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 Martin Creed

위 Work No. 1086-Mothers> 백색네온 철 500×1250×20cm 2011 © the artist, Image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Photo: Hugo Glendinning 아래  2013 ⓒ the artist  Photo Linda Nylind

위 Work No. 1086-Mothers> 백색네온 철 500×1250×20cm 2011 © the artist, Image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Photo: Hugo Glendinning  아래 2013 ⓒ the artistPhoto Linda Nylind

“나는 예술이 무엇인지 모른다”

허위적이면서 현학적인 예술에 대한 논의는 마틴 크리드(Martin Creed, 1968~) 앞에선 부질없는 장광설일지도 모른다. 그의 개인전 <그것의 요점은 무엇인가?
(What is the Point of it?>(1.29~5.5)가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린다.
그의 작업세계는 다양하다는 말이 진부할 정도다. 시각과 청각, 강약의 변주, 미적 대상과 일상의 오브제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고정화한 예술에 대한 태도에 일침을 가한다. 다시, 그가 묻는다. “그래서! 예술이 뭔데?”

Martin Creed

지가은  골드스미스 대학 비주얼 컬처 박사과정

‘나는 예술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행위는 모두 창조적인 행위이다.’ 마틴 크리드(Martin Creed)가 한 말이다. 그가 이번에는 관객에게 도리어 ‘그것의 요점은 무엇인가?(What is the point of it?)’ 반문하며, 지난 30여 년간 자신의 예술 행보를 한자리에 모은 회고전으로 돌아왔다. 전시는 런던 템스 강변 사우스 뱅크(South Bank)에 자리한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에서 열렸다. 영국 내 크리드의 개인전으로는 가장 큰 규모로 치러진 이번 전시는 마틴 크리드의 대표적 작품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크리드 특유의 자기지시적인 유머와 풍자가 가득한 작품들이 한자리에서 빚어내는 다중감각적인 자극 그 자체로 흥미로운 연주가 되었다.
생활 밀착형 예술가, 크리드의 일상과 평범한 사물을 소재로 하는 단순하고 소박하며 다소 황당하고 허무한 작품들은 그의 예술성에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01년 크리드에게 영국 현대미술상인 터너상 수상의 영광을 가져다준 작품은 텅 빈 갤러리 안에서 5초 간격으로 불빛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작품번호 227: 점멸하는 불빛(The lights going on and off)>(2000)이었다. 이에 분노한 한 관객이 이 작품을 향해 계란을 집어던졌다는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아이디어를 특별한 미적 경험으로 바꾸는 크리드는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빅벤을 비롯한 영국 전역의 종탑들이 일제히 3분간 종을 울리며 스포츠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타종 행사 <작품번호 1197>을 기획해,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 중 한 사람으로서 그다운 재기발랄한 감각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올린 레고 타워, 크기 순서대로 쌓은 종이상자와 책상, 의자, 합판, 벽돌, 철빔 등 크기별, 면적별, 길이별로 쌓아 올려 만든 피라미드 형태의 작업들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반복적인 쌓기는 크리드가 1992년부터 꾸준하게 이어온 대표적인 작업 방식 중 하나이다. 벽면 전체를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페인팅과 설치작업도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 크리드의 작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손님이다. 1000개의 브로콜리에 각기 다른 색의 물감을 칠해 하나씩 찍어 그린 <브로콜리 프린트(Broccoli prints)>(2009~2010)와 계단 통로의 양쪽 벽면을 150개의 접착 테이프로 한 줄 한 줄 채워 완성한 <작품번호 1806>(2014)의 줄무늬가 대담한 색조 대비를 이루며 시각적 운율을 더한다.
점점 크게, 점점 작게, 상승과 하강, 강약중강약의 시각적 변주가 보여주는 반복의 코드는 전시장 곳곳에서 청각을 자극하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다. 음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피아노 연주, 웃음소리, 전시장 한켠에서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문과 커튼, 쾅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피아노 뚜껑. 이들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소리로 전시장은 쉴 틈 없이 분주하다. 테라스에 주차되어 있던 포드 자동차 <작품번호 1686>(2013)은 일제히 모든 문과 창문이 열리고, 보닛과 트렁크가 열리고, 와이퍼가 돌아가고 라이트가 켜지고 음악이 흘러나오며 경적을 울려대다가 이내 다시 얌전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시각과 청각으로 수용되는 반복적 리듬감이 크리드 전시 전체를 연주하는 음표가 된다.
