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혈 독자

contents 2014.2. 열혈 독자
신도들과 함께 보는 《월간미술》

원욱스님
반야사 주지

이번 호 ‘열혈 독자’ 코너를 위해 만난 원욱스님은 최근 다녀온 일본 이야기로 취재일행을 맞이했다. 1월호 본지에 실린 히로시 스기모토의 전시를 일본에서 보게 되서 반가웠다했다. 그러면서 바쁜 일정으로 아직 이번 호를 다 읽지 못했다며 미안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맛과 향이 은은한 뽕잎차(茶)를 함께 마시며 몇 마디가 오고가자 이내 여유를 되찾았다. 36년 전,
속세 나이로 20세에 출가한 원욱스님은 현재 서울 목동에 자리 잡은 반야사의 주지다. 13년 전 이곳에 터를 잡은 반야사는 비구사찰(比丘寺刹)로 조계종에 속해 있다. 원욱스님은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누군가 고향을 물으면 ‘박수근의 고향 양구’라고 소개한다고. “아버지께서 그림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특히 김환기 작품을 무척 좋아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시와 관련한 도록과 사진 등 자료를 구해서 보여주시곤 했어요. 또한 아버님지와 서울로 나들이를 가면 덕수궁미술관을 종종 들르곤 했지요.” 출가 후, 불교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 관심은 미술 전반으로 확대됐다. “불교미술이 융성한 고려시대의 불화는 사실 몽골의 침략으로 피폐해졌을 때도 제작됐어요. 그러니깐 당시 그려진 불화는 고려인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셈이지요.” 이렇게 미술은 시대의 역사는 물론 정서까지 담는다. 스님은 그러한 불교미술을 바라보는 당대 속세인의 시선이 늘 궁금했다면서 미술에 대해 깊게 관심을 기울인 이유를 설명했다. 원욱스님의 이러한 미술 애호는 사찰 곳곳에서도 발견됐다. 인터뷰가 진행된 접견실에는 현대미술풍의 탱화가 걸려있고, 사찰의 계단벽까지 작품으로 빼곡했다. “지금까지 모은 작품이 약 30여 점 됩니다. 마치 전시회를 열 듯 작품을 바꿔가면서 선보이고 있어요. 때로는 신도가 제작한 작업을 걸기도 합니다.”
본지를 통해 우리 근대 서양화의 흐름을 살펴보고 싶다는 주문을 한 원욱스님은 본지를 소장하기보다 읽고 싶은 이에게 기꺼이 나눠준다고. 예술로 인한 감흥은 나누면 배가 되기 때문이다. 부디 원욱스님의 미술을 통한 포교활동
(?)에 본지가 자그마한 힘이 되길.

황석권 수석기자
일상의 마시멜로우

김갑영
주부

한 달에 한 번 독자 김갑영은 마법에 빠진다.《 월간미술》을 펼치는 순간 누군가의 아내로, 어머니로, 며느리로 살던 그녀는 온전히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녀는 “미술작품을 보고, 미술잡지를 읽는 시간은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미술을 만나는 동안 모든 것에서 벗어나 힐링의 시간을 갖는다.
《 월간미술》을 구독한 지 벌써 7년째. 미술에 관심을 키워가며 미술잡지를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자 했던 그녀는 한 아트페어의 미디어부스에서 본지와 첫연을 맺었다. 이후 매년 자신의 관심사를 기억하고 그에 해당하는 전시 티켓이나 도록을 챙겨주던 담당직원의 배려에 지금까지 정기구독을 이어왔다. 구독하면서 분명 아쉬운 점도 있었을터. 김 씨는 전문잡지다보니 지면의 글이 난해한 면이 있다고 말하며 “폭넓은 문화 전반의 기사도 간간이 볼 수 있으면 여유 있는 구성이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말했다. 더불어 한국 미술계의 새로운 얼굴과 해외미술의 소식을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반면《 월간미술》이 현대미술 뿐 아니라 고미술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보여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녀는 예술의전당에서 진행하는 전시장 투어 프로그램에 8년 가까이 참여하고 있다. 매달 한 번씩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를 관람하다보니 미술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생겨 문화센터 미술 관련 강의도 찾아듣지만 취미 이상
전문가이하 커리큘럼으로 짜인 교육기관이 드물다며 아쉬워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10여 년간 대학에서 생물학을 가르친 경험이 자연히 미술 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듯 하다. 그녀는 강의 당시,《 미켈란젤로미술의 비밀》이란
책을 접하고 바티칸 성당 천장화에 나타난 군상과 인체해부를 접목한 교습으로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했다.
이제 그녀는 가정주부로서 기업인 대상 일색인 대학 산하 문화강좌나 전문가 양성을 위한 대학원이 아닌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꼼꼼한 성격을 살려 문화재복원을 배워볼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며 수줍게 미소 짓는 그녀의 입
가에서 행복함이 느껴졌다. 그녀에게 미술은 분명 힐링 그 이상이다.

