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희: 충만한 ZERO

2020. 3. 5 – 5. 9

페리지갤러리

perigee.co.kr


성낙희, < Sequence 1 >, Acrylic on canvas, 110×130 cm, 2019.

성낙희의 과거 작업이 역동적이고 톡 쏘는 맛과 같은 자극적인 감각의 즐거움을 주는 모습이었다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 Sequence > 연작은 차분하고 정적이며 운동감보다는 공간감에 관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새로운 방식에 대한 연구는 2018년에 보여준 < Transpose > 연작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는데, 성조를 옮긴다는 혹은 바꾼다는 제목의 의미는 기존 상황을 바탕으로 하는 변주가 아니라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한 큰 변화를 모색했음을 유추하게 한다. 이번 전시 제목인 ‘Modulate’도 작가가 계속해서 실험하고 있음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제목 이외에 실제적인 도구 교체 또한 큰 변화다. 보다 넓은 붓을 사용해 시원스러운 터치감을 주었으며 이전보다 작은 캔버스를 사용했다. 

성낙희, < Sequence 3 >, Acrylic on canvas, 97×97 cm, 2019.

성낙희가 최근 작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회화는 작은 부분에서 시작해 회화에 필요한 부분은 채우고 나머지는 탈락시키며 이를 꾸준히 다듬어내는 ‘부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에 기인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주변 상황과 ‘나’의 내면에서 획득하거나 외면하는 선택으로 조그만 한 부분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이는 저마다의 성질을 가진 이질적인 것을 배열하는 조합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쌓여가는 부분을 재조합하고 새롭게 환기되는 것을 반복적으로 그린다. 작가에게 중요한 점은 자신에게 비어 있는 부분과 채워진 것이 무엇인지 세심하게 인식하고,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결국, 그의 회화에는 끊임없이 선택하는 삶이 반영돼 있기에 채워져 있지만 채워진 것이 아니며, 작은 부분 부분에 세밀한 관심이 깃들어 있다. 

성낙희, < Sequence 5 >, Acrylic on canvas, 65×53 cm, 2019.

작가는 새로운 작업을 선보이지만, 근본적인 태도에는 변화가 없다. 자신을 채우기 위한 부족한 부분에 대한 선택이 최근 작업에는 응축된 하나로서 온전한 전체에 다다르기 위함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개별의 온전한 작업 또한 전시라는 전체에서는 한 부분으로 그 위치가 변한다. 넓게 보면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작업과의 관계에서도 일부분이자 완결된 하나의 작업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그 위치가 고정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작업은 완결돼 보이지만 완성되지 않은 것, 가득 차 있지만, 아직 비어있는 것이다. 즉,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전환은 자신의 선택이라는 특징적인 과정보다는 결과로서 부분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간의 유격을 두고 작은 화면에 점, 선, 면, 색으로 얽혀있는 부분을 천천히 채워 나가면서 이전과는 다르게 부분과 전체, 내부와 외부 힘이 공존하는 깊이를 가진 화면을 구성했다. 새로운 작업이 절제된 붓놀림으로 인해 질서정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힘을 내재하고 있으며 작가의 통제 안에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움직임이 감지되는 이유다. 

성낙희, < Sequence 13 >, Acrylic on canvas, 61×50 cm, 2019.

정리하자면 이런 거리 두기는 대립하는 부분 간 조화를 거듭할수록 각자의 영역과 힘을 유지하며 긴장과 발산의 불안정한 상황으로 고착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방식의 < Sequence > 연작은 부분이 가진 다양한 성질을 응축해 결과적으로 충만하게 차 있으면서도 모든 힘이 무(無)로 돌아가는 텅 빈 제로와 다름없는 허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결국 도달하려는 곳은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존재하는 바깥의 힘(예를 들면 중력과 같은)과 ‘나’라는 주체가 가지고 있는 내부의 힘이 균형을 이루는 제로의 상태, 다시 말해 부분과 전체의 구분이 사라져 모두가 합일되는 완벽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목적지이다. 즉, 그는 자신 내면에서 완전함, 충만함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나타나는 미완, 불충분이라는 의심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부분’들을 조합하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성낙희가 자신의 회화 그 자체와 삶의 관계에 뿌리내리고 있는 ‘부분’이라는 테제이며, 작가가 ‘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방법이다.

자료제공: 페리지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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