한 장소를 택한 쑹둥은 현대문명 속에서 사소하게 다루어지는 옛것들을 층층이 쌓고 그 위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장소특정성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실제 촬영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매우 위태로워 보이는 순간들을 얼려버린 리웨이의 거대한 사진들은 기묘한 희극성마저 자아내며 단숨에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가 주도한 <액체문명>전의 오프닝 퍼포먼스는 마치 시뮬라크르처럼 보이는 리웨이의 작품들에 깃들인 나름의 진정성을 체감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화룡정점의 구실을 했다.
<액체문명>전에 참여한 한・중 작가들의 작품들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액체성’은 우리가 일견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액체의 자유롭게 유동하는 성질이기보다는 도리어 솔리드에 저항하는 몸부림, 그 견고함을 녹여내려는 액체화의 열망 같다. 어떤 액체는 언제나 액체 상태를 유지하지만, 또 어떤 액체는 열을 잃으면 고체로 굳어지기도 한다. 현대문명은 바우만이 보았듯 액체성을 통해 형성되었으나 어느덧 고체로 굳어져버렸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번 전시 참여 작가들은 고체화된 현대문명 사이로 액체화의 물꼬를 트려 애쓰고 있다. 그들은 언제까지 그 뜨거움을 간직할 수 있을까. 그들의 물길이 계속 흘러가기를. 그 흔적이 현대문명의 지형도에 의미 있게 남겨지기를.

정수경・미학

쉬융  연작 피그먼트프린트 80×60cm(각) 2013

쉬융 <초상사진> 연작 피그먼트프린트 80×60cm(각) 2013

 

Preview – 5월

아트스펙트럼 2014

삼성미술관 Leeum  5.1~ 6.29

삼성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이 작가를 선정해 격년제로 개최해온 아트스펙트럼展이 2014년 Leeum 개관 10주년을 맞아 새롭게 단장했다. 한국 미술계의 다양한 면모를 반영하기 위해 Leeum 큐레이터뿐 아니라 외부 평론가와 큐레이터를 섭외하여 작가 추천을 의뢰했다. 최종 선정된 작가는 회화, 설치, 영상, 퍼포먼스, 조각 등 다양한 장르의 김민애 박보나 송호준 심래정 이완 이은실 장현준 정희승 제니 조 천영미다. 참여작가들은 그라운드갤러리와 블랙박스를 활용하여 각자 작업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작품을 선보인다. 이들은 부모와의 관계부터 전 세계 정치경제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주제를 다루는 한편, 회화와 사진, 설치나 영상과 같이 잘 알려진 매체뿐 아니라 퍼포먼스와 관객 참여 프로그램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다가서려 시도한다. 이들의 작업을 통해서 세계로 나아가는 21세기 작가들의 패기를 느껴 볼 수 있다.심래정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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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이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

아트선재센터 4.19~6.1

한국의 사회에 대한 냉소적 시선이 담긴 회화·설치작업으로 젊은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박이소의 작고 10주기를 맞아 기획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는 소개되기 어려웠던 설치작품들을 중심으로, 회화, 조각,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의 작업으로 구성되었다.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출품했던 설치 작품을 비롯해 회화, 조각, 비디오 등 40여점을 1, 2층 공간에 구성하고 미국 뉴욕에서 박모라는 가명으로 대안공간을 운영하며 정체성을 고민했던 80~90년대와 박이소로 개명하고 귀국해 교수와 기획자, 작가로 활동했던 2000년대 이후로 작업 시기를 나누어 작품들을 배치했다. 예술과 일상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예술 안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에 큰획을 그은 작가의 작업을 통해 한국미술이 나아가야할 지향점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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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스퍼

예스퍼 유스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4.19~8.3

2013 베니스비엔날레 덴마크관 전시를 통해 세계 미술계에서 주목 받고 있는 예스퍼 유스트의 국내 최초 개인전. 이번 전시에서는 여성성을 바탕으로 사람과 사람 또는 사람과 환경 사이의 미묘한 교감을 포착한 주요 작품 13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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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용선

서용선

아트센터 화이트 블럭 5.2~7.27

갤러리에서 미술관으로 거듭난 화이트블럭이 특별전으로 서용선의 ‘역사적 상상-서용선의 단종이야기’를 소개한다. 작가는 비극적 사건을 기념하는 방식으로 특정 장소를 그리는 작업으로 풍경화이면서 동시에 역사화인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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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토퇄

Oh! My Complex

토탈미술관 4.25~6.29

2012년 이후 독일을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 개최했던 전시를 보완해 업데이트 된 버전으로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실제적인 갈등 요소에 초점을 맞춰 문제를 제기하는 맥락에 따라서 재구성했다. 키릴 글로브첸코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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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환기

어제와 오늘

덕수궁미술관 4.17~7.27

한국 미술의 선구자적 역할을 해온 예술원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해 대한민국예술원 미술분과 작고 회원과 현 회원의 작품 79점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인다. 57명의 작품을 통해 한국 미술의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의 좌표를 가늠해 본다.
김환기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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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

모모! 논리와 미디어가 만나다

BSSM 백순실미술관 5.3~7.13

미디어아티스트들과 인문학 연구공동체인 생각실험실 연구원들로 구성된 ‘리즈닝 미디어’가 선보이는 논리학과 미디어아트의 결합 전시. 8점의 설치작품을 통해 개인의 생각, 체험의 한계를 넘어 모두의 생각을 연결하는 접점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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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배윤환_전시출품작 중 일부1(50m 거대 캔버스 롤)_혼합재료_2014

배윤환

인사미술공간 5.9~6.5

회화와 드로잉을 통해 예술가로서 가지는 표현에 대한 욕망을 탐구하는 배윤환의 개인전. 작가는 경험에 상상과 이야기를 덧붙여 기승전결로 회화를 엮어내며 표면 자체에서 관찰되는 드로잉의 원시성, 표현의 욕망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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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노세환

3D PRINTING & ART:예술가의 새로운 창작도구

사비나미술관 5.14~7.6

21세기의 연금술로 불리는 3D프린터가 예술가의 창의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또 어떻게 활용되고, 나아가 시각예술 및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살펴본다. 작가 20인이 현재 보급된 3D프린터를 활용해 제작된 작품 50여점을 선보이며 현시점의 3D프린터의 가능성과 한계점, 그리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적 시각을 보여주며 3D프린터의 활용범위를 살펴본다. 미래에 더욱 다양하고 완벽한 창작도구로 활용 가능성의 단서를 제공함과 동시에 예술 창작방식의 새로운 방향 및 가능성을 제시한다. 노세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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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염지현

형상화된 일상의 낭만적 저항

키미아트 5.9~6.27

친숙하고 대중적인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하는 작가 강원제 겐마 히사타카 박미경 염지현 이채은 채한리 최윤희가 모였다. 주어진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주체적인 시선으로 재고해 새로운 사유를 이끌어낸다. 염지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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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김영원

김영원

표갤러리 5.9~30

인체라는 일관된 소재를 가지고 자신만의 작업세계를 구축해온 김영원의 개인전 ‘그림자의 그림자’. 이번 전시는 198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20여 점을 선보이며 입체와 평면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시적 요소를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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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8개의 제안서

갤러리 소소 5.13~6.15

드로잉의 개념과 형식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 내고자 기획되었다. 김을 김태헌 송민규 이상홍 이승현 이주영 이해민선 홍원석 작가가 참여해 드로잉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고 각기 다른 작업을 통해 드로잉의 경계점을 확인한다. 이승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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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_장재민

장재민

사루비아다방 5.2~31

특정한 장소에서 환기되는 상실된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재민의 개인전. 작가는 일상적인 공간과 개인의 감성이 만나면서 생성되는 특별함에 주목하고 관심 갖지 않았던 곳에서 보이지 않는 대상을 찾으며 존재의 의미를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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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팩토리

로와정

갤러리 팩토리 4.30~5.25

주변의 사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또 다른 지각의 방법을 제시하는 로와정의 개인전. 중심이라 표명하는 무엇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사이의 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전시 구성 과정과 장치로 치환하여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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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지현

숨을 참는 법

두산갤러리 4.23~5.31

구동희 양정욱 정지현 세 작가가 획일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을 각자의 시선으로 그린다. 두산인문극장의 2014년 테마인 ‘불신시대’를 전시로 풀어낸 것으로 사회 속에서 개성을 잃고 소멸해 가는 개인의 모습을 작품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정지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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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박미나

3인의 목격자

신한갤러리 역삼 4.9~5.21

평범한 일상의 장면을 개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는 3명의 작가 박미라 서재민 이수진의 그룹전. 일상에서 포착한 사건을 직접 겪는 경험자나 관찰자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며 당사자가 느끼는 불안, 음모, 균열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미라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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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정정주

정정주

갤러리 조선 4.30~5.29

‘암점’을 타이틀로 한 정정주의 개인전. 전시의 주제 ‘암점’은 응시에 의해 경험되는 ‘주체의 의식’ 으로서 내가 보고 있는 대상이 반대로 나를 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며 작가는 이 주제를 빔프로젝터와 비디오 카메라를 통해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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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미

홍영미

성산아트홀 5.6~11

자신이 바라보는 풍경을 작가만의 자유로운 느낌으로 그려내는 홍영미의 개인전. 작가는 물의 번짐을 이용해 산수화와 같은 수채화를 선보이며 자신의 토대가 되는 우리나라의 땅과 바다를 단순하지만 절제된 이미지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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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강상훈_뱃놀이-mudmixed_mideaW40×H25.5×D7.0cm2014

강상훈

갤러리 두 5.13~26

감정의 굴곡을 기록하는 강상훈의 개인전. 시멘트, 나무 등의 일상적 오브제를 활용해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재료의 보편적 특징과 일상의 사건을 결부시켜 현대사회에서 타인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포인트를 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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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신영호

2014 한마음

경북대학교미술관 5.15~6.20

경북대학교 개관 68주년 기념으로 ‘2014 한마음전’이 열린다. 학교 차원을 넘어 경북지역의 미술발전을 위한 전시로 기획되었다. 회화, 조각, 설치, 영상, 사진 등의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작가 50여 명 의 대표작 8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신영호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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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권지현

권지현

한미사진미술관 4.26~6.21

2009년부터 진행해 온 초상사진 시리즈 <THE GUILTY>. 사회가 제시하는 일반적인 답이나 인생이 아닌 예술가로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삶을 죄악시하는 사회의 시선을 다양한 문화권의 인물들의 은밀하고 진솔한 초상으로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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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창겸

김창겸

갤러리 이배 4.25~6.8

미디어를 통해 실제와 허구, 물질과 비물질을 구연하는 김창겸의 개인전. 갤러리 이배의 이전을 기념해 기획된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미디어아트에 접목하여 현실(2D)과 환영(3D)의 미학을 몽환적인 유토피아로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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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박방영_부안답사일기-2014_한지위에_혼합재료~

박방영

갤러리 담 5.7~18

특유의 힘있는 필치로 상형문자를 회화에 새롭게 적용시키고 있는 박방영의 개인전 <길을 가다가 너를 만나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살고 있는 부암동 근처를 그린 <부암동 답사기>를 비롯한 신작 20여 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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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이현열

이현열

갤러리 이레 4.26~5.20

2년여간 스케치 여행을 다니며 준비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남도 南島– 자연으로 물들다’. 작가는 자연과 인간의 경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며 극복의 대상과의 조화라는 관점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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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정연

이정연

루벤갤러리 5.14~20

주변 사람들과의 교감, 동물과의 교감 등 모든 대상과의 소통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정연의 개인전. 작가는 삶을 이어가는 원동력을 대상과의 교감이라고 생각해 모든 대상을 안아주듯 따뜻하고 정감어린 시선으로 보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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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김형률

