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Choi ByungHoon

국내 아트퍼니처 선구자로 이름을 알려온 최병훈은 지난 한 해, 서울공예박물관, 대전신세계 아트앤사이언스, 미국 휴스턴미술관 개관에 맞춘 작업을 선보이느라 꽤 분주하게 보냈다. 특히 11월 개관한 휴스턴미술관 신관에 설치된 3m 높이의 현무암 조각, 〈선비의 길〉은 그가 지금까지 작품으로 만들어왔던 선과 에너지가 집약된 작품이다. 한 해 작업을 마무리하며 가나아트센터에서 선보인 개인전 〈A Silent Message〉(2021.11.12~2 021.12.12)는 빈 듯 채워진 듯 그야말로 명상의 공간이 되었다. 최병훈이 돌과 나무에서 끌어낸 검은빛과 형상은 그가 오랫동안 탐구하고 궁구해온 ‘잔상’으로 남게 될 감각, 그리고 어떤 에너지다.

20년 전 작업실을 지으면서 건축의 한 부분으로 〈태초의 잔상〉 스타일의 테이블을 만들었다. 사진=박홍순

21세기의 아르테 포베라

서상숙 l 미술사

물질은 심화와 비약이라는 두 개의 방향으로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심화의 방향에서는 신비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비약의 방향에서는 기적과 같이 아무리 퍼내도 끝이 없는 힘으로 나타난다. 이 두 개의 경우, 다 같이 물질에 대한 명상은 ‘열린 상상력(imagination ouverte)’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력의 철학적 가르침이 무엇보다도 먼저 물질적 인과율(causalité)과 형식적 인과율의 관계를 연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문제는 조각가에게와 마찬가지로 시인에게도 부과된다. 시적 이미지는 하나의 물질을 갖는 것이다.

《물과 꿈:물질적 상상력에 관한 시론》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이가림 옮김, 문예출판사, 2010(1980)

자연의 감각이 사물의 질서와 만나는 것은 어떤 경지(境地)에서다. 돌과 나무 그리고 절제된 표현의 최병훈 작품은 그러한 지점에 있다. 그는 1977년 ‘현대공예창작회’를 조직하고 새로운 조형운동을 전개한 이래 현재까지 독자적 자연 감각의 언어를 구현하고 있다. 즉 자연석과 검은색 목재, 그리고 현무암 같은 물질로 절제된 표현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번 가나아트에서 열린 개인전 〈A Silent Message〉는 최근의 장 시리즈, 사이드테이블과 콘솔 시리즈, 아트벤치 작품 등 총 30여 점을 선보였는데, 1980년대 이후 “예술이 생활에 반영될 때, 그것은 생을 아름답게 한다”는 그의 신념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A Silent Message〉는 ‘빈장의 공간’, ‘빈상의 공간’, ‘빈좌의 공간’을 통해 최소한의 장식으로 자연의 물질을 관통하는 원천적 고요와 침묵의 사색을 의미한다. 이는 지난해 휴스턴미술관에 영구 소장 설치된 〈선비의 길〉에 드리워진 그의 철학과 결을 같이한다. 그의 정신성은 자연과의 일체를 지켜왔던 한국의 고유한 조형 철학과 이를 실천했던 삶의 태도에 다름아니다.

