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Feature] Korean Biennales 2014 Preview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
귀신, 간첩, 할머니

9.5-11.9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한국영상자료원

아시아의 개념에 질문을 던지다

<미디어시티서울>이 <SeMA 비엔날레 서울미디어시티 >로 명칭을 변경하고 9월 1일 새롭게 우리를 찾아왔다. 이름이 변했다고 내용이 달라질까? 사실 행정적인 차이가 있을 뿐 <서울미디어시티>가 가진 미디어라는 매체를 기반으로 이루워진 비엔날레라는 특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런데 이번 전시의 타이틀 ‘귀신, 간첩, 할머니’가 심상치 않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근현대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핵심 단어들의 조합이다. 식민시대와 냉전, 그리고 그 시대를 견뎌온 타자인 할머니의 등장은 전시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이번 비엔날레 감독을 맡은 박찬경은 “강력한 주제전이며 아시아 작가가 참여 작가의 주를 이루고 있다. 당대의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비엔날레는 거의 없다”며 타 비엔날레와의 차이를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국내외 17개국에서 42명(팀)의 작가가 참가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이 반영된 이 주제를 해외작가들은 과연 어떻게 읽어냈을까. 이에 대해 박찬경 감독은 “아시아 작가들은 역사적 맥락이 유사해서 쉽게 주제를 이해했으며 서구 작가들의 경우 이를 동양적 주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편적 주제로서 받아들였다”라며 “결국 전시에서 말하려는 아시아는 서구의 대상으로서 상대적인 개념도 아니고 대상화된 개념도 아니다. 구조적인 역사로 바라보면 살아있고 변화하는 역사이다”라고 설명했다. 거칠게 표현하면 아시아라는 개념의 모호성, 불확실성에 의문을 던지는 전시라고 볼 수이다. 그렇기에 전시에서는 아시아가 무한히 소통 및 교통해 온 모습을 작품으로 보여준다. 북한의 예술가와 기술자들이 아프리카 몇몇 독재 국가에 초대형 동상을 제작하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담은 최원준의 작업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는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다. 그 외에 가상의 해녀들의 위험한 일상 속 삶과 죽음을 표현한 미카일 카리키스의 <해녀>, 카일라스 산에 이르는 여정을 독특한 산의 풍경과 성스러운 영적 공간으로 표한한 자오싱 아서 리우의 <코라> 등은 이번 전시의 주제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특히 이번 비엔날레는 프레비엔날레부터 대중에게 공개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프레비엔날레에서 진행된 학자들의 토론은 여럿이 함께 주제를 잡아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번 비엔날레는 서울시립미술관 직영이 되면서 포스트 뮤지엄 비전을 내건 미술관의 특성상, 그리고 지리적 위치상 공공적 성격이 강하다. 과거 비엔날레에 15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했다고 하니 대중의 관심도가 어림짐작된다. 그렇다고 대중성을 의식하여 전시를 기획할 수는 없다. 다만 전시 참여작가이기도 한 장영혜중공업이 전시 트레일러를 만들고 배우 박해일과 최희서가 각각 국영문 오디오가이드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관객과 만난다. 이와 더불어 전시 기간 중 진행되는 다양한 행사와 교육 프로그램을 쉽게 풀어내 관객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려 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과 함께 전시가 진행되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영매(9.2~5)’,‘아시아고딕(9.11~17)’, ‘냉전극장(10.14~19)’, ‘그녀의 시간(11.4~9)’, ‘다큐멘터리 실험실(11.18~23)’이라는 주제로 평소에 보기 힘들었던 영상작품을 진득하게 앉아 관람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눈길을 끈다. “다른 전시와 달리 비엔날레를 찾는 관람객은 공부하는 태도를 취하는 특징이 있다. 그렇기에 현대미술에 대해 무작정 어렵다는 편견보다는 전시와 작업의 소통의 맥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누구나 전시를 즐겁게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이 박찬경 감독의 말이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작가 지원에 대한 노력이 눈에 띈다. 우선 양혜규, 배영환을 비롯 12점의 신작이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의 커미션으로 제작되었다. 또한 ‘SeMa-하나 미술상(가제)’이 신설되어 전시기간에 참여 작가 중 최우수 작품을 선정하여 상금 5000만 원을 수여할 예정이다. 알쏭달쏭한 주제어에 맞춰 어떤 시각미술이 펼쳐질지 궁금하다면, 시간 여유를 갖고 서울 미디어시티의 구석구석을 방문해보길 바란다. 그 속에 당신이 모르던 아시아 혹은 작가가 놓친 당신의 아시아가 펼쳐질 것이다.

임승현 기자

안드레아의 하늘

자오싱 아서 리우 Kora

양혜규

양혜규 소리나는 타원 놋쇠,니켈 도금 100×70×8cm 2013 Private collection Trets photo by Florian Kleinefenn

 

 

[Theme Feature] Korean Biennales 2014 Preview 2014 부산비엔날레

2014 부산비엔날레
세상 속에 거주하기

9.20-11.22

부산시립미술관
부산문화회관
고려제강 수영공장

세상을 살아가는 능동적인 태도

‘세상 속에 거주하기’를 주제로 내건 <2014부산비엔날레>가 9월 20일부터 두 달간의 여정에 나선다. 전체 행사를 통틀어 30개국 160여 명(팀)의 작가가 참여해 380여 점을 선보이며, 이 중에서 신작이 43점으로 구성된다.
본전시 감독을 맡은 올리비에 케플렝(Olivier Kaeppelin)은 “불안정한 현대사회에서 예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겠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계에 거주하기’란 능동적인 태도이자 생명력을 표현하는 의지”라고 강조하며, 바로 이러한 에너지와 유동성이 부산이라는 도시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고 말했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되는 본전시는 ‘추상/운동’, ‘우주’, ‘건축적 공간’, ‘정체성’, ‘동물성’, ‘역사’, ‘자연’ 7개의 키워드를 앞세워 동시대 작가들의 고민을 반영한다. 케플랭은 김수자, 쑤이젠궈, 아니쉬 카푸어, 아드리안 파시, 자멜 타타, 치하루 시오타 등을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로 내세웠다. 부산문화회관에서는 이건수 전《월간미술》편집장이 기획한 아카이브전 <한국 현대미술 비엔날레 진출사 50년>이 열리며, 큐레이터 4명(서준호, 하나다 신이치, 류춘펑, 조린 로)이 공동 기획한 아시안 큐레토리얼전 <간다, 파도를 만날 때까지 간다>가 고려제강 수영공장과 부산시민공원에서 선보인다.
이번 부산비엔날레는 진행 과정에서 전시감독 선임문제로 논란이 불거졌으며 부산문화연대가 나서서 비엔날레 보이콧을 벌이고 오광수 운영위원장이 사퇴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는 지난 6월 제도개선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직개선에 나섰다. 현재 운영위원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는 권달술 부위원장은 “부산비엔날레의 위상을 재검토하고 현지 체제에 맞게 수정할 것”이라며 강한 개선 의지를 보였다.
부산=이슬비 기자

자멜 타타 Untitled 캔버스에 유채, 왁스 220×160cm(21점) 2005

자멜 타타 Untitled 캔버스에 유채, 왁스 220×160cm(21점) 2005

[Theme Feature] Korean Biennales 2014 Preview 제6회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2014

제6회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2014
옆으로 자라는 나무

8. 29 – 11. 30

금강쌍신공원
금강국제자연미술센터

자연의 근원적 본성에 대한 성찰

<제6회 금강자연비엔날레 2014>는 비엔날레 형식으로 전환한 지 올해로 10주년을 맞는 뜻깊은 행사다. 하지만 그 역사를 들춰보면 행사의 주관인 (사)한국자연미술가협회-야투(野投)가 33년, 국제전 형식으로 전시를 개최한 햇수도 23년의 관록에 빛난다. 이번 대회의 주제는 ‘옆으로 자라는 나무(Horizontally Growing Trees).’ 김성호 총감독은 이 주제에 대해 “우리 동양의 자연에 대한 개념 역시 이러한 개체와 개체들의 조화를 담고 있다”며 “주제는 서구적이다, 동양적이다 하는 개념을 떠나서 자연의 근원적인 본성에 대해서 성찰해보자는 의도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즉 일반적으로 자연을 상징하는 나무는 수직으로 성장하나, 그것의 집합체인 숲, 자연은 수평적인 개념을 야기하며 확산되고, 탈중심적이며 개방적으로 변환됨을 의미한다.
이번 대회는 크게 야외전과 실내전으로 나뉜다. 금강쌍신공원과 금강국제자연미술센터가 각각 그 장소이며, 이곳에서 펼쳐지는 본전시에는 총 26명(팀)의 작가가 참여했다. 또한 특별전으로 <옆으로 자라는 나무_비밀정원>은 12인(팀)이 참여하는데 자연과 인공의 만남을 내러티브로 탐구하는 자연미술을 지향하는 작품이 전시될 예정이다. 부속행사로 자연미술심포지엄, 야투국제프로젝트 자연미술 여름워크숍 2014, 그리고 자연미술 포럼이 예정되어 있다.

