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남춘모

작가 남춘모는 선 그 자체로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오랫동안 다양한 실험을 펼쳐왔다. 캔버스에 입체적인 선을 구현해 회화에 깊이 있는 리듬감을 부여하고, 점과 선을 입체적인 형태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일 쾰른과 한국 청도에 각각 작업실을 두고 활발한 활동을 선보이는 작가는 최근 리안갤러리 서울(5.7~6.20)을 비롯해 독일 갤러리 2곳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개최한다. 반복적인 노동을 통해 한국적 손맛을 보여준 남춘모의 작품세계를 주목해본다.

2011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개관특별전 에 출품된 남춘모의 작품

2011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개관특별전 에 출품된 남춘모의 작품

제3의 ‘질(質)을 향하여

윤진섭 미술비평,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바야흐로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가 세계 미술계에 입성했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Frieze》는 필자를 포함, 미시건 대학의 조앤기 교수, 작년에 단색화전을 기획한 바 있는 뉴욕 소재 알렉산더 그레이 어소시에이츠 갤러리의 공동 큐레이터인 샘과 틸(Sam & Till)의 논고가 실린 라운드 테이블을 특집으로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대만에서 발행되는 중화권의 대표적인 미술잡지 《뎬짱(典藏:ARTCO)》은 단색화에 대한 필자의 글을 싣고 곁들여 한국 단색화 1세대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소개했다. 이 일련의 보도는 지난해 미국에서 발행되는 《Art Asia Pacific》의 단색화 특집에 이은 것으로 단색화에 대한 해외 언론의 높은 관심을 반영한다.
해외 미술언론의 이처럼 높은 관심과 열띤 취재 경쟁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단색화에 관한 국내 미술계의 태도이다. 단언하자면 현재 몇몇 화랑이 주도하는 단색화 붐은 그 초점이 주로 판매에만 국한돼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없지 않다. 이는 일본의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파인 ‘구타이 그룹’과 ‘모노파’가 세계미술사에 등재된 사실에 비춰볼 때, 한국의 단색화가 용의주도하게 전파되지 않는다면 등재 자체가 자칫 좌초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 기인한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단색화에 대한 이론적 조명과 판매가 병행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단색화의 조명이 김기린, 권영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창섭, 하종현 등 주로 전기 단색화 작가들에 집중되고 있는 점이다. 국내의 메이저 화랑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이러한 편향적 움직임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단색화의 행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 즉, 현재 한국의 미술계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후기 단색화 작가들의 활동에 대한 무관심은 모처럼 찾아온 단색화 열풍을 식혀 말 그대로 한때의 바람으로 그칠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계승과 심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화랑계의 관심과 더불어 단색화에 대한 비평계와 미술사학계의 학문적 접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 아닌가 한다.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남춘모는 후기 단색화 작가군에서 대표적인 작가이다. 필자는 이미 수차에 걸쳐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글을 쓴 바 있기 때문에 이번 논고에서는 그의 줄 이랑 작품의 의미를 소개하고 글의 후반부에서 작업의 방향을 대폭 전환한 근작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남춘모는 1970년대 단색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세계를 펼쳐나가는 작가이다. 특히 그의 작업은 입체회화 내지는 부조회화라는 측면에서 방법적으로 여타의 작가들과 차별화된다. ‘ㄷ’자 형태의 나무틀에 천을 감싸 마치 주조하듯이 제작되는 남춘모의 작품은 가히 ‘부조 회화’라고 부를 만하다. 그것은 일정한 패턴과 골격을 지닌다. 캔버스의 프레임에 평행을 이루는 작품의 세로형 이랑들은 캔버스의 표면으로부터 도드라짐으로써 그림자를 생성한다. 2차원 평면을 부정하고 3차원 공간으로 촉수를 뻗는 이러한 형태의 작업 선례는 프랭크 스텔라의 릴리프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남춘모의 경우는 제한된 프레임 안에서 ‘몸성’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보다 집중적인 미적 태도를 보여준다. 즉,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변형 캔버스 작품이 캔버스의 프레임을 따라 일정한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 나간 반면(“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Frank Stella)), 남춘모는 그러한 회화적 관례와는 별개의 선상에서 유미적(aesthetic)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양인과 동양인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은 바로 이러한 시각적 관습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는데, 가령 2012년 <한국의 단색화전>(국립현대미술관)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한 《Art in America》의 편집장 리처드 바인의 견해와도 유사하다. 당시 발제에 나선 리처드 바인은 “한국의 단색화 작품들이 왜 이렇게 한결같이 아름다운가”고 질문을 던진 뒤, 이는 실험을 중시하는 서구 아방가르드 전통에 비춰볼 때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이처럼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평자들 간의 상이한 견해의 차이는 과연 어느 지점에서 화해를 이룰 것인가?

 2014년 부산 갤러리 604에서 열린 개인전 광경

2014년 부산 갤러리 604에서 열린 개인전 광경

물질과 마음이 맞닿은 어느 지점
필자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단색화에 대한 국제적 논의가 바로 이러한 화해의 지점으로 나아가는 도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가치에 대한 탐구》의 저자인 로버트 M. 피어시그의 관점을 주목한다. 동양의 ‘미학적 요소(낭만적 유형)’와 서양의 ‘이론적 요소(고전적 유형)’, 소위 ‘합리적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을 극복하고 이를 통합할 수 있는 제3의 ‘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논의의 중요한 근거로 과거에 한국에서 본 성벽을 예로 들었다. 그는 한국에서 본 성벽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그것이 기술공학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성벽을 쌓은 사람들의 ‘대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즉, 한국인의 ‘자기 초월의 마음 상태’와 그것을 유도하는 방식에 주목하고, 그 원인으로 ‘자신과 일을 분리하지 않는’ 마음의 자세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총체적인 해결책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고 단언하기에 이른다.
남춘모의 부조회화와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줄무늬 회화 사이의 차이점도 바로 이러한 동서양 간 사고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곧 삶의 태도에서 빚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작화(作畵)를 둘러싼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일반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주지하듯이 남춘모의 캔버스 속 이랑들은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줄무늬 회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논리적이지 않다. 남춘모 작품의 날 선 이랑들은 마치 한국의 성벽을 구성하는 돌들이 푸근한 느낌을 주듯이, 천의 보푸라기들이 느껴질 만큼 불규칙적이며 푸근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는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 작품에서 느껴지는 보편적 특징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한국의 단색화에 내재된 어떤 특수한 ‘미적 질’이다.
남춘모는 최근에 단색의 원형과 줄 오브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이는 그가 1990년대 이후 오랜 기간 추구해 온 줄 이랑 작품에서 벗어나 일련의 수제(手製) 오브제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일련의 작품들은 파편화된 사각 입방체의 조합 이후에 변모된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일단 캔버스 프레임을 떠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남춘모가 시도하는 오브제 작품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원형의 것으로 이는 레진에 돌가루를 섞은 것이고, 로프를 연상시키는 오브제 작품은 굵은 철사에 석고가루를 천에 묻혀 바른 후 색을 입힌 것이다. 색은 청색, 적색, 흰색 등 극히 제한돼 있다.
원형의 작품이건 로프형의 작품이건 공통점은 기존의 남춘모 작품이 그렇듯이 모서리 부분이 정밀한 마감질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들에서도 역시 약간 거친 듯한 표면 질감이 두드러진다. 원형 또한 표면이 매끄러운 완벽한 원이 아니라 재료의 물질감이 돋보이는 거친 표면을 유지하고 있으며, 원반의 가장자리 또한 울퉁불퉁하게 조성돼 있다. 이 점은 로프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로 두드러진 특징이다. 특히 로프 작업은 마치 로프를 둘둘 말아 벽에 걸어놓은 것처럼 우리 눈에 익숙한 자연스러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것은 필경 우리의 삶 속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이 작업이 끝나는 지점은 과연 어디인가? 서양의 미니멀 작가들, 가령 프랭크 스텔라의 줄무늬 회화는 끝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작도된 선을 따라 물감이 묻은 붓으로 칠할 때 칠을 다하면 끝이 난다. 그래서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남춘모의 작업의 끝은 물질과 마음이 맞닿게 될 시간의 어느 지점이다. 작가는 그 시간의 끝을 미리 추측할 수 없고 일과 정신이 만족할 만한 합일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끝이 난다. 또한 이는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보편적 특징이기도 하다.
로프를 연상시키는 남춘모의 작품은 플라스틱 파이프의 기계적이며 매끄러운 표면질감과는 판이한 느낌을 준다. 자세히 보면 매우 거칠고 울퉁불퉁한 표면 질감을 지닌 그것은 마치 탯줄처럼 자연의 상태에 가깝다. 그것은 자연을 지향하는 행위, 즉 자연을 향한 ‘마음’의 작용의 발로이다. 그래서 그것은 ‘마음’이 질료에 옮겨 붙어 물질도 정신도 아닌, 피어시그의 용어를 빌리면 제3의 ‘질’을 지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언뜻 보면 남춘모의 작업은 한국 고유의 ‘대충주의’ 내지는 ‘적당주의’의 산물 같다. 한국인 특유의 독자적인 심성을 배태한 이 특유의 행동에는 그러나 그 속에 자연을 향한 ‘마음’이 담겨 있다. 남춘모는 왜 원반의 끝을 매끄러운 기계적 선으로 마감하지 않았는가? 왜 로프의 표면을 말끔하게 다듬지 않았는가? 나는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 이것에 대한 생래적인 거부가 일어났다고 본다. 합리적 이성과 동양적 직관 사이의 갈등을 넘어 양자를 통합하려는 미학적 의지가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댔다고 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피어스그가 언급한 것처럼 ‘자기 초월의 마음의 상태’가 질료에 육화돼 나타난 모습 그대로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남춘모의 작업에서 미래 한국 미술의 미학적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에 출품된 남춘모의 작품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단색화>에 출품된 남춘모의 작품

남 춘 모 Nam Tchunmo
1961년 출생했다. 계명대 미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9년 대구 예맥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39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청도와 독일 쾰른을 오가며 활발한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현재 독일 본 갤러리 쿤스트라움21(4.17~5.29)과 베를린 안도 파인아트(4.30~6.19)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ARTIST REVIEW 김남표

〈Instant Landscape-Traveler#33〉 캔버스에 혼합재료 130.3×162.2cm 2014

〈Instant Landscape-Traveler#33〉 캔버스에 혼합재료 130.3×162.2cm 2014

마치 앨리스가 토끼를 쫓아 ‘이상한 나라’로 입장하듯, 김남표는 동물의 형상을 캔버스 전면에 내세워 관객에게 동물의 시선을 따라가게 한다.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초현실적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서울 논현동에 새로생긴 전시공간 에이루트 (ARouTe)에서 개인전(4.22~5.22)이 열리고 있다. 손끝의 촉감으로 즉물적인 형상을 구현해내는 작가 김남표의 작업에 담긴 이야기를 살펴보자.