전시의 모든 음악적 요소는 크리드의 밴드 뮤지션으로서의 삶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크리드는 1994년부터 밴드 음악 활동을 하며 정식 음반도 여러 장 발매했다. 미술과 음악에 경계를 두지 않는 그에게는 공연도 작품이다. 전시 제목 <그것의 요점은 무엇인가?>도 사실은 크리드의 노래 제목 중 하나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준비한 라이브 퍼포먼스 <작품번호 1815>와 <작품번호 1020>을 4월 8일 사우스 뱅크 내 클래식 공연장인 로열 페스티벌 홀(Royal Festival Hall)과 퀸 엘리자베스 홀(Queen Elizabeth Hall)에서 각각 선보이기도 했다.
작품, 세상의 일부 혹은 전부가 되다    
크리드의 작품이 늘 경쾌한 유머만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관객은 처음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머리 바로 높이 위에서 아찔하게 돌아가는 <작품번호 1092: 엄마들(Mothers)>(2011)의 압도적인 스케일과 맞닥뜨리게 된다. 2미터 높이, 12미터 길이의 ‘엄마들(Mothers)’ 네온사인은 가속도가 붙어 돌아갈수록 더욱 위협적이다. 가장 친밀한 존재이자 거대한 존재, 극복의 대상으로서의 ‘엄마’라는 메시지를 이보다 더 강렬하고 심플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움츠러든 머리를 숙이면 바닥에는 각기 다른 템포로 돌아가는 39개의 메트로놈(Metronomes)의 째깍째깍 소리가 심리적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전시의 하이라이트 격인 <작품번호 200: 주어진 공간을 반쯤 채운 공기(Half the air in a given space)>(1998)는 말 그대로 절반이 풍선으로 가득찬 방이다. 누군가에게는 풍선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유아적 유희에 한껏 취할 수 있는 재미있는 놀이터일 수도 있겠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폐쇄공포증을 유발하는 숨막히는 공포의 공간이 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이 풍선방에 입장하는 관객에게 호흡곤란 증세나 폐쇄공포증을 초래할 수 있는 만약의 사태에 유념하라는 경고문이 적힌 안내장을 나눠준다.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려면 마지막 전시실의 <구토와 대변(Sick and Shit)> 영상을 피할 수가 없다. 화이트 큐브 공간 안에서 사정없이 구토하는 사람과 쪼그리고 앉아서 힘겹게 대변을 보는 사람들을 찍은 장면을 인내심 있게 바라보는 일은 거북함과 동시에 묘한 쾌감이 뒤엉켜 역설적인 감정을 마주하게 한다. 크리드의 작품에는 이렇게 양가적 태도와 감정이 공존한다.
크리드가 ‘반복’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를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선배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는 것도 그리 놀랍지 않다. 무의미해보이는 행위의 반복과 변주, 그리고 익살 속에서 삶의 허무와 부조리, 인간 존재의 치열함과 불확실성을 탐구했던 베케트. ‘다시 시도하라, 실패하라 더 나은 실패를 하라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나는 예술이 도통 무엇인지 모르겠고 그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만드는 것에 열중할 뿐’이라고 말하는 크리드의 말과 닮았다.
거창한 준비와 작업 과정보다는 지금이라도 당장 방 안에서 손에 잡히는 재료들로 뚝딱뚝딱 만들었다가 금세 해체할 수 있는 것을 선호하고, 아이디어나 순간의 행위 그 자체, 소리, 빛과 같은 비물질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만드는 크리드 작품의 미술사적 원류는 사실 익숙한 것들이다. 뒤샹 이후 레디메이드 일상 용품들의 갤러리 출입은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고, 플럭서스 그룹의 조지 브레히트(George Brecht)가 점멸하는 자동차 라이트와 경적으로 연주 퍼포먼스를 시도한 바 있다. 쌓기와 긋기의 반복적인 구조와 표현은 미니멀리즘에서, 몸 밖으로 배출되는 체액, 신체성에 대한 실험은 빈 행동주의자들의 신체미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드의 예술이 여전히 유쾌한 울림을 주며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이유는 그의 네온작품 <작품번호 232: 온 세상+작품=온 세상(The Whole World+The Work=The Whole World)>(2000)이라는 방정식이 지시하는 크리드의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작품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세상의 일부이고, 세상의 전부라는 것. ●

