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던시의 역할과 의미, 그 방향에 대하여
좌담 2023년 12월 4일
하도경 기자
(왼쪽 위부터)노재민, 하도경, 홍경한, 정헌기, 최선, 고원석
좌담_레지던시의 역할과 의미, 그 방향에 대하여
일시 ㅣ2023년 12월 4일
참석자 ㅣ고원석 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교육과장, 홍경한 미술비평가, 최선 작가, 정헌기 광주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운영자, 하도경 노재민 월간미술 기자
거꾸로 된 시곗바늘, 기울어진 운동장
최근 한국의 창작 산실로 꼽히는 주요 레지던시들이 예산과 인력을 대폭 축소하거나 폐관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예술인의 역량 강화와 국제 교류, 도시 재생, 지역사회 소통 등의 역할을 해온 이곳에 ‘위기’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를 공식적으로 짚어보고자 월간미술은 지난 12월 4일 ‘레지던시의 역할과 의미 그리고 그 방향에 대하여’ 라는 주제로 좌담을 개최했다. 고원석 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교육과장이 진행을 맡았고, 홍경한 미술비평가, 최선 작가와 정헌기 광주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운영자 및 아트주 대표가 패널로 참여했다.
고원석: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이하 테미)는 대전문화재단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갑자기 대전시장 공약 사항이었던 제2대전문학관을 테미의 부지에 건립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어 테미가 오갈 데가 없어진 상황이 됐어요. 그렇다고 폐지는 너무하다는 지역 여론이 있어 대전문화재단은 이후 한시적으로 대전의 원도심에 건물을 임차해 입주한다는 방안을 밝혔지만, 계속 유지될지 아니면 1년만 한시적으로 운영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 같아요. 그리고 최근 굉장히 초점을 모으고 있는 곳 중 하나가 서울시립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이하 난지)예요. 난지는 원래 자체적인 의도와 상관없이 난지 부지 일대에 쓰레기 소각장 부지가 추가 결정되면서 그 부지 안으로 들어간 상황이 된 거예요. 장소를 대체할 부지를 찾아야 해서 2024년 말까지는 작가를 뽑아 유지하고 그 후년부터는 다른 데로 이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인천시의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기능 폐지를 기점으로 ‘레지던시 위기’는 더더욱 공론화되고 있죠.
다양한 이유로 현재 레지던시들은 위축되고 위기도 겪고 있어 활력을 잃어가고 있어요. 좌담에 앞서 최선 작가께서 작가로서 레지던시가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에 관해 들려주시겠어요?
레지던시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인가
최선: 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처음 레지던시에 들어갔을 때는 작업실이 생겼다는 설렘이 컸어요. 그런데 들어가니까 제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다른 사람을 통해 많이 경험하게 됐습니다. 예컨대 저는 유학 경험이 없었지만, 유학을 갔다 온 작가들이 있어 나누는 얘기만으로도 유학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고요. 특히 작가들이 모인 곳이다 보니 가르치고, 배우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어서 지금까지 제가 받았던 교육 방식하고는 완전히 다른 문화 체험을 하게 된 거예요. 모두가 창작자이면서 동시에 흡수할 수 있는 곳이라 새롭고, 놀라운 기회들이 생기는 겁니다. 네트워크가 기하급수적으로 갑자기 늘어났죠. 레지던시 정책은 자연스럽게 작가들을 모으면서 새로운 미술 생태계를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고원석: 세 가지 포인트로 굉장히 중요한 얘기를 해 주셨어요. 첫 번째는 기능적인 장소로서 창작 동기를 부여하는 장소요. 특히 작가 간 교류 네트워킹을 통해 기존의 제도권 교육에서 충분히 받을 수 없었던 작가적인 지식, 문화적 공유, 체험 등이 있었던 것 같고 또 하나는 소속감, 연대가 굉장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짚어주셨어요. 그리고 국내 미술계의 생태계 층위가 확장하는 데 레지던시가 일조하는 현상을 목도했다는 부분까지 말씀해주셨습니다.