손끝 풍경

최은경 미술이론

김남표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집단 막’을 결성하여 5명의 작가와 함께 공동작품,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집단 막’은 “과연 일상적인 재료로 일상적인 장소에서 미술을 실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하여 실험적인 형태의 작업을 이끌어왔다. 예를 들어 〈재개발/재건축 프로젝트〉, 〈매봉터널 프로젝트〉, 〈비닐갤러리 프로젝트〉 등 이름만 들어도 한겨울의 찬바람이 살갗을 에는 듯 고생스러운 현장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작업이다. 김남표는 “젊은 시기의 대부분을 몇 명의 작가 동료와 함께했다. 일상적인 현장에 미술을 가지고 들어간 이때가 현재 개인 작업의 근간을 이룬 시기”라고 말한다.
김남표의 작품에는 초기(1990년대 중후반~)부터 캔버스에 여러 가지 재료를 ‘붙이는’ 형태의 모습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때로는 쇠 조각을 캔버스에 붙이고 때로는 캔버스 자체를 셰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로 변형시키기도 한다.
미완성작으로 여겨질 정도의 흰 여백이나 작품의 맥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물질을 오브제로서 캔버스에 부착하는 것은 회화의 본질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한 작가의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모더니즘의 화두와 관련된 것으로서 새로운 접근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작가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사회화 과정을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모더니즘적인 방식의 결과물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접근 방식은 김남표 작업의 시작이자, 창작 환경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든 아니면 부정하고 극복하든 그것은 작가 자신의 몫이다.
김남표의 작업실은 언제나 캔버스 아래에 인조털이 놓여있고, 목탄, 콘테 등에서 나온 가루가 날리고 바닥에 내려앉는다. 캔버스 위에 무엇을 표현하든 항상 재료의 일부분이 캔버스 아래 수북이 쌓인다. 더욱이 캔버스에 표현된 재료 역시 불안정하게 정착된다. ‘집단 막’에서 현장 작업을 중시하던 것이 습관이 되어 요즘의 개인 작업에도 드러난다. 캔버스를 둘러싼 주변부가 이와 같은 현장성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집단 막’이 운영한 비닐갤러리에서 2005년 열린 김남표 개인 프로젝트 〈Stopping for a while전〉에서는 경제적 논리에 의해 유목민처럼 이주하는 현대인과 작가 자신의 모습을 재료의 불안정성과 표현의 순간성으로 드러냈다.
모든 표현을 붓 대신 손끝으로 직접 하다 보니 시커멓게 그으른 검은색 목탄자국과 붙이다 남은 인조털이 손끝에 늘 매달려 있다. 손끝의 인조털은 마치 붓 인 양 목탄을 캔버스에 옮기고 캔버스는 화가의 손끝을 반영한다. 즉, 김남표 작업에서 드러나는 현장성은 캔버스 주변뿐만 아니라 작가의 손끝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착되지 않는 재료를 선택하고,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비계획적이고 순간적인 표현은 김남표 작품 전반의 제목인 순간적 풍경(Instant Landscape)의 개념을 이끌어낸다. 다시 말해서 순간적 풍경의 불안정성, 순간성, 그리고 직접성은 모더니즘에 반응하는 김남표의 작업태도이다.
한편 그의 작품은 캔버스 전체를 인조털로 감싼 작업과 흰 캔버스에 오브제로서 인조털을 사용한 작업으로 나눠진다. 첫 번째, 전면 털을 사용한 작업은 인조털의 결을 이용한다. 바늘이나 포크 같은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털을 누르고 세우기를 장시간 동안 반복하여 나타낸 음영으로 풍경을 표현한다. 고정된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완성된 작업이라 하더라도 어떤 물리적인 압력이 가해지면 이미지는 사라진다. 어릴 때 담요의 결을 이용하여 무엇을 그리고 지우 던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두 번째, 오브제로서 인조털을 사용한 작업은 우선 털을 임의로 캔버스에 부착한 후에 연상되는 이미지를 그려 나가거나 이미지를 그린 후에 인조털을 부착한다. 작은 점에서 무작위로 시작된 화면은 서서히 연결되고 그 결과 작품이 스스로 풍경이라는 구조 안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는 ‘의식의 흐름(flow of consciousness)’이라는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과도 연결될 수 있는데, 의식의 흐름을 차용한 기법은 구조적이기보다는 즉흥성을 더 강조한다. 지속성은 결여되지만 동시에 다양하면서도 복잡할 수 있는 수많은 아이디어와 마주할 기회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커피 잔에 커피가 아닌 폭포수가 떨어지고, 신발 안에 나무나 동물이 존재하는 공간이 나타남으로써 사물의 고유한 기능적 속성에서 벗어나 거대한 초현실적 풍경을 제공한다.
사물의 이상한 조합 –커피 잔에 신발을 올려놓는 비일상적인 상태 –을 기이한 사건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아름다운 풍경의 미적 사건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사물의 형태가 가지고 있는 기능적인 요소를 배제한 체, 하나의 미적 형태와 공간으로 인식했을 때 그 사물의 진정한 사물다움은 자유로운 상상의 공간 역할을 하며 보는 이를 몰입하게 한다. 사물다움이란 사물의 기능성과 용도에 의한 인식이 아니라, 그의 존재로부터 출발한다는 본질적인 깨달음이다.
또한 김남표 작품에는 동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 동물들은 소재적 측면보다는 작가에게 예술적 감흥을 일으키는 재료로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동물의 이미지를 ‘그린다’기보다는 동물을 손끝으로 ‘만지는’듯한 행위를 통해 작품을 구상하고 연상하기 때문이다. 손끝에 닿는 재료의 촉각을 통해 작품을 구상하고, 구상된 계획을 다시 손끝에서 실행한다.
화가가 무엇을 그릴 지를 결정하고 그에 맞는 방식의 기법과 재료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논리라면, 김남표는 ‘무엇을 만지고 무엇을 느꼈을 때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를 결정하는 독특한 과정을 취한다. 이를 통해 갇혀 있는 동물들의 함성을 손끝으로 들려주고, 일상의 재료 안에 갇혀 있는 사물다움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는 것이다. 손끝 풍경은 이러한 이야기가 존재하는 현장이다. ●

5월 22일까지 ARouTe에서 열리는 개인전 광경. 〈Instant Landscape-androgynous#3〉(왼쪽) 〈Instant Landscape-corrugated cardboard#2〉(오른쪽)

5월 22일까지 ARouTe에서 열리는 개인전 광경. 〈Instant Landscape-androgynous#3〉(왼쪽) 〈Instant Landscape-corrugated cardboard#2〉(오른쪽)

김 남 표 Kim Nampyo
1970년 태어났다. 서울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9년 웅전갤러리에서 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서울 암스테르담 뉴욕 등지에서 여러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0년 ‘집단 막’을 결성해 2004년까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5월 24일까지 갤러리 퍼플에서 〈TENT(김남표+윤두진)〉 2인전이 열린다.

ARTIST REVIEW 표영실

둥근구멍 2015 oil on canvas 112x145 cm

위 〈속살〉 캔버스에 유채 145×112 cm 2013 (오른쪽) 아래〈둥근구멍〉 캔버스에 유채 112×145cm 2015

작가 표영실의 회화는 반투명한 빛을 머금고 있다. 마치 따뜻한 봄기운을 알리는 연한 색 꽃잎처럼 은은하게 다가온다. 회화의 이미지들은 흐릿하고 모호한 듯 보이지만 이를 표현하는 터치는 겹겹이 쌓인 붓 터치 위에 존재한다. 표영실의 이미지는 큐브, 나무, 집, 풍선, 신체의 일부 등 일상생활 속 오브제의 표현이다. 스페이스비엠(3.27~4.30)에서 열린 개인전을 중심으로 표영실의 오묘하고 ‘반투명한’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살갗, 연약한 너무나 연약한

고충환 미술비평
반투명. 투명과 불투명 사이. 투명하지도 불투명하지도 않은. 반쯤만 보이는. 봐도 본 것이 아닌. 투명과 불투명에는 사이가 있다. 표영실의 그림은 불투명에서 투명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진화한다기보다는 옮아가고 있다. 그래서 근작은 눈에 띄게 투명 쪽에 가깝다. 그렇다고 달라진 건 별반 없어 보인다. 불투명으로 시작 했을 때나 투명한 근작에서나 애매하기는 매한가지. 처음엔 뭔지 몰라서 막연했고, 뭘 어떻게 그려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불투명했다. 그런데 투명해진 근작에서도 여전히 막연하고 막막하다. 투명하면 또렷해져야 하는데, 적어도 불투명에 비해보면 그 실체가 어느 정도 손에 잡혀야 하는데, 반쯤만 투명한 탓이고, 절반만 보여주는 탓이고, 숨기면서 보여주는 까닭이다. 숨기면서 보여주는? 혹 보여주는데 보지 못하는? 자크 라캉은 의식과 함께 무의식이 말을 한다고 했고, 그래서 나는 내가 하는 말속에, 지금 여기에 없다고 했다. 반쯤은 작가의 몫이고 절반은 내 탓이다. 무슨 말인가.
여기에 살갗이 있다. 알다시피 살갗은 몸과 네가 맞닿는 경계다. 몸의 응시와 너의 시선이 부닥치는, 주저하는 몸과 너의 욕망이 충돌하는, 주체와 외계가 면해있는 관계의 최전선이며,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바로미터다. 그래서 부끄러우면 발갛게 달아오르고, 때로 분노로 파르르 떨기도 한다. 살갗 밑엔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이 살갗 위로 자기를 밀어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다는 것은 몸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보는 것이며, 시선의 욕망은 사실 감정이 보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 눈빛의 의미는 뭔지, 나의 시선은 레이저가 돼 처음엔 꽤나 두꺼웠을 너의 살갗을 파고든다. 그래서 너의 살갗은 마치 허물을 벗듯 점점 더 얇아지고 점점 더 투명해진다.
그래서 감정이 보이는가. 시선의 욕망은 마침내 감정에 도달했는가. 살갗을 넘어, 감정을 넘어, 무의식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는가. 그리고 그 다음엔? 당연히 아무것도 없다. 오직 심연이 기다리고 있을 뿐. 텅 빈. 공허 자체인. 어둠 자체인. 처음처럼 혼돈 자체인. 살갗은 어쩜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시선의 욕망이 살갗 너머를 엿보는 것이 문제였다. 시선은 살갗을 죽이고, 감정을 죽이고, 무의식을 죽이고서야 비로소 살갗을 넘고, 감정을 사고, 무의식을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욕망이며, 그 이면에 죽음 충동을 숨겨놓은 욕망의 화신이며 죽음의 사신이다. 그렇게 너(시선)는 나(응시)를 본다. 그러면서 사실은 살갗이 벗겨져 허물어져 내린 나를 삼킨다. 그리고 종래에는 어둠 속에 빛나는 섬광처럼 사라지게 만든다.

스페이스비엠에서 열린 개인전 광경 〈경계〉(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194×130 cm 2015

스페이스비엠에서 열린 개인전 광경 〈경계〉(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194×130 cm 2015

무의식을 파고드는 감성
표영실은 이처럼 살갗을 그리고, 경계를 그리고, 관계를 그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있고, 나와 너 사이에 경계(다만, 여기까지!)가 있고, 주체와 외계 사이에 살갗이 있다. 그러므로 어쩜 작가의 그림은 인간관계의 미학이며 사람사이에 대한 성찰로 보면 되겠다. 사회적 관계와 심리적 관계, 객관적 관계와 주관적 관계가 삼투되면서 상호작용하는 어떤 지점 아님 현상을 그린 그림으로 보면 되겠다. 그 관계의 양쪽 끝에 각각 내가 있고 네가 있다. 나의 응시가 있고 너의 시선이 있다. 나는 너의 시선(시선의 욕망)으로 인해 이중으로 분열된다(시선의 욕망이 다중적이면 주체도 덩달아 다중 분열된다. 그리고 그렇게 주체가 분열되는 것은 욕망에 연동된다).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페르소나는 사회에 내어준 주체이며, 내가 보여주는 주체이며, 네가 보고 싶은 주체이다. 그리고 나는 그 페르소나 뒤에 숨는다. 그렇게 숨은 주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으므로 너도 모르고, 때로 나 자신에게마저 낯설다(자기소외?).
그래서 어쩜 살갗이란 그런,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 드러난 주체와 숨은 주체를 가름하는 경계와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너의 시선이 페르소나에 머물러 있었으면, 피상적인 웃음가면에 만족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페르소나의 뒤편을 엿보고, 그 경계를 기웃거릴 때 문제는 배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너는 나를 본다. 너의 시선이 나의 응시를 파고든다. 나의 속살을 파고들고, 나의 감정을 파고들고, 나의 무의식을 파고든다. 그렇게 파고들어봤자 아무것도 없다. 어쩜 당연하게도 거기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네가 뚫어놓은 공허한 두 구멍(둥근 구멍)이 있을 뿐. 다만 그 빈 구멍 너머로 보이는 어둠 자체가 있을 뿐.
작가는 이처럼 공허를 눈구멍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루이스 부르주아에게 공허는 목구멍으로 대리된다. 너의 욕망이 살갗을 넘어, 경계를 넘어, 금지를 넘어 뚫어놓은 구멍들이다. 본다는 것도 욕망에 연동되고 삼킨다는 것도 욕망에 연동된다. 작가는 눈구멍으로 그리고 부르주아는 목구멍으로 상처를 삼킨다. 그리고 그렇게 삼켜진 상처를 너는 결코 목격하지도, 그 어둠 자체에 도달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빈 눈구멍과 부르주아의 빈 목구멍은 똑같이 공허를 표상하고, 하나같이 욕망에 연동된 것이란 점에서 하나로 통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들자면, 작가가 그려놓은 얼굴그림(없는 얼굴)이 꼭 무슨 공허를 상연하는 무대 같고, 실재의 사막(슬라보예 지젝)이며 실재계(자크 라캉)를 상영하는 극장 같다. 암흑이며 어둠 자체, 막 섬광이 사라진 우주 아님 심연을 상영하는 그 극장에는 한편에 노란 커튼마저 드리워져 있어서 꽤나 그럴듯해 보이기조차 한다.
그리고 또 다른 그림이 증여를 암시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내민 손바닥 위로 꽃이 피어오르고(선택), 산딸기 같은 알갱이들이 소복하다(반복). 나는 너에게 꽃을 내밀고 산딸기를 선물한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선물이 상처가 돼 되돌아왔다. 꽃도 붉고, 산딸기도 붉고, 피도 붉다. 문화주의자 중 증여론자들이 있다. 증여가 문화를 생성시키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증여는 곧 권력의 표상이었다. 내가 너에게 증여하면, 너는 나에게 더 큰 증여며 더 나은 증여로 되돌려줘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증여를 교환하는 행위가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증여에 부수되는 선의는 다만 권력행위의 후광에 지나지 않는다.
꽃이면서 동시에 피기도 한, 산딸기면서 동시에 상처이기도 한 작가의 그림은 어쩜 이런 증여행위와 권력관계, 선의와 상처의 이율배반적인 관계, 진심과 오독이 뒤얽힌, 더 이상 풀 수 없게 꼬여버린 관계를 그려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너와 네가 도저히 통할 수 없는 불통의 관계를 그려놓은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상처에 민감한, 내 상처가 너무 커서 너의 선의마저 상처로 되돌려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살갗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살갗 너머를 엿보지 말 일이다. 그저 모자라도 차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고 머물 일이다.
처음에 작가는 집이며 풍선이며 구름 같은 오브제를 그렸었다. 그리고 근작에서 사람을 그린다. 이처럼 소재상 사물로부터 사람으로 옮겨왔지만, 알고 보면 사물도 사람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감정이입된 사물의 살갗이 벗겨진 수위 아님 수면 아래로 속살이, 상처가, 감정이, 사람이 드러나 보인 점이 다르다. 감정을 각각 사물형상에게 그리고 사람형상에게 분유한 그림들이다. 그래서 사물도 사람처럼 보이는 그림들이다. ●

