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EFING

황현욱을 아시나요?

아주 오랫동안 미루고 있던 숙제를 해치운 듯 홀가분하다. 이번 특집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무실 컴퓨터에 저장된 ‘편집회의 기획안’ 문서파일을 검색해보니, ‘황현욱’을 처음 제안했던 때가 2006년 3월호더라. 그러니 이 기사를 실현시키는데 10년 걸린 셈이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황현욱과 인공갤러리에 집착하게 했을까? (손발 오그라드는 표현이지만) 그건 아마도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마음속에서 잊지 못하는 ‘짝사랑’ 같은 감정 때문 아니었을까. 어디 나뿐이랴, 우리는 살면서 ‘그/녀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녀를 알고 있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예컨대 전시를 보면서 작가와 작품을 혼자서 흠모한다거나 이런저런 책과 신문 잡지 따위를 훑어보며 온갖 잡다한 정보와 글귀를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아 두듯이 말이다. 나에겐 황현욱과 인공갤러리, 그리고 특집제목으로 인용한 박명욱의 책 《너무~ 너무~》(박가서·장, 1998/그린비, 2004)가 그 가운데 하나다.
이번 특집을 준비하며 “내가 마치 형사가 된 것 같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릿속에 막연한 계획과 밑그림만 그렸을 뿐, 단서하나 없이 백지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글이야 어떻게든 받으면 될 테지만 문제는 이미지. 명색이 미술전문지인데 참고 이미지 하나 없어서야 되겠는가.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처음부터 허탕이기 일쑤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황현욱이란 범인(?)을 꼭 잡고 싶다는 오기와 의지가 더욱 솟구쳤다. 이미지에 관한 첫 단서는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에서 찾았다. 거기서 인공갤러리 리플릿 자료가 쏟아져 나왔고, 이후 대구와 대전을 오가며 고인의 지인들이 간직하고 있던 먼지 쌓인 옛날 사진과 자료를 하나 둘씩 모으며 실마리를 풀어 나갔다.
한편으론 황현욱이라는 인물에 대해 여러 사람과 만나며 탐문(探問) 수사를 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인생 공부’를 찐하게 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말이 많은 법. 같은 사실을 두고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같은 산(山)을 저 마다 다르게 기억하고 설명하는 꼴이었다. 당연히 산을 바라보는 위치도 다르고 정상에 오르는 등산로도 저마다 달랐기에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죽은 이를 기억하는 살아있는 사람(끼리)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신경전’과 ‘관계성’이었다. 역시나 인간관계란 참 어렵다!
아무튼, 아직 연초이고 하니 이 때쯤이면 ‘젊은 작가’나 ‘올해 주목 할 신진작가’ 같은 미래지향적인(?) 기사를 만들 법도 하지만 나는 오히려 뒤를 돌아본다. 황현욱도 물론이거니와 사진작가 정동석, 김지연 기사도 이런 맥락에서 만들었다. 그들은 애써 유명해지려고 안달부리거나 나대지 않았다. 묵묵히 혼자서 외길을 걸어 지금 여기까지 왔다. 공교롭게 故 황현욱, 정동석, 김지연 모두 1948년생. 나하고 20여 년 간극이 존재한다. 나는 20년 전부터 그들의 ‘의지’와 ‘작품’과 ‘삶의 태도’를 보며 성장했다. 이런 선배(세대)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다. 그런데 어느덧 나도 가끔씩 ‘꼰대’라는 말을 듣는 처지가 됐다. 말나온 김에 작정하고 꼰대 소리 한마디 하련다. 얼마 전 사석에서 ‘신생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느슨한 연대’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느슨한 연대’란 애당초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혼자서 한없이 헐렁하게 자유로운 ‘느슨함’과 강철같이 굳은 동지애로 굳건하게 결집함으로써만 가능한 ‘연대’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나는 ‘느슨한 연대’ 운운하는 일부 젊은 미술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도저도 아니게 어정쩡하게 양다리 걸치는 기회주의적인 모양새로 보이니까. 물론 그들의 행보가 내 맘에 들어야 한다거나 그럴 필요도 없지만 어쨌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COLUMN

분단국가의 예술 창작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하고 평화통일을 위한 3가지 제안, 즉 ‘드레스덴 선언’을 하였을 당시 드레스덴 공대의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은 기립박수를 보냈으며, 이 기사는 독일 전역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번 2016년 드레스덴 시와 드레스덴 미협이 주체가 되어 열린 드레스덴 아트페어는 ‘한국’을 주제로 내세웠다. 독일 통일의 전문가들과 드레스덴 시장, 작센안할트주의 문화부 장관과 정치인들 그리고 미술계의 주요 인물들을 초청하여 남북한 예술과 분단을 주제로 대담회 자리를 마련한 것은 박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 중 3번째 사항인 “예술과 문화 사업을 통하여 분단국의 이질감 극복을 위해 전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선언과 일맥상통하는 행사로 볼 수 있다.
대담회 진행을 맡은 유어겐 카일 박사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서울 괴테문화원 원장을 지내는 동안 북한을 20여 차례 방문하였으며, 북한 사회와 예술의 특성이 동독 시절의 분단체제와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개회사로 청중에게 남북한 미술과 동서독 미술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하였다.
전 드레스덴 공과대학 부학장이며 사회학 교수인 레베어크 교수는 동서독 분단체제하에 진행된 예술을 통한 ‘대리전쟁’ 현상에도 두 나라 예술가들이 체제에 반대하는 저항 미술로써 통일에 적극 기여하였으며, 통일 이후에는 오랜 분단으로 인한 사회적인 이질감 극복에 크게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이진 박사는 이러한 동서독 예술에 대한 연구에서 남북한도 배울 점이 있다고 했다.
동독 출신 작가 차브카는 동독체제에서 금지시되었던 마지막 ‘다다이스트’로 자신을 소개하며 통일 이전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중앙 중심의 엄격한 통제로 작가들의 자유를 제약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으며, 수많은 동독의 작가가 이 억압에 대항하여 저항예술을 펼쳐왔음을 본인의 체험담을 통해 증언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광 쿤스트페어라인64 대표는 북한 작가들에게는 동독에서 주어졌던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마저 주어지지 않으며, 남한에서는 이러한 실상과 북한 미술의 특성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부족하다고 아쉬움을 전달했다.
그리고 이광 대표는 북한 예술의 정체성을 청중에게 설명하고, 프로파간다의 목적 아래 작업하는 북한 작가들과의 소통의 중요함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남한의 민중미술과 동서독 미술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서양미술, 특히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남한의 민중미술은 그 역사가 짧고, 마르쿠스 뤼퍼츠, 바젤리츠, 펭크, 안젤름 키퍼 등 독일의 저항 미술가들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반면, 남한 내에서 그 지도적 역할과 예술가의 본질적 측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에는 모자란 면이 많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한국미술의 전통성 회복이야말로 오랜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으로 인해 상실된 전통과의 맥을 다시 잇는 길이며, 남북한 공동으로 노력해야 하는 과제임을 언급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한 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와 민중미술의 사회적 역할 확대, 남한 사회에서 소통의 중요성에 관한 인식의 전환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쿤스트페어라인64의 북한 관련 프로젝트 <반+반=한국(Halb+Halb=Korea)>을 소개하였다. 남북한, 독일 작가들이 베를린에 모여 한 아틀리에에서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할 예정이며, 독일 작가로는 동독작가들로 섭외 중이다. 이러한 작은 문화의 통일이 특히 베를린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당위성은 이러하다. 베를린은 한 도시 안에서 분단과 통일의 역사를 생생히 보여주며, 두 체제 아래 이질감의 극복을 위해 예술가들이 치열하게 정체성을 탐구하고 대리전쟁을 치러내는 저항예술의 메카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타국의 통일과 평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데 대하여 독일 정부와 청중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 대담회를 마쳤다. 청중은 한 시간 반을 넘기는 대담회 내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집중했다. 그들의 호응은 한국의 분단 상황과 남북 예술의 교류가 독일의 경우처럼 ‘대리전쟁’이라는 예술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었으며, 예술가들의 사회적인 역할이 평화에 기여하고, 사회 내의 갈등을 완화시키며, 공동체로서의 소속감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광 쿤스트페어라인64 대표

EDITOR’S VIEW

수사(修辭)와 행동

지난 해 12월 28일.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맺은 이른바 ‘한일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협상’을 벌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합의문 발표에 이어 아베 신조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착실히 실시해 나가겠다.” 박근혜 대통령은 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본의 잘못된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는 한일관계 개선과 대승적 견지에서 이번 합의에 대해 피해자 분들과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이해를 해 주시기 바란다”
일련의 소식이 전해지자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번 합의에 소녀상 철거에 대한 내용이 있다는 이유였다. 소녀상 철거에 대한 합의가 있었는지 공식적인 확인은 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든 이유는 일본 언론이 “소녀상 이전과 철거해야 아베 총리가 말한 ‘위안부’ 지원 재단 설립비용 10억 엔을 지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 중, 대학생들은 현재도 노숙을 자청하며 밤을 새운다. 지독한 한파가 엄습했던 날도 그들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미신고 집회’라는 이유로 대한민국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됐다. 1월 21일 인사동 입구 종로경찰서에 자진 출두한 그들은 경찰서 정문 앞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며, 경찰이 ‘표적수사’를 한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수사의 향연이라는 외교 문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소녀상 곁을 지키고 있을까? 그것은 이번 외교 문구가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와 인권의 문제에 있어서는 아베 총리의 말대로(원하는 대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합의는 없다. 또한 국익이라는 명분 아래 둘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니, 누가 누구에게 사과했으며, 누가 누구를 용서했는지도 모르겠다.
황석권 anarchy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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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_3

반 고흐와 미디어 아트?

인상주의 전시는 매력적이지만 낚이기 쉽다. 한국에서 열리는 전시 출품작 대부분이 유명 작가의 대표작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리고 있는 <반 고흐 인사이드: 빛과 음악의 축제>(1.8~4.17)에는 반 고흐뿐 아니라 터너, 모네, 르누아르 등의 주옥같은 명작들이 소개된다. 대신 회화 작품은 한 점도 걸려 있지 않다.
그동안 홍보대행사 측이 제공한 보도자료를 확인해보니 메일이 16통이나 된다. 그만큼 홍보에 심혈을 혼신을 기울이고 있는 셈이다. 어떤 전시인지 호기심에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음악과 함께 감상하는 미디어아트 전시라고 소개되지만 사실 놀이공원 분위기에 가깝다. 고흐의 작품에 들어갔다 온 것 같은 체험이 강조된다. 벽면, 천장, 기둥 등 전시장 전체를 스크린 삼아 영상을 쏘기 때문에, 고흐의 작품은 볼 수 없지만, 고흐의 이미지는 즐길 수 있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씁쓸했던 것은 진품이 없다는 사실보다 전시를 홍보하는 ‘미디어아트’라는 수식어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기술의 향연과 그 경계가 모호해졌지만 주최 측이 미디어아트라는 개념을 상업적으로 남용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실 이번 전시에 작가라고 한다면 고흐가 아니라 화려한 스펙터클을 마련한 연출자와 영상 감독, 음향 감독 등일 게다. 이번 행사는 하나의 아이디어 상품이라 할 수 있다. 반 고흐의 작품은 하나의 소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전시에 열광하는 대중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날이 갈수록 이 문제가 어렵게 느껴진다.
이슬비 drizzlesb@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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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다시 오리지에서〉(부분) 종이에 아크릴릭, 포스터 215×391cm 2003

이종구〈다시 오리지에서〉(부분) 종이에 아크릴릭, 포스터 215×391cm 2003

보트크래프트:전쟁의 서막(vote craft: The Beginning 2016)

2016년 4월 13일.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후보자 등록일(3.24~25)을 한참 남겨둔 1월부터 예비후보자들의 현수막이 거리에 등장했다. 지역 중심가에서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크게는 건물의 1/3까지 덮은 예비후보자의 얼굴이 하나 둘 늘고 있다. 선거철만큼 모르는 사람 얼굴이 떡하니 도시 중심부를 도배할 때도 없다. 선거를 위한 천편일률의 현수막과 포스터가 ‘센스 있게’ 소속 정당과 후보별 서로 다른 아이덴티티를 보여주거나, 자신이 출마하는 지역구의 고유한 특징을 드러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번 총선기간에도 ‘정치인 전용 얼짱각도’에 정당색만 입힌 일종의 ‘인물 공해’가 얼마간 도시를 장악해 갈 것이다. 사실 현수막이나 포스터가 단순한 선거 홍보 도구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정 기간 도시를 채우는 생활 디자인이다. 좋은 선거용 현수막 및 포스터 디자인은 시대의 흐름을 담고 유권자의 목소리를 수용해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간혹 선거용 전단지나 포스터가 새로운 시도로 주목 받은 경우가 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사용한 포스터는 한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는 성조기의 색을 적용해 자신의 얼굴을 덮음으로서 본인의 피부색을 지우고, 미국색을 입었다. 이후 이 포스터와 동일한 색과 디자인을 이미지에 적용할 수 있는 웹사이트가 만들어지면서 유권자들이 자신의 얼굴에 색을 입혀 SNS에 올리는 하나의 놀이가 이어지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간혹 파격적인 포스터를 통해 이슈가 된 정치인들이 있다. 그러나 이제 단발성 이슈를 위한 변화가 아닌 시각적인 이끌림과 적확한 정보를 전달하는데 효율적인 ‘아름다운 현수막과 포스터’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임승현 shlim987@gmail.com

SIGHT & ISSUE 국립현대미술관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멋의 맛_조성묵〉

조성묵(11)

<빵의 진화> 폴리우레탄, 폴리프로필렌 2008~2015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제1원형전시실 2015.12.1~6.6