(부분) 흰풍선 가변설치 20.5cm(풍선 지름) 1998  Courtesy Giardino dei Lauri © the artist, Image courtesy the artist

(부분) 흰풍선 가변설치 20.5cm(풍선 지름) 1998 Courtesy Giardino dei Lauri © the artist, Image courtesy the artist

· 2008 © the artist Installation view courtesy Ikon Gallery, Birmingham  photo: Stuart Whipps

· 2008 © the artist Installation view courtesy Ikon Gallery, Birmingham photo: Stuart Whipps

Martin Creed, Work no 299마틴 크리드는 1968년 영국 웨이크필드에서 태어났다. Slade School of Art at University College London을 졸업했다. 1987년부터 작품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글에 번호는 붙여 작품 타이틀로 사용했다. 2001년 <Work No. 227: The lights going on and off>로 터너프라이즈를 수상했다. 1994년 그의 밴드 오와다(Owada)는 첫 번째 앨범을 발매했으며 밴드 해체 후에도 음반을 발매하고 공연을 하는 등 꾸준히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Review]토탈리콜-기록하는 영화, 기억하는 미술관

토탈리콜  __  기록하는 영화, 기억하는 미술관
일민미술관 4.11-6.8

<토탈리콜전>은 미술관과 영화관이라는 장소의 맥락에 따라 보여주기의 제시와 수용에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지를 다룬다. 미술관과 영화관이라는 장소의 차이는 생산자(작가)에게는 형식의 가변성으로, 수용자(관객)에게는 감상의 자율성으로 요약된다. 이 차이를 좌우하는 것은 공간이라는 요소의 개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의 관건은 작품 배치와 설치에 있어 공간이라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식에 있다.
일단 블랙박스를 피하려고 한 미술관의 의도는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영상물로만 구성된 전시에서 공간의 분리는 이미지와 소리의 간섭을 피하는 손쉬운 방식이나, 영화관과 다른 종류의 지각 경험을 지향하는 기획 의도에 위배된다. 대신 주최 측은 공간을 터 작업 간의 간섭을 수용하되 이를 통제하는 쪽을 택했다. 이 경우 실질적 난점은 이미지보다 소리에 있다. 빛의 산란은 스크린의 방향을 달리함으로써 극복 가능하며, 시각의 인지 범위가 한정되어 있어서 타 작업의 존재가 감상에 실질적인 방해가 되지 않는다. 반면 소리의 중첩은 관람의 주요 방해물이다. 모든 작업에 헤드폰을 배치할 때 소리의 간섭은 사라지나 관람 가능한 관객의 수가 제한되고, 스피커를 선택하면 다수의 관객이 관람 가능하나 산란 효과가 극심하다. 미술관은 음향의 유무와 비중, 자막의 존재 여부에 따라 헤드폰과 스피커를 혼합 배치하는 방식으로 이 딜레마에 대응한 듯하다. 예를 들면 스피커와 헤드폰을 혼용한 <고진감래>(2014)를 음향이 없거나 헤드폰만 배치한 작업 사이에 배치해 소리의 충돌을 피하는 식이다. 하지만 대부분 음향이 있는 작업으로 구성된 2층의 경우 미술관 측의 고육지책에도 불구하고 소리의 방해가 현격해서 이 문제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고충임이 드러난다.
한편, 개별 작업을 공간 언어로 풀어내는 방식은 기획 의도를 구현하려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작품 배치에 비해 미흡한 감이 있다. 이 전시에 참여한 9팀 중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셋이나, 그중 상영이 아닌 설치라는 차이를 분명히 구현해낸 작가는 정윤석이 유일하다. 흰 벽 대신 나뭇결이 드러나는 거친 가벽에 투사된 영상은 흔들리는 화면 및 거친 숨소리와 함께 용산참사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육화해낸다. 영화계 기반의 작업 중에서 영사기, 스크린, 관객, 공간이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예는 이행준+홍철기다.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영사기 앞 아크릴판에 반사되어 산란되는 그림자는 빛이 만들어낸 환영이라는 매체의 근본 조건을 드러낸다. 같은 맥락에서 공간의 해석에 있어 의미 있는 시도는 단채널보다 다채널 설치다. 하지만 3채널 작업인 김소영의 경우 채널들의 이미지와 소리가 서로 조응하며 합을 이루기보다 연관된 작업 세 개가 병치된 쪽에 가까웠다. 양면 스크린을 활용한 배윤호의 작업 역시 양쪽 영상 간의 대조가 뚜렷하지 않고 음향의 차이도 모호해서 설치의 효과가 충분히 살아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상영 장소는 특정한 관례를 함축한 구축된 제도의 상징이다. 미술과 영화라는 별개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이 전시는 융복합 프로젝트가 부상하는 동시대미술의 추세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장르를 규정하는 규범에 대해 재고하는 자기성찰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문혜진・미술이론

[Review]이제-온기

이제  __  온기
갤러리 조선 3.12-4.18

회화는 그녀 자신이 거주하는 세계를 가장 간결하며 필연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방식이자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이다. 이 세계는 폐쇄적이며 섬처럼 독립되어 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고립된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 세계는 그녀 자신과 그 밖의 존재들, 사물들, 운동들의 총합이다. 그럼에도 회화는 세계를 간략하게 스케치하고 있다. 마치 세계의 표면을 가볍고 부드럽게 쓰다듬듯. 통속적이며 일상적인 그러나 별 볼일 없는 풍경이 스냅사진처럼 툭툭 던져진다.
사물들, 사건들이 던져져 있다. 그것이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걸 듯, 그러나 자신의 말을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의 대화방식처럼. 불가능한 대화 또는 말걸기. 버벅거리는 혼잣말.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벽을 더듬거리며 길을 따라 가다 보면 흔히 볼 법한 어둑하고 그늘진 애매모호한 풍경이 펼쳐진다. 평범한 일상에 편입되지 않은 또는 거부하는 사물들, 사건들이 연속되는데, 이는 무척이나 미시적이라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끝맺고 제한하지 않는다면 세계와 사물과 사건은 결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회화의 고유한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그림은 바람을 담고 있고, 사물과 사건을 담고 있다. 검은 새가 불길한 전조를 뿌리면서 세계를 가르면, 검은 인물이 빛 없는 거리에 누워 있으면, 제주도와 브루클린과 종로바닥에서, 해가 지는지 빛이 엷게 번지면, 그녀들은 지나쳐 가고 자동차는 달리기를 멈추고 세계는 불현듯 다가온다. 세계가 너무 갑자기 다가오기 때문에 결코 화합하지 못한다. 그 안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삐져나온다. 회화는 그렇게 세계와 결코 만날 수 없는 순간을 담는다. 애초에 실패하는 사건이기에 세계를 담아내는 재료나 방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회화의 위태로운, 숭고할 정도로 불안한 존엄성이 드러난다.
회화는 단순한 재현의 기술, 눈속임 같은 것이 아니다. 무한히 열려있는 구멍들, 차원들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와 만나고 세계를 번역하는 불투명한 시선들, 언어들, 거의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마법적인 순간들. 회화는 그 순간에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아주 미묘하게 흘러가는 공기의 흐름마저 이미지로 포착되는 것. 그 이미지는 투명하기도 하고 불투명하기도 하다. 빛이 있고 그림자가 있는 이미지들이 세계와의 불가능한 만남을 열어놓는다.
작가가 애써 묘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풍경이 곧 회화로 제시된다. 이렇게 엉성하고 구멍이 많은, 그리하여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어딘가로 흘러가버린 텅 빈 회화를 깊이 껴안는다. 몇 년 전 웃통을 벗고 정면을 바라보던 작가의 자화상처럼 회화는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본다.
누구에게나 가슴은 있다. 그녀는 가슴으로 말하고 가슴을 향해 말을 건다. 세계와 만나는 아주 단순한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고통을 전달한다. 나는 그녀를 통해 회화, 풍경, 세계와 사물이 분리되지 않는 어떤 순간, 어떤 장소를 확인한다. 아니 차라리 한 편의 시(詩)를 본다.

