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아라리오를 아시나요? “Art is Life, Life is Art”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탑동. 공항에서 차로 약 10분, 제주항 여객터미널에서 걸어서 20여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이 있다. 이렇게 좋은 입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일대는 자칫 도심 공동화 현상이 우려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다. 하지만 지난해 아라리오 뮤지엄이 개관하면서부터 다시 사람들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아라리오 뮤지엄 개관으로 심폐소생술을 받은 듯 활력을 되찾았다. 새로운 ‘핫 플레이스’로 급부상했다. 쇠락했던 제주 구도심의 분위기를 극적으로 반전시킨 주인공이 바로 김창일 회장이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컬렉터로, 그리고 뮤지엄 설립자인 동시에 작가로도 활동하며 1인 4역의 삶을 살고 있는 김 회장은 요즘도 한 달에 거의 반을 제주도 스튜디오에 머물며 작업하고 사업 구상도 한다.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 시네마 바로 옆 건물에 있는 김 회장의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Art is Life, Life is Art”

이준희 편집장

미술, 나아가 미술관에 대한 꿈을 언제부터 가졌나요?
저는 서울 남산 기슭 회현동에서 자랐어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비가 갠 후 햇빛이 쫙~ 비치면서 엄청나게 큰 무지개가 뜬 하늘을 봤어요. 그 광경은 마치 천국 같았고, 우주 같았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제 인생에 대해 자문했지요. “도대체 나는 뭐지?”라고.
아무튼 처음으로 작품을 산 건 1978년입니다. 스물여덟 살 때죠. 당시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아트페어에서 남농과 청전의 작품을 샀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신기한 게, 누가 가르쳐주거나 시키지도 않았고 얘기해준 것도 아닌데 뭐에 홀린 것처럼 제 발로 찾아가서 그림을 구입했어요. 그 다음부터 차츰 그림 보는 안목이 생겼어요. 하나에 절대적으로 몰입하다보니 감각이 진화했다고 볼 수 있죠. 저는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거나 외국 유학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한테 배운 것도 없고 오직 필드에서 온몸으로 느끼고 배운 거죠.
그래도 미술관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LA현대미술관(MOCA)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입니다. 모카MOCA는 제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컬렉션의 기준이랄까, 작품 구입을 결정할 때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원칙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말해 ‘생명’과 ‘영혼’이 있는 작품을 삽니다. 오리지널리티와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작품 말이죠. 저는 작가의 이름을 보고 컬렉션하지 않습니다. 대신 ‘생명과 영혼’이 깃든 작품이라는 판단이 서면 두 배 값을 주고라도 살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 미술시장에서 단색화 얘기가 많은데, 단색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단색화 중에서도 어떤 단색화 작품이 좋은 건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컬렉터란 어떤 인물일까요?
무엇보다 아트 컬렉터는 인격과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컬렉션 리스트에는 그 컬렉터의 인격이 반영됩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 컬렉션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 컬렉터를 존경하게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생명과 영혼’이 있는 작품을 사야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결국 나중에 돈도 벌게 되는 거고요. 처음부터 짧은 기간에 컬렉션으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면 남길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결국 10년, 20년 후에 가치가 증명되니까요.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배운 점이 있다면요?
갤러리는 생존게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모든 걸 라이브로 배웠어요. 갤러리를 하면서 실제경험을 통해 온몸으로 직접 피부에 와 닿게 공부했어요. 뉴욕에 갤러리를 냈다가 결국 손해를 봤지만, 더 큰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예방주사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무엇인가요?
2005년 라이프치히 화파를 국내에 처음 선보인 그룹 쇼입니다. 라이프치히 작가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고, 누구도 그들의 작품을 선뜻 사지 않을 때였죠. 하지만 당시 제가 보기에 그들의 작품엔 ‘생명과 영혼’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봐도 이런 전시를 유치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직접 작업하는 컬렉터로도 유명합니다.
아티스트는 하느님과 닮아가려는 존재입니다. 왜냐면, 창조하려고 하니까요.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작업하는 이유는 유명해지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지금처럼 작업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인생을 망쳤을 겁니다.(웃음) 젊어서 제 인생은 극과 극을 달렸어요. 진짜 헐크 같았다니까요.(웃음)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 평양에서 월남하신 부모님께 물려받은 제 DNA는 굉장히 착하고 말이 없고 소심하고 남 앞에 나서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었어요. 휘문고등학교 동창들한테 물어보세요.(웃음) 그런데 원하던 대학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특히 군 복무하면서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육군본부 의장대에서 근무할 때 무진장 맞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천안에서, 그것도 험한 터미널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저도 모르는 집념과 집중력이 생겼어요. 그래선지 그때는 사람 많은데 갑자기 테이블에 올라가서 노래 부르고 그랬어요. 그러면 안정감이 생기고 차분해졌거든요. 일종의 정신병이었죠(웃음)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작업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 작업하지 않았으면, 저는 지금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을지도 몰라요.(웃음)
원래 컬렉터보다 아티스트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었군요?
한때는 식당을 25개나 운영하기도 했는데, 그때 그 모든 식당 인테리어에 제가 다 관여했어요. 천안터미널에서 처음 매점 사업을 시작할 때도 당시로는 잘 사용하지 않던 알루미늄으로 직접 인테리어를 했어요. 그리고 처갓집이 있는 LA에 갔을 때, 한 식당에 들어섰는데 인테리어가 아주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식당에서 자유롭게 사진 찍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아날로그 필름카메라에 플래시 펑펑 터뜨려야 했으니까요. 허락 없이 사진 찍었다가는 경찰한테 잡혀가는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식당 분위기를 직접 드로잉 했지요. 요즘도 식당 뿐 아니라 옷집이나 카페처럼 맘에 드는 공간과 장소에서 닥치는 대로 드로잉을 한답니다. 그리고 여행할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구도를 익히게 된 것 같아요. 이런 훈련이 지금 작업에도 큰 도움이 되고요.
항상 열정과 에너지가 넘칩니다.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에너지는 방전시키지 않고 필요할 때 집중적으로 쓰는 게 중요합니다. 간혹 친구가 집을 설계해 달래요. 하지만 저는 안 해줘요. 하기 싫어요. 왜냐면, 그걸 하면 내 에너지가 방전되니까요.(웃음)
저는 사업 초기부터 운전기사와 비서를 꼭 두었습니다. 1978년에 운전면허를 땄지만 직접 운전하지는 않아요. 그 시간에 집중해서 생각을 하거나 피곤하면 자면서 에너지를 충전하지요. 그러니 기사 월급 주는 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해요. 비서도 마찬가지죠.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업무는 비서가 처리해주고, 저는 창의적인 일만 합니다. 스마트폰이나 이메일도 안 써요. 비서가 팩스로 전달해줍니다.
아라리오라는 이름은 직접 지으셨나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소심한 성격이라 남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눈에 띄지도 않았죠. 대학 두 번 떨어지곤 괜히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죠.(웃음) 그러다 대학 2학년 때 군대를 갔는데 정말 악몽이었어요. 지금은 말도 안 되겠지만, 엄청 얻어맞고, 기합 받고…. 졸병 때 헬기장에서 보초 서면서 아무도 없는 새벽에 풀벌레소리를 들으며 명상을 했어요. 완전히 킬링 타임용. 그렇게 몰입하다보니 한 시간이 십 분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가 떠올랐어요. 그때 결정했죠, 내가 앞으로 사업을 하면 회사이름을 ‘아라리오’로 정하겠노라 말이죠.(웃음) 알파벳 A로 시작하는 영어 표기로도 좋고, 한자도 없는 순수 한글이라 좋아요. 다른 회사이름도 제가 작명했어요. 우스갯 소리로 “홍도야 우지마라”를 세 글자로 줄이면 “홍도뚝”이라고 하는 것처럼, ‘야우리’라는 회사이름은 명상하던 중 떠오른 “야! 우리들만의 세상”에서 앞 세 글자를 따서 졌어요. 제주도 아라리오 뮤지엄 이름도 누구는 구겐하임 뮤지엄이나 바이엘러 뮤지엄처럼 ‘씨킴 뮤지엄’이 어떻겠냐는 의견도 주었지만, 원래 건물의 역사와 특성을 살리고자 ‘탑동 시네마, 바이크샵, 동문모텔’로 정했답니다.
막상 뮤지엄을 개관하기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요?
첫 컬렉션을 시작한 게 1978년이고, 1989년에 백화점 내에 처음으로 갤러리를 오픈해서 1999년에 문을 닫고, 2002년에 갤러리 건물을 새로 지어서 조각광장을 만들었죠. 이렇게 20년 넘게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국내외 다양한 릴레이션 십도 형성됐고, 특히 외국 미술관을 둘러보면 그날 저녁 몇 시간 동안 습관적으로 눈을 감고 낮에 본 미술작품을 머릿속으로 리와인드 합니다. 그렇다고 목적이 있는 학습은 아니고, 호텔방에서 저녁에 할 일이 없으니까 심심풀이로 하는 거죠.(웃음) 이런 과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저도 모르는 ‘촉觸’이 생겼어요.
그러고 보면 예전엔 단순하게 갤러리와 작가가 미술계를 이끌었어요. 두 바퀴 자전거 처럼요. 그런데 이제는 네 바퀴로 가는 자동차처럼 더욱 복잡해졌어요. 갤러리와 작가뿐 아니라 컬렉터와 뮤지엄이 공존공생하며 유기적으로 얽히고 관계 맺는 시대가 됐어요. 예전엔 미술관이 직접 작가를 상대했는데, 이제는 만약 죽은 작가를 전시하려면 그 작가와 관계를 맺었던 갤러리나 컬렉터를 찾을 수밖에 없어요. 좋은 컬렉터가 현대미술을 이끄는 시대인 거죠.
기존 건물의 구조와 특성을 최대한 살린 점이 눈에 띕니다.
제가 미술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시기의 작품은 대부분 페인팅이 주도했다고 봅니다. 그 페인팅에 맞는 공간은 ‘화이트 큐브White Cue’였고요. 하지만 동시대미술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페인팅뿐 아니라 비디오나 설치처럼 다양하죠. 즉 이런 경향을 소화하기에 화이트 큐브는 적합하지 않아요. 깔끔하면 재미없거든요, 새로 지어도 맛이 안 나고요. 건축이란 원래 100~200년 지나야 제 맛이 우러나요. 오래된 절에 있는 석탑처럼. 요즘에 지은 매끈한 화강암 건물은 맛이 안 나잖아요. 그래서 저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건축자재를 시멘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치 곰팡이처럼 과거의 시간과 흔적이 배어있는 거기에 동시대 작품이 조화롭게 어울리면 새로운 맛을 풍깁니다. 화음이 잘 맞는 거죠. 그래선지 건축과 학생들도 견학을 많이 옵니다.
서울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처럼 이곳 제주도 뮤지엄도 전시장뿐만 아니라 레스토랑과 수제 맥주 펍, 아트숍 등이 어우러진 ‘아트 타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제주 사람들이 이 동네를 ‘아라리오 로드’라고 부릅니다. 뮤지엄 하루 관람객을 1000명으로 목표하고 있는데,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외지에서 관광 온 관람객 비중이 60%가 넘습니다. 4월에 동문모텔Ⅱ와 편집매장이 오픈하면 제주 뮤지엄 프로젝트가 1차적으로 완성된다고 봅니다. 저는 패션이 미술관을 완성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음식점에 들어가면 무조건 음식을 먹어야 하지만 옷 가게는 그렇지 않거든요. 꼭 구입하지 않더라도 구경을 할 수 있어요. 미술관도 마치 옷가게처럼 편하게 구경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돼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의미에서 “Art is Life, Life is Art”가 실현되는 거니까요.
최근 구입한 작품은 어떤 건가요?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일본작가 다츠오 미야지마의 작품입니다. 저는 뮤지엄 디렉터는 지휘자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케스트라 마에스트로가 각기 다른 악기 소리를 듣고 전체 음악의 색깔을 구상하듯 저는 항상 머릿속에 미술관에 전시될 작품의 레퍼토리와 화음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물론 개별 작품도 중요하지만 전시의 화음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비디오작품이 이쯤에 있고, 이쯤에 회화가 걸리고, 이쯤에 설치작품이 놓여지고…. 예를 들어 탑동 시네마에 전시된 앤디 워홀 판화시리즈는 제가 250만 불을 주고 산 작품인데, 원래는 제가 10만 달러에 구입했다가 25만 달러를 받고 되팔았던 그걸 10배 값에 다시 구입했어요. 뮤지엄의 화음을 위해서요. 마찬가지로 서울 인 스페이스 5층 구석방에 있던 이탈리아 작가의 작품을 이번에 故 류인 작가의 조각으로 바꾸었습니다. 다츠오 미야지마 작품 역시 뮤지엄 인 스페스 전시공간의 화음을 고려해 구입한 거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미술관이나 롤모델이 있다면?
앞서 말한 대로 모카를 처음 보고 무의식적으로 미술관을 꿈꾸었는데, 디아 비컨Dia:Beacon을 보고 그 꿈을 실제로 이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다 둘러보고 나와서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죠. 아내와 아들이 부축해서 간신히 야외 벤치에 한참을 앉아 복기했어요. 그 미술관에서 제 상상력의 실체와 미래 비전을 보게 됐답니다. 미술을 핑계로 한 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미술관의 권력을 다 내려놓았더군요. 디아비컨을 둘러본 경험과 그 잔상이 지금 이 미술관을 가능하게 했어요.
앞으로 꿈꾸는 미술관은 어떤 모습일까요?
어쩌면 지금 뮤지엄은 예행연습일지도 몰라요. 제가 생각하는 뮤지엄의 최종은 하나의 박스형태입니다. 덩어리 같은 박스를 툭툭 던져 놓은 듯한 공간에 오직 한 작품만 있는…. 작품은 팔수도 없고, 박스-공간에 작품이 없다면 그 공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공간이 되는 그런 미술관 말입니다. 제 스튜디오가 있는 하도리에 땅 15만 평(49만5000여㎡)을 구입했습니다. 앞으로 또 다른 가능성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