김형률

리서울갤러리 4.23~5.6

우리 고유의 미적 요소를 탐색해 동양화의 시대적 조형성을 구현하는 김형률의 개인전. 여인, 공작, 풍경 등을 소재로 인간과 자연에 내재된 자연미를 다루며 자유분방선과 강렬한 채색의 조화로 한국화만이 가진 독특한 미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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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신현수

신현규

갤러리 예담 5.14~20

캄차카 반도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신현규의 사진전. 작가는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 못한 채 자연 그대로 보존된 캄차카 반도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일반적인 풍경이 아닌 신비롭고 기이한 풍경을 생생하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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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홍주혜

홍주혜

갤러리 조이 4.23~5.23

백자 흙을 사용해 지고지순한 사랑을 표현한 도예 전시. 백자로 빚어진 연꽃과 꽃살작업은 꽃의 낙화과정과 작업속의 시간성이 중첩된다. 단순한 도자기가 아닌 창살의 모양을 한 작업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도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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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이상렬

이상렬

대구 이상숙갤러리 5.2~30

작가는 화려한 꽃들과 더불어 가을을 알리는 풍요로운 열매로 화면을 채운다. 오랜 시련과 역경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맺힌 열매를 통해 삶을 은유하며 사람도 어려운 시절을 이기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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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로베르두아노

로베르 두아노

KT&G상상마당 5.1~8.3

로베르 두아노의 국내 첫 회고전.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대표작인 ‘파리 시청 앞 광장에서의 키스’ 원본 사진을 만날 수 있다. 순수, 사랑, 풍경, 인물 4개의 주제로 나뉜 로베르 두아노의 사진 70여 점과 밀착 인화본 3점이 함께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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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마유카

야마모토 마유카

갤러리 제이원 4.22~5.11

미묘한 두려움, 아련한 슬픔이 충돌하는 공간을 그리는 마유카 야마모토의 개인전. 작가는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통해 겉모습 속에 감추어진 유년기의 상처와 원초적인 두려움을 표현하며 우리의 잃어버린 자화상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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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롬 부트랭

Tome 2

아트사이드갤러리 서울 5.13~6.2

2015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마련된 프랑스 현대 추상미술 기획전. 다양한 상상력에 집중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 6명의 한국과 프랑스 작가의 작품을 통해 한국과 프랑스 현대미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본다. 제롬 부트랭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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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유기은

유기은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5.6~15

유토피아를 꿈꾸며 밝은 희망을 색으로 표현하는 작가 유기은의 개인전. 작가는 뿌리 없는 나무, 메아리 없는 골짜기, 음지 없는 양지 등 세상의 어두운 면을 외면한 밝은 면을 부각시켜 표현하며 부정이 결핍된 세상을 화려한 색으로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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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곽귀연

곽귀연

도도갤러리 5.13~20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곽귀연의 개인전. 작가는 일상에서 스치는 인연들을 놓치지 않고 탐구한다. 삶이라는 먼 길 속에서 그림에 대상이 되는 존재를 통해 살아있다는 근원적 생명력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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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홍찬석

홍찬석

전주 교동아트스페이스 5.20~25

전통적 민화를 현대적 시각으로 해석해 작업하는 홍찬석의 개인전. 동화적인 느낌과 함께 유머러스하고 독창적인 화법으로 하나같이 즐겁게 사는 것을 주제한 그의 작품에선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낙천적인 여유가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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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김애리

김애리

갤러리 M 5.14~20

자신이 가꾸는 꽃밭을 그리는 김애리의 개인전. 작가는 자신이 만들고 가꾼 꽃밭을 하나의 세계로 바라보고 옥황상제가 계신다는 자미원에 빗대 표현한다. 아름다움과 가치를 멀리서 찾지않고 가까운 곳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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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강순자

강순자

가나인사아트센터 5.28~6.2

비우는 것의 가치에 집중하는 작가 강순자의 개인전. 작가는 화면을 하나의 그릇으로 간주하여 대상의 해석과 재구성에 의미를 둔다. ‘허심’이라는 타이틀로 비움의 가치를 내면화하며 눈앞의 것에만 치중하는 현대인의 조급함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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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김명식

김명식

해운대아트센터 5.20~6.1

유학시절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다문화·다인종 사회의 모습을 담는 서양화가 김명식의 개인전. 작가는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라는 타이틀로 항상 해가 뜨는 동쪽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이야기를 집, 사람, 풍경을 통해 풀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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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작품이미지김성균(

김성균

전주 서학아트센터 5.8~27

작업을 통해 개인의 상처를 극복하는 것을 주제로 조각 작업을 진행해 왔던 작가 김성균이 더 나아가 상처의 극복을 통한 치유를 이야기한다. 작업의 과정 속에서 느낀 나무라는 소재와의 소통을 통해 깨달은 상처 치유의 과정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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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이종혁

이종혁

예일화랑 5.24~30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그리는 이종혁의 개인전. 작가는 단순히 밝은 미래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필로 염원을 담아 자신의 꿈과 소망을 종이위에 표현한다. 이번전시에서는 그의 화폭에서 나온 것 같은 도자작품들도 함께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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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오태석

오태석

가나인사아트센터 4.30~5.5

땅이 아닌 시멘트 위를 걷고 나무 숲이 아닌 빌딩 숲을 지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사회 속에서 자연에 집중하는 오태석의 개인전.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이 하찮은 가치로 전락하는 현상 속에서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찾는다.

[Exhibition focus] Shirin Neshat

위· 연작. (사진 맨 왼쪽) RC Print and ink 116×78cm 1994 Courtesy the artist and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아래· 연작 중  2012 ⓒ Shirin Neshat, Galerie Jerome de Noirmont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광경

위·<알라의 여인들> 연작. <알라의 여인들_침묵의 저항>(사진 맨 왼쪽) RC Print and ink 116×78cm 1994 Courtesy the artist and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아래·<왕서> 연작 중 <군중(Masses)> 2012 ⓒ Shirin Neshat, Galerie Jerome de Noirmont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광경

Shirin Neshat

쉬린 네샤트(Shirin Neshat, 1957~)의 작업은 바로 그녀의 일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란 출신으로 이슬람 문화권 영향하에 성장기를 보내고 미국으로 이주한 쉬린 네샤트의 작업은 이란의 정치, 역사, 그리고 이슬람 여성문제 등을 폭넓게 다룬다. 그녀의 대규모 회고전이 4월 1일부터 7월 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영상, 사진작업 50여 점이 소개된다. 이를 계기로 《월간미술》은 쉬린 네샤트의 육성으로 그녀의 작업세계를 들어보고 이와 함께 이번 전시의 의미를 살펴본다.

이슬람 디아스포라 여성작가의 교훈주의와 상징주의

김지훈  중앙대 영화·미디어연구 조교수

이란 디아스포라 작가인 쉬린 네샤트는 1990년대 중반부터 현대예술계에서 국제적 명성을 확고히 해 온 인물이다. 2010년 간행된 네샤트의 작품세계에 대한 카탈로그에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아서 단토 등이 보낸 비평적 성찬, 2채널 비디오 설치작품 <격동(Rapture)>(1998)의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첫 장편영화 <여자들만의 세상(Women without Men)>(2009)의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등은 그의 국제적 명성을 입증하는 일부일 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전 이후에 여는 첫 번째 개인전 대상으로 네샤트를 선정한 이유들 중 하나는 이슬람 여성이 처한 억압적 조건들을 주제적, 형식적 일관성을 갖고 표현해 온 그의 작품세계가 서구예술계에서 대중적 주목을 받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네샤트의 사진과 영상설치 작품들을 엮어주는 두 개의 키워드는 교훈주의(didacticism)와 상징주의(symbolism)이다. 교훈주의는 이 작품들이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슬람근본주의가 부과한 억압적 성차별주의와 서구적 고정관념의 이중구속에 사로잡힌 이슬람 여성의 불안정한 정체성을 전지구적 예술시장에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졌음을 뜻한다. 상징주의는 이러한 이중구속의 국면들을 표현하기 위해 네샤트의 작품들이 공유하고 변주하는 구조와 수사법들의 상징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상징성을 네샤트는 사진 작업에서는 시각적 요소들의 강렬한 충돌을 통해, 영상작업에서는 두 개의 스크린 분리와 병치를 통해 구현해왔다.
네샤트의 흑백사진작품으로는 초기작 <알라의 여인(Women of Allah)>(1993~97) 연작과 최근작에 속하는 <왕서(王書), The Book of Kings)(2010)들을 볼 수 있다. 네샤트의 이름을 최초로 각인시킨 <알라의 여인>의 사진들은 이란 여성들의 손과 발의 클로즈업, 또는 히잡을 착용하고 총으로 무장한 여성의 정면 얼굴의 클로즈업을 제시한다. 신체의 표면에는 이란의 현대시인 포러흐 파록자드와 타헤레 사파르자데의 여성주의적 시구들이 뚜렷한 페르시아어 서체로 각인되어 있다. 이 일련의 이미지들에서 유기적 신체와 비유기적 총 사이의 충돌, 이슬람 사회에서 노출이 용인된 신체 부분들인 눈, 손, 발의 가시성과 가리워진 신체의 비가시성 사이의 대립,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긴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뚜렷한 도상적 가치를 정서적으로 표현하는 이러한 이중성들은 이슬람 여성에게 부과된 이슬람근본주의와 서구적 편견에 대항하기 위한 형식적 장치들이다. 한편으로 히잡으로 가리워진 여성의 신체는 이슬람근본주의적 혁명의 폭력성과 종교적 권위를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인물들의 도발적인 정면 시선과 파편화된 몸, 총은 비서구 여성을 수동적인 볼거리의 대상 또는 핍박받는 희생자로 구획하는 서구적 응시에 대한 도전을 목표로 한다. 아울러 뚜렷한 페르시아어 서체는 이슬람 문화의 신화적 과거와 오늘날 이란의 정치적 긴박함을 모두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현대 이란 젊은이들의 얼굴 표정에 드러나는 정서적 강렬함을 표현한 초상사진 연작인 <왕서>에서도 반복된다.
이슬람 성정치학적 논제들의 시각적 형상화
네샤트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인증한 작품들은 흑백의 영상 설치작품 3부작인 <격동>, <환희(Rapture)>(1999), <열정(Fervour)>(2000)이다. 이 작품들 이전까지 내러티브가 배제되고 모니터의 조형적 배치에 의존한 비디오작업을 하던 네샤트는 이 3부작에서 영화적 편집과 내러티브를 전면적으로 차용하고 변형함으로써 ‘영화적 비디오 설치작품’의 초기 경향을 대표하게 된다. 이 작품들은 모두 16mm로 촬영되었으며 다리우스 콘쥐 등의 촬영기사와 필립 글래스 등의 음악 등 극장용 예술영화의 제작 시스템에 의존하기도 했다. 레이몽 벨루르가 적절하게 지적하듯 2채널 설치를 공통적으로 활용한 이 작품들은 영화사에서 대화 장면과 시점 쇼트, 나아가 두 개 이상의 사건들의 시간적 동시성과 상징적 연관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발달해 온 평행편집의 논리를 갤러리 설치공간으로 연장시킨 결과다. 평행편집에 대한 의존은 그만큼 이 작품들이 적어도 복수적인 이미지 트랙들의 편집과 스크린 공간의 배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단순명료하다는 점을 뜻한다. 남성과 여성을 스크린 단위에서 분리시키고 관객들에게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몽타주를 촉구하는 설치방식은 이슬람 이데올로기가 전통적으로 상정한 남녀 분리라는 성정치학적 논제들을 시각적이고 개념적으로 형상화한다. 배우들의 퍼포먼스와 의상 또한 이러한 대립주의에 상응한다. <격동>에서 남자가수는 흰 셔츠를 입고 청중을 뒤편에 두고 13세기 이란의 시를 가사로 한 열정적인 사랑 노래를 부르며, 여자가수는 어두운 화면을 배경으로 아무런 청중 없이 노래한다. <환희>에서 흰 셔츠를 입은 남성들이 성 안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동안 검은 차도르를 입은 여성들은 광야를 떠돌며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열정>에서 동일한 종교의식에 참석하는 두 남녀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지만 만나지는 않는다.
네샤트의 대립주의는 스크린 배치의 차원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격동>과 <환희>에서 남성과 여성의 행위는 서로를 바라보는 일종의 쇼트-역쇼트 구조로 전개된다. <격동>에서는 한쪽 스크린에서 남자가수가 노래를 하는 동안 다른 스크린에서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성이 정면을 응시하다가, 이 남자가수가 노래를 마치고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는 동안 여자가수가 얼굴을 드러내고 노래를 하게 된다. <환희>에서 남성들의 종교적 응시는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는 여성들의 모습과 병치되며, 이후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여성들을 남성들이 성벽에 머무른 채 바라보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일련의 대비들은 관람자가 두 개의 이미지 트랙을 일종의 시점 쇼트로 상징적으로 연결시킬 때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격동>과 <환희>는 두 이미지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로 귀결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시선 교환이 동일한 극적 장소에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슬람의 전통적 여성 자아와 현대적 여성 자아를 대면시킨 2채널 작품인 <독백(Soliloquy)>(1999)에서 나타나는 시선의 교환과 대조적이다). 이때 두 스크린 사이의 공간은 이슬람문화에서 남성과 여성의 환원불가능한 차이(<격동>에서 남자가수와 여자가수의 시청각적 차이, <환희>에서 이슬람 전통에 구속된 남자들과 이를 벗어나려는 여자들 사이의 차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번 개인전은 네샤트의 작품세계와 그의 작업을 지탱하는 교훈주의와 상징주의의 면모를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전시다. 이러한 면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는 관람객의 판단으로 남는다. 네샤트는 일련의 강연 및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들이 드러내는 뚜렷한 이분법들이 이슬람 여성에 대한 억압적 상황들을 유지시키는 문화적, 정치적 대립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주장해왔다, 이러한 이분법들이 한편으로는 비서구 하위주체들의 타자성과 혁명 이후 이란 사회의 견고한 보수성을 그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서구 대중에게 알게 쉽게 이해시키고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어느 정도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이 담보할 수밖에 없는 환원주의적 단순성, 그리고 비서구 예술가가 자신의 문화를 상징주의적으로 전달할 때 수반되는 자기-오리엔탈리즘(self-Orientalism)의 한계 또한 네샤트의 작품들을 비판적으로 관람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들이다.
끝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작품 설치방식에서 보완해야 할 점 한 가지를 지적한다. 네샤트의 작품에서 사운드는 이미지 트랙만큼이나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필립 글래스의 섬세한 미니멀리즘 스코어를 들을 수 있는 <패시지(Passage)>(2001)가 아니더라도, <격동>에서 서로 대비되는 남자가수와 여자가수의 목소리(분명한 가사와 청중을 가진 남자가수의 노래, 그리고 남성중심의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여성적 타자성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여자가수의 독백적인 노래)는 이미지만큼이나 중요하며, <열정>에서 남성 종교지도자의 연설은 작가의 의도에 따르면 ‘오페라와 같은 음악적 성질’을 띤다. 그러나 한정된 공간들 속에 여러 작품을 설치하다보니 개별 작품의 볼륨이 너무나 낮으며, 작품들 사이의 사운드 간섭 또한 문제점으로 남는다. 이후 전시에서도 필름 및 비디오 설치작품들을 비중있게 구현하게 될 미술관 측에서 세심히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다. ●