황석권 수석기자

금강 (1)

특별전에 출품하는 윤영화의 유산에서 자연으로

 

 

 

[Theme Feature] Korean Biennales 2014 Preview 2014 대구사진비엔날레

2014 대구사진비엔날레
사진적 서술

9.12-10.19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예술발전소
공산문화회관등

사진의 새로운 정체성을 탐구하다

올해 5회째를 맞이하는 <2014대구사진비엔날레>는 ‘사진적 서술(Photographic Narrative)’을 주제로 내건다. 기계의 눈을 빌린 객관적인 기록으로서의 사진과 환경이 급변하고 표현방법이 다양해지면서 인간의 기억을 조작하고 해체하는 사진의 새로운 정체성을 들여다보고 현대사진의 경향을 다양한 시각으로 풀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주 전시는 스페인 국제사진전 <포토에스파냐(PHotoEspana)> 설립자이자 국제적인 사진전문 기획자로 활동하는 알레한드로 카스테요테(Alejandro Castellote)가 감독을 맡았다. 그는 “올해가 사진발명 175년이라는 점에 주목해 ‘기원, 기억, 패러디’라는 주제로 고전적 사진기법에서 최첨단 기술에 이르기까지 동시대사진의 다층적인 면모를 선보일 것”이라며 “18개국 30여 명의 참여 작가 대부분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된다”고 밝혔다. <전쟁 속의 여성>, <만월: 하늘과 땅의 이야기>, <이탈리아 현대사진전>으로 구성된 특별전은 대구미래대 석재현 교수, 전시기획자 이일우, 주한 이탈리아 문화원장인 안젤로 조에(Angelo Gioe)가 각각 기획을 맡아 사진을 둘러싼 다양한 함의를 조명한다.
그리고 2008년부터 시작한 작가발굴 프로그램인 ‘포트폴리오 리뷰’(송수정 기획)는 국내외 사진전문가 30여 명으로 구성된 리뷰어와 70여 명의 사진작가가 참여해 작품 활동의 역량을 높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우수작가로 선정된 경우 미국 휴스턴 <포토페스트(Foto Fest)>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

이슬비 기자

왼쪽・리처드 모스  Safe From Harm, South Kivu, Eastern Congo  2012

왼쪽・리처드 모스 Safe From Harm, South Kivu, Eastern Congo 2012

 

[Theme Feature] Korean Biennales 2014 Preview 2014 창원조각비엔날레

2014 창원조각비엔날레
달그림자

9.25-11.9

돝섬 마산항중앙부두
창원시립문신미술관
창동일대

장르의 특화된 비엔날레의 방향을 제시한다

<창원조각비엔날레>는 조각이라는 장르에 특화된 전시다. 알려졌다시피 2010년에 시작된 ‘문신국제조각심포지엄’을 모태로 하여 출발하였으며 2012년 마산합포구에 있는 돝섬을 배경으로 <제1회 창원조각비엔날레>가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전시공간을 돝섬에 한정지었던 것에 비해 이번 대회는 돝섬은 물론 마산항중앙부두, 창원시립문신미술관 그리고 작가 창작촌이 형성된 창동일대로 넓혔다. 이번 대회의 주제는 ‘달그림자(月影, The Shade of the Moon)’이며 아시아 11개국의 작가 42명(팀)이 참여한다.
이번 주제는 마산합포구 월영동에 있는 ‘월영대(月影臺)’에서 착안한 것으로 신라시대 최치원이 세운 정자의 이름이자 다양한 전설이 든 곳이기도 하다. “예술과 세계가 조화를 이루고, 나아가 예술이 삶 속으로 확산해 나가는 동시대의 예술지형을 반영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
도시 곳곳에서 열리는 전시 특성상 지역에 대한 생태연구가 선행되었다. 이에 대해 예술감독을 맡은 최태만 국민대 교수는 “장르적 특성이 두드러진 오브제를 도시에 파종하듯이 심는 것은 비엔날레가 지향할 방향이 아니다”라며 “신생 비엔날레가 국제성을 내세우면 오히려 독자성을 훼손시킬 수 있고 미약하게 만들 수
있겠다 싶어 지역성을 살리는 방향을 잡았다”고 이번 비엔날레를 설명했다.
황석권 수석기자

0718611-10

[Theme Feature]Korean Biennales 2014 Preview 프로젝트대전 2014

프로젝트대전 2014
더 브레인

11.22-2015.2.22

대전시립미술관
중앙과학관
카이스트
원도심 일원
 

뇌과학의 원용을 통한 이성과 감성의 조망

어떤 도시를 규정하는 말에는 그 도시의 역사와 문화적 정서가 숨어 있다. 대전을 말할 때 ‘과학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격년마다 펼쳐지는 <프로젝트대전>은 이 도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전시다. ‘비엔날레’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지만 비엔날레다. 별도의 전시전담 기구 없이 대전시립미술관 자체 기획으로 진행하여 올해 2회 대회를 맞이하는 <프로젝트대전 2014>는 지난 대회의 주제인      ‘에네르기(Ener 氣)’에 이어 ‘The Brain’을 주제로 삼았다. 모든 생물의 의식과 행위를 관장하는 주요 장기로서 뇌는 그 중요성에 비해 아직도 그 구조와 기능의 생리학적 규명이 이뤄지지 않아 신비로움 그 자체로 남아 있다. 김준기 학예연구실장은 “전시에서 추구하는 것이 과학예술이다. 첨단의 과학적 의제, 방법론, 문제의식, 윤리의 문제를 예술을 통해 건드리는 작업이 전시의 목적이다”라며 “가장 핫한 주제인 뇌과학을 원용해, 인지란 무엇인가, 감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총제적으로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전시 주제를 설명했다.
본전시 격인 주제기획전은 대전시립미술관에서, 국내외 작가 15명이 참여하는 과학예술레지던스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한 협업프로그램은 중앙과학관 특별전시관에서 열린다. 또한 과학자와 예술가의 협업 작업은 10명의 국내외 작가가 참여한 가운데 카이스트 KI빌딩에서 열리며, 창작센터와 스카이로드에서는 원도심프로젝트가 진행된다.

대전=황석권 수석기자

[Exhibition Topic] 올해의 작가상 2014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 공동 주최로 한국 현대미술의 역량 있는 작가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신작을 선보이는 <올해의 작가상  2014전>(8.5~11.9)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다. ‘2014 올해의 작가’ 후보 작가로 구동희, 김신일, 노순택, 장지아가 선정돼 동시대 삶과 예술을 바라보는 뚜렷한 주제의식과 각자의 고민이 반영된 작품을 펼쳐보인다.
취재・인터뷰 이슬비 기자

 

구동희 | 재생길 Way of Replay

구동희 (8)

“다의적으로 체험하는 시간”