메신저-의자에 서린 삶의 메타포

김영호 중앙대 교수

원로 조각가 조성묵 선생이 1월 18일 오전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서둘러 찾은 그의 영정 앞에서 슬픔과 더불어 사모의 감정이 마음 한구석으로부터 솟아오른다. 중절모와 둥근 안경 그리고 바바리 코트를 즐겨 입던 생전의 선생은 진취적 성향을 지닌 화단 신사였다. 장신의 키에 여유로운 표정과 과묵한 언변 속에도 선생이 내놓는 전위적 작품들은 관객의 의식을 서늘하게 열어 주었다. 시류와 거리를 두면서 시대의 메신저로서 삶을 성찰하는 파수꾼의 태도는 후배들에게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제 영면으로 조각가로서 그의 삶의 마디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작품들은 미술계의 별자리로 자리 잡아 발광(發光)을 시작할 것이다.
이별의 아쉬움은 그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육신의 죽음이 예술가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분신인 조각작품들이 세상에 남아 그의 일생을 영원으로 지속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거닐었던 공원에서 거리에서 미술관이나 도심의 건축물 안에서 그와의 만남은 계속될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듯 거장의 죽음은 미술사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선생의 죽음을 계기로 그가 살았던 삶의 노정을 새롭게 반추할 것이다. 그리고 거장의 유작들 속에서 작가가 걸어온 인생노정의 멋과 가치들을 발견할 것이다.
시하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개인전 <멋의 맛-조성묵 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1일 과천에서 개막해 금년 6월 6일까지 이어질 대규모 회고전이다. 한국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원로작가를 조명하는 ‘현대미술작가시리즈’의 맥락에서 기획된 전시다. 초대전은 선생이 미술계에 주는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선물이 되었다. 그는 혼신을 다해 자신이 일군 예술세계를 펼쳐 보였고 연출을 끝으로 작가는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졌다.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도 감사할 일이다. 반년 동안 계속될 그의 회고 유작전이 미술관 사업의 차원에서 거장의 화력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나아가 한국 조각사의 지평을 넓힐 좋은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거장 조성묵 선생의 예술 노정은 몇 개의 굵은 마디로 짜여있다. 그중 의자 연작은 대표적인 결실로 기억될 것이다. 의자는 1980년대 이후 작가가 줄곧 다룬 소재이며 작가는 이 연작에 ‘메신저(messenger)’라는 제명을 붙였다.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일상적 오브제로서 의자는 작가의 손을 거치며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새로운 메타포를 만들어내는 기호가 되었다. 골격만 남은 의자에 인체의 볼륨을 대입시키거나 청동 재질의 물성을 극대화하면서 거장의 의자는 유기적 의미를 지닌 오브제로 작동한다. 그의 의자들은 그것이 놓이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읽힌다. 때로는 그물에 씌워진 모습으로 제시되고 한쪽 등받이가 날개로 변형되기도 하며 파괴된 전시장 벽면 사이에 폭력자처럼 배치되기도 한다. 채색된 채 공중에 매달린 종이의자 다발은 의식의 사냥터에서 포획해 온 희생 제물처럼 보인다.
1990년대 후반부터 작가는 국수라는 식품을 재료로 삼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연작을 내놓았다. 청동을 주로 사용하던 의자의 캐스팅 작업은 새로운 매체를 만나면서 독특한 형태의 선묘화를 구축했다. 작가는 연필로 종이에 선을 긋듯이 공간에 국수를 뿌리고 세우고 잘게 부수면서 자신의 조형세계를 독자적으로 세우기 시작했다. 기념비적 볼륨은 가변적 설치물로 바뀌었고 물성은 정신의 영역을 끌어안으면서 의자의 메타포가 한층 강화되었다. 30cm 남짓 길이의 국수는 전시장 공간에 수백만의 직선으로 작동하며 의자와 조명등과 침대를 비롯한 온갖 가구들을 조형의 세계로 드러내었다. 직선의 집합이 어느덧 정원의 잡초가 되고 고대의 탑신이 되며 전에 접하지 못했던 다양한 환상의 영역으로 보는 이들을 이끌었다.
2001년부터 시도한 <빵의 진화> 연작은 매체가 발화하는 삶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드러낸 경우다. 합성수지를 주재료로 삼아 빵의 질료감을 표현하고 이 기법을 의자를 비롯한 가구와 조명 기구의 형상에 적용한 것이다. 이때 빵의 진화란 빵이라는 일상적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진화를 은유한다. 작가가 만든 의자가 의자가 아니듯 그가 만들어내는 빵은 빵이 아니다. 그것은 의미를 품은 매체로 눈앞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며 주어진 조건이나 상황 속에서 열린 의미를 만들어내는 메신저일 뿐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처럼 조성묵의 빵은 그렇게 삶의 다양한 의미를 나르는 기호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회고전에서 처음 접하게 된 몇 점의 연필 드로잉은 조성묵 선생의 독자적 조형세계를 일괄하는 데 중요한 작품으로 보인다. 모두가 1962년에 제작된 것들로서 조각적 볼륨과 선묘의 평면성이 종이 위에 서로 어우러지면서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각체험을 불러일으킨다. 두 명 혹은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화면공간은 조각적 양괴감이 강조되고 있으나 특별히 세밀하게 묘사된 손가락의 표정은 등장인물의 심리적 상황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신체의 볼륨을 채우는 반복적 단선은 후에 국수 면발로 표현된 단선의 출현을 암시하고 있다. 이 몇 점의 연필 드로잉은 평면과 입체를 넘어 일관된 세계를 유지하는 조각가의 인생 노정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담뱃불로 구멍 낸 드로잉을 대하면 작가의 유희와 재치에 감응되어 미소가 절로 난다.
국립현대미술관 회고 유작전에 전시된 90여 점의 작품은 말 그대로 작가의 분신이다. 청동 의자에서 라디오 의자 그리고 국수 의자에서 빵 의자에 이르는 의자 연작은 작가가 살아온 인생의 굴곡을 드러낸다. 원형 전시장을 팽팽히 긴장시키는 의자들은 저마다의 표정으로 관객의 의식을 사로잡는다. 전시공간을 한 바퀴 돌아보면 휠체어를 타고 작품 설치를 주도하고 있는 거장의 안경너머 번쩍이는 눈빛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펼쳐 보이는 작가의 모습을 곁에서 본 어느 후배는 ‘맹수처럼’ 이라 했다. 마지막 에너지를 모두 쏟아내고 그는 무대에서 퇴장했다. 이제 거장은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메시지는 한국미술사의 큰 얼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조 성 목 Cho Sungmook
1940년 출생으로 홍익대학 미술학부 조소과를 졸업했다. 미대 재학 중에 1960년 제9회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해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1960년대 순수 조각그룹인 원형회의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70년대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동아미술제 조각부문 대상, 제8회 김세중조각상, 제4회 샤르자비엔날레 조각상 등을 수상했다.

故 조성묵은 1월 20일 운구돼 국립현대미술관과천관 전시실을 순회하고 장지인 충남 계룡시로 향했다

故 조성묵은 1월 20일 운구돼 국립현대미술관과천관 전시실을 순회하고 장지인 충남 계룡시로 향했다

 

HOT ART SPACE

박기원 개인전
313아트프로젝트 1.6~2.5

‘성장공간(成長空間)’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번 개인전은 작품이 공간에서 어떻게 관람객을 맞이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값싼 비닐로 벽면을 감싸면서 후면에 인공조명 혹은 자연광을 투사시키고, 캔버스는 아주 단순한 패턴으로 구성한다. 작가는 공간에 혹은 캔버스에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고, 작품은 공간을 지배하는 듯, 지배하지 않는다. 이 간극은 결국, 관람객의 참여로 메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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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파크 (2)

답장.하는.방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1.14~2.14

뉴욕에서 활동하는 미디어아티스트 이한과 영화·뮤직비디오 감독이자 첼리스트인 성승한의 공동예술 프로젝트이다. 인터랙티브 작업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 이한이 2014년 뉴욕 개인전에 선보였던 작업과 신작이 함께 출품됐다. 또한 성승한과 함께 관객참여 형식의 합동 공연을 4차례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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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임채욱

임채욱 개인전
아라아트센터 1.6~3.22

독특한 사진기법으로 한국의 산을 카메라에 담아온 임채욱의 개인전이 아라아트센터 전관에서 열린다. 한지에 사진을 프린트한 후 이를 구겨서 입체감을 표현한 8m에 이르는 거대 규모의 설악산 사진은 설악의 풍경을 현장감있게 해준다. 한편 전시와 함께 설악산 사진과 인터뷰 기사 등을 담은 책 《설악산 : 아름다움에서 무한으로》(임채욱 지음, 도서출판 다빈치)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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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근_공간해방(1)

오석근 개인전
공간 해방 2015.12.30~1.13

‘기억투쟁’으로 명명된 개인전에서 작가는 강화 민간인학살사건, 금정굴 민간인학살사건, 월미도 미군 민간인폭격사건 등 한국 사회에서 있었던 국가폭력에 대한 기억을 들춰낸다. 사진, 미디어, 아카이브 작업을 통해 개인의 기억과 국가의 기억의 간극을 살피고 공식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채 망각되고 있는 한국의 트라우마를 직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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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구용_북서울 (2)

구사구용(九思九容)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1.19~2.28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운영하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9기 입주작가 21명이 지난 1년의 성과를 되돌아보는 리뷰전. 율곡의 《격몽요결》에서 인용한 전시 제목 ‘구사구용(九思九容)’은 아홉 가지 몸가짐과 아홉 가지 마음가짐이라는 뜻으로 예술가의 실험적인 태도와 예술적 표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김은형, 박정기, 손혜민, 심래정, 이우성, 장민승 등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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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숙 (2)

Encounter:the story begins with
박여숙화랑 2015.12.11~1.22

‘뜻밖의 조우’를 의미하는 전시 제목처럼 낯선 경험을 통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작업의 원천으로 삼은 작품에 주목했다. 영국 유학 후 런던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신미경, 권대훈, 배찬효 3인이 참여해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진, 조각, 설치, 페인팅 등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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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균

김상균 개인전
갤러리 바톤 2015.12.11.~1.20

이번 전시에는 일제강점기 경성(京城)에 들어선 식민지풍 건축의 파사드를 마치 콜라주하듯 모아 선보였다. 이 건물들은 신문물의 전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른바 식민주의의를 합리화하는 선전물에 다름 아니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우리의 과거 인식이 무비판적인 것은 아닌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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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김진 개인전
갤러리 분도 2015.12.14~1.9

부제가 ‘Isolated Garden’이다. 작가의 작업이 주로 실내 전경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곳에서의 경험과 시간도 함께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그가 그린 공간은 그를 보호하지만 또 고립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그가 그린 대학 실기실의 광경은 그가 교수로서 또 다른 고립감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추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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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HH_오픈스페이스 배 (17)

KKHH(강지윤+장근희) 개인전
오픈스페이스 배 2015.12.19~1.24

두 작가는 지난 5년간 한 팀으로 작업하며 그 과정에 겪는 갈등과 균형 잡기에 관해 이야기해왔다. ‘제 몫(Sharing part)’으로 명명된 이번 전시에서 작가들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 먼저 자신의 몫을 챙기고 각자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충돌에 대해 집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과 균형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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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_김용택

빛깔그림창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성공회빌딩 2015.12.23~1.12

그동안 한국의 민화적인 요소를 살린 회화작품을 주로 해온 작가 김용철의 스테인드글라스 전시가 열렸다. 이번 전시에 대한성공회 온수리 성베드로 성당을 위해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인 아치형태의 <빛깔그림창> 20여 점을 소개했다. 성베드로에 관한 성서 내용에 수탉, 단청, 한글, 한복 등의 이미지를 더한 그만의 독창적 표현이 돋보인다.

SIGHT & ISSUE

미리보는 2016년 주요 전시

임승현 기자

2015년 국내 미술계는 이제는 공식처럼 자리 잡은 ‘비엔날레 쉬는 해’를 어느 해보다 활발하게 보냈다. 우선 ‘광복 70주년’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이슈가 비엔날레의 공백을 채우는 대규모 전시의 중추 역할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만 3개의 동일 주제 전시가 열렸으며 광복, 통일, 북한 등의 역사적 키워드가 대두했다. 또 다른 전시 흐름으로 ‘비미술의 미술관 유입’을 들 수 있다. K-pop 아이돌 스타 지-드래곤이 참여한 〈피스마이너스원: 무대를 넘어서〉(서울시립미술관, 2015.6.9~2015.8.23)은 대중문화와 미술관의 만남으로 주목을 받았다. 포스트 뮤지엄을 지향하며 미술관의 문턱을 낮춘다는 새로운 시도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조화된 전시 구성, 아이돌의 성급한 예술가 만들기 프로모션이라는 비판이 엇갈리는 가운데 대중문화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공론장이 펼쳐지기도 했다. 국내 패션 전시의 질적 향상으로 평가받은 〈디올 에스프리〉(DDP, 2015.06.20~2015.8.25) 역시 범시각문화의 미술관 진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시다. 허영만의 만화를 조명한 대규모 개인전, 스탠리 큐브릭, 필립 가렐 등의 영화도 줄줄이 전시장으로 들어왔다. 이 밖에도 건축가 조민석이 감독해 〈2014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황금사자상 수상으로 주목받은 〈한반도 오감도전〉(아르코미술관, 2015.3.12~2015.5.10) 부터 한국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조명한 〈한국건축예찬: 땅의 깨달음전〉(삼성미술관 리움, 2015.11.19~2.6) 등 건축 관련 전시가 지속적으로 이어진 점도 주목할 만한 흐름이었다. 이러한 미술관의 장르 확대는 ‘전시’라는 매개체가 미술계 내부에서 통용되는 문법에 국한되지 않고 범문화 장르를 표현하는 도구로서 적극적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전시 활용 및 구성’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전시만큼이나 떠오른 이슈는 ‘미술시장’이었다. 〈KIAF〉의 경우 차별화된 VIP 관람방식, 페어 속 공공미술전 등 홍콩 아트바젤을 벤치마킹함으로써 국제적인 트렌드를 따르려는 시도가 있었다. 또한 국내외 시장에서 단색화가 미술시장의 키워드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반면 새로운 시장의 등장도 눈에 띈다. 신생 공간을 중심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굿즈 2015〉(2015.10.14~18)는 지난해 가장 주목받은 미술 행사 중 하나였다. 기존 미술시장의 형태를 탈피하고 작업과 상품의 중간지대에서 작가들이 부스를 차리고 소비자를 직접 만났다. 이 행사는 관객-소비자, 예술가-생산자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로써 시장에 새로운 층이 형성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부풀었다.
새로 개관한 거대한 몸집의 국립기관도 있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2004년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추진단이 꾸려진 지 10년 만에 공식 개관했다. 오랜 기간 속 끓이던 문제에 종지부를 찍은 국립기관도 있다. 1년 반 이상 공석이었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직에 최초로 외국인 관장인 바르토메우 마리가 취임한 것이다. 마리 관장은 지난해 3월 바로셀로나 현대미술관장 재직 시 스페인 군주제를 풍자한 전시를 검열한 사실이 알려져, 그의 관장 취임을 반대하는 미술인들이 서명운동(국선즈)을 벌이기도 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자체검열에 따른 전시작품 철거 등으로 불거진 ‘검열’논란은 미술계에서도 뜨거운 감자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30주년을 맞이하는만큼 지난해 홍역을 치른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길 바란다.

2016년 전시 키워드
그렇다면 2016년에는 어떤 전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현재까지 주요 미술관 및 갤러리에서 발표한 전시일정을 살펴보면 몇 가지 키워드가 눈에 띈다. 첫 번째는 ‘故 백남준’이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작고 10주기를 맞아 그를 추모하는 다양한 형태의 전시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계속 될 전망이다. 국내에서 열린 첫 추모전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그루브_흥〉(2015.11.13~1.29)이다. 이어서 갤러리 현대에서는 아카이브 형태로 백남준을 추모하는 전시를 연다. 백남준이 요제프 보이스를 추모하며 갤러리 현대 뒷마당에서 펼친 진혼굿 퍼포먼스 〈늑대 걸음으로〉와 관련된 기록을 중심으로 전시한다. 퍼포먼스라는 현장성과 역사화된 자료를 같은 공간에서 보여줌으로써 백남준 작업의 의미를 되새긴다. 비슷한 기간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인문, 과학, 미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기획자로 참여하여 백남준과 그의 작업을 다각도로 살펴보는 전시도 열릴 예정이다. 이 외에도 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비디오 신디사이저전〉, 백남준아트센터와 간송문화재단이 만나 고미술과 백남준을 연결하는 전시가 이어진다. 회고전은 새로운 담론 제시보다는 작품이나 자료 나열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올해 열리는 백남준의 추모전이 백남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자료를 제시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또 다른 키워드는 ‘한불수교 130주년’이다. 한국과 프랑스는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2015~2016년을 ‘한불상호교류의 해’로 지정했다. 지난해 9월부터 프랑스 전역에서 우리나라 문화예술 행사가 펼쳐진 데 이어 다가올 3월부터는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출신 작가의 전시가 다수 열려 관객을 맞이한다. 우선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는 〈도시괴담〉(4.5~5.29)을 들 수 있다. 이 전시는 팔레 드 도쿄 국제 레지던시 파비옹과 서울시립미술관 난지창작스튜디오 협업으로 진행한다. 김아영을 포함한 6명의 젊은 작가가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공동 워크숍을 진행한 후 그 결과물을 발표하는 형태다. 의례적인 각국 작가 프로모션을 떠나, 함께 양국의 문화를 경험하면서 만들어가는 과정이 주목된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이 밖에도 같은 기간, 롤랑바르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 담긴 사진론에 기반을 둔 현대 사진전을 서소문 본관과 일우스페이스에서 연다. 프랑스의 공공기관 CNAP와 FRAC의 주요 사진 컬렉션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기관의 협조를 받아 열리는 또 다른 전시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프랑스 프리시 라 벨드 데 현대미술센터가 공공 주최하는 질 바비에 개인전, 프랑스 국립음악창작센터 GRAME의 전시를 초청해 토탈미술관에서 열리는 〈한-불 상호교류의 해 초청전〉이 있다. 이외에도 에르메스 아뜰리에에서 〈Quoi ?-L’Eternite〉(5.10~7.10)란 타이틀로 열릴 사단 아피프의 개인전, 독특한 유리구슬 모양으로 국내 관객에게도 익숙한 장 미셸 오토니엘 개인전(국제갤러리, 2.2~3.27) 등 프랑스 출신 작가의 개인전이 다수 열릴 예정이다.
한편 2015년 미술시장뿐 아니라 전시에서도 중심축이었던 단색화 열풍은 올해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창섭 개인전>(국제갤러리, 2.26~3.27), 갤러리 현대에서 5월 26일부터 7월 10일까지 열릴 <한국 추상 드로잉(가제)전>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단색화의 입지가 흔들릴 만한 논란도 있다. 지난해 12월 K옥션 경매에서 5억여 원에 낙찰된 이우환 작품, <점으로부터 No. 780217>의 감정서가 위조된 사실이 밝혀지며 위작 논란이 점화된 것이다. 위작논란의 대두는 단색화의 미술사적 의미는 물론 시장에서의 위치에도 적색신호등이 켜진 것과 같다. 미술시장에서 작품의 역사성과 가치에 대한 신뢰는 최우선되어야 한다. 앞으로 ‘위작 유통’ 논란이 미술시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위작 유통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마지막으로 올해 눈여겨볼 만한 전시 흐름으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저항의 미술, 한국적 리얼리즘으로 평가받는 민중미술을 들 수 있다. 그 첫 테이프는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자문한 〈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2-리얼리즘의 복권전〉이 끊는다. 가나인사아트센터 전관에서 1월 28일부터 2월 28일까지 열릴 이 전시는 1980년대의 한국적 시대 상황에서 등장한 민중미술의 미술사·역사적 의미를 오늘의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전시다. 학고재는 3월에 <주재환>, 10월초에 <민중미술전(가제)>까지 민중미술에 초점을 맞춘 전시를 올해만 2차례 열 예정이다. 한편 주재환은 7월부터는 김동규 작가와 함께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미술관에서 김동규와 함께 〈2016타이틀 매치전〉을 선보일 예정이라 상·하반기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단색화를 이어 우리만의 고유한 미술사적 흐름으로 민중미술에 대한 평가와 연구가 지속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국미술사의 흐름을 적립하고자 하는 시도가 잇따라 포착되는 가운데 지난해에 비해 고미술 부문에서는 주목할 만한 전시가 발표되지 않은 상태라 아쉽다. 반면 젊은 작가를 주목하여 소개하는 전시는 각 기관에서 연례행사처럼 이어지고 있다. 이와 별개로 기존의 화이트 큐브를 떠나 2014~2015년에 널리 회자되기 시작한 신생 공간의 전시는 올해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그들의 단발성 전시 방식이 올해는 하나의 층으로 자리매김할지 혹은 이들의 전시 방식이 미술관으로 입장하면서 기존 범주에 합류할지도 지켜볼 만한 이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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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의 전환점에 서서