탑동 시네마에 전시된 씨킴의 작품

탑동 시네마에 전시된 씨킴의 작품

그동안 발간된 작가 씨킴의 도록

그동안 발간된 작가 씨킴의 도록

 

SPECIAL ARTIST 최병소

작가 최병소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궤적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무한반복되는 선 긋기 방식으로 제작된 그의 작품은 시간과 노동이 집약된 독창적 표면으로 드러난다. 이와 같은 작가의 작품은 1970년대 한국의 주류 미술경향이던 단색조회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담은 실험미술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도 있다. 지난 40여 년간 최병소가 몰두해온 작품세계는 유의미한 인식과 행위의 결과물이다. 전통적인 회화 영역을 넘어 소멸함으로써 재탄생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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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신문용지 볼펜 54×82×1cm 2009

섬약하고도 강건한 검은 화면, 그 ‘애매성의 예술’

신혜영 미술비평

여기저기 찢기고 갈라진 새까맣고 얇은 최병소의 평면작품을 처음 접한 사람은 그 정체를 궁금해 하며 한참을 쳐다볼지 모른다. 그것은 캔버스나 종이 위에 검은색 물감을 칠한 여느 색면회화와는 다르며, 오히려 연소된 얇은 나무껍질이나 금속성의 광물질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그 둘 모두 아닌 듯하다. 다 타버린 재와 같이 금세 바스러질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오랜 시련에 더 단단해진 철판과 같은, 섬약纖弱하고도 강건剛健한 이 물질의 정체는 무엇인가.
뜻밖에 그것은 종이(주로 신문지)가 얇아지다 못해 찢어질 때까지 볼펜과 연필로 선을 긋고 또 그어 만들어낸 작가의 시간과 노동이 집약된 화면이다. 재현된 어떠한 형상이나 붓 자국도 없는, ‘회화’라는 호칭이 무색하리만큼 새로운 이 인공물artifact은 전체적으로 윤이 나면서 군데군데 비정형으로 갈라지고 찢긴 표면이 시각적이기보다는 촉각적이고, 어느 회화에서도 접해보지 못한 차갑고 저릿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최병소의 이러한 검은 화면을 회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분명 전통적인 의미의 회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종이에 볼펜으로 수없이 많은 선을 긋고 그 위에 다시 연필로 더 많은 선을 그어 만들어낸 그것은 “여러 선이나 색채로 평면상에 형상을 그려내는 조형미술”이라는 회화의 사전적 정의를 벗어나지 않는다. 마침내 전면화되어 묻히지만 수없이 반복되는 ‘선’, 색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사실상 작가가 선택한 볼펜과 연필의 검은 ‘색’, 미술의 재료는 아니지만 신문지라는 확실한 2차원의 ‘평면’, 의도적으로 그려낸 것은 아니지만 반복되는 선 긋기에 의해 드러나는 갈라지고 찢긴 무정형의 ‘형상’, 그 모두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최병소의 회화는 일반적인 색면회화와 구조적으로 전혀 다르다. 그것은 캔버스 위에 물감이 얹히는, 지지체와 안료의 고정된 관계를 탈피한 전혀 새로운 구조다. 사실상 지지체와 안료의 관계는 아주 오래전부터 최병소에게 중요한 화두였다. 안료가 칠해진 지지체를 ‘찢는’ 루치오 폰타나, 지지체를 완전히 뒤덮도록 안료를 ‘칠하는’ 바넷 뉴먼, 지지체를 안료로 ‘적시는’ 이브 클랭 등의 회화에 관심을 갖던 그는 종이 위에 아크릴 물감을 두껍게 칠한 후 뒤집어 종이를 사포로 밀어버림으로써 물감덩어리만을 남기는 지지체의 ‘소거’를 시도한 바 있다. 이렇듯 지지체와 안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최병소는 마침내 지지체를 소거하지 않으면서도 안료와 일체화하는 방법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것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올리는 면의 축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선의 축적으로서, 지지체 위에 안료가 얹히는 것이 아니라 안료(볼펜과 연필)가 지지체(신문지) 속으로 파고들어 양자가 일체 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러한 지지체와 안료의 일체로부터 본래 재료가 지닌 물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물성을 지닌 화면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신문 잉크 볼펜 연필 12×32×41cm 2009

<무제> 신문 잉크 볼펜 연필 12×32×41cm 2009

최병소 작품세계의 차별성과 고유성
이른바 “사라짐으로부터의 탄생”, 즉 “소멸하면서 태어나”1는 이러한 최병소 회화의 근원적인 동력은 주지하다시피 지지체 위에 끊임없이 선을 긋는 작가의 반복적 행위다. 신문지의 전면全面이 까매지다 못해 찢겨질때 까지 볼펜과 연필로 선을 긋는 그의 반복적인 행위는 그야말로 보통 사람은 할 수 없을 정도의 극단적인 인내와 시간을 요구한다. 작가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선을 긋고 또 긋는다. 그리고 그러한 작가의 ‘긋기’는 그 자체 자율성을 가지고 확장되어 나가다가 마침내 물질 자체가 한계에 달하는 지점에서 멈춘다. 따라서 최병소의 회화는 어떠한 결과물을 내기 위해 붓을 움직이는 전통적인 회화와 달리 행위 자체가 우선시되고, 결과물로서의 화면이 과정으로서의 행위를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선을 긋는 손이 멈추는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물질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최병소 회화가 지닌 고유함의 또 다른 요인은 재료의 선택과 그 변용에 있다. 작가가 신문지를 본인 작품의 주된 재료로 선택한 것은 그것이 “저렴하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라는 일차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신문용지를 구입해 쓰기도 하지만 그가 사용해 온 지지체는 주로 신문지와 잡지, 때로는 비행기표나 지폐 등과 같은 일상의 오브제고, 그가 사용하는 안료/매체는 물감을 묻힌 붓(화구)이 아니라 책상 옆에 굴러다니는 볼펜과 연필(문구)이다. 물론 미술사 내에서 많은 예술가가 일상의 오브제를 예술의 소재로 사용했으나, 그것들 대부분은 재료가 가진 ‘물성’에도 불구하고 ‘개념적’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최병소가 사용하는 일상의 오브제는 단지 용도와 의미를 변경하는 관념적인 차원이 아니라, 작가의 극단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 전혀 새로운 물질로 변모하는 실질적인 차원에서 작동한다.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재료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선 긋기라는 행위를 통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미적 산물을 만들어내는 최병소의 회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일상과 예술의 경계 흐리기일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최병소의 일상과 예술의 혼재는 삶과 밀착된 그의 작업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평생을 집에 딸린 작은 골방에서 잠자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음악을 들으며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는 그에게 일상과 예술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기 때문이다.
물론 최병소가 사용하는 신문지라는 재료를 단지 일상의 오브제로서만 고찰하기에는 미흡함이 있다. 그 이면에는 ‘신문’이 지닌 상징적 함의와 시대적 배경이 있다. 그가 미대를 졸업하던 1974년은 유신체제가 공포된 지 1년 남짓한 정치사회적 격동기로서, 사회 전반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침체된 분위기가 팽배했다. 당시 미술계도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작가들이 의도적으로 현실을 외면하고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단색화 사조로 편중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1960년대 후반부터 지속되어 온 – AG와 ST로 대변되는 – 한국 실험미술 작가들 일부는 현실을 그대로 외면하기보다는 예술 영역 안에서 직간접적으로 자신의 발언을 표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언론의 편파성을 비판하고자 신문을 이용해 행위예술을 선보인 성능경과 같은 작가다. 최병소의 신문 작업 역시 1970년대의 시대적 배경에서 신문이 지닌 상징적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당시 그는 매일 날아드는 신문을 읽으면서 답답하고 침통한 마음을 참다못해 신문의 내용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읽을 수 없도록 지워지고 애초에 무엇이었는지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그것은 당대의 현실을 보여주던 바로 그 신문이었으며, 그는 직접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당시 사회상을 자신의 작업에 적극 반영했던 셈이다.
이후에도 그는 줄곧 원래 화면을 뒤덮어 지움으로써, 읽을 수 없는 신문, 내용을 알 수 없는 잡지, 탈 수 없는 비행기표, 쓸 수 없는 지폐 등, 의도적으로 용도를 폐기하고 예술적 맥락에서 새롭게 탄생케 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발표했다. 짐작할 수 있듯, 최병소의 작업은 사실상 상당 부분 실험미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초창기 작업들은 그러한 성향이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1974년 첫 전시 <한국 실험작가전>과 1974년부터 5년간 참여한 <대구 현대미술제> 등의 전시에서 그는 화병에 꽂아놓은 꽃을 쳐서 바닥에 떨어진 꽃잎 몇 장을 분필로 표시해둔다거나 여름철에 전시장에 생선을 가져와 도마에 난도질하여 냄새가 진동하도록 하는 해프닝작업과 특정 장면의 사진 옆에 단어를 나열해 놓는 개념작업2 등을 선보인 바 있다. 또한 최근 신문작업 중에도 평면이 아닌 부서진 조각들은 접시에 담아두거나 책의 모서리 낱장들을 긁어 아크릴 박스 안에 세워놓는 등의 설치작업을 병행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최병소의 주된 작업은 ‘회화’의 범주 안에 있다. 또한 1970년대 당시 그의 회화는 주로 단색화로 분류된 바 있다.3 표면적으로 단색이고 물성이 강조되며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화면을 중성화하는 단색화와의 유사성 때문이었다. 특히 그러한 인식에는 그의 작업이 단색화의 대표 격인 박서보의 묘법과 – 계속해서 ‘연필’을 사선으로 ‘긋는’ – 재료와 행위 측면에서 부분적으로 유사하다는 사실이 일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작가의 작업은 방법과 개념상 상이하다. 박서보의 묘법에서 연필이 어디까지나 유화물감을 긁어내거나 밀어내기 위해 사용되는 보조도구 – 손가락, 나무, 쇠붙이 등과 유사한 – 에 해당한다면, 최병소의 신문작업에서 연필/볼펜은 화면을 전면화하는 유일한 도구다. 또한 물감이 얹힌 캔버스 위에 연필이 지나간 자리를 남겨 행위의 궤적을 드러내는 박서보의 묘법과 달리, 최병소의 작업은 신문지에 연필/볼펜의 선을 긋는 극단의 반복적 행위 끝에 결국 행위의 흔적은 사라지고 표면 전체가 균질해진 새로운 물질이 탄생한다. 이렇듯 최병소의 작업을 일정 부분 단색화와 비교할 수는 있을지언정, 온전히 그것을 단색화 사조 안에 넣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것은 그의 작업이 실험미술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결국 ‘회화’라는 결과물로 귀착돼 온전히 그 안에 머무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이렇듯 최병소는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에서 일어난 단색화와 실험미술이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던 중요한 두 사조 사이를 표류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 영역을 구축한 작가다.
작가 스스로 “그리기인 동시에 지우기고, 채우기인 동시에 비우기며, 의미이자 무의미다”고 밝히고 있듯, 최병소의 회화는 ‘애매성’을 본질로 삼는다. 선을 그리지만 결국 그것은 글자를 지우는 일이고, 선을 채우는 동안 작가 자신과 본래의 물질은 비워지며, 신문의 글자를 지움으로써 의미를 무화無化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무의미와는 다르다. 그리고 그것은 실질적으로 지지체와 안료, 과정과 결과물, 개념과 노동, 오브제와 회화, 일상과 예술, 실험미술과 단색화 등 수많은 미술사의 대립항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위치에 서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애매성’이 곧 고유함을 담보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그 사이 어딘가에서 유연하게 그만의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다. 현대미술의 중요한 논제와 사조를 관통함에도 그간 그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나 논의가 부재했던 것은 어쩌면 이러한 ‘애매성’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로 인해, 지나간 사조의 작가가 아닌 여전히 삶과 밀착해 작업을 지속하는 동시대 작가로서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가 남은 것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의 섬약하고도 강건한 검은 화면이 고유한 ‘애매성의 예술’로서 다시금 평가받길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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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신문 볼펜 연필 240×110×1cm 2007의 부분

