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미술로, 세계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는 1970년대부터 2000년에 이르기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의 국제미술 소장품 수집활동을 알아보는 전시 〈미술로, 세계로〉(1.20~6.12)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냉전시대 이후 세계화의 열망으로 가득했던 대한민국이 해외미술과 교류한 발자취를 1978년부터 수집해온 다양한 국적의 해외작가 96명의 조각, 드로잉, 회화 등 104점으로 보여준다. 이 중 초창기 수집작품 등 절반 이상이 수집 이후 처음으로 관람객에서 공개되며, 전시된 지 30년여 만에 처음으로 수장고를 벗어나 출품된 작품도 상당수다. 미술 국제교류 양상 및 88올림픽과 세계현대미술제 등을 경유한 묵은 작품들이 소장품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동시에 현대사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장 메사지에(Jean Messagier, 1920~1999) 〈장 바티스타 티에폴로와 빈센트 반고흐의 만남〉(사진 가운데)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릭 205.3×217cm 1987
19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기증. 장 메사지에는 파리 출신 화가이자 조각가, 판화가로 1943년 이래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작가로 88서울올림픽 기념 문화예술행사인 ‘세계현대미술제’ 〈국제현대회화전〉에 7점을 출품하고, 올림픽공원에 석제 타일화 〈봄의 제전〉을 제작해 남겼다.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사진: 이현무
198090 ‘세계화’의 환상과 우리,
그리고 그에 대한 질문김주원 |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세계화’ 환상과 미술관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이하 ‘MMCA’) 국제미술 소장품 가운데 수집 경로가 분명하게 확인되는 첫 번째 예는, 미국계 중국인 화가인 류예자오(劉業昭, Liu Ye Zhao, 1910~2003)의 수묵담채화 〈공산불견인(空山不見人, Vacant Mountain)〉이다. 미술관의 ‘구입’ 대신 한국을 방문한 외국 작가의 ‘기증’으로 시작된 MMCA의 국제미술 소장품은 미술관의 수집 정책이나 미션과는 무관했다. 이어서 소장된 작품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1981년까지 8점이 수집되었는데, ‘88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가 기증한 2점을 제외하곤 모두 한국을 방문한 작가 개인의 기증에 의한 것이었으며, 대부분 ‘한국의 인상’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예컨대, 체류 기간의 길고 짧음과 무관하게 한국을 방문한 리처드 프랭클린(Richard Franklin)과 에이드리언 워커 하워드(Adrienne Walker Hoard)가 각각 기증한 작품 〈경쾌한 항해 #2〉(1979)와 〈제주의 정원〉(1981) 등은 재료나 색채, 주제 등에서 한국에 대한 그들의 이국취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한국방문 해외미술”로 구분되어 소개되는 이들 소장품은 공보처 산하 국립영상제작소(현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정책방송원)가 제작한 몇 편의 기록영화인 〈대한뉴스〉를 보고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만날 수 있다. MMCA 국제미술 소장품전 〈미술로, 세계로〉는 이렇게 19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SEOUL!’이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발표되는 순간과 1990년대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선언’을 기록한 국가적 차원의 뉴스를 전시 메이킹의 ‘이미지’로 내세웠다. 특히 전시제목 〈미술로, 세계로〉는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라는 사마란치(Juan Antonio Samaranch)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의 88서울올림픽 개회선언의 정치적 정당성과의 오버랩을 의도하고 있는 듯했다. 새로운 미술의 흐름을 조명하는 일과 이를 적극적으로 공동체에 대입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는 그 환상성에 온통 집중한다 해도, 그 구체적인 내면화 과정이 감내해야 할 각각의 일상은 세계화라는 환상성이 배태하고 있는 그늘을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 세계적인 맥락에서 볼 때 미술의 세계화가 시작된 순간으로 공식화할 수 있는 사건은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일 것이다. 