바야흐로 ‘비엔날레의 해’다. 짝수 해가 되면 미술계는 비엔날레라는 매가톤급 전시 준비로 분주해진다. 올해 열릴 대표적인 비엔날레 3인방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주제와 참여 작가 라인업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전시에 대한 기대감은 어느 해 못지않다. 스펙터클한 비엔날레를 지향하던 예년과 달리 올해의 비엔날레는 전반적으로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고 새로운 접근을 모색하는 시도가 눈에 들어온다. 거대담론 제시보다는 소통을 중심으로 한 전시 구조의 매개에 초점이 맞춰진 듯 보인다.
우선 제11회를 맞이한 〈2016 광주비엔날레〉(9.2~11.6)의 경우, 지난해 6월 스웨덴 스톡홀름 텐스타 쿤스트홀(Tensta Konsthall) 디렉터 마리아 린드(Maria Lind)(사진왼쪽)를 예술총감독으로 선정했다. 스웨덴 출신인 그는 그동안 제도권 전시와 차별화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반영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기존에 그가 선보인 전시가 기관의 역할과 교육 프로그램과 전시의 긴밀한 연결을 이뤄내는 등 ‘과정 중심’으로 이뤄져왔기 때문에 이번 광주비엔날레에서도 광주 지역민의 참여를 이끌어낸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움직임은 최종 주제어 선정에서 이미 드러났다. 감독이 임의로 주제를 제시하기보다 키워드를 던진 오픈포럼, 국내외 리서치 등을 통해 주제어를 공개적으로 구체화해가는 과정부터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2015년 12월 3일에는 오픈포럼을 개최하고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물음하에 ‘예술에 대한 신뢰 회복’, ‘미래에 대한 상상력’, ‘매개체로서의 예술’이라는 3개의 키워드를 발표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보조 기획자 4인(네덜란드 거점 큐레이터인 최빛나를 비롯해 미쉘 웡(Michelle Wong) 홍콩 아시아아트아카이브 연구원, 마르가리다 멘데스(Margarida Mendes) 큐레이터, 아자 마모우디언(Azar Mahmoudian) 아시아시각예술센터 공동 큐레이터)도 선임되어 지역과 연계한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수행할 계획이다.
한편 2014년 감독 선임 문제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부산비엔날레는 9월 6일부터 11월 30일까지 열리는 〈2016부산비엔날레〉감독을 일찌감치 선정했다. 중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국 하우아트뮤지엄 관장 윤재갑(가운데)이 전시감독을 맡았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큐레이터로서 한·중·일 3국의 자생적 아방가르드를 다루는 내용이 전시에 포함될 예정이다. 윤재갑 전시감독은 “1990년대 이전의 로컬 아방가르드 시스템과 1990년대 이후에 대두한 글로벌 비엔날레 시스템, 이 둘의 관계(연속-불연속-습합)를 집중적으로 거론할 생각이다”라며 전시 얼개를 밝혔다. 특히 이번 전시는 부산시립미술관과 고려제강 수영공장 전체를 활용하여 역대 비엔날레 중 최대 규모가 될 전망이다.
전시장 규모가 넓어진 것은 올해로 9회째를 맞이한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도 마찬가지다. 백지숙(오른쪽)이 예술감독을 맡아 9월 1일부터 11월 20일까지 열릴 이번 비엔날레는 예년과 달리 전시공간을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기존 전시공간인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을 포함 남서울생활미술관, 북서울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까지 장소를 넓혔다. 광주비엔날레와 마찬가지로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역시 프리비엔날레 행사를 열면서 본 전시 시작 전부터 예열을 가하고 있다. 앞으로 연속적인 워크숍과 학교를 운영하며 총 4번에 걸쳐 비정기 간행물을 제작 및 배포할 예정이다. 지난 11월 27일 열린 출판 회의로 출간할 간행물의 서두를 열기도 했다. 백지숙 감독이 밝힌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는 “떠돌아다니는 지식의 꼴들에 반사되는 미래의 모습들”이다. 다시 말해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은 동시대 미디어들이 만들어내는 커뮤니티의 다양한 양상에 초점을 맞춰갈 예정이다. 백지숙 감독은 전시를 짚는 주요 내용으로 “아시아 지역에 집중했던 지난 회에 비해 남반구의 주요한 몇 가지 상상력을 견인하며, 여성, 청소년, 장애와 보철, 불확실성과 독창성 등을 토픽으로 한다”고 전했다.
올해 비엔날레는 전체적으로 전시장소를 분산하여 공간마다 전시의 차별성을 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기적인 관계항을 확장하는 방식을 취해 본 전시의 화려한 개막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전시 과정 자체를 비엔날레 행사로 포함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미술계의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비엔날레의 화려함을 걷어내고,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와 개입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비엔날레의 앞길이 기대된다. 임승현 기자

SPECIAL FEATURE 황현욱,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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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5/128전> 창립전에 참여했던 작가들. 왼쪽부터 황태갑, 황현욱, 이묘춘, 이향미, 이명미, 강호은, 김기동, 최병소

황현욱의 대구시절 발자취를 추적하다

이준희 먼저 황현욱 선생의 기사를 준비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죠. 제가 88학번인데요, 대학로 인공갤러리에서 리처드 롱, 정병국, 차계남 등의 전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먼발치에서 황현욱 선생을 직접 뵙기도 했고, 나중엔 카페 말파에도 몇 번 드나들었고요. 당시 말파 커피 값이 무진장 비쌌던 걸로 기억해요. 아무튼 제가 2000년부터 지금까지 《월간미술》에서 일하면서 여러 작가를 만났는데 인공갤러리와 황현욱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듣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직감적으로 황현욱이란 인물과 인공갤러리가 한국현대미술 현장에서 아주 중요한 존재이자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저는 요즘 개인적으로 일부 젊은 세대에 의해 표출되는 미술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불만이 많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등장한 이른바 ‘신생공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움직임과 현상, 즉 동시대 한국현대미술계의 지형 변화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그들에게 황현욱의 존재와 인공갤러리라는 역사적 공간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현대미술 현장에 존재했던 이런 역사적 인물과 전시공간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을 테니까요. 아주 오래된 과거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던 중 몇 달 전, 대구미술관에서 우연히 황현욱 선생의 미망인이자 대전 비비스페이스 대표 김춘화 선생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제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황 선생 기사 계획을 말씀드렸죠. 처음엔 선뜻 내켜 하지 않으셨지만, 대전 비비스페이스로 직접 찾아가서 다시 간곡히 부탁하고 도움을 청했죠. 그때 김춘화 대표가 그러셨어요. “만약에 황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그분 성격에 이런 기사를 100% 반대하시며 크게 호통쳤을 것이다. 황 선생은 그런 분이다. 그래서 나 역시 처음엔 황 선생의 뜻을 헤아려 내켜하지 않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제 그분이 돌아가신 지 15년도 넘었고,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그분을 재조명하는 일이 의미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취재에 협조하기로 했다”고. 이렇게 해서 이 기사를 본격적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황 선생의 대구시절 활동에 대해 미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여러분과 접촉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황현욱 선생의 초창기 대구 활동을 빼놓을 수 없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선생님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그 이야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황 선생은 1948년 안동에서 태어나신 걸로 조사됐는데, 구체적인 가족관계나 성장 과정은 여전히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이교준 황 선생은 1남 2녀에 둘째예요. 위아래로 누님과 여동생이 계시죠. 제가 듣기로는 6.25 때 부친이 황 선생을 이웃에 맡기고 북으로 가셨다고 해요. 이후로 소식이 끊기고 끝내 아버지를 못 뵌 거죠. 당시 황 선생이 3살 때였는데 자전거 뒤에 실려서 도산서원 쪽으로 피난가는 중에 마을 사람에게 맡긴 것을 기억한대요. 이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가 혼자서 황 선생을 키웠고요.

이준희 이명미 선생님은 황 선생의 초기 활동에 대해 알고 계시죠?

이명미 1973년 <非오브제전>이라는 제목으로 황현욱의 개인전이 서울 명동화랑에서 열렸는데, 그 전시가 끝나는 날 황현욱을 처음 봤어요. 첫 만남이었던 그날 황현욱과 대판 싸웠어요.(웃음) 싸우면서 서로를 알게 된 거죠. 황현욱 전시가 끝나고 바로 다음 날 저하고 여자 작가 2명이 함께 <시점 73>이라는 전시를 열었거든요. 그런데 황현욱이 <非오브제전>에 출품했던 울퉁불퉁한 자연석을 명동화랑 바닥에 그대로 던져놓았어요. 저보다 먼저 도착한 친구가 그 돌이 황현욱의 작품인줄 모르고 그 위에 자기 작품을 올려놓았어요. 그런데 황현욱이 자기 작품 위에 물건을 올려놨다고 버럭 화를 내서 싸움이 났고 제 친구가 울면서 밖으로 나왔죠. 그래서 봤더니 그 뒤로 못되게 생긴 남자가 나오더라고.(웃음) 우리가 들어가서 삿대질하면서 같이 싸우면서 서로 알게 됐어요. 싸우면서 만난 것이 첫 인연이라 제가 정확히 기억하죠.

이교준 그 이후 황 선생은 1973년 <제2회 S.T그룹전>에 참여했는데, 당시 S.T그룹은 서울대, 홍익대 출신으로 구성된 작가 그룹이죠. 주변에서는 황 선생이 S.T에 들어간 것을 참 이례적이라 생각했어요.

이명미 그리고 1974년부터 <대구현대미술제>에 함께 참여했고, 1975년엔 대구시립도서관화랑에서 열린 <35/128전> 창립전에도 같이 참여했어요. 그때 서문을 이일 선생이 쓰셨고요. 그때 우리는 전시만 한 게 아니라 같이 책 읽고 토론도 하고 그랬어요. 황 선생은 나중에 제 남편이 운영한 대구 수화랑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했는데, 한국 최초의 ‘아트디렉터’라고 《매일신문》에 기사가 실리기도 했어요.

이준희 그럼 수화랑 아트디렉터를 하시게 되면서 작업 활동은 그만두신건가요?

이교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1978~79년 즈음 일거예요. 그때 황 선생은 작가가 작업하면서 동시에 제대로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본인이 직접 작가를 종합적으로 학습시키고 지원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 무렵부터 황 선생은 지금은 아파트가 된 옛 효성여대 뒷산 골목 안 작은 집 골방에서 머리 깎고 영어공부를 하셨어요. 한국에는 변변한 현대미술 서적이 없으니까, 외국 책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죠. 그러던 중에 작가 박현기 선생의 설득으로 수화랑 디렉터를 맡게 됐어요. 저는 그때 군대를 제대하고 20대 후반이었는데, 그런 황 선생을 존경하고 따라다닌 후배 가운데 한 사람이었죠. 그전에 황 선생은 서울에서 활동하다 대구에 이강소 최병소 이명미 같은 작가들이 계시니까 대구로 내려오신 것 같아요.

정병국 아마도 황 선생 누님이 대구에서 결혼해서 산 연고도 있었을 겁니다. 그 무렵 저 역시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1980년에 영남대 교수로 발령을 받아 대구로 내려왔죠.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황 선생은 대구에서 큐레이팅을 시작하고 대구미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서 대구지역 미술대학 출신 젊은 작가에 관심을 갖게 됐죠. 미협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요, 제가 영남대에 새로 온 젊은 선생이니까 저한테 기대를 많이 했죠. 그 당시만 해도 현대미술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황 선생이 영어를 해독해서 공부했다는 것은 정보를 적극적으로 획득하려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죠.

이준희 그때 주로 어떤 책을 보셨나요?

이교준 그 당시는 해외여행도 마음대로 못할 때고, 외국 잡지나 책도 검열이 심해서 잘 들어오지도 못했어요. 그나마 미국문화원에 가면 《아트 인 아메리카》 같은 전문지를 볼 수는 있었죠. 황 선생은 수화랑 디렉터로 들어가기 전에 본인이 공부했던 것을 후배들에게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권부문, 박현기, 신용덕을 비롯해 8~10명이 조그마한 2층 방에서 공부하는 스터디모임을 만들었어요. 황 선생이 일주일에 3번 정도 산에서 버스 타고 와서 영어강독을 했죠. 주로 뉴욕스쿨, 비트겐슈타인, 과학혁명의 구조, 토마스 쿤, 박이문, 현상학…, 이런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 쓰고 또 숙제 내주고….

정병국 여러 사람이 같이 번역한 책을 저한테도 몇 권 가져다주고 했어요.

이교준 예. 그 당시에 신용덕 씨도 영문과를 나왔고 황 선생도 번역을 해서 그 모임에서 미술에 관한 어휘를 서로 맞춰가면서 번역을 했었죠. 책 한 권을 다 번역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중에 읽을 만한 거리들을 끄집어내서 번역하고 서로 돌려보곤 했죠.

정병국 책을 한사람이 완역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모여서 토론을 하고 번역을 한다는 것이 고무적인 일이었죠. 미술에 관한 것, 철학에 관한 것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미술의 흐름을 짚고 했던 것을 나도 받아봤어요.

이준희 권오봉 선생님은 황 선생을 언제 처음 만나신거죠?