 신문(《The Time》) 볼펜 연필 230×2250×1cm 2012

<무제> 신문(《The Time》) 볼펜 연필 230×2250×1cm 2012

최 병 소 Choi Byungso
1943년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과와 계명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75년 대구 시립도서관 화랑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6회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0년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했고 현재 대구에서 작업하고 있다.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에서 3월에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1 <소멸하며 태어나다(Birth from disappearance)>는 2006년 대구 갤러리M에서 열린 작가의 개인전 부제였다
2 그것은 허공 위에 두 마리 새가 뒤엉켜 있는 모습의 사진 옆에 ‘sky, cloud, wind, birds, flying, meeting’ 여섯 단어를 나열해 놓은 작품이었다.
3 최병소는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전>(도쿄 센트럴미술관, 1977)과 <에꼴 드 서울>(국립현대미술관, 1976~79) 등 주요 단색화 전시에 참여했다.

 

 

ARTIST REVIEW 이은우

작가 이은우의 작업은 사물의 기능과 형태나 미술과 디자인의 경계 측면에서 이야기된다. 그는 사물에 부여된 관념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사물이 다른 사물과 맺는 관계에 주목한다. 그 관계항 속에서 물건을 변형시키면서 일반적인 물건 새로운 의미와 일상의 모습을 교차시켜 나간다. 새로운 세대의 물건 고안자, 이은우를 만나본다.

물건들의 역사

이병희 독립큐레이터

여기 새로 등장한 물건들이 있다. 우선 이들은 미술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등록됐다. 한 물건의 이름은 ‘사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물건은 비록 ‘사각’이라고 하지만, 사각에 고정되지 않으므로, 차라리 사각의 파생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푸른 사각형>, 2014) 또 다른 물건은 원통에서 고안됐지만, ‘반복과 접합 그리고 배치’라는 부제를 붙이고 싶을 정도로, 여기서 ‘원’이라는 것은 하나의 참조, 혹은 클리셰에 불과하다(〈녹색 원〉, 2014). 재현을 거부하는 듯한 순수-노란색 원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일렬로 나열된 스테인리스 스틸 파이프의 좌측 중앙에 배치되자 그 재현의 거부라는 추상적 역할은 사라지고, 이 배열이 야기하는 속도감과 시각적 균질감을 방해, 혹은 차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물건 3〉, 2014). 기존 형태를 참조하는 작업은 또 있다. 수평 균일하게 나열된 철판들은 분해와 조립이라는 반복기능 자체에만 몰두하는 모듈로서 존재할 것 같지만, 이 기능을 방해하는 오렌지 색 원추 때문에 이것은 아마도 잠시 한때, 영원히 버티는 조각으로 존재할까를 고민했던 것 같다(〈물건 2〉, 2014). 이런 반복 배열은 당연히 어떤 속도감을 야기하고, 나아가 물리학적 법칙에 의해서, 당연히 시간성을 환기시킨다. 대부분 3차원에 존재해야 하는 이 물건들은 반복 배열, 분해 조립 운동을 하는 시공간-참조물이다.
재현이냐 아니냐, 쓸모가 있냐, 순수 미적 대상이냐 등의 이분법적 경계를 깨뜨리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전략으로 불린 ‘차용’ 혹은 ‘키치’였다. 물론, 이 모더니즘의 아우세대격 물건들은 이런 포스트-행위로써 선배세대의 시도들을 맥락에 ‘등록’시키는 아주 충실한 기호놀이를 했다. 그 기호 놀이가 맥이 빠진 것은 ‘상품’으로서의 물건들이 여기저기에서 마구 쏟아져 나오고, 전지구적으로 유통되고, 소비되고, 향유되면서부터다. 대다수의 물건은 현재, 등록과 폐기를 쉴 새 없이 반복하는 소모전에 처해 있다.
현대 물건들의 짧은 역사를 생각해보자. 신자유주의 시대의 물건들은 1980년대경 전지구적 대량생산의 메커니즘으로 본격 진입했다. 전지구적 대형마트 체인점들에서도 생산라인과 마찬가지로, 넘쳐나는 이 갖가지 대량생산 물건들을 배열하고 판매하기 위하여 규모 있는 배열과 수납, 저장, 배달과 조립 같은 일련의 자동적인 시스템들을 고안해냈다. 소비자의 삶의 패턴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런 일률성, 자동성은 일정 정도 폭력적이다. 즉, 전지구적 경쟁에서 엘리트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효율적으로 일들을 해치워야 하며 여기에서 물건들은 효율성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쓸모없는 물건이 된다. 아니 나아가 나쁜 물건이 된다. 왜냐면 효율적이지 않고, 일을 방해하며, 심지어 사색하게 하므로.
다른 물건들이 있다. 소위 디자인용품, 수공예품, 예술작품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런 물건들은 일종의 저작권물이다. 전지구적 대량생산 물건들에 비하자면, 대부분은 한정된 수량으로 생산되는 소수의 엘리트 물건, 혹은 소수의 사적인 물건들이다. 이 물건들을 선호하는 자들은 이것을 딱히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해서 구매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복합적인 욕망을 교차 투영시킨다. 가령 예쁘다, 오래 간직하고 싶다,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 같다, 제작자의 손길이 느껴진다, 뭔가 유일한 것을 갖고 있다는 느낌에 자아가 숭고해지는 것 같다 등 여타의 개인적인 욕망들이 투영될 여지를 반영한다. 이 소수의 저작권, 혹은 엘리트 물건들과 대량생산물과 비슷한 점이 있다면, 등록된 물건이라는 것이다. 다른 점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차원에서 취향이 반영된 문화생산물이라는 점이다.
물건의 약사에서, 인간사로 논의를 돌려보자. 얼마 전에 파리에서 한 언론사에 대한 총기사건이 벌어졌다. 프랑스의 젊은 청년들이 언론인과 노인 삽화가를 죽인 일이었다. 발단은 성스러운 인물에 대한 각기 다른 표현방식과 그것의 소비에 있었다. 하나는 매우 천박하게 조롱함으로써 그 아우라를 발가벗기는 스타일을 대량생산해내는 시스템 속에서의 소비. 다른 하나는 역사적으로 해온 습관 그대로 성스러운 영역을 보존하려는 숭고의 논리. 물론 이런 성스러운 것 혹은 숭고한 어떤 유일성과 천박한 대량의 복제 사이에는 항상 갈등이 있어왔다.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 아트와 상용품(대량생산), 전통과 현대(키치), 남자와 여자(출산이라는 복제) 혹은 이성애중심주의와 LGBTIQ lmnop(성소수자 인권단체) 등의 사이에서처럼.
현대에 이르러 이런 갈등들은, 물론 새롭지 않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이 갈등 사이에서 배태된 세대들이 자행하는 폭력의 잔인함 냉소적 강렬함이다. 아주 오래된 역사적인 갈등 속에서 왜 총으로 해당 대상을 매우 잔인하게 일일이 쏴 죽이는 사건을 파생시키기에 이르렀냐는 것에, 그토록 노력한 어떤 휴머니즘적,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예술적 기타 등등의 노력은 도대체 뭐였냐는 질문에 이르는 것이다. 노력과 애증의 결과로 겨우 낳은 자식세대가, 어째서 그들의 할아버지 세대를 처단하기에 이른 것인가.