냉전 종식과 세계화의 지표로 통용되는 이 역사적 사건은, 세계사의 지평에서 더는 동서(東西)라는 세계의 절반과 다른 절반 간의 차이 또는 경직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분명, 냉전 종식은 환상과도 같이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라는 위계를 허물었으며, 정전(canon)으로서의 서구 역시 위험에 처하고 도전받게 했다. 동서의 권력관계는 침투 가능한 것으로 보였고 이제 서양미술과 동양미술이라는 말은 더 이상 적합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음은 이미 클리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는, 당시 국내 미술계가 상상했던 ‘세계화’가 ‘88서울올림픽 이펙트’, 다시 말해서 그 환상과 실현의 계기였음을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당시 정부는 ‘문화올림픽’을 표방하며 대대적인 국제화, 세계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적 연장선상에서 올림픽 공식 문화예술행사의 하나로 개최된 〈세계현대미술제(Olympiad of Art)〉는 주목할 만하다. 개최 당시 작가 선정 및 예산사용 등의 여러 잡음에도 불구하고 〈세계현대미술제〉 출품작들은 오늘날 MMCA 국제미술 컬렉션에서 적지 않은 비중과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번 전시에 대거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적어도 이런 것 말이다. ‘관 주도 정책, 정치와 미술/미술관의 동거는 건강한 것일까.’ ‘환상은 꼭 그늘을 배태하고 있는가.’ ‘환상과 실제, 그 사이 어디쯤에 진실은 존재할까’ 등등.
1부 ‘한국 방문 해외미술’에서는 해외작가가 한국의 인상을 받아 제작·기증한 작품이 출품되었다.
에이드리언 워커 호워드(Adrienne Walker Hoard, 미국, 1946~) 〈제주의 정원〉 / 〈구름의 전당〉(사진 왼쪽) 캔버스에 유채 76×122cm / 48×118cm, 37×111cm, 66×119cm 1981 1981년 작가 기증 리처드 프랭크린(Richard Franklin, 미국, 1939~) 〈경쾌한 항해〉(사진 오른쪽) #2 한지에 대나무, 실 콜라주 2327cm 1979 1979년 작가 기증
오른쪽 페이지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미술의 국제교류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역할과 한계를 살펴보는 2부 ‘미술교유, 미술교류’ 섹션. 당시 미술관이 해외미술작품을 수집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사)현대미술관회의 활동과 미술인들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영국, 1937~) 〈레일이 있는 그랜드캐년 남쪽 끝, 1982년 10월〉(사진 왼쪽) 사진 콜라주 95×334cm 1982 1991년 (사)현대미술관회 기증
한국미술, ‘88서울올림픽’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조건
한국미술의 국제화와 MMCA 국제미술 소장품 수집 연대기의 교착을 기본 서사로 구성하고 있는 이 전시는 냉전의 종식,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부상 같은 세계정세는 물론, 88서울올림픽 등의 국제적 문화행사가 한국 대표 미술관의 국제미술 수집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즉, 이 전시가 ‘세계화’라는 키워드 아래 국가 대표 미술관의 수집 연대기를 더듬고는 있지만, 그 키워드가 품어야 할 ‘지역의 역사’/한국사, 보편이 괄호를 쳐 놓은 ‘차이’, 공통감각의 기초가 되는 ‘취미’ 등을 같은 위상에서 다루고자 시도하면서 이들의 동거를 현실과 사실, 그리고 실제로서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미술로, 세계로〉는 MMCA가 1969년 개관 이래 수집한 ‘국제미술’ 소장품 가운데 미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세계 전역에 걸친 국외 작가 96명의 조각, 회화, 판화, 드로잉 등 104점을 선별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점도 이를 반증한다. 전시는 다섯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1부 ‘한국방문 해외미술’, 2부 ‘미술교유, 미술교류’, 3부 ‘그림으로 보는 세계’, 4부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 5부 ‘미술, 세계를 보는 창’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새로움’이 미덕인 현대미술의 관례를 차치하고라도, 정전으로서의 영미 서구 권위에 대한 열망을 배태하고 있는 비서구권 미술계의 유명작가 신작 선호 경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미술관 컬렉션과 무관하게 유명작가의 대형신작 전시로 압도해야 하는 대중성 역시 오늘 우리의 모습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전시는 서구 유명작가 중심의 구성이 아닌 전 세계 권역을 평등하게 다루고 있다.