표 영 실 Pyo Youngsil
1974년 태어났다. 덕성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1999년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즐거운 각성제>를 시작으로 10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EXHIBITION FOCUS YUN HYONG-KEUN 2

〈Burnt Umber& Ultramarine〉oil on linen 91.8×115.2cm 1981~1984 (Courtesy of 윤성렬and PKM Gallery)

한국 추상 회화의 거장 윤형근(1928~2007)의 개인전이 4월 15일부터 5월 17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PKM갤러리가 개관 14주년을 맞아 삼청동에 새 공간을 마련하고 연 첫 전시다. 군더더기 없는 전시공간과 사색의 깊은 울림을 주는 회화의 만남으로 주목 받고 있다. 개관전으로 윤형근의 회화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 고유의 표현양식과 예술세계를 집중적으로 주목하고자 한 것으로 읽힌다. 그의 회화를 최근 회자되는 ‘단색화’라는 개념을 넘어 ‘윤형근’이라는 인물을 집중 조명하여 살펴본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는 은은한 농담(濃淡)과 서정적 정취를 느껴보자.

윤형근 미술에 구현된 담(淡)의 정신

홍가이 문화비평

최근에 자생적 한국 현대화를 표방하는 전시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 한국적 현대화를 ‘단색화’라 하는데, 이는 개념적 내용이 결여된 명명이라 하겠다. 인상파니 큐비즘이니 이런 이름들이 그냥 아파트 3동, 4동이라고 지칭하듯 지어진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언어철학에서는 이름 붙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 20세기 후반의 천재 철학자 솔 크립키의 철학적 업적이 담긴 책 제목도 바로 《명명과 필연성(Naming and Necessity)》이다. 필자는 2013년 8월 싱가포르 ICA에서 개최된 <담화전(淡畵展)> 도록에서 단색화라는 용어에 대해 개념 없는 언어유희라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요점만 정리하고자 한다.
인류 역사상 서양문명의 진행 속에서 역사적 단절이 처음으로 야기된 상황을 ‘현대성(modernity)’이라 칭할 때 모노크롬 회화로 명명되는 스타일의 회화는 예술분야에서 일련의 현대주의 또는 전위라는 이름의 양식적 유행의 하나로 나타났다 이 서양 모노크롬 회화(monochrome painting)의 출현은 서구 현대미술사의 역사 변증법적 행군 속에서 역사적 필연성의 논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문명이 겪은-현대성(modernity)이라는-역사적 단절의 트라우마를 내부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외부 서양문물로부터 자극 받아 그것을 흉내 낸 서구화를 통해 비로소 현대화를 꾀하면서 서구와 똑같은 역사 변증법적 논리에 근거하려는 방법으로는 단색화의 필연성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 즉, 서구 현대미술에서는 결국 ‘예술의 죽음(End of Art)’을 향해 가차없이 진군하는 과정에서 모노크롬 회화가 임시방편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지, 그것이 무슨 새로운 회화의 문법을 또는 새로운 예술세계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탠리 카벨이 지적했듯이,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서구의 작가, 화가, 작곡가 등은 자기들이 계승한 예술행위를 지속하는 데 전제되어야 하는 사회적 규범 (또는 게임의 법칙, 또는 문법)이 붕괴되어, 더 이상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술행위인지를 규정해줄 판단의 잣대가 없어졌다고 믿었다. 어떤 문장이 문법에 맞는지 아닌지를 판단해 줄 형식적 규정이 없다면, 그 언어는 소통의 도구로서는 무용지물인 것인데, 19세기 중반 서구의 예술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카벨은 현대예술의 상황을 특정 짓는 것은 항상 산재한 사기의 가능성이라 했다. 19세기 중반부터 재현적 서구회화의 전통이 역사적으로 해체(historical deconstruction of representational painting)되기 시작하여 1960년대 중반 프랭크 스텔라의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로 귀결되면서 소위 미니멀아트라 칭해진 이 모노크롬 회화는 일련의 서구 현대미술사 속에서 재현적 회화의 역사적 해체 시기에 나온 양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노크롬 회화는 아무런 개념적 콘텐트가 전무한 것이 실체다.
한국에서 1970년대에 출현한 형상 없는 단순한 색상의 서양화만 단색화이며 전통 동양화의 수묵화는 단색화가 아닌가? 왜 한국 ‘서양화가’가 그리는 추상회화만 ‘단색화’란 말인가? 1970~1980년대엔 단색화 대신 ‘평면화’를 유행어 삼아 ‘한국적 현대추상’이라는 이론적으로 설득력 없는 담론이 펼쳐졌었다. 이 글의 주목적은 최근 ‘한국적 모노크롬 회화’로서의 ‘단색화’를 주제로 한 기획 전시마다 윤형근의 작품들이 포함됨으로써 윤형근의 작품세계가 자칫 편협하게 곡해되는 것을 우려하며 그 부당함을 바로잡고자 함이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단색화’라는 한국 미술용어의 개념 없는 분류의 카테고리에 윤형근을 가둬두기에는 그의 작품세계가 훨씬 깊고 독창적이며 현재 허무주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서구 중심부의 현대예술 담론을 거부하는 동시에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대안적 예술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윤형근 미술이 구현하는 통찰력 깊은 대안적 예술철학이 무엇이냐에 대해 국내 처음으로,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윤형근 예술세계를 여는 두 가지 명제
“우선 사람이 되어라.”
“내 그림은 추사 김정희의 쓰기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예술계 종사자 대다수는 서구 중심부에서 흘러 내려오는 담론의 소화에 급급해서, 그 담론의 개념에 생소한 다른 패러다임의 아이디어를 새롭게 창출해낼 필요성을 못 느꼈고 사실상 그렇게 할 지적(知的) 여유도 없었다. 반면에 전통 동양화의 맥을 보전하는 예술 종사자들은 고답적이고 기술적인 전통 동양화론(論)의 디테일에 매몰되어 현대에도 전통에도 속하지 않은 새로운 예술의 경계를 그려내려는, 윤형근 같은 창의적인 작가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담론화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용어의 개발에 무기력했다. 이 글에서는 이 두 가지 명제를 시작으로 윤형근이 추구하는 예술 정신을 드러내보려고 한다. 그중 두 번째 명제인 “내 그림은 추사 김정희의 쓰기에서 시작되었다”에 대해서는 《월간미술》 2008년 3월호에서 상세하게 기술한 바 있어서, 본고에서는 주로 첫 번째 명제를 중심으로 윤형근의 예술세계를 풀어나가겠다.
“우선 사람이 되어라.” 윤형근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늘 이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이 예술가가 되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라면, 여기에는 어떤 예술 철학이 암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선 이런 질문을 해야 된다. ‘사람이 되어라’가 무슨 말이냐? 먼저 이 질문에 대한 가설적 답변(hypothetical answer)을 제시하면서 가상의 예술철학 이론을 구축해가 보자. 그렇게 구축한 예술적 담론 구조가 설득력이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설득력의 유무는 물론 독자들(동료학자, 예술인, 일반 독자 등등)의 판단에 맡기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사람이 되어라’는 ‘너다운 사람이 되어라’의 준말이라고 가정하고 시작해 보련다.
참나(眞我)란 무엇일까? 우리는 일상 언어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런 논평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참 그 사람답다” 라고. 그렇다면 혹시 그를 그 사람답게 만드는 그 무엇이 바로 숨겨진 참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참나를 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일상에서 벗어나는 장소에서 홀로 조용히 반성하는 시간 없이는 참나를 발견할 다른 길은 없을 것이며, 이런 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이 바로 명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머릿속은 수만 가지의 생각으로 혼탁해져 있다. 그러나 물결이 잔잔해지고 물위에 떠돌던 것들이 바닥에 가라앉게 되면, 수면은 맑고 투명해져서 바닥이 보이게 되듯이 명상은 이와 같은 이치인 것이다. 마음을 조용히 하여, 여러 일상의 잡다한 생각들과 감정을 가라앉히면 담담해진다. 그렇게 담담해진 상태가 되면 머리가 명료해지면서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명상이란 생각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여 담담한 평정심을 찾는 방법이라고 보면 된다.

〈Ultramarine Umber〉oil on linen 259.5×181.5cm 1976 (Courtesy of 윤성렬and PKM Gallery)

〈Ultramarine Umber〉oil on linen 259.5×181.5cm 1976 (Courtesy of 윤성렬and PKM Gallery)

담(淡)의 조건
도대체 참나의 정체는 무엇일까? 먼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의 결을 찾아야 하는 데, 인간도 연꽃의 씨앗 같은 그만의 결을 확보해주는 DNA의 구조로 설명할 수 있을까. 육체적인 특성의 경우 그가 어떤 종류의 질병에 약한가 등의 정보까지 유전적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성품, 그다운 독특한 영혼의 소유자로서의 참나는 뇌 구조나 유전적 특성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20세기 후반의 인지 과학적 발견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인간의 언어 능력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한 노암 촘스키의 이론일 것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우주의 원리를 내재적으로 습득한 채 태어난다. 하나의 돌도 우주의 역사를 관통한 그 돌의 역사에 의해 그만의 독특한 결이 결정지어지듯이, 한 인간 역시 그만의 유일한 잠재 능력을 갖고 태어났고, 명상 같은 담담함의 상태에 도달하여야 비로소 자신의 그 능력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참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자아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언급했는데, 도대체 ‘자아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선 담담한 상태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필자는 그것을 ‘담(淡)의 정신’이라 부르고자 한다. 담담(淡淡)함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음으로써 조용히 고요하게 하여 생각과 감정의 파고를 가라앉히는 상태를 말한다. 고요히 가라앉아서 담담하게 되면 명료함이 따르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며 흐려졌던 눈과 마음과 귀가 밝아진다. 그렇다면 동양적 사유는 정녕 개념적으로 모호한 사유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는가? 왜 동양적 인문학을 운운하는 식자층에서는 사려 깊게 탐색하지 않은 애매한 개념들을 마치 무슨 심오한 내용이라도 들어있는 것처럼 늘어놓는가? 그 한 예가 공(空)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동양 지혜의 진수처럼 되어버린 채, 동양적 현대화(現代畫)를 표방하는 미술인들이 ‘여백의 미학’이라는 용어를 즐기며 작품 속에 심오한 예술철학이 담긴 것처럼 주장하고 대중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미술용어로서의 ‘단색화’라는 명명작업처럼 이런 단어들도 무(無)개념의 단어들을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현대 물리학은 절대 진공(vacuum) 상태를 부정한다. ‘마음을 비워’서 명상(冥想)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음을 공(空)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모든 소프트웨어가 지워진 상태에서는 그 컴퓨터의 재부팅이 불가능하듯이, 엄밀히 말하자면, 명상 상태에 들어간다함은 이미 설치된 여러 소프트웨어의 작동을 일시로 중단시켜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작동이 중단됨으로써 잠재력(potential force) 또는 하나의 잠복상태(latency)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완전히 지워져서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언제나 재부팅의 가능성이 온전히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명상의 상태는 공(空)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상념을 내려놓은 상태, 또는 가라앉힌 상태를 말한다. 그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는 한국말이 바로 ‘담담(淡淡)함’이다. 세상과 인간사를 모두 하나 같이 담담하게 대할 수 있음을 바로 담(淡)의 정신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윤형근의 지인들이 그를 ‘태산 ’같다고 말할 때 바로 그런 담(淡)의 정신에서 나오는 의연함을 일컫는 말이라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담(淡)의 정신은 결국 명상 같은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아서 세상과 인간사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세계관이자 인생 철학으로서, 윤형근의 작품은 이러한 동양적 수행문화의 산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수(修)는 닦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서양철학은 몸과 정신 분리의 이분법을 전제로 하지만, 동북아 문화권에서는 몸을 닦으면 동시에 마음도 닦인다고 이해한다. 동·서 사유의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행(行)은 행한다, 실천한다는 뜻으로 수행(修行)은 닦고 행하여 자연의, 대우주의 순환 기류에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이 잘 되려면 완전히 깨어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쉬고 있어야 하며 바로 그런 상태가 ‘담담함’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담(淡) 정신은 궁극적으로 우주와의 합일을 추구하며 이 우주와의 합일이야 말로, 인간 정신성(human spirituality)의 발현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만년의 이마누엘 칸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우주와의 합일의 추구를 인간 정신성의 핵심이요, 그것에 대한 영원한 추구의 표현이 바로 인간의 예술성이라 강조했다.