김노암 ・문화역서울284 전시감독

[Review]한효석-Crematorium-공중부양돼지

한효석  __  Crematorium-공중부양돼지
갤러리 아트사이드 4.10-5.1

전시장에는 얼굴 피부가 벗겨진 인물 초상화가 있고, 한켠에는 머리가 둘인 새끼돼지 형상이 금박이 된 채로 진열대 안에 설치되어 있으며, 아래층에는 덩치 큰 어미돼지와 새끼돼지들이 뒤엉킨 채로 공중에 매달려 있는데, 이 형상들은 그 크기와 색이 실제와 완벽하리만큼 똑같이 재현되어 있어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다. 그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끔찍한 장면을 실제와 혼동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시장 입구에는 “나는 이번 전시를 통하여 불덩이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이 열정의 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익명인이 잠시나마 욕망과 망각의 멍에를 내려놓고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하고 싶다”는 작가의 글이 쓰여 있다. 관람자로 하여금 자신을 들여다보도록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고 하기에는 작품을 처음 대할 때의 인상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고깃덩어리 초상과 돼지의 죽음 말고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만 고깃덩어리로 묘사된 인물과 눈이 마주치면 마치 얼굴 피부가 벗겨질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약간의 감정이입이 가능한 정도이다.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니 그렇다면 저 끔직한 것들이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일종의 안도감을 갖게 하려고 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자행한 결과라는 것을 눈앞에 던져놓고서 우리에게 죄의식을 갖도록 하려는 것일까.
이번 전시는 <검증되지 않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주제의 개인전 이후 작가가 5년만에 연 전시이다. 말하자면, 5년 동안 준비한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살덩어리 초상과 돼지 사체로 이루어진 전시는 그때와 구성이 비슷해 보인다. 다른 점은 이전 초상화가 동양인이 주를 이룬 반면, 이번은 서양인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고, 조각에서는 돼지형상과 본인의 두상을 결합한 작품이 아닌 온전히 돼지 사체 자체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얼굴의 피부를 벗겨낸 초상화에 대해 작가는 인종이나 성적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얼굴의 본질에 대한 묘사이며, 이는 인간 존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 얼굴의 골격이나 생김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 한갓 고깃덩어리여서 동양이든 서양이든 작가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조각에서 본인의 두상을 제거하고 오로지 돼지 사체로만 묘사한 점은 큰 변화로 보인다. 예전의 작품이 동물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나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번 작품에선 죽음을 직시하는 작가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괴기스러울 정도로 생생한 돼지사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지난 시간 돼지농장에 작업장을 만들고, 번식을 위해 길러지는 모돈(母豚)이 죽거나 비좁은 우리에서 새끼돼지가 죽으면 바로 실제를 본떠서 작업을 했다. 모든 죽음은 인간이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최대이윤을 내기 위해 구축한 환경에 의한 것이다. 그는 돼지 사체를 통해 죽음을 얘기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자행한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일종의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동물을 ‘살처분’하는 끔직한 현실을 목격하면서도 먹거리의 풍족함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지 못한다. 고깃덩어리에 대한 연민에서 과잉생산의 욕망이 만들어낸 돼지사체라는 결과물은 우리에게 인간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사육당하고 살처분당하는 동물로부터 우리가 언제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는 홀로코스트나 테러 등을 목격하면서 인간의 잔혹함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이러한 재난들은 비록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자본주의가 그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대체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붕괴나 추락, 그리고 어떤 침몰 등 현대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잠재적인 것이 부분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이면서, 동물의 생매장과 홀로코스트의 유사성을 드러내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한효석의 작품은 지극히 혐오스럽고 끔직하다. 그는 “미술이나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 수 없는 것들을 끌어오는 데 집중한다”고 말한다. 현대예술은 아름다움이 예술의 고유한 미덕이라는 전제을 포기한지 오래다. 결국 자신의 피를 얼리거나, 동물을 산채로 절단해 박제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서 충격은 감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감상은 이제 이성이 아닌 감성의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돼지 사육은 단지 거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다가올 재난의 암시일지도 모른다. 재난을 재현하는 것은  현대예술에서 금기시되곤 한다. 끔직한 현실을 재현하기에 예술의 모방적인 방식은 본질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난에 대한 암시는 예술이 해야 할 임무일 수도 있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예언할 수 있는 힘은 상상력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고, 상상력은 여전히 예술의 고유한 덕이기 때문이다. 한효석의 작품을 보면서 예술에 있어 재현에 대한 윤리를 생각해 보게 된다.