임승현 기자

모니터 광장

contents 2014.2. 모니터 광장
문화재 환수-뜨거움과 차가움으로
몇 년 전, 대한민국 국보 1호 숭례문이 한 취객의 방화에 맥없이 훼손되었다. 온 국민의 가슴을 아리게 했던 그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던 그 일이 또다시 일어나고야 말았다. 사리사욕으로 복원된 불완전한 국보 숭례문. 그것을 복원하는 데 수천 시간과 천문학적인 세금이 다시금 들어야 한단다. 이 어이없는 뉴스에서 문화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위치를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자부할 만한 역사와 문화재를 지녔음에도 지켜내질 못했다. 안타깝다. 36년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급급했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 잃어버린 얼을 되찾아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겸재정선화첩》이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된 과정은 좋은 미담이다. 어느 학생의 끈질긴 연구, 한 한국신부와 독일 신부의 우정. 한 화첩을 사이에 두고 훈훈한 이야기가 피어난다. 그것은 정치, 외교, 학술의 협업으로 이루어낸 값진 성과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의 뜨거운 관심이 있어야한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또다시 숭례문 사건과 같은 참혹한 결과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고궁박물관으로 달려가 겸재정선의 화첩을 만나봐야겠다.
권은영
소통에 대한 의문과 제언
본인의 지난 모니터글에 원고에 쓰지 않았던 표현이 들어가 의도치않은 해석이 가능한 서두가 된 데 유감이었다. 실은 분량상 짧더라도 모니터글은 무진 고심과 과감함이 요구되는 일이다. 잔뼈 굵은 전문인과 언론인의 글을 여러 구독자를 대표해 평하고, 그것이 바로 그 해당매체에 영구히 게재된다는 것은 영광인 동시에 책임이 무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이지만 필요 이상 수정된 바가 보이고 웬일로 정렬이 맞지 않았던 지난 지면이었다. 한편, 열혈 독자를 인터뷰하는 코너가 신설되어 소통의 의지가 보였는데 개선안에 우호적인 데 앞서 몇 가지 의문과 제언이 있다. 독자 의견의 활용을 매체 스스로 얼마나 기대하고 귀 기울이는가? 그간 제출했던 아이디어에 피드백이 없었으므로 모르겠다. 터놓고 말하는 통로가 되기에 ‘monitor’s letters’ 같은 지면은 제약이 따를수밖에 없다. 또한《 월간미술》이 생각하는 독자층-전문가와 대중,대중이라면 어떤?- 포지셔닝이 궁금하다. 특집기사의 구성면에서나 마케팅 면에서나《 월간미술》은 전문성과 대중성을 오가는
경우가 있었다. 기사가 너무 전문적이라 어렵다 해야 할지 보편정보라 희귀성이 없다 해야 할지 모니터 역시 엇갈리고는 했다. 마지막으로 기고자의 다층다양에 쇄신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지 묻고 싶다. 자사 비평을 지면상에 수렴했던 결단과 과정에 점검이 있기를 애독자로서 바란다.
오정은
풍성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고민들을 담아
개인적으로 2014년《 월간미술》의 첫 권은 진정으로 풍성한 새해을 맞이하기 위한 고민을 엿볼 수 있었던 호라고 생각한다. 우선 국외문화재 환수관련 특집은 기사의 구성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정보를 얻을 뿐 아니라 관련된 문제에 대한 다각적 접근을 통해 지난 환수사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앞으로의 과제까지도 생각해보도록 구성되어 있어 인상깊었다. 단순 정보뿐 아니라 생각과 관심을 이끌어내는《 월간미술》 특유의 시선이 돋보였다.
또한 개인적으로 ‘Devoted Reader’란이 흥미로웠다. 모니터 요원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오랜 기간 《 월간미술》을 사랑해 온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월간미술》에 바라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려 한 점은 독자와의 소통에 귀 기울이는 긍정적인 변화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었다. 더불어 같은《 월간미술》 독자로서 간접적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지면이 풍요로워졌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나뿐만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저번 달에 이어지는 서울관 개관전 관련 기사에서는 호를 넘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집중적인 면모를 볼 수 있었고, 해외미술시장과 국내 미술계 전시소식에 관해서도 훨씬 다채롭고 풍부한 정보와 시선을 엿볼 수 있는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야심차게 풍성한 내용으로 시작한 1월호를 통해 앞으로의 《 월간미술》을 기대해 본다. 
강한라
소통은 발전의 초석
이번 달부터《 월간미술》엔 ‘Devoted Reader’가 신설되었다. ‘Monitor’s Letters’가 매 달의 지면에 대해 간단한 코멘트를 남기는 근시안적인 접근이라면 는 오랫동안 《 월간미술》을 읽어온 애독자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좀 더 넓은 범위이자 원시안적인 시각으로《 월간미술》을 바라볼 수 있는 꼭지라고 하겠다. 이는 매달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본연의 임무에만 머무르지 않고 독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적극적 방법으로 듣겠다는 입장으로 해석된다. 소통은 발전의 초석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Devoted Reader’ 꼭지의 활약이 기대된다. 이번달 ‘Devoted Reader’ 꼭지 인터뷰에 응해주신 두 분의 이야기를 읽으며 흥미로웠던 점은 한 분은 일반인과 좀 더 폭넓게 소통하는 《 월간미술》이 되길 요청했고, 다른 한 분은 전문성을 띤 지면이 줄어드는 점을 아쉬워 했다는 점이다. 독자층이 두꺼운만큼 다양한, 어떤 면에선 상반된 의견들이 제시된다는 점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부분이었다. 이 안에서《 월간미술》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물론
소통을 한다고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입맛을 맞출 수는 없겠지만, 일단 독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 월간미술》에 응원을 보낸다.
신지현