이번 작품의 제목인 ‘재생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의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체감시간을 뜻하며, 다시 유쾌하거나 불편하거나 놀아보는 공간적 성격, 지시하는 말 그대로 되풀이되는 방법 자체를 전시현장에서 물질적으로 구현하면서 이 제목을 사용하게 되었다.
형광 노랑색 천으로 짜인 구조물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높낮이도 다양하게 만들어졌는데 관객의 어떤 공간 체험을 유도하고 싶었는가? 형광색은 작업시기가 무더운 피서철과 겹치면서 작업의 외양이 전시장 층고 대비 위아래로 꽉 차 인공적으로 부풀거나 과장돼 보이는 측면이 재미있을 것 같아 택하였다. 관람자의 체험이 이 작업의 완결성을 담보로 한 절대적 조건이나 콘셉트는 아니지만, 이왕이면 상상컨대 각각의 신체가 전시물에 안전하게 적응하는 스스로의 움직임과 무엇을 보았는가 하는 인식의 시차를 의도적으로 분리해 전후 상황을 조합하는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서울대공원의 인상과 경험은 작품에 어떻게 반영됐는가? 전시장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보다 더 기억이 나는 장소는 개장 후 대학교 재학 시까지 방문하던 서울랜드였다. 현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전시 준비 차 기구 탑승자 관점을 촬영하여 당시에는 뭐가 될지도 모르는 전체 작업의 배후 풍경이나 트랙 내 보행 시 시야를 간섭하는 요소로 사용하고자 했다. 산 중턱 전시장으로 향하는 도로 또한 이러한 기구들을 연상케 했다. 형광색 구조 중 커브 값이 커서 자세가 바뀌거나 전체 형태 조감 시 곡선이 부각되는 세 군데에 각기 다른 종류의 투 채널 트랙 운동 영상들이 들어가 있고 벽 투사용 영상에는 운동축이 다른 기구, ‘도깨비 바람’ 하나가 있다.
당신의 작업에 회전이나 나선형 구조가 자주 등장한다. 이 같은 운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롤러코스터는 원래 제자리로 돌아오는 운동이지만 <재생길>은 마지막에 점프라는 수직운동을 통해서 지면에 착지한다. 관람객의 동선을 어떻게 고려했나? 앞에 언급한 형상들은 운동의 궤적이나 패턴을 관찰하게 하거나 발생학적인 단서로서의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전작들에 겹쳐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외양상 이러한 모습은 확실히 시작점과 끝점의 경로를 연상케 하고 시간성을 주입하고 거리대비 속도 등을 시각적으로 표상하여 상태변화를 왜곡하기에도 편리한 측면이 있다. 놀이동산의 운동기구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재생길>의 운동주체도 별일 없다면 결국 돌아올 것이다. 다만 설치 전 도면제작 과정 중 관람객의 동선은 꼭 출입구 쪽 트랙에서 시작하여 막다른 벽을 마주하게 한 후 트램폴린에 낙하하게 한다는 강박적 관람 매뉴얼은 없었고 커다랗게 노출된 형광색 구조를 시각적 가이드라인으로 잡고 이의 안과 밖에 관람객의 적극적 판단 개입을 통해 위치나 경로를 취사선택하게끔 하는 분기점을 배치해 놓았다. 전시장 내 사회적 거리만 서로 지킨다면 무언가 볼거리를 찾아 급히 돌아다녀야 할 이유도 없으며 가만히 앉아 딴 생각을 하여도 무방하다.
관객이 직접 구조물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안전모를 쓰고 관람객 안전수칙 동의서에 사인을 해야 한다. 미술관이라는 제도권과 당신이 상상한 작품의 이상적인 경험 사이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가? 작업 구상 단계부터 안전모와 안전수칙 동의서를 전시장 관람을 전제로 관객에게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불특정 다수인 관람자 보호와 작품 보존의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미술관 제도의 행정적 측면과 창작과정의 확장성에 주로 가담하는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관람객의 범주는 큰 편차가 있다는 것을 전시 설치과정 중에 발견했다. 물론 양측 모두 안전에 대한 이슈가 가장 민감한 현안이라는 인식을 공유했으나 이 내용을 전시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은 다소 달랐다. 최대다수의 최저 사고발생률을 염두에 두는 공공기관과 현장에서 작업의 질적 변화를 꾀하는 나의 입장이 서로 달라 작품 제작과정에 갈등, 협상, 타협이 개입되면서 최종 결과물이 도출되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공적제도는 무사안녕과 안전을, 나는 모험과 자율성을 지지하는 묘한 입장차의 대상 자체가 작품과 가상의 관람객 간 물리적 충돌이라는 상황적 조건이었고, 이는 전시작 <재생길> 전체의 서브텍스트로 또한 적용되었다. 어찌 보면 현실을 마주하는 나의 무의식이 제안할 때 제작과정에서 이미(?) 예측된 우연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의 이상은 미술관 내 관람객의 신체에 제도적 부가장치나 작업의 연장으로서의 어색한 관객 참여형 매뉴얼을 아무리 덧대는 지원 혹은 통제시스템을 마련하더라도 경계에 대한 관람객의 공간 지각적 판단과 시각경험은 앞으로도 절대적으로 수동적 위치에 놓이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물잔과 ‘손 있는 날’이란 문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 담긴 와인잔은 관람자의 위치표지이자 전시 작품의 일부이다. 즉 전시 기간 중 불완전한 관계를 보여주는 매개물이다. ‘손 있는 날’은 말 그대로 음력기준으로 이삿날을 정할 때 운수와 방위를 예측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손’은 손님 혹은 마가 끼어 운수 없음을 뜻하며 전시를 위해 공간을 가로지르는 유동적인 영역표시이자 대물 대인 간 상호 충돌 시 언제라도 뒤집힐 수 있는 경계면으로 사용하였다.
미술과 경쟁, 수상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누군가를 걸러내야만 하는 경쟁을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살고 있다. 미술 내 경쟁 또한 현실의 일부이더라도 미술 존재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다. 수상제도는 인간이 고안해낸 성찬의 기념이지만 그 변별력이 모호해지면 가끔 예술가의 근시안적 보험이나 적립불가의 할인 포인트제도 같기도 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작가적 태도란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앞으로의 계획은? 집을 치우고 가을 개인전을 준비해야 한다.

구동희는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와 예일대 미술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했다. 서울, 슈투트가르트, 뉴욕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 미디어시티 비엔날레>, <애니미즘>(일민미술관) 등에 참여했다.

 

김신일 | 이미 알고 있는 Ready-known

김신일 (7)

“예술은 결국 마음에 대한 이야기”

작품에 문자가 많이 등장하는데 어떤 의미인가? 문자들이 겹쳐져 있어서 읽기 어렵지만 자세히 보면 읽을 수 있다. 어떤 생각을 반영한 것인가? 문자는 이성의 대표적 시각물이다. 우리는 언어, 문자를 수단으로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 활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남과 소통하려 함은 아마도 언어적 요소만으로는 그 표현에 한계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여전히 문자, 언어가 가진 힘과 작용에 많은 장점이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언어적 소통과 예술적 소통을 합하려 노력한다. 어쩌면 사회적 약속으로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는 예술의 한 기능인 소통과도 통하므로 문자를 예술에 끌어들여서 좋지 않을 것이 없다.
문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형상을 우리 식으로 단정하는 데 사용된다. 그것이 장점도 있지만 이미 내려진 정의 내에 사고가 갇힐 수 있는, 현상을 이해하거나 서술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이 오히려 현상에서 멀어진 정의 자체만 난무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할 수 있다. 이미 정해진 정보 내에서 파악되고 소통되어 정의된 것 이상으로 벗어나기 힘든 문자의 틀은 hot-media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런 hot-media를 cool-media로 바꾸는 작업이 문자 겹침이라 할 수 있겠다. 읽기 어려운 문자를 통해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고 이성적으로 읽어서 파악되는 문자가 아닌 보다 직관적으로 파악되길 바란다. 마치 시가 언어적 요소로 표현되지만 언어의 한계를 넘나드는 것과 같이 문자작품을 통해 시와 같은 역할을 해보려 한다.
‘이미 알고 있는(Ready-known)’이라는 이번 전시 주제와 전시를 위해 선택한 세 단어, ‘마음’과 ‘믿음’과 ‘이념’의 관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음이 어떤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가만히 보면 마음에 따라 선과 악이 나누어지고 때로는 대립이 때로는 화합이 나오기도,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술도 결국 크게 보거나 작게 보면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가 싶다. 어떤 출발점이 되는 마음을 알아야 더 자유로운 생각과 표현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마음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었다. 상황마다 다르게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마음의 작용을 살피려 한다. 작용 없는 정의는 정의에만 머물기에 여전히 허공에 떠있는 구름을 잡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다. 마음의 작용을 생각하다가 다양함이 ‘있는 그대로’ 있는 ‘마음’, 그 다양함이 투명막으로 만든 벽에 갇히게 되면 ‘믿음’, 그 투명막이 콘크리트 벽으로 바뀌면 ‘이념’이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마음에서 출발한 세 가지 단계, 인간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단계를 대표하는 단어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믿음은 과거에, 마음은 현재에, 이념은 미래에 가까운 것 같아 세 단어가 시공을 포용하는 어떤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Ready-known’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지성적인 면의 ‘이미 알고 있는’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수많은 정의에 의해 파악되는 정의가 앞서는 앎이고, 그 앎 이면에 이를 포괄하면서도 보다 직관적인 ‘이미 알고 있는’의 측면이 있고 그것이 예술을 가능하게 하지 않나 싶다. 전자는 문자적 측면이고 후자는 문자의 배열이 달라지고 다른 요소가 문자와 합하여 관객에게 다가오는 어떤 것 이라 할 수 있다. 둘 다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는 측면에서 마음의 작용에 대한 세 단어를 사용했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게 그대로 문자적으로 드러내서, 보다 직관적인 앎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 문자조각의 내용을 알고 나면 더 이상 이를 이해하려는 이성의 역할은 줄어들고 보다 직관적인 앎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백색의 견고한 조각에 비디오 프로젝션을 통해 빛을 투사하는 방식은 언어에 대한 어떤 고민을 반영한 것인가? 언어, 문자로 파악되는 현상은 이들이 만든 여러 정의로 인해 분절적으로 파악된다는 의미에서 비디오 이미지가 문자에 의해 깨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상적인 면에서는 문자의 이러한 속성에 단점을 제기할 수 있으나, 우리가 만들어놓은 습관이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장점을 보면 문자는 또 다른 다양함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쪼갬과 동시에 수많은 다양한 빛의 변화를 포용하는 문자라는 시각적 느낌을 나타내려 했다.
마을 풍경과 자연 풍경 사진을 픽셀이 드러날 때까지 확대한 뒤 교차시킨 영상 <42000초의 대화>는 어떤 작품인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북한산에 올라가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이미지, 누구나 촬영했을법한 두 장의 상반된 사진으로 만든 영상이다. 두 장의 사진은 달리 보면 상반된 모습만 보이고 또 어찌 보면 공통된 요소를 볼 수 있는 도시와 자연의 사진이다. 사회적 대립의 느낌이 강한 이념적 이미지로 작업하려다가 방향이 전환되어 나온 이미지다. 우리가 흔히 대립의 극치라 보는 상반된 두 가지 이념도 모두 인간의 마음에서 왔기에 어쩌면 공통된 부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만 보면 다르고, 같다고 보면 같은 요소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 않나. 다른 것은 인정하고 그 공통의 부분에서 화해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시각화하기 위해 두 이미지의 물리적 공통지점을 찾으려 했다. 서로 다른 이미지인데도 픽셀로 되었을 때는 화면상 같은 면이 있다. 이 교차지점에서 두 이미지 A와 B의 자리를 바꿔도 자연스러워 보이는 면을 보였다. 그리고 픽셀을 강조하는 이유 중엔 실제 있는 픽셀인데 우리의 물리적, 인식적 한계로 보지 못하는 세상을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면도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Ready-known’이란 마음이 미술과 생활에 끼치는 당연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보려는 주제다. 앞으로 이에 대해 지속적인 생각하고 실천할 것이다.