박순영・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Review]이원철-Time

이원철  __  Time
스페이스22 4.3-29

1970년대 초, 전설적인 록그룹 비틀스와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제작에 참여했던 세션 연주자들이 있었다. 앨런 파슨스와 에릭 울프슨인데, 그들이 1975년에 결성한 그룹이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The Alan Parsons Project)이다. 3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진보적인 음악성과 세련된 사운드로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사진작가 이원철과의 인연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술관에서 공원을 주제로 사진전을 개최하였는데, 작가의 <The Starlight>시리즈 작품을 대면하는 계기가 되었다. 야간 촬영이지만, 생경하고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하는 작품은 매우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그때부터, 이원철의 작품을 관심 있게 보았다. 그 보다 먼저 제작된<unfinished…>시리즈는 호주 유학시절에 묘지를 작품의 소재로 삼았는데, 역설적으로 삶의 마지막 의식을 치른 묘지를 ‘완결되지 않은’, 좀 더 의미를 부여하자면,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제목의 전시로 만들었다. 귀국 후에 전국의 고분을 소재로 <The Starlight> 때처럼, 야간 촬영 노출 정도에 맞춰서 생과 사가 공존하는 생경한 풍경을 특화된 감각과 공간적인 표현으로 연출하였다. <The Starlight>가 낮과 밤, 빛과 어두움, 시간성의 숨은 현상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unfinished…>는 삶과 죽음, 인간의 실존과 부재에 관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시리즈의 미덕은,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동화 같은 시각적 볼거리와 서정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원철이<Time>으로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번 전시로 작품의 변화와 작가가 나아가려는 방향이 명확하게 보이는 듯하다. 우선, 좋았던 점부터 말하자면, 작가가 10여 년 전부터 일관되게 탐구하고 진행해온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주제는 <unfinished…>, <The Starlight>의 연장선상에서 결론에 가까울 정도로 정답이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는 시간과 영원성에 관한 내용이다. 화면 안에 움직이는 사물들은 장(長)노출기법에 의해 사라지듯 표현되고, 영원한 것은 시간밖에 없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시곗 바늘도 영원으로 인도하는 도구로서 존재할 뿐이므로 그것이 제거됨 또한 이런 맥락으로 읽힌다.
<London United Kingdom> 시리즈 중에 실내 기차역 같은 장면과 이름 모를 현대식 건물사이의 휴식 공간, HSBC은행 건물이 있는 담벼락 작품을 보면서 영국 출신의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가 1980년 발표한 <Time>이란 노래가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3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 사진과 음악이라는 장르를 관통하며 다가오는 감흥(感興)은 분명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예술이 지니는 확장성인 경계를 허물고 넘나드는 최상의 단계에 이르렀음이 통했다고 하겠다.
이제, 아쉬운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작품의 배경으로 나오는 8개국 도시의 풍경들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번 전시의 중요한 개념이 시간성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장소성에 큰 비중이 없다는 것이다. 나머지 작품들에 등장하는 이국적인 문화와 건축양식의 장소성이 주제의식을 약화시키는 변수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차라리 장소를 짐작하기 어려운 넓은 실내 공간의 시계들을 소재로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이국적인 풍경과 화려한 건축양식에 주제의식이 희석되지 않고, 움직이는 모든 사물이 실루엣의 잔상으로 존재와 부재를 넘나드는 여운을 보여주었을 때, 시간의 영속성(永續性)과 미학적인 깊이는 배가(倍加)되었을 것이다. 이런, 나의 판단이 오판이라는 가정도 해보았다. <The Starlight>, <unfinished…>에서 보여준 시각적인 볼거리를 위해 건축적인 장식미를 도입했다는 가정을 해보아도 주제의식을 약화시키는 선택이라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이원철 사진의 시각적인 볼거리는 인간들이 구축해놓은 인공물이 아니라, 빛과 어두움인 자연현상에 적절한 사물과 결합된 개념 있는 노출의 미학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작가의 작업은, 도록에 쓴 필자의 말을 인용하여 ‘현상 너머의 실재에 대한 탐구’임을 인정하고 좋은 방향으로 접근해도, 이번 ‘Time’이라는 주제의 무게와 깊이를 담기엔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사진작가 이원철에게서 받았던 첫인상, 즉 현실에서 보기 힘든 동화 같은 풍경(Atopia)이나 낯선 장소(Unfamiliar place)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준 데 대한 만족과 그에 따른 기대가 커서  그럴 거라는 생각도 든다. 시간성이란 주제는 절대 만만하지 않다. 작가로서 평생을 매달려도 해결하지 못할 수 있다.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의 <Time>에 반복되는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Who knows when we Shall meet again, But time keeps flowing like a river to the sea”(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강이 바다가 되듯 계속 흐르고 있다.), Till it’s gone forever…(영원히 끝날 때까지…)Gone forever…(영원의 끝…) Gone forevermore(언제나의 끝…)
세월의 무상함과 시간의 영속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는 가사 내용이다.  끝.

손성진・소마미술관 큐레이터

 