〈물건2〉 철판, 우레탄 페인트, 고무줄, pvc파이프, 목재, 73×40×40cm 2014

〈물건2〉 철판, 우레탄 페인트, 고무줄, pvc파이프, 목재, 73×40×40cm 2014

〈물건 3〉 철판, 우레탄 페인트, 스테인리스 파이프, 크리스탈, 102×212×65cm 2014

〈물건 3〉 철판, 우레탄 페인트, 스테인리스 파이프, 크리스탈, 102×212×65cm 2014

물건들의 위계질서
물건들 사이에도 위계질서와 갈등이 있다. 대량생산물이라는 어떤 천박함과 예술작품이라는 어떤 숭고함 사이에 놓여있는 차이들은 그것의 생산 메커니즘과 소비-소유 메커니즘, 그리고 엘리트주의 속에서의 서술과 단순 사용 매뉴얼에 이르기까지 그 차이들은 잔인할 만큼 극단적으로 차별화된다. 오늘날의 인간사가 그렇듯이, 그 물건들의 위계질서는 상품들의 위계질서로 대체됐을 뿐 갈등의 메커니즘 자체는 불완전한 역사가 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어떤 물건이 감정이 있거나, 적어도 기억장치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젠가 물건들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애도하며,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획일적인 대량생산물의 글로벌한 유통과 소비, 숭고한 예술작품들의 전지구적인 키치화와 나아가 새로운 특정 예술-상품으로의 재생산. 이 둘 사이 교배에 의해서 태어난 새 세대의 물건들이 적어도 인간계와는 달리 뭔가 극단적인 액팅아웃을 하지 않는 것은 약간 다행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결코 순수 온화한 존재들일 수는 없다. 때로 그들은 매우 공격적이고 직접적이다. 동시에 때로 방어적이며, 때로 거부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처한 맥락 자체가, 유사-역사, 유사-메커니즘이라는 (가상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이들은 전 세대처럼 ‘그것이 아니오’라는 모더니즘적 히스테리 반응을 모른다. 즉, 히스테리적 증상이 없는 한, 극단적인 액팅아웃도 생기질 않는 것이다. 그것이 폭력적이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일단, 지금의 물건들이 하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는 ‘소비 혹은 소모’, 다른 하나는 ‘그럴수도 있겠죠’ 라고 하고는 딴 짓 하기.
근-현대에 적어도 한 번쯤 역사는 반복됐다. 1960~1970년대를 거쳐 반성된 움직임은 1980~1990년대를 거치면서 ‘포스트’ 혹은 ‘유사’ 혹은 ‘차용’의 메커니즘으로 반복됐다. 이제 역사는 그 포스트-역사를 참조하는 듯하다. 참조란 행위는 역사로부터의 어떤 거리감, 즉 객관성이 어느 정도 생겼고, 그것을 다른 차원으로 변형시킬 준비가 됐다는 증상적 행위다. 이 참조란 행위는 쉽게 관심을 돌리는 행위라고 하겠다. 사실 역사에서, 관심의 몰두 혹은 집중과 분산 사이에서 갈등했던 히스테리적인 반응이 사이코패스나 히키코모리와 같은 질병적 상태를 더 많이 잉태했기에, 현시점에서의 관심 돌리기, 환기 역할은 중요하다. 물론 새 세대의 물건들이 새로운 페티시의 재영토화할지, 아니면 거부와 그것의 반복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히스테리적 반응의 반복이 될지, 혹은 실로 취향의 차원에서 관심 밖의 어떤 차원이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새로운 미술공간에서 먼저 등록된 물건들을 예로 들어보자. 이들은 모더니즘적 숭고함과 포스트모더니즘적 키치 사이에서, 순수미술형태와 용도 사이에, 형태와 색깔과 배열 사이에 있다(존재한다). 그런데 이 물건들은 이 거부와 동경, 쓸모와 특수성 사이에서 존재하는 어떤 in-between의 존재감을 만끽하는 듯하다. 이들은 단단해보이고, 견고해보이며, 더욱 강해지고, 더욱 날렵해지고, 메커니즘적으로 시스티믹해지려는 듯하다. 물건에도 욕망이 있다면, 이런 in-between적인 상황에서 교배되고 태어나 이 세상이 놓였을 때 그들의 유전자를 무관심하게 대상화시키는 ‘object’가 되려는 게 아닐까. 즉, 이들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근친상간적 교배의 산물임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하지 않는다. 적어도 억압으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가 생긴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물건 고안자의 이름은 이은우. 디자인 툴을 사용하여 오브제를 구상하고, 업체에 프린팅을 맞긴다. 물론 제작을 맞긴다고 해야겠지만, 왠지 지금은 ‘프린팅’이란 말을 쓰고 싶다. 아마도 이 제작자는 앞으로도 어떤 특정 물건들을 참조, 변형시키고 역사적, 일상적 여타의 물건들이 환기시키는 기존의 아우라를 끊임없이 교차-통풍시켜 나갈 것으로 보인다. 보다 자세한 제작과정이나 전시 장면, 평면작업에서 오브제 작업으로의 변화과정, 레디메이드 설치 과정과 공간작업, 그리고 미술사적인 참조 등은 제작자의 홈페이지를 참조하라. 나는 최근 이 제작자의 오브제 작업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했다. 나는 변화에 있어서 과거를 소급해서 서술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그보다는 실제로 단절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이은우의 최근 작업이 명쾌한 어떤 출발선으로 보인다. 이들은 부모세대와 말끔하게 단절하고, 영리하게 앞으로도 한동안은 반복, 재생산되면서 스스로를 속도감있게 참조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

〈시공사례 1〉〈시공사례 2〉 합판, 타일, 몰딩, 폴리우레탄 바퀴, 조명, 벽지 가변크기 2012 문화역서울284 설치장면

〈시공사례 1〉〈시공사례 2〉 합판, 타일, 몰딩, 폴리우레탄 바퀴, 조명, 벽지 가변크기 2012 문화역서울284 설치장면

 

〈특정물건〉 간유리, 반투명거울, 무늬유리, 색유리, 망입유리, 원목, 2013 아트스페이스풀 설치장면

〈특정물건〉 간유리, 반투명거울, 무늬유리, 색유리, 망입유리, 원목, 2013 아트스페이스풀 설치장면

이 은 우 Lee Eunu
1982년 출생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예술사와 동 대학원 전문사를 졸업했다. 2009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린 개인전을 시작으로 2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2005년부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오는 3월에 아트선재센터 라운지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WORLD REPORT 칼 안드레 : 장소로서의 조각, 1958 – 2010

서구 미니멀리즘의 태두 칼 안드레(Carl Andre, 1935~). 그를 정의하는 말은 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지난해 5월 개막한 그의 대규모 회고전 <칼 안드레: 장소로서의 조각, 1958~2010(Carl Andre : Sculpture as Place, 1958~2010)>이 뉴욕 디아: 비컨에서 3월 9일까지 계속된다. 여타 미니멀리스트와 확연히 구별되는 시적인 그의 작업이 전시공간과 어우러져 그 자체의 물성을 한껏 드러낸 자리였다.

살아있는 미니멀리즘의 전설을 만나다

서상숙 미술사

칼 안드레의 작품은 심플하다.
바닥에 깔린 사각형 동판들의 규칙적인 반복, 낮은 담처럼 쌓여 있는 벽돌들의 소박함, 무심하게 뿌려진 듯한 금조각들의 빛남…. 그리고 고대의 문화 유적처럼 묵직하게 서있는 목재들. 그의 작품이 전시된 공간은 늘 침묵한다.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작품들이 남겨 놓은 텅 빈 공간, 자연에서 발굴된 원재료에서 읽히는 시간성, 단순한 선과 면이 이루어내는 직설법의 리듬. 미니멀리즘의 선구자 칼 안드레Carl Andre, 1935~의 50여 년에 걸친 작업을 모은 뉴욕주 디아:비컨의 전시장을 걷고 바라보며 떠오른 단상들이다.
이 미술관에 장기 전시 중인 도널드 저드, 댄 플래빈, 솔 르윗, 로버트 스미드슨 등 그와 동시대의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철저히 공업적인 차가운 작품들과 달리 안드레의 작품은 시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허드슨 강변의 나즈막한 언덕 위 나무숲에 둘러싸인 디아:비컨 미술관은 1960년대 미니멀리즘 작업과 그 후의 현대미술품을 소장 전시하는 곳이다.
뉴욕시 맨해튼에서 북쪽을 향해 자동차로 한 시간쯤 올라가다 보면 이르게 되는 작은 도시 비컨에서 디아 미술재단 Dia Art Foundation이 운영하는 디아:비컨은 2003년 문을 열었다.
칼 안드레의 회고전 <장소로서의 조각Sculpture as Place, 1958–2010>은 지난해 5월 개막해 오는 3월 9일까지 진행된다. 올해 80세의 그는 미술사에 기록되는 미니멀리즘의 거장이지만 미술관 규모의 서베이전으로는 처음이고 미국에서는 1970년 구겐하임에서의 회고전 이후 45년만이다. 1985년 부인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고 그 사고와 관련해 범인으로 지목되어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그후 자신의 전시 오프닝은 물론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은둔자의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미술계에는 그의 유죄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 회고전이 시작된 지난해 5월에 뉴욕시 첼시의 디아갤러리 앞에서 벌어진 작은 시위가 화제가 되었다. 이들은 길바닥에 플래카드를 붙이고 (마치 안드레의 조각처럼) 시를 읽은 후 (안드레의 시 작품처럼) 피가 흐르는 닭의 내장을 바닥에 쏟아 붓고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러나 뉴욕에서의 전시는 지속되었고 미국에서는 그의 딜러인 파울라 쿠퍼 갤러리를 통해 작품을 발표해왔다. 1958년부터 2010년까지—안드레는 몇 년 전 공식적으로 은퇴했다—작업한 조각품 45점과 160여 점의 구조주의 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만든 종이작업 등이 그가 직접 만든 전시상자에 넣어져 전시되었다. 특히 지금까지 소개된 적이 거의 없는, ‘다다 모조품’이라고 불리는 아상블라주 작품, 사진 등이 함께 선보여 흥미롭다.
“내 작품의 주제를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가지는 엄청난 잠재력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는 안드레는 작업에서 재료의 물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번 전시 카탈로그에는 그가 쓴 재료를 금속, 광석, 자철광, 합성재료, 나무, 풀 등 유기재료로 나누어 도표를 만들었는데 무려 100여 종에 달한다. 안드레는 1960년대 전시포스터를 화학기호표처럼 만들 정도로 초기부터 한 가지 재료의 물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이같은 작업을 그는 “물질을 물질화한다matter mattering”고 축약한 바 있다.
안드레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작업실을 가져본 적이 없다. 전시할 곳에 도착해 전시공간을 확인한 후 주변을 돌아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물건을 줍거나 누군가의 소유라면 얻기도 하고 전시가 끝난 후 돌려주기로 하고 빌리기도 한다. 아니면 그 지역의 철공장이나 목공소 등에 벽돌, 나무, 철판, 스티로폼, 금 혹은 은 등을 사각형이나 원 같은 가장 단순한 형태, 특정한 크기로 잘라달라고 주문한다. 이렇게 구해진 재료들을 그 물성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색도 칠하지 않고 변형시키지 않은 채 그가 직접 하나 하나 전시장 바닥에 배열하거나 쌓는다. 따라서 주문하는 재료의 크기는 그가 직접 옮길 수 있는 크기와 무게이며 전체 완성된 작업도 작가가 신체적으로 움직여 닿을 수 있는 크기에 한정된다. 못이나 접착제 등은 전혀 사용하지 않아 전시가 끝나면 쉽게 수거해 다시 되돌려주거나 차곡차곡 쌓아 보관할 수 있다. <조인트Joint>는 1968년 작으로 건초더미 183개를 길게 한 줄로 늘어놓은 작품이다. 167m 길이의 이 작품은 이번 전시를 위해 디아 비컨 미술관 야외에 재현되었는데 10개월에 걸친 전시 중 짐승들에 의해 옮겨질 수도 있고 먹힐 수도 있으며 날씨에 따라 썩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전시가 끝나면 쓰레기로 처분된다.

Installation view, Carl Andre: Sculpture as Place, 1958–2010, Dia:Beacon, Riggio Galleries, Beacon, New York. May 5, 2014–March 2, 2015. Art © Carl Andre/Licensed by VAGA, New York, NY. Photo: Bill Jacobson Studio, New York.

Carl Andre: Sculpture as Place, 1958–2010, Dia:Beacon, Riggio Galleries, Beacon, New York. May 5, 2014–March 2, 2015. Art © Carl Andre/Licensed by VAGA, New York, NY. Photo: Bill Jacobson Studio, New York.