레지던시 운영 양태도 많이 변화해 왔죠. 레지던시가 핵심적으로 수행하는 기능도 변화해 왔는데, 이를 홍경한 선생님께서 긴 시간 동안 목격해오셨을 것 같아요.
홍경한: 창작스튜디오 혹은 레지던시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예술가의 창작을 진흥하는 데에 있어요. 기능은 창작을 보다 효과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며, 설립 목적 역시 그것에 근거해요. 그러나 최근 들어 레지던시는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오히려 지역사회 연계를 중시하고 대시민 프로그램에 맞춰지는 방향으로의 변화가 뚜렷하죠. 따라서 오늘날의 레지던시는 순수 창작을 위한 ‘창작중심형’과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 강화와 공공자본의 극대화라는 명분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형’, 그리고 지역에 거처를 두고 지역발전과의 밀접한 운영 형태를 지니는 ‘지역밀착형’ 생활문화시설 이라는 갈래로 나눌 수 있을 듯해요. 그런데 미술인들이 원하는 것은 창작중심형이죠. 애초 레지던시의 역할과 기능은 예술 창작 환경 개선을 전제로 한 예술가 자생력 확보, 네트워크 강화, 해외 진출 기회 제공의 측면이 강했어요. 창작공간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도 창작가들의 경제적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이었고, 이를 타개하고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정부와 각 지자체는 1995년 이후 예술가에게 작업실을 제공하고 창작 진흥을 지원하는 창작공간 설립에 나섰죠. 그러나 점차 지역밀착형 생활 문화시설로 개념이 변화하고 있고, 그에 따른 지역연계프로그램 및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강조되는 추세죠. 이는 지역 문화 활성화를 통한 예술의 공공성 함양에 방점을 둔 결과예요.
고원석: 말씀해주신 내용에서 조금 더 들어가 구체적으로 난지 레지던시 발전 과정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2006년에 문을 연 난지는 처음에는 창작공간 지원이 첫 번째 목표였습니다. 두 번째는 공간 제공보다는 레지던시가 지원해 줄 수 있는 국제화와 네트워킹이었습니다. 해외 레지던시 교류 프로그램으로 해외 입주가 더 활성화되고 활발하게 된 시점이었죠. 그다음에는 국제화도 일반화되면서 인큐베이팅과 멘토링으로 넘어갔어요. 작가의 실질적 창작 역량을 성장시키거나 해외 진출에 실질적인 조언과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그리고 팬데믹을 계기로 네트워킹은 축소되고 프로덕션 측면이 강화되었죠.
홍경한: 네, 코로나19는 레지던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죠. 말씀처럼 프로덕션 측면도 강해졌고요. 더불어 살펴봐야 할 지점은 작가들에게 작업실을 빌려주는 ‘공간 유형’에서 복합문화공간, 지역문화센터로서 역할 변화가 시도됐다는 점이에요. 정부 및 지자체들의 레지던시 정책목표 또한 예술가 창작 여건 개선을 넘어 지역 및 도시 재생, 지역주민에 대한 문화 향유 기회 제공과 참여라는, 가시적 효과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기 시작했죠.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창작공간들은 창작스튜디오의 개념과 역할에 있어 정적인 형태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효과 속에서 과거와 걸음을 달리하고 있어요. 즉, 예술가의 창작 원리 준수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존재 및 창작 활동에 대한 인식과 가치가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것을 뿌리로 하고 있다는 것이죠.
운영 주체에 따라 목적이 달라지는 레지던시
고원석: 우리나라에 200여 개의 레지던시가 있다고 하는데, 이중 재단이나 민간이 운영하는 곳의 비율이 어느 정도로 추정되고 있나요?
