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그녀들은 최선을 다했다
박영숙 사진전 <두고 왔을 리가 없다>
여성의 초상은 종종 어떤 ‘대상’으로 대체된다. 1930년대 도로시아 랭의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중 가장 유명한 <이주민 어머니>는 대공황 속에서 갈 곳 잃은 농민들의 처연한 상황을 극적으로 드러냈고, 애니 레보비츠가 찍은 <롤링스톤지> 표지 속 존 레논의 키스를 받는 오노 요코는 한 예술가의 영원한 뮤즈 그 자체를 보여줬다. 여성 포트레이트 사진의 역사와 특징을 일일히 나열하지 않더라도 박영숙 작가가 1981년에 찍었다는 인물들을 본다면, 뭔가 조금은 다른 점을 눈치챌 수 있을지 모르겠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연인, 누군가의 엄마, 어떤 집안의 며느리가 아닌, 자신의 직함을 달고 있는 여성들이 카메라 앞에 서 있다. “내가 난데, 무슨 수식어가 필요하지?” 30년도 더 된 사진 속, 40세의 그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by SOJIN LEE
39살, 문득 돌아본 삶의 기로에서
전시의 시작점에 쓰여진 작가 노트에서 박영숙 작가는 36명의 포트레이트를 찍게 된 연유를 간략히 밝혔다. “1979년 여름, 나는 인물 사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39살의 나는 유방암이라는 판정에 두 다리가 휘청거려 주저앉을 것 같았다. 이 작업은 마흔이라는 나이 앞에서 지난 39년을 뒤돌아 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난 뭔가 그럴듯한,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내가 되려고 그간 달려왔던 것이었다. 그런 나 자신에게 ‘너도 별 것 아니구나’ 싶었다… 내 삶이 여기 까지 였구나 싶어 슬펐다. ‘철없이 꿈만 많던 내가 벌써 마흔이라니’하며 나이 마흔의 나를 처음 만났던 것 같다. 내 주변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뭔가 꿈을 이루어 누구누구라는 수식어가 붙여진 인물들이 되어 있었다.”
무사히 퇴원 수속을 밟은 박영숙은 누워 있는 동안에도 오락가락 떠올랐던 친구들을 찍기 시작했다. 그가 부러웠던 친구들은 시인, 소설가, 작곡가, 성악가, 연극배우 등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길을 걷던 이들이었다. 작품 제목도 ‘최욱경, 화가’ 식으로 이름과 직업만 밝혀 놓았다. 심플하다. 화가는 화가대로 작업실에서, 농구선수는 선수대로 코트장에서 포즈를 취했을 뿐 그 이상의 과장이나 수사는 없다. 오직 찍는 사람의 지긋한 응시만 있을 뿐. 인물들이 이토록 자연스럽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편한 친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영숙은 ‘그들을 기록하는 일이 내 의무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덕분에 2018년의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1981년에 이런 멋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변화무쌍한 세월을 살아낸 언니들의 이야기
오늘날의 멋진 언니들은 어디 있을까. 20층에서 열리는 <36인의 포트레이트>를 보고 나서 19층으로 내려가면, 전시의 2막이 펼쳐진다. 박영숙은 자신보다 연배 높은 80~90대의 여성 7명의 삶을 경청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들이 살아온 세월 안에는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인생 속 지팡이가 있지 않을까. 극단장 이병복, 판소리 명창 최승희, 故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화가이자 패션디자이너인 김비함, 기업인의 아내 박경애, 안동할매청국장집을 운영하는 이상주, 갤러리 대표 이은주가 그 주인공으로 각각 마련된 7개의 방마다 사진과 인터뷰 영상이 설치되어 있다. 그들의 인생이 연극 무대가 된 듯 각 방을 나누는 파티션마다 화려한 벨벳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박영숙은 그들의 공간을 찾아가 조곤조곤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었다. 처음에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세월은 어느 순간 속사포처럼 쏟아진다. 삶 속에서 맺은 가족과의 관계, 자신의 길을 걷게 된 계기, 누군가와의 인연 그리고 한맺힌 사연이 그들의 육성에 의해 전해지는 경험은 특별하다. 인터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보통 20세기 초반생으로,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몸소 겪은 세대다. 여성이라서 했던 일들, 여성이라서 하지 말하야 했던 일들의 선택지 속에서 자신이 믿는 것은 굳게 지켜온 여성들이며 또 그럼에도 두고 온 것들, 못한 일들에 대한 미련을 툭 던져 놓을 수 있는 어른들이기도 하다. 7명 모두 다 다른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공통점은 하나 있다. 이 변화무쌍한 세월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 찬란한 삶의 기쁨도 세월을 타면 이별이라는 종착지에 달한다. 언니들의 삶은 그런 인생을 사는 우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묵직한 위로다. M.A
가치 개념이 많이 바뀌어 가는 변화무쌍한 세월들을 다 감당해 내었다. 그녀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그녀들의 삶은 매우 찬란했고, 현란했다. 그래서 오늘 여기 이곳에 서있을 수 있다.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고, 주어진 소명을 다 감당하고, 모두 극복하였기에 여기에 서있는 것이 감동이다. 같은 시대를 서로 다른 형편으로 서로 다르게 살아낸 그녀들의 삶이 그래서 소중하다. 그렇게 일곱 명의 여인들이 모여 서로 어우러지니 서로가 빛난다.
-박영숙 작가 노트 중-
* 박영숙은 1975년 사진 작업으로 참여하게 된 단체전을 시작으로 다양한 전시에 참여하였고, 여성미술연구회에 가입해 사진가로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왔다. 또한 1997년에는 여성작가협회를 발족하기도 했다. 이후〈마녀, 〈우리 봇물을 트자〉그리고〈미친년 프로젝트〉등을 통해 그동안 흔히 다루어지지 않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사진으로 꾸준히 작업해왔다.
박영숙 사진전
<두고 왔을 리가 없다>
2017년 12월 16일 ~ 2018년 2월 17일
한미사진미술관 바로가기
*전시의 주인공 중 한 분인 이병복 선생님이 작년 연말에 소천하셨다. 1세대 연극 무대미술가로 극단 자유를 이끌어온 연극계의 개척가 한 분의 인생을 깊이 추모한다.
Caption
이병복, 극단 자유 대표 ⓒ박영숙 그 외 전시 전경
이소진 (sojin.chloe.lee@gmail.com)
사진 월간미술 미디어콘텐츠,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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