[Review]방&리-Friendship is universal

방&리 __ Friendship is universal
대안공간 루프 3.28-4.29

각종 오브제들과 언어가 뒤섞인 방&리의 전시 작품들을 엮어주는 매체는 단연 ‘빛’이다. 전시장의 입구에서 관객의 발을 멈추게 하는 거대한 무대조명은 리드미컬한 음악처럼 전시장을 환하게 비추거나 어둡게 하는데, 밝혀지고 어두워지는 대상은 그 작품 앞에 서 있는 관객들이다. 작품이 말하고 관객이 듣는 고전적인 위치를 전복시키려는 듯 조명은 관객이 선 자리를 명료하거나 불명료하게 비춘다. 할로겐 조명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제목은 <Bury your head in the sand like an ostrich>. 이 제목은 작가의 의도를 밝히기도, 숨기기도, 회피하기도 한다. 명령문으로 이루어진 제목의 작품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각성이 일어날 지, 의미가 어긋나는 불편한 느낌을 감수할지는 개별적 시간 속에 있는 개별적 관객의 몫이다.
광섬유를 이용한 작업과 LED 조명을 이용한 그들의 작업은 대체로 언어를 이용한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다. <Can’t take my eyes off you>, <Our daily bread>, <Friendship is universal>, <Cul-de-sac>, <Elephant in the living room> 등의 작업은, 빛을 기본으로 하는 뉴미디어를 이용해 실제 언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당혹스러운 점은 대개 언어를 이용한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딱 떨어지는 통쾌한 이유나 명확히 의도된 불일치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문장과 ‘우리의 일용할 양식’의 관계, ‘너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는 문장과 동일한 작품에서 보이는 화면의 인터랙션, ‘elephant’와 ‘象’과 화면에서 보이는 흐린 영상들, 박제된 산양의 몸을 감싸고 있는 ‘죄’라는 글자의 네온 빛, ‘우정은 보편적이다’라는 문장에 연이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이 문장이나 단어들이 언어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이해되어야 할 것 같은 기대를 지속적으로 저버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많은 매체와 많은 언어, 그것들이 기존의 좌표를 잃고, 혹은 본래의 의무를 벗어나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것 같은 혼란스러움은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거의 모든 작품에 내재되어 있다. 그것이 정서이든 메시지든, 그들은 수렴이 아닌 발산을 전략으로 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선택한 매체의 은유, 그들이 선택한 명료한 언어의 불명료성, 이러한 특성들이 차후의 작품들에서 전개되는 양상을 지켜보고자 한다.

이윤희・미술비평

[Review]박미경-역사 없는 밤의 세계

박미경  __  역사 없는 밤의 세계
송은아트큐브 4.11-5.28

언뜻 보면, 태곳적 자연의 모습인 듯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웅장한 규모와 깊이, 중량감을 가진, 인간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언어와 야생의 규칙만으로 구성된 풍경. 그것이 박미경의 그림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표면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현실의 시간, 현실의 공간을 채록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기억에서 연동하여 자동기술처럼 토사하고 쌓아올린 형상들로, 자연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풍경처럼 보이나 풍경이 아닌 그림인 것이다.
이처럼 기억의 재구성과 변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의 그리기는 독특한 공정(?)이 요구된다. 우선 그에게는 무엇을 그리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빈 캔버스 위에 점이나 선과 같은 단편적인 조형 요소들이 단서가 되어 작가의 기억 속 편린들을 자극하고 그 감정의 부추김에 의해 다음 단계의 전개 방향이 무의식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 속에서 작가의 의식으로부터 호출된 낱낱의 기억들, 무의식으로부터 연원된 무수한 우연과 예측불허의 상황들이 돌발적으로 교차하고 상충하는 자가증식의 과정을 거쳐 낯선 풍경과 같이 전혀 새로운 결과를 도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무의식과 꿈에서 자신들의 리얼리티를 찾고자 했던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기술법과 어느 정도 유사해 보이기도 하나 박미경의 경우, 현실의 의식적 상황들을 부정하는 방편으로서의 ‘설정’이 아니라 현실의 경험과 기억을 의식하면서 초현실의 세계로 나아가는 중간 과정의 ‘소임’이라는 점에서 그와는 다른 지점의 수행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미경의 회화에서 두드러지는 표현적 특징은 거대 서사적인 화면 장악력과 캔버스의 배후로까지 넘어갈 듯한 디테일의 깊이라는 상극적인 감성 표현이 탁월하게 조우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특히 최근작은 이전에 비해 풍경적 표현의 스케일이 장대하게 발전했는데, 그 까마득한 거리감으로 인해 심리적 공간이라는 정황마저 망각한 채 시각적 경외심에 설득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의 확장은 그의 기억과 심리에 근거한 감정이 어떤 식으로든 영역을 넓혀 발산된 것으로 이해된다. 무채색을 선호한 것이 한없이 가라앉는 어둡고 묵직한 심리의 표정인지, 나이프의 경직되고 날선 단선의 흔적들이 사라지지 않는 기억 속 상처와 예민한 정서를 들춘 것인지, 혹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려는 단호한 의지의 선언인지는 여기서 부차시된다. 박미경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기라는 행위 자체와 캔버스 위에 새롭게 나타난 과거 속 수많은 박미경과의 만남이 아닐까 싶다. 자신을 끄집어내고 다시 곧추 세우며 나아가려는 그의 심리 풍경은 기억의 씻김과 의식의 안식을 위한 본능적 행위처럼 다가온다. 그의 예술적 진중함과 진득함은 당분간 이 지점에서 발화될 것으로 보인다.