전통과 혁신-동시대성과 보편적 가치
동양 전통서예에서 ‘쓰기’란 한지 위에 미리 선택해 놓은 특정 한자 또는 한자의 군(群)을 먹물 묻힌 붓으로 획 하나 하나를 그어 나가는 것이다. 한자의 여러 획이 어떤 상관관계로 구조를 이루고 그 안에 내재된 힘 또는 가상의 기세(virtual force or potential force)를 작가 자신이 몸으로 느끼게 됨으로써 이에 대한 자동적 반응으로 붓을 든 손이 움직이는 순간 바로 그 힘으로, 그 속도로 획을 긋는다. 즉, 미리 선택된 구도의 가상의 기세를 몸으로 읽고 작가 자신의 당시 기운에 따라 붓 운동으로 획을 그어 이미 잠재하는 그 가상의 기세를 한지 위에 구현해주는 것이다. 윤형근의 작품 역시 이러한 ‘쓰기’의 과정을 통해 잠재한 기운을 발현해낸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가 택하는 모든 재료는 분명히 서구미술 규범 속에서 사용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윤형근은 자신이 그림에 대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추사와 마찬가지로 ‘쓰기’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동양의 전통적 재료인 한지 위에 먹물을 갈아서 서예용 붓으로 획을 그어 작품을 만드는 대신, 캔버스와 오일컬러 및 브러시 등 서구의 현대적 재료들을 사용한다. 먹을 갈아 전통한지에 붓으로 획을 긋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단순한 검정색이 아닌 갈색(umber)과 청색(ultra-marine blue) 물감을 섞고 테레핀에 희석시켜 표면처리 하지 않은 리넨 또는 면 화폭 위에 번지는 효과를 냄으로써 동시대인이 크게 공감할 수 있는, 수묵 빛깔과도 같이 한없이 깊은 그만의 독창적 팔레트를 만든 것이다. 이것은 기술적 차원에서 수묵과 서예의 예술행위를 서구적 재료인 캔버스 위로 옮겨와 이행한 것으로 동양 전통서예/수묵화의 문화적 경계 지형도를 넘어선, 가히 범세계적인 혁명적 쇄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 단색화 작가들에 대한 국내외 미술계의 반응이 뜨겁고 그중 윤형근에 대한 관심도 매우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만 윤형근의 활동 시기가 다른 단색화 작가들과 겹치고 그의 작품 색상이 표면적으로 단순하다 하여 그를 단색화 작가 집단에 가둬두고 평가하는 것은 그의 담(淡)의 정신에 바탕한 삶과 예술에 대한 태도 및 그가 전통과 혁신을 한 화폭에서 아우르며 독창적이고 기운과 기품 넘치는 결과물을 탄생시킨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얕고 편협한 접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근거 없이 표피적이고 가벼움과 허무주의가 팽배한 작금의 세계적 미술 기류에서 오는 피로함 속에서 거대한 뿌리와 정신성을 계승하며 동시에 혁신성을 추구함으로써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윤형근의 작품은 충분히 21세기의 보편적이고 대안적인 미술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필자의 해석이 틀리지 않았다면 향후 20세기 후반부 미술을 재론할 때 윤형근은 세계 미술사 차원에서 재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EXHIBITION FOCUS YUN HYONG-KEUN

한국 추상 회화의 거장 윤형근(1928~2007)의 개인전이 4월 15일부터 5월 17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PKM갤러리가 개관 14주년을 맞아 삼청동에 새 공간을 마련하고 연 첫 전시다. 군더더기 없는 전시공간과 사색의 깊은 울림을 주는 회화의 만남으로 주목 받고 있다. 개관전으로 윤형근의 회화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 고유의 표현양식과 예술세계를 집중적으로 주목하고자 한 것으로 읽힌다. 그의 회화를 최근 회자되는 ‘단색화’라는 개념을 넘어 ‘윤형근’이라는 인물을 집중 조명하여 살펴본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는 은은한 농담(濃淡)과 서정적 정취를 느껴보자.

언제 보아도 물리지 않는 그림

류병학 미술비평

지난 4월 15일 PKM갤러리는 개관 14주년을 맞이하여 안국동에서 삼청동으로 이전하고 재개관 특별전으로 〈윤형근 개인전〉을 개막했다. 재개관 특별전으로 〈윤형근 개인전〉을 기획한 이유는 무엇일까? 갤러리 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윤형근을 “한국 ‘단색화’의 거장”으로 불렀다. 그렇다면 이번 〈윤형근 개인전〉은 최근의 ‘단색화 열풍’을 타깃으로 삼은 전시란 말인가? 갤러리 측은 이번 전시를 “2007년 윤형근 화백이 작고한 이후 국내외에서 처음 개최하는 개인전”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이번 윤형근 개인전은 사후 첫 회고전이란 점에서 일종의 ‘유작전’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윤형근의 초기부터 말기까지 40여년에 걸친 작품세계를 망라하는 ‘회고전’은 지면(地面) 전시가 아닌 지면(紙面) 전시인 영문판 ‘윤형근 화집’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윤형근 8주년 회고전이 미술관이 아닌 상업갤러리에서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재조명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윤형근과 스승 김환기
윤형근의 대표작 <다-청(茶-靑)> 회화는 흔히 ‘담백하면서도 웅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그 담백함과 웅대함은 작가의 풍모와 기질을 담아낸 것으로 간주된다. 윤형근은 친구들 사이에서 ‘자이언트’로 불렸다고 한다. 물론 그는 큼직한 체구를 지녔다. 하지만 그가 ‘자이언트’로 불린 것은 체구보다는 대범한 성격 때문이다. 그의 대범성은 당대 현대미술의 거장인 김환기를 만나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1947년 윤형근은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는데, 당시 그의 주임교수가 김환기 화백이었다. 1949년 그는 국가 반체제운동으로 중부경찰서에 42일간 구류되고 이 일로 서울미대를 휴학한다. 이후 복학을 희망했지만 거부당했고 당시 홍익대 미대로 자리를 옮긴 김환기 교수의 배려로 홍대 미대로 편입한다. 그는 홍대 미대 재학 중 김환기 교수의 장녀 김영숙을 만난다. 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인 1960년 청첩장을 받는데, 결혼 당사자가 다름 아닌 김영숙과 윤형근 자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스승은 장인이 된다.
1966년 윤형근은 38세에 신문회관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196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측 커미셔너 이일이 그를 출품작가로 선정한다. 하지만 1960년대 윤형근의 그림은 스승 김환기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그는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된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73년 명동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연다. 당시 전시된 작품이 그의 대표작인 <다-청> 회화이다. 도대체 그는 <다-청> 회화를 어떻게 시작한 것일까? 1973년 그는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당시 부정입학사건에 항의했다가 1달간 서대문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한다. 출옥 후 수년간 근무했던 숙명여고 미술교사직을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을 택한다. 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973년도부터 내 그림이 확 달라진 것은 서대문교도소에서 나와 홧김에 한 것이 계기였지. 그전에는 색을 썼었는데 색채가 싫어졌고, 화려한 것이 싫어 그림이 검어진 것이지. 욕을 하면서 독기를 뿜어낸 것이지. 그림에는 내가 살아온 것이 배인 거야.”

윤형근pkm (6)

〈Umber〉(왼쪽) oil on linen 205×333.5cm 1988~1989

윤형근과 도널드 저드
1974년 윤형근의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 화백이 별세한다. 자신을 지탱해주던 거목이 쓰러진 심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스승에게 보답하기 위해 작업에 몰두한다. <다-청> 회화는 그의 성격처럼 더욱 담백해지고 스케일도 웅대해진다. 그리고 그의 활동도 활발해진다. 197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1976년 <제8회 까뉴국제회화제>, 1977년 <한국현대미술 단면전>(도쿄 센트럴미술관), 1978년 <제2회 파리국제현대미술제>와 <인도트리엔날레>, 1980년 <아시아현대미술전>(후쿠오카미술관), 1981년 <한국현대미술전>(교토미술관), 1983년 <한국현대미술전>(도쿄도 미술관) 등 다수의 해외전시에 초대받는다. 1984년 그는 경원대 미대 교수로 부임한다. 1990년 경원대 총장이 된다(화가가 대학 총장이 된 사례는 그가 최초가 아닐까).
만약 누군가 윤형근의 작품을 언급하고자 한다면 (지금은 윤형근처럼 모두 고인이 되신) 인공화랑 황현욱 대표와 도날드 저드를 관통해야만 할 것 같다. 1986년 윤형근은 대구 인공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그는 인공갤러리 황현욱 대표의 미적 감각을 높게 평가하여 서울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주선한다. 1989년 황 대표는 윤형근의 지원으로 서울 대학로에 인공갤러리를 오픈한다. 1991년 황 대표는 이곳에서 도날드 저드 개인전을 개최한다. 저드는 당시 인공갤러리에 소장된 윤형근의 그림을 보고 황 대표에게 작가를 만나고 싶다고 하여, 윤형근과 저드가 만나게 된다. 저드는 윤형근의 작품에 대해 ‘구조적이고 담백하다’면서 극찬한다. 그들은 곧 친구가 되었고, 저드는 윤형근에게 자신의 뉴욕 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을 제안한다. 1993년 윤형근은 뉴욕 도널드 저드 파운데이션(Donald Judd Foundation)에서 개인전을 연다. 당시 미국 미술계 인사들은 윤형근의 작품을 극찬했고 저드는 윤형근에게 텍사스에 있는 자신의 또 다른 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 다음 해인 1994년 저드가 사망한다. 저드는 임종 전에 텍사스 파운데이션의 윤형근 개인전 추진을 아내 마리안에게 당부하여, 1994년 윤형근은 텍사스 치나티 파운데이션(The Chinati Foundation)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윤형근은 당시 전시된 작품들 중에서 3점을 기증한다. 치나티 파운데이션은 윤형근의 기증 작품을 위한 파빌롱(Pavillon)을 칼 앙드레(Carl Andre) 파빌롱 옆에 만들어 영구 소장한다.
1993년 필자는 인공화랑 황현욱 대표의 주선으로 이우환과 윤형근을 만난다. 당시 이우환은 다음 해인 1994년 대대적인 전시회(국립현대미술관, 현대화랑, 인공화랑)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황 대표는 이우환 개인전을 위한 도록의 서문을 제안한다. 필자가 1년간 집필해서 발행한 단행본이 《이우환의 입장들》(1994)이다. 1995년 필자의 젊은 시절 작품을 거의 모두 소장하고 있는 독일의 구체미술을 위한 파운데이션(Stifuetung fuer Konkrete Kunst)의 반델(Bandel) 관장이 필자에게 개인전을 제안한다. 하지만 당시 필자는 이미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평론과 기획을 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반델 관장에게 거꾸로 윤형근 개인전을 제안한다. 반델 관장은 필자에게 윤형근 작품에 대한 세미나를 요청하여, 그 세미나 준비를 위해 필자는 인공화랑 황 대표의 주선으로 윤형근의 작업실 겸 주거지인 서교동 자택을 방문하여 그동안 작업된 거의 모든 작품을 보고 긴 토론을 한다. 필자는 1년간 집필하여 세미나를 개최하고 그 자료를 모아 단행본 《윤형근의 다-청 회화》(1996)를 발행한다.
1996년 윤형근은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해 윤형근 가족과 박명자 갤러리현대 대표 그리고 이화익 실장(현재 이화익갤러리 대표)과 필자는 윤형근 파빌롱 오픈에 초대되어 텍사스 치나티 파운데이션을 방문한다. 1997년 윤형근은 독일 구체미술을 위한 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개막식에는 윤형근 가족과 갤러리현대 도형태 대표부부 그리고 김창열 화백 등 국내외 인사들이 참석했다.
1993년부터 2000년까지 필자가 만난 윤형근은 한마디로 ‘거목’이었다. 그는 필자에게 늘 지식보다 인간됨이 먼저임을 상기시켰다.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예(禮)는 무엇하겠는가.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미술을 한들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윤형근의 대표작 <다-청> 회화는 작가의 꾸밈없는 담백함과 대범한 기질을 담아낸 웅대함으로 나타난다. 윤형근은 자신의 작품관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은 언제 보아도 소박하고 신선해서 아름답다. 나의 일도 그 자연과 같이 소박하고 신선한 세계를 지닐 수 없을까. 그것은 어렵다. 안된다. 가령 그렇게 원한 대로 된다 하더라도 자연과 같이 언제 보아도 물리지 않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일 뿐.”●