김신일은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뉴욕 스쿨오브비주얼아트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 히로시마, 싱가포르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아르코미술관, 백남준아트센터,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노순택 |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Sneaky Snakes in Scenes of in Competence

노순택 (4)

“분단 풍경 속에 사진은 교활하다”

이번 전시장에서 공간 구성 콘셉트는 무엇인가? 크게 두 부분이다. ‘무능한 풍경’의 장면과 ‘젊은 뱀’의 장면이 공간적으로 구분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서로 넘나들게 구성했다. ‘무능한 풍경’은 지난 10여 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사회적 갈등과 충돌, 참사의 장면을 담고 있다. 예컨대 대추리 강제이주, 용산참사, 쌍용차 살인해고,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갈등,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사태, 세월호 참사 등이다. 이러한 사건 속 풍경은 참혹하다. 잔인한 풍경이라 부를까? 아니, 지극히 무능한 풍경이었다.
‘젊은 뱀’은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목격과 기록 혹은 개입의 역할을 수행한 ‘사진’이라는 매체의 작동 풍경을 담고 있다. 사진은 다양한 시각예술의 역사에서 발명시점을 꼭 짚을 수 있는 젊은 매체다. 태어난 지 175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사진은 대중미디어의 영역에서도, 예술의 영역에서도, 그리고 우리의 평범한 삶에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빠르다. 유능하다. 사실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능한 풍경 속에서 작동할 때, 그 유능이 무능의 반대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사진은 정직하기보다는 교활하다.
그동안의 작업은 일종의 분단 목격담이라 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다양한 문제거리 중에서 특히 분단이라는 이슈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사회가 품은 복잡다단한 문제를 가로지르는 한 단어를 꼽으라면 ‘분단’을 말할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분단’이라는 필터를 통해 보면 납득이 된다.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분단모순만으로 설명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분단모순을 빼놓고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적 현장들 앞에 나와 카메라를 위치시키면서 늘 품어온 의문들, 합리의 결핍과 후안무치의 만행들이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분단’은 중요한 열쇳말이 되어주었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와 같은 재난 앞에서도 분단의 논리와 무논리는 작동한다. 유가족의 신상을 털어 사상을 검증하는 짓은 지금 우리가 분단체제에서 살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분단은 그냥 작동하지 않는다. 오(誤)작동으로써 작동한다. 나는 그 오작동의 장면들에 눈길이 간다.
이번 전시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 오히려 사진에 대한 경계가 두드러진 것 같다. 사진은 재빠르고 사실적이며 유능하다. 언뜻 투명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불투명함을 잘도 감춘다. 그러하기에 대중매체도, 시위대도, 경찰도, 그리고 예술도 그토록 사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사회 갈등의 현장에서 카메라는 진압경찰의 방패와 진압봉만큼이나, 시위대의 구호와 바리케이드만큼이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사진은 분명 ‘있는 사실’에 기초한다. 허나 프레임 안만을 보여줄 뿐 프레임 밖을 보여주지 않으며, 특정한 시점을 보여줄 뿐 사건의 전후 시점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일 것이다. ‘카메라가 나의 무기가 되어줄 것’이라는 저마다의 믿음들, 혹은 착각들.
사진의 힘을 믿지 않지만 그럼에도 사진을 계속 찍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계속 찍을 수밖에 없는 이유’란 없다. 사진의 힘을 맹신했다면 진즉 사진을 그만뒀을 것 같다. 사진은 힘이 없다. 정작 힘은 대상에 있다. ‘대상의존적’이라는 사진의 가냘픈 속성이, 그러면서도 야비한 속성이 좋다. ‘장면의 중계’가 어디까지 가능하고 어느 지점부터 불가능한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데, 그 고민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일단 ‘현장에’, ‘나와’, ‘카메라를’ 위치시키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
현장을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과 작가로서 작업 사이에서 갈등은 없는가? 갈등이 있고, 갈등이 해소될 것 같지도 않다. 갈등이 있을 법한 경계에서 작업하면서 해소를 바라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지금의 한국 현실이 ‘무능한 상황’이라면 사진은 현상의 표피를 훑는 ‘젊은 뱀’으로 표현했다. 이때 텍스트의 역할은 무엇인가? 대부분 짧은 글을, 가끔은 긴 글을 꾸준히 써왔다. 어떤 경우에도 사진을 설명하거나 납득시키려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내가 쓴 글이 사진을 ‘보완’하기보다는, 생각을 어지럽히거나 확장시키는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미술에서 경쟁과 상이라는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술에서 경쟁과 상이라는 제도는 근본적으로 쓸모없는 짓이지만, 불행히도 미술은 ‘쓸모없는 짓’을 용인하고 때론 장려한다. 아이러니는 미술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구성하는 성분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해 온 작업을 다시 보고, 분류하고, 재배치하는 와중에도 거리와 작업실을 쉴 새 없이 들락날락하는 일을 이어가려 한다. 무계획의 계획이랄까. 발신안테나보다 수신안테나를 예민하게 세워두려 한다.

노순택은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산미대학원 사진디자인과를 중퇴했다. 서울, 슈투트가르트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 광주비엔날레>, <2013 Real DMZ>, <2013 에르메스미술상전> 등에 작품을 출품했다.

