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刊美術 RE-READ
가상현실 작품의 ‘프런트 라인’을 그렸던
20여 년 전의 시선
2021년에 이어, 올해에도 가상현실(VR) 기술이 도입된 전시 및 작품이 늘어나는 추이가 관찰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VR작품 제작에 기술과 자본을 지원하는 문화정책이 있을 테지만, 어쨌든 관련 작품의 증가는 VR작품에 대한 창작자들의 관심을 암시한다. 그리고 물론, 이에 대한 담론 역시 불어나고 있다.
가상현실을 도입한 작품에 대한 논의는 당연하게도 이전부터 있어왔다. 2002년, 《월간미술》 편집부는 ‘미술 속의 디지털’ 꼭지로 시각예술분야에서 당시 중심적이었던 디지털 아트의 경향을 1월호부터 9회에 걸쳐 살폈다. 그중 가상현실에 관한 논의는 두 차례 발행되었다. 먼저 2002년 2월호 ‘미술 속의 디지털’ 꼭지에는 에라스무스대 철학과 교수 조스 드 물(Jos De Mul)의 글 ‘사이버 테크놀러지와 예술의 존재론’(김민아 옮김)이 실렸다. 그는 여타 작품들보다 더 기술의존적인 예술 형태인 가상현실 작품도 “세계를 드러낸다”는 점을 주지시키며, 다음과 같이 썼다. “가상현실의 궁극적인 약속은 도피하거나 즐겁게 하거나 혹은 소통하는 것보다 현실에 대한 자각을 되찾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당시의 가상현실 작품들이 영상 작품을 ‘VR화’하는 등 초기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었기에 조스 드 물은 이를 인터페이스 개진에 따른 “사용자의 행동에 따라 실시간에 행해지는 삼차원적이며, 컴퓨터에 의한 시뮬레이션 환경”으로 보았지만, 가상현실 ‘경험’에 있어 그가 서술한 세 가지 “요소”는 현재까지도 유효한 감상의 지점을 짚는다. 그는 첫째로 “삼차원적인 시각과 음향을 만들어내는 쌍안경 패럴랙스와 스테레오 이어폰” 덕분에 조성된 “몰두/집중”을 언급했다. 둘째는 “내비게이션”이며, 셋째는 관객이 조종사처럼 “가상 환경과 ‘상호작용’ 할 수 있는 것”인데, 이는 전통적인 극장에서처럼 고정되어있던 관객의 역할 변화에 대해 사고한 결과이기도 하다. 조스 드 물은 하이데거의 책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을 해제하는 동시에 그의 ‘현존재(Dasein)’ 개념으로 가상현실과 공간을 이렇게 바라봤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현실이 가상현실을 통해 현존재에 의해 해석되고 드러나느냐는 것이다. … 회화와 영화 같은 과거 재현의 형식들로부터 가상현실을 구분 짓는 점은 가상현실은 재현 밖의 실재하는 세계가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가상세계-내-존재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관객을 새로운 공간 및 ‘세계’ 구현에 참여시키는 가상현실이 “관람객을 참여자로 변화시키려 했던 아방가르드의 목적을 실현”한다며, 가상현실 작품이 기술과 관련한 철학적인 고찰을 거친다면 이후의 가장 걸출한 예술 경험은 가상현실 작품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 서술했다.
《월간미술》 2002년 6월호 ‘가상공간이 빚어내는 상상력의 확장’에 소개된
야엘 캐너렉(Yael Kanarek) 〈The World of Awe〉 2000 작품은 2002 휘트니비엔날레에 출품되었다.
《월간미술》 2002년 2월호에 실린 ‘사이버 테크놀러지와 예술의 존재론’
2002년 6월호의 네 번째 ‘미술 속의 디지털’ 꼭지에는 미술비평가 정용도의 논고 ‘가상공간이 빚어내는 상상력의 확장’이 실렸다. 그는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가상공간에서 우리 인간은 가상성(virtuality)을 통해 우리의 비전을 각인”한다고 말했다. 이 때 그가 정의한 ‘가상성’은 “예술작품이 지닌 정신적 특성을 탐구하는 지각과정 안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자, “‘상호작용성’의 개념 안에서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작가가 제시한 가상현실 속 세계를 탐험하는 관객의 참여 자체가 작품의 제시 및 감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언급했다.
두 편의 글은 가상현실 기술을 활용한 작품들에 대한 관객의 참여와 몰두에 의한 직관적이고 주체적인 감상 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의 언설은 현재 대규모 기획전이라면 한 점씩 소개하고 있는 VR작품과, 소규모 전시 공간의 한계를 넘어 하나의 ‘유니버스’를 제시하려 하는 작가들의 VR작품 특성을 고찰하도록 한다.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정교한 가상현실 구축을 목표로 기획된 VR작품들이 향하는 길에 함께할 미학적이고 이론적인, 비평적 관점의 논의를 더 많이 꺼내어야 할 때다. 이들 작품에 몸이 익숙해져가는 만큼, 그것의 예술적 가치를 고찰할 수 있는 방법에도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 말이다.
- 더불어 박해천은 “군산복합체의 연구결과물”을 가상현실의 시작점으로 언급했다. 1950년대 이후 “과학자들이 현실세계의 물질적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상의 시공간을 발명하려 했다. 이후 “가상현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이 시공간은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에서 “사이버스페이스”로 불리기도 했다. … (깁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냉전시대에 개발된 군 실험용인 머리에 쓰는 헬멧과 기초적인 그래픽 프로그램의 결합물”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박해천 《인터페이스 연대기》 디자인플럭스 2009 p.78
조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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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월간미술》 2022년 2월호 SIGHT&ISSU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