EXHIBITION TOPIC MARK ROTHKO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초기작부터 타계 직전까지의 작품 50점을 소개하는 <마크 로스코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3.23~6.28)이 열린다. 알려진 바대로 로스코의 작업은 신비로움을 넘어 종교적 차원의 감흥을 일으키는 힘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성당을 연상시키는 전시장을 거닐면서 작품이 주는 ‘숭고함’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추상의 의미와 유효성

정무정 덕성여대 교수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2차 대전 이후 국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추상표현주의를 대변하는 작가다. 로스코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작품들은 대체로 커다란 수직의 캔버스에 몇 개의 사각형이 배치된 형태를 취한다. 전반적으로 그의 작품에선 정면성과 대칭성이라는 형태적 특성상 정적인 느낌이 지배적이지만, 동시에 표면의 섬세한 회화적 터치로 그 정적인 공간을 채운 미묘한 파장이 감지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일찍부터 신비적, 종교적 차원의 감정과 정서를 환기시킨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예컨대 미술사가인 존 캐너데이(John Canaday)는 1961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전시리뷰에서 그의 회화에 보이는 색채의 무게감과 사각형의 거대함이 원시적 종교의 제의적 상징을 시사한다고 주장했고, 197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을 보며 미술비평가 힐튼 크레이머(Hilton Kramer)는 그의 작품세계를 ‘종교적 신념의 미술’로 규정지었다. 깊은 공명을 자아내며 많은 관람자를 작품 앞에 멈춰 서게 하거나 눈물 흘리게 만드는 로스코 작품의 이러한 특성은 깨달음의 순간처럼 단숨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부단한 탐색과 도전과 변화의 결과로 얻어진 산물이었다.
주요 추상표현주의자들 중 가장 연장자였던 로스코는 라트비아 출신으로 1925년 뉴욕시의 비공식미술학교인 미술학도연맹에 등록해 미국 초기 모더니스트인 막스 웨버(Max Weber)를 사사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초기 작업은 주로 피카소를 연상시키는 구상작품이나 존 마린(John Marin)이나 밀턴 에이버리(Milton Avery)와 같은 미국 1세대 모더니스트의 영향을 보이는 작품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작업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38년부터로 이 시기에 시작된 신화적 주제의 반추상 작업은 194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다. 이들 작품에서는 고대 미술, 그리스 도기회화, 건축 장식에서 유래된 수평적 띠로 화면이 구획되고, 구획된 공간에 고대미술의 잔재나 파편을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채워져 고대 그리스의 종교적, 신화적 장면이 연상된다. 특히, <안티코네>, <독수리의 전조>, <시리아의 황소>, <이피케니아의 희생>과 같은 이 시기 작품의 제목은 로스코의 고대 미술과 신화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주는 데, 1943년 10월 아돌프 고틀리브와 함께 출연한 라디오 방송(WNYC)에서 그는 신화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는 신념을 피력했다. “우리의 제목이 익숙한 고대의 신화를 연상시킨다고 할 때, 우리가 그러한 것을 다시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기본적인 심리적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의지해야 할 영원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원시적 공포와 욕구의 상징으로 그리스, 아즈텍, 아이슬란드 또는 이집트 등 어느 지역,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오직 세부에서만 변화할 뿐 그 실체는 변하지 않는다. 현대심리학은 삶의 외적인 조건이 모두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우리의 꿈과 일상 언어와 미술에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본다.”
1943~44년에 이르러 로스코는 이러한 신화적 구체성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한정시킨다는 생각에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주로 수채로 작업하며 세부 묘사보다는 일반화된 형태를 선호하고 수용성 물감이 자아내는 유동적 붓터치에 집중했다. 이들 종이작업에서는 대체로 명도가 낮은 색이 넓은 부위에 다소 투명하게 채색되고 그 위에 무정형의 형태가 배치된다. 이 무정형의 형태는 인간 존재를 암시하면서 동시에 원초적 유기체를 연상시킨다. 바탕색이나 수평선으로 구획된 얕은 공간 속에서 부유하는 듯한 이 연약한 형태는 면도칼 같은 날카로운 도구나 붓의 나무 손잡이 등으로 갓 칠한 물감을 긁거나 문지르고 물감을 뿌려 점묘적 효과를 내는 등의 새로운 기법을 통해 획득된 것이다. 이 시기 로스코의 자유로운 실험은 미로, 클레 등의 작품과 같은 유럽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이해와 마타, 에른스트, 마송과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의 회화, 드로잉에 구사된 정신적 자동기술법의 영향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캔버스에 유채 236.6×211.5cm 1956 © 1998 Kate Rothko Prizel and Christopher Rothko/ARS, NY/SACK, Seoul

<무제> 캔버스에 유채 236.6×211.5cm 1956 © 1998 Kate Rothko Prizel and Christopher Rothko/ARS, NY/SACK, Seoul

“나는 추상주의자가 아니다”
이 시기부터 미국 미술계도 로스코를 비롯한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새로운 작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45년 3월에 열린 <비평가의 문제(A Problem for Critics)전>을 통해 하워드 퍼첼(Howard Putzel)은 “1940년 이래로 회화에서 새로운 변형을 향한 추세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며 그 ‘새로운 변형’의 근원으로 아르프, 미로(Joan Miró) 그리고 피카소를 꼽았다. 추상표현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운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도 퍼첼의 주장에 공감했지만, 미국 미술가들의 작품을 아르프나 미로와 연관시키지 않았고, 1948년에 이르러서는 큐비즘의 쇠퇴를 선언함과 동시에 큐비즘의 개념적 토대와 구조에서도 벗어난 비위계적이고 전면적인 구성을 통해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반면 당사자인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유럽미술과의 관계 속에서 추상표현주의 작품의 기원과 새로운 형식적 발전을 설명하는 퍼첼이나 그린버그의 주장을 반박했다. 예컨대 바넷 뉴먼은 자신의 의도가 미술에 형이상학적 내용을 부여하는 ‘숭고’의 표현임을 강조했고, 로스코도 퍼첼의 분석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고 1945년 6월 1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신화창조자이다. 따라서 실재에 대한 호불호의 선입관을 갖고 있지 않다. 모든 신화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회화는 기꺼이 실재의 파편을 ‘비실재적’이라 간주되는 것과 결합하고 이러한 통합의 타당성을 강조한다”고 주장했다.
1946년부터 로스코의 작품은 보다 추상적으로 변화하였다, 화면에 분산된 형태가 더 거칠어지고 가장자리가 회화적으로 처리되는 과도기를 거쳐 형상과 배경이 완전히 통합된 전체 화면에 부유하는 듯한 부드러운 사각의 형태가 활기를 부여하는 양상으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로스코가 추상으로 완전히 전환한 것은 다양한 기법에 의해 획득된 그의 합성적 형상조차 매우 제한적이고 구체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제목을 붙이는 것도 포기하고 숫자로 대체했다. 이러한 그의 성숙기 작품은 너무 추상적이고 이야기와 모방을 거부한다는 점 때문에 많은 의심과 비판을 받았지만 로스코는 계속해서 그의 성숙기 회화가 추상적이라는 평가에 반론을 제기하며 오히려 사실적이며 진정하고 구체적이며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주제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추상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색채나 형태 또는 다른 어떤 것의 관계가 아니다. 나는 기본적 인간의 감정—비극, 엑스터시, 운명 등—을 표현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많은 사람이 내 그림을 대면하면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은 내가 이 기본적 인간의 감정과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내가 그 작품을 그릴 때 느낀 것과 동일한 종교적 경험을 갖는 것이다. 만일 색채의 관계에만 감동을 받는다면 중요한 점을 놓치는 것이다.”(Seldon Rodman, <Conversations with Artists>, New York: Capricorn, 1961, pp. 93~94)
이러한 주장은 로스코의 추상적 형태가 가시적 경험과 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그의 초기 작업에 보이는 유기적 형상에 내포된 원리와 의지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원시, 고대미술과의 정신적 유대감을 공언하고 비극적이고 영원한 주제만이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로스코에게 그의 성숙기 추상작업은 추상적 사고와 경외심의 살아있는 매개물이었던 셈이다. 여전히 로스코의 작품 앞에서 무언가에 홀린 듯 멈춰서는 관람객은 로스코의 진정성을 웅변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로스코의 작품이 대거 한국에 들어와 꾸려진 이번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는 그의 진정성을 확인할 좋은기회가 되리라 본다.

 캔버스에 아크릴 152.4×145.1cm 1970

<무제> 캔버스에 아크릴 152.4×145.1cm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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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마크 로스코전〉같은 의미있는 전시는 계속 열려야”

㈜코바나컨텐츠 대표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 김건희

전시를 개최하게 된 계기에 대해 알려달라.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작가다, 작품평가액이 매우 높은 데다가 미국의 국립미술관인 워싱턴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이 해외반출을 안하기로 유명한 터라 감히 들여올 엄두도 내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그런데 미술관의 리노베이션 덕분에 대규모 마크 로스코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로스코의 어떤 면모를 드러낼 수 있을지 설명을 부탁한다. 마크 로스코는 양차 세계대전을 겪고 미국으로 망명한 작가로, 랍비교육까지 철저하게 받은 유대인 출신이다. 신화, 철학, 성서의 본질을 학습한 그는 이후 인간을 철저히 연구하면서 고유의 정신세계를 구축했다. 당연히 작품 또한 깊고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와 호흡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그의 초기부터 중기 전성기 말기에 이르는 작품을 총망라해 한 작가의 위대한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다.
이번 전시를 관람할 때 흥미를 더욱 돋울 수 있는 팁을 알려준다면? 전문가를 제외한 대중은 사실 유명한 인상파 작가인 고흐의 진짜 가치도 잘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시에서 그 기본개념을 제대로 설명하느냐 여부는 중요한 문제다. 유명해서 보러 오고, 식별할 수 있는 소재라서 그림을 이해한다. 본 전시는 더 어려운 추상이다. 추상을 통해 오히려 그 전 시대의 인상파나 입체파를 이해할 수 있는 이해의 장을 마련하려 했다. 조용한 공간, 침묵의 공간, 명상의 공간 그림과의 거리 45cm, 어두운 조명 등등 까다로운 전시 관람조건을 제시한 로스코의 전시장은 모든 걸 떠나 뭉클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누구나 마음이 움직이고 눈물이 나는 특이한 경험을 미술을 통해 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종교적인 경험까지 제시한 로스코의 특별함은 이 전시가 주는 강한 감동이다. 로스코 전시장에 오면 눈물 흘리는 사람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문화 기업을 운영하면서 경영 방향과 그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세우고 있는가? 마크 로스코 전시를 결심했을 때 내 가족을 포함 아무도 지지하지 않았다. 역시 대중성이 문제였다. 그래서 더욱 외로운 결정을 해야 했다. 손해를 결심했다는 게 솔직한 대답이다. 그만큼 국내 최초 마크 로스코 전시는 가치 있다는 판단에는 지금도 물러섬이 없다. 결정을 하고 나서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접근하기 쉬운 전시를 만드는 게 나의 관건이었다. 기획의 문제였다. 기획이 실패하면 장기적 경기불황에 총체적 난국인 국내 정세에 마크 로스코라는 대중성 없는 전시는 큰 실패로 끝날 것임이 분명한 일이었다. 전문가들과 사명감 있는 분들을 찾아가 절실한 도움을 요청했다. 기획에서부터 마케팅까지 정말 그분들의 도움으로 한국에 이런 좋은 콘텐츠를 선보이게 되어 뿌듯하다. 이처럼 의미있고 가치있는 전시는 반드시 되풀이되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국립미술관 소장품이 대규모 소개되는 최초 전시 <마크 로스코>는 대한민국 전시계에 큰 영향을 줄 것임은 분명하다.
황석권 수석기자

WORLD REPORT | VIENNA Sleepless – The Bed in History and Contemporary Art

줄리아 피시텔리(Giulia Piscitelli) <임시 상태(Temporary State)> 용수철 매트리스 라텍스 무명천 220×180cm 2011 Courtesy Galleria Fonti © Photo: Amedeo Benestante

침대가 갖는 문화사적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휴식의 장소라는 기본적인 기능 외에 문명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며 새로운 의미가 덧입혀진 인류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한 흐름을 살펴보는 전시 <잠 못 이루는-역사와 현대미술로 본 침대(Sleepless-The Bed in History and Contemporary Art)전>(1.30~6.7, 오스트리아 빈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21세기 하우스)이 열린다. 공간으로서뿐만 아니라, 그 너머의 의미를 가지는 침대를 새롭게 고찰해본다.