홍경한: 제가 알기로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곳이 50% 이상이에요. 재단이나 미술관 등 지자체 위탁운영이 약 40% 정도 되고요. 대략 50% 정도가 유휴시설과 폐교를 활용하고 있으며, 짧게는 3개월에서부터 1년 내외의 입주 기간을 갖고 있죠. 비록 운영 주최와 입주 기간은 다르지만 ‘예술가 육성’을 목표로 하나의 공간을 거점으로 다양한 사회적 영향 관계를 기대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분모를 지녀요.
고원석: 정헌기 대표께서는 민간 주체로서 레지던시를 시작해서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유지해 오셨어요. 호랑가시나무의 경우는 어떤가요? 광주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시나요?
정헌기: 저희 레지던시의 운영 목표는 단순하게 작가 삶 선상에 레지던시가 놓이는 것으로 잡았어요. 실제로 서울에서 지리적으로 얼마나 멀어지느냐에 따라 작가들 사이에서 레지던시 순위가 암암리에 매겨지곤 하는데 저희는 아무래도 전라도 광주에 있는 민간 레지던시이다 보니 다른 것보다 작업에 집중하고 싶어서 오는 작가가 많습니다. 저희는 광주문화재단의 지원을 받는데, 광주에는 안식년 제도가 있어요. 4년 운영하면 1년은 쉬어야 해요. 강제적으로 운영을 못 하게 하는 건데 그때 저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지원금 신청을 합니다. 저희가 작가들에게 작업실만 제공하는 건 아니니까 어떻게든 보조금을 받아 작가의 작업을 위해 제공해야 하기에 2023년에는 기부금 매칭 사업을 통해 레지던시를 지속했습니다. 보통 민간 레지던시들은 보조금 사업에서 한두 번 떨어지면 사라지기 십상이에요. 그리고 민간 레지던시는 매해 심사를 받아야 합니다. 오랫동안 잘 운영해 왔는지는 평가 지표가 아닙니다. 항상 1년 단위로 끊어 평가받다 보니 내년을 기약하기가 힘들고 미래를 도모하기 힘든 환경에 늘 놓이게 된다고 할 수 있어요.
홍경한: 사실 운영자 입장에선 예산 문제가 가장 곤란할 거예요. 예술가들은 레지던시로부터 창작공간 확보, 전문영역 진입에 따른 전문적인 예술가로서의 위치 확보, 시설 및 지원금, 프로그램에 따른 심리적, 경제적 보호를 받게 되지만 사립 레지던시는 그 많은 것을 이어가기 위해 정부나 지자체에 예산을 기대할 수밖에 없고, 기부금 매칭 사업 등에도 관심을 쏟아야 하죠.
고원석: 운영 주체에 따라 레지던시의 초점도 달라지기 마련이죠. 최선 작가님이 보시기에 작가 관점에서 운영 주체에 따라 무엇이 달랐고, 어떤 장단점이 있었는지 들려주실 수 있나요?
최선: 나라마다 조금씩 달라요. 미국 레지던시 ISCP(The International Studio & Curatorial Program)를 예로 들어 보자면, 그곳에 입주한 작가는 낮에는 맨해튼에 가서 예술인 네트워크를 쌓고 저녁에 와서 작업을 하거나, 새로운 작업보다는 뉴욕 미술 문화를 경험하는 일에 에너지를 씁니다. 예술계 사람을 소개받기 위한, 네트워크를 위한 형태인 거죠. 제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일본 요코하마의 뱅크아트라는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뱅크아트는 창조도시 요코하마 정책 일환으로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와 더불어 제도적으로 만든 레지던시입니다. 그곳에 입주하는 작가는 정해진 장르가 없어요. 굉장히 다양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거쳐 갑니다. 흥미로웠던 점은 창조도시 일환으로 생겼지만 절대 작가들이 지역 문화 활동에 동원된 적은 없었다는 겁니다.
