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역병의 해 일지

역병의 해 일지

아르코미술관 8.31~11.16

<역병의 해 일지전>은 2003년 봄 홍콩에 큰 영향을 미친 일련의 사건들인 사스(SARS・중증급성 호흡기 증후군)의 유행과 배우 장궈룽(張國榮)의 자살을 계기로 시작된 국제적 순회전시를 한국에 재구성한 것이다. 전염병과 죽음이 환기시키는 타자, 공포, 비가시성, 유령성 같은 키워드들에 대한 탐구를 지향하는 이 전시는 지금 국내에서 유행하는 여타 전시 및 프로젝트들과 나란히 놓인다. 이 전시를 개최한 아르코미술관에서 공연과 상영, 심포지엄을 병행하여 진행하고 있는 전통 재발견 프로젝트인 “Tradition (Un)realized,” 그리고 “귀신, 간첩, 할머니”라는 슬로건을 내건 <미디어시티서울 2014>를 떠올릴 수 있다. 이 모든 기획은 다음과 같은 공통분모를 갖는다. 아시아라는 지정학적 범주, 아시아 각국에서 진행되어 온 모더니티의 기획과 그 기획이 전통과 충돌하면서 만들어낸 타자들의 초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즘과 탈식민주의를 포괄하는 이데올로기들의 경합, 이러한 타자들과 이데올로기들을 반영하는 문화적 기호들과 미디어 실천들, 이 기호들과 실천들을 재발견하고 탐구하는 작품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각 국가의 로컬한 맥락 속에서 초국적의 매트랙스로 재배치하고자 하는 큐레이팅의 전략이다. <역병의 해 일지전>은 최근 국내 미술계가 다소 강박적으로 느껴질 만큼 집중 및 투자하고 있는 이러한 공통분모들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전시는 할 포스터(Hal Foster)가 말한 ‘아카이브적 충동(archival impulse)’에 따라 움직인다. 과거의 역사적 자료들과 정보를 망각되거나 잘못 자리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발견되는 동시에 재구성에 열려 있는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관람자의 다양한 인지적, 감각적 연상을 촉진하고자 하는 충동이 그것이다. 포스터는 기존의 역사적 자료들과 문화적 인공물들로 작업하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업 경향을 가리키기 위해 이 용어를 썼지만, 사실 이 용어는 예술작품뿐 아니라 자료 및 인공물 자체에 대한 조사와 전시를 동반하는 큐레이팅의 구성 방식에도 적용될 수 있다. <역병의 해 일지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시물들은 바로 과거 자료들의 조사와 재배치에 근거한다. 관동대지진, 731부대, 사스 등 우리에게 익숙한 동아시아 각국에서 벌어진 재난과 공포의 역사들이 다양한 사진자료와 신문기사, TV뉴스 리포트 영상을 통해 펼쳐진다. 황인종에 대한 제국주의적 응시가 투영된 푸 만추(Fu Manchu). 찰리 챈(Chalie Chan), 이소룡 등의 캐릭터들이 형형색색의 할리우드 영화 포스터들 속에서 오리엔탈리즘의 반복적 귀환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역병의 해 일지>는 이 다양한 자료들을 제국과 타자, 폭력과 공포를 탐구한 예술작품 및 이에 대한 기록(퍼포먼스에 대한 사진자료 또는 기록영상)과 나란히 배열한다. 이를 통해 이 전시는 지역적 특수성과 아시아적 보편성 호소하고자 하는 초국적, 비연대기적 아카이브가 되고자 한다.
역사적 자료들의 조사와 재배치에 비하면 전시의 또 다른 축인 예술작품들의 규모와 스펙트럼은 상대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앞서 거론한 황인종 영웅들의 포스터와 할리우드 영화의 동영상을 병치시킨   <중국인 탐정>(2012)으로 소개된 왕밍(Ming Wong)의 경우는 사실    <차이나타운>과 <화양연화> 등의 영화를 원작과는 다른 인종의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원작에 기입된 인종적 스트레오타입을 수행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리메이킹 영상작품’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에 속하는 작품들을 소개했다면 전시가 더욱 풍부하고 다채로웠을 것이다. 이 전시에서 충분한 규모로 탐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작가는 중국계 미국인인 제임스 T. 홍(James T. Hong)이다. 미국 내 멕시코인의 이미지를 세균과 개미로 은유한 작품, 홍콩에서 장궈룽의 유령적 현전을 전자온도계 영상으로 재해석한 작품, 센카쿠 열도와 독도의 역사를 2채널로 병치시킨 에세이적 작품 등에서 아시아의 역사와 지정학적 갈등, 서구에서의 비서구 인종의 왜곡된 정체성에 대한 작가의 일관된 시선을 만날 수 있다. 김지훈・중앙대학교 영화·미디어연구 교수

제임스 T.홍 <중국인의 기회(독도와 센가쿠)> 2채널 비디오 12분24초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