불면증에 걸린 현대미술

박진아 미술사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인생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들은 침대 위나 그 주변서 벌어지지 않는가? 예술적 대상으로서 혹은 주제로서 침대는 세계 문명의 태초부터 늘 인류와 함께 해왔다. 침대가 있는 장소 혹은 침실이란 영원한 모태의 공간, 즉 생명이 잉태되는 신비의 변증적 공간이다.” 마리오 코도냐토(Mario Codognato) 큐레이터는 침대를 주제로 한 현대미술 전시회를 기획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침대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가구에 얽혀 있는 인류 역사와 의미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전시 <잠 못 이루는 현대인: 역사와 현대미술로 본 침대(Sleepless – The Bed in History and Contemporary Art)전>은 1월 30일 개막해 6월 7일까지 오스트리아 빈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21세기 하우스(21er Haus)에서 계속된다.
누구라도 어려운 시험문제에 답하지 못하고 난감해 하거나 아무리 뛰려고 애를 써도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허우적대는 꿈을 꾸다 화들짝 놀라 깬 경험이 한 두 번은 있을 것이다. 크고작은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있으면 마음속에 억눌러둔 불안과 강박감이 꿈으로 표현되곤 한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 앞으로 해야 할 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실존적 불안감이 커진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언제부턴가 하루 24시간 중 방해 받지 않고 쉬고 잠자고 꿈꿀 수 있는 한 토막 7~8시간은 잘 깎은 한 덩어리 다이아몬드보다 찾기 어려운 귀한 럭셔리가 되었다.
과거 하루 8시간 편한 잠을 약속했던 침대 생산업체들은 21세기로 접어든 후 잠자리에서조차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무공간으로써의 침대를 마케팅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2001년 뉴욕근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열린 화제의 디자인 전시회 <미래의 사무실(Workspheres)전>에서 네덜란드의 디자이너 헬라 용게리우스(Hella Jongerius)는 아우핑(Auping) 사와의 협력으로 멀티 컴퓨터 스크린을 장착한 업무용 침대 콘셉트를 디자인하고 ‘침대 속에서 비즈니스’를 선언했다.
특히 최근 미국에서 만성적 불면증에 시달리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취침과 숙면을 돕는 스마트폰 앱까지 등장해 속속 일상화하고 있다는 소식에 이어, 올해 1월 30일자 미국의 시사지 《뉴스위크》는 <미국인 대 취침결핍의 시대(The Great American Sleep Deficit)> 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담은 특집호를 내보내 불면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이 그토록 증가하는 원인을 분석하고 약물 치료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1970년대 후반기에 태어난 이른바 밀레니엄 세대는 불안정한 라이프스타일과 스마트폰 같은 전자용품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전 세대보다 더 잠을 못이룬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그 같은 침대 생산업체들과 소비전자제품 업계의 라이프스타일 예언은 적중했디. 오늘날 현대인은 깊은 밤에 일하거나 잠 못 이뤄 들썩이는 이른바 24시간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사무실에서 일을 다 마치지 못한 일중독자들은 잠자리로까지 컴퓨터를 가져오고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소셜네트워크로 인맥관리하느라 바쁘다. 특히 밀레니엄 세대는 ‘셀카(selfie)’는 물론 인생의 가장 사적인 순간까지 인터넷과 모바일 통신기기를 통해 공개・공유하는 데 익숙한 독특한 세대인데, 그 현상은 2015년 1월 자 《엘르》 프랑스 판 포르노 특집에 실린 베네통 광고 사진가 올리비에로 토스카니(Oliviero Toscani)의 사진 연작 <사이버 에덴의 아담과 이브(Adam and Eve in Cyber-Eden)> 에 잘 응축돼 있다.

위르겐 텔러(Juergen Teller) (런던) C-프린트 45×55.5cm 1998 ©Juergen Teller and Christine König Galerie

위르겐 텔러(Juergen Teller) <핑크색의 어린 케이트(Young Pink Kate)>(런던) C-프린트 45×55.5cm 1998
©Juergen Teller and Christine König Galerie

디비시오 아포스톨로룸의 화가(Master of the Divisio Apostolorum)가 그린  가문비 목판 위에 유채 78×73.5cm©Belvedere, Vienna

디비시오 아포스톨로룸의 화가(Master of the Divisio Apostolorum)가 그린 <성처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 탄생(The Nativity of the Virgin)> 가문비 목판 위에 유채 78×73.5cm©Belvedere, Vienna

침대, 인생의 가장 극적인 무대
서양미술에서 침대가 개인사와 문화 일반을 반영하는 배경 도구로 즐겨 등장했듯 오늘날 거의 대다수의 인간은 침대에서 태어난다. 라비니아 폰타나(Lavinia Fontana)가 그린 16세기 그림 속에 직사각형 요람에 누워있는 갓난아기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서구에서 생명 탄생의 신비는 침대에서 비롯된다고 믿어졌다. 일찍이 고대 로마시대 폼페이의 여느 가정집 금슬 좋은 내외의 침실에서는 벽장식으로 사랑을 나누는 연인 남녀의 모습이 그려졌고 매춘굴에서는 침대가 광고판 심볼로 활용되었다 한다.
인생살이의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生老病死) 순회바퀴 속에서 결정적인 단계마다 침대는 인간과 함께 한다. 인류 역사의 초창기부터 우리가 몸을 뉘어 휴식하고 잠드는 자리는 참으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해왔다. 우리네 인간은 침대(寢臺) 또는 요(寢牀)에서 태어나고 사랑을 나누고 나이가 들면 병을 앓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침대를 가장 극적이고 최종적인 ‘인생의 무대(theater)’라고 하는 이유다.
아르테포베라 운동의 기수 야니스 쿠넬리스(Jannis Kounellis)는 내버려진 단순한 철제 침대받침이나 매트리스를 전시하는 것으로써 시간과 기후 변화에 따라 붉게 녹스는 금속과 닳고 허물어져 먼지로 화하는 직물 매트리스란 한 인간이 무작위적으로 거치는 탄생, 성장, 사랑, 죽음이라는 생사의 순환과정과 다를 바 없음을 은유하며 관객에게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사색의 여유를 가져볼 것을 권유한다.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의 설치작 <무제(검은 침대)>는 침대란 인간의 신체가 가하는 무게, 반복해 가한 충격, 체액을 감내하고 흡수하는 세월의 증인이자 산물이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현대미술에서 침대가 한 편의 정치적 콘셉트이자 매개체로 재탄생한 결정적인 순간은 지금부터 약 50년 전인 1969년에 벌어진 한 편의 개념미술 퍼포먼스를 통해서였다. 오노 요코와 존 레논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힐튼 호텔에서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며 침대 시위(Bed-In)를 펼치는 것으로써 휴식, 잠, 에로티즘을 두루 상징하던 침대에 대한 관점과 관객의 고정관념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렇게 하여 침대는 전 세계 만인이 볼 수 있는 공공 무대가 되었고, 신혼여행이라는 로맨틱한 행사는 ‘싸우지 말고 사랑합시다(Make Love, Not War!)’라는 구호를 내건 정치적 제스처로 재탄생했다.
20세기 후반기 현대미술이 연인과 부부만의 침실 공간 속으로 밀치고 들어온 이후로 이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에서 벌어지던 갖가지 인간사도 예술이라는 이름을 달고 공공 공간 바깥으로 떠밀려 나왔다. 미국의 팝아티스트 에드 루샤(Ed Ruscha)는 ‘대학 시절 즐거움이여 안녕(Goodbye to College Joys)’이라는 캡션과 함께 작가와 두 여성이 한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사진을 1967년 미술전문지 《아트포럼(Artforum)》에 발표하는 것으로써 결혼 선언을 하고 자유롭던 총각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어서 그는 1971년 24분 길이의 16mm 비디오 <프리미엄(Premium)>을 제작했다. 한 남성이 한 여인을 호텔로 초대해 드레싱과 크루통으로 사랑의 샐러드를 만든다는 줄거리의 아트 코미디로 심각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영상예술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또 자유연애가 구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주류 청년문화로 자리 잡아가던 1970년대, 래리 클라크(Lary Clark)는 미성년자 연애, 불법 마약 복용, 폭력 등 청년 서브컬처 뒤안길에 서린 어두운 일면을 사진으로 담아냈는데, 특히 <무제(Untitled, T40)>(1971)라는 흑백사진에서 침대는 연인 사이에 사랑은 물론 금지된 마약을 몰래 주고받는 공간으로 묘사됐다.
그런가 하면 일찍이 바로크 시대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에서 그렸듯 침대는 죽음의 무대이기도 하다. 신체미술이 미술 창조의 큰 모티프로 차용된 오스트리아에서 특히 침대는 질병과 죽음과 연관 깊은 사물로 여겨졌다. 긴 병고 끝에 2012년 타계한 프란츠 베스트(Franz West)의 작품이 이번 전시에서 유독 다수 눈에 띄는데,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자도 결국 패배자에 불과하다는 인간생명의 유한성에 사로잡혀 있던 이 빈 출신 조각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또 지난해 세상을 뜬 오스트리아 출신의 원로화가 마리아 라스닉(Maria Lassnig)의 유화작품 <병원(Hospital)>은 병원 침대에 누워 육신적 고통, 공포, 고독 속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한낱 고깃덩이로서의 육신을 여과없이 표현했다.
침대가 모티프가 된 21세기 미술작품들 역시 관객의 심기를 불편하게 건드리면서 침대는 휴식과 휴면을 위한 가구가 아니라며 자명종을 요란하게 울려댄다. 트레이시 에민(Tracy Emin)은 1999년 헝클어진 침구와 자질구레한 소지품들이 널브러져 있는 <나의 침대(My Bed)>라는 레디메이드 설치작을 갖고 자신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 공간과 과거사를 노출하는 ‘치부 고백하기’ 전략으로 현대미술의 경계를 한 단계 더 밀어붙여 현대미술사의 ‘아이콘’이 되었다. 사라 루카스(Sarah Lucas)의 <오 나튀렐(Au Naturel)>은 남녀를 상징하는 과일과 플라스틱 양동이가 놓인 매트리스를 통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침대란 남녀 간 섹스의 교환이 벌어지는 영역임을 논평한다. 서구와 중동 사이의 정치문화적 차이를 미술로 해석하는 모나 하툼(Mona Hatoum)에게 현대 글로벌 시대에서 침대란 치즈갈이를 연상시키듯 뾰족하게 날이 선 바늘방석이라고 은유하면서 현대인에게 한시도 방심 말고 깨어있으라 경고한다.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는 종일 일하고 소비하는 21세기형 인간을 요구한다. 일로, 시험 준비로, 마음속 불안감 때문에 깊은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24시간 사회 속에서 늘 불안해 하고 정처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은 어느새 초현대판 노마드가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회를 떠돈다. 만성적인 잠 부족과 피로에 지치고 화가 난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편안한 침대와 방해받지 않는 숙면이지만, 현대미술은 현대인의 만성적 불면증은 쉽게 치유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는 듯하다. 그러나 기억하자. 플라톤이 말했듯, “잠자고 꿈을 꾸지 않는 인간은 죽음이라는 꿈 없는 영원(永遠)으로 간다”는 것을. ●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  캔버스에 가정용 래커, 두개골, 조명등, 곰인형, 까마귀, 침대. 작품 크기: 침대: 97×202×123cm 그림: 213.4×213.4cm 2008 Courtesy of the artist/White Cube Gallery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 <죽어가는 사람에게 미치는 최면술의 놀라운 효능(The Startling Effects of Mesmerism on a Dying Man)> 캔버스에 가정용 래커, 두개골, 조명등, 곰인형, 까마귀, 침대.
작품 크기: 침대: 97×202×123cm
그림: 213.4×213.4cm 2008 Courtesy of the artist/White Cube Gallery

 

WORLD REPORT | LONDON Magnificent Obsessions : Artist as Collector

작가가 무엇인가를 수집하는 행위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서는 일이다. 작가는 때로 수집을 통해 작업의 동인(動因)을 얻기도 하고 소재로서 이용하기도 한다. 런던 바비칸 아트갤러리에서 열리는 <Magnificent Obsessions: The Artist as Collector전>(2.12~5.25)은 작가의 취미를 엿보는 흥미로운 전시다. 작업실 내부에 꼭꼭 숨겨왔던 작가의 소장품을 통해 그들의 은밀한 면모를 살펴보기 바란다.