“재료의 물성만이 나의 관심사”
1966년에는 한 컬렉터가 작품을 사겠다고 하자 작품값만큼의 네모 반듯한 금괴 하나를 주문해주었다. 0.37×67.6cm 크기의 이 작품의 제목은 <금밭Gold Field>
이었다. 그가 국제적 명성을 얻은 첫 작품, <520 오래된 도시의 사각형들Altstadt Rectangles>은 1967년 독일 뒤셀도르프의 콘라드 휘셔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으로 100장의 얇은 철판Hot–rolled Steel, 열간압 연강을 타일처럼 갤러리 바닥 전체에 깐 것이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긴 통로처럼 생긴 전시장에 들어와 벽에 걸린 작품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이 작품을 밟고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관람객이 작품을 밟도록 한 것은 그때까지 조각의 개념을 뒤바꾼 것으로 마르셀 뒤샹이 가게에서 산 변기를 그대로 전시한 이래로 현대미술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도전이었다. 이 때문에 일부 이론가들은 안드레의 작품을 개념주의 작업으로 보기도 했으나 작가 자신은 “재료의 물성만이 나의 관심사”라며 부정했다.
안드레가 작품에 관람객을 포함시킨 이후 현대미술은 장소특정적site-specific, 퍼포먼스, 인스톨레이션(설치), 프로세스 아트 등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장르가 무너지고 만드는 이와 보는 이의 경계도 없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1960년 여름 뉴욕의 그린갤러리에서 열린 마크 디 수베로Mark di Suvero의 작품전에서 전시대를 없애고 바닥에 직접 놓은 조각을 보고 감명받은 안드레는 이렇게 말한다. “프랭크 스텔라가 조각의 개념을 바꿀 전시가 있으니 꼭 봐야 한다며 나를 데려갔다. 그 이후 더이상 작품대에 올려놓는 조각bench–top sculpture은 할 수 없었다. 그 전시는 나에게 바닥에서 직접 솟아 올라오는 조각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새로운 시도가 언제나 그렇듯 안드레의 작품 또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게 미술이냐?”는 아직까지도 그의 작품에 따라다니는 의문이다.
1976년에는 영국의 일간 《데일리 미러》가 테이트 미술관이 구입한 벽돌 120장으로 이루어진 <등가 V III Equivalent V III>(1966/1969)에 대해 “이런 쓰레기 더미를!”이라는 제목으로 예산 낭비의 대표적 예로 들어 1면에 실었다. 안드레는 일명 ‘벽돌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다. 960장, 8개의 단위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팔린 작품에 쓰인 벽돌 120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벽돌공장에 돌려 주었다고 한다. 칼 안드레는 어디를 가든 트레이드 마크인 가슴받이와 멜빵이 달린 블루진 작업복을 입고 다녀 공사장 인부를 연상케 한다. 매사추세츠 주 퀸시 출신인 그는 할아버지가 벽돌공이었고 아버지는 해군 조선소에서 배를 고치는 일을 했으며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철판과 나무조각, 그리고 연장을 가지고 놀던 어린시절, 현 뉴욕철도사 암트랙의 전신이던 펜실베이니아 레일웨이의 보수공으로 일한 경험들이 자신의 작업 원천임을 누누이 밝혔다.
그는 명문 사립교인 필립스 아카데미를 장학금을 받아 다녔는데 대학을 가지 않은 안드레에게 이곳에서 받은 교육은 정규 미술교육의 전부다. 뉴욕에서 고교 동창인 작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1936~와 아방가르드 영화감독 홀리스 프램프턴Hollis Frampton, 1936~1984 등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가의 길을 가게 된다. 특히 그의 작업은 프랭크 스텔라의 스튜디오를 함께 쓰면서 스텔라의 초기 블랙페인팅에 영향을 받았다. 스텔라가 그의 조각되지 않은 나무의 단면을 가리키며 “이것도 조각”이라고 말한 것에 아이디어를 얻어 현재의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50여 년이 지난 후에도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세련되어 보인다. 마치 미술의 법칙을 일깨우고 나아가 삶의 정곡을 찌르는 듯한 단순함의 힘이 그 어느때보다 강렬하게 다가온다.
안드레는 2010년 미니멀리즘의 메카인 텍사스의 치내티 재단Chinati Foundation 건물과 건물 사이의 야외공간에 그의 마지막 작품인 <Chinati Thirteener>을 설치했다. 또 이번 디아 비컨전과 2013년 파이돈에서 출판된 모노그래프 책 발간을 계기로 30년의 침묵을 깨고 오랜만에 인터뷰에 응하고 전시를 준비 중인 디아:비컨을 직접 방문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매일 밤 술에 취해 있던 나를 구해준 사람”이라고 부르는 4번째 부인이자 작가인 멜리사 크레취머Melissa Kretschmer, 1962~와 뉴욕대학 근처 아파트에 살고 있다. 2013년 《인터뷰》지에 실린 친구이자 미술비평가인 바바라 로즈와의 대담에서 안드레는 노자의 말을 인용했는데 격동적으로 살아 온 그의 인생에 대한 담담한 소회를 듣는 것 같아 흥미롭다.
“훌륭한 여행자는 정해진 계획이 없으며 도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자이다.” ●

Installation view, Carl Andre: Sculpture as Place, 1958–2010, Dia:Beacon, Riggio Galleries, Beacon, New York. May 5, 2014–March 2, 2015. Art © Carl Andre/Licensed by VAGA, New York, NY. Photo: Bill Jacobson Studio, New York.

Carl Andre: Sculpture as Place, 1958–2010, Dia:Beacon, Riggio Galleries, Beacon, New York. May 5, 2014–March 2, 2015. Art © Carl Andre/Licensed by VAGA, New York, NY. Photo: Bill Jacobson Studio, New York.

맨위 <Breda>(사진 앞, The Hague) 97개의 석회암 , 1986 Courtesy the artist and Konrad Fischer Galerie, Düsseldorf <Neubrückwerk>(사진 가운데, Düsseldorf) 19개의 나무 1976 Musée d’Art Contemporain, Montreal

EXHIBITION FOCUS Anxiety and Desire 류인 작고 15주기 기념 개인전

 

요절과 천재라는 수식어가 동시에 붙는 조각가 류인(1956~1999).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주년을 맞았다. 故 류인은 김복진에서 권진규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 구상조각의 계보를 잇는 조각가다. 사실주의적인 인체형상을 바탕으로 드라마틱한 조형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그의 조각은 인간 내면의 본질을 담고 있다.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에서 <Anxiety and Desire>이라는 타이틀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1월 20일부터 4월 19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는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초 공개작에 이르기까지 생전에 그가 창조한 작품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기회다.

류인이라는 조각적 사건

김종길 미술비평

형상조각이 공간과 장소의 성격을 뒤흔들고 급기야 그 성격마저 미학적 개념으로 변화시킨 대표적 예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일 것이다. 그것은 기념비가 아니라 조각이 서 있는 그 장소의 상징이고, 칼레시市를 재사유하게 하는 예술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로댕은 <칼레의 시민>을 세우기 위해 좌대를 두지 않았다. 로잘린 크라우스가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이라 말하며 무위계성無位階性, 무위상성無位相性의 현대조각을 로댕에게서 찾은 이유다. 그의 조각은 그렇게 대지 위에서 인간과 눈 맞춤하며 가장 인간적인 현실주의 미학과 만났고, 새로운 형상조각론의 출현을 예고했다.

 FRP 철350×130×228cm 1993

<부활-조용한 새벽> FRP 철350×130×228cm 1993

< Their Attributes > 철 브론즈188×325×85cm 1995

조각의 혼(魂), 몰입과 감동의 거리
류인의 조각에서 로댕의 무위계적, 무위상적인 조각정신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의 조각들 또한 좌대 위가 아니라 대지 위에 섰을 때 그 미학적 상징어가 파닥거리며 싱싱하게 살아난다.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이하 아라리오)에 들어찬 그의 조각들은 갤러리 공간의 여백까지 밀도를 한껏 높이는 조형적 에너지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낯선 추상적 공간이었을 것이 분명한 갤러리 공간이 그의 조각들과 만나서 통감각적 체험의 구체적 장소들로 변환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공간이 조각에 장소성을 부여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듯 조각이 공간을 곧장 ‘장소화’ 해버리는 이런 미학적 사태는 흔치 않다. 도대체 류인 조각의 무엇이 이런 사태 즉 ‘조각적 사건’을 형성하는 것일까?
작고 15주기를 맞아 기획된 <불안 그리고 욕망>전은 추모전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운 전시지만 그동안 우리가 기존의 연구를 바탕으로 류인을 인식했거나 그렇게 인식했던 것의 신화적 관념을 고착시키지 않도록 유도하는 새로운 측면이 있는 것 같다. 2004년 모란미술관에서 기획한 작고 5주기 추모전과 달리 이번 전시는 ‘15년’이라는 시간성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조각의 존재론적 현상이 새롭게 드러나는 것이다. 안타까운 요절에의 추모가 끝나고 그와 그의 조각을 차분히,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다시 주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예술에는 ‘시간의 눈’으로 보아야만 보이는 그 어떤 실체, 진리, 상징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아라리오 전시장을 채운 류인의 작품들은 그 이전의 전시들에서 느낄 수 있었던 ‘혼의 미학’으로서의 격정적 조각미와 달리 조각들이 조각작품으로 보이는, 오롯이 인간 류인이면서 조각가 류인이고 그래서 그의 조각이 순수하게 인간의 조각임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연출했다. 그것은 마치 연극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보여준 이른바 소외효과疏外效果 alienation effect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객이자 비평가인 ‘나’를 몰입과 감동의 지점으로부터 일정 거리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역설적으로 주제의 핵심에 더 가까이 가도록 유인하는 전략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것은 누구의 전략이었을까? 큐레이터일까, 아니면 15년 전에 작고한 류인이었을까?
이번 전시 <불안 그리고 욕망>은 우리를 다시 류인의 앞자리에 불러 세운다. 그 자신을, 그가 세운 조형론의 피고인이자 피의자로 소환해 놓은 셈이다. 그는 우리에게 그를 ‘낯설게 하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왜 그의 조각들이 자연의 신화와 이종교호異種交互하면서 인간의 조각으로 세워졌는지, 또 각각의 조각들이 하나의 조형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전체적 조형 사건들과 긴밀하게 연결되는지를 묻는다. 어쩌면 바로 그 부분에 “공간을 ‘장소화’하는 조각”으로서의 샤먼적 토테미즘이 있을 것이고 조각적 사건의 진실이 숨어 있을 것이다.
호해壺孩는 단지에서 나온 수로왕이요, 마란馬卵은 말 곁의 알에서 탄생한 혁거세의 탄생신화다. 혁거세가 나고 5년 뒤, 용이 알영의 우물에 나타나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류인의 <아들의 하늘>은 두 개의 알에서 깨어나는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다. 알을 깨고 일어선 아버지가 한 손은 깨어 나오는 알을 딛고, 한 손으론 아들의 알을 받치고 있다. <지각의 주>는 <아들의 하늘>과 이어지는 미학적 구조를 갖는다. <지각의 주>는 다만 알이 아니라 생명 탄생의 모반이 대지일 뿐이다. 이러한 탄생신화의 원형에 대해 미술평론가 최태만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아브락사스Abraxas의 상징을 빗대어 분석하기도 했다.
용龍은 신화 속 상상이어서 실체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여섯 동물의 부분을 조합해서 용을 그렸으나 사실 그 실체를 변태變態에 있다. 이무기가 용이 될 때 빛(번개)이 터진다. 용의 실체는 빛光이어서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욕망에 휩싸여 있어서 쉽게 용이 될 수 없다. 인간의 불안, 인간의 욕망은 그래서 일그러진 이무기일 뿐이다. <지각의 주>가 빛龍으로 깨어나는 ‘참나眞我’로서의 인간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숨소리Ⅱ>는 다다르지 못하는 이무기(욕망)의 한계상황을 드러낸다. 거대한 뱀의 입에서 토해지듯 솟구치는 벌거벗은 육체를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지각의 주>에서 <입산>까지의 연작에는 ‘몸뚱이로서의 나’인 육체적 ‘몸나’에서 ‘참된 나’로서의 ‘참나’로 변태하고자 하는 작가의 미학적 열망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인체만이 아니라 입방체로 등장하는 구조들의 상징에서 명확해진다. <입산Ⅱ>-업, <윤의 변Ⅱ>-무한의 고통, <정전>- 번뇌 해탈, <그와의 약속>-참나…. 이런 상징구조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가는 시대령(嶺)이 그의 화두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1990년대는 1980년대와 달리 너무나 다른 시대적 상황이 펼쳐졌다.
그의 이른 죽음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했던 현실. <급행열차-시대의 변>, <황색음-묻혔던 숲>, <부활-조용한 새벽> 등은 삶의 현실이 아니라 상징어로서의 시대와 역사를 묻고자 했던 작품들이다. 그는 1990년대의 시간을 온통 그 두 가지 테제를 조각을 통해 물었다. 그 이전의 조각들이 그 자체로 사건이 되는 신화요 조각이었다면, 1990년대의 작품들은 21세기를 묻는 화두였을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조각이 새롭게 던지는 예지적 전망들을 살필 수 있다. 아라리오에서 그의 작품들은 완전히 현존 상태로 우리를 불러 세운다. 과거의 실존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 내 존재”로서 조각의 미학적 언어를 터뜨리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류인이 남긴 아주 오래된 조각적 화두일지도 모른다. 그 화두를 인식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전시의 사건이다. ●

EXHIBITION TOPIC 이중섭의 사랑, 가족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의 위치는 공고하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구성된 전시가 열리고 있다. 1월 6일부터 2월 22일까지 현대화랑에서 진행되는 <이중섭의 사랑, 가족전>이 바로 그것. 이중섭의 유화, 드로잉, 은지화, 편지화 등 70여 점이 소개되는 이번 전시에는 특히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소장하고 있는 은지화 3점이 최초로 공개되어 화제를 낳았다.