편집실에서·도움주신 분들

contents 2014.2. 편집실에서·도움주신 분들
어떤 희망
마감으로 한창 분주할 때,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를 건네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서울시 산하 某재단의 홍보담당직원. 젊은 목소리의 여성이었다. 전화를 건 목적은 3월에 개관하는 전시공간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자기네 전시를《 월간미술》 특집기사로 다뤄 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그녀는 여기서 한술 더 떠 그 전시관련 이미지가 표지에 실리기를 ‘희망 한다’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흠칫 놀랐다. 아니, 좀 황당했다. 지금껏 일해 오면서 이런 비슷한 상황을 가끔 경험했지만, 이번처럼 당당(?)하고 단도직입적으로 표지 게재를 요구하는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게다가 그녀는 ‘희망 한다’는 표현을 습관처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그 말투는 의례적이거나 사무적인 뉘앙스도 아니었고, 사뭇 간절함과 절실함이 배어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최대한 정중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표지 선정은 편집부의 고유 권한이고, 아직 전시가 열리지도 않았으니 지금은 가타부타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시점이다. 그리고 그때가 돼서 그 전시를 표지 후보로 고려해 볼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그렇다고 그대의 ‘희망’이 꼭 실현된다고 장담할수도 없다”고.(이 대목에서 나도 얼떨결에 ‘희망’이라는 단어를 몇 번인가 내 뱉은 것 같다) 여기서 또 한 번의 반전. 이 얘기를 들은 상대는 추호의 망설임이나 추근거림 없이 알겠다며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헐~.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한참동안 ‘희망’을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희망이 무너진 것은 그 쪽임에도 오히려 내가 안타까운 이유는 왜일까? 논리적 비약 혹은 일반화의 오류일는지는 몰라도, 이 시추에이션에서 요즘 젊은 세대의 세태를 보는 것 같아 뒷맛이 씁쓸하고 개운치 않았다. 희망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가볍게 얘기하고, 그에 비례해 너무 쉽게 단념하고 포기하는 경향 말이다. 희망이란 가슴에 담는 것일텐데. 말나온 김에 표지를 빙자한 사족. 누군가는 이번호 표지작품을 보고 ‘망치’에 감정이입해 젊은 세대의
메시지를 감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오히려 구멍이 숭숭 뚫린 ‘벽’이 마치 그들 같다는 생각을 끝내 떨쳐내지 못하겠다. 겉으론 번지르르하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망치질 한방에 맥없이 구멍 뚫리고 마는 견고하지 못한 허당. 특집기사에 실린 작가 강홍구의 글처럼, 젊은 세대를 진단하는 나의 삐딱한 시선 또한 오진(誤診)이기를 희망한다. 진짜로.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이부용
국립현대미술관
언론홍보 담당
모든 언론매체 미술담당 기자가 모두 고마워하는 인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술관과 언론사를 잇는 통로 역할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수행해 왔다. 특히 최근 7~8개월은 몸이 두개라도 모자를 만큼 과중된 업무를 헌신적으로 감당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서울관 때문에. 이건 기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비정규 계약직 입사 4년차인 그는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할 위기에 직면했다. 반면 정형민 관장은 연임됐다.


김지훈
중앙대 영화
미디어전공 교수
뉴욕대에서 영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교수는 영화연구, 미디어연구, 현대예술이론을 넘나들며 1960년대부터 포스트-시네마시대에 이르는 영화 및 무빙 이미지 예술의 미학, 역사, 문화적 함의를 풀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월간미술》과는 지난해 12월호에 실린 <더그 에이트킨전>에 관한 원고로 첫 인연을 맺었다. 그의 첫 번째 저작인《 필름과 비디오, 디지털 사이(Between Film, Video, and the Digital)》가 2015년 출간될 예정이다.


홍원석
작가회화, 영상, 소셜 퍼포먼스, 커뮤니티아트 등 다방면으로 활발한 행보를 보여왔다. 평소 작가로서의 욕망과 자기고발, 자기성찰 사이에서 진동하며 기자에게 대단히 솔직한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이번에는 승자독식의 사회,세대 간의 갈등, 예술 제도에 대한 성찰 등 동시대의 감수성으로 젊은 작가의 현실을 예민하게 포착한 글을 써주었다. 작업처럼 글 역시 그동안의 경험과 고민이 솔직하게 녹아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