권오봉 저는 여기 계신 분들보다 좀 뒤에 만났어요. 1982년 수화랑 신축 개관 기념전 <28인의 이미지>에 참여하면서 황 선생을 처음 만났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제 그림을 보고 “왜 이런 식으로 그리냐”고 막 뭐라고 하시더라고. 전시에 작가를 초대해놓고 초대한 작가의 그림가지고 막 뭐라고 하시더라고.(웃음) 저도 그렇게 황 선생에 대한 첫인상이 매우 강했죠.(웃음)

이교준 그 당시 황현욱 선생이 학생의 작품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제가 늦은 나이에 복학해서 학교 실기실에 있었는데 누가 와서 휙 돌아보고 가고 그러더라고. 나는 그때 그 분이 누군지 잘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황현욱 선생이더라고요. 수화랑 디렉터로 있을 때 학교 실기실에서 학생들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도 많이 하고 괜찮은 친구들을 끄집어내기도 하셨지요. 그리고 당시 수화랑에서는 곽인식, 이우환, 스가 기시오 등의 전시를 열었죠. 당시 이우환 선생은 서울에서도 익히 알려진 작가는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명미 서울 메이저 화랑에서도 1990년대까지 이우환 선생의 작품을 안 샀어요. 나중에 1990년대 지나서 진화랑에서 일본을 오가면서 이우환 선생 판화작업을 사면서 불이 붙기 시작했고 그전에는 서울에서 홀대를 받으셨어요.

정병국 직접 이우환 선생에게 들어봐야 알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우환 선생에게 대구가 갖는 정서적인 면은 특별한 거 같아요. 서울은 이우환의 가치를 화랑에서 뜨고, 돈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서 알게 됐지만, 대구에 있던 황현욱 씨는 그전에 작가로서 이우환의 가치를 알고, 공감했던 거죠.

이명미 이우환의 가치를 알고 먼저 이우환 전시를 한 사람이 이강소 선생이었어요. 대구 대봉동에 리화랑이 있었는데 전시 한 서너 번하고 1년도 안돼 문 닫았죠.

이교준 맞습니다. 이강소 선생 부친이 소유하고 있던 신축 건물 1, 2층에 화랑을 꾸몄죠. 1979년 <대구현대미술제>를 분산 개최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하면서 화랑을 연 것으로로 압니다. 여하튼 수화랑에서는 서울에서도 개인전을 한 적이 없는 곽인식 작가 같은 분들의 전시를 일찍이 했었죠. 그 이후 이우환, 박석원, 이건용 등 많은 전시가 이루어졌죠. 1985년대 당시 스가 기시오 등 일본과 교류하기 시작했어요. 서울에서도 없던 일이죠. 당시 리플릿을 보면 한국과 일본의 교류 관점에 관해 황 선생이 써놓은 글이 있어요.

이준희 황 선생이 당시 남보다 앞선 시기에 현대미술에 관한 독자적인 시각을 확보하게 된 계기랄까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이교준 황 선생은 그전부터 철학 사상 이런 쪽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어요. 《사상계》 등 문학비평에 관한 서적을 즐겨보셨죠. 당시는 문학비평이 미술 쪽보다 관점이 확실하다고 황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이명미 황현욱이라는 인간이 즐겨먹던 음식이라든지 행동의 패턴을 보면 취향 자체가 군더더기가 없었어요. 옷 입는 감각도 아주 깔끔하고 전시 오프닝 때 상 차림도 굉장히 심플했어요. 물론 돈도 없었지만 그 자체가 간결하고 깔끔했어요. 서울에서도 현대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화랑이 1990년대 이후에 나오기 시작하는데 수화랑, 인공갤러리, 갤러리 댓(That) 등 황 선생과 관계있는 화랑을 보면 현대미술 전문 화랑을 지향했어요. 민중미술은 약간 복합적인 측면이 있는데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죠.

이교준 그 당시에 오프닝 상 차림을 보면 수입 주류가 유통되던 시기도 아닌데 미군 부대에서 구한 보드카에 하얀 무, 배추, 채소 썰어놓고 그게 끝이에요. 나중에 서울 인공갤러리 오픈 때 그렇게 하니까 서울사람들이 다 놀라더라고. 어디서 보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성향 자체가 그런거죠.

정병국 저는 황 선생의 디테일한 면을 접할 기회는 많이 없었습니다. 《사상계》는 우리나라 근대사에 접하는 책이라 민중미술하고 연관을 많이 짓는데 황 선생은 사상과 민중미술은 전혀 별개로 생각했습니다. 황 선생은 민중미술은 미술을 이용한 것이지, 미술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것은 본인의 지적 사유에 기반을 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준희 완전 자생적 모더니스트군요.

이명미 그렇지. 그게 맞아요. 그리고 황 선생님이 현대미술, 특히 대구지역 현대미술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1980년대 초에 《공간》에 쓴 글을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이교준 1985년에 수화랑을 그만두고, 그해에 갤러리 댓(That)을 바로 열었어요. 그리고 1986년에 대구 인공갤러리를 열고 백남준으로 오픈 전시를 했어요.

이준희 인공갤러리 이름은 어떻게 지은 건가요?

권오봉 인공갤러리 이름을 지을 때 제가 옆에 있었어요. 주변에 몇 명이 있었는데 황 선생이 잘 생각해보라고 하더라고. 그때 박현기 선생도 있었는데 박 선생이 그때 제안한 이름이 ‘컨테이너’였어요. 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를 잘 듣고 있다가 황 선생이 순간적으로 “‘인공’ 어때!” 하시더라고. 그런데 그때 ‘인공’이라는 단어 자체가 굉장히 거부감을 주더라고. 북한 국기를 인공기라고 하잖아요.(웃음) 그래서 거부감을 표시했는데 그래도 황 선생은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을 한 것 같더라고.

이교준 맞아요. 그때 우리가 ‘인공’이라고 하면 북한하고 연관되잖아요, 그랬더니, “그러면 뭐 어때”라고 하시면서 “모든 예술은 인공적인 거야”라고 말하면서 인공을 쓰시더라고. 人(사람인)에 工(만들공)자를 써서 인공이 되었죠.

권오봉 황 선생은 감성, 로맨틱한 거 싫어하시니까. 미술도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든, 인공이라는 이름을 생각하신 거 같아요.

이교준 당시는 컴퓨터가 없을 때여서 수화랑, 인공갤러리 로고타입도 직접 디자인했어요. 손수 식자 뜯어 붙여가며 본인이 직접 제작한 겁니다.

이준희 1986년에 대구 인공갤러리를 오픈하고 1988년에 서울에 인공갤러리를 오픈하셨어요.

이명미 처음 4~5년 정도는 서울과 대구 갤러리를 같이 운영했죠. 그때 대구 인공은 이교준 선생이 같이 하셨죠?

이교준 저는 관리를 맡아서 한 정도지 운영한 것은 아니고요. 대구 인공갤러리를 오픈한지 2년 만에 서울에 왜 오픈하셨는지 확실한 계기는 잘 모르겠어요.

정병국 제가 봤을 때, 황 선생은 대구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본인이 조금씩 갤러리스트가 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갤러리스트로서 자신의 꿈, 입지를 확장하고, 이 확장이라는 것은 공간 크기의 확장이 아닌 서울이라는 곳의 의미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윤형근 선생 등 도움으로 서울에 진출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서울 인공은 기초공사 할 때 제가 가봤어요. 모자 쓰고 까만 티셔츠 입고 담배 피면서 줄자 하나 들고 이리저리 혼자서 궁리하고 있는데, 내가 가니까 무척 반가워하더라고요.

이명미 인공갤러리는 당시 진짜 근사했어요. 최고로 근사했던 것 같아. 그 당시에 서울에 테이트모던 사람들이 왔었는데 서울시내 갤러리를 다 둘러보고 인공갤러리가 최고라고 했다는 소문이 일본 도쿄에까지 났었어요. 나중에 갤러리를 접고 커피숍 하면서는 벽에 그림 한 점도 안 걸었어요. 그림, 꼴도 보기 싫다고.(웃음)

이교준 아무튼 황 선생은 자기 주관과 입장이 너무 뚜렷하다보니 늘 주변 사람과 부딪쳤죠. 그 양반이 평소에 하시던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이 세상에 미술작가가 뭐 그렇게 많이 필요하냐! 좋은 작가 100명, 좋은 작품 100점만 있으면 세계 미술 다 이야기할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요.

권오봉 황 선생은 한국 작가 중에 아주 소수 몇 명만 좋아하시고 나머지 작가들한테는 작업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작업을 될 수 있으면 못하게 하셨어요. “아직도 모르겠냐?” 하시면서요.(웃음)

정병국 취재하시다 보면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들어서 아시겠죠.(웃음)

이준희 1988년부터 서울 인공갤러리에 집중하면서 대구 활동에 공백이 생기게 됐는데요. 그때 대구 작가들이 섭섭했겠어요?

권오봉 서울에 인공갤러리를 오픈하면서 황 선생 자신이 대구 인공갤러리에 집중할 수 없으니까 대구는 거의 관여하지 않고 이교준 선생에게 맡겼죠. 그렇다고 대구 작가들이 섭섭할 이유는 전혀 없었죠. 서울에 화랑이 있으니 오히려 희망으로 생각했어요.

이교준 대구 인공은 저에게 맡기고 갤러리 댓은 졸업한 후배들에게 너희가 직접 운영해보라고 맡기시고는 서울에만 집중하셨어요. 그래서 대구시대와 서울시대로 크게 나눌 수 있어요.

정병국 맞아요. 일종의 서울 진출이니까. 그리고 저희도 서울 인공에 자주 갔어요.

이명미 인공갤러리 말기에 시공갤러리도 생기고 신라갤러리도 생기면서 대구에서도 나름대로 갤러리들이 돌아갔죠.

이준희 작업을 하시던 황 선생이 본인은 더 이상 작업을 않고 작가를 발굴하고 전시를 하게 된 시점이 언제부터인가요?

이명미 제가 황현욱의 마지막 작품을 기억하는 게 <35/128전>에서 본 건대 송판을 바닥에 놓고 나무톱밥을 그 주위에 뿌려놨어요. 그걸 뿌려놓으니까 사람들 신발에 톱밥이 묻어서 화랑 밖에까지 옮겨지게 되었죠.

이교준 <대구현대미술제> 2회때인지 3회때인지, 제가 군대 있어서 직접 보지는 못하고 이야기만 들었는데, 흐르는 물속에 있는 돌을 끄집어내서 수성페인트로 글씨를 쓰고 다시 집어넣고, 이런 행위를 반복하는 작업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권오봉 두 분은 같이 작업하면서 만나서 그런 걸 기억하시지만, 저는 황 선생을 처음 만날 때부터 기획자였기 때문에 나중에 친해져서도 별의별 이야기 다해도 정작 본인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저는 그게 그분의 속성인가보다 생각했어요. 그래도 기억나는 건 서울 인공갤러리 시작할 무렵 김용익 선생 등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모여서 열띤 토론을 했던거죠.

이교준 그래요 만날 토론했어요. 밤에 술집에 모여서도 했고, 굳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했어요. 그럴 때마다 직접 뭘 써가지고 와서 토론을 했어요.

이준희 그러고 보면 황 선생은 작가 못지않게 당시 평론가나 이론가들에게도 불만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권오봉 그렇죠. 작가에게 불만이 많은 만큼 평론가에게도 불만이 많았어요. 독일에 있던 류병학 씨를 불러들이게 된 계기가 그거죠.

이교준 그래도 이일 선생은 존경하셨죠.

정병국 특히 이론에 대해서 한국이 약하다는 점에서 불만이 좀 있었어요. 윤형근, 이강소 같은 선생들에 대한 책을 잘 만들고 싶어 했어요.

이교준 평소에는 말수가 없는 사람인데 자기가 관심 갖고 호기심 가는 부분에서는 대단히 관심을 많이 가지셨어요. 저희가 스터디그룹 할 때 한번은 서울에서 작가 장경호 선생과 다른 분이 왔는데 그분들도 자기 분야에서는 입이 쎈 분들인데 그분들하고 밤새도록 토론하고 했죠. 우리가 그때 진짜 질렸지.

이준희 술이나 담배를 즐기셨나요?

이교준 초기엔 술도 많이 하셨는데 나중에는 뭐 별로….

권오봉 그래도 웬만한 사람보다는 많이 드셨죠.

이교준 특히 아주 독한 담배를 많이 피우셨죠.

이준희 서울 인공갤러리도 그렇고 대전 비비스페이스도 그렇고 건물 자체가 아주 심플하잖아요. 그런 특징 말고도, 최근 활성화된 미술시장 측면에서 볼 때, 화랑 주인으로서 황 선생은 어떤 분으로 기억될까요?

이명미 화랑 주인으로는 빵점이지. 아주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지금 미술시장에서 봤을 때는 원류나 마찬가지 같은 인물인데도 말입니다. 도널드 저드 개인전 할 때도 홍보를 제대로 하지 않았어요. 그냥 엽서만 보내고. 미술 기자들이 도널드 저드를 모르는 데도 홍보도 안하고 그랬죠.

권오봉 제가 생각할 때 황 선생은 갤러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예술가였던 분인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 자기가 생각할 때 웬만한 작가들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리처드 롱이나 도널드 저드 같은 작가만 눈에 들어오고, 한국 작가 중에는 윤형근, 이우환 정도의 작가를 좋아하는데, 그 작가들 전시만 할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다른 작가 전시도 하는데 속으로 부글부글 화가 나고…,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들어서 괜히 작가들한테 작업 하지 말라고 하고…. 저는 그분이 진짜 예술을 했다고 생각해요.

이교준 그러고 보니 황 선생이 ‘아닐 비(非)’자를 좋아했던 것 같네요. 첫 개인전 <非오브제>의 비도 아닐 비고, 대전에 비비스페이스도 ‘非非’니까요.

이명미 황 선생은 갤러리스트지만 안동의 유교적인 선비정신이 배어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쪽이 문기(文氣)가 강한 동네인데, 안동 선비의 마지막 세대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물질과 야합하지 않고 배가 고프더라도 때를 안 묻히겠다 그런 면에서 말이에요.

정병국 안동에 대한 긍지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지요.

권오봉 제 생각에는 대전에서 화랑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고, 나중에 안동에 화랑을 하고 싶어 하셨어요. 특히 안동에 이우환미술관을 짓고 싶어 하셨어요. 안동 가서 하려다가 그렇게 끝이 난 것이지요.

이준희 대전 비비스페이스 건물을 짓는 사이에 병을 알게 되신거죠?

이교 2001년 5월 윤형근 전으로 개관을 했는데 건물을 지을 때, 감독 한다고 텐트를 치고 생활하면서 건강을 많이 잃었죠. 공사 중이던 건물 옥상에 올라가다 갑자기 의식을 잃어 사다리에서 떨어져 다쳤어요. 그때 병원에서 간암 판정을 받고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요. 사실 그전에 황 선생이 대구에 있을 때 C형 간염으로 황달 증상을 앓은 적이 있는데 제대로 관리를 안하시다 보니 그렇게 됐지요. 술 드시면 찬송가를 부르시고, 어머니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데 농담처럼 “나는 예수님이 태어난 날 죽을 거야!” 그러셨는데 결국 12월 24일 돌아가셨죠.

정병국 가족 측은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다고 하셨는데, 황 선생이 생전에 화장해서 병산서원 앞 강물에 뿌려달라고 해서 평소에 고인이 뜻한 방식으로 장례를 치렀죠.

이준희 이제 좌담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해주시죠.

권오봉 황 선생은 평소에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자료를 남기는 사람도 아니고, 자기 사생활 얘기하는 사람도 아니고, 평소에 사진 찍으려고 카메라 들이대면 획 고개를 돌려버리고….

이명미 황현욱 씨가 대구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점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현재 세계미술시장에서 뜨고 있는 한국 단색화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황현욱 씨였습니다. 그리고 타협을 잘 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갤러리스트로서는 실패자였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경제관념으로만 화랑을 보지만 황현욱은 경제관념 이전에 예술로 봤던 사람입니다.

이교준 전 황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요즘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합니다.

정병국 일단 지금 같은 상태의 화랑 경영은 안하셨을 거예요. 안동에서 화랑을 하셨더라도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전시만 1년에 한 번 정도, 누가 오든 말든 신경 안 쓰고 하셨겠지요.

이교준 찾아보니까 전시 오프닝 뒷자리 같은 데에서 황 선생과 같이 술 마시던 사진이 좀 있더라고요. 이상하게 평소 말이 많지 않으셨는데도, 황 선생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였던 것 같아요.

