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향은 왜 산수화로 표현되었을까?
우리는 그 의미를 알아야 할 이유가 있다 산수는 사람들이 꿈꾼 다양한 이상을 품고 있으며 그것을 소재로 그린 그림은 그 다양함을 담을 수 있는 것이었다 현실 너머의 그곳에 대해 알아본다.
고연희 ・미술사
산수화의 ‘산수(山水)’란, 처음부터 자연 속의 자연이 아니었다. ‘산수’란 오히려 인공의 개념이었다. ‘산수’는 현실적인 욕심이 제거된 청정한 도덕이요, 시비를 따지는 소리가 없는 고요함이며, 나아가 우주적 순리의 실현체로 인정받았다. ‘산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문명의 속도보다 지혜롭고 사회적 성취보다 현명한 사람이라, 말하자면 그 고상하고 뛰어남의 정도가 비현실적인 사람을 뜻했다. 손에 꼽을 만한 동아시아의 성현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모두가 산수를 배울 만한 개념으로 정의했고, 좋아하기에 가장 마땅한 대상으로 제시했다. “지혜로운 자는 물을 즐기고 어진 자는 산을 즐긴다”고 한 공자의 요산요수(樂山樂水)나 아래로 흐르는 물의 덕을 지목한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가 모두 고전의 상식으로 전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속된 기운(俗韻)이 없고, 본성이 산과 언덕(邱山)을 좋아했지”라고 말한 5세기의 도연명 (陶淵明), “그대가 정치를 안다면, 나는 구학(丘壑)을 더 잘 안다”고 자부한 같은 시절 사유여(謝幼輿)가 속된 현실과 고상한 산수의 대비를 정확하게 표현했다. 11세기 송나라 최고의 산수화가로 활약한 곽희(郭熙)는, 산수로 나가지 못하는 관료를 위하여 산수화가 필요한 현실사정을 역설하며 산수화를 널리 진작시켰다. 조선의 모든 선비는 산수를 사랑하노라고 시로 읊었고, 심지어 산수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에 깊은 병이 들었노라고 한탄했다. 그들은 관직을 떠날 의향이 없더라도 오직 산수를 사랑하노라고 읊음으로써 내면의 고상함을 표현하는 글쓰기를 그치지 않았다. 산수는 지고한 이상(理想)으로 의심 없이 인정되었다.
‘산수화’란 이러한 ‘산수’를 담은 그림이다.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지식과 권력을 획득한 이들이 산수화를 꾸준히 요구했던 근본적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보기 좋게 산이 솟고 맑은 물이 흐르는 산수는, 현실적 문제가 말끔하게 사라진 곳이며 선량한 사람이 머무는 곳이다. 현실 너머로 펼쳐낸 꿈이나 특정한 이상사회의 소망이 있으면 산수화로 표현되었고, 그 가운데 어떤 테마는 산수화의 주요한 화제가 되었다.
동서고금의 사람들은 현실의 부족이 충족된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동서의 역사 속에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이상세계를 보면, 그 시절의 정치사회적 모순이 사라진 사회이거나, 이데올로기가 제거된 곳, 혹은 억눌린 욕망을 마음껏 향유하거나 아예 인간적 시공간의 제한이 없는 절대영원을 향유하는 곳 등 다양한 모습이다. 동아시아에서도 극락정토나 불로불사의 선계 등 절대시공을 추구하는 종교적 상상세계가 있었고 현실사회 및 철학분야에 집중한 이상향도 여려 형태로 구축되었다.
유가와 도가의 사유방식에 근거한 이상향의 주제는, 현실 너머의 이상을 꿈꾸는 지식인의 산수 지향 개념과 근본적으로 일치했다. 산수화는 문학작품 못지않게 이러한 이상향을 담아내는 멋진 그릇이 되었다. 말하자면 산수화는 다양한 이상향을 표현하는 시각매체로 풍성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예컨대 정치사회적 문제가 제거된 ‘도원(桃源)’, 지상 최고의 풍경으로 동경된 ‘강남(江南)’경, 성리학적 이상을 담은 ‘무이(武夷)’계곡과 군자로 추앙받은 사마광의 독락원(獨樂園), 도가의 최고경지 ‘선경(仙境)’ 등이 산수로 그려졌고, 이에 더하여 조선후기 중인들이 완벽한 아(雅)의 실현을 그린 산수화와 조선후기 학자들과 국왕의 비전으로 빚어낸 강산무진 (江山無盡)이 모두 이상경을 그려내어 회화사에 빛나는 산수화 작품들이다.