현대화랑과 이중섭 그리고 가족의 귀환

최열 미술비평

현대화랑, 다시 말해 박명자 대표와 이중섭은 뗄 수 없는 인연이다. 이중섭이 세상을 떠나고 열여섯 해가 지난 1972년 박명자 대표는 이중섭의 친구 구상, 박고석, 유강렬과 함께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유작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것이 저 유명한 <15주기 기념 이중섭 작품전>이다. 이 전람회는 이중섭을 부활시킨 기점이었다. 이중섭이라는 신화와 전설의 기원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20세기가 끝나는 1999년 또다시 현대화랑과 박명자는 <이중섭 특별전>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박명자가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미술관에 이중섭 작품을 기증하기까지 그 관계는 운명과도 같이 질긴 것이었다.
이번에 ‘이중섭의 사랑, 가족’ 주제의 전람회가 열리는 장소와 관련하여 조용하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 벌어졌다. 현대화랑이란 이름의 부활이다. 그러니까 27년 전인 1987년 ‘갤러리 현대’로 이름을 바꾸면서 사라졌던 이름 ‘현대화랑’이 이중섭과 함께 귀환한 것이다. 이제 갤러리 현대는 현대화랑과 함께 두 개의 건물로 나뉘었고 홈페이지도 두 개의 누리집(홈페이지)으로 구성됐다. 양날개를 펼친 형세를 갖춘 것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이 사건은 한국 화상畵商의 살아있는 역사 박명자의 귀환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성장한 2세가 경영 일선에 참가하던 금세기 초 성급하게도 2세체제 전환이 임박한 듯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후 10여 년의 과정을 보면 사실은 1세대의 주도 아래 2세대가 실전 훈련을 치르는 수준임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이중섭을 앞세운 현대화랑의 부활은 이제 2세대의 진출이 완만하게나마 현실화되고 있으며 따라서 지금에야 겨우 신구세대가 공존하는 시대임을 상징하는 사건인 셈이다.
이번 전람회가 지닌 두 번째 의미는 가족의 기억과 가치다. 전시 주제인 ‘이중섭의 사랑, 가족’은 주최 측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6·25전쟁으로 파괴당한 가족의 기억 그리고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사회를 뒤흔든 가족의 가치를 환기시켜주고 있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은 모두 가족을 소재로 삼고 있다. 난민의 고통과 이별, 재회를 향한 간절한 소망 그리고 죽음으로 나아가는 절망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하나에 가족 이야기가 숨쉰다. 전후 60여 년 동안 우리 사회는 개발과 성장이란 늪에 빠져 가족이란 이름의 사랑을 옆으로 밀어냈다. 개발과 성장의 다른 이름은 경쟁과 욕망이다. 오늘날 가족이란 탐욕의 그늘에 가려 어둡고 무거운 초상화일 뿐이다. ‘사랑, 가족’이란 제목 아래 우리 앞에 홀연히 나타난 ‘이중섭’과 지워졌던 ‘현대화랑’의 부활은 우리를 일깨우려는 빛처럼 느껴진다.
이번 전시에는 개인 소장가의 품 안에 꼭꼭 숨어있던 엽서화葉書畵, 편지화便紙畵 그리고 춘화春畫가 공개된다. 또 1956년 바다 건너 뉴욕현대미술관MoMA 수장고로 들어간 이래 근 60년 만에 조국으로 귀환해 처음으로 세상 빛을 보는 저 은지화銀紙畵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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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화된 이중섭에 대한 연구 필요
필자는 《이중섭 평전》에서 저 엽서화를 ‘주소 없는 편지’로써 ‘사랑의 기호학’이며 미술사상 아주 희귀한 사례로 기록될 ‘우리 미술사의 축복’이라고 묘사했다. 출품된 10점 가운데 최고의 걸작은 <마사マサ>다. 벌거벗은 몸의 애인 야마모토 마사코가 나무와 한 몸으로 이어져 있고 탐스러운 열매 한아름을 받쳐들고 있다. 사랑의 연서戀書는 많은 시인, 문인들이 남겼지만 이처럼 80여 장에 달하는 사랑의 엽서화는 전에도 후에도 없는 오직 하나뿐인 연화戀畵다.
편지화 또한 예를 찾기 어려운 사랑의 그림이다. 지금껏 부인에게 보내는 38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20편의 번역본만 알려져 있었을 뿐이다. 편지화 원본은 겨우 몇 점만 공개돼 있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야 비로소 그 원화를 마주할 수 있음은 어쩌면 그 사랑이 그만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번에 공개되는 20편의 편지 연화가 아름다운 까닭은 첫째, 두 아들에게 사랑을 호소하는 문자 하나 하나에도 감정이 어려있어 간절하다는 것. 둘째, 그림과 글씨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 셋째, 이중섭만의 능수능란한 필력이 거침없이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니까 한결같이 서화일치의 경지에 다가선 예술 그 자체라는 것이다. 누군가 냉소하는 말투로 “편지 한 장이 웬 1억 원이나 가는거야”라고 했다. 그건 이 예술을 편지일 뿐이라고 여기는 선입관 때문이다. 공개되지 않은 나머지 편지들도 모두 공개되기를 기다리는 까닭은 바로 이중섭의 편지화, 그 서예술書藝術을 진심으로 마주하고 싶은 욕망에 있다.
은지화는 잘 알려진바 대로 이중섭이 탄생시킨 아주 특별한 미술품이다. 아니, 그것은 이중섭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전쟁과 난민이라는 시대가 탄생시킨 것이다. 탄생의 기원도 자못 비장하거니와 거기 담긴 이야기도 비극에서 환희에 이르기까지 20세기 방황하는 정신을 모두 담고 있으므로 몇 백 점의 은지화가 공개될 적마다 탄성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되는 ‘춘화’는 매우 극적이다. 남녀가 서로 성기를 마주한 모습 그대로 노출된 은지화는 지금껏 극소수만이 본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데 한걸음 더 나아가는 충격은 다름아닌 MoMA 소장 은지화 3점의 귀환이라 하겠다.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됐다는 사실은 한국이 20세기 100년 동안 서구문명권으로 편입된 이래 일어난 가장 거대한 사건이다. 그런데 누구도 그 소장작품을 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무려 59년만에 귀향한 석 점은 상상보다도 훨씬 놀라운 충격이었다. 수백 점의 은지화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조형성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사냥꾼과 비둘기와 꽃>은 유사한 소재를 그린 은지화들 가운데 가장 아기자기하고 충실한 구성을 갖춘 작품이며 <신문 읽기>는 몽환이 아닌 현실을 소재로 삼았으되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나눈 위에 여러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현실을 뛰어넘는 분위기를 연출한 작품이다. 전시장에 걸린 3점과 마주하는 순간, 기증자인 맥타가트 박사가 말한바 그대로 ‘특별한 매력’이 넘친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후 60년 그리고 탄생 99주년인 2015년 이중섭의 귀환을 맞이해 우리는 ‘가족, 사랑’을 반추한다. 아마도 그것은 숱한 상처로 얼룩진 가족이란 이름의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일 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 오랜 세월 이중섭은 신화와 전설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 사이 작품은 시장에서 진위眞僞시비를 일으키는 진원지였으며 그의 예술에 대한 가치평가 또한 찬사와 비난의 극단을 오갔다. 탄신 백주년 행사를 준비해야 할 이때 미술인들이 해야 할 단 하나의 일은 신화가 된 이중섭의 예술에 대한 아주 차분하고 진지하기 그지 없는 탐구일 것이다. 현대화랑과 함께 귀환한 이중섭이 우리에게 희망하는 것도 그게 아닐까. ●

EXHIBITION & THEME 眞景山水畵 우리 강산, 우리 그림

보편성 위에 펼쳐진 고유의 독자성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진경산수화는 많은 이에게 조선의 문화 역량과 우수성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2014년 12월 14일부터 5월 10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박물관에서 진경산수화를 대규모로 만날 수 있는 전시, <진경산수화: 우리 강산, 우리 그림>이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진경산수화를 정립한 정선의 서울, 금강산 그림부터 정선의 화풍을 부분적으로 이은 심사정, 정조시대의 김홍도, 이인문을 이어 조선 말기에 활동한 근대화가들까지 이어지는 진경산수의 맥을 짚어본다. 이를 통해 조선 성리학과 우리 땅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한눈에 살펴본다.
간송미술관을 대표하는 소장품으로는 《훈민정음》,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미인도〉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모두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문화재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단일 작품이 아닌 특정 분야를 꼽는다면, 역시 진경산수화가 아닐까 싶다. 겸재 정선을 중심으로 하는 진경산수화는 소장품 양과 수준에서 간송미술관을 따라올 곳이 없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뚜렷한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진경산수화를 집중적으로 수집한 결과이다. 간송은 우리 문화재를 선조들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결정체로 생각했다. 그래서 문화재를 모으는 것이 곧 우리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되살리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간송 선생은 특히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후대에 올바르게 전해주고자 했다. 일제에 의해 우리 역사와 문화가 심각하게 폄하되고 왜곡된 시대였기 때문이다. 간송은 진경산수화야말로 조선 문화의 역량과 우수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간송의 뜻에 부응하여 간송미술관은 수십 년 동안 심도 있는 연구와 다양한 전시를 통해 진경산수화를 집중 조명하여 그 가치와 의미를 널리 알리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런 점에서 진경산수화는 간송 선생과 간송미술관의 신념과 지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분야라 할 수 있다.

