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HT&ISSUE
불투명한, 반투명한, 빛나는
거점을 뛰어넘는 비전
재개관한 리만머핀 서울 전경
새 공간에서 이어가는 갤러리의 미션
2017년부터 안국동에 자리했던 리만머핀 서울이 올해 3월 한남동으로 위치를 옮겼다. 세로로 폭이 좁은 복층 구조의 안국동 갤러리가 개별 작가의 대표작을 가까이 느끼게 만드는 공간이었다면, 에스오에이(SoA)가 리노베이션을 담당한 한남동 갤러리는 이전의 두 배가 넘는 70여 평의 화이트 큐브이자 미디어 작품과 조각 작품, 그리고 토크 프로그램 등을 소개할 수 있는 ‘복합적인 프로젝트 공간’으로 확장된 갤러리의 취지를 보여준다. 리만머핀 측에 따르면, 2019년부터 한국에서 활동을 키우면서 다양한 규모의 작품과 그 특색에 맞춘 전시를 위해 보다 넓은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이태원역과 가까운 현 갤러리는 입지 면에서 유동 인구가 많고 주로 젊은이들이 오가는 곳이라 한국에서 처음 개인전을 여는 작가들의 작품이 좀 더 신선한 시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프리즈 서울〉이 열리는 올해는 한국 미술시장이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또 세계 시장으로 한발 더 나아가는 해로 글로벌 갤러리 다수가 하반기에 있을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리만머핀 서울도 9월 자전적 추상 작업을 해온 맥아서 비니언(McArthur Binion), 라텍스로 여성을 둘러싼 심리적이고 외연적인 억압을 표현했던 하이디 부쉐(Heidi Bucher)등 원로 또는 작고 작가의 전시를 서울에서 소개할 예정이라 밝혔다.
〈Luminous: Cities with Egg Monuments 3〉
(사진 왼쪽) 젯소칠된 캔버스 위에 아크릴과 래커 스프레이 243.8×203.2cm 2022
〈Translucent: Inside of the Egg with Stained Glass Windows 3〉
패널에 젯소칠한 아카이벌 뮤지엄 보드, 아크릴, 스프레이 에나멜 101.6×81.3cm 2021 © Lari Pittman 제공: Regen Projects, Los Angeles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사진: Evan Bedford
화면에 그려낸 건축이 광원에 도달하기까지
래리 피트먼은 아크릴과 스프레이 페인트 등을 사용해 ‘중층 구조’의 장식적인 형상을 화면에 선보여왔다. 이번 전시는 한국에서 열리는 그의 첫 개인전으로, 2021년과 올해 제작된 신작들로 채워졌다. 그 안에는 콜롬비아인 어머니의 문화와 작가 자신의 성 정체성, 그리고 그가 겪거나 마주했던 사회의 일면이 담겨 있다. 작품 전면에는 인류사의 배경이 되는 대도시 앞에 우뚝 선 건축물과 알의 형상이 등장한다. 건축물은 그것이 세워진 시대의 이념을 드러내기도, 그 저변에 흐르던 목소리를 폭력적으로 묵살하는 “기념비”이기도 하다. 이상적이기에 물리적으로 구현되기 어려운 비저너리 아키텍처(Visionary architecture)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신작의 도상은 일견 혼란스러울 정도로 압착되어 있지만, 그 세부적인 모습은 타인에게 희망의 기운을 전한다. 알은 작가의 작품에서 인간의 기원, 여성, 삶 등 다층적인 의미로 출현해왔는데, 이는 그가 1970년대 초반 칼아츠(CalArts)에서 미리암 샤피로(Miriam Schapiro)에게 받은 멘토링을 계기로 한다. 피트먼은 이때부터 작품에 수공예적인 요소를 드러내고, 여성을 생명의 근원으로 보는 시각을 작품에 옮겨왔다.
작품은 전시명의 일부인, ‘불투명한(Opaque)’, ‘반투명한(Translucent)’, ‘빛나는(Luminous)’의 구성으로 되어있다. 세 막으로 전개되는 작품의 서사에 따라, 관람자는 화면 안에 빛이 점차 강렬하게 투과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특히 ‘반투명한’ 연작에는 중세 종교 건축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조각나 있으면서도 하나의 형상을 암시하는 화려한 색면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깨어진 색면은 형상을 직설적으로 재현하지 않으며 관람자들의 손쉬운 해석을 방지한다. ‘빛나는’ 연작에서 알은 건축물과 같은 높이로 떠올랐다. 200호 규모의 〈Luminous: Cities with Egg Monuments 3〉(2022)은 중세 성화에서 울트라마린의 가운에 싸인 성모 마리아의 모습처럼 파란색으로 둘러싸인 알의 형상과 시대 구분 없이 한 도시에 존재하는 다양한 건축 양식으로 채워졌다.
2층 전시실에는 6면화 〈Crystalloluminescence〉(2021)가 위치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하나에서 여섯 개로 늘어나는 알에는 작품명과 같은 ‘결정발광(結晶發光)’을 의미하는 알파벳이 쓰여 있다. 알이 내재한 생명의 힘을 마치 찰나의 강력한 빛처럼 느낀 것일까, 이는 물질이 급속하게 결합하거나 그것이 깨질 때 섬광같이 번뜩이는 빛을 말한다. 작가는 4월 초 방한 예정이다. 피트먼의 회화가 우리의 눈길을 잡아끌었듯, 그가 앞으로 전할 메시지는 어떤 인상을 남길지 기대해본다.
〈Crystalloluminescence〉
(사진 왼쪽) 패널에 고정된 젯소칠된 아카이벌 뮤지엄 보드에 아크릴과 에나멜 스프레이 104.5×520×4.5cm 2021
조현아기자
사진 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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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월간미술》 2022년 4월호 월간미술 SIGHT&ISSUE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