· 중  Courtesy the artist and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환희(Rapture)> 중 <바위투성이 해변가에서 여성들이 성스러운 선물에 맞춰 무작위로 이동하여 모인다>
Courtesy the artist and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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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린 네샤트,
뉴욕에서 만나다

날짜 3월 19일  |  장소 뉴욕 소호의 쉬린 네샤트 작업실

인터뷰이 쉬린 네샤트 작가  |  인터뷰어 김유연 독립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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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연(이하 ‘김’)  1993년 뉴욕 프랭클린 퍼니스에서 당신의 개인전 <알라의 여인(Women Of Allah)>을 보았다. 당시 여성의 얼굴과 발에 총구가 겨누어지고 그 위로 텍스트가 영사된 장면이 지금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여기서 폭력의 의미와 역사적 유산의 상징이 함축된 여성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당시 전시를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이러한 작품을 통해 전하려는 중동 여성을 향한 메시지는 무엇인지 그리고 서구의 시각과 이슬람 내부에서 보는 시각을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는가?
쉬린 네샤트(이하 ‘쉬린’)  당신은 그 전시를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 쇼는 내 첫 번째 전시였다. 1990년대에 다시 이란에 돌아간 이후 <알라의 여인>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슬람혁명 이후 상황은 매우 나빴고 이란으로 여행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이주했고, 당시 내 작업이 마음에 들지않아 더 이상 예술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알다시피, 나의 남편인 박경(Kyung Park)과 함께 뉴욕 Storefront for Art in Architecture 비영리기관을 운영하는 데 주력을 다했다. <알라의 여인>은 처음 이란으로 돌아간 뒤에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일어났던 이슬람혁명의 여파와 이란의 상황으로 인해 국가의 변형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여성의 위치와 예전의 이란이 페르시아 및 이슬람화해 있었던 상황에 주목했다.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와 이슬람혁명 후의 주요 개념에 대한 이해에 흥미를 가졌다. 나는 이 주제가 매우 심오한 의미를 가진 주제임을 깨달았고 다행히 외부에서 활동하는 여성 예술가였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한 방식은 흥미있는 주제를 주축으로 노력하는 학자나 사회주의자와 다름없었다. 나에게는 사랑과 미움, 삶과 죽음 사이를 중재해 표현하는 특이한 방식이 있었고 그것이 테러리스트이거나 폭력적이거나 전투적인 여자라면, 모든 것이 훨씬 강조되었다. 왜냐하면 <알라의 여인>은 기본적으로 이슬람의 전투적 여성에 관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 이미지의 시리즈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어떠한 형태로 촬영되던지 간에, 구성 요소들의 완벽한 이분법성, 미와 감성, 에로티시즘의 역설, 강하게 양식화된 흑백이미지를 항상 상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폭력, 잔인성, 압력의 제안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이미지는 어두운 측면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매우 아름답다. 나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역설이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알라의 여인>이 종교와 사람들에게 인해 세뇌당하는 과정, 그리고 기본적으로 그들과 신(神) 사이에서 가두어진 방식을 들여다보기 위한 창구이다.
  1998년에 당신은 세상이 놀랄 만한 영상설치작업 <격동(Turbulent)>을 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두 개의 비디오작업 <환희(Rapture)>(1999)와, <열정(Fervour)>(2000)을 제작한다. <격동>은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소개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설치는 성과 사회, 그룹과 연관된 개인에 관한 변증법을 보여주기 위해, 양 채널 비디오 스크린을 이용했다. 이란 출신 망명작가로서 서구적 측면과 이란과 이슬람문화의 문제점, 특히 이슬람법에 의해 제한받는 이슬람 여성의 본성을 새롭게 창조하는데 어려웠던 점을 설명해 줄 수 있는가?
쉬린  1993~1997년 사이에 완성한 <알라의 여인> 이후, 1998년부터 나는 사진작업에 대해 좌절을 느끼기 시작했고, 내가 다뤄왔던 테마와 주제들에 지쳐있었다. 이란 정부와의 문제로, 더 이상 자유롭게 이란에 갈 수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 나에게 <격동>은 매우 혁신적인 작업이다. 이는 형식적 매체를 사진에서 영상으로 변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적 요소에서 영상은 비록 흑백사진과 매우 흡사하지만, 유동적이고 서술적이며 음악과 구성이 내재돼 있었다. 여기에 나는 풍경, 안무, 음악, 퍼포먼스를 포함하였다. 그것은 나 자신과 나의 예술적 언어를 위한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주제별로
<격동>과 함께 <알라의 여인>에서 나의 관점에 대해 좀 더 중립적이려고 노력했고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본 실제상황을 관찰했다. 하지만 <격동>에서 작품은 더욱 비평적으로 나타났다. 나는 이란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리고 이란 내부의 억압에 대해서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최근까지 나는 이란을 여러 번 여행하면서 나의 작업은 점점 더 비판적이 되었고 여전히 예술적이고 우화적인 방법으로 작업을 풀어갔다. <격동>은 음악산업에서 여성 부재에 대해 집중한 작품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여성의 음악산업 진출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념적으로는 남성은 좀 더 순응적인 타입의 노래를 하고 예상 가능한 해답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중 없이 노래하는 여성은 음악에 대한 당국의 규칙을 언제든지 깰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소리, 우수에 젖은 소리를 낼 수 있다. 이는 여성이 처한 선택권이 없고 소외된 환경과 상징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에 대한 반응은 훨씬 거칠고 강하기 때문에 매력적이고 실험적이기도 하다.
  2001년에 당신은 필립 글래스(Phillip Glass)와 함께 <패시지(Passage)>라는 작업을 했다. 이 작업의 내러티브는 무엇인가? 그리고 만약에 이 작업을 만드는 데 당신과 필립이 직면했던 문제점이나 절충안이 있다면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두 명의 예술가가 아주 다른 시각으로 접근 한 것같다.
쉬린  수잔과 쇼자 등 이란인들로 이루어진 팀과 수잔의 목소리 영상작업을 만든 후에, 나는 갑자기 필립 글래스의 사무실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그는 몇몇 영화감독에게 배경음악을 작곡할 단편 필름을 맡기고 있었다. 한 명은 마이클 루브너(Michal Rovner) 감독이었고, 피터 그린어웨이(Peter Greenaway) 감독, 아톰 에고얀(Atom Egoyan) 감독, 고프리 레지오(Godfrey Reggio) 감독 등이었다. 이것은 굉장한 기회였다. 나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그에게 제안했다. 나는 모로코로 촬영을 하러 갔고 그가 어떠한 음악이나 악기를 이용할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매우 허구적이었기 때문에 불안했다. 나의 작업은 아랍적인 요소가 강하고 <패시지>의 주제는 애도와 장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란여성인 수잔과 작업한 이후, 어떻게 내가 미니멀한 음악을 하는 서양의 백인 남성과 같이 일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콜라보레이션이 매우 마음에 들었고, 사실 내가 기획한 음악에 흡족했다. 우리가 꼭 이란인과만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나에게는 굉장한 발견이었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온 사람이 아니어도, 아이디어의 토대를 이해하는 사람이면 얼마든지 같이 일할 수 있다. 나는 또한 목소리가 아닌, 소리와 음악만으로 얼마나 훌륭한 작품을 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필립 글래스와 일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후, 류이치 사카모토(Ryuich Sakamoto)라는 작곡가와
<여자들만의 세상(Women Without Men)>이라는 작업을 하게 된다. 필립 글래스와 함께 한 것은 굉장한 협업이었고 나와 음악의 관계, 콜라보레이션 등에서 중요한 돌파구였다고 느낀다. 진실된 작업을 위해서 모국 출신만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자신의 지평선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2002년에 당신은 독일 ‘카셀 도쿠멘타11’ 지원으로 <새들의 논리(Logic of The Birds)>를 완성하고, 같은 해에 <투바(Tooba)>를 만들었다. 대부분 작품처럼, 이것은 시적인 알레고리와 마술적인 리얼리즘의 형태를 조합한다. 그리고 당신 작품은 페르시안 작가 샤누시 파시퍼(Shahrnush Parsipur)의 여성성 나무(a feminine tree), 투바(Tooba), 파라다이스의 나무(tree of Paradise)가 중심이 되는《 여자들만의 세상(Women Without Men)》에서 영감을 받았다. 나무는 대부분의 문화에서 종교적인 상징을 갖는다. 유대인 탄생 신화의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에는 도교적인 전통에서 신성한 복숭아와 마찬가지로 불멸의 의미가 부여된다. 불교적 전통에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가 깨달음을 얻는다. 페르시안 전통에서 나무가 갖는 상징성과 그것이 어떻게 당신의 필름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과 관련을 갖게 되는지 좀 더 설명해줄 수 있는가?
쉬린  <투바>는 멕시코에서 촬영했다. 그 필름을 찍기 전 2001년 9월 11일 9·11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2002년 봄이었다. 나는 평화롭고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중동으로 돌아가 영상을 촬영하는 것은 이 시기에 적합하지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작업이 그 어떤 것보다 9·11 참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본다. 이 작품은 시적이고 메타포이다. 투바의 나무는 코란에 존재하는 신화적 대상이다. 파라다이스의 나무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나무이다. 그래서 여성성을 대표하기 위하여 파라다이스의 나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나는 이란과 풍경이 유사한 와하카라는 곳의 풍경에 이 나무를 배치시키기로 했다. 그곳에는 척박한 언덕이 있었다. 우리는 언덕 중간에 나무 한 그루와 함께 나무로 둘러싸인 벽을 만들었고 이것은 나무와 관계가 형성되었다. 검은색 옷을 입고 투바 나무 주변의 정원을 은신처로 삼으려는 무리, 남성과 여성에게, 그것은 절대적으로 신성시되는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종교의례와 성가를 부르는 한 무리의 남성들이 원을 그리며 앉아있다. 나에게는, 비록 이것이 허구적이라 하여도, 이들에게서 영감을 받으며, 종교를 가진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 유대인이거나 힌두교인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생각된다. 그들의 동작에는 강렬함이 있었고 그들이 옷을 입은 방식은 매우 모호하지만 명백히 힘이 있고 종교적이었다.