 

장지아 | 금기는 숨겨진 욕망을 자극한다
Taboos Stimulate Hidden Desire

장지아  (1)

“고통과 쾌락의 경계, 해체되는 순간까지”

최근 신체에 물리적 고통을 가하는 고문을 주제로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쾌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동안 <아름다운 도구들> 시리즈를 선보였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신작 <아름다운 도구들3-브레이킹 휠>은 어떤 도구에 착안한 것인가? 신작에 대한 소개 부탁한다. <아름다운 도구들>은 2009년부터 제작해온 고문을 모티프로 한 시리즈 작업이다. 실제로 존재했던 고문의 방식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감정이나 상황, 의미들을 한 지점에 교차시키는 시도들을 해왔다. 신작 <아름다운 도구들3-브레이킹 휠>은 5년 전 구상한 작업인데 당시 준비하던 개인전에서 예산 문제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올해의 작가상 같은 기회가 주어져 예산과 공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드로잉으로만 남았을 작업이다. 전시장 중앙에는 종교적 성소 같은 흰색의 원형 천막이 설치되고 내부에는 ‘아름다운 도구들3-브레이킹 휠’이 배치되며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Breaking wheel’은 중세의 대표적 고문 도구로 공포의 상징이었다. 당시 죄수를 마차 바퀴에 묶어 원 밖으로 나온 신체를 절단하거나 뼈를 부러뜨리는 고문을 했는데 기구의 특성보다는 바퀴라는 일상적 사물이 신체를 재단하는 도구로 탈바꿈되는 상황에 공포가 가중되었을 것이다. 1950년대 사용된 마차, 전차의 바퀴들을 수집해 높이 2.5m의 새로운 기구 12개를 만들었다. 이 기구는 바퀴에 새의 털이 달려있고 구조물에 올라가 바퀴를 굴리면 바퀴둘레에 장식된 깃털이 퍼포머의 음부를 스치게 고안 되었다.
육중한 무게의 바퀴를 굴리기 위해 기구 위의 여성들은 힘을 내기 위한 노동요를 부른다. 바퀴를 힘껏 굴려 속도가 높아질수록 육체적 노동은 심해지나 육체를 둘러싼 성적욕망은 실현된다. 개막일에 여성들이 고통과 쾌락의 지점을 오가며 바퀴를 굴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12개의 기구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지극히 사적인 순간을 서로가 확인하고 노래로 응원하며 공유하는 일탈의 장을 만들고자 했다.
개막식날 선보인 퍼포먼스에 대해서 말해달라. 퍼포머들이 부르는 노래도 인상적이다. 퍼포머들은 충청도 북부 지역에서 전해오는 디딜방아 노동요의 가사에 교회에서 탐욕적 음계라며 금지했던 화성법으로 작곡된 그레고리안 방식의 성가를 붙여 부르며 노동의 고통과 성적 환희의 순간을 공유하게 된다. 12명의 퍼포머는 중세 갑옷 속에 입은 철망의 조직모양대로 짜여진 니트를 입고 시골 처녀, 성녀, 요부의 캐릭터를 섞어 놓은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고 돌림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방아를 찧을 때 부르는 노동요로 바퀴를 굴리는 행위나 방아를 찧는 행위적 유사함 외에도 상황에 의해 가사가 은유적인 성적 메타포를 갖게 된다. 이 돌림노래는 바퀴를 천천히 굴리는 걸로 시작해 마지막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단계에선 바퀴를 굴리는 속도와 노래를 부르는 속도가 최대치로 빨라져 퍼포머들의 숨이 차오고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가 다 해체되어버리는 순간까지 몰고 가고자 했다.
데뷔작이 <작가가 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2000)이다. ‘몸’의 문제가 문화적이라면, ‘신체’는 보다 구체적인 감각의 영역인 것 같다. 이에 대해 설명 부탁한다. 경계로 구분된 감각보다는 감각을 넘어서서 서로 다른 오감이 동원되거나 혼용되는 상태로 문화, 체계, 정치, 규율, 관습, 전통 등을 드러내거나 신체적 감각과 상반된 감정이 중첩된 상태로 현실을 은유적으로 또는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2004년부터 몸의 구멍에서 나오는 액체들, 침, 오줌, 피 등에 관심을 가졌다. 신체의 분비물을 다루는 이유는 무엇인가? 액체분비물은 각 기관을 통해 나온 수분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기 다른 이름과 기능, 그리고 연결될 수 있는 다른 감정들이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들 모두 얇은 막(피부)을 벗어나면 그 순간 다른 가치가 부여되고 만다. 땀이 가지고 있는 시큼함과 에로틱함, 눈물의 짠맛과 슬픔, 환희. 침의 거품과 질긴 장력, 게걸스러움 이런 것들이다. 그것은 아브젝트적(abject) 성격의 무의미함, 버려지는 것들, 기피대상 등의 개념을 넘어 하드하고 치밀한 모든 조직을 흔들어 놓는 유동적인 파장으로 작업에 등장하길 바란다.
작업에 등장하는 아브젝트적 요소들은 사적이고 미시적인 결과물, 행위들 안에 등장하면서 오히려 위기의 요소로, 스펙터클한 상황으로, 관객들 경험의 확장된 순간으로 전복된 위치를 가지길 원한다.
미술에서 경쟁과 상이라는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술에 대한 하이어라키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먼저인 것 같다. 그렇다면 yes. 하지만 하이어라키의 계층구조가 어떠한 모양새인지 알 수 없다. 다들 동의하는 같은 내용도 아닐테고, 그것이 피라미드인지, 고정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것들이 그 모양새를 움직이는지 미술제도 안의 구성만이 아닌 변화무쌍한 디테일이 개입하는 것. 그것이 미술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첨예하게 미술이, 작품이, 현 시점의 화두가 다시금 언급되는 것이 미술제도의 상이 가진 순기능이고 그 역할에 대해 긍정적이다. 작업에서 경쟁 대상은 외부에 있지 않다. 밖에서 볼 때는 치열한 경쟁으로 진행될 것 같지만 정작 작가는 본인의 작업을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녹초가 된 상태라 다른 작가를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런 불필요한 소모가 작업을 좋게 한다면야 얼마든지 하겠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당분간 쉬겠다는 결심이다. 내 몸에 대해 참 모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3년정도 제대로 쉬질 못했다. 몸이 약해지니 이상한 불안증이 생긴다. 신작으로 준비하는 전시가 올해 하반기에 열릴 예정이고 다음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개인전은 정확히 언제, 어디서 할 것인지 정하지 않았고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구체화하고 있다.

장지아는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추계예대 동양화과,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전문사 과정을 마쳤다. 대안공간 루프, 갤러리 정미소, 가인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아르코미술관, ZKM 미디어갤러리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World Topic] Go Betweens:The World Seen through Children

중개자들, 어린이라는 장르

일본 롯폰기에 있는 모리미술관에서 5월 31일부터 8월 31일까지 <Go Betweens-아이들을 통해서 보는 세계전>이 열렸다. 전시 타이틀을 언뜻 보면 어린이를 위한 전시로 생각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시는 어른의 고정된 시각이 세계를 보는 ‘상식’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어린이가 세상을 살피는, 틀에 얽매이지 않은 시각을 소개한다. 또한 아이들을 둘러싼 세상의 다양한 요소를 바라보는데, 매개자로서 아이들은 어른에게 색다른 세상 보기를 제안하고 있다.

강수미  미학,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
글 제목을 보고 우선 당신은 ‘이 글은 별로 읽을 필요가 없다’고 넘길지 모른다. 어린이미술에는 큰 관심이 없으니까. 나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의 바로 그 같은 관심의 선별이 어떤 선입관에서 연유한 것인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간과하게 하는지가 이 글의 주제다.
지난 5월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열린 <고 비트윈스: 아이들을 통해 보이는 세계(Go-Betweens: The World Seen through Children)>는 개막 시기도 그렇거니와, 전시 명을 통해서도 언뜻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어린이들의 전시’라는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5월 가족의 달부터 8월 여름방학까지, 관객 특수(特需)를 기대하고 여는 ‘대중 기획전’ 또는 ‘패키지 전시’ 유형의 하나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고 비트윈스>를 두고, 전시장 곳곳에 핑크색과 파란색의 장난감 같은 순진무구한 작품들이 즐비하고,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줄 맞춰 전시를 관람하며, 미술관 교육프로그램을 따라 아이들이 이것저것 미술 체험을 하는 현장을 눈앞에 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기획전은 그런 알록달록하고 명랑 쾌활한 전시가 아니다. 오히려 주제 면에서 보면 어른들이 고민해야 할 현실의 무거운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정서적으로는 희로애락을 복합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의미심장한 전시다. 물론 전시 부제에 보듯이 그런 현실의 문제를 어른들의 관점이나 주장 대신 ‘아이들을 통해’ 보고 느끼고 생각하도록 하는데, 우리가 이 전시를 특별히 주목할 이유가 여기 있다. 요컨대 <고 비트윈스>는 맑은 동심이라며 아이들을 낭만화하지 않는다(그것은 어른이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중심에서 밀어내는 가장 손쉬운 방식이다). 그렇다고 어른들, 특히 국내외 미술계 전문가들만의 리그에 매몰되지도 않으면서, 전시는 우리가 속한 세계의 리얼리티를 입체적으로 보게 한다. 그 리얼리티란 글로벌리즘의 시대적 조류를 좇아 문화적 다양성, 차이, 이주, 유목, 다문화, 다자적 교류가 당연시되는 사회 내부에서 불안, 갈등, 배타, 고립, 단절, 혼란의 양상이 이미 발생했고 언제나 작용 중인 실재다. 어른이자 소위 전문가인 내가 이렇게 논리적 언어로밖에 쓰지 못하는 그 리얼리티를, <고 비트윈스>는 아이들의 얼굴 표정, 몸짓, 말, 꿈, 판타지, 그리고 무엇보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 자잘하게 축적되는 내면의 일들(을 다룬 작품들)로 드러낸다.