LONDON, ENGLAND - FEBRUARY 11:  Magnificent Obsessions: The Artist as Collector exhibition at the Barbican Art Gallery on February 11, 2015 in London, England. This is the first major exhibition in the UK to present the personal collections of post-war and contemporary artists. Ranging from mass-produced memorabilia and popular collectibles to one-of-a-kind curiosities, rare artefacts and specimens, these collections provide insight into the inspirations, influences, motives and obsessions of artists. Magnificent Obsessions: The Artist as Collector opens at the Barbican Art Gallery in London on February 12, 2015 until - May 25, 2015.  (Photo by Peter Macdiarmid/Getty Images for Barbican Art Gallery)

마틴 왕(Martin Wong)의 수집품_Dahn Vo artwork. < Magnificent Obsessions_The Artist as Collector >, Barbican Art Gallery_Peter MacDiarmid, Getty Images

LONDON, ENGLAND - FEBRUARY 11: Dolls in the collection of Peter Blake are shown in the Magnificent Obsessions: The Artist as Collector exhibition at the Barbican Art Gallery on February 11, 2015 in London, England. This is the first major exhibition in the UK to present the personal collections of post-war and contemporary artists. Ranging from mass-produced memorabilia and popular collectibles to one-of-a-kind curiosities, rare artefacts and specimens, these collections provide insight into the inspirations, influences, motives and obsessions of artists. Magnificent Obsessions: The Artist as Collector opens at the Barbican Art Gallery in London on February 12, 2015 until - May 25, 2015.  (Photo by Peter Macdiarmid/Getty Images for Barbican Art Gallery)

피터 블래이크(Peter Blake)의 인형들_< Magnificent Obsessions_The Artist as Collector >, Barbican Art Gallery_Peter MacDiarmid, Getty Images

예술가의 호기심 캐비닛을 열다

지가은 골드스미스대학 비주얼컬처 박사과정
“모든 수집가의 진열장은 우리에게 다른 세상, 수집가의 상상 속에만 있는 세상, 그러면서도 기억이건 상상이건 아름다움이건 천재성이건 또 다른 영역을 만들어내는 세상에 체류를 허락해준다. 그곳은 수집가가 도피하는 폐쇄된 공간이며 수집가 자신이 조물주요 심판자인 곳, 승인과 추방, 순서와 배열, 미와 가치를 결정하는 곳이다.” (필립 블롬 지음, 이민아 역, 《수집: 기묘하고 아름다운 강박의 세계》, 동녘, 2006, p.201)
예부터 예술계에는 남다른 수집벽을 자랑하는 대가가 많았다. 렘브란트는 동서양 회화부터 악기, 화석, 무기, 골동품 등 방대하고 열렬한 수집벽으로 가계가 파산에 이를 지경이었고, 루벤스는 보석, 조각품과 이집트 미라와 같은 고대 예술품에 감식안을 가진 수집가로 유명했다. 드가나 모네는 일본 판화에 심취해 이를 수집하는 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색채와 구도를 작품에 차용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피카소의 아프리카 조각과 가면 컬렉션은 큐비즘을 탄생시키는 데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런던 바비칸(Barbican)의 <아름다운 강박: 수집가로서의 예술가 (Magnificent Obsessions: Artist as Collector)전>은 이러한 수집가의 명맥을 잇는 전후시대 및 동시대 예술가 14명의 수집품 8000여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아르망(Arman), 솔 르윗(SolLewitt), 앤디 워홀(Andy Warhol), 피터 블레이크 (Peter Blake),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 등 낯익은 예술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수집 진열장이 공개됐다.
애초에 공개될 목적으로 모아진 수집품들이 아니다. 특별한 연결고리가 없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컬렉션이 모인 만큼 수집품의 범위나 종류도 광범위했다. 예술가 개인의 은밀한 취향이나 취미 생활이 배어 있는 갖가지 컬렉션들은 독립된 섹션으로 나누어진 공간에 각각 개별 전시처럼 포진했는데, 실제 작업실이나 집 안 한 켠을 슬며시 엿보는 듯한 관람 동선이 수집품 탐색의 묘미를 더했다. 컬렉션과 작품의 연관성이 명백한 경우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반짝이는 금속 액자 속에 나비와 곤충들이 정렬된 자태는 멀리서도 한눈에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주변으로 동물 박제, 해골, 의학 모형, 곤충 표본들이 군집해 있었다. 돌연변이 동물 박제나 사체의 단면을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아 기괴하고도 냉정한 시선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허스트 작업의 근저에는 어린시절부터 심취한 자연사 유물에 대한 관심과 죽음에 대한 유별난 집착이 자리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학생 시절부터 동료 작가들과 작품을 교환하는 것을 시작으로 스스로 고가의 미술작품을 수집하는 컬렉터가 되었다. 컬렉터의 생리를 이해하기 위해 미술품 수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고백한 바 있는 허스트에게 수집 행위와 예술 창작은 동일한 맥락에 존재한다.
예술가의 수집 컬렉션과 작품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경우도 있지만 그 연관성이 아주 은밀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히로시 스기모토(Hiroshi Sugimoto)의 정적이고 미니멀한 흑백 사진들을 먼저 떠올렸다면 전시장에 진열된 신석기시대 도구들과 화석, 해부학 모형과 각종 의학 도구들로 이루어진 그의 수집품들이 꽤나 낯설지도 모르겠다. 스기모토가 사진작가가 되기 전에 일본 민속미술을 취급하던 전문 딜러였다는 행적도 그의 자연사 컬렉션의 수준을 높이는데에 한몫했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들어가 생각해보면, 스기모토 컬렉션은 인류의 기원이나 생명, 지식의 진화, 흐르는 시간과 역사의 층위들을 사진이라는 한 프레임에 응축하고자 하는 그의 오랜 예술적 사유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스기모토에게 화석과 사진은 모두 특정한 순간의 시간성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그 본질이 같은 영역인 것이다. 미술품 전문가(connoisseur)의 심미안으로 특정한 분야와 장르에 특화된 수준 높은 컬렉션을 완성한 또 다른 예술가로는 하워드 호지킨(Howard Hodgkin)이 있다. 학창시절부터 인도회화에 깊이 매료되어 수집을 시작한 호지킨은 특히 17세기 무갈(Mughal) 회화에 조예가 깊다. 양식과 맥락은 다르지만,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와 빛의 표현을 즐기는 호지킨의 추상회화와 인도회화의 연관성도 짐작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히로시 스기모토 (Hiroshi Sugimoto)_ , Barbican Art Gallery_ Peter MacDiarmid, Getty images

히로시 스기모토 (Hiroshi Sugimoto)_ < Magnificent Obsessions_ The Artist as Collector >, Barbican Art Gallery_
Peter MacDiarmid, Getty images

앤디 워홀(ANDY WARHOL) 쿠키단지

앤디 워홀(ANDY WARHOL) 쿠키단지

수집, 병리학적 강박증? 창작의 동인?
수집한다는 행위 자체와 자신의 작업세계에 유사한 수행적 규칙을 적용하는 예술가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1960년대 유럽의 누보 레알리즘(Nouveau Realisme)을 주도한 아르망(Arman)이 있다. 한 가지 종류의 산업 생산물과 일상 오브제들을 유리 진열장 안에 빼곡히 채워넣은 작업과 같은 방식으로, 아르망은 자신의 아프리카 가면과 조각상, 시계, 일본 갑옷 컬렉션에도 예외없이이 ‘반복과 축적’의 코드를 적용했다. 미니멀리즘의 대표주자 솔 르윗은 자신의 작업실이나 생활 공간에서 마주하는 일상용품들의 사진을 종류별로 모아 9개씩 목록화해두었다. 작품의 균일한 모듈 구조와 조형성이 일상적 삶의 반복된 수행성에도 고스란히 묻어난 경우이다. 이와 함께, 영국 도예가 에드문드 드 왈 (Edmund de Waal)의 단순한 형태와 간결한 색채의 도자기 작품들이 군집하여 만들어내는 리듬감은 어린 시절부터 원석과 화석을 모아 순서대로 배열하기를 즐기던 그의 습관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일본에 머물 때 모은 264개의 ‘네추케(Netsuke)’ 컬렉션도 왈의 명상적인 수집 활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이와 정반대로 한네 다보벤(Hanne Darboven)은 엄격한 수학적 계산과 배열, 개념주의에 중심을 둔 자신의 작품 체계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수집 패턴으로 반전을 선보였다. 사자가죽에서부터 실물크기 말 조각상, 각종 공예장식품 등 무질서해보이는 수집품 더미는 그녀의 함부르크 고향집과 작업실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빈틈없이 차지하고 있던 수집품 일부를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한편, 컬렉션을 구성하는 각 아이템의 모티프나 이에 담긴 기억, 이야기가 예술가들에게는 그 자체로 영감의 보고가 되기도 한다. 멕시코의 타투이스트(Tattooist) 닥터 라크라 (Dr Lakra)는 정식 미술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전통시장이나 벼룩시장에서 모은 일상적 오브제나 이미지들이 교과서였다. 벽면을 메운 50장의 음반 커버에 담긴 이국적이면서도 통속적인 핀업걸(Pin-up girls) 이미지와 으스스하고 기이한 캐릭터들이 타투 디자인의 중요한 소스가 되었다. 미국 작가 짐 쇼 (Jim Shaw) 컬렉션의 주된 출처도 중고 잡화점이나 동네 차고 세일이었는데, 그가 집착적으로 수집한 것은 내다 버려진 작가 미상의 그림들이다. 작가는 이 흉물스러운 그림들이 아무도 원치 않기 때문에 더 의미가 깊다고 말했는데, 이는 미국 대중문화의 찌꺼기를 대하는 그의 끈질긴 애정과도 일맥상통한다. 짐 쇼는 파편화되고 소모되는 대중문화의 시각 이미지에서 따온 상징, 기호, 모티프를 그만의 방식으로 중첩시켜 만든, 출처와 전개가 불분명한 이야기를 통해 사회와 개인에 대한 질문을 던져왔다. 더불어, 영국 사진작가 마틴 파(Martin Parr)의 기념 엽서 컬렉션은 그가 스냅사진에 담아낸 현대인의 단조로운 여가 생활상, 그에 스며든 소비사회의 강박적 욕망과 허영의 단상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흑백의 빈티지 엽서부터 컬러로 이어지는 20세기 엽서 시리즈에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진부한 기념 사진, 관광 사진의 시선이 포착되어 있다. 또 이와는 별개로, 마틴 파가 소비에트 연방 시절 우주로 보내져 희생양이 된 개, 라이카를 추억하는 이미지들을 담은 담배 케이스나 배지, 시계들을 집요하게 수집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집벽이 병리학적인 저장강박증으로 남느냐 혹은 지치지 않는 창작 동인의 열쇠가 되느냐는 한 끗 차이이다. 패 화이트(Pae White)는 베라 뉴만 (Vera Neumann)의 텍스타일 디자인이라면 침대보, 티타월, 냅킨, 스카프 등 무엇이든 중독적으로 사 모은다. 화이트에게 이 수천 장의 텍스타일 컬렉션은 “디자인 라이브러리 혹은 그래픽 아카이브”이자, 패턴 디자인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하는 영감의 원천이다. 작가는 자신의 이 끈질긴 수집 에너지가 창작을 지속시키는 결정적인 동력이라고 말했다. 피터 블레이크(Peter Blake)도 타고난 수집가 기질을 자랑하는데, 그의 수집벽은 뿌리깊은 집안 내력으로 알려졌다. 영국 민속미술품, 오래된 장난감, 빅토리안 콜라주, 곤충 표본, 가면 등 그 수집 범위도 광범위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수십 종류의 코끼리 모형을 비롯해 인형과 간판, 가면 컬렉션의 일부만이 공개되었다. 작업실 벽면을 가득 채운 간판 컬렉션을 그대로 전시장에 가져와 재현하고 싶었던 큐레이터의 바람은 블레이크의 거절로 성사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자신만의 수집 체계와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을 우려하는 진정한 수집가적 고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블레이크에게 작업실은 이제 수집품의 정교한 축적과 배열로 완성된 아주 사적인 영역의 예술작품이 된 것이다. 컬렉션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된 사례는 미국의 화가 마틴 왕(Martin Wong)의 컬렉션에서도 찾을 수 있다. 왕이 40여 년간 수집한 중국 다기들과 기념품 4000여점은 작가가 타계한 이후 이를 승계한 또 다른 예술가 단 보(Danh Vo)가 설치작품으로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마지막으로, 일상생활과 삶 자체가 수집과 저장의 연속이었던 강박적 수집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컬렉션은 그 유명세에 비해 다소 초라한 규모와 수준으로 공개되었다. 워홀의 판화 작품과 함께 전시된 쿠키통들은 그가 평생 끊임없이 사고 모으고 쌓아 두고 보관해 온 수만 점의 물건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쇼핑중독자였던 워홀이 남긴 것은 벼룩시장에서 사모은 물건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창작 활동과 비즈니스 과정, 사적인 일상생활에서 파생된 온갖 종류의 기록물을 담은 박스 610개가 발견되었는데, 워홀 스스로 이를 ‘타임캡슐’이라 명명했다.
주로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경험 등 개인의 심리적 요인에서 비롯된 수집 강박은 예술가들에게는 그저 수집을 위한 수집에 그치지 않고, 창작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열렬한 탐구 에너지이자 애정과 욕망의 분출구가 된다.
그 컬렉션의 세계는 예술가 자신만의 질서와 체계, 철학과 미감이 작동하는 하나의 소우주이고 상상과 창조력의 발로이다. 때로는 수집품에 담긴 이야기가 특정 지역색이나 정치, 문화, 사회사의 다양한 층위를 반영하는 흥미로운 텍스트가 되기도 한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리디아 이(Lydia Yee)는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면서 늘 그들의 생활공간에 함께 자리한 수집품들의 정체가 궁금했고, 이들의 집착적 수집 동기, 작품과 컬렉션의 내밀한 연관 관계를 들여다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전시는 예술과 수집의 동인과 배후를 심도있게 파고들었다기보다는 예술가 컬렉션의 폭넓은 스펙트럼과 다양성을 수용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다. 관객은 논리나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예술가들의 이상한 호기심에 동참하는 열린 마음만 있으면 충분히 전시를 즐길 수 있다. ●

