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SANG NAM LEE

이상남은 회화에 신조형주의, 절대주의의 영향을 흡수하여 작가가 본 세계의 질서를 풀어왔다. 그의 작품에는 당시 ‘현대미술의 중심지’였던 뉴욕에서 이방인 예술가가 겪었던 격정적이고 불안한 감정 상태와 지속적인 수련과 배움으로 이루어낸 도상의 명확한 표현력이 공존한다. 바탕에 아크릴 물감을 칠하고 사포질로 갈아내어 얻은 표면 위에 패턴을 그린 후 그 표면을 다시 갈아내는 행위의 반복으로 완성된 표면이자 지층은 회화의 본질에 대한 작가의 탐구를 보여준다. 지난해 봄 개인전 《감각의 요새》(PKM 갤러리, 2022)에서 서로 다른 문명에서 발생한 도상과 부호가 적층된 신작 회화 20점을 선보인 이상남은 보다 깊은 시각적 세계를 만들어가려 지속적으로 분투하고 있다.

이상남은 1953년 태어났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1년 도미한 후 현재까지 뉴욕에서 작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뉴욕 엘가 위머 갤러리, 암스테르담 아페르 갤러리, PKM 갤러리 등에서 20회 이상의 개인전을 열었다. 제3회 포즈난 메디에이션 비엔날레, 제15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 국제적인 기획전에 참여해왔다. 경기도미술관, 주일 한국대사관, 폴란드 포즈난 신공항 로비 등에 작품이 영구 설치되어 있다.

사진 박흥순

이상남의 새로운 유형의 기하추상:〈풍경의 알고리듬〉에서 〈감각의 제국〉까지

김홍희 |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

1. 이상남은 2008년 개인전 《풍경의 알고리듬》(PKM Trinity)에서 동명의 연작을 발표하면서 국내 화단에 우뚝 서는 재미화가로 각인되었다. 1981년 뉴욕으로 건너간 지 27년 만의 일이다. ‘풍경의 알고리듬’은 단지 전시나 작품 제목, 또는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미학적 개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기하추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추상화의 신영역을 개척한 점에서,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와 함께 퇴색하고 있는 기하추상, 크게는 페인팅을 부활시킨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를 갖는다.
‘풍경의 알고리듬’은 영문 ‘Landscapic Algorithm’의 번역어로 언제부터인지 그렇게 통용되고 있는 국문 제목이다. 그런데 ‘landscapic’은 사전에 없는 단어로, 고의든 불의든 ‘풍경적’이라는 의미에서 작가가 붙인 한국식 영어이다. 직역하면 ‘풍경적 알고리듬’이 될 터인데, “내 상상은 자연이 아닌 인공에서 출발한 것으로, 현대 문명사회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이 내게는 정물화요, 풍경화”라는 본인의 언급을 돌이켜보면 맥락상 ‘알고리듬의 풍경’이 더 적절해 보인다. 용어의 문제를 떠나 중요한 점은 작가가 ‘Landscapic Algorithm’이라는 제하에 주제적, 개념적으로 고유할 뿐 아니라, 양식과 기법 면에서 독특한 자신 고유의 추상미술, ‘새로운 유형의 기하추상’을 창안했다는 사실이다. “말 되지 않는 것으로 대든다”라고 스스로를 솔직하게 묘사하듯, 그는 실제로 말 되지 않는 제목으로 말 되는 작품세계를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머뭇거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집요한 기질과 뛰어난 감성적 직관, 그리고 무엇보다 고품격의 작품 자체로 말이다.

2. 〈풍경의 알고리듬〉 이전 그의 초기 작업은, 1997년 갤러리 현대와 1998년 뉴욕의 엘가 위머 갤러리에서 발표한 작품들이 예시하듯이, 일견 모더니즘 계열의 단순 기하추상화로 보인다. 흰 바탕에 주로 검은색으로 정교하게 그린 원, 직선, 궁형의 선묘가 기계도면이나 디자인 도안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적이고 고착적인 일반 기하추상과 달리 상하좌우로 향하는 선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안겨준다. 생명력을 암시하는 이러한 동적 운동감은 “직선은 죽음이고 원은 삶이다. 생과 사는 하나의 원 속에 있다”는 자신의 진술이 함의하는 바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즉 생과 사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단순 조형을 넘어서는, 의미로 충만한 추상미학을 발동시킨 배경이라고 가정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형식을 초월하여 종교적 경지나 정신세계를 표현한 맥락에서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작업을 불교나 동양사상의 영향으로 피력했지만, 초월적인 신비주의 경향의 추상화는 20세기 전반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Suprematism) 회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사조들은 정신적 가치를 예술로 승화시킨 의미있는 추상화의 선구적 사례였을 뿐 아니라, 양식적으로도 디자인 요소가 강한 이상남 작업과 필연적인 유사성을 시사한다. 더구나 이들이 자연환경적으로 침울한 북유럽과 러시아 태생이라는 사실을 북구 추상양식의 기원을 풍토심리학적으로 설명한 보링거(Wilhelm Worringer)의 학설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흥미로운 유추가 가능해진다. 이상남의 추상회화는 북유럽 기후만큼 감정이입이 어려운 냉랭하고 살벌한 뉴욕의 미술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 타자적 생존을 위한 추상적 예술충동의 결과라는 개연성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남 개인전 《감각의 요새》PKM 갤러리 설치 광경 2022
이상남 개인전 《풍경의 알고리듬》 PKM Trinity 설치 광경 2008
〈풍경의 알고리듬(Light+Right)〉 알루미늄 패널에 아크릴릭 우레탄 1,130×1,090cm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설치 광경 2013