권오봉 보스 기질이 있어요. 주위에 사람들이 저절로 잘 모였어요.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죠.

이명미 수화랑 디렉터였을 때 대구 문인들과도 친분이 두터웠어요. 그들하고 공동의 대화를 이끌어낼 만큼 지적인 분이셨죠.

정병국 기자와는 싸움을 많이 했어요.(웃음)

이명미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일간지 기자한테는 말도 안되는 소리 쓴다며, 아예 기사를 못 쓰게 했지요. 그만큼 사람이 좀 별났죠.

권오봉 약자한테 잘 대해줬고, 강자하고는 무조건 싸웠어.(웃음)

정병국 일종의 순혈주의가 있었죠.

이명미 그 사람, 꽃도 싫어했어요. 성격은 별난데 근본적으로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시들어가는 꽃을 옆에 두면, 신경이 쓰이고 마음을 안 쓸 수 없으니까 아예 옆에 두지를 않았던 거죠. 내가 기억하는 황현욱은 마음이 따뜻하고 선비정신이 남아있는 사람이었어요. ●

좌담일시 2016년 1월 8일 금요일
장소 대구 약전식당
참석자 이교준 작가, 이명미 작가, 권오봉 작가, 정병국 작가
진행·정리 이준희 편집장, 이슬비 기자

 

SPECIAL FEATURE 황현욱,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

황현욱의 인공갤러리와 나

김용익 | 작가, 前 경원대 교수

나는 인공갤러리에서 개인전을 네 번 했다. 1986년과 1994년에 대구 인공갤러리에서, 1989년과 1993년에 서울 인공갤러리에서, 그리고 1990년 서울 인공갤러리에서 4인전과 1994년 대구인공갤러리에서 3인전을 또 했으니 가히 “인공갤러리 작가”였다 하여도 무방하리라.
내가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제1회 청년작가전>에서 나의 출세작인 ‘천(布)’ 작품을 박스로 포장해버리는 작품을 발표하고 당시 화단의 주류였던 소위 ‘에꼴 드 서울’파와 거리를 두는 행보를 한 이래 1997년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기까지의 약 15~16년 동안 나의 주 활동무대는 인공갤러리였다는 것이 화력(畵歷)을 보니 저절로 밝혀진다. 어떤 연고로 나는 이렇게 인공갤러리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서울서 작가 활동을 하던 황현욱이 어느 때인지 대구로 내려가 화랑을 하나 맡아서 운영한다며 전시를 하나 기획하였으니 출품해달라는 연락을 해왔었다. 그 전시가 1982년 대구 수화랑의 <논리성 이후전>이다. 그 후 1983년에서 1985년 사이 언젠가 잘 기억이 안나는데 황현욱이 학교로 날 찾아왔었다. 대구서 자기가 직접 인공갤러리라는 공간을 오픈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개인전을 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대담한 제안을 하나 했으니 당시 내가 재직하고 있던 00전문대학 교수직을 조만간 정리하고 인공갤러리 전속작가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대구미술계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인 모 음식점 사장님의 후원을 연결시켜 주었다. 그 후원금만으로는 생활이 안 되었고 또 그것이 1년 만에 끊겨서 그 대담한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를 계기로 인공갤리에 대한 소속감을 굳게 가지게 되었다.
대구 인공갤러리도 그랬지만 서울 인공갤러리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모던한 흰 입방체로서의 화랑공간을 구현하고 있었고, 1988년 당시로서는 거의 무명이던 작가 이기봉을 개관 기념전 작가로 초대하는가 하면 도널드 저드, 리처드 롱 등 현대미술사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개인전을 잇달아 개최하는 등 당시 한국 화랑계에서는 독보적 존재였다. 작가라면 누구나 거기서 전시를 하고 싶어하는 공간이었는데 거기서 네 번이나 개인전을 한 나는 1981년 예의 ‘박스작업’ 이후 화단의 주류에서는 멀어진 듯 보였지만 그 누구도 무시 못할 인공갤러리의 후광을 톡톡히 입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황현욱은 전시기획의 독보적 존재감과 화랑 운영의 성공을 맞바꾼 감이 있다. 운영이 어려워서였는지 어쨌는지 전시가 점점 뜸해지더니 결국 그는 1996년 서울 인공갤러리를 말파(marfa)라는 카페로 바꾸었고 대구 인공갤러리도 문을 닫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이 정말 화랑 운영의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서울 화단의 동료 작가들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는지, 미술신(scene) 자체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는지, 이 셋이 조금씩 다 합쳐진 것 때문이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당시 나는 나대로 모더니즘 미술에 회의를 느껴 공공미술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고 미술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 전에 가까이 지내던 사람과의 관계를 끊음으로써 새로운 생각의 순도(純度)를 지키려 하는 습성대로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황현욱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한 심정을 나는 1997년 금호미술관 개인전 카탈로그 맨 뒤에 실린 <narrow based specialist의 노우트 2>라는 에세이에서 ‘결별’이란 제목으로 피력한 바 있다. 그 후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내 기억에 두 번 정도인데 2001년 대전에 비비스페이스(BIBI Space)라는 공간을 오픈할 때, 그리고 같은 해 그의 임종 일주일 전 병문안을 가서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날 알아보는 듯한 그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무 까불었었지…” 무슨 뜻이었을까? 나는 그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일단 그와 멀어진 내 마음은 그의 죽음도 그리 애틋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후 그와 함께했던 시절의 추억을 다 잊고 살아왔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종종 내 꿈에 나타나는 것이냐? 황현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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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15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우순옥 개인전 전시광경

1991년 3월15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우순옥 개인전 전시광경

황현욱과 철학자 박이문 선생, 그리고 나

우순옥 | 작가, 이화여대 교수

1990년 가을, 독일 유학 중 잠시 서울을 방문하던 차 서울에 근사한 갤러리 하나가 생겼다기에 찾아가 보았다. 현대미술 전문화랑이며 많은 작가가 선망하는 공간이라는 말을 듣곤 더욱 궁금했다. 옛 추억의 거리 동숭동 사잇길가 단정한 컨테이너 건물 외관이 우선 신선했고 ‘인공갤러리’라는 이름(디키의 ‘예술제도론’에 영향받아 지었다함) 또한 모던했다. 어떠한 장식이나 서술 없이 심플하게 기본 골조로만 이루어진 대담한 공간 감각에서 예술의 본질을 꿰뚫어보고자 하는 의도가 느껴졌고, 시원하게 높은 천장은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현대미술’을 위한 공간임을 실감케 했으며, 침묵의 성소같이 그 공간을 감싸고 있던 쿨하고 적막한 아우라는 작품마다 독특하고 강한 존재감을 안겨주었다. 때마침 갤러리 2층에서 힐끗 내려다보던 검은 양복 차림의 시니컬한 황현욱 선생 역시 어딘지 비밀스럽고 ‘인공’스럽게 그 장소와 잘 어울렸다.
그날 황현욱 선생과는 초면이었지만 이런저런 대화에서 철학자 박이문 선생님을 존경한다는 서로의 공통점을 알게 되자 어떤 신뢰와도 같은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난 며칠 뒤 독일로 다시 떠나면서 인공에 간단한 포트폴리오를 남겼고 그해 겨울 황현욱 선생은 뒤셀도르프로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내년 3월에 개인전 합시다. 저는 우선생의 전시에 기대가 큽니다. 박이문 선생님의 사상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서 더욱 그러하거니와 현재 우리 화단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마땅히 기대되는 것입니다…’ 아,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것은 무명작가 독일 유학생이던 나의 첫 개인전이었다. 전시기간 동안 무심한 듯 세심한 황현욱 선생의 배려에 감사했고 시대를 앞서가는 탁월한 갤러리스트의 순수한 열정과 집념에 놀랐으며 척박한 한국 현대미술 상황에서 느끼는 깊은 고뇌와 피로, 고독과 절망에 어떤 연민이 느껴졌다.
1993년 봄, 나는 7년 만에 일시적으로 귀국하였다.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고향 서울은 또 다른 낯선 땅이고 난 이방인 같았다. 적응하기 힘들어 혼자 파묻혀 지내던 시절이다. 그때마다 문득 인공갤러리를 찾아가면 황현욱 선생은 동병상련으로 맞아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이화여대 후문에서 만나 박이문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다. 박이문 선생님은 나의 대학시절 철학 스승이시고 황현욱 선생은 대구시절 그분의 책으로 현대미술을 스터디했다 한다. 그날 황현욱 선생은 은근한 존경심과 첫 만남의 설렘으로 이우환 선생님의 화집과 김용익 선생의 작품을 정중히 선물로 드렸고, 기뻐하시는 노학자의 순수한 열정과 투명한 정신에 감동했으며, 세상의 부닥침에 점점 희미해져가던 예술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오랜 꿈을 다시금 되새겼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황현욱 선생이 안타깝고 아쉽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에게 무수한 철학적 질문으로 예술과 삶의 진실성을 일깨워 주셨던, 하지만 지금은 노환으로 쓰러져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신 채 말없이 깊이 잠들어 계신 박이문 선생님의 슬픈 망각이 또한 너무 아득하고 허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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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갤러리가 있던 동숭동 골목의 과거

인공갤러리가 있던 동숭동 골목의 과거

내가 혜화동 키드였던 시절

고충환 | 미술비평

당시 나는 아이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닌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림을 그리다가 벽을 만났다고 생각했고, 실기가 아닌 이론을 통해서 그 벽을 넘거나 우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미술사학과, 예술학과, 미학과처럼 예술이론 관련 학과가 세분화돼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앞뒤 사정을 모르기도 했거니와, 그저 예술이론 관련 학과면 되었다. 그래서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에 응시를 했고, 덜컥 붙었다. 그래서 어떡하든 서울에서 기숙하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인공갤러리와의 인연은 그 필요가 만들어준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로 어떻게 인공갤러리에 기숙하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의 중재가 있었을 것이다.
인공갤러리와의 인연은 그렇다 치고, 황현욱 선생과의 인연은 대구 미술대학 시절로 소급된다(앞으로 적지 않은 사람의 이름이 거명될 것인데, 그중에는 이미 작고하신 분들도 있고, 그리고 대개는 쟁쟁한 분들이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편의상 선생으로 총칭하기로 한다). 당시 영남대학교 서양화과 출신을 중심으로 한 람이라는 그룹이 있었는데, 그 그룹의 일원으로 갤러리 댓에서 전시를 했었다. 갤러리 댓은 서울인공갤러리 이전에 황선생이 대구에 차린 작은 갤러리로서(물론 그 이전에 수화랑이라는, 보다 중요한 공간이 있었지만), 현대미술을 표방했고, 신진작가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공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치기가 형식을 범했던, 형식의 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자유분방한 분위기였던 것 같다. 그 전시에 똥 싸는 그림을 걸었는데, 세로로 긴 그림 위에 엉덩이를 까고 앉은 사람이 똥을 싸면 그 똥이 화면 아래쪽에 쌓이는 그림이었다. 세상을 향해 똥을 싸는 의식 있는 그림도 아니었고, 인격을 똥으로 환원하는 존재론적인 그림도 아니었다. 막연하게 좀 무겁고 꿀꿀한 그림들을 그렸었는데, 그 연장에서 나온 그림이었다. 당시 그 그림을 황선생도 보았을 것이고, 우스개를 자아냈었던 것 같다. 인연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인연 같지 않은 인연이 황선생의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서울 인공갤러리에 둥지를 틀었다. 추운 줄도 모르고 마냥 춥던 시절이었다. 공간은 1, 2층으로 구분돼 있었는데, 층고가 높은 1층이 갤러리 공간으로, 그리고 2층이 사무실공간으로 구분돼 있었다. 그 구분은 황선생 공간과 내 공간의 구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층의 황선생 공간은 출입금지구역까지는 아니더라도, 드문 호출이 아니라면 거의 드나들 일이 없는, 그래서 오히려 호기심을 자아냈던, 그런 공간이었다. 그렇다고 1층이 온전한 내 공간도 아니었다. 작품 사진을 찍거나 작품 설치를 하거나 작품 철수를 할 때에만 일시적으로 내 공간이었고, 정작 작품이 전시되는 대부분의 기간 내내 1층은 내 공간이 아니었다. 내 공간은 벽과 똑같은 흰색이 칠해진 문짝에 달린 손잡이가 아니라면 문이 있는지도 모를, 전시공간 구석에 있는 작은 문을 밀고 들어가면 있는, 창고였다. 그 창고에서 작품들과 뒤섞인 잡동사니들과 더불어 살았는데, 겨울이면 어김없이 그릇에 떠놓은 물이 얼어붙는, 그런 곳이었다. 그나마 세면대가 있어서 전시 오픈 때면 주방으로 임시변통되는, 그런 곳이었다.
여느 도시가 그렇듯 혜화동에도 바깥쪽과 안쪽(뒤쪽?)이 있다. 바깥쪽과 안쪽의 구분은 특히 낮보다는 밤에 더 극명해지는데, 바깥쪽이 거사를 치르는 곳이라면, 안쪽은 결산을 위한 곳이다. 밤에 인공갤러리는 결산하기에 딱 좋을, 그런 도심 속의 후미로 변신한다. 일어나면 하는, 하루 일과 중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간밤의 결산의 흔적을 일소하는 일이다. 인공갤러리에는 전면 주차장 옆으로 나 있는, 옆집 벽과 공간 사이에 나 있는, 바깥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그런 좁고 긴 사이공간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밤사이의 결산이 이루어진다. 아침에 청소할 때 보면 버려진 빈 지갑과 주민등록증, 그리고 때로 여자 팬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주차장 구석에 수도가 있었는데, 낮에는 황선생이 사용했지만, 밤에는 술꾼 아니면 싸움꾼 차지였다. 긴 호수를 연결해 마당(주차장)에 물을 뿌리곤 했던 수돗가에 박 터진 머리를 디밀고 피를 씻어내던,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누군가의 황망한 눈빛이 선연하다.
아마도 내가 꼭 필요한 이유였을 것이고, 실제로도 내가 한 가장 중요한 일과 중에 하나였다. 나는 인공갤러리의 지킴이였다. 당시 인공갤러리에는 엄청난 양의 전시 팸플릿이 배달돼 왔는데, 대부분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쓰레기통으로 건너가기 전에 팸플릿은 내 점검을 거쳤는데,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한 일 중 하나였다. 그렇게 나는 인공갤러리의 청소부였다. 맵시 있고 말이 없는, 겉보기와는 달리 혹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그렇게 웃음에 인색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 그런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주인을 모시는 기꺼운 지킴이였고 청소부였다.
이런 지킴이며 청소부와 함께 잔심부름과 같은 소소한 일 외에 내가 딱히 해야 할 일은 없었다. 특히 전시 오픈 때 내가 해야 할 일이 없다 싶으면 대개는 줄행랑을 쳤는데, 그렇게 동숭아트센터와 문화예술회관을 어슬렁거렸고, 갤러리 소나무와 바탕골(지금은 양평으로 이사 간)을 들락거렸다. 동숭아트센터에는 예술영화 전용관이 있어서 자주 찾았었는데, 사실은 영화를 보다가 잘 때가 더 많아서 지금은 뭘 봤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건물 내에 갤러리도 있었는데, 당시 그곳에서 심영철 선생의 네온설치작업을 본 기억이 난다. 빛을 내는 가시 면류관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종교적인 개념을 작업으로 승화한 것이다. 심영철 선생은 이후 인공갤러리에서도 전시를 했는데, 성경책을 쌓아 만든 피라미드로 형상화된 말씀의 집을 불을 뿜는 뿔을 가진 신성한 사슴이 지키는, 그런 설치작업이었다.
문화예술회관 뒤편에 갤러리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황금사과’ 아니면 ‘타라’와 같은 그룹전을 본 것 같고, 김찬동 선생도 그때 그곳에서 전시를 했다고 들었다. 갤러리 소나무는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 작가들(아틀리에 소나무 소속 작가들)이 국내거점으로 마련한 것이라고도 했고 아니라고도 했다. 여하튼 당시 건물 2층에 있는 전시장에서 이불 작가의 핑크 몬스터 행위작업을 본 기억이 난다. 일종의 성기괴물이라고 해야 할 거대한 봉제인형을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작가의 궤적을 따라 사람들이 자리를 피해주면서 같이 움직였던, 그런 인산인해였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는 작가가 아니었던 강형구 선생이 운영하는 나우갤러리가 있었고, 그곳도 자주 드나들었던 것 같다. 이후 강형구 선생 첫 전시에 전시 글을 쓰기도 했지만, 아마도 당시에는 서로 보고도 몰랐을 것이다.
다시 황선생 얘기로 돌아오면, 황선생은 원래 서라벌예대 출신의 작가였다. 황선생의 그림을 우연히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뉴욕색면화파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색면구성이었다. 대구 수화랑 시절 스터디를 이끌기도 했다고 하는데, 현대미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대개는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철학과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에 조예가 깊었고, 박이문 선생의 저작이 그 안내자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실제로 황선생과의 대화를 통해서라기보다는 꽤나 오랜 시간 모시면서 자연스레 드는 감이 그렇다는 말이다.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말을 삼갔고, 공적인 자리를 싫어했던 사람인만큼 미술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작업에 관한 한 편애가 심했는데, 자기가 생각하는 현대미술이 아니라면 미술로 쳐주지도 않았다. 작가가 너무 많다고도 했다. 공간을 탐낸 작가가 많았지만, 그렇게 탐낸 작가들 중 실제 전시로까지 성사된 경우는 드물었다. 한정된 작가군 내에서 움직였는데, 주로 앵포르멜 계열의 작가들, 단색파 화가들, 미니멀 계열의 작가들, 그리고 물성 위주의 조각가들과 어울렸다.