‘도원’(桃源)을 찾는 바람.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기록된 도원은 무릉 깊은 산에 자리한 상상의 마을이다. 길 잃은 어부가 우연히 입구를 찾아냈다는 도원은, 자급자족하는 작은 농촌이라 정부의 횡포가 없고, 국제 간 왕래가 불가하여 전쟁이 없는 곳이다. 도원은 폐쇄적이며 정태적인 사회였지만, 그 기원이 노자의 《도덕경》에 제시된 소국과민(小國寡民)에 이르고 이후로는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나 두보의 <위농(爲農)> 등 한・중・일의 모든 문인이 노래하였을 만큼 동아시아에서 오래오래 지속된 이상향이었다.
산수와 이상향의 만남
복숭아꽃잎 흩날리는 분홍빛 산수 속에 착한 농민들이 거주하는 전원풍경으로 떠오르는 도원은, 한중일의 산수화로 수없이 제작되었다. 그 가운데 어부가 도원으로 드는 장면이 가장 많이 그려졌으니, 도원을 찾아들고픈 꿈이 반영된 것이다. 우리나라 고려로부터 기록되는 청학동(靑鶴洞)의 전설이 모두 도원의 꿈을 반영한 상상이었으며, 조선초기 왕자 안평대군이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도원에 드는 꿈으로 선포하고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 데서도 도원이 멋진 이상세계의 대명사로 통용된 사정을 보여준다.
‘강남(江南)’에의 동경. 모든 이상은 현실에서 비롯한다. 어떤 현실은 거부되고 어떤 현실은 과장되면서 이상이 만들어진다. 직접 갈 수 없기에 이상화된 곳으로,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과 서호십경(西湖十景) 등이 있었다. 소강과 상강이 흘러드는동정호나 서호가 자리한 항주는 중국에 실재한 풍경이지만, 중국뿐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이곳에 대한 동경이 깊어지면서 이상향으로 정착되었다. 세계의 중심을 중국이라 여기던 시절, 중국 양자강 남쪽의 ‘강남’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수로 인정되었다.
호수의 수평선이 하늘과 이어져 망망한 ‘강남’경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가을달이 뜨고 기러기가 내려앉는 상상 속에 펼쳐지는 평화로운 풍광들은 한중일 산수화의 주요한 테마로 수백 년 동안 그려졌다. 특히 소상은 순임금의 아내들이 나란히 숨진 열녀 미담으로 조선에서 각별한 의미가 부여되었고, 효녀 심청이 인당수로 가는 길에 유람하는 꿈의 공간이 되었다. 민화라 불리는 산수화에서도 소상팔경은 가장 많이 그려지던 주제였다.
존모하는 사람이 머물던 곳.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이 머무는 곳이라면, 그들에 대한 이상화와 맞물려 그 공간도 이상화되기 마련이다. 주자성리학에 매료된 조선 학자들은, 주자의 시 <무이도가>(武夷棹歌, 무이계곡 뱃놀이)를 읽으면서 무이산 계곡을 굽이굽이 돌며 단계단계 철학의 경지가 오르는 만족을 꿈꾸었다. 무이산의 아홉 계곡을 상상한 <무이구곡도>를 보고, 이황 선생은 눈물을 흘렸고 그의 제자 정구는 감동으로 탄식하였다. 조선의 학자들에게 무이구곡은 대스승의 숨결이 감도는 곳이요 학문성취의 경지였다. 조선후기 이익이 병중에 무이산을 보고자 강세황에게 그림을 부탁하고, 국왕 정조가 김홍도에게 무이산 그림을 요청한 이유이다. 무이구곡은 민화라는 범주에서도 실로 많이 그려졌다. 굽어지는 물길을 따라 배에 탄 주자의 모습으로 점철된 무이구곡도는 철학의 이상을 담은 감동의 산수화였다.
이외에도, 공자의 태산 등반, 제자 증점이 꿈꾼 기수의 물놀이, 왕유의 망천, 소동파의 적벽, 주렴계의 연못, 백거이와 사마광의 정원 등 대학자 대문인과 함께 하고픈 꿈이 산수의 이상경으로 그려졌다.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은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시절《 자치통감》을 저술하며 정원 독락원(獨樂園)을 경영했고 그 내용은 <독락원기>로 전한다. 독락원은 중국 명나라 문인들의 요구 속에 구영(仇英)이 여러 차례 그렸고, 조선후기에도 거듭 그려졌다. 이러한 그림들은 수백 년 전 공간에 대한 상상이며 당시 조선학자들이 누리고 싶어 한 정원이나 산수경의 이미지였다.