전시를 이루는 3개의 공간은 그의 예술이 다가서고 있는 자연의 물질과 감각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첫 번째 ‘빈장의 공간’은 검은색 나무와 자연석이 대칭과 비대칭의 균형을 이루는 〈태초의 잔상〉 시리즈를 만나게 한다. 고인돌의 형상처럼 아래 두툼한 기둥 위에 평평한 돌판 그리고 그 위에 검은 장이 놓인다. 자연석이 지닌 날것의 질감과 공들여 다듬은 손맛이 함께 있다. 수직적 적층의 형태거나 수평적 구조의 책장은 드러남과 감춤, 돌출과 후퇴, 날것과 공력의 대칭과 비대칭의 균형을 즐기게 한다. 오랜 시간 형태와 성질을 다루어온 경험에 의한 적층의 균형과 적절한 형식적 파격이 빛난다. 그윽한 ‘현(玄)’의 검은빛을 띠는 목재는 물푸레나무로 스스로가 지닌 결 이외에 어떤 장식이나 표현도 없이 직관적 기능의 요소만을 남긴 채 수직과 수평의 짜임으로 완결된다. 여기에 현무암, 자연석, 수석 등이 맨 아래 기단이 되는 부분에서부터 중간중간 칸에 또는 다리가 되는 부분에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기능적이거나 심미적인 가치에 의해 선택된 자연석은 엄숙한 정형성의 수직 또는 수평 패턴의 장에 자유와 자연의 호흡을 불어넣는다. 나무라는 질료에서 수없이 다듬어낸 손길이 자연석과 균형을 맞추어 직선의 단정함과 사선의 변화를 아우르는 감각적 관용에 이르게 한다.

단정하고 지극한 검은빛과 나무의 결이 은근하게 표면의 울림을 만든 ‘빈장의 공간’과 질료적 측면에서 동일하지만 다른 사물을 만들어내는 ‘빈상의 공간’으로 가면, 자연석이 보다 적극적으로 콘솔이나 사이드테이블 몸체와 결합한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왜 돌을 그렇게 열심히 찾아다녔는지를 헤아리게 되는 순간이다. 어떤 돌도 똑같이 생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크기와 속성을 지닌 것들이 그의 오브제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는 물질적 본질의 발견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며, 이는 곧 자연의 본성에 다가서고 이를 충분히 탐색하고 다루는 여정이 포함된 것을 확인케 한다. 화강암, 현무암 등 자연석이 가진 천연의 질료 형상과 절단된 표면에 다듬고 옻칠을 더 해 나뭇결과 검붉은 빛으로 견고하게 만든 상부의 조형성이 결합되면서 경이로운 오브제로 완성한다. 옻칠의 빛과 강건함의 에너지가 더해진 콘솔과 사이드테이블 상판은 때론 호수를 비춘 듯이 그윽하고 때론 손만짐으로 결이 생긴 듯 따듯하다. 이처럼 나무와 돌 등 자연의 물질들을 잇는 감각과 제련의 순간이 차가움과 따뜻함, 반듯함과 울퉁불퉁함, 세움과 눕힘의 다양한 인간적 정서와 느낌이 공존하게 한다.

〈afterimage of beginning(태초의 잔상) 020 - 542〉 51×30×59cm 물푸레나무에 검은 우레탄 마감, 자연석 2020 이미지 제공: 가나아트 사진: 최병훈

휴스턴미술관에 소장된 〈Scholar’s Way(선비의 길)〉 이미지 제공: 최병훈 © Bae, Bien-U

자연의 결을 살리고 쓰임과 결합해 자연과 인공의 중용에 이르게 하는 ‘빈상의 공간’에서 압도적 자연물질의 제스처인 ‘빈좌의 공간’에 이르면 아트벤치가 자리한다. 1993년 아트퍼니처의 길을 개척한 이래 많은 작업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고 덕수궁 길이나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아트벤치를 만날 수도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검은빛의 석재는 인도네시아의 현무암으로 자연의 강한 생명력과 시간의 위력을 지녔으며 그 자체로 표현적인 물질로 선택된 것이다. 그에게 나무와 돌은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되고 실험되었지만 인도네시아산 바잘트, 현무암은 한층 특별한 의미와 질료 형상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그는 현무암의 근원지인 인도네시아까지 찾아가서 이것이 화산폭발 이후 마그마가 수억 년간 응어리진 결과물임을 확인하였다. 자연의 분출로부터 기인했고 이것이 또다시 흙의 시간 속에 안착하고 표면의 황토마저 단단한 돌이 되게 한 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바잘트에서 자연의 생명성과 순환의 역사를 볼 수 있다. 겉이 흙빛으로, 파고 들어가면 검은 현무암인 이 물질의 속성을 최대한 살리며 최소한의 조형을 통해 아트벤치로 완성함으로써 그는 질료 자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이런 과정이 물질 지성을 발견하고 심층화하는 것이리라. 커다란 현무암 덩어리를 스튜디오에 들이고 만지고 바라보며 흙의 결이 흔적으로 남은 돌의 부분과 검은 마그마의 부분을 적절하게 형상과 형태로 조각해서 도달한 아트벤치는 그대로 자연의 시간을 만나게 한다. 2~3m길이의 규모에 육중한 메스의 벤치는 공간의 풍경이며, 자연의 자리이다. 검은 현무암의 강렬함은 〈일필휘지〉의 붓의 획을 극대화한 것으로도, 수없이 바라보는 자연이 스스로 형상화하듯 드러나는 〈선비의 길〉로, 〈태초의 잔상〉이라 이름하는 메시지의 아트벤치처럼 자연의 시간에서 인간의 쉼으로 이어진 것이다.