황현욱이 편애한 이우환과 윤형근
몇날며칠 전시 디스플레이를 했던, 장흥 토탈미술관에까지 가서 철판 위에 놓을 호박돌을 실어왔던 이우환 선생 전시, 홍대 앞 작업실을 방문해 작업을 실어왔던 윤형근 선생 전시(거칠한 막사발에 당신의 그림처럼 묽은 커피와 돌 설탕을 타서 내어주시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오리선생이라는 별명을 안겨준 특유의 무심한 필치로 그린 그림과 점토 덩어리를 되는대로 툭 던져놓은 것 같은 입체작업의 이강소 선생 전시, 사이 톰블리를 연상시키는 권오봉 선생 전시, 프랭크 스텔라의 셰이프트 캔버스가 입체로 화한 것 같은 김용익 선생 전시, 앵포르멜을 연상시키는 파워풀한 검은 그림을 내걸었던 제여란 선생 전시, 색면구성을 각각 평면으로 그리고 입체로도 변주해 보여준 장옥심 선생 전시, 침목 끝을 무슨 젓가락처럼 자른 틈새로 돌과 함께 소형 모니터를 끼워 넣은 박현기 선생 전시, <내일의 너> 시리즈를 그린 박영하 선생 전시, 조각으로는 김청정 선생과 김진영 선생 전시, 그리고 사진에 권부문 선생 전시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돌이켜보면 작가들 중 특히 윤형근 선생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편애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좀체 표를 안 내는 사람임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알 만한 사람들 전시에서도 따로 도록을 만들지는 않았는데, 대개는 간단한 엽서나 접지 형식의 리플릿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윤형근 선생은 예외였다. 사실상 전작을 수록한 도록을 구상했고, 당시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하드커버로 된 제법 두툼한 도록을 제작했다. 인쇄 색깔이 제대로 나왔는지 전전긍긍해하고 몇 번이고 수정하고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 일련의 전시들과 함께 당시 인공갤러리 전시로 치자면 단연 도널드 저드와 리처드 롱 전시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전시를 위해 두 작가 모두 직접 내한했는데, 특히 리처드 롱은 현장작업의 특성상 직접 오지 않으면 아예 전시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무의미한 경우에 해당한다. 당시 인공갤러리의 한쪽 벽면 전체를 일일이 손바닥으로 흙칠해 메우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전시 기간 내내 사람들은 거대한 흙벽과 마주해야 했다. 도널드 저드는 공항에서 작품이 문제가 된 사실이 당시 신문에도 실렸다. 예술작품이면 면세가 되고 공산품이면 세금을 물리는데, 당시 황선생이 직접 공항에까지 가서 전후사정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도널드 저드도 그렇고 리처드 롱도 마찬가지지만 이후 근 10년은 지난 연후에나 국제화랑에서 순차적으로 두 사람을 초대전시한 걸 보면 황선생이 선구적인 사람임을 알 수가 있겠다. 그 시차만큼 황선생이 시대를 앞질러간 혜안의 차이로 봐도 되겠다.
황선생 얘기를 해야 하는데, 결국 내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글을 청탁하면서 이준희 편집장이 아주 개인적인 경험과 추억에 기반을 둔 회고성격의 글을 주문하기도 했거니와, 사실 황선생과 공유할 만한 이렇다 할 추억도 별반 없는 편이다. 모르긴 해도 황선생 당신도 추억을 만들 만한, 그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추억은 세속적인 사람의 몫이다. 그렇게 새삼스레 추억을 곱씹게 해준 이준희 편집장이 고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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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영 딴판이었는지도 몰라”
– 막다른 공간 – HHW의 선택 가능성

제여란 | 화가

사실 갤러리 공간이란 어떤 가상성에 기반을 두고 설계된 것이다.
항상 머릿속의 궁리 끝에 선택되는 것보다
먼저 발생하는 이 가시성을 위해 경험을 채우는 것이다.
감각적 대상적 관계적 형식적 건축적 비감각적 추상적 취향적 선행 구상에 따라 선택되고 현실화된 그곳에서 항상 더 즉각적인 아이콘으로 기능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소설이나 시보다 경구나 말장난을 더 좋아한다.
개를 좋아한다.
사람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사람다움을 좋아하는 자신을
더 좋아한다.
모든 오류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을 좋아한다.
붉은 색을 좋아한다.
일찍 집을 나서는 것을 좋아한다.
약이나 병이 아닌 다른 일들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기념일보다 하루살이가 기념일이 되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점잖음보다 섣부른 말을 해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좋아한다.
섣부른 악수를 하는 것보다 도덕론자를 좋아한다.
땡땡이 무늬를 좋아한다.
평범한 기적보다는 개소리를 좋아한다.
지나치게 쉽게 믿는 것보다는 교활한 영리함을 좋아한다.
비축보다는 낭비를 좋아한다.
혼돈의 평화보다는 정리된 지옥을 좋아한다.
그림자가 몸보다 더 실재일 때가 많은 경우보다는
그림자도 실재도 없다는 장갑 같은 공간을 좋아한다.
햇빛의 볼륨보다 낙하산의 하강을 좋아한다.
내 눈이 불쌍해 보이므로 귀티 나는 눈매를 좋아한다.
책상 서랍보다는 책상 위를 좋아한다.
자유로운 0보다 1을 좋아한다.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보다 열거되지 않은 다른 많은 것을 좋아한다.
단단한 돌들의 시간보다 풀벌레의 시간을 좋아한다.
우울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발 구르는 것을 좋아한다.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착각의 행간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왼편과 오른편들의 반대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사과씨보다 과수원을 좋아한다.
질문보다는 답을 좋아한다. 감탄과 절망 둘 다 좋아한다.
하늘보다 망원렌즈 안으로 들어와 말린 지평선을 좋아한다.
명확한 것보다는 그럴싸한 것을 좋아한다.
구멍 난 장갑보다는 살을 에는 듯한 냉기를 좋아한다.
화가 ‘K’의 우울증적 불만보다는 그의 헛헛증을 좋아한다.
유아론적 자기 찬양보다 맹목적 충동에의 복종을 좋아한다.
고상한 안달보다는 발칙한 현기증을 좋아한다.
증류주(酒)를 좋아한다.
미래, 침묵, 무(無)보다 낭자한 웃음을 좋아한다.
어릿광대를 좋아하지만 어릿광대로 분장한 익살광대를 더 좋아한다.
짙은 색 코트를 즐겨 입던 그를 좋아하면서 거의 노출증에 가까운 경솔한 인간인 과묵한 엘리트였던 ‘G’를 좋아한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좋아한다. ‘H’의 드로잉보다 밧줄처럼 팽팽한 원고지 한 장을 좋아한다.
과묵하고 느슨한 영혼의 음모보다 치통을 좋아한다.
자신과 겉돌고 있는 무능과 무력감에 대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던 혐오감을 좋아한다.
정신 산란한 지식인의 회절된 머리보다 넉넉하고 호방한 남자의 어깨를 좋아한다.
숲과 안개 별들과 깨진 기와 벌레가 우글거리고 거미줄이 철마다 뒤엉키면서 양감을 더해가면서 꽃뱀이 소스라치던 안동의 병산서원을 좋아한다.
하여 길(교차로) 위에서 언제나 부분적이고 순간적이며 뒤따르면서 앞서 가다가 숨어버렸다. ●

SPECIAL ARTIST 정동석

11)  신미에서경진까지.Project 1991-2000 [80] 경. 갑술2월

<신미에서 경진까지 Project [80] 경. 갑술2월> 1991~2000

17)  서울묵상.Contemplation in city 21-10

<서울묵상 Contemplation in city 21-10> 2001

정동석은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그룹 ‘현실과 발언’ 창립멤버 가운데 유일한 사진작가다. 그는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일관되게 이 땅의 풍경에 주목해왔다. 작품의 궤적은 분단현상을 비판적으로 드러낸 초기작 <反-풍경> 연작을 시작으로 1990년대 <신미(辛未)에서 경진(庚辰)까지>와 <서울 묵상>(2000~2001)을 거쳐 <밤의 꿈>, <가득 빈>, <마음혁명>, <묘행(妙行)> 시리즈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왔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사진작가 정동석은 대면한 세계와 불화하는 현상들을 사진이란 매체를 통해 용해시킨다고 주장한다. 또한 작가 자신의 ‘내면’과 ‘사진’을 통일시키려는 사유를 적극 실천한다는 점에서 정독석이야말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사진작가임을 밝히고 있다.

