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FACE 2015 박아람

“전시장에 놓인, 평면 혹은 입체의 작품들은 일곱 개의 형상이 거듭나는 절차, 그 일련의 기제에 의한 것들이다. 일단 이러한 기제를 이해하게 된다면 전시장에 전시된 작품들은 짐짓 태연해 보이지만, 사실은 작가에 의해 계산된 절차들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윤민화 전시기획

명확하지 않은 것에 대한 측량

박아람 작가를 만나 명함을 받았을 때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스스로를 ‘측량사surveyor’로 정의하고, 영문이름을 ‘Parc Rahm’으로 적시하고 있어서다. 작가의 설명은 이렇다. “도처에 산재한 이미지에 대해서, 이미지의 내적인 논리(내용과 의미의 차원으로 인도하는 인식/판별 가능한 사물이나 인물의 형태)를 따르지 않고, 사소한 색이나 명암 차이에 불과한 것을 따라가면서 이미지를 회膾 뜨는 행위를 반복하는데요. 저는 이것을 개인적으로 ‘이미지-측량’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러면서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벌인 퍼포먼스에 대해 설명했다. “<착륙 기념사진>은 ‘자석 올가미magnetic lasso 측량-뉴욕’ 기획하에 구상한 작업입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참고로 한 이 퍼포먼스는, 구글 뉴욕 지도를 포토숍의 자석 올가미로 측량하고, 그것을 깃발에 프린팅한 후, 누구나 알고 있는 뉴욕을 마치 처음 발견한 양 센트럴파크의 쥐바위Rat Rock 위에서 천연덕스럽게 착륙 기념 촬영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어로 ‘parc’가 ‘공원’을 뜻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D프린트 가변크기 2014 케이크갤러리 전시광경

<운석들> 3D프린트 가변크기 2014 케이크갤러리 전시광경

학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박 작가는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인 포토숍의 ‘마그네틱 라소툴’을 이용한 작업을 선보였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시각예술분야에서 어떤 장르건 간에 작가는 매체를 활용해 표현한다. 그런데 박 작가가 사용하는 매체는 좀 생소하기도 하고, 프로그래밍된 진부한 것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는 미술가 대부분이 작업 과정에 디지털 이미지와 그래픽 프로그램, 출력기를 이용하죠. 그래서 그것들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에는 별달리 특기할 점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는 그래픽 프로그램의 툴과 그런 작업 내역들을 개념화하고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변별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툴의 예정된 기능에서 무엇인가 다른 것을 도출하는 것은 오히려 더 지난한 과정일 것도 같다. 이는 작품에 스며든 ‘노동의 흔적’이 곧 작가의 미학적 특성이라는 등가관계에 어떻게 역행하느냐의 문제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토숍의 ‘자석 올가미’ 툴은 이미지를 명확하게 지정하거나 항상 같은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 툴을 반복적으로 같은 이미지에 적용하는 행위는 일견 대상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행위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 같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력장치를 매개로 하는 제 손에 의한 무작위적인 개입에 의해 왜곡되어 결국 무의미한 궤적을 산출합니다. 실제로 측량한 형상들은 원본 이미지와 대조했을 때 별다른 연관성을 갖지 않아요. 저는 대상을 명확히 지정하거나 정의하는 일에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참조 대상으로부터 막다른 것을 도출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해석의 과잉이나 오독을 경계하는 태도가 분명했다.
지금 작가는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우주생활전>(2.6~5.17) 3층에 <운석들>이라는 작품을 설치했다. 최근 첨단 테크놀로지의 총아로 떠오른 3D프린터로 출력한 가공의 ‘운석’을 오렌지색 바탕에 깔았다. 45억 전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구에 불시착한 이방의 물체인 운석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기계 장치에 의해 ‘구현’되는 가공의 운석과 여러모로 닮아 있다.
당장은 근작인 운석 등을 크게 제작하고 싶다는 작가 박아람. 몇 번의 개인전이 열린 곳은 다분히 실험적인 작품이 선보였던 공간이다. 의도성은 없었지만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것이다. 그래도 현실은 현실이다. 박 작가 말대로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도 현재 큰 고민거리다. 그래서 최근 통영을 다녀왔고 “모니터 스크린만 보다가, 저 멀리 뻗어나가는 실제적인 거리감, 시야를 확보하는 경험을 오랜만에 했다”고 했다. 그곳에서 해수의 표면에 반사되어 산란하는 빛을 어떻게 봤을지, 그것이 어떻게 작업으로 ‘쌓일지’ 지켜볼 요량이다.
황석권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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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 커팅 및 드로잉 21×29.5cm 2014

<유령-지도> 종이 커팅 및 드로잉 21×29.5cm 2014

박아람은 1986년 태어났다. 가천대 시각디자인과, 홍익대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2014년 케이크갤러리에서 <자석 올가미 측량전>으로 명명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2012년부터 각종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2012년 일현트래블그랜트에 선정됐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NEW FACE 2015 호상근

“이 모든 장면과 그림과 이야기들은 해석하려 하면 미신이 될 것이고, 가까이 다가가면 인생극장이 되어버리기 십상이고 좀 더 가까이 가면 그 장면을 야기한 사회구조와 삶에 관한 불신과 회의와 분노를 일으킬 테지만 거리를 두고 본 이 모든 것은 ‘영감’이라 일컫는 그 어떤 에너지가 되어 목격자나 재현한 자에게 남거나 때때로 휘발하는 성질의 것으로 변모한다.”
– 윤재원 독립잡지 《칠(Chill)》 전 편집장

