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은 곳 대신에
2020. 1. 30 – 2. 29
갤러리바톤
갤러리바톤은 박석원, 박장년, 송번수 작가의 그룹전 < 더 높은 곳 대신에 >를 개최한다. d이번 전시는 평생 화업에 매진하며 한국 현대미술 지형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쳐 온 원로·작고 작가 3인의 작업을 조명하는 자리이다. 전시 제목 ‘더 높은 곳 대신에’는 물아일체로 작업을 해오며 삶이 곧 예술적 궤적이었던 세 작가의 위업을 은유한다. 이들은 사적 영달과 유명세를 좇지 않고 평생 탐구하듯 자신의 미술 세계를 펼치고 형상화에 주력해왔다. 구도적 자세로 미의 영역을 고민하고 묵묵히 외연을 넓혀온 이들의 그간 화업을 < 더 높은 곳 대신에> 전에서 살펴본다.
박석원, < 積-對 7918 >, 1978.
박석원(b. 1941)의 작업은 ‘적(積: 쌓을 적)’이라는 키워드로 나타낼 수 있다. 전시는 박석원의 ‘적(積)’ 개념이 정착되던 시기인 1970-80년대 나무 조각 작품을 선보인다. 이 시기에 작가는 나무나 돌 등 자연을 근원으로 하는 소재의 순수한 물성에 주목하는 동시에 인위적인 변용과 리듬을 부여했다. ‘Mutation-Relation(변용-관계)’으로 명명된 시리즈는 나뭇결과 고유 색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특정한 패턴으로 재차 재단된 나무의 모습이다. 작가는 물결 모양, 사선의 중첩, 사람의 관절과 유사한 접합부 등 인위적인 재단이 중첩된 조형적 변용을 통해 자연과 환원을 동시에 드러낸다.
박장년, < 마포89-1 >, 1989.
박장년(1938-2009)은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마(麻)직물에 마포(麻布)의 형상을 재현하는 데에 평생을 천착했다. 갤러리바톤은 이번 전시에서 박장년 작업의 각 시기적 특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표작을 펼쳐 보인다. 그의 60년대 작품에서는 두터운 색조를 띈 색면이 경계를 형성하고 지우는 듯한데 여기서 *앵포르멜의 영향이 돋보인다. 그 이후에는 소재로서의 마포가 다양한 외형으로 변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데에 주력했다. 박장년이 극사실적으로 재현한 마포는 시각적 명료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상적이지 않다. 무언가 개념적으로 이해되고 수용되어야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정밀하게 외피만 재현해놓은 것과 유사하다.
* ’앵포르멜’ :원래 부정형 또는 비정형의 뜻. 앵포르멜 미술은 미리 계획된 구성을 거부하고 자발적이며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말한다. (출처: 월간미술 『세계미술용어사전』)
송번수, < 네 자신을 알라 >, 2007.
송번수(b. 1943)는 존재에 대한 내밀한 종교적 성찰을 작품으로 본격 승화하던 90년대 초반 대형 태피스트리 작품과 후기 페인팅을 선보인다. 작가는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는 기독교적 도상인 가시와 십자가를 주 대상으로 작업해왔다. 작품 속 세밀하고 능란하게 다루어진 굵은 색실은 특유의 잔 굴곡을 형성하며 조명 아래에서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고 연출된 이미지의 함의를 엄중하게 숙고하게끔 이끈다. 가시의 상징성에 대한 작가의 주목은 2000년대 페인팅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등장하는데, 실제 캔버스를 관통해 솟아오른 듯한 가시 형태의 부조 군집은 화면에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고통과 희생, 암울과 희망 등의 다중적 심상을 느끼게끔 한다.
갤러리바톤은 평생동안 자신의 예술적 이상에 솔직하고 치열했던 원로 작가의 작품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하는 예술성이 동시대에 여전히 유효함을 느낄 수 있길 기대한다.
자료제공: 갤러리바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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