삶의 말, 삶의 꿈, 삶의 꽃

김진하 미술비평, 나무아트 대표

정동석은 사진 ‘작가’다. 작가라는 말에 방점을 둔 것은 그가 사진으로 자신의 지향점을 증명하고 표현하는 사람임을 강조해서다. 사진을 찍는 게 작업이 아니라, 정동석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와 만나는 매체가 사진이고 작업이라는 뜻이다. 정동석은 외부의 대상에 그의 미적 감성이 감응해서 사진을 찍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내면으로부터 느끼고 사유한 주제를 증명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외부의 소재를 사진 속으로 수용한다. 외부 세계보다는 그 세계를 마주하고 느끼고 인식한 주체, 즉 정동석 본인에게 내포된 서사를 사진이란 매체로 증명하는 데 무게가 실려서 그렇다.
이럴 경우 사진 속의 피사체는 작가의 의도를 가시화하기 위해 빌려온 질료나 기호의 기능을한다. 또한 기계적 메커니즘의 결과인 사진적 현상이나 효과도, 정동석에게는 작업의 부수적인 요소가 된다. 우선적인 것은 역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이며,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사진을 풀어가는 과정과 방법, 그리고 사진이란 매체에 대한 그의 인식이나 논리 등이 주목해야 할 포인트가 된다. 그러면 대상성을 우선시하는 일반적 사진과는 다르게, 작가 내부세계에 무게를 두는 정동석이 사진작업을 통해서 추구하는 궁극적 주제가 무엇인지 그의 작업 궤적을 편년(編年)적으로 돌아보며 찾아보자.
1970년대 후반, 서른 즈음의 정동석은 10여 년간 제작한 사진을 모두 불태웠다. 정확한 노출에 정교한 재현, 빛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포착한 드라마틱한 시각효과, 스펙터클한 대상성, 실험적 암실 작업, 여타의 다큐 등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잘 찍은” 사진들이다. 20대 내내 명동의 외국잡지 서점 골목에서 거의 모든 현대사진을 탐독하고 섭렵하다가, 어느 날 자신의 작업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유명 사진가들의 작품은 결국 그들의 것일 뿐인데, “왜 여기서, 내가, 하필이면 남의 것을 열심히 보고 뒤따르려고 하는가?”란 생각이 들었다는 것. 그때까지 자신이 찍은 사진들이 그의 내부로부터 도출된 이야기나 관점이 아니라는 걸 자각한 것이다. 자신의 사진이 습관적으로 반복되고 유형화된 채로 교육받은 유명 사진가들의 스타일이나, 외국잡지에서 본 서구 사진가들의 아류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든 것이기도 하고. 내 것 또는 주체에 대한 성찰인 셈이었다. 그것은 곧 사진과 자신에 대한 통일된 인식의 바탕에서 독자적인 작업을 하겠다는 결심으로 연결된다. 패기와 도전과 의지가 교차하는, 이 젊은 반성이 그의 작업 궤적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지점이다.
몇 년 뒤인 1982년, 정동석은 ‘문화공보부’의 국정홍보물 게시판을 찍었다. <1982 in Seoul>이란 제목이 붙은 흑백사진 연작이다. 앞서 태워버린 사진들은 작품이 아니라 여겼으니, 이 사진이 그 스스로가 인정하는 처녀작인 셈이다. 화면에는 텅 빈 게시판만 있다. 각종 홍보물들이 항상 넘치도록 덧붙여지는 그곳인데, 상단의 강원도, 충청남도, 부산직할시… 등의 글씨만 무표정하게 붙어 있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런 말도 없는 공간, 정동석은 바로 그 ‘없음’을 찍은 것이다. 장면 자체로는 어떤 감각도 자극하지 않고 내용도 없이 무미건조하고 평범하다. 그러나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느끼고 자세히 보게끔 만든다. 게시물이 부재한 이 게시판에서 5공화국 초의 시대상이 반영되어서다. 1980년대 초 언론통폐합 직후부터 벌어진 일련의 상황적 단서들이 거기에 있다. 급속하게 보급된 컬러TV 방송, 프로야구 창설 및 중계, 영화제작 지원 등의 3S정책으로 자신들의 군복에 묻은 핏빛 행적을 가리려던 군사정권의 행태. 급조된 대중문화의 방만해진 오락성과는 정반대로 집행된 언론통폐합, 보도지침… 등. 정동석은 그 빈 게시판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소통 과정에서 관객 스스로가 그 사진에 해석학적 접근을 하게끔 만든 것이다. 그것은 무력에 의한 검열과, TV라는 컬러 표백제로 탈색시킨 언론 통제의 맨얼굴이자, 그런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을 견인하는 정치적 메타포였다.
보통 다큐사진의 직접적 시사성이나, 현란한 예술사진의 모던함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이 사진은 내러티브를 이끌어낸다. 객관적 다큐와 주관적 작가주의의 경계를 무화시키면서 비판성으로 작품의 리얼리티를 확보한 것이다. 정치적 슬로건이 거론되지 않으면서도 사진의 역할과 자신의 발언이 정묘하게 결합되어 드러난 것. 이는 사진을 찍기 전에 설정한 “내게 사진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찍는가?”, “어떤 목소리로?” 등과 같은, 자기 내부를 향한 회의를 통해서 확립된 사진에 대한 의식과 방법론이 그 바탕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만약 정동석이 당대성과 자기 사진의 방법론과 정체성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연관하지 않았다면, 볼품없이 비어 있는 이런 게시판을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또 기존에 없던 이런 사진 언어를 남기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 작품을 제작하고 난 다음 해인 1983년 정동석은 ‘현실과 발언’ 동인에 가입한다. 사진계가 아닌 미술계로 데뷔한 것. 당시로서는 자기 문법으로 자유롭게 활동하기에는 사진계보다 미술계가 더 적합했던 모양이다. 제도화된 1970년대 미술계의 관념적 행태를 극복하면서 미술과 삶의 간극을 좁히려던 ‘현실과 발언’ 그룹과, 기존 사진계의 사진 전반에 대한 암묵적 카르텔과 카테고리로부터 일탈을 꿈꾸던 리얼리스트 정동석이 결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정동석의 1980년대를 관통하는 주요작품인 <反-풍경>연작이 ‘현실과 발언’ 활동 시기에 제작되고 발표되었다.
<反-풍경 Anti Landscape, 1983~1989>은 분단의 현장을 찍은 일련의 작품 제목이다. 풍경을 찍으면서 그 사진이 풍경에 반하는 것이란 역설에는, 정동석의 풍경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 녹아 있다. 여기에서 정동석은 풍경을 ‘자연미’의 범주에서 이탈시키고 분단 상황의 표지로 빌려온다. 이름 그대로 <反-풍경>인 이 작품들에서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시각이 선호하는 멋지고·숭고하고·장엄한 스펙터클이나 서정성은 없다. 해변가 철책선·방호벽·초소·D.M.Z풍경 등 우리 일상의 이면으로 소외된 분단 현장의 건조한 풍경만 있다. 사진의 그곳은 덩그러니 초라하고 무덤덤하다. 풍경 특유의 자연을 찬양하는 원초적 관능미가 거세된 이 소박한 흑백사진들은 풍경에 대한 우리들의 습관적인 미적·관념적 아우라를 사살한다.
이 점에 대해 평론가 박찬경은 미첼(W.J.T Michell)의 ‘풍경에 대한 테제’를 참고하며, “정동석은 ‘그림 같은’ 풍경의 죽음을 찍는다.”고 썼다가, 더 나아가서 “정동석은 이미 죽어 있는 풍경을 찍는다.”1고 단언한다. 미첼에 따르자면, 풍경이란 장르는 그 프레임 내의 장면이 무엇이든 ‘자연미’나 ‘생동미’라는 미적 범주로 일반화되고 물화되어 그 자체가 이미 제도적 ‘미디어’가 된 지 오래다.
분단을 표지하는 전략적·인공적 설치물들이 우리 국토에 가한 폭력성은, 풍경을 풍경이 아닌 분단의 한 장면(정치, 역사성)이나 기호로 간단하게 전치시켰다. 실제 풍경으로서도, 또 우리에게 작용하는 인문적 소스(Source)로도 그것은 이미 풍경이 아닌 <反-풍경>의 상태였다. ‘사실’이 아니라, 풍경이란 장르적 프레임 속에서 박제된 ‘그림 같은’ 환영(Illusion)으로 말이다. 관능이 거세된 ‘풍경의 죽음’과 ‘죽어 있는 풍경’이 공고하게 물화된 이 지점을 정동석은 그의 사진에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대상을 사진 속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의 철저하게 인식적인 거리두기로, 분단에 접근하는 시각과 해석의 새로운 장르적 코드를 마련하는 방식으로 찍은 것이다. 그러자 죽어 있던 풍경이 분단현실에 대한 시각적 인식소(素)로 코드화되어 부활했다. 그래서 이 현장 사진들은 풍경에 대한 감각적 향유보다는 분단현실에 대한 사유의 단서를 관객에게 제공한다.
사진이란 그런 게 아닐까. 재현이나 묘사의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간과해버린 문제를 비판적으로 ‘재귀’시키는 가장 리얼한 양식이란 것. 그 재귀의 이미지들이 예술이자 기록으로 당대와 후대를 아우르는 시각언어로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 그래서 이런 탈(脫)스펙터클한 풍경을 작가는 왜 찍힌 풍경은 어째서 풍경(경관)에 反하며 해석학적 코드인 <反-풍경>의 인식적 문제로 기능을 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 이럴 때 사진은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보여지는 수동적 텍스트로부터, <작가-사진 속 이미지-사진 표면-관객> 사이를 진자처럼 넘나드는 정치적 기의로 콘텍스트화하며 능동적으로 소통 기능을 하게 된다.
이런 작업 프로세스로 분단을 환기시키면서, 정동석은 자신의 미적 기호(嗜好)도 이 사진 한쪽에 살포시 얹는다. 사진의 중성적 표면에 부드러운 시각적 감촉을 얻기 위해, 암실작업에서 사진의 색 계조를 최대한 부드럽게 단순화시키면서 인화2한 것이다. 화면으로 불러들인 분단 현장은 물론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인화된 사진의 질감은 고운 색상과 중·저채도의 부드러운 톤으로 덮여 있다. 이는 작가의 지극히 내밀하고도 순박한(?) 감성의 미적 표상이자, 다소간의 딱딱한 형식적 모색 뒤에서 자연스럽게 출몰하는 고운 마음결이라 하겠다.
1990년대 작품인 <辛未에서 庚辰까지 Project 1991~2000>, 그리고 2000년 서울로 입성하며 작업한 <서울 묵상 Contemplation in City, 2000~2001> 연작까지는 카메라의 재현적 메커니즘을 어느 정도 활용하는 방식을 유지했다. <신미에서 경진까지>는 강원도의 이름 없는 야산을 다니면서 채집한 풍경이다. 산·강·들판·농경지 등에 흐드러지며, 그 종과 장소와 공간의 경계 없이 함께 피고 어울리면서 생장하는 나무·잡초·채소·곡식들의 모습을 정밀하게 제시한 사진이다.3 그것은 구분·분단·갈라짐·갈등이 없는 식물성으로 만물의 상생과 생명력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 상징이자 알레고리들이다. <反-풍경>에서의 건조한 비판성에서, 민초적인 생명성의 끈질김과 더불어 그 아름다움에 대한 서정성으로의 변주이기도 하다.
뭇 생명이 서로 얽히면서 더불어 사는 이런 모습은, 이후 서울에서의 욕망과 꿈을 아우르는 정동석의 사진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생태론적/존재론적 성찰로 여전히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2002년 이후 서울의 밤풍경을 통해서 도시인의 세속적 욕망을 승화된 아름다움으로 기호화(記號化)한 작품들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로 연결되고 적용된다. 분단풍경(1980년대)/강원도풍경(1990년대)/서울풍경(2000년대)은 시공간·피사체·카메라·사진 찍기 방식·조형성·발성법 모두가 서로 다르지만, 이 모두를 가로지르는 작가의 사진에 대한 접근 태도와 의도는 모두 공통분모에 기반을 둔 것이다. 갈등과 대립과 분단을 넘어서려는 순연한 마음에 대한 사진적 접근이라는 분모 말이다.
서울로 귀경한 2000년, 정동석은 도시와 그 주변의 다소 쓸쓸한 풍광을 찍었다. <서울 묵상, 2000> 연작이다. 도심 미관을 위해 가지치기된 나무, 일상적 공간에서 소외된 잡초들, 그것을 가르는 바람결 등의 황량함을 아름답게 연역해낸 컬러 작품이다. 1990년대의 <辛未에서 庚辰까지>와 이후 2000년대 전체 테마인 <Dreamscape, 2002~2014> 사이에서, 과거의 사진적 형식과 장소성 등에서 새로운 조형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중간적 역할을 하는 경향으로 여겨진다. <Dreamscape>는 <밤의 꿈 Dreamscape, 2002~2005/가득 빈, Full Empty, 2006~2009/마음혁명, Mind Revolution, 2010~2013/ 묘행(妙行), 2015>등 일련의 연작을 총칭하는 장기적 프로젝트다. 서울의 밤을 통해서 사람들의 욕망과 그 결과로서의 꿈, 그리고 거기에 대한 작가 본인의 존재론적·사진적 통찰과 반응을 드러낸 작업이다.
여기서부터 정동석 사진의 조형적 양식은 과거의 스타일로부터 혁명적으로 이탈한다. 자신이 현재 발디디고 서 있는 곳(Standing point)의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동시대적 시선과 진부하지 않은 형식을 찾은 것이다.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세계에 대한 인식은 더 깊어지되, 사진 형식과 언어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복을 실행한 것이기도 했다. <反-풍경>을 통해서 이미 자기 스타일이 구축된 50대가 넘어선 중견작가로선 부담스러운 도전이자 모험이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의 것이라도, 이미 체계화된 것에 대해서는 끝없이 회의하고 거역하는 체질로부터 연유한, 그리고 삶과 사진의 관계성에 대한 성찰이 더욱 민감해진 결과라 하겠다. 화면의 피사체(네온, 불빛)는 있는 그대로 재현된 사실이다. 도시의 밤, 그리고 불빛. 그러나 화면에서 최소한의 이미지로 환원된 조형적(그러나 피사체 그대로인 사진적) 기표는, 실재보다 훨씬 광의의 해석이 가능한 기의로 작동한다. 시각적으로도 그것은 재현된 풍경이라기보다는 일견, 정신성을 추구하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나 몬드리안 유의 신조형주의 추상, 탈(脫)이미지와 중성구조의 미니멀 회화, 기하학적인 하드에지, 혹은 실험적 예술사진으로 보일 만큼 대상성과 감정과 표현을 철저하게 절제한 것이었다. 어둠으로 대상성을 해체하거나 제거해서 검게 덮어버린 화면엔 간단한 네온 불빛만이 기호처럼 명료하다. 그 최소화된 조형성으로 정동석은 서울의 삶에 대한 그의 인식적 내러티브를 상징화한 것이다.
<밤의 꿈>을 시작하면서 정동석은 2년가량 택시운전을 했다. 대략 2만여 명의 승객을 통해서 도시인들의 욕망과 현실과 꿈에 대해서 느끼고 인지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척박하고도 화려한 도시의 밤이, 그들의 삶을 고스란히 꿈으로 발화시키는 현장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선/악, 욕망/이성, 빈/부, 남/녀, 성인/청소년… 등 조건을 가리지 않고 모두 꿈이 있었다. 꿈은 현실과 욕망의 이질성이 통일되며 생산한 꽃이다. 척박하고 차가운 어둠 속의 불빛이자 진흙 속 연꽃 같은 것. 욕망을 꿈으로 치환하며 스스로 살아남은 도시의 삶, 그 생명은 모두 고귀하고 모두 아름답다. 아무도 윤리나 관습으로 간섭하지도 제어하지도 못하는 온전한 자기만의 권리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온존하고 평등하게 마음에 자리한다. 사람들은 그 빛나는 꿈에 이르기 위해 현재의 차가운 일상을 기꺼이 유보한다. 정동석이 서울의 밤 풍경을 모두 <Dreamscape, 2002~2015>라는 어휘로 명제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꿈은 정동석이 찍고자 하는 소재이자 궁극적으로 그가 현실에서 다다르려는 이데아이기도 하다. <밤의 꿈>에 이어 2006년부터의 <가득 빈> 연작에서는 스스로의 마음을, 다시 2011년부터의 <마음혁명>에서는 존재론적인 철학적 통찰을 담아낸다. 이어서 2014년 <묘행(妙行)> 연작으로 서울의 밤 전체 시리즈인 <Dreamscape>는 끝난다.
서울의 밤 시리즈는 점차적으로 도시와 사람들로부터 작가 자신의 안으로 이행되고 환원되는 시선을 담는다.
그 시선은 외부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자기의 내부로 옮겨간다. 렌즈가 향하는 대상성은 좀 더 추상적인 기표로 바뀌었다. 그만큼 내면으로의 간구를 향한 그의 사진 찍기는 소재의 소거라는 결과로 이행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서울의 밤이란 실제 현장을 찍은 것이지만, 엄밀하게는 대상과 작가의 ‘사이’에서 발현되고 생성된(아(我)도 비아(非我)도 아닌) 새로운 이미지를 포착한 것이라서 그렇다.

19)  꿈꾸는세상.Dreamscape  278-5

<꿈꾸는 세상 Dreamscape 278-5> 2007

거기엔 구상성보다는 작가의 내면적 기호가 더 두드러지게 자리한다. 특히 숨을 쉬고 카메라를 움직이면서 찍은 <마음혁명>에서는 밤의 꿈으로 피어난 현실, 거기에서 발현한 영성적 경건함을 통해 그와 세계가 통일하는 지점에서 움직이며 생성하고 생장하는 제3의 현상과 이미지가 진술된다. 여기에선, 과거 <反-풍경>에서 의도적으로 제거했던 아우라를 절제되고 긴장된 정신성으로 부활시킨다. 서울에서의 일상적 삶에 대한 내면적인 자기성찰을 통해서 다다른 최소한의 핵심 이미지를 얻으면서 발생한 긴장도 때문이다. 마치 중도(中道)의 수행처럼, 서울에서의 꿈에서 깨달음의 꽃을 얻으려는 간구처럼, 그 긴장은 사리처럼 엄격하게 절제된 결과다. 그 많은 일상과 서사들의 핵심으로 환원해서 구한 이미지는 그래서 아름답고 깊다. <Dreamscape>의 형식에 대한 설명은 예전에 필자가 기술했던 글의 부분적 인용으로 갈무리하자. 새로 써도 같은 내용이 될 듯해서다.
“눈으로 본 것을 넘어선 이 이미지들은 정동석의 마음의 결이자, 이성적 사유와 희구가 최소 단위로 환원된 결정체다. 도시의 욕망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며 정동석은 거기에 대한 인식을 극한까지 밀어 붙여 마침내 하나의 세계, 혹은 깨우침으로 주체와 대상이 서로 교차하며 합일하는 풍경을 형상화한 것이다. 도시의 밤을 의미소(意味素)로 하여, 사진 고유의 원근법적 재현을 거부한 평면적 조형성, 카메라 흔들어 찍기로 도출한 동적인 내면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그 결과 피사체의 사실적인 재현에서 벗어나면서 작가의 마음을 반영하는 또 다른 움직이는 형상이 나타난 것이다.”
“카메라를 흔드는 것은 곧 시차(視差)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바라보는 주체의 초점의 위치에 따라 대상이 다르게 인지됨으로 대상에 공고하게 각인된 주체의 시선이 흔들릴 때, 마음속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현상을 정동석은 카메라로 포착한 것이다. ‘카메라 드로잉’이라 명명할 수도 있는 그것은, 정동석과 삶의 현장인 도시의 밤 풍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제3의 현상에 대한 진술이다. 사진이자 그림이고 그림이자 사진이면서, 주체와 피사체 간의 수평적 만남으로 시선을 넘어서는 이미지가 발아하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세계를 마주하는 정동석의 이런 작가적 태도에 데리다(Derrida, Jacques)의 다음 문구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카메라 셔터가 감겼다 떠지며 사진이 찍히는 특성상 우리는 대상을 보고 우리가 본 것을 찍는다고 생각하지만, 카메라 셔터가 터지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 그 순간을 찍는 것 이라는. 여기서
‘보지 못한 순간’은 대상을 찍으려는 사진가의 욕망이, 그대로 피사체에 담기고 드러나는 권력적 시선의 작동방식을 해체시키는 그 시간이 아닐까.”
정동석의 카메라를 흔드는 행위는 외부의 사물을 보기만 하는 주체의 입장에서 벗어나서, 역으로 주체 자신의 내면을 대상화하는 것이다. 피사체의 묘사를 넘는 서사가 주체와 피사체란 분별을 넘어 서로 해방되면서 진화하는 사진 이미지는 그래서 싱싱하다. 카메라를 흔들며 정동석이 다다른 곳은 자기 호흡으로 만난, 그리고 자기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대상과 숨을 나누는 지점이다. ‘주체의 시선’이라는 사진의 독점적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서, 피사체인 도시인들의 삶의 의지와 작가의 마음을 담은 열린 공간의 창출이기도 하다.”4
최근 정동석은 서울의 낮 풍경을 사진에 담고 있다. 그동안 <Dreamscape>에서의, 의식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던 긴장에서 이완해서 비교적 유유자적하게 나무가 있는 풍경을 찍는다. 고희(古稀)가 다 되어가는 이제 소요유(逍遙遊)의 입장으로 뷰파인더를 대면하려는 것으로 느껴질 만큼 여유롭게 보인다.
근작에서의 나무는 유연한 형태들이다. 나무는 같은 뿌리에서 자라도 가지나 위치·생긴 모양·생장 속도·색깔·생사가 서로 다르다. 그래도 나무는 자기 자리에서 이런 모든 차이와 다름을 수렴하면서 굳게 서 있다. 바로 그런 나무의 넉넉하고 통일된 생명성을 마치 카메라를 처음 잡았던 40년 전처럼 재현적 방식으로 찍고 있는 것이다. 고수들에게서 느껴지는 허허실실 같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렌즈에선 나무의 자연스러운 생명력에 대한 서술과 함께 존재에 대한 문제의식도 여전히 묻어 나온다. 자신의 내면에서 서사적 인식으로 상상한 사진을 완성하고 난 뒤, 외부로 출사해서 원했던 피사체를 찾은 다음에라야 셔터를 누르는 습관으로 인해서 그런 듯하다. 몸에 축적된 발화(發話)방식은 바꾸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그래서 담담하고 “릴랙스하게” 진행한다는 <Deep Contemplation>으로 지칭되는 그의 현재 작업에서도, 여전히 어떤 독자성이 또 드러날지를 기대하게 된다. 개별적 인식과 총체적인 서사를 사진으로 연결하는 문법에서 정동석은 한국 현대사진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유한다. 그의 작업엔 늘 ‘反’이란 접두사가 붙어 있는 듯해서다. <反풍경> 뿐만 아니다. 반어(反語)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도 그렇고, 기존에 제도화된 사진 문법에의 반성(反省)도 그렇고, 부조리한 현실이나 구조에 반역(反逆)하는 것도 그렇다. 머무르거나 안주하지 않는 태도가 고집스러운 그만의 작업을 체계적으로 긴 시간 지속시켜 온 힘이고, 그것이 작가로서 그의 큰 저력이자 매력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그가 대면한 세계와 불화하는 현상들을 사진이란 매체를 통해서 용해시키며 그의 ‘내면’과 ‘사진’을 통일시키려는 작가적 사유와 실천이다. 사진으로 나와 너를 말하고, 사진으로 우리를 꿈꾸고, 사진으로 갈등을 넘어 관계의 꽃을 피우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을 동반해서 더 그렇다. 정동석이 진짜 사진 ‘작가’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 동 석 Chung Dongsuk
1948년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사진과에서 수학하고 《한국일보》기자를 지냈다.
1983년 현실과발언 동인전(관훈미술관)에 참여했고, 1992년부터 12회 개인전을 열었다. 작품집으로 《반풍경》(눈빛, 1999) 《밤의 꿈》(세상의 아침, 2004) 《나다》(글을읽다, 2008) 《마음혁명》(나무아트, 2011) 등이 있다.