혼자만 보기 아까운 풍경

‘호상근재현소’. 작가 호상근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수많은 사람과 마주치면서 자신이 본 것(내가 본 것) 혹은 타인이 본 것(네가 본 것)을 넘나들며 일상에서 경험한 소소한 풍경을 드로잉 형식으로 재현한다. 특별한 기준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작가는 사람들과 시시콜콜 이야기하면서 관심이 가는 부분을 포착해낸다. 이때 요구 사항은 한 가지다. TV나 인터넷을 통해서 본 것이 아닌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본 장면 혹은 특이한 꿈을 되도록 자세히 얘기해달라는 것이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 눈에 익숙해져서 주목받지 못하지만 머릿속 한 귀퉁이에 남아있는 구석진 풍경을 끄집어낸다.
손글씨처럼 정감이 넘치는 호상근의 그림은 SNS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을 호출한다. 손바닥 크기만한 작품이 완성되면 그림은 이야기를 들려준 이에게 우편으로 전달된다. 그림을 받는 이는 오랜만에 손편지 받을 때의 설렘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요즘 손쉽게 타인의 일상을 엿보고 자신의 일상을 노출하면서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을 가볍게 대상화해 현상이 안타깝기만 하다.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SNS를 통해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쉽게 볼 수 있고, 덕분에 나도 살아있음을 힘들이지 않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들의 이야기들이 너무 가볍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즘 인터넷, SNS을 통해서 다양한 이미지가 범람하지만 모두가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인다.

3_끝까지얘기안하는사랑 사본

<끝까지 얘기 안하는 사랑> 관제엽서에 연필과 색연필 10.4×14.8cm 2014

 종이에 연필과 색연필 21×29.7cm 2012

<부드러운 침범> 종이에 연필과 색연필 21×29.7cm 2012

2011년부터 꾸준히 그린 그림은 어느 새 수 백장이 넘는다.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물어보자 작가는 ‘네가 본 것’ 중에서 한강 둔치에서 운동하는 한 아주머니가 얼굴에 검은 손수건을 얹자마자 빠르게 걸어 나가던 모습을 꼽는다. 천이 얇아서 앞을 보는데 전혀 지장이 없지만 햇볕을 가려주는 편의성과 동시에 속도측정도 가능한 손수건이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집중하는 이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주머니가 살면서 얻은 노하우가 압축된 장면이다. 자신을 소인배라 부르며 겸손함을 보이는 작가는 탑골공원 할아버지들이 손 안 대고 코푸는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타인이 주차하지 못하도록 자리 주인이 만든 다양한 모양의 주차금지 조형물에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한다.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의 단면에 매력을 느끼고 사람들이 살면서 축적해놓은 사소한 삶의 내공에 존경을 표한다.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사회적 모순, 부조리가 가득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작가들도 있지만 호상근은 조금만 관점을 달리하면 “수많은 잣대가 교차하는 치열함 속에서 스스로만의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호상근재현소’는 지금까지 하나의 장소에 머물지 않고 서울, 부산, 청주 등지로 이동하며 사람들의 사연을 모았다. 최근에는 한 라디오프로그램 코너에 고정적으로 참여해 선정된 사연을 재현하고 있다. ‘내가 본 것’, ‘네가 본 것’은 혼자만의 풍경으로 간직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호출된다. 그리고 전시로 펼쳐지며 많은 사람과 기억을 공유하고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 같은 풍경을 두고도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느끼는 점이 다르다. 그림 원본이 실제 이야기의 주인에게 전달되다보니 작가에게 작품이 남지 않는 특성상 호상근은 이미지를 모아 책을 만들 예정이다. 그리고 제3자가 그림에 관한 글을 써 이미지와 텍스트의 간극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교차시켜 보여주고 싶단다.
최근 작가는 작은 그림뿐 아니라 대형 캔버스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작은 크기의 작품은 한 화면에 하나의 이야기만 담을 수 있지만 큰 화면에는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상근재현소는 앞으로도 계속돼 다양한 기억의 재현물을 축적할 계획이다.
이슬비 기자

청주 우민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광경

청주 우민아트센터에서 열린 <다시, 그림이다> 전시광경

호상근은 1984년 태어났다. 한성대학교 미술학과와 동 대학원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2012년 꿀풀에서 첫 개인전 <내가 본 것, 네가 본 것: 호상근 재현소>를 열었고 <산으로 간 펭귄>(백남준아트센터), <어쩌다 꾼 꿈>(부산시립미술관), <다시, 그림이다>(우민아트센터)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NEW FACE 2015 지희킴

“자화상은 작가 자신의 심리적 전이의 효과들이 기록되는 도상적 기호로, 거기에는 항상 작가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다. 개인적 욕망을 접목시키고 사회의 표준적 경계 내에 포착되지 않은 모호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마두-여성은 그 자체가 자화상이자 작가의 투쟁 장소이며 혼성과 경계 넘기를 실현하는 시대적 표상이다.”
– 배명지 코리아나미술관 큐레이터