  그것은 파라다이스로의 여정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쉬린   정확한 말이다. 그것은 마치 오아시스, 안식처를 찾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나에게는 9·11사태를 돌이켜볼 때와 같이, 사람들이 느꼈을 상처와 불안전성의 양면을 뜻한다. 세계적으로, 우리는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고 안전한 방법을 찾는다. 그래서 시적인 연극방식에서 인간이라는 무리는 항상 안전하게 보이는 나무 아래에 도달하려 하지만 나무라는 성스러운 곳에 도달하자마자 나무, 투바(Tooba)는 사라진다. 점령함으로써 성스러운 장소를 상실한다. 이것은 지극히 이란적이며, 이 점에서 나는 이란 문학에 찬사를 보낸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당신은 여러 분야에 걸쳐 사진, 필름, 비디오 설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작업하였다. 당신의 첫 번째 영화 필름 <여자들만의 세상>(2009)은 독일 헤센 지방의 영화제에서 평화특별상과 66회 베니스영화제(2009)에서 은사자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무엇이 당신을 이러한 영화필름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만들었으며, 어떻게 발전했는가?
쉬린  2003년 <투바>를 만들고 나서, 나는 약간 지쳐 있었다. 그전에는 매체가 사진이었던 반면, 지금은 영상으로 바뀌었고 지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시간 완전히 다른 것을 해야 할 시기라고 느꼈다. 현재까지 나는 여러 편의 영상을 만들었고, 영화의 매력에 빠졌다. 나는 절친인 쇼자, 그리고 영화계에서 온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나는 수많은 영화를 보았고, 갤러리와 미술관의 문턱을 넘어, 영화로 인해,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는 일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일을 하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고 아직 두려웠다. 2002년인가 2003년의 어느 순간, 내가 도쿠멘타(Document)에 나갔을 때, 내 생각에 2002년 <투바>를 출품했을 때인 것 같다. 나는 미술계에 완전히 지쳐있었다. 내가 떠나야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생각했다. 프로듀서가 내게 왔을 때 나는 영화로 만들고 싶은 스토리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샤누시 파시퍼가 쓴《여자들만의 세상》을 찾았다. (샤누시 파시퍼(Shahrnush Parsipur)는 1946년 2월 17일 이란의 테헤란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1980년대 말에, 파시퍼는 그녀 이야기와 관련해 다수의 출판사와 잡지《 Donya-ye Sokhan》과의 인터뷰 등으로 테헤란 문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은 4년7개월간의 감옥 생활 이후에 쓴《 투바와 밤의 의미-1989(Touba va ma’na-ye Shab)》였다. 감금 이후, 1990년에 그녀는 단편소설을 출판했다. 파시퍼가 1970년대 말 집필을 끝낸《 여자들만의 세상(Zanan Bedun-e Mardan)》과 같은 연작을 재출판. 첫 번째 챕터는《 Alefba, no. 5》(1974) 이다. 이란 정부는 1990년대 중반에《 여자들만의 세상》을 판금 조치하고 작가가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1990년대 초반, 파시퍼는 네 번째 소설인 450페이지 분량의 여성 돈키호테에 관한《 푸른색의 이유(Aql-e abi’rang)》를 완성하는데 이는 1992년 초반까지 판금되었다. 1994년 파시퍼는 미국으로 건너가《 감옥의 기억(Prison Memoire)》을 쓴다. 이는 450페이지 분량으로 그녀가 각각 다른 감옥에서 보낸 4번의 시간에 관한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다. 1996년 그녀는 다섯 번째 소설을 썼는데 이는 900페이지짜리 과학소설《 Shiva》이다. 1999년에는 여섯 번째 소설인 300페이지 분량의 《나무의 정신이 가진 고통과 작은 모험(Maajerahaaye Saadeh Va Kuchake Ruhe Deraxat)》을 출판한다. 2002년 그녀는 700페이지 분량의 일곱 번째 소설《바람의 날개 위에서(Bar Baale Baad Neshastan)》를 쓴다. 그녀는 그 이후 이란을 떠나 현재는 미국에 거주한다. 브라운대학교의 국제 연구를 위한 왓슨 인스티튜트와 혁신적인 글쓰기(Creative Writing and the Wat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Studies) 프로그램의 첫 번째 국제 작가 프로젝트 펠로십 수상자이다) 그녀는 매우 유명한 이란의 소설가인데 매우 힘든 삶을 살았고, 망명했으며, 감옥에 수감됐고 정신적 질병을 앓았다. 하지만 그녀의 책은 상상력이 매우 풍부했고 어느 면에서는 초현실적이었다. 이란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세계적이고 보편적이었다. 또한, 등장인물들은 이란문화 외부로부터 오는 경향이 있었고, 그들의 사건과 문제는 전세계의 어떠한 여성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녀가 신을 묘사하는 대목은 매우 시각적이었다. 나는 이 책이 내가 흥미를 가진 것들의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문제점은 문학이 지닌 마술적 리얼리즘이었다. 이것은 영화로 만들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2003년부터 2007년까지 4년 동안 준비기간을 거쳤고, 모로코에서 촬영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대본을 다시 썼다. 2009년 2년의 수정과 4년의 글쓰기를 합해 총 6년에 걸쳐 만든 영화가 개봉되었다. 당신은 내가 그 상을 받을 때 얼마나 흥분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김  당신의 사진 이미지에는 당신이 직접 쓴 글이 더해진다. 이 텍스트들은 언어로서, 초상화를 넘어 시각적으로 가려진 베일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쉬린  글씨체는 각기 다른 매력들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미학적인 매력이다. 당신이 이것을 그래픽적으로 생각하더라도 크고 진한 글씨체의 텍스트와는 반대되는 작은 텍스트는 사진에 다른 영향을 준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그런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글 혹은 일러스트레이션이 이미지에 또 다른 측면의 정보 및 복합성을 제공하는 방식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글의 경우, 번역되었을 때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10세기의 <왕서>에서 가져온 그림을 예로 들면, 이는 전쟁과 폭력에 대한 일러스트레이션이므로 그러한 혁명의 폭력적인 측면에 대한 진실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진에 추가하는 모든 것은 나의 의도를 더욱 잘 나타내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작품은 겹의 모호성을 나타낸다. 시적이자 정치적이고 역설적이기도 하며 여성 대 남성, 전통 대 현대의 대립적인 것을 나타낸다. 당신은 사회의 역사적 뿌리를 깊이 생각하며 어떻게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려한다. 또 당신은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어디에 있으며, 존재와 사람의 조건에 대하여 생각한다. 당신의 작품을 어떻게 보며, 예술과 정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쉬린   정말 좋은 질문이다. 내 생각에 나는 때때로 덜 정치적이고, 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작업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좀 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작업을 만든다. 나는 예술세계에서는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정치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다루게 되면 사람들은 바로 당신을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균형을 유지해야 비로소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를 설교하려고 하는, 즉 설교적인 예술로 추락할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시적인 것이면서도 더욱 심원한 것, 더욱 일반적인 것이어야 한다. 나는 정치적인 예술가로 낙인찍히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나는 예술가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란인이며 나의 조국은 정치적인 문제, 혁명 및 기타 많은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자연히 나는 그에 반응하게 된다. 내가 스위스 출신의 예술가였더라면, 즉 내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지 않았다면, 나는 다른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문화적 배경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동시에 나는 설교하지 않고서도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항상 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이 어려운 노선을 따라서 걷고자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내 작품에 대하여 너무 정치적인 면만을 보고 예술적인 면을 보지 않거나, 그와 반대로 보는 경우가 많아서 나는 때때로 좌절하기도 한다. 보도매체에서도, 즉 기자들도 실제 예술작품을 보기보다는 그 작품에 대한 정치적인 측면을 과장하고 있다. ●

독백(Soliloquy)> 젤라틴 실버프린트 43.5×56.8cm 1999 Copyright Shirin Neshat, Courtesy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독백(Soliloquy)> 젤라틴 실버프린트 43.5×56.8cm 1999 Copyright Shirin Neshat, Courtesy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Exhibition topic] 그룹 뮌 – 기억극장

Memory Theater

김민선(사진 왼쪽)과 최문선으로 구성된 부부작가 그룹 뮌의 개인전 <기억극장>(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c, 3.20~5.30)이 열린다.
전시 타이틀이 말하듯 이번 전시에서 뮌은 ‘기억’과 ‘극장’을 주목한다.
즉 사회적, 역사적, 심리적인 차원에서 기억이라는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요소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해석한다. 그래서 우리의 지각에만 놓여있지 않은 ‘기억’이 매체를 통해, 그리고 매체에 어떻게 놓여있는지 확인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사물성과 이질성, 미디어아트의 분더캄머

강수미  미학, 동덕여대 교수

기억은 당신의 내부 어딘가만이 아니라 사물/사태에도 저장돼 있다. 당신이 이전에 갔던 어느 장소를 다시 찾았을 때 문득 생각나는   ‘잊고 있던 장면’이나, 만졌던 어떤 물건을 발견했을 때 떠오르는 ‘옛일의 잔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장소나 물건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신이 지나간 흔적이, 당신이 매만졌던 자국이 그것들에 담겨 있다는 뜻이다. 바르부르크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라는 이름 아래 수천의 이미지를 수집했을 때, 벤야민이 기억을 ‘지나간 것을 알아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체험된 것의 매체’라고 정의할 때, 그 기본적 인식은 인간 중심이 아니라 사물/사태들의 관계 속에서 기억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논할 미디어아티스트 뮌(Mioon)의 작업을 통해 말하자면, 아티스트인 당신이 몇 년 전 참가했던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작업실 어딘가에 당신의 행위로 남은 흔적이 지금도 있을 것이다. 또 크리스마스 때 트리를 장식했던 붉은 구슬장식은 당신의 손톱에 긁힌 자국을 아직 간직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듯 물리적 차원에서 물질의 몸체에 저장된 기억은 종종, 인간의 머릿속이나 마음에 떠오르는 추상적 기억보다 훨씬 구체적인 지각과 감정 상태로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일종의 미디어이다. 생리학적 의미로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우리 내면의 기억과는 달리, 그것들은 생생한 물리적 현존으로 그와 연관된 이들의 느낌, 정서, 의식을 깨우고, 불러  모으고, 여기서 저기로 전달하는 것이다. 예컨대 물질의 기억은 과거의 어떤 사건을 현재 공간이나 사물의 흔적 또는 자국으로 제시함으로써 선형적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그리움이나 회한을 일으킬 수 있다. 혹은 그 사건에 대한 경험을 상기시키면서 그때의 감각이나 판단을 재생산하고 나아가 새롭게 조직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는 지나가버렸지만 그 장소나 물건이 지금 여기 여전히 존재하는 한. 이런 맥락에서, 물질을 기반으로 시각적인 동시에 촉각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는 미술만큼 기억의 미디어로서 효과적인 것도 드물다. 사물의 현존을 즉자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설치미술과 기술공학적으로 시공간의 질서를 조작할 수 있는 미디어아트, 그리고 그 둘의 결합 형태 전시라면 특히 그렇다.