맨위이미지 닥터 라크라(Dr. Lakra)의 레코드앨범 커버 수집품_ <Magnificent Obsessions: The Artist as Collector전>, Barbican Art Gallery_Peter MacDiarmid, Getty Images

NEW FACE 2015 유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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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연의 작업이 미술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 중 하나는 무엇보다 타자 또는 소수 문화에 건네는 그의 시선에 있었다. 동시대미술은 어쩔 수 없이 주류 문화의 반대편으로부터 거슬러 가는 저항적 태도로부터 출현한 ‘변종의 미술’이다. 그러나 교육과 문화제도가 견고해지면서 이러한 비주류적 태도마저도 하나의 관습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문화적 현상에도 불구하고 유목연은 타자를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타자와 밀착된 시선을 통해 타인들, 다양한 개인들과 ‘접촉’하였기에 그의 작업은 으스대지 않고 자연스레 소통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 정현 미술비평

‘유케아’식 예술•생존•게임 가이드

최근 작가 유목연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목연포차>는 전국을 누비며 만남의 장을 펼쳤고 작가는 넘치는 아이디어를 쏟아내며 동시다발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각양각색의 형태를 띤 그의 작업은 전체적으로 ‘유케아(UKEA)’라는 자체 브랜드로 수렴된다. 이 콘셉트는 좋은 디자인과 싼 가격, 그리고 무엇보다 손수 조립할 수 있는 가구로 유명해진 스웨덴 가구 브랜드 ‘이케아(IKEA)’를 차용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브랜드 ‘UKEA’에 대해 “끊임없이 이동하고 정착하지 못하는 삶의 방식에서 오는 불안함과 생존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트레이드 마크”라고 설명한다. 작가의 모든 작업은 쉬운 설명을 담은 소책자 형태의 지극히 개인적인 가이드북에서 시작한다. 벌써 25권이 발행됐다.
가이드북을 토대로 한 작업 방식은 드로잉, 설치, 소설, 영상, 퍼포먼스, 아카이브 등 다양하다. 사진을 전공해 동시대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는 그는 마치 미술매체 완전정복을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그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작업 자체가 절실하다고 설명한다. 작업을 진행할 때마다 직관을 따르고 새로운 매체에 도전하다보니 결과적으로 다른 작가와 유사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다지만 일단 필이 꽂히면 돈키호테처럼 돌진하는 모습 자체가 유목연스럽다.
유목연 작업의 특징은 작업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생존 영역, 일상적 경험과 직접적으로 연동되며 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작가 역시 “아직도 내가 하는 것이 예술의 영역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고 토로한다. <도시유목서바이벌 가이드>의 경우 작가가 7년간의 회사 생활을 그만두고 실제 노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가이드 소책자에는 ‘진통제로 환각제 만들기’, ‘손쉬운 오토바이 훔치는 법’ 등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생존 노하우 등이 소개돼 있다.
슈퍼마켓 카트 위에 만들어진 작은 1인용 이동형 선술집인 <목연포차>는 유목연의 대표적인 작업이자 생계의 수단으로 실제 홍대, 안산 지방 각지를 돌면서 어묵꼬치를 팔고, 술을 파는 등의 상거래를 하며 새로운 만남을 유도했다. 작가는 음식을 팔고 술 한잔 따라줄 때 관람객이 즐거워하고 재밌어 하는 반응에 만족한다고 말한다. 사진이나 회화 같은 작업이 관람객에게 공허한 메시지를 던질 때 관람객과 자연스럽게 만나고 소소하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접점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차 한잔 합시다>에서도 유사하게 이어지는 그의 작업 방식은 그렇다고 예술과 일상의 일회적이고 소박한 만남을 추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홍대 거리, 이태원 펍(pub) 등 그 자신이 길바닥에서 작업의 영감을 얻은 것처럼 그의 작업은 예술이라는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일종의 오픈 소스로 다양한 사람과 교감하는 데 의미를 둔다. 게다가 <목연포차 창업 가이드북>은 누구나 포차를 만들어 작가 자신처럼 실질적인 생존에 도움을 얻을 수도 있는 실용성을 갖췄다.
한편 <더 아티스트 보드게임>은 작가가 공모에 지원하고 선정돼 레지던스, 미술관 전시 등에 참여하는 현상을 보드게임에 적용한 것이다. 국내편에서 해외편으로 확장되며 작가 생존의 현실적 문제와 제도적인 안착의 관계를 질문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는 제도권 자체 혹은 제도권에 편승하는 태도를 직접적으로 비판하진 않는다. 대신 그 스스로 생존 게임판의 말이 되는 실험을 거친다.
욕심이 많은 그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도 많다.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 <모험도감>(5.20~6.20)에서는 지난 4년간 도시 유목생활을 하면서 선보인 다양한 작업을 펼쳐보인다. 이뿐 아니라 앞으로 지금까지 벌려놓은 작업을 보다 깊이 있게 다룰 생각이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는 가이드북 형태로 계속해서 출간할 예정이다.
이슬비 기자

유목연은 1978년 태어났다. 중앙대 사진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인사미술공간, 대구예술발전소, 경남도립미술관, 금호미술관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4 중앙미술대전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경기창작센터 입주 작가로 활동 중이다. 올해 7월부터 1년 간 삼성문화재단이 지원하는 파리국제예술공동체 레지던스 입주작가에 선정됐다.

 

NEW FACE 2015 이정형

이정형 인물 (1)

“작가의 작업이 노동의 부산물을 재구성하는 이유, 그래서 그 현장감을 생생하게 드러내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바로 세대의 현실을 예술에 곧바로 투사한 것이다. 지금까지 예술은 순수의식이어야 했고, 사회참여적이더라도 적어도 미감적 형식을 반영해왔다. 이정형 작가의 메타포는 상궤를 완전히 달리 하는 것이다.”
– 이진명 간송C&D 큐레이터

너와 나의 연결고리

영화 <인셉션>에서 수면상태로 들어간 주인공은 강한 물리적 충격을 받아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영화에서는 이를 ‘킥’이라 한다. 영어로 ‘짜릿한 쾌감’을 뜻하기도 하는데 최근에는 TV에서 셰프가 자신만의 특별한 조리법을 ‘킥’이라 불러 귀에 익숙한 단어다. 이정형의 작업을 보고 있자면, ‘작가의 킥’이 궁금해진다.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하는 작가의 조형적 미감은 투박하면서도 세련됐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노동의 중심에서 순간적 찰나를 놓치지 않고 작업으로 연결시키는 전환의 순간, 그 결정적 지점은 무엇일까.
이정형의 작업은 누구보다 일상과의 유착과 단절이 극명하다. 작가는 이른바 생계형 작업과 예술적 작업이라는 두 작업 경계의 묘한 줄타기를 시도한다. 생계를 위한 노동으로 작가는 ‘종합 설치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작품의 디스플레이나 전시장 설치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이정형은 20대 중반부터 유명 작가의 어시스턴트로 활동했다. 작업 설치를 돕다보니 점차 전시장 설치나 공간을 구성하는 일에 대한 도움요청이 잦아졌다. 이 활동은 분명한 노동이다. 전시장은 작품이 진열되고 보여지는 공간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공사 현장이다.
작가는 일터에서 틈나는 대로 사진을 찍는다. 노동하는 사람, 휴식을 취하는 노동자, 노동 이후의 잔재 등 현장에서 벌어지는 시시비비의 순간을 가감없이 담는다. 특별한 연출 없이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은 기록물에 가깝다. 작가는 그렇게 찍은 사진을 모아 분류한다. 카테고리를 만들어 기록의 현장을 정리한다. 이중 전시할만한 작품을 선정하고 설치작업의 모티프를 삼기도 한다. 이정형의 작업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에 가깝다. 이정형 작가는 지난해 아마도예술공장에서 진행한 제2회 〈아마도 애뉴얼날레_목하진행중〉에 참여했을 때 “작품의 뒷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설명 없이 작품만 봤을 때는 전달이 부족하다”는 의견을 많이 들었다. 이번 윌링앤딜링에서 열리는 그의 첫 개인전 〈파인 워크〉(4.30~5.20)에서 선보일 작품은 그 의견을 반영하여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기보다는 가공과 변주를 취하려고 노력했다. 작가는 ‘벽’을 큰 테마로 설정했다. 벽을 칠할 때 사용하는 페인트통을 모아둔 것을 표현한 <Painter>는 마치 작가의 팔레트를 연상케 한다. 또 벽을 칠할 때 사용하는 바퀴 달린 의자는 약간의 변용을 통해 움직이는 가벽의 모습을 갖췄다.
결국 전시가 열리면서 사라지는 사람들의 흔적과 노동의 공을 완성된 전시장에 다시 작품으로 소환한다. 크게 가공을 거치지 않은 날것의 느낌이 오히려 세련된 유머, 지적인 풍자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그가 사회 비판적인 시각에 초점을 맞춘 작업은 아니다. 작가는 젊은 작가들이 노동과 예술을 병행하는 행위를 부조리게만 인식하지 않는다. 다만 이 둘 사이의 상응을 이끌어가는 교착지점을 찾으려 한다. 물론 2년 전까지만해도 노동과 예술 사이의 괴리감, 그 사이에서 예술가로서의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정형은 노동 현장을 예술로 끌어들이면서, 오히려 소재의 폭이 무궁무진하게 넓혔다. 작가는 “일은 작업이 되지만, 작업은 일이 될 수 없다”며 일터에서 얻는 많은 예술적 감각의 순간을 이야기했다.
일례로 공구를 구비하기 위해 자주 들르는 청계천 공구상가에서 나열된 공구들을 보고 어느 순간 영감을 얻는 식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물건들이 뒤죽박죽 쌓여있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 숨은 법칙이 있었다. 그걸 발견한 순간 작가는 작업의 룰을 생각해낸다. 한편 공사 현장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공구도 그에게는 특별한 스토리를 담은 예술오브제로서 읽힌다.
노동과 예술의 연결고리를 직접적으로 투사하고 물질적으로 드러내는 이정형의 표현 방식은 숭고한 아름다움의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노동과 예술의 뫼비우스의 띠 자체가 예술적 숭고함은 아닐까. 그의 작업을 대면한 관객이 작품을 이해하는 ‘킥’이다.
임승현 기자

이정형은 1983년 태어났다. 홍익대 도예유리과와 동 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했다. 2008년부터 수차례의 단체전과 세 차례의 공공미술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윌링앤딜링에서 4월 30일부터 5월 20일까지 첫 개인전 〈파인워크〉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