마스커레이드는 끝났다

12시 종이 울리면 신데렐라의 마법은 사라진다. 화려한 치장은 사라진다. 그렇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이 한낮 백일몽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본연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최근 지희킴이 선보인 작업은 12시가 지난 신데렐라 같다. 마스커레이드가 끝나고 베일을 벗은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희킴의 최근 작업은 책에 기반을 둔다. 그녀의 북드로잉 작업은 텍스트에 담긴 논리적 인과관계를 무시한다. 그리고 책 위에 드로잉을 그림으로써 텍스트를 지운다. 이 행위는 단순히 글자를 그림으로 덮어쓰는 것이 아니다. 책 위에 그려진 드로잉의 주제는 텍스트의 서술적 내용을 무력화한다. 드로잉은 철저히 개인적인 기억과 감정에 의지한다.
북드로잉 작업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책을 펼쳐서 눈에 띄는 한 단어를 포착한다. 그 단어에 뿌리를 두고 브레인스토밍을 이어간다. 잊고 있었던 내면에 자신을 맡긴 채 생각의 길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기억 앞에 발걸음이 멈춘다. 바로 그 종착지에서 마주하는 장면이 책에 그려지게 된다. 작가는 개인적인 기억의 조각을 책에 활짝 펼쳐 보이지만, 관객이 그 의식의 흐름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는 없다. 마치 남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데 모르는 언어로 쓰여있어서 해석 불가한 상황 같다. 영국 유학시절, 언어의 장벽에 부딪힌 지희킴은 유독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흔히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다”라는 표현처럼 작가에게 독해가 어려운 영문 텍스트 단락은 이미지 덩어리와 같았다. 이미지화된 텍스트 위에 그려진 그림은 레디메이드(책)를 사용한 작업이다. 검은 덩어리(텍스트)와 조응을 이루는 콜라보레이션이다.
의식의 과정을 생략한 결과물로, 내면을 한 단계 감추면서도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지희킴의 작업에서 꾸준히 나타난다. 책을 지지체로 사용하기 전에는 얼룩말 탈을 쓴 여성이 등장하는 회화를 주로 했다. 얼룩말의 줄무늬는 카모플라주다. 얼룩말 모양 탈로 그림 속 인물은 이중으로 자신을 숨긴다. 이를 통해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반항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의 모습을 감춘 여성이 등장하는 유학 이전 작업은 어딘지 모를 불편함이 있다. 반면 유학 후 작업에 등장한 여성은 훨씬 직접적이다. 풍자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여성은 얼룩말 탈을 벗고 실존 인물로 등장한다. 작가는 너무나 명확하게 규정지진 아름다움의 기준에 염증을 느꼈다. 한국 여성은 큰 눈, 높은 코 등 서구의 아프로디테를 설정하고 이를 위해 몸부림친다. 이러한 기준에서 작가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작가는 과연 우리의 이러한 미적 기준이 옳은지 질문을 던진다. 잡지에 등장한 서양모델들을 지知의 아이콘인 책과 함께 배치해 문제를 제기한다. 얼룩말 탈로 얼굴을 가리고 다소 폭력적으로 드러내던 반항적 표현과 사뭇 다른 변화다.
지희킴에게 책은 무한한 자유의 창작소다. 도서관에서 기증 받은 책에는 많은 사람의 추억과 기억이 남아 있다. 책장 사이에 사람을 찾는 편지가 끼워져 있기도 하고, 압화가 발견되기도 했다. 책 위에 식물도감에서 스캔 받은 꽃을 오려붙여 정원을 만드는 작업도 이러한 타인의 흔적에서 시작되었다. 결국 책을 펼쳐 눈에 띄는 한 단어에서 시작해 자기 자신의 의식이 닿는 어느 지점을 표현하거나, 또 다른 책에서 차용한 이미지와 부착해 사회를 풍자하거나, 타인의 흔적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진행하며 작가는 이전보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책이라는 지지체에 의지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작가는 이 위험성을 자각하고 기존의 작업을 확대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 중이다. 앞으로 펼쳐질 지희킴의 작업이 기대되는 이유는 그의 모습이 어떤 식으로 드러날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날 전면에 자신을 드러낼 수도, 혹은 사회나 관객을 드러낼 수도 있다. 자신의 모습을 한 꺼풀씩 드러낼 때마다 우리는 작가와 가까워질 것이다.
임승현 기자

〈불가능한 열망〉 기부 받은 책에 프린트 이미지, 가변크기, 2013~2015

〈불가능한 열망〉 기부 받은 책에 프린트 이미지, 가변크기, 2013~2015

〈Sleepless Night 2〉 캔버스에 아크릴, 마블링 130×162cm 2008

〈Sleepless Night 2〉 캔버스에 아크릴, 마블링 130×162cm 2008

지희킴은 1983년 태어났다. 동국대 미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골드스미스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07년 진흥아트홀에서 열린 〈Finding my other self〉를 시작으로 서울과 런던에서 4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서울시립미술관, 골드스미스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3월부터 2016년 2월까지 인천아트플랫폼 6기 장기 입주작가로 활동한다.

 

