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의 근대 서화가:
희재 황기식(羲齋 黃基式)
2021.11.30~8.28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관
〈와유금강기승지도〉128×396cm 1960 황준명 소장
희재 황기식과 경산의 문인화
이나나 미술사
영남의 문인화
문인화는 한대로부터 수많은 명가에 의해 장구하게 체계화된 동양예술로서 하나의 법체계로 계승되면서도 작가의 개성을 충분히 드러내는 조형적 미를 지녔다.
19세기 초 시 · 서 · 화 삼절을 이룬 사대부 문인화가 신위(1769~1847)는 “나는 신사(神似)를 스승삼지 형사(形似)를 스승삼지 않는다(我師神似不師形).”고 했다. 이는 형사를 떠나 신사를 얻는다는 뜻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형태의 같음을 추구하는 것보다 정신을 얻기를 강조한 말이다. 다시 말해 대나무를 그리는데, 대나무와 똑같게 그리는 것이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대나무의 정신을 잘 표현한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문인화란 바로 그런 것이다. 처음엔 형사에서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형사를 버리고 신사를 얻는 것이다.
필자가 소개하는 희재 황기식(1905~1971, 이하 희재)은 영남의 경산이 낳은 근대의 문인화가로 바로 신사(정신)를 잘 표현했다. 일제강점기 한국 근대전통화단을 풍성하게 하는 영남의 전통화단은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교유한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 1862~1936)를 개조(開祖)로 하는 대구 · 경북화단과 차산 배전(此山 裵㙉, 1843~1899)으로 이어지는 김해 · 경남화단이 형성되었다. 특히 영남의 대구 · 경북화단은 서병오로부터
중국 상해의 감각적이고 활달한 발묵이 가미된 필법의 서예와 문인화가 번성하게 되었는데, 대구는 묵죽화를 특장으로 사군자화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죽농 서동균(竹農 徐東均, 1903~1978)으로 화맥이 계승되었고, 경산은 희재 황기식(1905~1971)으로 화단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영남의 경남 김해화단은 차산 배전으로 시작하여 아석 김종대(我石 金鍾大, 1873~1949), 우죽 배병민(又竹 裵秉民, 1875~1936), 수암 안병목(修庵 安秉穆, 1906~1985)으로 이어지는 중선 중기 이후의 개자원(芥子園) 화보풍이 특징이다.
한편 대구의 문인화는 죽농 서동균과 긍석 김진만(肯石 金鎭萬, 1876~1933) 등으로 이미 그 연구가 크게 진행되었으나, 경산의 문인화는 2021년 11월 30일,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관 희재 황기식 특별전을 통해 연구의 물꼬가 트이고 있다. 필자는 이 짧은 지면을 통해 경산 문인화단의 개조라 할 수 있는 희재 황기식의 문인화를 다소 형식적으로나마 소개함으로써 추후 그의 작품세계 연구에 박차를 가할 기회를 찾는다.
경산의 문인화의 개조
근대 경산의 문인화를 대표하는 희재는 1905년 2월 3일 경산시 자인면 동부리에서 황주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 아래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3 · 18 자인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보안법위반으로 경찰에 체포된 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정도로 문인으로서의 강직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또한 1932년 편찬한 《자인현읍지》는 자인의 산천, 역사 · 문화, 행정 등에 대한 희재의 다재다능한 학식을 보여준다. 그는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대구 · 경북을 대표하는 근대 서화가였다. 특히 사군자, 기명절지, 산수화, 풍속화 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에 능통했다. 그럼에도 그의 삶과 뛰어난 예술세계는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희재는 근 · 현대를 살아온 문인화가 대부분이 그렇듯이 한국 최초의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작가 활동을 시작했으며, 1958년에 현재 대구경북서예가협회의 전신인 해동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으로서 이후에 회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통해 그 화명을 남긴 경산 문인화의 개조이다.
