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刊美術 RE-READ

높은 문화의 힘 다지기
혹은 역사는 회전목마

〈서울국제미술제〉에서의 피에르 레스타니(사진 왼쪽)와 이어령(가운데) 《월간미술》 1990년 12월호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가 암 투병 끝에 지난 2월 26일 향년 89세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문학평론가이자 언론인, 교육자, 정치인이었으며 문학작가로도 활동했다. 그중에서도 ‘이상’을 발견하고 잡지 《문학사상》을 창간해 ‘이상문학상’을 제정한 평론가 이어령이 가장 영향력 있는 자아이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그는 한국의 사람과 말, 글, 문화 보따리를 풀어낼 줄 아는 재주를 지녔다. 1988년 서울올림픽 기획은 20세기 한국 최고의 문화기획 중 하나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고 말이다.

이어령 선생은 중앙일보 고문을 맡은 2001년, 《월간미술》 11월호 특집 기사 ‘인문사회과학자 46인이 그려보는 21세기 신지식학’ 인터뷰 기사에 등장한다. 이건수 편집장은 같은 해 9월, 이화여대 고별강연을 마친 그를 만나 21세기 신지식에 관해 듣고 이를 실었다. 이어령 선생이 황순원, 염상섭, 서정주 등을 ‘현대의 신라인들’이라고 비판했던 것을 기억한 것인지, 이건수 편집장은 신라인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를 신지식 전파자 예로 들며 이 시대 신지식에 대해 물었다. 그는 20세기를 이론과 실천이 분리된 파우스트적 지식의 시대로 보고 21세기 신지식은 이 둘을 겸하는 마르코 폴로형 지식이라고 설명하며 소유적 발상을 고집하지 말고 체험을 증폭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전했다. 통합적 관점으로 가능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그레이존’으로 설명했던 그가 당시에 읽고 추천한 책은 《잡초의 자연설》, 《이타적 유전자》 같은 생태학 저작과 데이비드 셍크의 《데이터 스모그》와 제러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이다.

《월간미술》에는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서의 흔적도 어렴풋이 드러난다. 그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1990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포스트올림픽’의 일환으로 〈서울국제미술제〉가 열렸으며 《월간미술》에서는 12월호에 관련 기사를 게재했다. 〈서울국제미술제〉는 “‘한국미술의 국제적 지위 향상’이라는 슬로건 하에 비동양권 26개국 60명의 작가에게 국내에서 생산된 닥종이 10장씩을 제공, 100호 크기의 작품 2점씩 받아 시상하는 국내 최초 국제지명공모전”이었다. 대상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열리는 전시, 〈미술로, 세계로〉에서 소개되고 있는 미국 작가 브라이언 헌트의 〈가을폭포〉가 수상했으며 상금은 10만 달러였다. 본지 기자 김희선은 ‘취재수첩’에서 〈올림픽미술제〉부터 사대적이고 소비적인 발상이 그대로 이어졌고 국내작가들은 소외된, 그야말로 먹을 것 없는 잔치라는 평을 전했다. 당시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프랑스 미술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니와 우수상을 탄 존 체임벌린의 작품을 보고 있는 사진이 흑백으로 실렸다.

1991년 2월호.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와 관련된 사건이 《월간미술》에 또 한 번 소개됐다. “미술문화의 민주화, 그 진통의 현장”이라는 제목의 ‘취재수첩’에서는 당시 예술의전당 미술관에서 열린 〈젊은 시각 - 내일에의 제안전〉(1990.11.27~12.31)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다루었다. 당시 30대 평론가였던 서성록 임두빈 이준 심광현 박신의는 모더니즘계열 미술과 민중미술을 한자리에 모으는 기획을 했지만 공공미술관에 민중미술이 진입했다는 이유로 정부당국의 간섭이 거세지면서 윤범모 미술관장이 항의성 사표를 던지는 파국을 맞았는데, 이 전시를 불허한 이가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이라고 알려졌다.

1967년, ‘분지’ 필화사건에서 문학은 본질적으로 저항이라며 소설의 상징을 비호했던 그다. 그 유명한 김수영과의 ‘불온시 논쟁’, 김동리와의 ‘비문논쟁’으로 미루어 봤을 때 민중미술의 어떤 점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을지 다만 추측해 볼 뿐이다. 어쨌거나 정무적인 잣대로 예술을 판단했던 이력 때문에 스스로 마르코 폴로는 되지 못했지만, 그레이존을 넘나들던 그의 창의력은 2022년 문화 길잡이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다시 회전목마 위에 오른다.

 《월간미술》 2001년 11월호에 실린 이어령 고문 인터뷰

배우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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