KIM SHIN’S DESIGN ESSAY 9

창조 적당히 합시다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미팅을 하려 경복궁역에서 내려 서촌을 걸었다. 이곳은 최근 몇 년 사이 상권이 엄청나게 뜬 곳이다. 중국과 한국 관광객들로 붐빈다. 인왕산과 북악산, 경복궁과 사직공원, 옛날 도시형 한옥과 골목길이 있는 예스러운 곳이다.
그러나 길가에 늘어선 상점들을 보면 고개를 돌리고 싶다. 어지러운 간판들 때문이다. 한국의 디자인 수준은 모든 분야에서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단 하나 거리의 간판 디자인만 빼놓고 말이다. 간판 속 한글 서체는 모두 대학에서 정규 디자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디자인한 거다. 그렇지만 옛날에 디자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간판장이들이
간판 만들 때보다도 더 형편없어진 거 같다. 왜 그럴까?
옛날에는 무식한 간판장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멋을 부려가며 글자를 만들지 않았다. 옛날부터 내려오거나 그 시대에 널리 쓰이는 글꼴을 선택해서 글자를 만들었다. 전화 취급소나 버스표 판매소를 알리는 양철간판, 이발소나 쌀집, 도장집을 알려주는 나무입간판, 아무 장식도 없는 백색 바탕에 고딕체로 중량감 있게 쓴 메인 간판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정도에서 벗어난 못났거나 요란한 간판을 보기 힘들었다. 그건 그걸 쓴 사람의 솜씨라기보다 전통과 시대의 솜씨다. 개성의 과시나 열정적 창조 따위는 주인이, 동네 사람이, 그리고 간판장이 스스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암묵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창조적인 능력이 없어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간판이 없다는 건 사람을 얼마나 편안하게 만드는가! 아니 오히려 “창조하라”는 사회적 강요가 없기 때문에 간판들은 사람들의 신경을 자극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한국이 창조로 먹고사는 나라인 양 떠드는 오늘날의 간판을 보라. 대개는 붉은 색, 파란색, 노란색, 심지어는 핑크색 또는 무지개색, 그라데이션 효과를 바탕으로 글자가 쓰였다. 또는 업종을 표시한다고 간판 배경에 시골의 목장이나 음식이 끓고 있는 찌개, 소, 돼지, 생선 따위가 인쇄돼 있다. 상점 간판 하나에 심벌, 업종 관련 사진, 글자, 타원과 같은 그래픽 요소, 게다가 글꼴마저 여러 가지, 온갖 색상들로 무질서를 넘어 방종, 방탕, 난잡하기 이를 데 없다. 산업혁명시대의 수준 낮은 바로크 스타일을 보는 것 같다. 글꼴은 또 어떤가? 개성이 지나치다고 하는 건 과분한 평가다. 그냥 수준 이하의 글꼴이 수두룩하다.
글꼴 회사들이라고 변명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글꼴의 가치를 몰라주니 돈 주고 사지 않는다.
또 영문 알파벳에 견주어 너무나 많은 수의 글자를 디자인해야 하니 생산성과 효율이 떨어진다. 한글 서체는 오로지 한국시장에서만 팔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상품이다. 그러니 생산하는 모든 서체를 다 완성도 높고 아름답게 디자인하는 건 불가능하단 걸 인정한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낙서한 것 같은 글꼴을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구색을 갖춰야 해서, 고객이 다양한 걸 찾으니까 라고 변명하지 말자. 왜냐면 불행하게도 어떤 상점 주인이나 간판업자는 그런 형편없는 글꼴로 간판을 만들어 시민들의 눈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간판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서 이런 걸 이슈로 삼는 건 진부하기조차 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개선이 안 되는 걸 넘어 나빠지기까지 하니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나는 이 문제에 대안을 낼 능력이 없다. 단지 창조의 압박, 다시 말해 남과 달라야 한다는 내부, 또는 외부의 강요로부터 초연해질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사실 거창한 창조는 그다지 필요 없다. 글자를 쓰고 읽는 대다수 사람은 글꼴이 많지 않은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상점 주인도 간판업자도 이상한 글씨가 있어서 골라 쓴 것이지, 없었다면 아마도 더 아름답고 완성도 높은 단순한 명조체 같은 글꼴로 간판을 만들었을 것이다. 만약 상품의 구색 때문에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면 기본 글꼴에서 조금만 변화를 주어 출시하는 건 어떨까? 차별성과 동시에 완성도도 높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개성과 창조에 매달리다보면 사람이 손으로 쓴 흘림체 같은 걸 바탕으로 한 글꼴 만들기의 유혹에 빠져들고, 괴물을 낳기 쉽다. 창조의 압박이나 경쟁 없이도 아름답고 정겨운 간판세계를 만들었던 옛날 사람들의 평화롭고 느긋한 마음이 새삼스럽게 부럽다. ●

위 정희우 <종로의 나무간판> 시리즈 2014 갤러리 그리다에서 열린 개인전(2014.11.26~12.7) 광경 작가는 종로의 나무간판을 탁본으로 떠내 전시장에 나란히 걸었다.

