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14인의 목소리
강은경 〈낯선 두 사람의 차 마시는 거리: 금천, 찻자리〉 찻자리 가변크기 2022
조재영 〈그녀들의 정원〉 목재, 스티로폼, 철사, 조명 가변설치 2022
14인의 목소리
임서진 | 독립기획자
전시라는 매체가 작가 또는 기획자의 말을 중력 삼아 관람자와 소통해온 것을 고려했을 때, 서로 다른 목소리가 바쁘게 오가고 있는 듯한 전시 《14인의 목소리》에서 관람자는 가장 먼저 화자를 파악하고자 할 것이다. 금천구 및 인근지역의 주민 7인과 문화예술 종사자 7인, 그리고 이들의 발언과 대화를 시각언어로 포착하고자 하는 작가 3인이 참여한 이 전시는 미술의 영역에서 열리는 여느 전시보다 더 복잡한 소통 구조를 가진다.
전시 공간은 총 네 개의 섹션으로 구분되어 있다. 참여자들은 각 섹션에서 주어진 주제 혹은 지시사항에 따라 대화를 나눈다. ‘사적인 연결고리’라는 소제목의 섹션에서는 14인의 참여자가 제출한 오브제가 전시되고 있었다. 오브제 중 일부는 금천에서 운영하는 공공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자발적인 공동체 활동을 진행하며 제작한 사진 및 출판물 형태의 결과물이다. 다른 몇몇 참여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애장품을 내놓았다. 작품을 선보이듯 좌대 위에 놓인 오브제의 옆에는 그것이 제출자에게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는 짧은 글이 함께 전시된다. 그중 “아이의 성장 동선을 맞출 수 있는 마을에서 일하기” 위해 마을공동체 활동을 시작했다는 중년 여성, 자녀와 함께 이웃을 만날 수 있는 편안한 장소라며 놀이터의 사진을 제시한 튀르키예 결혼이주 여성의 글은 어린이, 여성, 이주민으로 이루어진 금천의 일상을 상상해보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20~30대 참여자가 제출한 오브제와 글을 통해서는 젊은 인구의 가구 형태와 직업의 다양성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나머지 세 개 섹션에서는 강은경, 유장우, 조재영 작가의 개입과 함께 참여자들이 교류하는 모습이 전시되고 있었다. 유장우의 〈무제〉(2022)는 지역의 문화예술 기관에서 개최된 좌담회를 기록한 작업으로 화자의 목소리, 손, 발에 초점을 맞춘 3채널 영상 작업이다. 영상에는 금나래갤러리, 금천예술공장, 범일운수종점 Tiger1, 북서울시립미술관,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G밸리산업박물관, #메이크구로창작소의 관계자들이 모여 서울 서남권 예술생태계의 조건과 이를 고려한 각 기관의 지향점을 공유한다. 이때 이들의 주된 고민은 지역주민, 지역작가, 지역사를 아우르는 지역성의 가능성과 한계다. 각 기관이 중요하게 여기는 지역성이란 모두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르다. 이 미묘한 차이는 과거, 현재, 미래의 서로 다른 조합과 농도에 달려있다. 관객 개발의 문제에서는 현재의 지역주민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반면 기관의 교육적 역할을 논할 때는 금천의 역사가 필수적인 요소로 언급된다.
강은경과 조재영의 작업은 참여자 14인의 만남을 여러 단위로 재조직한다. 강은경의 〈낯선 두 사람의 차 마시는 거리〉(2022)는 두 사람이 함께 차를 마시는 과정을 기록한 워크숍 및 설치 작업이다. 두 사람은 자신이 마실 티백을 선택하고, 자신의 짝이 된 상대방과 시간을 보내기에 편안한 물리적 거리를 함께 설정한다. 이 거리는 노란 끈으로 측정되며, 이 끈은 추후 두 사람의 티백을 연결하는 데 사용된다. 실로 이어진 두 사람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대화를 나눈다. 이 과정을 수행한 흔적은 문서, 사진, 실이 달린 티백의 형태로 전시 공간에 남겨진다. 조재영의 설치 작업 〈그녀들의 정원〉(2022)은 지역주민들이 금천구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말을 재료 삼아 만들어졌다. 지역주민과의 대담 이후 작가는 “엄마들”, “돌보다”, “구로공단”, “수출의 다리”, “마을을 가꾸어 갔습니다”와 같은 말들을 선택하여 목록을 만들었다. 이 목록으로부터 작가는 50~70대 여성의 존재를 포착하였으며 지역을 가꾸고 일궈낸 주역들로 그들을 소개한다. 하나의 구조물에 조명을 비춰 그 그림자가 거대하게 메아리치는 형상을 만든 조재영의 작업은 여성의 노동과 구로공단이라는 지역의 과거를 지목하며 그것의 메아리로서 현재를 바라보는 연결적인 관점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소 많은 요소로 이루어진 《14인의 목소리》는 하나로 수렴되지 않은 채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며 표류하는 느낌을 준다. 이런 혼란스러운 감각이 가시지 않는 까닭을 되돌아보면서, 전시에서 산발적으로 언급된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1964년 수출산업의 증진을 위해 조성되었던 ‘구로공단’은 2000년에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금천G밸리’라고도 불리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내세우는 디지털 기술, 스타트업, 젊음, 혁신 등의 키워드는 현재를 과거로부터 분리하고 미래에 과중한 무게를 두는 관점을 갖고 있기에 문제적일 수 있다. 더불어 금천구는 1995년에 신설된 행정구역으로, 이전에는 영등포구와 구로구의 일부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했을 때 금천구의 지역성을 모색하는 일은 불규칙한 과거를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제임을 알 수 있다. 지역의 현재를 조명하는 전시는 이처럼 과거와의 접속이 어려워진 현실 속에서 지역성을 모색하는 일의 어수선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근대화 이후 많은 지역이 공통적으로 직면한 난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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