 스테인리스 스틸 전구 픽셀글라스 180×100×40cm 2014

<Character(Point, Line, Plane)> 스테인리스 스틸 전구 픽셀글라스 180×100×40cm 2014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열린 뮌의 개인전 <기억극장>이 미술관 관람객 개개인의 내밀한 미적 경험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다수의 공감을 얻는 조건도 이와 관련해 볼 수 있다. 핵심만 먼저 말하자면, 뮌의 <기억극장전>은 기억을 공간과 사물의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형상화하고, 그 차원에서 감상자와 전시작품이 상호 매개될 통로를 구축했다(도록 글 가운데 이 전시는 “보통 ‘기억’에서 요청하는 서사나 이미지들을 찾기란 힘들다”고 단언한 김남수의 관점은 인간중심적 사고 범주에서 기억을 규정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덕분에 사적으로 전유하면서도 타인들이 함께 공유하는 감각 지각의 장(場)을 생성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안 어느 구석에나 방치돼 있는 유행 지난 장식품이나 장난감,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찍었으나 오래된 앨범 안쪽에 묻혀있고 컴퓨터 파일 중 하나로 축소된 사진들, 분명 이유가 있어 거기 그렇게 놔뒀는데 까맣게 잊고 지낸 비닐봉지 속 정체 모를 물체들. 이것들은 나만의 것이지만 또한 누구나의 삶에 엇비슷한 경험과 기억의 대상으로 잔존하는 사물들이다. 뮌은 그처럼 일시적 경험의 때가 묻어있고 다종다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삶의 잔재들을 아상블라주해서 빛과 그림자의 유희로 가득 찬 캐비닛(<오디토리엄(Template A- Z)>)을 만들었다. 또 그 잔재들로 유년의 추억과 청장년의 회한이 얽힌 크리스마스트리 형태의 구경꾼상자(<오프 스테이지>), 전시장 귀퉁이 전기 콘센트에 연결된 채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고 다만 알 수 없는 말소리만 흘려보내는 흰색 봉지(<독자의 극장>) 작품을 제시했다. 폭 7미터, 높이 3.2미터의 거대한 크기의 설치작품 <오디토리엄>은 마치 르네상스 시기 백과사전적 수집을 통해 탐욕스러운 호기심을 충족시켰던 이들의 분더캄머(Wunderkammer)처럼 미술관 관람객 주위를 감싸고 돌며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우리가 잘 모르는 다섯 가족의 기억을 장식 형태로 매달고 있는 <오프 스테이지>는, 마치 19세기 카이저파노라마를 보듯이, 의자에 앉아 사각형 상자를 통해 그 안을 들여다보는 구조로 관객 개인과 익명의 가정사를 내밀하게 연결시킨다. 그리고 작가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레지던시 경험에서 연유한 <독자의 극장>은 작은 비닐봉지 속의 소형녹음기가 이방의 언어(네덜란드와 아프리카의 혼혈어)를 전시장 저층부로 흘려보내며 마치 무의식에 억압된 기억의 소음처럼 감상자의 신경을 두드린다. <커튼 콜>은 또 어떤가? 미술관의 건축구조를 살려, 10미터 길이의 통로 형태 허공에 설치한 세 겹의 붉은색 커튼들이 열리고 닫히며 언뜻언뜻 인형의 깜빡이는 눈을 보여주는 영상설치작품. 그것은 어렸을 때 내가 인형을 좋아라 가지고 놀다 문득 이유 없이 느낀 무서움, 그 기이한 체험의 순간을 다 커버린 내 머릿속에 반복 상연시킨다. 커튼의 개폐처럼 의식 위로 드러냈다 감췄다 하면서.
뮌의 <기억극장전>이 이상과 같은 리뷰를 가능하게 하는 지점은 각 전시작이 단지 공허한 조형적 오브제로만 놓여있지 않아서고, 예술적 개념이나 서사만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서다. 작품들은 앞서 썼듯이 개인적 기억의 환기와 유사한 경험을 가진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물질적 조건을 갖췄으되, 심미적 대상으로서의 기능을 넘어 작용한다. 또 역으로 작가가 기억을 집단의 상황극이나 가정 내의 대소사로 정의하는 데서부터 사적-집단적 경험이 교환되는 방식 등을 건드리는 데까지 작품 외적 텍스트를 효과적으로 설정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은 작품의 물질적 현존을 짓누르지 않는다. 그 점에서 뮌의 최근 작업은 잡다한 물질과 하이-로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감각 지각적 의미를 가진 사물이자 보고 만질 수 있는 질료를 가진 의미로서 미디어아트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테인리스 스틸 나무 조명 장식품 280×460×460cm 2014

<오프 스테이지(Off Stage(Making Ornament))> 스테인리스 스틸 나무 조명 장식품 280×460×460cm 2014

이질성의 미디어아트로
그런데 뮌, 이제야 밝히지만 김민선과 최문선 두 사람으로 이뤄진 이 작가그룹의 미디어아트에서 물질 및 물리적 기술이 처음부터 이와 같이 쓰였던 것은 아니다. 뮌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2006년부터 꾸준히 미디어기술과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설치미술을 국내 미술계에 선보여왔다. 아마도 많은 이가 흰 깃털을 이어 붙여 만든 스크린 위에 이집트 피라미드나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전경이 투사되는 작품 <관광객 프로젝트>(2003)를 뮌의 대표작으로 기억할 것이다. 또 박수치며 환호하는 사람들 이미지를 400개의 홀로그램 판에 담아 원형극장 형태로 구축한 <홀로오디언스(Holoaudi-ence)>(2005)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감상자도 꽤 될 것이다. 이렇게 예로 든 뮌의 이전 작품들은 글로벌리즘의 관광산업에 대한 비판적 접근, 무대와 객석이라는 이원구조를 뒤집어 봄으로써 주체와 타자 관계에 대한 재고를 주제로 삼은 것들이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와는 별도로, 사실 감상자 입장에서는 작품의 설치 효과 및 장치로서의 기계적 작동에 더 매혹되고, 더 감탄하게 됐던 미디어아트다. 그러니까 이때 뮌의 작품들은 작가 입장에서 일종의 메시지나 발언을 비중 있게 다루고자 했더라도, 수용자는 작품의 스펙터클과 표피적 자극에 매혹(현혹)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양상은 2009년 작인 <우연한 규칙>에까지 이어진다. 인터랙션 영상으로 제작된 이 작품에서 주식시장의 데이터 변화에 실시간 반응하는 전자나무 숲은, 뮌이 의도한 바와 달리, 감상자에게 자본주의의 역학을 뒤돌아보는 인식적 장보다는 보라색과 푸른색으로 명멸하는 가상현실이미지에 눈부셔하는 체험의 순간을 주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일정한 가치를 갖는 미디어아트다. 하지만 자신의 사고와 감각을 작품의 물리적 현존에 삼투하고자 하는 작가들만큼이나, 감상자 또한 작품의 표면 혹은 순간적 효과에 맹목적으로 이끌리는 구경꾼 역을 벗어나 감성과 판단력을 가진 능동적 경험자로서 작품과 관계하고 싶어 한다. 뮌의 이전 작품들의 가치에 한계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같은 감상자 주체의 욕구다. 그런데 이번 뮌의 전시에서 가령 나나 당신은 이미 써진 글 위에 새로운 글을 겹쳐 쓰는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처럼, 다르면서도 엇비슷하고, 공약불가능하면서도 상호 매개되는 무엇을 개시하고 중층화할 수 있다. 거기서는 작가의 창작시간과 감상자의 향유시간이 물질을 매개로 겹쳐지고, 이미지기억의 작용공간과 심미적 주체의 피드백공간이 모터처럼 사소한 공학 장치에 힘입어서라도 확장된다. 뮌이 <기억극장> 이후 어떤 행보를 보일지 알 수 없지만, 일단 감상자가 전시를 관통해서 그와 같은 개시, 중층화, 확장을 실행했다면 뮌의 미디어아트에 이질성이 도입된 것이다. 이질성은 16세기 분더캄머, 즉 경이의 방을 축성한 가장 중요한 비가시적 힘이었다. 뮌의 미디어아트가 감상자의 이질성을 물질 아래서, 장치 너머에서,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동일시라는 제한 바깥에서 적극화할 이유가 그와 연결된다.●

<오디토리엄(Auditorium (Template A-Z))(부분, 후면) 캐비닛, 오브제, 조명, 모터 700×500×320cm 2014

<오디토리엄(Auditorium (Template A-Z))(부분, 후면) 캐비닛, 오브제, 조명, 모터 700×500×320cm 2014

 