‘어른 중심주의’가 가능하지 않은
어떤 친절한 어른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하지 않는 일이 있다.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부정적인 문제로 인식되거나 골치 아픈 일을 아이들과 나누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를 해주지도 않고, 토로하지도 않고, 의논을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문제적인 일 자체를 아이들의 삶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일은 오롯이 어른들만 겪고, 어른들만 알며, 어른들끼리만 의논하고 해결할 수 있는/해야 할 어른들 세계의 문제라고 단정한다. 피상적으로야 어린이는 사랑하고 보호할 대상이지만 실상 어른들의 무의식 속에 그들은 이미 항상 아무것도 모르고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도 별로 없는 약자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의 주인’ 또는 ‘다음세대’라는 말을 써도 그 어린 주인공들의 세계를 어른들의 세계와 단절시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어른 중심주의’다.
예컨대 2000년대 들어 싫든 좋든, 원하든 원치 않던 동시대인 모두가 따라야 할 계율처럼 된 세계화와, 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우리 대다수가 정주하는 삶이 아니라 떠돌이의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되고, 국적불문 및 지역불문의 의식주 상품과 문화 소비재를 소비하고,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며 우리나 그들도 아닌 낱알의 익명의 존재들이 된 상황을 ‘어린이’의 관점과 구체적 경험의 수준에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특히 이 질문을 학자, 비평가, 큐레이터들에게 던져야 한다. 왜냐하면 비슷한 시기부터 ‘글로벌리즘과 연관된 비판적 연구, 글쓰기, 기획’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고, 현재도 여전한 마당에 우리는 거의 한 번도 그 이슈를 어린이의 내면, 경험, 지각, 정서라는 층위에서 탐색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리미술관의 아라키 나쓰미(Araki Natsumi)가 기획한 <고 비트윈스>는 21세기 들어 우세한 가치로 떠오른 유동성, 이동성, 이질성, 혼종 등을 어른들의 시각과 판단으로 검토하는 대신 아이들의 모습, 행동, 감수성을 중심으로 들여다본다. 그렇게 해서 “다른 문화들, 현실세계와 상상세계, 성년과 유년”이 공생, 각축을 벌이는 현실의 차원을 미술로 훑어내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떠올려보자. 중년이 다 돼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타국으로 이민을 간 부모, 그리고 그 부모를 따라 낯선 곳으로 이주해야 했던 어린아이. 부모는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쉽게 받아들이거나 그곳의 이질적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교포사회 안에서 제한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 아이는 그 낯선 곳의 문화적 습속을 빠르게 습득해나간다. 그래서 차차 아이가 자신의 부모와 이민 간 나라의 사람들 간 소통 및 사회생활의 각종 일들을 맡아 하게 된다. 영미권에서는 이런 아이들을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중개자(Go-Between)’라고 부른다. 사실 차이를 뜻하는 단어 ‘difference’에서 ‘fference’는 라틴어로 ‘전달, 운반’ 또는 ‘관계’를 뜻하는 단어 ‘ferre’를 어원으로 하는데, 그럼 중개자로서 이민자 아이들은 모국과 이국 사이에서 길을 잃은 부모세대에게 차이의 문화를 전달하고 서로 관계 짓는 역할을 한다고 풀이해도 좋을 것이다. 또 다르게는, 그런 어린이들 자체가 이름 그대로 이 상태와 저 상태 사이, 익숙한 문화와 낯선 문화 사이, 자유로운 이동과 뿌리 뽑힘 사이, 다양성과 정체 없음 사이를 실존적으로(go between) 구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현존은 어른의 시각을 특권시하는 어른 중심주의만으로 파악할 수 없다.
<고 비트윈스>가 주목한 대상이 바로 그런 유년의 세계다. 전시에는 20세기 초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여자아이 사진을 통해 서구사회의 아동 노동착취 문제를 불러일으킨 루이스 하인(Lewis W. Hine)부터 한국의 김인숙과 원성원, 나라 요시토모(Nara Yoshitomo)를 비롯한 다수의 일본작가, 또 네덜란드, 호주, 핀란드 등 다양한 국적과 작업 성향을 가진 26팀/28명이 참여했다. 그리고 전시는 그 다양성을 배경으로 한 작품 속의 어린이들이 어떤 의미와 모습을 띠고 경계와 차이로 가득한 세계를 중개하고 있는지, 차이가 차별이 되는 어른 중심사회에서 어떻게 상처받거나 소외되며 왜곡에 빠지는지 등을 5개 섹션의 대규모 전시를 통해 펼치고 종합한다. ‘문화를 넘어’, ‘자유와 고립의 세계’, ‘고통과 갈등의 기억’, ‘어른과 아이 사이에 낌’, ‘다른 차원들 사이를 움직이기’가 그것이다. 섹션 주제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전시된 여러 작품에서 조명하는 ‘고 비트윈스/어린 중개자들’은 그 용어의 유래처럼 부모세대보다 강한 적응력으로 자신에게 강제 이식된 낯선 삶을 마찰이나 고통 없이 유연하게 살아내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거나 자유롭거나 행복하지 않다. 거기에는 예컨대 테레사 허바드와 알렉산더 비르클러(Teresa Hubbard & Alexander Birchler)의 비디오에서 여자아이가 즐거운 커뮤니티로부터 배제된 채 비를 흠뻑 맞으며 혼자 생일파티를 치르는 것과 같은 이방(異邦)의 서러움이 있다. 김인숙의 <달콤한 시간들>에 담긴 조선인민학교 출신 두 소녀의 성장기는 재일교포 2세, 3세의 가족사진과 더불어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한 이민자들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가며 구축한 마이크로월드를 드러내는데, 그 미시세계는 비연대기적(anachronic) 시간과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성을 품고 있다. 이는 원성원이 사진합성기법을 통해 만든 <나의 일곱 살> 사진연작 속 시간 및 복잡성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김인숙의 사진에서 착오적 시간과 문화적 복잡성은 일제 식민지배와 분단의 역사라는 외적 강압이 작은 개인을 넘어서 오랜 시간 교포사회에 파생시킨 결과다. 반면 원성원의 사진은 작가의 유년기 사적 경험과 기억을 사진의 객관성과 디지털 이미지합성 기술력을 혼합해 동심의 얼굴을 한 무시간적 가상세계로 변형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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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쿠치 도모코 Lost Boundaries 영상설치(7분) 2012 Copyright MORI ART MUSEUM All Rights Reserved.