6. 삼일포 - 심사정

심사정 〈삼일포〉 지본담채 27×30.5cm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참된 경지眞境로 나아가다
진경산수화는 실재하는 경관을 사생한 그림이다. 그러나 실경을 그렸다고 모두 진경산수화라 하지는 않는다. 실경산수는 고려시대나 조선전기와 중기에도 있었지만 주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그렸으며, 기법도 중국의 관념산수화풍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진경산수화는 자존적 인식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화풍을 구사하여 이전의 실경산수화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런 자존감과 독창성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문화를 식물에 비유하면 이념이 뿌리이고, 예술은 꽃이라 한다. 이전과 다른 꽃이 피었다면 그 바탕이 되는 뿌리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 뿌리는 다름 아닌 조선 성리학이었다. 조선 성리학은 율곡 이이에 의해 정립된 신학설로 성리학의 발원지인 중국에도 없는 고유 이념이었다. 진경산수화는 조선 성리학이라는 고유 이념의 뿌리에서 피어난 꽃인 셈이다. 당연히 주체적이고 독자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시기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자,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화문화를 계승할 유일한 국가는 바로 조선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른바 조선중화주의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곧 세계문화의 중심’이라는 생각이었다. 영조시대 문인인 조구명趙龜命은 “예술은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없을 진대, 어찌하여 제 스스로 중국의 문명을 기준으로 삼겠는가” 라고 갈파했다.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의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가 왜 이 시기에 크게 유행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말이라 하겠다.
진경산수화의 출현은 조선 성리학이라는 고유 이념과 조선중화주의라는 주체적 자의식에서 움튼 조국애와 국토애가 조형적으로 발현된 현상이었다. 진경산수화의 발전을 주도한 이들이 주로 조선 성리학의 정립자인 율곡계 문인들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겸재 정선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선은 우리 산천의 조형적 본질과 내재된 정신성을 면밀한 관찰과 많은 사생을 통해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역대 중국 산수화풍의 장점을 취합한 뒤, 성리학의 기본 경전인 《주역》의 원리에 입각해 음양의 대비와 조화로 화폭에 풀어냈다. 우리 산천의 ‘진짜 경치眞景’를 사생하여 ‘참된 경지眞境’로 승화시킨 과감하고 혁신적인 시도였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금강산, 한양 주변의 명승, 관동팔경과 단양팔경, 박연폭포 등 정선이 그린 40여 점의 작품을 통해 그 진수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선에 의해 정립된 진경산수화풍은 다음 세대인 현재 심사정으로 이어졌다. 그는 어린 시절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지만, 진경산수화풍을 좇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중국 문인화풍의 관념산수화를 더 잘 그렸다. 그러나 진경산수화의 도도한 흐름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지 중년 이후 정선의 화풍을 부분적으로 끌어들여 금강산의 명소들을 사생해낸다. 이렇게 그려진 작품들이 이번에 출품된 〈만폭동〉과 〈삼일포〉이다. 정선에 비해 사생성과 현장감은 다소 미흡하지만, 문인 취향의 그윽한 아취가 결합된 독특한 진경산수화풍을 보여준다.
진경산수화의 대미를 장식할 역할은 정조시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김홍도, 이인문 등 화원 화가들의 몫이었다. 그중에서도 김홍도는 화원화과 특유의 시각적인 사실성을 중시하는 정교하고 섬세한 화풍으로 진경산수화를 그려 앞선 문인화가들과는 또 다른 흥취를 자아낸다. 한편 김홍도와 더불어 정조시대를 풍미했던 동갑내기 화가 이인문은 서양화풍이 가미된 진경산수화를 그려 독특한 감흥과 더불어 시대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조선후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진경문화는 정조대를 넘어서며 제 수명을 다하고 스러져갔다. 진경산수화도 생명력을 잃어갔다. 진경산수화 출현과 발전의 토대가 되었던 조선 성리학이 말폐 현상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선말기 예원의 종장이었던 김정희金正喜가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은 모두 명성이 대단하지만, 한갓 안목만 어지럽게 할 뿐이니 절대 들춰보지 말라”한 것은 이 시기 진경산수화가 처한 입지와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몇몇 화가에 의해 진경산수화가 간혹 그려졌지만, 대체로 과거의 전통에 안주하여 형식화하거나,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하고 의미 없는 변주만 지속하며 박제처럼 굳어져 갔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기서金箕書, 조정규趙廷奎 등 조선 말기에 활동한 화가들과 조석진趙錫晋, 안중식安中植, 김은호金殷鎬 등 근대 화가들의 진경산수화도 함께 전시된다. 정선이나 단원 등 진경산수화풍의 절정기에 그려진 작품과 비교하면 내면의 정신성을 상실한 진경산수화의 여맥과 잔해가 어떤 모습으로 조락해가는지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겸재 정선에서 근대화가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진경산수화를 망라한다. 따라서 전시 동선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시기별 변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동일한 장소를 그린 작품들을 위주로 비교 감상하면 그 유사점과 차이점이 더욱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그것이 조금 어렵다면, 실경과 그것을 소재로 한 그림을 비교하며 보는 것도 나름대로 소소한 재미를 준다. 이를 위해 전시장 한켠에 실경을 찍은 사진과 그림을 한 화면에서 동시에 감상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이를 세심하게 보면 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300년 전 우리 국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진경산수화의 본질적인 지향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이나, 우리 그림의 아름다움을 보아도 좋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보편성을 공유하면서도 고유의 독자성을 한껏 펼쳐보인 진경산수화가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더욱 좋겠다. 이번 전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다. ●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전시광경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전시광경

KIM SHIN'S DESIGN ESSAY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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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즐거운 나의 집>(2014.12.12~2.15) 전시광경

즐겁고 행복한 나의 집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옛날에는 일단 아파트 한 채 사두면 곧바로 집값이 올라 그 집을 팔고 더 비싼 집으로 옮겨가곤 했다. 그런 부동산 거품 시대가 지난 지금 아파트 소유는 더 이상 재테크의 수단이 아니다. 은행 이자 내는 만큼 집값이 오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집을 사는 게 손해라는 말도 있다. 집을 팔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집은 그저 부의 가치로만 측정되는 거 같다. 집 사기가 옛날보다 쉬워져도, 집을 소유한 사람이 많아져도, 집값이 옛날보다 떨어져도 여전히 한국인들은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닌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며칠이 멀다하고 이사 트럭과 사다리차가 와서 짐을 내리고 싣기를 반복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난민 아닌 난민이다.
아르코미술관에서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전시를 보았다. 첫 전시장은 거실이다. 테이블 위에 잡동사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털 잔과 크리스털 재떨이, 섹시하게 생긴 장식용 용기들, 각종 트로피, 액자에 끼워진 상장, 봉황을 새겨 한껏 권위를 부린 유리 재질의 감사패, 가짜 앤틱 전화기와 이국적인 무늬가 수놓인 전화기 받침대, 모조 고려청자, 중국 여행에서 가져온 듯한 도자기, 사람 모양 인삼이 들어있는 병, 바둑판과 바둑돌, 야구공, 에펠탑 기념품, 지구본, 미니어처 범선, 위스키 로얄살루트 병, 타자기, 이제는 볼 수 없는 검정색의 다이얼식 전화기, 손잡이가 달린 카세트 겸 라디오, 레이스 달린 천 커버를 씌운 티슈통… 우리나라 어느 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이다. 하나하나 보면 결코 미술관에 들어올 만한 그런 고상하고 수준 높은 것들이 아니다.
집주인은 이런 것들을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고 장식장에 넣어두고 벽에 걸어둔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씩 가짓수가 늘어난다. 이것들은 집주인이 이룬 사회적 성취의 증거이고 취향과 기호의 표현이며 여행지에서 가져온 기념품의 과시다. 집이란 이런 잡동사니들의 집합소이고, 한 가족의 역사와 기억을 진열한 전시장이다. 어느 것 하나 사연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다. 가족이 겪는 경험과 시간의 흐름으로 한국의 천편일률적인 아파트도 그 주인에 따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집이 된다.
최근에 출간된 송미경의 단편 동화 <아빠의 집으로>를 읽었다. 고아원에서 살던 한 소년이 친부모를 만나 진짜 자기 집으로 향한다. 두 살 때 친부모가 아이를 잃어버려서 소년은 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는 앵벌이, 그 뒤 낡은 고아원에 수용된 고아로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다. 그는 늘 깨끗한 집, 맛있는 음식, 친절한 가족을 꿈꿨다. 그리고 그 꿈이 정말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꿈이 실현되자 소년은 진짜 친부모가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깨끗한 집 역시 더러운 자신을 더욱 초라하고 주눅 들게 만든다. 그가 꿈꾸던 집은 실제로는 그를 위축시키고 긴장시키기만 한다. 소년은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딱 하루, 오늘 하룻밤이라도 천우와 함께 지내던 낡고 비좁은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휘청거리던 이층침대와 낡은 누비이불 틈으로 몸을 밀어넣고 싶다. 나는 진짜 엄마와 아빠가 살고 있는 이 깨끗하고 밝은 집을 벗어나 내 마음대로 발가락을 까딱거리거나 다리를 떨며, 천우와 동전 따먹기를 하다가 잠들고 싶다. 오늘 하룻밤만이라도.” 이 소년의 간절한 마음은 집이란 개념을 다시 생각게 한다. 집이란 자기와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곳은 익숙한 사물들로 채워져 있으며 그것마다 사연이 있다.
이사하는 날, 모든 짐을 빼내 텅 비어버린 집 안을 볼 때 밀려오는 이상한 기분, 섭섭한 마음을 누구나 경험할 것이다. 나에게 익숙한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집의 가장 중요한 기능, 즉 따뜻함도 공중으로 사라진다. 건축과 디자인, 인테리어 책과 잡지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보여준다. 위대한 건축가들이 지은 명성 높은 집은 결국 사람 사는 공간이 아닌 그 자체가 미술관이 된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집은 늘 부동산의 가치로 평가되며 그것으로 매매와 이사가 반복된다. 전시 <즐거운 나의 집>과 동화 <아빠의 집으로>는 우리에게 집의 가치에 대해 다시 묻게 만든다. 집은 아름다움이나 부동산이 아니라 가족과, 또는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과 기억으로 가치가 높아진다. 집은 ‘내 집’이어야 하는 것이다. ●

CRITIC 응답하라 작가들

오뉴월 2014.11.28~2014.12.21

2층 전시장을 잇는 계단에서 ‘작가피…’ 라는 문구를 발견한 순간 필자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잠깐만. 이 문구가 웃으라는 말장난이었을까? 어쩌면 작가피(fee)는 진정 작가의 피(血)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 전시는 오뉴월에서 열린 고동연 기획의 <응답하라, 작가들>이다. 노동자로서의 예술가, 미술계 사람들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생계를 고민하는 이 전시는 우리 시대 순수 시각예술인이 겪는 고군분투기가 그려진 작업과 이들의 생존을 위한 자료들로 채워진 예술계의 비하인드스토리를 제공했다. 그리고 기획자가 인터뷰로 얻어낸 비하인드스토리는 곧 출판될 예정이다. 꼭 필요한 전시였고 방대한 양의 자료가 제공되었지만 작가의 주제 범위가 방대해서 제도 비평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이 전시 자체의 통일성을 꿰뚫어보기 힘들었으리라는 판단이다.
덕분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필자가 ‘작가피’라는 문구를 보고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작가피가 작가의 연수입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으리라는 추측에서 비롯한 듯하다. 작품 가격이란 으레 백만, 천만 원대에 이르는데 10만 원대의 작가피가 뭔가 대수라고 ‘피’ 운운한단 말인가? 작가피를 이렇게까지 굳이 받아내려는 의지가 작가에게는, 특히나 팔리지 않고 전시에 초대만 될 법한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에게 작가피란 생계 수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인 듯하다. 더구나 공공미술, 프로젝트성 작품과 같이 과정만이 강조되는 예술 실천이 비대해진 오늘날의 예술 현장을 고려해보면 연간 기관이 지출하는 작가피 또한 상당하겠지 싶다. 단, 그들이 작가피를 지급한다면 말이다.

예술계가 작동하는 방식
기획의 주체가 자신이 초대한 이가 할애하게 될 시간에 대해 보상하는 것은 당연할진대 ‘선한, 공공’ 기관이 작가피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걸까? 왜? 이는 기존 예술계의 관습에서 야기된 문제라고 본다. 작가는 언젠가는 정통에서 인정받는 거장이 되어 미술관과 화랑이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모셔가게 될 날을 고대하며 장인적 기술과 숭고한 정신을 연마한다. 따라서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할 공식기관인 미술관과 화랑의 권세를 감내하는 것이 기존의 미술계 풍조였기 때문에 작가와 인증기관의 관계는 동종 업계의 동료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화랑과 미술관 또한 작가가 거장이 된 후에는 작품 가격이라는 금전적 보상이 뒤따르기 때문에 동료인 작가가 굳이 작가피를 받겠다고 고집한다면 찌질하게 볼 수 있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 김아영 또한 예술계 안의 사회적 관계를 주목했고 이를 댄스 스텝으로 도식화한 <바빌론 댄스>를 선보였다. 바빌론 댄스에서는 공모, 대안공간, 화랑을 선택하거나 미술을 포기하는 4개의 장단 중 하나에 맞추어 춤을 추도록 그려져 있다. 그러나 동료 관계가 항상 평등하지는 않다. 박준범의 <비디오 아트의 유통기한>은 예술계에서 벌어지는 기관의 횡포를 고발한다. 작가는 어느 날 스위스 바젤에 위치한 팅겔리 미술관(The Tinguely Museum)이 자신의 비디오를 파스칼 반회케 화랑(Galerie Pascal Vanhoecke)으로부터 받아 무단으로 전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작가는 해당기관들과 서신을 교환했고 그 내용을 우스꽝스럽게 번역, 전시했는데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을 짜깁기해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작가님아
미술관이 너네 화랑이랑 연락이 안 된다고 우기잖아. 그래서 우리가 네 데모 DVD를 미술관에게 줬다? 네가 화난 건 알겠는데 미술관 전시도 하고 좋잖아, 화 풀어. 빠리의 비디오계에서 우리가 얼마나 파워 있고 빠삭한 화랑인지 모르냐? 미술계 바닥에서 나쁜 소문 돌아봤자 둘 다 뭐 좋겠어? 네가 CUBE에서 전시한 것도 다 내 덕인 줄도 다 까먹고 배은망덕하게…

작가피를 지급하지 않는 데 대해 참을 만한 병폐로 여기던 기존 미술계의 관습은 지금도 유지되는 반면 미술계의 구조는 크게 바뀌었다. 개념미술, 포스트-스튜디오라는 용어와 함께 발전한, 작품 판매와는 무관한 활동으로 구성된 예술영역은 상대적으로 커졌으며 이제 예술계는 더 이상 작품 가격으로는 보상을 약속할 수 없는 구조로 전환되었다. 이런 구조는 작가피로 상징되는 예술가의 노동의 소외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예를 들면, 작가들은 작품 생산 외에 토론회, 레지던시 등에서 관객과 함께 하는 교육 등의 활동, 이를 위한 사이트의 리서치 및 글쓰기, 스폰서 확보, 설치 용역 및 장비 제공, 디자인, 운송 및 교통비 확보와 같은 활동을 추가적으로 (그리고 현재는 대부분을 무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여기에 할애되는 시간만 고려해도 그 비용이 작가에겐 크나큰 타격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은 신진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 팔리는 블루칩 작가도 아닌, 어디서 이름은 자주 들어본 비교적 안정된 작가들인데 그럼에도 예술과 자본이 만나는 접점에서 약자로 살면서 예술계의 병폐를 메우느라 세컨드 잡으로 고생한다. 예를 들어 김재범의 <출근 기록 드로잉 하기>는 작가로 행세하기 위한 비용을 벌려고 택한 세컨드 잡의 출근부 도장으로 로고를 만들었다. 오늘날 예술의 생산-소비구조에서 작가피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작가들은 아직도 궁핍하다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이 전시에서 제시하는 ‘피’의 문제는 미술계가 해결해야 하는 업계 윤리 혹은 작가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 존엄성 침해의 문제이다.