홍경한: 일본과는 달리 우린 동원되죠. 그래서 늘 말도 많고요. 의무적으로 적용, 동원되는 지역연계 프로그램, 공공미술 등은 ‘예술의 자율성’ 침해라는 점에서 개선되어야 할 요소로 판단해요. 저는 정책자들의 막연한 성과주의에 의해 작가들이 도구화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밖에도 레지던시 정책과 제도에 대해 예술가들은 관료주의 예술정책이라고 비판하고 있으며, 획일화된 예술 행정 또한 불만족스럽게 여기죠. 솔직히 레지던시 근무자 도 업무 만족도가 그리 높아 보이진 않아요.
위기 맞이한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에 대해
고원석: 인천아트플랫폼의 레지던시 사례는 보다 구체적으로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요.
정헌기: 인천아트플랫폼과 같은 명성을 쌓으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헤아려 보았으면 합니다. 일반적으로 10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야 안전한
플랫폼으로서의 명성을 쌓을 수 있는데 순간의 결단으로 인해 레지던시가 사라진다는 게 황망하기만 합니다. 해외에서는 2024년의 한국을 굉장히 주목한다고 보도하고 있고 한국에서의 문화 예술 관련 계획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오히려 레지던시를 강화해도 모자랄 판에 폐지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홍경한: 인천아트플랫폼 사태는 레지던시를 은폐된 공간으로 간주하는 정책자들의 인식을 잘 드러낸 사례라고 생각해요. 안정적인 창작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예술의 국내외 위상보다는 시민 세금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시민 문화생활 시설로의 전환을 추구하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고, 성과주의에 급급한 조급함도 엿볼 수 있었죠. 저는 인천아트플랫폼 사태가 오히려 레지던시의 존립 이유가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판단해요.
바람이 있다면 주체이자 당사자이기도 한 예술가들은 물론, 정책자들과 전문가들 역시 레지던시의 제도적 유효성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가 지속되었으면 해요. 임흥순 작가가 금천예술공장에 있을 때 베니스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았잖아요. 올림픽도 아니고 비엔날레에서 상을 준다는 게 조금은 어색하지만, 어쨌든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성과였던 것은 분명해요. 때론 그 성과를 시민들과 정책자들이 잘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무대 역시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고원석: 인천은 문화적 자양분이 풍부하고 해석할 여지가 많은 지역입니다. 작가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 너무 많은 도시이지만 역설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이 심하고 문화가 빨리 휘발돼버리는 도시이기도 했죠 시립미술관도 없는 도시에서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까지 없애려는 지금, 기본적인 논의 선상 자체가 달라지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없애는 게 능사가 아니라 업그레이드해야 하고 지역 생태계에 더 밀착해 빨아들여야 하는 상황인데 말이죠. 저는 인천의 사례가 지금 굉장히 중요한 모멘텀을 심어주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미술계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고, 공론화되고 있는데 여기에 힘을 더 실을 수 있다면 향후에 발생할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홍경한: 네, 인천시 행정부의 시각에서는 레지던시 하나 없애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수 있어요. 10여 년 동안 예술인과 시민의 창작·교육·체험의 축을 담당해온 플랫폼의 핵심 기능이 멈춘다는 건 수백 명의 국내외 작가와 수십만 시민이 공들여 쌓아온 역사의 중단임을 그들은 알지 못하죠. 문화 비전과 예술 가치를 거세하는 일임을 알 리가 없어요. 그래서 공론화가 요구되고, 오늘 이 자리도 그 공론화에 기여한다고 봐요.
거꾸로 된 시계추를 돌려놓는 방법은
고원석: 지역 문화 인사가 기회 균등을 외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가 공공기금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림잡아 국내 레시던시의 절반 정도는 공공기관이나 지역 정부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경영 평가를 받아요. 좋은 지표를 내서 어떻게든 그다음 예산을 많이 받아야 하기에 가능한 성과를 다 동원하려고 한단 말이죠. 그러다 보면 성과주의가 대두하고 레지던시에 가해지는 압력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절차적 개선과 동시에 향후 민간 영역에 있는 레지던시를 강화하는 방향에 관해 이야기 나눠 보고 싶은데요.