파괴적이며 활동적인
원성원 작품 속 가상성을 야마모토 다카유키(Yamamoto Takayuki)의 <새로운 지옥> 영상설치작품과 대구로 논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이번 모리미술관 전시를 위해 4일에 걸쳐 아이들과 워크숍을 했고, 그 과정에서 선생의 경력을 살려 아이들에게 불교 만다라 등 일본미술사의 각종 지옥 형상을 가르쳤다. 아이들은 거기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해골이 눌어붙은 집, 갈기갈기 찢긴 심장, 외눈박이 귀신 등 총천연색 지옥도/설치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것에 대해 어른이 훈련시킨 발표 방식으로 카메라 앞에서 설명하는데, 작가는 최종적으로 그 영상과 새로운 지옥이미지를 함께 전시에 내놓았다. 여기서 우리는 아이의 상상력이 새하얀 도화지 같다거나 상실한 유년기가 가상의 풍요로 넘친다는 식의 묘사가 얼마나 어른들의 상투적 사고인지 새삼 느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어린아이들의 감각과 지성이 전통과 어른들의 교육에 의해 어떻게 주조되고, 그 아이들이 다시 자기 현실의 무엇을 중개하는지 두려운 눈으로 보는 일이다. 어린이란 어른의 보호 아래 고정된 일차원적 객체가 아니라 부모의 문화 속에서 태어나 그것을 먹어치우고, 자신의 문화를 만들며, 다시 그 스스로 부모의 문화가 되는 파괴적이고 활동적인 중간자인 것이다.
감상자들이 <고 비트윈스>에서 꽤나 충격적이고 어린이들의 전시로 부적합하다고 꼽을 작품은 아마도 기쿠치 도모코(Kikuchi Tomoko)의 <잃어버린 경계들> 영상일 것이다. 또 말로 꺼내기 민감한 성적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느끼는 작품은 장오(Zhang O)의 <아빠와 나> 사진 연작이 아닐까 싶다. 베이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도모코는 <잃어버린 경계들>에서 하이틴 소녀가 남자로서 연상의 여자들과 성적 관계를 맺으며 자본주의적 성장으로 흥청거리는 중국 도시의 구석을 헤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습관적 감성으로든 도덕의 이름으로든 그런 모습을 아이들과 결부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의 사진들에서는 서구에 입양된 아시아 여자아이들이 자신의 의붓아버지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른 감상자 입장에서 그 포즈들은 부녀관계로는 부적절한 어떤 육체적 관계와 성적 교환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 느낌은 머리 굵은 어른의 입양에 대한 편견이나 몹쓸 상상력에 기인한 것일 수 있지만, 또한 자신에게 강제된 삶의 조건에서 사랑받고 살아남아야 하는 입양아동의 본능이 노출된 효과일 수도 있다.
어른들이 쉽게 단정해버리는 아이들의 속성은 ‘어리고 연약하다, 순진무구하다, 귀엽고 예쁘다’는 것 등이다. 그러고 보면 어른들이 생각하는 아이라는 존재는 애완동물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고 비트윈스>의 작품들 속 여러 양상처럼 어른과 마찬가지로 각자 자기 앞의 생을 살아나가야 하는 존재다. 그들에게도 글로벌리즘은 현실이며, 소통과 관계는 어려운 문제다. 어른만이 아닌, 어린이라는 특정 지대/장르를 통해 세계를 보고, 경험하고, 판단할 필연적 이유가 그 가운데 깊게 도사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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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Betweens: The World Seen through Children전 그림책 라이브러리 광경 Photo: Sakano Takaya Photo courtesy: Mori Art Museum, Tokyo Copyright MORI ART MUSEUM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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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원 Oversleeping (from the series My Age of Seven) C-print 86×120cm 2010 Copyright MORI ART MUSEUM All Rights Reserved.

 

[World Report] Simultaneous Echoes

hola! 부에노스아이레스

한국의 젊은 세대 미디어아티스트 10명이 참여한 전시 <동시적 울림(Simultaneous Echos)전>이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7월 23일부터 9월 30일까지 열린다. 이 전시의 무대인 포르타밧미술관은 아르헨티나 4대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유명 사립미술관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현지 취재를 통해 이번 전시의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이준희  본지 편집장

전 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브라질 월드컵의 열기가 식어가는 즈음에도,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월드컵 준우승의 아쉬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 남반구에 위치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서울과 정확히 12시간 시차가 난다. 따라서 우리나라와는 낮과 밤이 반대고 계절 또한 반대다. ‘남미의 파리’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도시 전체가 전형적인 유럽 도시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오래된 유럽식 건물과 잘 정돈된 공원은 영락없는 유럽 한복판 풍경이다. 최근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디폴트(default, 채무불이행)를 선언하는 등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태지만 거리나 식당에서 마주친 시민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한국대사관 외벽엔 때마침 한국을 방문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자한 얼굴이 그려진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황이 아르헨티나 사람임을 자랑스러워 했다. 현수막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선 오히려 여유와 풍요로움이 느껴졌다. 이처럼 아르헨티나는 국민 대부분이 백인이고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여느 남미 국가와 달리 원주민의 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래설까? 그들은 문화적인 자존감과 우월의식이 넘쳐났다. 그 이면엔 침략과 점령을 통한 식민지배라는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가 감춰져 있음은 물론이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 한류 바람이 확산되고 있다. 그 중심엔 이른바 ‘K-Pop’이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의 한국 대중가요가 있다. 한국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클래식 연주자에 대한 관심도 크다.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 미술이나 현대무용 같은 순수예술 분야 교류도 점차 확대되어가는 추세다. 이와같은 문화외교의 중심에 중남미 대륙에서 유일하게 아르헨티나에 있는 중남미한국문화원(원장 이종률)의 역할이 컸다. 한국의 젊은 미디어아티스트 10명의 작품이 출품된 이번 전시 또한 중남미한국문화원에서 추진하는 문화사업 ‘K-컬처 4중주(팝, 영화, 클래식, 아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성사된 것이다.
예술매체이론 박사인 경일대 사진영상과 손영실 교수가 기획한 <동시적 울림전>이 열린 포르타밧미술관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근래 개발된 신도시 지역에 있다. 마치 바다처럼 넓은 강변에 위치한 미술관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여느 오래된 건물과 달리 현대적이다. 미술관 설계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건축가 라파엘 비뇰리가 했다. 서울 종로2가 사거리에 있는 삼성 종로타워와 도쿄아트페어가 열리는 도쿄 국제포럼 빌딩이 그의 작품이다. 그것들과 비교해 포르티밧 미술관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비뇰리 특유의 건축적 감각이 물씬 풍긴다. 2008년 개관한 포르티밧 미술관의 역사 또한 흥미롭다. 미술관의 정식 명칭은 ‘COLECCION DE ARTE AMALIA LACROOZE DE FORTABAT’. 즉 ‘아말리아 라크루제 드 포르타밧의 컬렉션을 모아 놓은 미술관’이란 뜻이다. 건물은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  1층은 카페와 아트숍 등이 있고,  2층과 3층에서 기획전시가 열린다. 이번 전시도 3층 공간을 활용했다. 지상층보다 훨씬 넓은 지하 전시장에서 컬렉션이 상설전시된다. 지하 1층 상설전의 첫 작품은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품 <Portrait of Mrs. Amalia Lacroze de Fortabat>(1980)이다. 앤디 워홀 특유의 색채로 표현된 아말리아 포르타밧 여사가  이 미술관을 만든 주인공이다. 바로 옆에 걸린 흑백 인물사진을 보면 상당한 미인임을 알 수 있다. 재밌는 사실은 아말리아 여사의 성(姓)이 원래는  포르타밧이 아니었다는 것. 유부녀인 아말리아를 보고 한눈에 반한 아르헨티나의 부호이자 시멘트 사업가였던 포르타밧(Retrato del senor Alfred Fortabat, 1919~1994)의 끈질긴 구애로 결국 아말리아는 원래 남편과 이혼하고 그와 재혼했다고 한다.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포르타밧과 재혼한 아말리아는 포르타밧이 죽은 후에도 시멘트 사업을 더욱 번창시켰고, 그러면서 수준 높은 미술작품을 수집해 미술관까지 건립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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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빈 <임상빈> 싱글채널비디오 음향 11분 35초 2013

 