신선의 경지, 선경(仙境). 신비로운 식물과 동물, 불사의 선약, 신선과 선녀가 노니는 곳으로의 상상을 하노라면, 유한한 인간의 운명이나 현실의 질곡을 모두 잊고 무한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선의 경지는 실존하지 않은 고대의 신화로부터 실존한 인물의 신비화가 어울리며 이미지화되어 실로 오랜 역사를 가진다. 중국 한나라 박산(博山)의 상상에서《 산해경》, 《 장자》 등의 언급을 거쳐 조선시대 유선시(遊仙詩, 신선계를 노닐다)로 드러나는 조선 학자들의 선계 유람 상상이 어울려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신선경이나 신선을 그리는 그림, 잘 익은 반도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린 서왕모의 요지를 그린 그림 등이 모두 현실을 잊는 행복을 공유하게 해주었다. 산수화로 그려진 신선산의 풍경은 먼 바다 속 신비로운 산으로 표현되었으며 뿌리가 가늘고 위가 넓어 오르기 어려운 오묘한 형태로 그려지기도 했다. 봉래 ·영주· 방장이란 기록을 바탕으로, 신선경은 ‘봉래선경’이라 불리기도 했다.
중인의 ‘아(雅)’ 추구. 지위가 높고 고결한 사람들의 행위를 ‘아(雅)’라고 부른 역사가 깊다. 우아하고 고아하다는 의미의 아(雅)란, 속(俗)의 반대말로, 옛 문인들이 추구한 이상의 개념이었다. 조선후기에 ‘아’를 간절하게 바라고 표현하는 문화그룹이 등장한 것은 주목할 만한 문화현상이다. 이들은 사회신분이 중인이라 양반사대부에 속하지 못했지만 경제적 성취로 문화적 수준도 높았기에, 그들 자신의 모습을 ‘아’로 표현하여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들이 향유한 산수화를 보면, 실로 고상한 운치로 그려진 그들의 아집(雅集)이 있고, 산수 속에서 하염없이 독서를 하는 비현실적 장면도 있다. 산수에서 시간을 잊은 독서 ‘산중독서(山中讀書)’나, 이른 봄 매화 가득 핀 산속의 독서 ‘매화서옥(梅花書屋)’은 환상경이었다. 눈 향기의 밤바다를 연상케 하여 ‘향설해 (香雪海)’라 불린 매화서옥은, 간절한 바람이 만든 특별한 이상향이었다.
학자와 국왕의 비전, ‘강산무진.’ <강산무진도>는 특기할 만한 산수경이다. 기이한 산수가 펼쳐진 가운데, 시끌벅적한 수레 소리, 나귀 굽 소리, 도르레를 돌리는 함성이 산속 구석구석까지 진동하는 그림이라, 이 그림의 산수는 청정하고 고요하지 않고, 폐쇄적이고 정태적이지 않다. 백 척도 넘는 거대한 배들이 정박하고 드나들며 산비탈로, 폭포 뒤로 유통과 건축이 이루어지며 곳곳에서 수레가 돌아간다. 당시 조선에는 수레와 배와 나귀가 이렇게 발달하지 않았다. 튼튼한 배를 만들라 당부하고 요동과 심양까지 이르는 수레길을 꿈꾸었던 국왕 정조의 비전을, 이 그림 속에서 엿보게 된다. 정조 시절 우리산천은 관동절경으로 인기를 누렸기에 우리 국토 깊숙한 곳에 대한 국왕의 상상은 기암절벽이었다. 국토 깊은 곳까지 파고든 개발과 유통의 비전이 <강산무진도>로 표현되었다. 이 그림은 위정자의 이상이 반영된 문명추구의 산수화이다. 현실문명을 제거시켰던 오랜 산수화의 이상과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산수 속 이상, 그리고 우리
‘산수’란 그 자체로 현실 너머의 이상이며 초월이었다. 그곳은 생각으로 빚은 ‘이상한 나라’였다. 그 속에는 가장 멋진 산수경이 펼쳐지고 훌륭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산수의 이상은, 사람들이 꿈꾼 다양한 이상향을 반영할 수 있었다. 산수화로 그려진 이상의 표현 속에서 우리는 그 시절의 결핍을 보고 그 결핍에서 자란 꿈의 형상을 만나보게 된다. 그 꿈과 이상은 현실을 왜곡하기도 하고 가끔 공허한 메아리로 울리는 것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공허함 속에서 반짝이는 빛줄기는 우리에게 영감의 원천과 삶의 위안을 준다. 이상과 꿈은 고금과 동서를 초월하여 인간이 공유하는 또 다른 하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전근대기의 산수화에 구현되었던 이상향의 모습은 근현대로 오면서 그 모습과 성격을 바꾸기도 한다. 성서적 파라다이스가 우리의 꿈에 포함되었고, 전통시대의 간절했던 이상은 과거의 아련함이나 푸근함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꿈이 되었다.