홍경한: 우선 관료주의 해체를 위해 운영 주체의 분산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요. 지자체의 재정 지원 확대를 통한 민간 위탁 방식도 고려할 만하죠. 그렇게만 된다면 공공지원의 결과에 따라 한 해 사업 운명이 바뀌는 작금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고, 민간이 운영하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개입해 좌지우지하는 경우의 수도 줄어들겠죠. 그리고 그에 따른 예술의 자율성도 획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요. 물론 다양한 전문가와 예술가가 함께 만들어가는 미래지향적인 플랫폼이 될 수도 있다고 봐요. 이 밖에도 기존 레지던시와 별도로 개인 창작공간에 대한 주거비 혹은 임대료 지급 등을 통한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라고 여겨요.
레지던시가 가야 할 길
고원석: 앞으로 레지던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고 이 좌담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홍경한: 한국 레지던시의 역사가 30년 정도 되니까 패러다임이 바뀐 건지 아니면 다른 대안 찾기의 국면에 접어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레지던시의 위기는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변변한 예술가 등용문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레지던시는 예술가들에게 작지 않은 긍정적 기능을 제공하고 있고, 성과도 커요. 그렇다면 유지, 확장 등에 관한 고민 또한 유효하다고 봐요. 저는 이 좌담회 기사 내용을 읽고 보다 많은 미술계 구성원이 함께 머릴 맞대거나 지혜로운 방법을 제시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레지던시가 흔들리면 작가들의 제도권 진입은 더욱 어려워질 거예요. 등용문에 관한 마땅한 입구조차 없으니까요.
고원석: 앞으로 레지던시라는 제도를 통해 미술인들이 해야 할 일은, 50% 정도에 해당하는 행정 영역을 관행적으로 움직이지 말고 조금 더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잘 이용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배정된 행정 예산은 지금 눈앞에 있는 거고 지금 우리가 쓸 수 있는 카드라는 거죠. 그래서 되도록 행정은 놓치지 말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다음 단기적으로 바라는 것 중의 하나는 레지던시끼리의 네트워킹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레지던시는 생태적으로 굉장히 쉽게 네트워킹될 수 있어요. 레지던시의 현안들에 공감대가 크고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사안이 있다고 했을 때 굉장히 의욕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지던시가 다양한 정체성을 함의하고 있는 기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곳은 지역이 중심이 되고, 어떤 곳은 건물이 중심이 되고, 어떤 곳은 프로그램이 중심이 되는 등 운영 목적이 다양해 작가 본인의 작업세계나 추구하는 바에 맞춰서 향유할 수 있는 생태계가 됐으면 좋겠다는 게 바람입니다.
하도경: 팬데믹 이후에 세계적으로 온 오프라인, 하이브리드 형태를 병행하는 탈영토화된 레지던시가 늘어나고 있는데 한국의 상황에 맞게 그런 방식들이 정착, 발전하려면 많은 것이 해결되고, 의식 수준 자체가 올라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안을 어떻게 조명하고, 변화를 유도할 수 있을지가 앞으로의 숙제입니다.
고원석: 팬데믹 이후에 제가 주목했던 것이 개별화하고 디지털화하는 프로덕션에 레지던시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였습니다. 세대가 변화함에 따라 프로덕션의 방식이 바뀌고 요구하는 양태들이 달라졌는데 우리가 전통적인 모델을 가지고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물리적인 제약이 있을 때 해외 작가와 어떻게 교류하고, 입주할 것인가 등이었어요. 이런 논의가 계속 개진되어야 하는데 다수의 레지던시 이관 및 폐지 건으로 갑자기 시곗바늘이 거꾸로 된 시점으로 간 거예요. 만일 이 좌담이 상하로 편성 연재될 수 있다면 두 번째 꼭지는 그 문제가 주제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후속 기획이 꼭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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