2020년 현재 MMCA 소장품 수는 8,785점에 달한다. 그 가운데 국제미술 소장품은 약 925점으로 전체 소장품의 10분의 1이 조금 넘는다. MMCA는 196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전시장소가 필요하다는 문공부의 판단에 따라 소장품 0점으로 개관했다. 설립과 개관부터 근대적 개념의 미술관이라고 하기엔 미술관 활동의 기초가 되는 소장품 수집, 조사, 연구가 배제된 채 ‘전시’라는 퍼포먼스만 부각되어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한국 대표 미술관의 ‘국제성’ 컬렉션
소장된 후 수장고에 갇혀 조사연구, 해석, 전시되지 못했던 비관적 운명의 소장품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 작품 자체가 지닌 내용과 가치, 의미와는 별개로, MMCA 컬렉션의 연대기적 문맥이라는 새로운 역사성과 의미를 부여받으며 새로운 역사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의 말대로, 이번 전시를 통해 오랜 기간 소개되지 않았던 MMCA 수장고 속 작품들은 자신들 애초의 운명과 무관하게 MMCA의 수집 과정과 전개라는 맥락에 따라 새로운 숙명의 결들을 첨가했다. 여러 차례 같은 주제의 글들을 통해 밝혀왔듯이, 오늘의 현대미술관 소장품은 수장고에 갇혀 조사연구, 해석, 전시되지 못하는 비관적 운명을 배태하고 있다. 미술관의 컬렉션이 된 작품들은 대부분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안전한 수장고에서 미술관의 에피소드 일부로 관리되고 있으며, 모든 소장품이 미술관의 ‘에피소드’에서 미술관의 ‘역사’로 전환되는 순간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수집활동에 대한 연대기적 서사로 구성된 〈미술로, 세계로〉는 작품 개별에 대한 연대기적 서사와는 달리 한국미술 지형의 변화와 맥락을 지도로서 파악하게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차원의 교훈을 안기고 있다. 또다시, 1929년 설립된 초기 MoMA의 컬렉션 정책과 조사연구에 기반한 전시 등을 떠올려 본다. MoMA는 설립 초기 9점의 작품으로 출발했다. 미술관 초기 여러 차례의 전시를 치르면서 미술관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줄 항구소장품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1939년, 큐비즘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피카소의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1907)을 컬렉션 했으며 개관 이후 지속적인 조사연구와 ‘추상표현주의’의 근거를 마련했다. 소장품 0점으로 출발한 MMCA와 무엇이 다를까. 그리고 100년이 지난 현재 한국의 공립미술관들과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우리에게 ‘국제성’은 무엇이며, ‘세계화’는 실현되었는가를 질문하면서 글을 마친다.
올림픽 부대행사로 열렸던 전시와 올림픽공원 야외조각 심포지엄 참여작가들로부터 기증받은 작품으로 구성된 4부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 광경. 히울라 코시세(Gyula Kosice, 아르헨티나, 1924~2016) 〈얽힘〉(사진 왼쪽) 플랙시글라스 74.5×41×29cm 1988
19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기증
5부 ‘미술, 세상을 보는 창’에서는 1990년대 수집된 독일 신표현주의, 이탈리아 트랜스 아방가르드, 쉬포르 쉬르파스, 미니멀리즘, 팝아트, 옵아트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빅토르 바사렐리〉(Victor Vasarely, 프랑스 1906~1997) 〈게자〉(사진 두 번째) 캔버스에 아크릴릭 121.7×120.5cm 1983 1990년 구입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 기사 자세히 보기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월간미술》 2022년 4월호 월간미술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