백남준의 후예들
한편 이번 전시를 기획한 손영실 교수는 올해가 백남준 인공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주년 되는 해임을 전면에 내세웠다. 백남준의 인지도는 남미에서도 매우 높다. 아르헨티나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젊은 미디어아티스트를 소개하면서 그들을 ‘백남준의 후예’로 각인시킨 기획자의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백남준의 명성과 맞물려 최첨단 디지털 산업이 발달한 한국에서 온 젊은 작가들이 다양한 형식의 미디어아트 작품을 선보인다는 점은 현지 미술계로부터 관심과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참여작가 류호열, 뮌(김민선+최문선), 박준범, 오용석, 유비호, 이예승, 이이남, 이종석, 임상빈, 한경우는 2000년대 이후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한국 3세대 미디어아티스트로 구분지울 수 있다. 디지털 환경에 기반을 둔 영상과 음향, 설치 등 다양한 표현매체를 다루는 이들의 작품은 개인의 내밀한 감수성 문제부터 사회·정치적 이슈에 이르기까지 폭넓다. 손영실 교수는 “정치/문화/사회적 정체성이 재편되고 전이되면서 급격한 변모를 거쳐 온 한국 현대사회 속에서 사회와 개인, 예술과 삶, 기술과 예술이라는 이항대립적 관계에서 파생된 현상을 동시대의 시각으로 진단하고자 이와 같은 전시주제를 설정했다”고 밝혔다. 출품작가 가운데 뮌, 이예승, 이종석이 손영실 교수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직접 방문해 현장에서 작품을 설치하고 워크숍에 참여했다. 부부 작가 뮌은 올봄 코리아나미술관 개인전 <기억극장>에서 선보여 큰 호응을 받은 미니어처 권투 링 모양의 작품 <앙상블-Ethics Business>과 영상 <Set(American wooden house)>를 독립된 전시공간에 설치했다. 이예승은 오브제와 그것에 비친 그림자를 이용한 설치작업 <Cave into the cave : A wild rumor)> 새 버전과 관람객 소리에 반응해서 점멸하는 전구 작품을 전시장 곳곳에 설치했다. 그리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장면을 느린 카메라 워크로 섬세하게 표현한 류호열은 소형 모니터를 이용함으로써 관람객의 집중도를 높였다. 이 밖에도 임상빈은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는 사운드와 입모양 영상작품을 출품했고, 나머지 작가의 작품은 삼성전자 현지법인으로부터 협찬 받은 TV모니터를 통해 디지털 영상을 상영하는 방식으로 공개됐다. 이틀 동안 두 차례 전시장을 방문했을 때,  한결같이 많은 관람객이 이이남의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오랫동안 감상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미 여러 전시를 통해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거니와 작품이미지가 전시 팜플렛과 포스터 이미지로 사용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동서양의 명화 이미지를 차용해 디지털로 번안한 이이남의 작품이 서양인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
전시를 함께 관람한 중남미한국문화원 이종률 원장은 미술에 문외한이라며 겸손해하면서도 “한국은 1979년 <한국미술 5천년전> 이후로 대규모 해외전시를 찾아보기 어려운 반면,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식 해외 전시가 60여 회 열렸고, 1994년에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1945년 이후 일본미술:하늘을 향한 비명>이라는 큰 규모의 전시가 열린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대미술 경우에도 비엔날레를 통해 외국 작가를 초청하는 사례는 많지만, 한국 작가를 외국에 적극 소개하는 사례는 상대적으로 미흡하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이에 기자는 한국 현대미술을 외국에 프로모션하기 위한 세계화 사업의 일환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관했던 전시 <박하사탕전>이 지난 2007년과 2008년에 걸쳐 4개월 동안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순회한 적이 있노라 궁색하게 변명 아닌 변명으로 댓구했다. 그런가 하면 현지에서 만난 이민 2세 출신 작가 조용화 씨는 “국적으로는 아르헨티나 사람이지만 나의 뿌리는 한국” 이라며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앞으로도 한국미술의 발전을 기대하며 관심 갖고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대로 남미뿐 아니라 그동안 서구 일부 국가에 편향된 미술교류의 통로를 보다 다각화하고 넓힐 필요성을 절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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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승 Cave into the cave : A wild rumor 가변크기 설치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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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손영실<동시적 울림전>을 기획한 경일대 사진영상학과 손영실 교수

“첨단기술과 문화가 결합한 국가 이미지를 심어줬다”

아르헨티나에서 전시를 개최하게 된 계기는? 오래전부터 한국의 미디어아트 작업을 해외에 선보일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아르헨티나 중남미한국문화원이 2013~2014년 중점사업 분야를 한국미술 전시로 지정한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1년 넘게 여러 차례 전시기획안을 아르헨티나 주요 미술관에 제출했고, 이런 과정을 거쳐 올해 초 전시가 결정됐다.
현지 관객의 반응은? 아르헨티나 주요 신문기자들은 물론이고 미술 관계자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특히 개막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백남준에 대한 기억 속에서 이번 전시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왜냐면 그들은 백남준과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백남준 이후 한국의 미디어아트가 어떤 양상으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한국의 젊은 미디어작가들의 모습을 백남준과 비교해보려는 듯 작품을 유심히 살펴보고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전시를 준비하며 아쉬웠거나 어려웠던 점은? 한국과 물리적으로 먼 남미라는 점이 가장 큰 장애였다. 작품 운송이 쉽지 않은 환경에 대해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전시 기획의 첫 단계에서부터 작품 운송 문제는 크나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모니터 기반의 싱글채널 작업이 상대적으로 많이 소개됐다. 일부 설치작업은 작가가 현지에서 직접 설치했는데,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좀 더 역동적으로 보일 수 없었던 점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주년을 전시 주제의 모티프로 설정한 점은 다분히 전략적으로 보인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국가에서 백남준의 명성과 인지도는 어느 정도인가? 이번 전시는 백남준과 젊은 미디어아티스트의 미디어아트에 관한 시선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차이와 간극을 드러냄과 동시에 급격하게 개인화한 미디어의 변용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했다.
특히 전시 기간 중에 ‘한국 현대 미디어아트와 백남준의 유산들’이라는 주제의 워크숍이 포르타밧미술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2시간가량 진행된 워크숍에서 ‘한국 미디어아트의 역사와 특성’을 주제로 발제를 하고, 참여 작가의 작품을 보다 자세히 소개했다. 이 자리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호르헤 라 페를라 교수 등 아르헨티나 미술계에서 영향력 있는 전문가들이 여럿 참여했다. 그들은 한국의 미디어아트를 여전히 생소하게 받아들였지만, 백남준에 대해서는 뜨거운 관심을 표출했다.
이번 전시가 향후 전시기획을 추진하는 데 좋은 경험이 되겠다. 앞으로의 계획은? 전시 개막 직후 현지 관계자로부터 남미 순회전 제안을 받았다. 현재로서는 실행 여부를 좀 더 차분히 고민해보려 한다. 앞으로 한국 미디어아트의 담론을 확산시키고 동시에 작가들의 해외 진출을 위한 플랫폼을 제공할 수 있는 전시를 준비할 계획이다. 우선 내년에 프랑스에서 개최할 예정인 전시기획안 확정 작업을 서두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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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호열 LCD, 싱글채널비디오, 플렉시글라스 17×34×5cm 3분 2013

 

 

[Review] 김기라 – The Last Leaf

김기라 – The Last Leaf

페리지갤러리 5.30~7.31

후기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되는 갈등 등 현대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다양한 예술적 표현양식으로 다루는 김기라 작가의 개인전 <마지막 잎새>가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우리에게 공동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작가는 현대사회에 대해 치밀하게 조사하고 연구하며, 때로는 인류학적으로 다양한 문명권과 종교에서 만들어낸 방대한 이미지를 수집하는 등 현재 일어나는 사건과 삶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두 가지 질문에는 현대사회라는 거대 담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현재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분단 현실의 문제를 풀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따라서 이산가족이나 북한, 강정마을이나 노조의 투쟁 등 우리나라가 당면한 현실과 실제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전시장이 있는 건물의 로비는 온통 붉은색이다. 유리로 마감된 건물 외벽을 붉은색으로 처리하여 밖에서 보면 안이 그렇고, 안에서 보면 밖이 그렇다. 색 중에서 붉음은 맥락에 따라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축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분단 상황에 처한 우리나라에서는 그 의미가 더 강하다. 작가는 붉은 필터를 통해 우리 사회가 주입한 이념과 사상으로 인해 상대를 편견을 갖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하나의 주장이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반대편을 악으로 표현해야 한다. 우리는 붉게 처리한 유리벽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배척하는 붉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이를 인지할수록 상대편만을 붉게 보려는 심리가 작동하게 된다. 따라서 작품 제목에 사용된 ‘검열’은 단지 사회만이 아니라 개별자가 자신의 사회에서 배척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로비에 설치된 <ON-NO_양면의 대립>도 같은 의미에서 볼 수 있다. 허용하고 금지하는 기준은 사실 관점에 따라 오락가락한다. ‘O’와 ‘N’의 단조로운 조합은 메시지가 명확함에도 관객의 심리에 혼동을 가져온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 객관적 기준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다. 엄청난 폭력으로 귀결되는 대립이나 갈등은 단지 어디에 서있고,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맹신하는 기준은 사실 실체없는 ‘망령(specter)’이고, 우리나라로 치면 북한을 적대시하는 이데올로기이다. 냉면을 먹으면서 갑자기 생각난 평양이라는 단어의 가벼움, 그래서 그는 그곳에 편지를 보낸다. “밥 잘 챙겨 먹으라”는 그의 독백은 이념을 넘어 인간적인 관심을 담고 있다. 서로에게 숨을 불어넣고, 눈을 가리고 헤매기도 하며, 다른 색의 끈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움직임 등 영상에서 보여주는 갈등과 화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의지하고, 그 안에서 상대를 바라보려는 것인가. <이념의 무게_마지막 잎새>는 이산가족의 상봉을 재현하고 있다. 검은 배경에 그들의 대화만이 흐른다. 이념을 넘은 인간관계의 회복은 개별자가 자신의 기준과 의지를 갖고서 서로를 만나고자 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이번 전시에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박순영・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