CRITIC 양혜규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

삼성미술관 리움 2.12~5.10

블라인드 설치작업을 통해 일찌감치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아온 양혜규 작가의 이번 삼성미술관 리움 전시는 필자를 기대감으로 부풀게 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어떤 식으로든 블라인드 구조물을 발견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블라인드 구조물인 <솔 르윗 뒤집기 – 23배로 확장된, 세 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 작품은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미니멀리즘 작가인 솔 르윗의 작품 자체가 주변 환경에 쉽게 동화되듯 양혜규의 블라인드 작품 역시 리움의 현대적 공간 구조물과 함께 작품이라는 인상을 깊이 심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혜규의 작품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거나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심코 지나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어떤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시의 도입부에 <솔 르윗 뒤집기>를 설치함으로써 작가는 그 제목과 마찬가지로 ‘현대문명 뒤집기’를 시도하고 있음을 강력히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뒤집기는 또다시 기획전의 전체 제목과 의도인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와 정확히 일치한다. 양혜규가 조지 오웰과 로맹 가리의 소설에서 차용한 코끼리의 의미는 현실에서는 연약하지만 주인공의 상상 속에서는 강인한 존재로서 자연 생태계를 의미하고, 자연으로부터 괴리된 인간 윤리를 호소하는 매개체와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전시의 큰 목적은 자연과 야생을 현대문명 속에 부활시키고, 자연과 함께 사라져버린 인간들의 공동체적 관계의 회복과 소외와 고립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함이다. 이러한 전시 의도를 읽으며 전체 전시를 다시 보면 독립적이고 이질적으로 보이는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공명하며, 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처럼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시장으로 내려가면 짚풀로 제작된 설치물들이 한눈에 들어오며 전반적으로 농경사회로 이뤄진 과거의 한 시대로 우리를 인도한다. 농경사회는 공동체의 가치가 분명히 존재하고 이웃과 동일한 종교와 삶의 의미를 갖춘 사회였으리라. 그래서 지금 이 전시를 감상하는 모든 관람객은 일시적이나마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중간 유형>이라 명명된 짚풀 건축물들은 고대 마야의 피라미드, 인도네시아의 불교 유적 보로부드르, 피어나는 튤립이라 불리는 러시아의 이슬람 사원 라라 툴판을 참조한 구조물과 인체를 연상시키는 개별 조각 6점으로 구성된다. <중간 유형>은 다양한 출처의 문명들을 대변하는 문명의 파편들이다. 더 나아가서 전시장의 기둥은 마치 고대 신전들의 그것처럼 짚풀로 감싸져 있다. 작가 양혜규는 어쩌면 ‘문화 순례자’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구조물들 사이에 놓인 인물상 같은 입체물에는 민속적 상상력이 깃들어 있다. 짚풀은 천연 짚이 아니라 인조 짚이다. 이러한 인조 짚의 사용은 모든 것이 시뮬라크르로 화한 현대문명에 대한 작가의 이중적 태도를 엿보게 해준다. 현대의 기술문명은 자연적인 것, 역사적인 것, 상상적인 모든 것을 진짜인 것처럼 복원할 수 있다. 사라진 자연, 사라진 공동체, 사라진 민속적 유물들이 엄밀한 과학기술과 고고학적 발견과 고증을 통해 실제보다 더 실제적으로 복원되고 전시된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영혼이 삭제된 피상적인 복원이 창궐한다. 따라서 양혜규는 자신의 작품을 통한 부활이 이러한 피상성 속에 함몰되는 것을 극히 경계하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그중 첫째가 <VIP 학생회>라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관람객들의 쉼터이다. 이것은 서울의 외교사절들과 정치인, 화가, 문학가들이 사용하던 의자와 탁자들로 관람객이 전시 감상 중 잠시 앉아 휴식하면서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장소이다. 여기서 작가는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이래로 내려온 창작의 분업을 제안한다. 작가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대여자들은 대상을 제공하며, 미술관은 예술작품임을 인정하는 전시장을 제공하고, 관람객들은 실제로 휴식을 취함으로써 작품 제작에 참여한다. 그리고 작품 구입을 통해 다시 한 번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창작에 직접 행동으로 참여함으로써 양혜규 작가의 창작 공동체가 완성된다.
다음으로 작가는 영감의 부활을 위해 무속 신앙적인 요소를 다분히 가감한다. 작가가 관람객의 참여를 유발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사실 관람객이 전시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요구된다. 즉 관람객은 전시장 입구에 준비된 <소리 나는 의류>라고 하는, 실제 착용 가능한 황금색의 금속 방울들로 엮어진 작품을 착용하고 방울 소리를 울리며 전시장에 입장한다. 대부분의 종교와 무속에서 방울은 영혼과 신성에 관계된 중요한 요소이다. <상자에 가둔 발레>도 인물 조각 6점의 표면 전체를 방울로 뒤덮었으며, <바람이 도는 궤도 – 놋쇠 도금>에도 선풍기 날개 대신 방울을 달아 청아한 방울 소리를 내게 한다. 이와 같이 이번 전시 작품들의 대부분은 종교적 색채를 짙게 풍기는데, 수공예 기법을 이용하여 정성들여 짠 <삼세번 희부연이>도 이슬람 문화권의 기하학적 문양에서 출발했고, 중앙 정면의 높은 벽면에 그려진 대형 벽화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자춤 – 신용양호자 #240> 역시 바위산에 새겨진 토템을 연상케 하며 개인 정보를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나타난다. 또한 <정지(井地)>의 귀목도 기이한 동물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마치 영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종교적 분위기는 긴 벽을 뒤덮은 <만국애도실>로 이어진다. 위아래가 뒤집혀 강이 하늘 같고, 하늘이 강 같은 히로시마의 풍경 위에 거꾸로 선 작가의 작품 뿌리 공예, 묘비석 등의 이미지가 둥둥 떠다니는 초현실적 풍경은 원폭으로 희생된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함으로써 사라질 현대문명에 애도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블랙박스’의 블라인드 설치작품 <성채> 역시 컴컴한 분위기 속에서 고해성사실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여기서는 끝없는 고해성사가 이뤄지는 것처럼 계속 중얼거리는 소리가 반복된다. 고해성사와 기도문을 중얼거리고 염불을 외는 듯한 소리는 아래층의 <창고피스> 안에서도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작품에 현실성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공감각의 활용을 들 수 있다. 양혜규의 작품세계는 시각, 청각 혹은 촉각 등 하나의 감각에 제한되지 않는다. 전시장 깊은 곳에서는 각종 소리와 음악, 해설 등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며 공간을 채우고, <성채>에서는 빛과 어둠, 그리고 여덟 가지의 향을 분사하도록 해서 이미지에 현실감을 부여하고자 한다. 인위를 통해 인위를 극복하고자 하는 모순을 보이지만 말이다.
양혜규 작가는 이번 기획전을 통해 극히 복합적인 작품세계를 제시하고자 한다. 문화적・종교적 복합성, 모든 예술 장르를 포함한 장르의 복합성, 그리고 다양한 소재의 복합성이 그것이며, 여기에 시간과 역사, 장소의 다양성이 더해진다. 나아가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수용,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 역시 그 두께가 느껴지며 복합적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시도들이 예술작품으로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는지 여부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대예술에서는 작가는 제안하고 관람객과 공동체가 그것을 성공적인 예술작품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양혜규 작가는 자신이 의도한 바를 훌륭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수균 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양혜규 <상자에 가둔 발레>(가운데) 2013/2015

양혜규 <상자에 가둔 발레>(가운데) 2013/2015

 