[Exhibition Focus] 정연두 전

정연두의 작품세계-‘가볍거나 무거운’일상의 리얼리즘

입체와 평면, 가상과 실재의 관계를 다루는 작가 정연두의 개인전이 3월 13일부터 6월 8일까지 플라토에서 열린다.
지난10여 년간 선보였던 작가의 대표작 일부와 신작 〈크레용팝 스페셜〉을 선보인다. 작가중심에서 벗어나 대상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그의 시선은 주체와 대상을 전복시킨다. 작가와 피사체 그리고 관객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전영백 홍익대 교수

jung2ok플라토에 열리는 정연두의 <무겁거나 혹은 가볍거나>전은 도심 한 가운데에 청량제 역할을 하는 듯하다. 밝고, 즐겁고, 따듯하다. 그리고 가벼운 느낌도 든다. 전시된 작업이 대중 유행가를 다룬 동영상이거나, 일상생활의 장면을 포착한 사진이어서 그런가 보다. 아니면, 인터랙티브 매체안경을 활용해 이 미술관의 상징인 로댕의 무거운 <지옥의 문>을 가볍게 눈앞으로 당겨오기 때문일 수도. 죽음처럼 검은 지옥의 나락에서 뒤엉킨 신체들은 순식간에 생생하고 육감적인 누드의 군상이 되어 시각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작가 스스로 ‘사진 조각’이라 부른 신작 <베르길리우스의 통로> (2014)는 정연두의 사진미학이 가진 핵심을 함축한다. 조각을 전공한 사진작가라서일까. 입체와 평면을 넘나드는 시각이다.
결과적인 이미지는 하나의 사진작품이나, 그 배후에 피사체(인물)와의 소통을 위한 수많은 시간과 엄청난 수공(手功)의 노력이 있다. 로댕이 표현한 단테의 지옥은 정연두의 <베르길리우스의 통로>에서 연옥으로 끌어올려진 것인가. 관람자 개인별로 보는 가상공간에서 청동의 지옥에 갇혔던 인간들이 표면으로 부상하며 소생하는 듯하다. 이를 위해 작가는 수개월 동안의 <지옥의 문>에 관한 연구에 기반을 둔 모델들의 포즈를 수백 번 촬영, 이를 합성하는 복잡한 작업 과정을 거쳤다. 다수의 드로잉이 그 포즈의 형태적 탐구를 보여준다. 사진이 가진 순간의 포착과 가시적 표면이라는 특징과 대비되는 오랜 시간의 발품과 집요한 관찰, 그리고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엿볼 수 있다.
작가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꿈을 이뤄주는 비현실적 사진으로 그 이름을 알려왔다. 2000년대 초의 <내 사랑 지니>(2001~), <원더랜드>(2003) 등이 그의 대표작인데, 인물의 꿈을 사진으로나마 실현시켜주는 이러한 작업의 시초가 된 초기작 <영웅>(1998)이 이번 전시에 걸렸다. 이러한 작업은 그 내러티브를 사진이 찍히는 대상 (인물)의 입장에서 만들고, 그(녀)의 소망을 작업의 내용으로 삼는 것이 특징이다. 작가가 모든 것을 주관하는 작가중심에서 벗어나려는 점과 대상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던 미학에 이보다 적합한 사진을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한마디로, 어깨에 힘을 뺀 작업이다. 정연두의 작업이 관객 다수의 사랑을 받는 건 당연하다싶다. 내용과 주제 면에서 누구나 쉽게 동감할 수 있는 건, 작가 스스로 피사체가 되는 인물의 입장, 시각, 그리고 욕망과 동일시하고 눈높이를 맞춰서이다. 맞춤 시각이다. 누구나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안달인 거다. 더구나 ‘작가’란 존재는 보통사람보다 그 정도가 심하고, 스토리텔링에 능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정연두의 작업은 ‘들어주는 작가’라는 발상의 전환을 거쳤다. 그의 사진처럼 대상과의 동일시에 충실한 ‘착한’ 작업이 또 있을까 싶다.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순순히 보여준다. 인물이 원하는 대로 꾸미고 구체적으로 실현시켜준다. 대상과 주체(작가)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점에서 정연두를 따를 작가는 없을 것이다. 미술의 근본 메커니즘이 이러한 대상과의 동일시에 있다고 볼 때 그는 훌륭한 ‘작업 태도’를 지녔다. 이 태도가 중요한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전시의 화제작인 <크레용팝 스페셜〉도 이러한 태도의 결실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반짝이가 ‘촌티 나게’ 화려한 파란색 커튼을 열고 들어가면 마주치는 동영상과 설치작이다. 이 작업의 주인공은 걸그룹 크레용팝이 아니라, 이들을 의리있게 응원해온 아저씨 팬(‘팝저씨’)들이다. 작가는 지난해 10월부터 5개월간 카톡방을 통해 이들과 소통했고, 급기야 이들을 미술관을 무대로 한 영상 퍼포먼스에 등장시켰다. 50여 명 팝저씨의 우렁찬 ‘떼창’을 찍은 영상, 크레‘용’팝을 의식하고 만든 반짝이는 ‘용’과 현란한 조명의 빈 무대가 마련돼 있다. 그리고 팝저씨들이 헌정한 이름표와 배지들이 부착된 트레이닝복을 수건처럼 말아 크레용 셋트처럼 정렬시켜 벽에 붙인 설치 등 이들의 지극정성이 감동이다. 부성애가 전우애로 맺어져, 엉성하지만 자연발생적으로 뿜어내는 이 중년의 막무가내 열성은, 이들이 초지일관 응원해온 그룹이 처음에 거리를 전전한 무명의 ‘B’급 그룹이었던 점에서 누구에게나 공감대를 형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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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와 대상 사이 시선의 메카니즘

이렇듯 집단성과 사회 동질성을 다루는 작가의 관심이 일찍이 일상 삶의 공간을 관찰하여 제시된 작업이 <상록타워>(2001)이다. 서울 광장동 임대아파트 상록타워의 32가구를 찍은 사진연작인데, 소위 남에게 보이고 싶은 이상적인 가정의 이미지를 전형적으로 포착해 보여준 작업이다. 이 역시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사진의 대상(인물들)이 가진 집단의식과 사회적 고정관념을 드러냈다. 한국 사회 중산층이 생각할 수 있는 ‘이상적 가정’의 전형은 그들이 사는 동일한 규모와 구조의 공간만큼이나 유사해 보인다. 획일적 아파트의 사각형 틀 속에 한껏 과시하는 가정의 행복은 그래봤자 별반 차이가 없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가족의 모습은 판에 박힌 듯 행복을 연출한다. 높은 산 정상에 올라 까마득히 내려다볼 때 밀려오는 인간적 연민이 느껴지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자세히 볼수록 집단의 획일성을 뚫고 각 가정의 개별성이 차츰 드러난다. 정연두가 다수를 다루면서도 개별적이라 보는 이유이다.
요컨대 작가가 주목하는 가장 중요한 모티프는 주체와 대상의 시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시선은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리얼리즘을 담고 있다. 때로 보는 이를 마비시키듯 차갑고, 상품시장의 물건처럼 대상화하고, 또는 상대를 무장시키거나 가면을 씌운다. 그의 초기작 <도쿄 브랜드 시티>(2002)는 명품 숍에서 일하는 점원들의 모습을 현장에서 촬영한 10점의 사진연작이다. 상품시장에서 작동하는 시선의 메커니즘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것이 유발하는 조소, 위선, 긴장 등의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노출시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소비문화로 가득 찬 대도시 공간을 사는 우리의 일상생활은 그것이 다른 문화와 교차될 때 더욱 힘겨워진다. 그의 연속 사진작업 <여섯 지점(Six Points)>(2010)은 이러한 다문화 대도시에 사는 현대인의 삶을 빗대어 뉴욕의 여섯 구역에 사는 다양한 민족별 소수자의 대형 파노라마 영상을 보여준다. 커다란 스케일로 연속장면에 펼쳐진 도시 공간 속 개인들의 모습은 강한 명암의 대조로 인해 더욱 고립적으로 보인다. 밝은 햇빛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인물들은 개별적으로 도드라지고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는 시선은 하나의 시점으로 집결된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여 길게 늘이는 영상기법으로, 익숙한 도시의 거리를 낯설게 만든다.
이 주체(작가)의 시선을 동일시하면서 우리는 지극히 평범하나 제각기 힘겹게 살아가는 개인 존재의 중요성을 설득당한다. 그들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글로벌 시대의 다문화주의가 가진 불통과 소외, 그리고 그 세계를 살아가는 개인의 고독감을 지극히 실제적으로 표현하였다. 여기에, 독백하듯 들리는 남저음 내레이션에 이민자들의 애환을 곁들인다. 이 작업에서 보는 리얼리즘은 수많은 인물이 드리운 그림자처럼 명확하고 개인적이다. 낯선 풍경 속 인물들은 초현실적으로 정적이며 고독해 보인다. 여섯 군데의 다른 지역 속 인물들과 오브제들이 이음새 없이 연속된 하나의 세계는 작가가 각고의 노력을 들인 4년 동안의 결과물이다. 천천히 돌아가는 파노라마 영상은 밝은 스포트라이트로 조명한 거리의 장면을 미세한 간격으로 찍은 수백 장의 컷을 합성하여 구성한 장면인 것이다. 정연두 사진의 제작 과정은 놀랄 정도로 전문적이고 고도로 노동집약적이다. 작가는 때로 이미지의 연출, 미장센의 조작을 그대로 드러낸다. 실제의 장면이 편집되지 않은 채 노출되지만, 최종적인 사진의 가시적 결과는 기막히게 매끈하다. 그러고 보면, 이 작가의 궁극적 관심은 가상과 실재의 관계라 봐야 할 것이다. 그 관계가 만난 사진의 글로시한 표면이 경쾌하고 가볍다. 그러나 그 표면을 받치는 보이지 않는 덩어리의 중량감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정연두의 작업은 무겁거나 혹은 가볍다. ●