최정주・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Review]선을 치다

선을 치다
우민아트센터 2.13-4.19

선을 ‘긋다’ 혹은 ‘그리다’가 아닌 ‘치다’라고 명명한 제목은 드로잉의 확장을 함축적으로 선언한다. 드로잉(drawing)이 단지 작품의 밑그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도 하나의 중요한 장르라는 아이디어에 근거한 전시는 많이 있었지만 대개는 그리기 기법에 충실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이번 전시는 2차원의 평범한 드로잉을 넘어서 입체, 설치, 영상 등 다양하게 변주하는 드로잉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존의 전시들과 차별성을 지닌다.
전시장 입구에서 관객을 맞이하는 송진수의 작품은 마치 펜으로 빠르게 그려나간 스케치처럼 보이지만 실은 굵은 철사를 연결하여 만든 속이 텅 빈 입체 조형물로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3차원의 공간에 그려진 선이라는 점에서 드로잉의 고정관념을 깰 뿐 아니라 동시에 조각이란 본디 양감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개념도 뛰어넘고 있다. 곧이어 만나게 되는 김보민의 동양화는 선 하나에도 작가의 정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동양화의 전통을 꼬집기라도 하듯 라인테이프를 들여와 과장되게 선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지는 김철유의 펜 드로잉은 컴퓨터로 그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치밀하고 반복적인 패턴을 보여주고 있는데 가까이에서 화면을 관찰하면 펜의 세밀한 번짐과 자연스러운 육필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작품들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드로잉이라는 특성을 공유하면서도 기존 관념의 해체를 통해 드로잉의 새 관점을 제시한다. 전시 동선과 상관없이 8명의 작가가 각각 송진수 김병주의 공간 입체 조각, 양연화 이정민의 애니메이션, 김보민 이승현이 보여주는 선의 확장과 재해석, 김정주 김철유의 세밀한 펜화 등으로 짝을 이루며 상호 소통하는 점도 흥미롭다.
본 전시는 개관 3년 만에 심도 있는 전시 기획으로 ‘이동석미술상’을 수상하는 등 중부권의 주요 미술관으로 자리 잡은 우민아트센터의 2014년 첫 기획전으로, 외부 큐레이터를 초청하여 확장된 시선을 보여주려는 시도에서 기획되었다. 전시를 맡은 큐레이터는 사회적 이슈를 진지하게 다루는 기존의 전시기획과 맥을 이으면서도 현대미술의 다양한 시각적 실험을 선보이기 위해 ‘드로잉’을 주제로 선택했다고 한다. 꾸준하게 젊은 한국 작가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선’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어낸 기획력이 돋보이며, 우민아트센터의 넓은 공간을 조화롭게 채워 시각적인 즐거움도 충만하다.

김영애・이안아트컨설팅 대표

 

[Review]최인선-날것의 빛

최인선  __  날것의 빛
갤러리3 4.4-25

전시장에 들어서면 백색의 색점들이 다채롭게 반짝거리며 나란히 놓인 3점의 <백색의 침실>(2013) 시리즈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작가가 왜 이런 작품을 그렸는지를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이 관람자는 경쾌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가는 듯한 감각의 축제 속에 던져진다. 그러나 숨을 돌리고 찬찬히 살펴보면, 그 감각의 축제는 단순한 감각적 쾌락의 장면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물성이 짙게 드러나는 날것의 빛, 색으로 이루어진 점, 선, 면, 그리고 회화공간의 구성은 최인선이라는 작가가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회화와 인간 사유의 본성에 대해 얼마나 치밀하게 회화적 행위를 통해 사유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최인선은 타고난 모더니스트이다. 그는 자신의 회화에 대해 ‘감각논리’나 ‘색채질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감각은 세계의 사물들과 그 성질들을 우리 마음속에 질서지우는 통로이다. 미술가의 사유는 감각논리로 형상화된 색채질서로서 드러난다. 나는 이번 최인선의 전시를 통해 한 명의 포스트모던 모더니스트를 보았고, 최근 예술학계에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감성적 인식의 과학이 최인선만의 감각논리와 색채질서로서 육화되는 현장을 보았다고 해야 할까?
<백색의 침실>이 보여주는 눈부신 백색 점들로 구성된 화면은 숨쉴 틈을 만들 듯 사이사이에 올려진 원색의 두꺼운 색점들로 인해 더욱 다채롭고 경쾌한 빛의 향연을 선사한다. 빛을 만드는 것은 그림자이며, 그림자 없이는 빛이 없다. 빛과 그림자는 형상을 만든다. 최인선의 화면에 쏟아지는 무수한 백색 점은 화면에 바로 짜낸 두꺼운 물감덩어리의 색점 하나하나가 스스로 그림자를 품고 있기에 영롱한 빛으로 현현한다. 그것은 감각 속에서 육화되는 빛, 물감덩어리들이다. 백색점 하나하나가 서로 어우러져 반짝거리는 화면이 주는 감각적 즐거움은 작가의 치밀한 감각적 사유가 색채질서를 통제하고 있기에 가능한 즐거움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색점으로 이루어진 빛을 보면 인상파가 떠오른다. 언뜻 보면 ‘날것의 빛’이라는 용어는 인상파 화가들의 감각인상으로 파악된 빛과 유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상파의 빛이 자연 관찰과 광학적 사실주의를 드러내는 태양이 비추는 야외의 빛이라면, 최인선의 빛은 태양이 없는 실내로 들어온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 마음속으로 들어온 ‘날것의 빛’이다. 인상파의 빛이 태양에 기원을 둔 ‘광학적 과학’의 빛이라면, 최인선의 빛은 세계의 물성을 감지하는 몸, 감각적 사유라는 ‘마음의 과학’이 창조하는 빛이다. 그의 빛은 감각의 총체로서 몸이 미술의 집인 미술관에서만 만날 수 있는, 개념화로 걸러지지 않은 생생한 빛이다. 이것이 그가 <뮤지엄 실내-날것의 빛>이라는 제목을 사용하는 이유일 것이다.
날것의 빛이 주는 감각적 즐거움은 백색과 원색으로 구성된 질서로만 드러나지 않는다. 전시장 입구 왼편에 놓인 회색 톤의 <미술관 실내-날것의 빛>(2014)에서 보듯이, 이작품은 두꺼운 백색이나 원색 점들의 향연 대신, 겹겹이 쌓이고 축적된 평면적인 붓질의 흔적을 드러내는 회색톤의 실내공간이다. 수직과 수평으로 분할된 공간 속에서 중첩된 붓질의 면들만큼 묘사된 사물들도 중첩되고 있다. 작품 왼쪽의 화면에 수직으로 분할된 두 개의 화면은 각각 다른 시점의 분리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인이 그려진 오른쪽의 화면은 다르다. 오른쪽도 여전히 수직과 수평의 화면으로 구성돼 있으나, 그려진 사물들은 수직선에 의해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중첩되면서 공간적 깊이와 실재감을 주는 것이 흥미롭다. 팔걸이의자와 여인의 치마의 중첩, 소파테이블과 여인의 치마의 중첩, 여인의 가슴부위를 지나가는 책장의 수평선의 중첩이 있다.
이는 마치 사진을 찍을 때 전경과 후경 어디에 초점이 맞추어지느냐에 따라 전경의 물체가 드러나기도 하고 후경의 물체가 드러나기도 하는 것처럼 이러한 중첩은 화면 공간의 깊이를 전해준다. 수직의 구성에 의해 잘려나간 여인의 손목은 이 장면 속의 시간성까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여인이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움직임을 보고 있는 듯, 여인이 존재했던 순간의 공간과 여인이 사라진 공간을 중첩시키면서 시간의 경과를 화면 속에 담아낸다. 이처럼 이번 최인선의 전시 ‘날것의 빛’은 경쾌한 감각적 즐거움에서 출발하여 지각적 공간, 감각적으로 육화된 영성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비범한 감각과 작가적 욕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연희・미학