CRITIC 미묘한 삼각관계

서울시립미술관 3.10~5.10

역사에 대한 기억과 망각의 정치학은 국가 간의 정신적 차이와 습성을 낳는다. 정신은 한 사회의 제도를 형성하고 그 제도를 통해 세대가 구성되며, 이러한 거시사적 틀 안에 위치한 한 사람은 또한 미시사를 생산한다. 서울 시립미술관의 <미묘한 삼각관계展>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세 작가, 양아치, 쉬전, 고이즈미 메이로의 미시사와 거시사가 교차하는 지점 위에 서 있다. ‘시간’은 이 전시의 매우 중요한 테마로, 같은 세대의 세 작가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각기 다른 시기를 재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형적 시간을 동시적 관계, 즉 ‘미묘한 삼각관계’로 풀어내고자 한다.
그런데 전시가 시작되자마자 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서울 한복판에서, 가미카제의 영상뿐 아니라 역사에 대한 궤변을 늘어놓는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에 대한 거북함이 그것이다. 더욱이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립미술관에서, 피해자 담론을 옹호하는 일본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언어들이 관객의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미술 작품이 어떤 이유로 거센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일은 흔히 있지만, 고이즈미의 작업에 대한 비판은 한국이 역사에 접근하는 태도의 단면 또한 함축하는 흥미로운 해프닝으로 보인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도쿄 이야기>에서 착하고 아름다운 둘째 며느리로 유명한 배우 하라 세츠코는 쇼와시대, 친절과 미소의 대표 이미지로 굳어졌다. 이렇게 고착된 이미지는 개인의 영혼이나 진실과는 상관없이 박제처럼 한 시대와 권력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고이즈미 메이로의 <알터피스 #6, 2014>에서 점점 일그러지는 하라 세츠코의 초상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을 통해 각인되고 왜곡되는 역사와 현실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이는 <어린 사무라이의 초상, 2009>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미카제로 분한 배우는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부추김에 도취해 결국 흐느끼고 마는데, 비평가 가토 슈이치(加藤周一)가 추신쿠라(忠臣藏)증후군이라 부른 일본의 이 독특한 정신이 실체도 없는 국체(國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파시즘으로 고조되고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일본의 근대화가 근대적 합리화의 핵심인 탈주술화에 성공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병리적 상태였으며, 이것이 현재까지 유효함을 드러내는 짧은 서사이다.
또한 아버지가 천장에 그리는 검은 비행기(<기억술>(아버지)2011)나 공습의 순간을 증언하는 갖힌 기억(<갇혀진 말> 2014)은 실체없는 우상에 눈멀었던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광기의 결과로 제시된다. 그럼에도 <오랄 히스토리 – 1900년부터 1945년 사이 일본과 그 주변에서 일어난 일>(2015)에서 역사에 대한 망각과 무지의 현재를 가감없이 보여줌으로써, 그의 작품 <시각적 결함>처럼 일본의 새로운 세대 역시 여전히 먼 눈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음을 직시하도록 한다.
직접적이며 강렬한 방식으로 자국의 근현대사에 접근하는 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들은 동시대 일본 미술에서 찾아보기 힘든 메타적 역사인식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는다. 따라서 일본의 기형적 근대화 과정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관객은 강력한 피해자의 기억을 호출하며 어린 사무라이나 오랄 히스토리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작업들이 제시하는 직접성을 무조건 역사에 대한 불경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미술작품이 제시하는 진지한 역사적 성찰에 대한 외면이며, 과거를 냉정히 직시하는 태도와도 어긋난다. 요컨대 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은 서울뿐 아니라 도쿄, 베이징에 전시하더라도 불편할 것이며, 이 불편함의 이유는 세 도시 각기 다르다. 동일한 불편함과 서로 다른 이유, 이것이 한중일 세 나라의 미묘하다면 미묘한 삼각관계의 현재이다.
구나연 미술비평

CRITIC 두렵지만 황홀한

하이트컬렉션 2.27~6.5

중견 화가들이 추천한 후배 화가들로 구성된 만큼, 회화의 현재를 확인하는 자리일 듯싶어, 필자가 출강하는 미대 수강생들에게 토론 과제로 내준 전시가 <두렵지만 황홀한>이다. 한 학생이 전시 제목 ‘두렵지만 황홀한’의 뜻이 전시를 통해 파악되지 않으며, 출품작들의 공통점이 뭔지 모르겠다고 지적하길래, 전시 제목은 우연적으로 선택되었을 것이고 기획의 초점은 중견작가들이 추천한 후배 화가들의 면모를 확인시키는 데에 있다고 답해줬다. 또 추천자 6인의 회화관이 상이한 만큼 피추천된 13명 사이에 작품이 균질하지 않고 다변화된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덧붙였다. 추천인 6명과 피추천인 13명의 공통점이 없진 않다. 이들의 대화록을 살피면 회화의 위기라는 해묵은 자문자답이 자주 읽힌다. “저는 가끔씩 스스로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내가 하는 작업, 즉 회화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요”라는 전현선의 고민이나, “이렇게 강하고 자극적인 것만을 원하는 … 시대에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도 나지 않는 정물화라는 진부한 제목의 평면 그림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과 기능이란 있기나 한 것인가?”라는 자의식이 밴 12년 전 작가노트를 이번 대화록에 재수록한 김지원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창작과는 거리를 둔 평론가로서, 화가만이 공유하는 미적 질감이 있음을 인정한다. 완성작의 우열을 좌우할 때 화가들이 흔히 의존하는 색감의 선택, 안료의 물성, 붓질의 재질감 등이, 평론에선 곧잘 간과되는 사실 역시 잘 안다. 그래선지 회화의 가치를 다룬 대화에서 홍승혜는 “요즘은 회화의 개념을 확장시키는 추세이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의 회화란 여전히 작가의 몸이나 정신을 드러내는 붓질, 색채의 선택 등이 중요”하다는 경험을 털어놓았고, 이번 전시 제목에 인용된 카툰풍 작업을 하는 유한숙마저 “회화만이 가지는 특유의 촉감, 정서”를 신뢰하다고 밝힌다. 전적으로 회화에 집중한 이 기획을 추동한 배후에 무엇이 있을까? 화단의 주 무대를 다매체 예술이 장악한 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것 같다. 때때로 미심쩍은 공감마저 일으키지 못하는 다매체 예술의 선전 앞에서, 누적된 피로감이 미술의 원형인 회화의 현재를 검토하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럼에도 <두렵지만 황홀한>에 피추천된 주목할 화가 13명 사이에 평면이라는 장르적 공통점 외에 교차점을 찾긴 어렵다. 13명이 지향하는 미감도 다분히 차이가 있다. 파악하기 어려운 작품의 맥락이나 합의하기 힘든 작품의 우열까지 치면, 다매체 예술에 버금갈 만큼 회화의 현재는 친숙했던 예전의 바로 그 회화가 더는 아니다. 그래선지 우열을 가르는 합의점도 얻기 힘들다. 전시를 본 학생 일부가 정은영의 작업을 저평가했는데 실물 케이크를 닮지도 않았으며 시각적으로 근사하지도 않아서란다. 안료로 케이크와 김밥을 만든 정은영에게서, 회화를 가둔 프레임 밖에서 물감으로 동서양의 음식이라는 뜻밖의 결과물을 낳은 재치를 높게 산 나와는 차이가 컸지만 내 생각을 털어놓진 않았다. 학생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고, 물감을 케이크와 김밥으로 둔갑시킨 정은영의 태도에서 작가적 자의식을 읽은 내 해석이,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낮은 편”이어서 안료로 입체 조형을 택했다는 작가의 의중과 달랐던 탓도 있다. “그림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 자체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풍겨야” 한다는 왕선정이나, “좋은 그림을 보면 자세한 내용이나 무슨 맥락인지 잘은 몰라도 그냥 좋은 게 느껴지잖아요?”라는 최수연이나, “텍스트가 비주얼의 쾌감을 증폭시킨다(회화가 이제는 많다)”는 홍승혜의 견해는 서로 다른 주장이지만 공존한다. 그것이 다매체 예술의 선전과 다변화된 회화가 뒤엉킨 속에서, 화가가 찾는 어려운 길이다.
반이정 미술비평