1 박찬경 《정동석의 反-풍경/反-풍경》 도서출판 나다 2008
2 이런 사진표면의 질료적 분위기와 이미지의 감성적 통일을 위해 카메라도 라이카 M시리즈로 바꿨다. 더불어 암실에서 인화할 때 색상의 명도와 채도를 의도적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만들었다. 색상과 채도가 곱게 연결된 하늘이나 바다 같은 피사체들의 리드미컬한 연결은 작가의 감성적/미적 기호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3 이때는 좀 더 섬세하고 세밀하게 자연물들의 얽히고설킴을 포착하기 위해서 대형 목재바디인 ‘비스타’카메라와 ‘슈나이더’렌즈를 사용했다.
4 김진하 《사진으로 가는 ‘마음혁명의 길’ 정동석-MIND REVOLUTION》 나무아트 2012

ARTIST REVIEW 김지연

비교적 뒤늦게 사진공부를 시작한 김지연은 사진에서 이론과 깨달음을 얻고 실천하며 자신의 사상을 구현한다. 그는 점차 사라져가는 공동체의 가치와 옛것의 기억을 기록하고 있다. 개인 사진작업 외에 공간운영을 통한 전시기획과 아키비스트로서의 다재다능한 역량을 펼치고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최근 김지연이 주목하는 ‘낡은 방’을 가리켜 과거로의 회귀도, 이전 세대에 대한 애가도 아닌, 사람이 사물과 관계맺는 방식에 관한 ‘정직한 보고서’라고 정의 한다.

사물의 질서로서의 ‘낡은 방’

전가경 디자이너, 《세계의 아트디렉터 10 》 저자

2015년 10월 중순, 나는 김지연 사진가와의 1년여에 걸친 사전작업을 거쳐 사진 책 《빈방에 서다》를 완성했다. 출판사 ‘사월의 눈’에서 나온 다섯 번째 사진 책이자, 김지연 작가에겐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집’이다. 애초 사진 책에 김지연 사진가의 <낡은 방> 시리즈만 수록하고자 했다. 그간 발행된 여덟 권의 사진 책이 사진시리즈 명과 동일하게 갔듯이, 아홉 번째 사진 제목책도 의심의 여지없이 ‘낡은 방’이었으며, 출판사와 작가가 바라본 사진들 또한 일관되게 ‘낡은 방’이었다. 그러나 출간일자를 두 달여 남겨둔 8월 중순, 김지연은 새로운 사진꾸러미를 준비해 내 앞에 나타났다. 전주에서 서학동사진관을 운영하는 그는 인근 군산의 철거예정지역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철거 전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버려진 빈집들을 촬영한 것이다. 새로운 시리즈의 등장으로 기존의 사진책 계획안은 완벽하게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의 아홉번째 사진책은 《빈방에 서다》라는 제목과 함께 ‘낡은 방’과 ‘빈방’의 교차편집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2012년 발표된 김지연의 ‘낡은 방’은 2015년이라는 시간과 테이크아웃드로잉이라는 전시공간 속으로 새롭게 편입되었고, 그의 사진은 무거운 은유가 되었다.
애당초 테이크아웃드로잉 한남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김지연의 개인전은 테이크아웃드로잉의 건물주 싸이와의 법적 분쟁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보다 안전한 테이크아웃드로잉 이태원점으로 ‘망명’하여 전시가 열린 것이다. 김지연은 전시와 책을 준비하는 내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강제집행이 이뤄진 테이크아웃드로잉은 어느새 국내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이 되어버렸고, 그의 전시 또한 불안한 약속이 될 수 있는 운명이었다. 공간을 중심에 둔 세입자와 임대인간의 팽팽한 긴장은 ‘땅’에 대한 다른 해석이 낳은 상처였다. 공간이 곧 자본인 임대인에게 공간에 축적된 삶은 언제든지 죽음의 문 앞으로 던져질 수 있는 헌신짝이었다. 테이크아웃드로잉의 그런 투쟁 속에서 김지연의 군산 철거지역 화면들이 전시되었다. 전라북도 군산과 서울 한남동의 테이크아웃드로잉은 어느새 박탈당하는 삶의 상징으로서 운명의 공동체가 되었다. 김지연의 군산 사진은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쉬어가는 목소리를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는 사진적 목소리였다. 전시공간의 절박한 상황은 김지연의 사진을 재난에 대한 은유로 탈바꿈시켰다. 그것은 그 상황에서는 분명 빛나는 은유였다. 그런데 손택은 “은유는 오도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빈방에 서다> 60×80cm(각) 2015 군산지역에 남아있는 오래된 옛 집의 외관과 내부를 촬영한 작품이다

<빈방에 서다> 60×80cm(각) 2015 군산지역에 남아있는 오래된 옛 집의 외관과 내부를 촬영한 작품이다

의미의 무덤
“내 마음을 끄는 건 항상 그런 회의주의를 표현하면서 은유를 넘어 깨끗하고 투명한 무언가로 나아가는 담론이에요.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0도의 글쓰기죠.” 손택은 1970년대에 조너선 콧과의 대화에서 “질병은 저주다”와 같은 은유를 가리키며 이를 사유의 붕괴에 빗대었다. 사진은 명징한 오브제들의 세계다. 객관적 실체라는 ‘기능적 역할’로서 사진은 실존했던 대상을 찍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에 사진은 여전히 우리가 보는 사물들의 뚜렷한 윤곽이 존재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진이 그리는 윤곽을 따라 사진에 담긴 대상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그 윤곽으로 인해 그려진 사물이나 대상이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각자 안에 저장된 지식을 불러내어 해석의 낚시망을 던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조형적 각론 이전에 해석의 총평을 서두르진 않았던가.
사회적 발언의 매체로서 사진은 당연히 존재한다. 다만, 김지연의 사진 앞에는 이미 고안된 어떤 결론이 묵직하게 서있는 느낌이다. 이미 고정된 어떤 해석의 틀이 서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사진들은 윤곽선들을 아주 명징하게 드러낸다. 포착된 대상은 “나는 여기 있음”을 알몸으로 드러낸다. 캐논 EOS 마크투로 기록된 윤곽선이 대상의 가시성을 드러내는 구별 기준이라면, 우리는 그 윤곽을 따라 대상에 침잠해 볼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반짝임을 보자. 더 잘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감수성을 회복하자”라는 손택의 표현대로.
김지연의 사진들은 현재의 완벽한 ‘재현(represenation)‘이다. 여기서 말하는 재현이란 기술적으로 똑같이 복사한다는 뜻이다. 그는 여전히 우리의 현대적 삶의 테두리에 겹겹이 달라 붙거나 간신히 걸려 있을 넝마를 찍는다. 시간의 유속에서 기능을 박탈당한 건물 혹은 장소로서의 넝마이다. ‘고물’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질 만도 한데 김지연이 찍는 ‘넝마’는 견고하게 땅에 붙어 있다. 그런데 바래고, 낡은 대상의 면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과거를 들추도록 부추긴다. 초기작인 ‘정미소’ 시리즈부터 ‘나는 이발소에 간다’, ‘근대화상회’ 등이 그렇다. 그가 기록하는 대상들의 일관된 ‘조형적’ 특질 때문인지 그의 사진에 대한 해석은 과거를 향한다.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기념비적인 존재로서, 잃어버리는 공동체의 상징으로서 의미를 부여받으며 ‘근대화에 대한 반성적 사유’ 혹은 ‘노스탤지어’로 양분되어 소비된다. 물론 이것은 사진의 운명이기도 하다. “카메라라는 기계적 장치는 생생한 기억을 간직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사진은 살아온 삶을 기억하게 해주는 기념물인 것이다.”라고 존 버거는 말했고, 이말은 사진과 관련된 ‘진부한 진리’가 되었다. 특히, 과거에 익숙한 것이 포착되어 사진으로 환기되면, 우리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은 발견에서 오는 쾌락을 느낀다. 그런데 온전히 사진적인 쾌락은 있을 수 없는 것인가. 보는 이의 감성적 쾌락이 아닌, 사진 그 본연으로서의 쾌락 말이다.

장터국수 3,000원.2012

<장터국수 3000원>(2012)

백양국수1단5,000원.2014

<백양국수 1단 5000원>(2012)

계열체로서의 미적 성취
나에게 김지연의 ‘낡은 방’은 사물의 질서다. 한 장, 한 장의 사진에서는 찬란한 사물의 질서가 펼쳐진다. 그것은 버네큘러 감수성을 담은 찬란한 인테리어이기도 하다. 요강, 물파스, 전기장판, 곰팡이, 에프킬라, 파리채, 유선전화기, 카네이션, 꽃무늬, 벽시계, 농협달력, 플라스틱 옷걸이, 보일러, 벽거울, 연분홍 수건, 담요, 약봉투, 부채, 두루말이 휴지, 재떨이, 홈키파, 십자가, 빨래집게, 라디오, 전기밥솥, 먼지떨이, 맨소래담, 양은 주전자, 자개장, 리모컨, 브라운관 TV, 플라스틱 꽃무늬 휴지통, 땅콩 캬라멜, 2단 서랍장 등.
사물을 하나하나 뜯어 보고 있노라면 주인의 삶의 방식과 대략의 나이도 가늠하게 된다. 친구들과 캬라멜을 나눠 먹을 동네 할머니들이 떠오르는가 하면, 구석에 놓인 밥솥에서 플라스틱 하얀 주걱으로 밥을 한가득 퍼서 밥상기 앞에 앉아 소박한 반찬으로 하루의 끼니를 해결하는 독거노인도 어렴풋이 그려진다. 파리는 연신 음식의 냄새를 쫓으며 날아다닐테고, 그때마다 분사방식의 홈키파나 날렵한 파리채의 내리치기가 성가신 소음을 단번에 잠재울테다. 그 흔한 스마트폰이 보이지 않는 이 방들에서 달력과 벽시계는 여전히 병렬적일 수 있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상의 증명이기도 한다. 난잡해 보이지만 각각의 사물은 오랜 시간 형성되어온 삶의 패턴, 그러니까 삶의 질서를 대변한다. 그리고 이 질서의 한가운데 사진들이 있다.
돌사진, 결혼식 사진, 회갑 사진 등이 나열되어 있다. 전통 한옥구조에서 흔히 보던 현판은 가옥이 변하면서 어느새 사진액자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사진들은 우리가 평소 응시하는 높이에서 조금 더 높은 벽 그곳에 자리해 있다. 손안 스마트폰에서 보고 유통되는 ‘젊은’ 사진과 달리 ‘낡은 방’의 ‘늙은’ 사진들은 숭배의 대상이 되어 조금 높이 존재한다. ‘낡은 방’은 과거로의 회귀도, 이전 세대에 대한 애가도 아닌, 사람이 사물과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한 정직한 보고서이다. 동시에 ‘낡은 방’은 각 방에 진열된 사진들을 매개로 한 삶의 기념물로서의 사진 기능에 대한 환기이다.
존 버거가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을 본 방식이란 유물론적이었다. 그는 잔더의 인물사진에서 신사복에 집중했고, 신사복의 생산 배경과 그 사회적 표상을 짚었다. 아마도 김지연의 사진들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태도라면 이렇듯 버거가 잔더의 사진에 취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사진이 기록의 기능을 할 때, 그 기능에 순응하여 버티는 것이다. 해석의 그물망은 잠시 놓고서. 이는 관념론적이고 개념적인 현대사진에서 사진아카이브연구소의 이경민이 시도했듯이 아키비스트로서의 김지연을 재배치하는 작업일 수도 있다.
모든 사물이란 특유의 임무를 갖고서 태어난다. 사물의 배경엔 사물의 생산자가 존재한다. 각 사물엔 사물을 사용하는 일종의 사용매뉴얼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기능 때문에 사물을 구매한다. 그렇게 사물과 한 사람과의 결속관계를 맺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물의 기능은 본연의 기능에서 멀어진다. 아마도 가장 기초적인 기능은 남아 있겠지만, 시간은 사물에 다른 이야기를 풍성하게 삽입한다. 사물의 다른 용도가 마련된다. 사물은 일차적, 보편적 기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화자로서 독립적이 된다. ‘낡은 방’은 그러한 사물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벽면에 일사불란하게 배치되어 있거나 방 여기저기 무심하게 놓인 사물들은 주인공과 장기계약을 맺은 모습이다. 우리는 사람이 없는 방에서 사물들을 통해서 사람의 모습을 대략 떠올릴 수 있고, 사람의 모습에선 그의 취향을 읽어낸다. 사물과 취향, 그 명징한 관계맺기가 ‘낡은 방’에 포착된 것이다. 그래서 ‘낡은 방’은 사물의 유형학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근대적 시간관에 숨어있는 ‘주체’의 존재를 거부했다. 그런데 사진은 촬영과 인화라는 시간적 공백 때문에 해석의 주체가 개입하기 쉬운 매체다. 하지만 “삶에서는 플래시 조명을 받아 영원히 고정된 세세한 디테일들이 낱낱이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사진에서는 그렇다”란 손택의 말처럼 우리는 그 순간 고정된 세세한 디테일을 일단 좀 더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계열체의 차이와 반복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철저하게 형식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김지연의 사진은 다시 스캐닝될 수 있다. 설사 그 태도가 군산의 ‘빈방’ 사진들을 조형적으로 예쁜 화면으로만 바라보게 만든다고 한들 포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조형 또한 김지연 사진을 이루는-아마도 가장 핵심적인-구성물이기 때문이다. ●

2012년 류가헌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광경

2012년 류가헌에서 열린 개인전 <낡은방> 전시광경

김 지 연 Kim Jeeyoun
1948년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를 수료하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과를 졸업했다. 2002년 갤러리룩스에서 첫 개인전 <정미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9회 개인전을 열었다. 사진집 《정미소》 《나는 이발소에 간다》 《우리 동네 이장님은 출근중》 《진안골 졸업사진첩》 《근대화상회》 《용담위로 나는 새》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 《빈방에 서다》를 냈다. 진안 계남정미소 공동체박물관과 전주 서학동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