 

[Review]정수진-다차원 존재의 출현

정수진  __  다차원 존재의 출현
갤러리 스케이프 4.8-5.18

<입체·나선형 변증법>이란 제목을 세운 3년 전 개인전에도 허공에 둥둥 떠 있거나 가지런히 나열된 두상이 자주 보였지만, 정수진의 올해 개인전에선 유독 기호로 처리된 얼굴 형상이 크게 각인됐다. 유사성을 빌미로 도형들이 유기적으로 반복되고 나열된 화면들의 총합. 인간 두뇌를 닮은 호두의 나열(일부는 진짜 두뇌처럼 보인다), 게임 캐릭터 팩맨Pac Man처럼 생긴 도형, 팩맨과 유사한 토끼 두상의 출현, 토끼 두상은 다시금 오리처럼 보인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현실’을 설명하려고 비트겐슈타인이 인용한 오리와 토끼를 나란히 닮은 ‘오리-토끼 환영’ 도상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줄넘기 소녀의 줄은 우연히 얼굴 형태를 구성하고 있으며, 마주한 거석 두 개 사이로 얼굴 윤곽이 보이는 듯도 하다. 이런 얼굴 형상은 ‘오리-토끼 환영’ 공식처럼, 필연적인 결실이기보다는 보는 사람에 따른 임의적인 발명품에 가깝다.
그래서 화면을 둥둥 떠다니는 두상은 어느 때보다 화면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처럼 느껴졌고, 균질한 화면으로 기억되는 <뇌해> 이후 정수진 스타일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최소 단위들로 구현된 화면’이라는 제작 공식에 훨씬 역점을 둔 전시회라고나 할까. 때문에 <뇌해>처럼 화면 속으로 나른한 유영을 시도하게 되기보다는, 작가의 이론 앞에 얼어붙을 수도 있겠다. 경직된 불투명 채색 모자이크로 구성한 인물상의 출연도 그 이론을 따르는 것일 테다.
정수진의 이번 개인전은 신작과 더불어 <부도(符圖)이론>이라는 단행본을 함께 선보인 자리였다. ‘의식세계를 가시화하는 시각이론’으로 소개된 이 책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의식을 그림을 통해 해독하려는 작가의 오랜 의지가 반영된 이론서다. 지문을 살펴보면 부도가 부호와 그림을 모두 의미하는 점, 신체 감각과 의식을 나란히 대상화시키는 점 등 시각정보 일반에 관해 답을 내줄 이른바 시각이론의 통합모델을 부도이론에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창작의 근간을 이론으로 정립하려 한 1세기 전 현대예술가를 우리는 안다. 칸딘스키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피라미드에 빗대어 피라미드의 정점에 도달하는 걸 예술가의 고차원적 임무로 믿은 그는 관련 이론을 세웠고, 그 후 화면을 구성하는 기하학적 요소를 분석한 이론서까지 집필했다. 그렇지만 칸딘스키의 이론은 객관적인 과학 이론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전적으로 주관적 사유의 산물’로 평가되기에 칸딘스키의 이론과 그의 작품이 유기적으로 일치한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시각예술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 한 그의 진정성과 학구열이 높게 평가받는 것이다.
연관성 낮은 파편들의 총합처럼 보이는 정수진의 고유한 화면에는 도형과 이와 어울리기 어려운 유기체가 나란히 마주보며 나타난다. 데페이즈망 기법이 자주 동원되는 이유다. 그렇지만 이런 화면이 사물의 우연적 배열이 아닌 부도이론에 입각한 결과라면 감상자의 태도는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으리라. 부도이론이 전적으로 자의적 발명품은 아니어도 작가가 원하는 주장을 선취해서 구성한 자기이론화의 결실일 공산이 크다. 부도이론이 타당하다면 이론의 확산력은 커지고, 작품과 이론 사이의 유기성 때문에 감상의 질도 확장될 게다. 이론의 타당성이 낮다면 이론의 확산력은 감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되 작가의 창작 동력으로 한정될 게다. 칸딘스키의 경우도 그랬지만.

반이정・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