희재 문인화의 특징 및 작품 분석
희재로 대표되는 경산의 문인화는 영남문인화의 한 축이다. 대구의 문인화가 곧 경북의 문인화로 인식되는 현시점에 희재 황기식의 조명은 경산 문인화이자 경북 문인화의 재발견이면서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희재의 문인화는 대구문인화의 중추 죽농 서동균(이하 죽농)과 비견된다. 죽농은 이미 한국 근대전통화단을 대표하는 문인화가로서 활달한 필선과 맑은 농담 구사, 뛰어난 조형미로 미술사에 화명의 위상이 높다. 한편 희재는 작품세계에서 죽농과 비견할 정도의 필묵 구사와 조형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화역 또한 훨씬 넓었음에도 지금에 와서야 그 화명이 드러나고 있다. 죽농의 화역은 사군자화, 기명절지화, 화조화 그리고 몇 점의 병풍으로 남은 산수화에 그치지만, 희재는 현존 작품들로 살펴볼 때 화역이 앞서 언급된 죽농의 화역을 포함한 단계를 넘어 조선말기 쇠퇴에 이른 풍속화에까지 실력을 선보였다.
희재는 사군자화나 기명절지화, 화조화에서 대구의 서병오나 죽농에 비견되면서도 그들과는 또 다른 자신만의 개성이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초기 사군자화와 화조화는 대구의 죽농과 마찬가지로 영남 북부권 문인화가 그렇듯 서병오풍의 활달한 농묵과 필법이 구사되었다. 예를 들어 희재의 〈묵매〉와 서병오의 〈묵매〉는 짙은 농묵과 발묵 그리고 일필휘지로 그려낸 필선에서 영남 대구의 문인화풍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희재의 〈금강산도〉나 풍속화에서는 상반되는 필법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금강산도 병풍 등에서는 겸재 정선 이후, 금강산을 가장 잘 표현해낸 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소정 변관식의 서양적 풍경화 같은 실경산수화의 표현 기법이 구사되어 있다. 그의 풍속화 역시 사군자화에서 구사되는 활달한 필선보다는 다소 동양화적인 필선으로 표현되어있다. 희재의 금강산 일부를 그린 실경산수화와 소정의 금강산 실경산수화를 비교하면 두 그림 모두 조선말기 산수화가 조석진이나 안중식의 산수화와 같은 중국풍의 관념산수화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일본식 서양화법이다.
이상, 희재의 이중적 화풍은 조선말기에서 근대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변화의 국면을 맞이했던 20세기 초 한국근대미술의 양상을 연구하는 좋은 사례로써 서양화나 일본화가 유행하는 서울 화단과 사군자 중심의 지역 화단을 활발히 오가며 활동하면서 폭넓은 화법을 수용했음을 확인시킨다.
조선말기에서 근대로 접어들면서 서울 화단에서 전통산수화는 서양의 풍경화 같은 근대적 실경화로 변모하고 있었으며, 지조와 절개의 정신성이 강조되는 사군자화 중심의 문인화는 지나치게 관념적이어서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5회를 기점으로 외면당했다. 그리하여 사군자화는 오히려 영남과 호남 지역에서 활달한 지역 화단이 형성되었는데, 희재의 다양한 화역은 동시대 서울 화단과 지역 화단의 차별적 형성의 변화를 모두 보여줘 예술사적 가치가 높다. 따라서 추후 희재의 문인화 연구에서 그 의의는 영남의 근대미술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미술사에 또 다른 한 획을 긋는 발굴이 될 것이다.
〈금강산도〉 94.5×32.5cm(1폭) 1967
황준명 소장 희재는 생전 금강산을 2~3차례 답사한 것으로 가족들은 기억하고 있으며, 금강산에서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 희재는 분단 이후 조선인들이 금강산에 대해 가졌던 민족의 영산으로서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금강산도 병풍을 그렸다
김성환(Sung Hwan Kim)
〈Temper Clay〉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June 5~July 18, 2021. Digital image © 2022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Photo: Robert Gerhardt
이번 특별전에는 희재 황기식의 독립운동 이력이 담긴 국가기록원 소장의 《형사사건부》(1919), 향토사학자로서 펴낸 《자인현읍지》(1932), 신문 기고문, 사진, 서예 교본, 금강산 화집 등의 아카이브도 전시되었다
〈묵죽〉134×35cm(1폭) 1958 황준명 소장 1958년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그린 대나무 10폭 그림
(사진 왼쪽부터) 〈국화〉 122.5×32cm 연도미상 전일주 소장, 〈매화〉 124×32cm 연도미상 전일주 소장, 〈묵죽〉 125.5×32cm 연도미상 소헌미술관 소장,
〈난초〉 122×32cm 연도미상 전일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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