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권자연: 두 개의 장소와 드로잉-인덱스

권자연 〈두 개의 장소와 드로잉-인덱스〉 A.P. 23 전시 전경

권자연: 두 개의 장소와 드로잉-인덱스
이슬비 | 미술사

이번 권자연 개인전은 미술사학자인 박윤조 A.P. 23 디렉터가 중견 작가의 작업 흐름을 조명한 아카이브 기반 전시이다. 산울림소극장 2층에 위치한 A.P. 23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한 작가의 작업 과정을 펼쳐내고 곱씹어 보는 데 부담스럽지 않은 공간이었다. 단순히 아카이브가 나열된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작가 연구를 토대로 기획된 전시로 권자연의 작업 흐름을 ‘인덱스’라는 키워드로 재맥락화했다. 이 글에서는 이번 전시를 바탕으로 권자연의 작업의 관계적인 특성을 밝히는 데 중점을 두고자 한다.
그의 작업은 특정 매체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넓게 보면 드로잉의 범주에 포함된다. 하지만 종이라는 물리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드로잉과는 차이가 있다. 2000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린 첫 개인전과 2002년 한전플라자에서 선보인 두 번째 개인전에서 그는 며칠에 걸쳐 전시장 벽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고 작업실에 쌓여 있던 여러 사물을 배치해 전시 공간을 한시적으로 점유한 모든 것을 드로잉적 요소로 담아냈다. 그가 직접 그린 이미지와 오브제는 작업의 ‘일부’이자 ‘파편’으로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고, 작가의 감각과 관람자의 경험을 매개하는 역할을 했다.
권자연의 작업은 항상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장소와 포개어져 있는데, 유독 오픈 스튜디오와 같이 작업과 일상이 연결되는 장소에서 빛을 발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오픈스튜디오 프로젝트–웰컴 투 마이 스튜디오》(2004)에 참여한 그는 자신의 작업실로 안내하는 흥미로운 여정을 기획했다. 작업실이 위치한 아파트 단지 곳곳에 그림을 그려 방문객이 보물찾기하듯이 탐색하며 일상의 장소를 새롭게 마주할 수 있도록 끌어냈다. 이후 그의 드로잉은 자신을 비우고 주변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2004년 뉴욕 ISCP 레지던시 오픈스튜디오에서는 벽에 박힌 수많은 못을 분홍 실로 연결하거나 울퉁불퉁하게 칠해진 벽이나 바닥 등에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흔적을 드러냈고, 2006년 차샤마 오픈 스튜디오에서는 공동 생활하는 예술가들이 레지던시 공간을 개인화하는 다양한 방식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의 작업은 내부의 언어로 그치지 않고 외부의 자극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안과 밖을 가로지르며 누군가의 흔적을 더듬어 그들의 소통방식을 포착하는 데 집중하고 쉽게 지나치고 사라지는 순간을 연결하여 일종의 매듭 형태로 보여준다. 형식적으로는 독립된 영역을 확보한 단단한 이미지나 조각이 아니라 연약한 외피를 가지거나 사진이나 영상과 같은 기록 매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세 아이를 기르며 아이들이 남긴 흔적을 기록한 〈슬리핑 돌스〉 (1998~2008)는 특히 비중 있게 다뤄졌다. 이 작업은 그가 10년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았던 집의 일상적인 풍경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것이기도 하다. 당시 미술계의 분위기가 결혼한 여성 작가들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을 떠올려볼 때 어머니의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이 작업은 일종의 선언처럼 느껴진다. 사진 속 인형이나 장난감은 모양이 제각각이지만 모두 이불이나 수건, 심지어 돗자리 같은 천을 덮고 곤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간혹 머리에 수건이 얹혀 있거나 배를 꼭 덮고 있어 아이들의 재미난 놀이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다층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돌보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한편 그의 작업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중요한 축을 이룬다. 2011년 전시 〈이주를 사유하다〉에서 선보인 드로잉 설치 작업 〈동그라미 그리려다〉에 이어 2020년 상업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는 ‘그의 산’을 주제로 아버지의 흔적을 더듬으며 개인의 삶보다 공동체의 삶에 헌신하며 그가 이루지 못한 이상을 추적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사실 권자연이 유년 시절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국가를 오가며 이주를 경험한 것은 아버지의 직업 때문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자리를 허물고 새롭게 시작하는 유동적인 삶의 경험은 작가가 흔적, 파편을 통해 순간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삶의 경계를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바탕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흔적을 포착하고 장면을 기록하는 것은 그 순간이 금방 사라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항상 보이는 관계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누군가의 흔적을 담아내는 동시에 보는 존재로까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례를 언급하자면 ISCP 오픈스튜디오를 방문한 한 작가처럼 자신이 벽면에 남긴 흔적을 권자연의 작업을 통해 새롭게 마주하는 뜻밖에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권자연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늘 자신의 작업과 주변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작업이 되지 못하고 작업실에 남겨진 것들, 잉여의 파편들을 모아 새로운 작업으로 선보여 온 것인데, 2007년 《Into Drawing 2》에 출품된 작품과 지난해 개인 작업실이자 전시 공간에서 소개된 〈낙오된/풍경/유닉스〉(2021)가 이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드로잉에 대한 그의 신념 같은 것이다. 드로잉은 날것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만큼 밀도나 깊이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가져온 이미지와 재료를 수없이 더하고 빼는 그의 드로잉은 절제, 망설임, 고민 등을 동반하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오는 풍경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드로잉의 개념은 시각적 결과물보다 반추하는 삶의 태도이자 사유의 방법론에 가깝다.
이번 전시에서는 권자연을 작가이면서 동시에 기획자로서의 역량도 조명했다.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경험과 맥락을 포개어 새로운 사건으로 확장하는 탁월한 감각과 기획력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삶과 예술, 재료와 작품, 창작자와 관객, 창작자와 매개자 등 기존의 관계를 흐트러트리고 뒤섞으며 새로운 맥락을 발견해 나간다. 또한 특유의 따뜻한 기운은 서로를 연결하며 생의 울림을 선사한다.

왼쪽 권자연 〈단초들(Thresholds)〉 혼합매체 2015~2022
오른쪽 권자연 〈A.P.23 아카이브 테이블(Archive Table)〉 권자연 작가 참여 전시 도록들과 관련 글들을 모아둔 섹션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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