예술 실천은 노동인가
지난해 11월 말, 서울 시청에서는 ‘노동하는 예술가, 예술 환경의 조건’이라는 제목 아래 심포지엄이 열렸고 12월에는 <응답하라, 작가들전>의 연계 행사로 토론회도 열렸다. 필자는 이 두 행사가 예술가와 노동의 문제를 다룬다면 ‘예술가를 과연 노동자로 불러야 할 것인가’와 같은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리라 상상했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적어도 두 행사에 참여한 관객들은 자신이 노동자로 불리는 것에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렇지만 예술이 소명이라는 개념이 팽배한 만큼 아직까지 ‘예술가’와 ‘노동’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뜨거운 감자이다. 예술이 소명이라는 감성은 <응답하라, 작가들전>에서도 소개됐다. 함혜경은 <거짓말하는 애인>이라는 스니커즈 디자인으로 생계를 꾸려가려다 예술을 해버리고 만, 그래서 마진이 남지 않게 된 어느 작가의 업무일지를 비디오로 만든다. 예술이 아니라 직업을 갖겠다는 것이 애인이 말하는 거짓말의 실체는 아니었을까? 전통적인 미학에서는 자본으로부터 비평적 거리를 두기 위해 예술가를 노동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예술가를 노동자로 규정하면 예술이 자본이나 정치, 사회로부터 비평적 거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에서 생산은 자율적인 창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론적인 입장과는 달리 예술가를 노동자로 구분하는 논리는 유물론에서 나온다. 마르크스가 “저자는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한 생산적인 노동자이나 그의 작품을 출판하는 출판사의 배를 부르게 하는 한 자본주의의 임금노동자이다”1라고 했다던데 필자는 그의 언급이 마치 ‘예술로 돈을 벌면 순수하지 않다’로 들린다. 오히려 모든 정신활동을 경제적 토대에 묶느라 정신의 순수성을 강조하게 돼버린 관념론으로 들린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예술가가 자본과 사회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적이 있기나 할까? 미켈란젤로도 보상을 받았을 텐데 그렇다고 그의 예술성이 교황의 것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전통적 예술계는 상거래를 하면서 자율성을 위반하고 유물론은 정신을 강조하면서 자율성을 옹호한다. 이렇게 고전의 논리에서부터 이미 이율배반을 포함하는 개념이 자율성인데다가 학자들은 예술계가 사회적 관계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지켜야 할 자율성은 이미 없다고 하는데 작가들은 아직도 자발적으로 궁핍을 받아들인다. 지금의 미술계 구조가 소외하는 노동의 양이 엄청난데도 눈감아주고 자신의 작업과 관련된 노동이 아니라 기획 주체가 감당해야 하는 노동까지 감수한다면, 그 결과는 기존 예술계 구조의 유지이다.
두 행사 모두에서 작가피에 해당하는 용어를 ‘사례비’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참가비’나 ‘작품 대여료’라고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논의가 벌어졌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사례비는 자선을 베푸는 것 같아 싫다’는 의견이 중론이었는데 이는 ‘나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으면 배고파요’로 들렸다. 지금까지 국공립 기관의 예산에서 작가피는 아예 제외되어 왔다.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행사의 경우 지원금에서의 작가피 지출이 금지되어 있어 기획자가 작가에게 사례비를 지급하려면 스스로의 재원에서 지출해야 한다. 즉, 작가피는 기획 주체의 정의로운 마음이나 자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지금의 여건이다. 정부는 고용되지 않은 기간 동안 겪는 전업 작가의 어려운 사정에 공감한다는 차원에서 복지 재단을 만들 당시 작가들에게 자신을 자영업 노동자로 생각하라는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원칙적으로 미술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정부의 의도는 선도적인 것이었으며 감사하다. 그런데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작가에게는 경제논리를 수용하라고 요구하는 반면 노동의 대가를 지급받도록 하는 시스템 형성은 규제하는 셈이므로 정부 정책은 모순된다. 때문에 재단의 이름에 달린 ‘복지’가 함의하는 바와 같이 예술가들에게는 자선만이 허락되는 셈이다. 여기서 승자는 사회적 관계망에 의존해 온 ‘기존’ 예술계의 보상구조이다. 그러나 희망의 메시지도 들린다. 지난 1월 22일 정부는 미술작가의 창작활동에 대해 정당한 비용을 지급하는 ‘작가보수제’를 올해 하반기부터 적용하기로 발표했다. 이제 지원금 지출 정책이 바뀌고 사립 및 상업기관만 작가피를 지급하도록 하면 된다.

예술가가 노동자라 불려도 괜찮다면
‘사례비’와 ‘작가피’ 중 어느 단어를 사용할 것인가의 차이는 기존 미술계의 보상 및 독점구조에 순응할 것인가 아닌가의 입장 차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희생을 줄이면서 예술을 보전하려는 입장에 서는 동시에 업계 윤리의 개선을 요구하는 자세다.
예술가를 노동자로 불러도 괜찮다는 이들 중 아트리크, 웨이지라는 단체는 기존의 예술계 구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들이다. 아트리크(artleak.org)는 작가피를 지급하지 않는 예술기관을 고발하는 게시판 역할을 자처하고 미국의 WAGE라는 그룹(wageforwork.com)과 캐나다의 CARFAC(Canadian Artists’Representation)는 예술가가 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사례비 기준자를 만들어 소개했다. 한스 애빙 또한 기존 예술계가 보장했던 보상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경제논리를 한껏 활용하자는 의지를 보여주는 경제학자이자 작가이다. 애빙은 미술작품의 원본이 가진 허세의 혹은 상징적인 가치와 별도로 저렴한 가격으로 예술을 보급하거나 혹은 포스터와 같은 복제품의 판로를 활성화하여 기존 예술작품의 원본이 가졌던 아우라를 제거하자고 제안한다. 결국 산업화된 대중음악계와 유사한 대중미술계를 상상해보자는 그의 요지 중 하나였는데 이번 전시에 포함된 박재영의 작업은 마치 이에 대한 화답처럼 보인다. 그는 Butter Cutter라는, 디자이너였다가 순수예술로 전향하거나 순수예술을 하다가 세컨드 잡이었던 디자인의 길로 들어선 이들로 구성된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전시에는 이전에 수행했던 상대적으로 저렴한 예술상품을 만든 셈인 간이매점용 음식, 디자이너 상품처럼 보이는 순수예술 조형물의 기록과 함께 도록디자인 샘플을 보여주는 ‘자영업자’의 홍보부스가 선보여졌다.
현시점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작가들을 생각하면 예술계의 구조조정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다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예술가를 노동자라 부르는 방향으로의 구조조정은 경제논리를 패러다임으로 적용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현진 미술비평

김재범 (왼쪽 벽면) 시네마그래피 및 혼합매체2014

김재범 <출퇴근기로 드로잉하기>(왼쪽 벽면) 시네마그래피 및 혼합매체2014

1 Bryan-Wilson, Julia, Art Workers: Radical Practice in the Vietnam War Era, (Berkeley, Los Angeles, Lon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9). P. 27에서 재인용. 원문은 “A writer is a productive laborer in so far as he produces ideas, but in so far as he enriches the publisher who publishes his works, he is a wage laborer for the capitalist.”
크리스 맨슈어. <예술의 노동점유: 줄리아 브라이언 윌슨과의 인터뷰>, 《00도큐멘트3 : 다들 만들고 계십니까》, 미디어버스, 2014 참고.

CRITIC 홍경택 Green Green Grass

페리지갤러리 2014.12.5~1.31

삶의 허무를 주제로 한 17세기 네델란드의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성스럽고 속된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한다. 홍경택은 그간 성배, 촛대, 연필, 볼펜, 서재, 해골, 화초, 올빼미, 대중문화 스타 등 현대인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이미지들을 강렬한 색상과 더불어 다양한 패턴과 함께 정물의 형식으로 다뤄왔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변화의 지점은 골프장과 에베레스트 산처럼 풍경을 배경으로 사용했다는 점인데, 이들 풍경은 순수한 자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극히 짜여있고 계획된 인공적인 공간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커져만 가는 사람의 욕망은 하나로 몰릴 때 큰 문제를 만든다. 특히 한국에서 골프장은 값비싼 비용을 내야 하는 욕망의 공간이고, 심지어 골프장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을 가진 곳은 같은 단지라 하더라도 그렇지 못한 곳과 시세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에베레스트 산 역시 신성한 자연이 아닌 올라가 봐야 하고 정복해야 할 욕망의 대상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풍경의 형식을 끌어들였지만 예전에 다루던 일회용 플라스틱 같은 오브제의 정물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질감과 찰나적인 화려함 뒤에 숨은 허무함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또한 신작 <반추>에서는 그의 대표작인 <연필> 시리즈처럼 골프채를 꽃다발처럼 표현하는데, 반복적이고 구심점에서 무수히 많은 선들로 확장하는 구도의 작품이다. 그는 골프채의 조합을 마치 우주 속 행성처럼 아름답게 보이도록 했지만 특이하게도 자세히 보면 골프채의 헤드 부분에 작업실에서의 작가 모습이 담겨 있어 보는 이에 따라서는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도록 의도했다. 이는 시간성을 도입하려는 시도이자 몰입을 일부러 방해하는 소격효과처럼 변화된 그의 작업에 대한 스스로의 선언이자 성찰처럼 느껴진다. 신작 <연필그림-여섯 개의 하늘>은 여러 개의 하늘들을 중첩시키고 거기에 하늘을 가로지르며 다이빙하는 것 같은 남자의 이미지를 그려놓은 작품이다. 개인전에서 열린 작가와의 대화에서 그는 인간이 죽었을 때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한다는 교황의 언급에 공감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앞으로의 그의 창작 방향을 예상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었는데,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 거주하지만 각각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거나 여러 차원의 동시적 공존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TV중계에서 보는 다이빙 선수들의 모습은 멀리서는 유려한 몸짓으로 포장돼 있지만 클로즈업된 모습들은 짧은 순간 높은 속도로 도약하고 균형을 잡기 위해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다. 이처럼 그림 속의 다이빙하는 남자의 이미지는 독자적인 개체성을 가지고 공존하는 하늘을 뚫고 추락하는 다른 체계의 죽음과 유한성을 상징하며, 긴장감 있게 한 화면에 담은 것이다.
홍경택의 작품은 화려하지만 불편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경계에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평단뿐만 아니라 시장에서도 환영 받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오브제와 풍경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욕망에 대해 전하는 메시지를 시간성의 도입, 초현실주의적 접근 등으로 창작의 방향과 사유를 확장하는 그의 균형감각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전동휘 예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