[Exhibition Topic] 이브 수스만 전

배명지 코리아나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리안갤러리 대구에서 열리는 <흰색 위에 흰색: 알고리즘적누와르>는 국내에 알려진 이브 수스만의 작업들과 명백한 간극을 보여준다. 영상의 출발점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 <흰색 위의 흰색>(1918)이다. <알카자르에서의 89초>와 <사비나 여인들의 약탈> 등이 과거 회화를 이미지의 차원에서 전유하면서 현재 시점에서 재맥락화하는 데 주목했다면, <흰색 위의 흰색: 알고리즘적 느와르>는 말레비치의 회화를 이미지-표상이 아닌 내적 의미작용의 차원에서 인용한다. 말레비치의 흰색 회화는 자연 대상을 초월한 순수한 ‘무(無)’로서 ‘유토피아’의 실재를 사각형 내에 응집한 것인데, 이브 수스만의 동명의 영상은 절대주의 회화가 추구하는 이러한 초월의 지대와 순수한 공간, 그리고 우주적 감성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절대주의자의 급진적 정신을 환기시키기 위해 이브 수스만과 루퍼스 코퍼레이션이 찾은 영화의 로케이션은 유토피아적 기획이 ‘러시아 혁명’의 실행으로 옮겨졌던 소비에트연합(러시아)이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의 거리, 풍경, 인물들은 2년여에 걸쳐 촬영되었고, 구 러시아의 오래된 건축과 도시 풍경은 기존 영화에서 수집된 3000개의 영상과 80개의 보이스, 150개의 음악 등과 함께 영화 <흰색 위의 흰색: 알고리즘적 느와르>를 구성하는 주된 소스로 사용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영상의 모든 재료가 ‘알고리즘’의 메커니즘에 따라 유기적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뜻밖의 행운과도 같은 기계 (serendipity machine)’ 라 명명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모든 영상과 보이스는 무작위적으로 결합되고 전시공간에서 실시간 편집된다.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각각 태그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랜덤으로 재생시키면서, 화면에 비치는 영상은 같은 장면과 사운드가 결코 반복되지 않는, 문자 그대로의 ‘네버 엔딩 스토리’를 재생시킨다. 따라서 영화 <흰색 위의 흰색: 알고리즘적 느와르>의 이야기는 기계에 의해 제어되고 관객에 의해 사후적으로 재구성된다. 볼 때마다 새로운 내러티브로 재구성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영화이면서 동시에 영화적 프레임 외부에 있다. 디터 메르쉬가 전자 코드와 상호작용을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의 매체론 신화의 토대로 지적했듯이, 여기서 모든 의사소통은 내러티브와 상징이 아니라 데이터의 변환에 의해 이루어진다.
eve3ok특히 영상 <흰색 위의 흰색>는 공상과학, 과학, 보이스(시), 철학, 미술사 등의 제(諸)학문적 전략을 작동시켜 상호텍스트적인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 영상은 공상과학 영화이기도, 고도의 심리극이나 정치극이기도, 한 편의 시적 영상이기도 하다. 또한 제학문적인 경계를 교차시키고 복잡하게 만듦으로써 연쇄적인 구문론을 제시할 뿐 아니라 하나의 결정된 메타포를 거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의미의 혼돈으로 향하게 한다. 모든 의미는 정착되지 않으며, 알고리즘의 변형에 의해 끊임없이 유보되고 지연된다.
영원히 이어지지만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 이브 수스만의 기이한 흑백 영화는 공상과학영화와 필름 누아르 사이에 놓여있다. 이 영화에서 제프 우드(Jeff Wood)가 분한 주인공 홀츠(Holz)는 지구물리학자로, 유정 시멘트 회사가 지배하는 City-A라는 메트로폴리스에 갇혀 있다. 미래 도시에 갇힌 홀츠를 향한 관찰과 감시로 영화는 이어지는 듯하지만, 무한히 이어지는 영상의 순환반복으로 인해 총체적 내러티브는 결코 파악될 수 없다. 외관상 관련 없어 보이는 대상들과 보이스는 서로 대비되면서도 미묘하게 연결되어 관객들을 영화적 환영에 빠져들게 한다. 또한 영화 전체를 감도는 어두운 색채와 흐릿하고 우울한 영상, 의혹에 잠긴 내러티브와 디스토피아적 감성은 필름 누아르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혼재된 공간과 시간
이브 수스만의 이 영화는 장 뤽 고다르의 영화《 알파빌(Alphaville)》(1965)에 대한 오마쥬와도 같다. 고다르 영화에서 알파빌은 이브 수스만 영화에서의 City-A와 유비적이다. 이곳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추구한 미래의 유토피아를 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황량한 폐허가 의미화하는 디스토피아를 현실에 투사한 곳이다. 이브 수스만과 루퍼스 코퍼레이션이 촬영한 유토피아를 향한 건축들이 21세기 폐허의 잔상으로 각인되는 것은 역설적이다.
사이먼 리(Simon Lee)가 영화 제작기간에 촬영한 사진작품들은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감성을 전달한다. 사진 <카루셀>과 <파일론> 등이 보여주는 해질녘의 잔광, 버려진 회전목마와 송전탑, 비에 젖은 음습한 풍경은 어두움과 슬픔, 공포감을 전달한다. 이곳은 발전과 진보 세계관에 역행하는 무질서와 퇴보를 지향하는 엔트로피적 공간으로 읽힌다. 이브 수스만의 영상과 사이먼 리의 사진은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내세운 진보의 목표인 유토피아가 결국 허구의 세계임을 재단하는 듯 보인다. 발터 벤야민이 폐허를 언젠가는 붕괴될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로 주목했듯이, 사진 속의 공간은 영원함에 반하는 일시성과 공허, 단절, 불안의 요소들을 담아내고 있다.
영원히 현존할 것 같은 소비에트 건축의 잃어버린 유토피아는 이브 수스만과 사이먼 리가 공동으로 제작한 시적 영상들에서 재생된다. <Seitenflugel(Side Wing)>, <겨울정원(Wintergarden)>, <미래와 과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How to tell the Future from the Past)> 등은 모두 기하학적 형태의 특정 프레임-창문을 통해 보여진 일상의 풍경들을 제시한다. 사진과 영상의 경계에서, 정지된 듯 서서히 진행되는 영상 <Seitenflugel(Side Wing)>에서 창문 너머의 풍경은 익숙한 일상의 파편들이다. 관음증적 시선으로 바라본 일상의 풍경들은 그러나 실재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연출된 장면이다. 그러나 밖에서 훔쳐보는 듯한 ‘거리두기’의 시선은 내부 일상 풍경의 섬세한 알레고리를 모두 꿰뚫지 못한다.
3채널 비디오 영상 <겨울정원>에서 반복되는 기하학적 형태의 질서정연한 건축-창문 구조는 모더니즘 건축가가 꿈꾸었던 근대적 질서의 구현체이다. 이는 영화 <흰색 위의 흰색>에서 발견되는 20세기 중반 모더니스트들이 고안한 건축 형태의 동어반복이기도 하다. 1960년대 지어진 콘크리트 아파트 블록의 동일한 발코니를 보여주는 영상에서 발코니는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그 모습이 변한다. 동일한 구조 속에 여러 개의 다른 발코니 형상을 담아내는 것이다. 반복성과 동일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건축의 정치적 메타포는 소거되고, 대신 서서히 변화하는 영상의 시적 정취가 획득된다. 흔들리는 자동차 창문 너머의 풍경을 포착한 <미래와 과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는 시간성이 혼재한 가운데 속도가 부여된 흔들리는 영상 이미지를 제시한다. 이러한 영상 이미지들에서 의미작용을 하는 두 가지 지점은 건축적 ‘공간’과 ‘시간’이다. 공간이 가지는 정치성과 내러티브는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시간성에 의해 희미해진다. 이브 수스만의 영상에 내포된 느린 시간은 서서히 변화하는 모습을 짚어낼 뿐 아니라, 시간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여 오랜 세월 그 건축에 깃든 삶의 겹들을, 기억들을 사유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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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 Theme] 2014 이응노미술관 신소장품전

대전으로 돌아온 이응노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이응노미술관에 기증된 고암의 작품 500여 점이 공개되는 전시가 대전 이응노미술관(2.25~6.1)에서 열린다. 고암의 회화, 조각, 판화 및 판화 원판과 유품 등이 공개되는 이번 전시는 그 동안 미공개되었던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세계와 행적을 4개 섹션으로 나눠 살펴본다.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드라마틱한 생을 살았던 고암의 작품세계를 들여다 본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이응노미술관에 다녀왔다. 대전에 간다고 하니 성심당의 튀김소보로와 부추빵을 사먹어야 한단다. KTX 대전역사(驛舍)에서 요행히 성심당를 발견하고 줄을 서서 빵을 사고 택시를 타고 이응노미술관에 도착. 개막식에 맞추어 마침 박인경 여사가 한국에 와 계셨다. 그녀와 환담을 나누며 튀김소보로를 함께 먹는 순간. 그 순간이 이상하게도 내게는 거의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특별하게 다가왔다. 참 오랜 세대 차이가 나서, 내 머릿 속에는 이미 역사 속의 인물들로 자리매김되어 있는 이응노와 박인경 부부. 그중 한 분은 이미 1989년. 20세기의 질곡 많은 세계사의 한 단락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생을 마감하셨지만, 박인경 여사는 2014년 2월 바로 나의 앞자리에 앉아 1956년 개점한 성심당의 튀김소보로를 맛있게 잡수신다. 내가 그들 인생의 끝자락 어딘가에 잠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만으로, 마치 나도 역사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그저 소보로빵을 함께 먹는 장면이지만.
lee2ok어떤 예술가도 시대를 떠나 존재할 리 없다. 하지만 나는 왠지 이응노 작가를 생각하면, 특히나 한국의 역사가 그의 생애에 고스란히 겹쳐져 떠오른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해 충청도 홍성에서 태어나 1910년 경술국치 때 숙부가 조상의 묘 앞에서 자결했던 사건을 평생 기억하며 살았다. 김좌진과 유관순의 고향이기도 한 홍성 터에서 3·1운동을 경험했고, 20의 나이에 무작정 상경, 김규진 문하에서 열심히 대나무를 그렸다. 간판업을 해서 가세를 세우고 돈을 번 후에는 1935년 일본으로 유학 가 일본 남화와 서양화를 두루 공부했다. (일본에서 돈이 떨어졌을 때는 요미우리 신문배달소를 차려 친척들을 채용하고 그들의 유학까지 지원했다. 엄청나게 강인한 생활력을 소유한 가부장 시대의 남자.)
2차대전 종전 직전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아들을 잃었고(그는 후에 북으로 가서 살아있는 것으로 판명 났지만), 1949년경 박인경 여사를 만나 함께 한국에서의 피난생활을 거친 후 1958년 유럽으로 건너갔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며 심지어 1964년에는 동양미술을 프랑스인에게 가르치는 학교도 세웠다. 그러던 중 1967년 거의 10여 년 만에 고국을 찾았으나 냉전시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어 고국 땅을 밟자마자 감옥으로 끌려갔다. 이른바 동베를린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 대전교도소, 안양교도소를 거쳐 2년 반 만에 석방됐다. 출옥 후 고향 근처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 암각화를 남기고 홀연히 프랑스로 돌아가 더욱 완숙한 예술작업을 펼쳤다. 한국에서도 작품 전시를 이어가던 중 다시 1977년,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미수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면서 국내 작품 반입이 전면 금지된다. 이 사건의 정확한 경위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1979년 박정희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던 시기, 그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프랑스에서 뉴스를 접하며 대작 <군중> 연작을 탄생시켰다. 1983년 프랑스 국적을 택한 후 1987년에는 평양에 가서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1980년대 말 소련이 개방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려는 시기, 전 세계적인 화해 무드 속에서 1989년 1월 1일 서울에서 대규모의 이응노 회고전이 개막했다. 그러나 열흘 후, 그러니까 1989년 1월 10일, 그는 파리에서 돌연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이응노의 시신은 1871년 파리코뮌이 최후까지 저항하다 총살된 페르 라세즈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20세기 ‘극단의 시대’를 온몸으로 체험했던 한 예술가의 생애를 어찌 이 좁은 지면에 다 담아낼 수 있으랴.
이응노미술관 신소장품전 개막식 인사말에서 박인경 여사는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단 한마디로 압축했다. “이응노 선생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가셨습니다.”

형식, 주제, 소재, 그 무엇 하나 거칠것 없는
lee5ok그는 참으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신 것 같다. 85년간의 그의 생애가 그러할 뿐 아니라 그의 작품이 또한 작가의 드넓은 스펙트럼을 증명한다. 이응노는 주로 한국화를 제작했다고 할 수 있으나, 서예, 조각, 판화, 도자기, 태피스트리 등 갖가지 장르를 두루 넘나들었으며, 일본 유학기에는 서양화도 배웠고, 프랑스에서 10미터 높이의 공공 조각도 만들었다. 그는 한지에 먹을 주로 활용했지만, 다 쓴 신문지나 폐지, 나무, 돌, 천, 밥풀, 노끈, 부채, 달걀껍데기, 흙, 벼루 뚜껑, 바위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모든 재료들을 작품에 끌어들였다. 그러한 재료들로 그는 사군자도 치고, 소와 닭과 양, 산과 강과 마을도 그리고, 상형문자와 같은 추상의 세계를 드러내는가 하면, 무엇보다 사람, 사람들을 만들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다작의 작가로 쉴 새 없이 손발을 움직였던 그는, 언제나 그리고 긋고 찢고 베고 긁고 짜고 붙이고 짓이기고 지지고 뿌리고 두드리고 굽고 새겼다. 그러니 한마디로 ,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신 것이다!
그토록 다채로운 이응노의 행적을 모두 드러내 보이기에는 어떠한 미술관도 작아 보일 것이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자그마하게 설계하여 큰 욕심을 부리지 않은 이응노미술관의 건축 설계가 역설적으로 적절했는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인 건축가 로랑 보두엥(Laurent Beaudouin)은 미술관 입구의 소나무에서부터 중정의 마구 자란 풀, 후원의 대나무에 이르기까지, 우연을 가장한 채 관람자들이 이 풍경들을 자연스럽게 마주치도록 설계했다. 전시장 공간의 형태가 조금씩 달라보이게 한 것도, 건축 재료가 조금씩 다르게 끼어드는 것도, 이응노 작품의 다양성을 지극히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장치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응노미술관은 갈 때마다 볼 때마다 공간도 작품도 달라 보인다.
이번 전시가 특히나 의미 있는 것은 2007년 미술관 개관 이래 두 번째의 대규모 소장품 전시라는 점이다. 2013년 초에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주로 박인경 여사를 통해 기증된 533점의 작품을 정리하고 전시했으며 큰 도록도 함께 출간했다. 올해는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비슷한 경로로 수집된 697점의 작품을 대부분 전시했다. 다 걸 수 없는 작품들은 영상실에서 이미지로나마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응노미술관에서는 이제 총 1230점에 달하는 소장품과 많은 아카이브를 체계적으로 정리·관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 방법을 고민하는 학술 심포지엄도 함께 열었다.
지난해 전시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서예, 동물화, 사군자, 추상, 판화 원판 등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무래도 옥중화(獄中畵)일 것이다. 이응노의 출옥 장면을 담은 그 흑백사진 속에서 한쪽 팔에 끼어 있던 뭉툭한 꾸러미. 바로 그 꾸러미에 들어있던 그림들이 이제야 빛을 보게 된 것인가. 거의 반추상화되어 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형상들이 화면 위를 부유한다. 차마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은 작품들…. 어찌 보면 마치 분노와 환희가 공존하는 것 같다.
개막식에서 박인경 여사의 인사말은 간결했다.
“이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에는 온통 ‘대전’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그 대전에 이렇게 작품이 와서 걸렸습니다.”
이응노는 작품 옆에 ‘대전교도소에서’라는 말 대신 그저 ‘대전에서’라고만 써두었다. 교도소에서일망정 그래도 고향 근처 대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던 것일까? 그는 실제로 후에 “감옥은 나의 학교였다”고 말했다. 밥풀이 질긴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이도, 그것으로 장기 두는 말을 만들어 쓰던 옥중의 동료들이었으니까. 무엇이든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일상의 행위가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도 그는 감옥에서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 대전교도소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프랑스 파리를 거쳐 이제 다시 대전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은 그렇게 짧은 한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사건일 것이다.
박인경 여사의 짧은 인사말은 이렇게 끝났다. “이제는 여러분이 주인공입니다.” 그 많은 이응노의 작품을 프랑스에 남겨두지 않고 고국으로, 대전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들어오기 위해 여전히 그녀는 애쓰고 있다. 바로 주인공인 우리들을 위해! 전시 보러 대전에 한번 가보자. 2014년의 따사로운 봄날, 1956년 개점한 성심당의 튀김소보로와 부추빵도 사먹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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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조덕현 – THE GARDEN OF SOUNDS

