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 빗물 화석

2020. 3. 19 – 5. 9

리안갤러리 대구

leeahngallery.com


윤희, < Pluie Fossile(빗물 화석) >, Aluminium, 25x75x75cm, 2014-2017.

리안갤러리 대구는 올해 첫 전시로 윤희의 개인전 < 빗물 화석 >을 펼친다. 윤희의 최신 조각 작업 11점과 회화 작품 7점을 선보이며 그의 작업 방식을 함축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윤희는 청동, 황동, 알루미늄과 같은 금속을 고온에서 용해한 후 작업자에게 용액을 원추, 원형 등의 주형에 여러 차례 던지도록 해 금속 용액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거나 쌓여 물질이 스스로 작품의 최종 형태를 이루도록 하는 독특한 작업 방식을 이룩했다. 전시 표제인 < 빗물 화석 >은 같은 뜻의 불어 제목인 < Pluie Fossile(빗물 화석) > 연작에서 따온 것으로 무형의 빗물과 형태와 단단함을 지닌 화석의 특성을 동시에 시각화했음을 의미한다.

윤희, < En Spirale(나선의) >, Aluminium, 100×140 x140cm, 2018-2020.

윤희 작업의 일관된 특성은 ‘모순’으로 수렴된다. < Pluie Fossile(빗물 화석) > 형태는 천장의 주형에 용액을 던질 때 바로 아래에 놓인 주형에 금속 용액이 빗물처럼 떨어지며 튀긴 자국이 응고되며 발현된다. 금속의 역동감과 고정성을 동시에 느끼게 하며, 더 나아가 무름과 단단함, 부드러움과 거친 느낌도 함께 전달한다. 이 연작은 < Giclé(튀긴, 튄) >과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두 연작의 관계는 상승과 하강의 개념을 교란한다. < Pluie Fossile(빗물 화석) >은 금속 용액을 천장을 향해 던지지만 액체는 이내 바닥으로 하락한다. < Giclé(튀긴, 튄) > 연작은 금속 액체가 바닥에 부딪히며 미약하게나마 상승함을 표현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 Pluie Fossil(빗물 화석) >을 바닥에 설치하고, < Giclé(튀긴, 튄) >는 벽에 설치한 점이다. 두 연작의 관계에서 상승과 하강의 의미는 전도되거나 수직이 아닌 수평적 의미로 전환된다.

윤희, < En Spirale(나선의) >, Pigment on paper, 180x125cm, 2019.

원추형 주형에 알루미늄과 청동, 황동 용액을 각각 던져 작업한 < En Spirale(나선의) > 연작에서도 모순된 조형적 특성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주문대로 작업자가 금속 용액을 던지는 힘과 방향, 속도와 양, 횟수에 따라 금속의 겹이 형성되며 서로 결합하거나 분리된다. 각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성질인 빠른 움직임과 흐르는 시간은 금속 덩어리로 응고되며 작품의 외적 특징으로 고착된다. 덧붙여, 단단함과 굳건함을 상기하는 금속 물질은 정반대 이미지인 연약하고 부드러운 만개한 꽃잎처럼 보인다. < En Spirale(나선의) > 작품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모두 다른 작업자를 통해 실현된 작품이기 때문에 비록 동일한 작업 방식과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더라도 각 재료의 물질적 특성과 색상 그리고 문양에 있어서는 작업자 고유의 개성이 담겨 있다. 이 모든 점을 의도한 작가의 생각 또한 작품의 일부다. 결국 작품에서 자아와 타자, 능동과 수동은 구분 불가능하며 형태의 우연성은 작가의 의도로 수용된다.

윤희, < Giclé(튀긴, 튄) >, Aluminium, Diameter 180cm, 2018-2020.

개별 작품은 비록 역동감을 내재하지만 하나의 고정된 형태에 불과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 작품들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세우거나 눕히는 설치 방식을 통해 서로 상관관계에 놓으며 전시 공간 전체를 역동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따라서 각각의 작업은 개별 작품인 동시에 빈 공간에서 유기적 작용을 통해 채움과 비움의 조화를 충족하는 설치작품인 것이다. 또한 작가는 ‘튄’, ‘나선형의’, ‘분출된’과 같이 작품 제목으로 동사나 명사가 아닌 형용사를 주로 사용했다. 이는 동사나 명사가 어떤 행위나 상태의 확정성을 환기하는 반면 형용사에는 더욱 더 열린 가능성과 다양한 변용성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라 짐작한다. 이렇듯, 윤희는 관람객이 하나의 고정된 관점이 아니라 다채롭게 수식하고 형용 가능한 시선으로 작품과 마주하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료제공: 리안갤러리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