7월 말에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전>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없었던 이상한 산수와 그 속을 노니는 이상하고 멋진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 안에 산수화의 정수가 있었고, 그것은 옛 시절 꿈과 바람의 극점이었다(필자는 이 특별한 전시의 오픈을 기다리는 한 명의 관람자로서, 함께 관람하실 분들을 위한 작은 안내의 역할을 기대하며 이 글을 썼다.). ●
소아미(相阿彌, ?~1525)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종이에 먹 173.4×370.8cm(각) 일본 무로마치(室町) 16세기 전반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Image source: Art Resource, NY 일본식 6폭 병풍에 그려진 <소상팔경도>. 강남의 습윤한 경관을 잘 묘사하고 있다
위·이한철(李漢喆, 1812~1893?)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종이에 담채 138.3×198.3cm 조선 19세기 1981 이홍근 기증 매화나무 사이에 가옥에서 책을 읽고 있는 선비를 그린 전형적인 매화서옥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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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전>을 기획한 권혜은 학예연구사
“큰 구성 속에 한중일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번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전>은 아시아의‘이상향’을 주제로 한 흔치 않은 전시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이유와 그 과정, 그리고 미술사적 의의에 대해 설명해달라.
‘이상향(理想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오랫동안 널리 애호된 회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번 전시는 이상향을 그린 한·중·일의 정통 산수화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최대 규모의 전시로, 동아시아 회화의 큰 흐름 속에서 형성된 이상적인 삶과 사회의 모습을 찾아보고자 기획하였다. 회화 전시는 일반적으로 작가나 화파, 장르를 주제로 하는데, 이상향이라는 주제로 산수화전을 개최한다는 점에서 외국에서도 드물다고 한다. 회화를 카테고리를 벗어나 하나의 주제로 묶어서 전시하는 것은 박물관 입장에서도 새로운 시도였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지만, 우리 박물관이 꼭 해야 할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이상향을 주제로 한 한·중·일 3국의 작품이 모였다. 모두 중국문화권이라 주제나 모티프, 그리고 형식이나 구현방식이 같거나 비슷한 작품도 눈에 띈다. 그래서 혹자는 이번 전시에 대해“중국회화에 드러난 이상향이 한국과 일본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볼 기회”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공통된 문화를 공유했다고 해서 모두가 중국회화의 영향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주자에서 비롯된 무이구곡은 조선에 들어온 이후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등의 영향으로 조선만의 구곡문화를 형성한다. 성리학이 뿌리내리면서 중국보다도 다양한 구곡도가 성행한 것이다. 오히려 이처럼 같은 주제라도 세 나라의 문화권에서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그렸는지 비교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전시에서도 큰 구성 속에 한중일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실제 전시작업을 하면서도 서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세 나라의 작품이 잘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감상할 수 있었다. 전시 기획도 그런 방향으로 구성하였다.
이른바 이상향을 그렸다고 한다면 흔히 관념산수를 떠올린다. 그 의미를 살펴본다면?
중국의 문인 종병(宗炳, 375~443)은 산수의 아름다움과 감상 작용을 중요시하고, 산수화를 보는 것은 “정신을 펼쳐내는 것(暢神)”이라 하여 산수화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산수화를 곁에 두고 감상하며‘마음을 맑게 하고 도를 본다(澄懷觀道)’는‘와유(臥遊)’의 정신은 산수 자체에 도덕성과 자연미를 부여하고 이를 그린 산수화의 심미 작용과 나아가 교육기능까지 인정되어 산수화를 창작할 수 있는 토대가 굳건하게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마음의 눈으로 본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그리는 것이고, 여기에 마음속 바람을 담은 것이라 하겠다.
이른바‘이상향을 주제로 그렸다’고 한다면 당대의 현실에 염증을 느꼈거나 심정상 도피를 목적으로 작업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봄직하다. 조선 산수화에서‘이상향을 주제로 그렸다’라는 의미에 대해 설명해달라.
조선 문화와 예술의 부흥기인 18세기,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자연과 사람, 사회가 서로 평화롭게 어우러진 이상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 백성들은 맡은 일에 충실하고 군주는 백성을 덕으로 다스리는 유교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이상사회가 이 작품이 지향하는 바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개인으로는 선비들은 모름지기 벼슬길에 나아가 왕을 보좌하며 백성을 돌보는 것이 삶의 목표이지만, 그 뜻을 펼치지 못하면 자연에 귀의하여 조용히 덕을 쌓는 것이 도리였다. 한편으로 관직에 있을 때는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은거를 꿈꾸기도 하였다. 이처럼 당시의 작품들을 통해 대의적인 이상사회를 꿈꾸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속세를 떠나 자연에서 안식을 취하는 은거를 표방하였던 조선시대 지식인의 면모를 찾을 수 있다.