CRITIC 아무도 모른다

인사미술공간 2.6~3.8

<아무도 모른다전>은 인사미술공간의 2014년 큐레이터 워크숍 1차 성과보고전으로써 김보현, 김리원, 김태인, 정시우(이상 4인)가 공동기획했고, 석수선, 최수연, 서평주, 한정우, 000간(신윤예+홍성재), ETC(이샘, 전보경, 진나래), 다다수 다카미네(이상 7팀)가 참여했다. 기획자들은 8개월 동안의 인큐베이팅 과정과 워크숍을 거쳐 ‘괴담’이라고 하는 사회적 징후를 ‘괴담의 탄생과 은유’, ‘언술 전략으로서 재구성’, ‘실재하는 공포와 불안’이라는 세 가지 맥락 속에서 전시 형식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어느 시대, 사회에서도 괴담은 존재해왔으나 이 전시는 특히 괴담이 동시대의 병적 징후를 환기하는 통로로 쓰이는 것으로 보았고, 사회가 지니는 공포와 불안을 이미지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기획자들의 현실감각을 보여주려고 했다.
전시는 각 작품이 개별적으로 읽히기보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로 보이게끔 서사 구조(앞서 언급한 3가지: 괴담의 탄생과 은유, 언술 전략으로서 재구성, 실재하는 공포와 불안)를 갖추었다. 이는 대형 주제전이 종종 취하는 방식인데 <아무도 모른다>의 경우 각 섹션이 2-3편의 작품으로만 구성된 만큼 소수의 작품으로 섹션별 주제를 깊이 파고들기는 어려워 보였다. 여기에는 일부 밀도가 떨어지는 작업들도 한몫했다. 그래도 전시가 괴담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맥락을 짚어주었기 때문에 좀 더 쉽게 읽히는 것도 사실이다. 석수선은 에볼라 창궐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확산되는 것을 타이포그라피 연작으로 보여줌으로써 괴담의 탄생을 은유했다. 무속인의 신당을 그린 최수연의 <용궁>은 괴담의 진원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물 아래에 대한 공포일 뿐임을 보여준다. 한정우, 000간, 서평주의 작업은 언뜻 한 작업으로 읽힐 만큼 괴담이 재생산(000간), 재구성되어(한정우) 전달되는(서평주) 과정이 이어지듯 연출되었다. 즉, 카더라를 수집하고, 진술서와 알리바이를 제시하고, 미디어로 도배하는 언술 전략이 연결된 듯하기에 관람하면서 잠시 혼돈에 빠질 수도 있다. 다다수 다카미네는 원전사고 이후 안전한 삶을 더욱 욕망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일시적 합의기업 ETC는 전시장에 시판 생수인 양 강남수를 가져다 놓았다. 두 작업은 상품이 안전한지 질문할수록, 또 상품이 안전하다고 강조할수록 이미 우리 일상에는 불안이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말한다. 한편, 기획자들은 인터넷에서 수집한 각종 이미지와 글을 전시작품과 함께 실은 괴담집을 전시장에 비치하여 이를 본 관람객들이 괴담의 새로운 가담자이자 유포자가 되길 바랐다. 전시 자체가 괴담의 발원지로 작용하기를 의도한 것이다. 그러나 우비 살인마와 빨간색 크레용같이 유년기에나 혹할 이야기가 아니라, 좀 더 정교한 이중의 비틀기를 시도했으면 어땠을까? 결과적으로 이 괴담집은 작가들이 나름 의뭉스럽게 만든 전시장의 알리바이를 마치 ‘괴담은 괴담이다’에 그치도록 흐트러뜨린 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성휘 하이트컬렉션 큐레이터

CRITIC 이슬기 분화석!