조덕현 – THE GARDEN OF SOUNDS
아트클럽1563   3.7 – 5.17

조덕현의 <음(音)의 정원전>은 설치 형식으로 구현된 섬세한 벽화이자 음악을 위한 간이 무대이다. 음영과 음이 어우러진 공간은 실내에 조성된 정원이기도 하다. 13×4m 크기의 무대 안쪽 4.5m 너비 안에 놓여있는 갖가지 식물들은 밀폐된 하얀 무대 막 위에 다양한 실루엣을 드리운다. 하얀 막 위에 떨궈진 그림자는 마치 수묵화 같은 농담을 펼친다. 정적인 가운데 미세한 움직임이 감지되는 이 평화로운 풍경은 도시인의 눈을 어지럽히는 전광판 같은 형식이라는 점도 잊게 한다.
그의 작품은 수묵화뿐 아니라, 한옥의 하얀 문풍지에 비친 그림자, 그림자 연극, 수묵 애니메이션, 상감된 무늬, 압화, 흑백 사진–작품 <그림자들>(1986)의 작가 볼탕스키는 ‘그리스에서 그림자라는 말에는 빛을 가지고 적는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그림자는 최초의 사진이다’고 말한 바 있다–이나 느릿한 영상도 연상된다.
여기에 음악까지 곁들였으니 작품이 갖는 감각과 형식의 공감대는 무한한 확장성을 가진다. 전시장 한 벽면을 이루는 미니멀한 무대는 하얀 백지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들이는 내포적 다양성이 있다. 이 공감각적인 설치작업은 드뷔시와 윤이상의 현대음악을 위한 배경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기획과 구상 단계부터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대화의 산물이다. 작가가 윤이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의 짧고 무기력한 삶에 견줄 수 없는 자연의 커다란 언어에 바탕을 둔 그의 음악철학 때문이었다고 한다.
작품의 기조를 이루는 하얀 바탕에 검은 얼룩들은 통영에 있는 윤이상의 육필 악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단지 현대음악을 현대미술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양자 간의 상응이며 보다 깊은 시원에서의 조우이다. 벽 안에 배치된 각종 식물들은 그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로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지만, 거기에는 컬러사진보다 더 깊은 맛을 주는 흑백사진, 산문적 실제보다 더 운치 있는 시적 분위기가 있다.
자연과 인공 사이에 존재하는 소우주인 이 정원은 ‘살아있는 구조’(롬바흐)이다. 정원과 무대의 중첩은 이 고즈녁한 시공간이 무엇인가로 꿈틀거림을 예시한다. 그 자체로 벽면을 이루는 힘찬 구조는 동시에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에도 흔들리는 궤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민감한 표면이다. 이러한 장치는 실물의 모사가 아니라, 실물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것은 정원술 자체가 자연과 협력하여 만들어지는 예술임을 인식하게 한다. 자연은 선택된 것이지만, 주어진 한계 안에서 강요됨 없이 스스로를 펼치고 접는다.
거대한 막을 만들기 위해 필요했을 바느질 선은 인간을 위한 길이 되었다. 거기에는 인생이라는 여로 위의 군상이 있다. 막을 가로지르는 지평선 위의 작은 인간들은 스케일의 차이 때문에 풀 같은 작은 식물들을 거대한 숲으로 변모시킨다. 인간에게 공포를 줄 수도 있는 원초적이고 무질서한 숲이 아니라, 한가운데로 길이 열려있는 유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노동 없이 행복했던 낙원으로서의 정원이다.
이미지가 펼쳐지는 방식이 그림자라는 것은 그 자신은 소극적이면서도 타자들을 품는 넉넉한 자리임을 알려준다.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에서 재현의 기원으로 그림자가 거울보다 먼저였음을 밝힌 바 있다. 예술적 재현의 탄생은 음화(陰畵)에 있다는 저자는 시각영역에서 이 두(그림자와 거울) 이미지의 근본원리가 광학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다름을 강조한다. 스토이치타에 의하면 플리니우스가 묘사한 최초의 재현 행위에 드러나는 원시적 속성은 최초의 회화적 이미지가 인간 몸에 대한 직접적 관찰의 결과물이 아니라, 몸의 그림자를 잡아낸 재현물이라는 사실이다.
르네상스 이후 대세가 된 거울의 모델은 동일자를 정면에서 비추지만, 그림자는 타자를 측면에서 비춘다. 그것은 원형을 복제한 것 즉, 미메시스가 아니라, 닮아 보이는 것 만들기 즉, 시뮬라크라(simulacra)이다. 유한한 형식 속에 떠도는 허상이 메아리치는 무대는 대체의 마술이 펼쳐지는 시공간이 된다.
막에 비춰진 자연과 인간은 그것이 모두 덧없는 그림자라는 점에서 무한한 시공간에 찍힌 작은 점 같은 덧없음의 지표(index)이다. 자연이라는 무대 위에 잠시 출연했다가 사라지는 연극배우 같은 인생 말이다. 시간 속에서 생멸하는 소리(음악) 또한 덧없다. 그러나 이러한 덧없음은 생명의 본질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전시의 중요한 요소인 음악은 윤이상의 <두 개의 비올라를 위한 명상>이 연주(연주자 전진희)된 오프닝 공연을 필두로, 전시 기간 내내 이루어진 공연에 있다.
표본처럼 있는 식물조차 진동하는 무대는 음악처럼 시간의 흐름을 탄다. 무대는 다양한 시간적 형태들이 구성되는 장이다. 이 전체적 흐름 속에서 정지나 정적 또한 의미의 일부가 된다. 벽화가 그렇듯이 음악은 배경이 아니라, 살아있는 무대를 위한 필수 요소이다. 빅토르 주어칸들은《 소리와 상징》에서 사람들이 우주를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때는 우주의 운동이 아니라, 그들의 하모니 즉, 함께 소리 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지적한다. 빛과 색채, 소리, 냄새, 맛, 단단함, 유동성, 거칠고 부드러운 것, 뜨겁고 찬 것, 이들 모두가 무생물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 음은 오로지 살아있는 것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덕현의 작품에서 음은 전적으로 살아있는 생에 속하며, 미술만큼이나 세상을 내다볼 수 있게 한다. 

이선영・미술비평

[Review] 설원기 – 흑(黑).백(白)

설원기 – 흑(黑).백(白)
통인옥션갤러리 3.5 – 3.30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드로잉은 하나의 선으로 그린 그림이며, 데생은 여러 개의 선을 겹쳐서 그린 그림일 수 있다. 얼추 선으로 그린 그림과 음영으로 그린 그림으로 환원해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단박에 대상을 포획한 그림과 대상을 더듬어 찾아가는 그림의 경우를 비교해봐도 되겠다. 이처럼 드로잉은 적어도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머뭇거림 없이, 최소한 머뭇거린 흔적이 없이 사물대상을 단번에 포착해야 하는 까닭에 어렵다.
대개 드로잉이 페인팅에 비해 번잡하지가 않고 단출한 인상을 주는 것도, 적당히 심심하면서 꽉 찬 느낌을 주는 것도 알고 보면 이처럼 하나의 선으로 대상을 압축해 들인 형태 감각과 군더더기 없는 화면에 연유한다. 평소 사물을 관찰하면서 골격 내지 구조와 같은 형태적 특징을 캐치하는 과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평소 몸에 밴 과정이 밀어올린 드로잉은 한정된 화면에 대한 공간운영과 같은 작가의 감각 정도가 즉각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솔직한 그림이랄 수 있겠다. 감각에 관한 한, 가릴 데도 숨을 곳도 없는 그림이랄까.
설원기는 평소 페인팅과 함께 드로잉 작업을 한다. 페인팅이 작정하고 그린 그림이라면 드로잉은 그저 생활의 일부처럼, 일상의 기록처럼 부담이 없고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그림이다. 그래서 무슨 거창한 예술혼보다는 작가의 평소 인성이며 인격에, 생활감정이며 생활철학에 더 밀착된 그림이다.
소재도 산과 같은 스케일이 있는 그림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탁자 위에 놓인 화병과 같은 생활의 주변머리에서 취한 것들이어서 마치 작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듯 친근한 느낌이다.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기로 그린 그림이 주는 편안한 느낌이다. 여기로 그린 그림은 문법에 맞출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도 여기로 그린 그림만이 줄 수 있는 완성도가 있다. 아마도 드로잉이 독립된 장르로 인정받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그림은 작가의 말마따나 서재에 오랫동안 걸어 놓고 보아도 질리지 않을,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림이고, 없는 듯한 방심 속에 존재감을 숨겨놓은, 그런 그림이다. 흑과 백과 중간계조로 이루어진 그림이 삶의 계조를 닮았다고나 할까.
한지에 목탄으로, 한지에 먹으로, 때론 반투명한 폴리필름 위에 잉크로 그린 그림이 선과 면이 대비되고 흑과 백이 대비돼 보이는 목판화 같고, 선이 강조된 그림이란 점에서 전통적인 수묵화 같다. 그린 부분과 그리지 않은 부분의 안배가 안정감을 주면서 소소한 느낌이고, 부드러우면서 터실터실한 목탄 재질 특유의 질감이 감각적이고 우호적인 인상을 준다.
이처럼 목탄그림이 목탄과 한지가 일체를 이룬 물성을 강조하고 있다면, 폴리필름에 잉크로 그린 그림은 어떤 울림을 자아낸다. 폴리필름은 뒤가 막힌 반투명 재질이다. 그래서 그 위에 잉크로 그림을 그리면 잉크가 지나간 자국이 낱낱이 기록된다. 이렇게 기록된, 중첩된 잉크자국이 울림을 자아내는 것. 이렇게 작가의 그림은 생활의 주변머리를 기록하고 있었고, 일상이 자아내는 정서적 울림을 기록하고 있었다.

고충환・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