3개의 공간을 통해 작가의 최근 작업을 마주하는 동안 그가 지향하는 세계와 삶의 태도를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된다. 장식이 없이 절제된 형식미의 원형성과 결함 없는 기능의 간결미는 모더니즘 디자인의 미니멀리즘과 기능주의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겠지만, 이것이 철저히 한국적 소재와 미학으로 재고찰되는 과정을 통해 어떤 이즘이나 누구의 영향이라는 것을 말할 수 없는, 작가만의 독자적 세계에 이른 것임을 보여준다. 1970~1980년대 표현주의적 면모가 강한 작품을 주로 디자인하던 시기부터, 1990년대에 내면적인 세계에의 관심이 강화되고 자연주의적이며 절제된 형태의 작품이 시작되는데 〈태초의 잔상〉 시리즈가 이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작가 스스로 한국적 미의식과 자연에 순응하는 한국인의 삶에 대한 의미가 매우 크게 자리하게 되었고, 고요한 산자락에 자리 잡은 사찰에서 만나는 자연에 대한 겸양의 태도를 ‘절제와 비움’이라는 양식으로 구체화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과정으로부터 최근에는 질료와 물질의 본질과 형상을 발견하고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질료 형상이 가진 에너지와 형상성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극단의 두 성질을 오묘하게 조화시키는 형식적 특성은 오랜 경험을 통해 도달한 조형 탐색의 결과이다. 돌과 나무가 하나의 덩어리로 만나, 특별한 기능의 오브제로 자리하게 하는 것이 낯설지만 특별함으로 다가오게 하는 작가만의 조형성이다. 이는 자연 물질을 발견하고 관찰하는 근원적인 태도로부터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사물의 본질과 심층에 다가서려는 그의 자세가 물질 안의 형상에 근접하며, 물질에 내재한 인과율과 시적 상상력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자연물질을 통해 발견된 물질 지성(material intelligence)과 제작 본능(instinct of workmanship)이 일구는 의지가 지금의 그의 예술에 이르게 한 것임은 분명하다.

〈afterimage of beginning 021- 578〉 물푸레나무에 검은 우레탄 마감, 알루미늄 패널, 자연석 1080×450×1750cm 2021 이미지 제공: 가나아트 사진: 황정욱

〈A Silent Message〉 전시 광경. 〈after image of beginning 021-543〉 229×80×55cm 2021 〈after image of beginning 015 - 439〉 80×40×51cm 2015 바잘트, 자연석 이미지 제공: 가나아트

최병훈은 1952년 태어났다. 홍익대 응용미술학과 학사, 가구디자인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국내 아트 퍼니처 선구자로, 선화랑, 조현화랑, 이도갤러리, 가나아트센터, 프리드먼 벤다(뉴욕)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의 작품은 휴스턴미술관, 프랑스 파리장식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홍콩 M+뮤지엄, 스미소니언 디자인 뮤지엄, 비트라 디자인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서울공예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유수의 미술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서울 포시즌스호텔, 대전신세계 아트앤사이언스 등의 공간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현재 파주에서 작업하며 홍익대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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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월간미술》 2022년 2월호 SIGHT&ISSU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