미메시스아트뮤지엄 3.7~4.19

파주 미메시스 미술관에서 진행중인 작가 이슬기의 전시 <분화석!>은 전시장의 실내 구조에 따라 <안>과 <밖>으로 설정된 두 공간에서, 두 가지로 구분되는 형태의 작업들로 이뤄진다. <안>의 공간에는 10장의 커다란 누비이불이 바닥면에 놓인 하얀 좌대 위에 가지런히 펼쳐져 있고, <밖>의 공간에는 진흙으로 쌓아 올린 ‘분화석’ 조각 다섯 덩어리가 섬처럼 놓여 있다. 선명한 색감의 명주로 만든 <안>의 작업들과, 두껍고 어두운 진흙으로 투박하게 자리한 <밖>의 작업들은 그 색과 형태에서 크게 대조를 이룬다.
장인의 손바느질로 섬세하게 만들어진 <안>의 이불들은 각각이 하나의 속담과 연결된다. 붉은 바탕에 초록색 원이 들어간 작업은 ‘수박 겉핥기’, 세 개의 선으로 나뉜 ‘새발의’의 한쪽에는 동그란 ‘피’ 자국이 형상화돼 있다, ‘빛 좋은 개살구’는 정말 탐스러운 진분홍의 타원형이다. 전통적 공예작업의 형식에다 단순한 선과 형태의 디자인을 담은 이 작업은, 고급스러운 외형과는 달리 속담 제목을 통해 그 구성 요소와 의미를 쉽게 연결하도록 한다.
분화석은 동물의 배설물이 굳어져 화석이 된 것을 뜻한다. 배설물 그 자체는 거부감을 일으키는 물질이지만 분화석은 동물의 식생과 생태를 가늠해볼 수 있는 분석의 재료이기도 하다. 긴 시간은 이렇게 물체의 본질을 바꿔버리기도 한다. 하얀 전시장의 검은 덩어리들은 뾰족한 탑처럼 솟아 있거나, 둘둘 말려 올려진 형태로 운반용 팔레트 위에 앉아 있다. 물론 이것은 파주의 강가에서 퍼올린 진흙 덩어리이지 진짜 배설물은 아니다. 설명서에 쓰여진 것처럼 프랑스어 “메르드(Merde)!”는 똥이라는 뜻이자 욕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걷다가 개똥을 밟았을 때 무심코 입에서 튀어나오는 의성어 같은 단어이다. 여기서 형상화된 분화석은 ‘똥의 화석’이자 ‘욕의 화석’이다. 욕설, 분노의 순간들이 퇴적되고 굳어져 무덤덤해진 상황들을 환기시키면서, 똥에서 유물로, 작품에서 똥으로 오가는 형상과 의미 사이의 메타모포즈를 보여준다.
이 <안>과 <밖>을 관통하는 것은 작업의 유희적 측면이다. 전통 이불이 가진 형태의 단아함을 속담의 가벼운 단어들로 용해하고, 다소 심각한 수사로 해석할 수도 있을 법한 진흙 조형물들은 분화석이라는 의미로 속내를 드러낸다. 이슬기 작가의 유희는 그것이 놓인 공간에 따라 사물들에 발생하는 의미에 의외의 연결점들을 집어 넣고, 그로 인해 생기는 위상 변화를 뜻한다. 안과 밖, 겉과 속이 다른 사물들에게서 “내가 이럴줄 몰랐지”라는 키득거림이 들린다. 공간의 바닥에 놓인 <안>과 <밖>의 작업들과는 그 결과 형태를 달리하는 두 개의 작업에 시선이 간다. 하나는 작은 탈 모양의 조형물이고, 다른 하나는 벽에 걸린 흑백의 이불 <가위에 눌리다>이다. 동그란 눈을 뜨고 있는 작은 탈은 못본 척 입을 닫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이불 속의 형상은 갸우뚱하며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는 까마귀의 표정을 닮았다.
김해주 독립큐레이터

CRITIC KDK P

페리지갤러리 3.12~5.9

KDK(김도균)의 사진은 공간이든 사물이든 일정량의 심리적 거리를 유추하게 한다. 실제 존재하는 대상을 담았음에도 실체적 모습을 짐작하기 힘든 시각 결과물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작가적 인상을 우발적인 감정에 의존하지 않고 예민하고 내밀한 파악이 선행된 포착으로 기록해낸다. 관찰이 아닌 포착은 우발과는 다른 작가적 시각이고 직감이며, 학습이나 숙고로 해결되지 않는 절대치에 해당한다. 이렇게 선택된 대상은 사유의 틀을 거쳐 모순된 실존을 부여 받는다.(포장상자 같지 않은 포장상자<P>) 사물의 앞뒷면도 양가성도 아닌 서로 다른 가치를 한 컷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방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작가의 시선 혹은 감각 때문으로 보인다. 그 첫 번째 방향은 기본 구조에서 전혀 다른 면모를 유추해내는 상상력이다. 포장재의 주인공 격 상품을 들어낸 후 포장상자의 구조를 클로즈업하여 마치 제3의 공간으로 보이게 하는 전이는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이 된다. 상상력과 상반되는 두 번째 방향성은 존재의 근원으로 파고들어가 원초적 핵심을 들여다보는 행위다. 살피지 않고 인식으로만 잔재한 경계 면, 포장재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모서리, 틈새 구조는 KDK로부터 제품 포장재라는 제품의 주변이 아닌 목적성이라는 전혀 다른 존재 가치를 부여받는다. (Package, Perigee, Pure) 화면의 색감 역시 불필요한 생각을 유발할 원소들을 배제한 흰색의 모노톤 위에 그라데이션이 주는 느낌이 이전 KDK의 작품에 비해 따뜻한 감상에 들게 하여 조금 더 친숙한 느낌의 일상을 만나도록 해준다.
결국 <P>는 아름답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며, 예술특구가 아닌 일상 영역의 과자, 휴대전화, 호박죽, 치킨의 포장상자들이다. 그러나 <P>는 굳이 본래의 목적과 처지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고 상상할 필요도 없는 온전한 예술작품이다.
“가장 풍부한 사건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흔히 그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보이는 것 위에 눈을 열기 시작할 때, 이미 우리는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것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ㅡ D’ Annunzio 《죽음의 명상》 중에서
예술의 일상성. 필자는 ‘일상’이라는 소박하고 친숙한 이름 아래 여전히 어렵고, 불친절한 조형언어를 남발하여 예술과 일상, 예술가와 대중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고 유지한 수많은 시각예술작품을 보아왔다. 때문에 합목적의 예술이 차라리 정직하다고 생각해왔다. <P>를 만난 오늘, 합목적의 예술이 어떻게 일상과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교집합을 보았다. 게다가 의도보다는 우연에 가깝지만-KDK의 <P>는 2~3년간 일상생활에서 모은 포장지나 포장용기 일부 또는 전체를 찍은 사진 중 75개를 고른 전시이기 때문에-전시공간인 Perigee(근지점)갤러리의 의미와 모기업인 KH바텍(휴대전화 케이스 제작업체)의 기업 특성이 매우 잘 만난 선례가 될 전시로 보인다.
김최은영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