이상향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작가들은 주로 어떤 이들인가? 그들이 이상향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이유와 함께 설명해 달라.
화가들은 워낙 다양한 화목(畵目)을 다루었기 때문에, 이상향을 주로 다룬 특정한 화가를 꼽기는 어렵다. 진경산수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 역시 실경뿐만 아니라 은거(隱居)를 지향하는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조선시대 화가들 중에선 조선후기 대표적 화원인 이인문이나 조선말기 화가 이방운을 꼽을 수 있겠다. 이인문은 진경산수화보다 우리가 잘 아는 <강산무진도>나 산거(山居)를 주제로 한 <산정일장도>를 많이 남긴 작가이다. 산속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하거나 자연 속에서 은거하는 삶을 추구한 것 모두 조선후기 문인들이 애호한 주제 중 하나이다. 진경산수나 풍속화 등이 유행한 당시의 풍조 속에서도 그가 전통적인 화목들을 지향하고자 했음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별도의 영상으로 관객을 만나게 된다. 최근 고미술 전시에서 디지털 콘텐츠로 전시를 진행하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아닌가 싶다.
최근 전시에 디지털 콘텐츠를 활용하는 것은 고미술이나 현대미술을 떠나 꼭 필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는 전시실 입구에 이미지화 한 단순한 영상물 하나를 설치하고 내부에는 최근 많이 하는 디지털 전시기법을 배제하였다. 오직 작품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세부를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공예품이나 대형 유물의 경우 디지털을 활용한 보조물이 그 유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만, 산수화는 멀리서 감상해야 할 작품도 있고 디지털 전시보조물이 오히려 작품을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한 전시해설 음성가이드를 운영하고 있다.
한·중·일의 대표작이 모였다. 작품 대여를 섭외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이번에 전시되는 총 109점 중 42점이 해외 박물관 소장품이다. 보통 우리 박물관을 비롯해서 해외에서 유물을 대여받으려면 최소 전시 1~2년 전에는 협의를 해야 한다. 이번에 우리가 원한 작품들은 모두 유명한 작품이라 전시 스케줄을 맞추고 협의하는 데도 많은 시일이 걸렸다. 다른 기관보다 한발 늦게 섭외하여 놓친 작품이 있었는데 매우 아쉬웠다. 또한 미국, 중국, 일본에서 여러 작품을 들여오다 보니, 기관별로 대여조건들을 맞추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전시작업 첫날 한국, 미국, 중국의 큐레이터가 한자리에 모여 작업을 하였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각국의 전시방식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업이기도 했다.
큐레이터의 입장에서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이라면? 일반 관람객을 위한 관람 팁을 제시해달라.
정선(鄭敾), 김홍도(金弘道), 이인문(李寅文), 안중식(安中植), 장욱진(張旭鎭) 등 각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이번 특별전에는, 특히 18세기 조선 화단에서 쌍벽을 이룬 이인문과 김홍도의 대작 산수도가 모처럼 대중에게 공개된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와 김홍도의 <삼공불환도>에서 조선시대 문인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나라와 개인의 삶의 모습이 아름다운 산수로써 구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폭이 무려 8m50cm에 달하는 <강산무진도>의 전장면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으며, <삼공불환도> 역시 대작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도록 전시하였다.
전체 전시 작품 중 42점은 국내에 처음 전시되는 중국과 일본의 명작들로 놓칠 수 없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문징명(文徵明)과 동기창(董其昌) 등 중국 산수화 대가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그린 <귀거래도歸去來圖>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중국 회화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명품이다.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에서 온 <봉래선경도(蓬萊仙境圖)>와 <무릉도원도(武陵桃源圖)>는 일본의 마지막 문인으로 불리는 도미오카 데사이(富岡鐵齋)의 대작이다. 여름의 더위를 잊을 정도로 시원한 대폭의 화면이 시선을 끈다.
한편 전시기간에 맞추어 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휴게공간에 디지털 산수로 유명한 황인기 작가의 <몽유도원도>가 전시 중이다. 전시 중인 옛그림과 이를 자그마한 못으로 픽셀화하여 재해석한 현대 작품을 비교해보는 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번 전시에는 애플리케이션으로 오디오가이드를 제작하였다. 오디오가이드를 받으며 작품들을 감상한다면 전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황석권 수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