3. 이상남이 뉴욕에 체류하기 시작했던 1980년대 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 속에서 신표현주의와 신추상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움트던 시기였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미학적 신구 투쟁을 벌이던 그 혼란의 시기에 이상남은 기나긴 방황과 고독한 칩거 속에서 동시대 신추상을 독자적으로 재맥락화한 고유의 추상언어를 개발하게 된다. 그 결실이 2006~2008년 사이 빛을 보게 되는 〈풍경의 알고리듬〉이다. 그것은 건조한 기하추상에 인간의 내면 심리와 시대정신을 반영한 의미 있는 추상, 학습된 모더니즘과 신생 포스트모더니즘을 절충한 ‘새로운 유형의 기하추상’의 용의주도한 제안이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잇길에서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부활시킨 주제의식을 고양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모더니즘 회화의 궁극적 본질인 평면성에 집착했다.
그는 평면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손상시키는 양면적 태도로 끈질기게 평면과 대결한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개념적으로 2차원적인 숫자, 문자, 기호, 부호, 암호, 도표 등을 자신의 패턴 모티프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재스퍼 존스가 성조기, 과녁과 같이 평면으로 존재하는 물체를 재현 대상으로 삼았던 사실과 같은 맥락이다. 다음 단계로 그는 평면적 모티프를 독자적 방식으로 패턴화한다. 자나 컴퍼스로 그린 정밀한 프로토타입 이미지를 컴퓨터로 변주하거나 복사기로 확대/축소한 후 재조합한 최종패턴을 캔버스나 패널 위에 손으로 그리며 색칠하는 다단계의 수작업을 거친다. 집적/접촉적으로 몸과 씨름하는 사이, 그 패턴들은 작가의 신체적 리듬을 반영하듯 화면을 생명력으로 진동시킨다. 평면에 거는 작가의 미학적 베팅은 무엇보다 패턴이 얹히는 바탕면 작업으로 전격화된다. 화판 위에 아크릴 물감을 수십 번 바르며 사포질로 갈아낸 다음 그 위에 자신 고유의 패턴을 그리고 칠하며 사포질하는 반복행위로 평면의 지층을 한층 한층 쌓아올리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평면 위에서 평면의 깊이가 생성된다. 패턴을 만들고 바탕면을 고르는 노동집약적인 창조행위를 통해 회화와 디자인, 물질과 정신, 정과 동, 평면과 깊이가 공존하는 무궁무진한 변수의 알고리듬 풍경이 창출된다.

〈감각의 요새(H 07)〉 목재 패널에 아크릴릭 240×200cm 2021

4. 2008년 개인전 《풍경의 알고리듬》 출품작 가운데 단연 돋보인 작품은 일군의 대형 흑백 페인팅이었다. 흰 바탕에 검은색으로 표기된 플러스, 마이너스, 나누기와 같은 수학적 부호들과 타원형의 매듭 같은 비밀스러운 다이어그램들, 특히 그 검은 패턴들이 그려지기보다는 상감 세공으로 새겨진 듯한 정교함과 기계적 완벽성을 발휘하며 시선을 끌어모은 것이다. 이는 옻칠이라는 새로운 재료의 활용으로 얻어진 경이로운 효과였다. 이를테면 나무 패널 위에 주로 바탕색으로 사용하던 흰 아크릴 대신에 검은 옻칠을 입히고 사포질로 지워가며 윤기 흐르는 검은 바탕면을 만들고, 그 위에 흰색 아크릴을 도포하면서 기호 패턴이 될 부분만 검은 옻칠을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다. 배경이 형상이 되는 역전적 방법에 의해 드러난 최종의 검은 선들은 옻칠 본연의 물질성과 표면성으로 강력한 흡인력을 내뿜었다. 이에 덧붙여 일종의 단축법에 의해 화면 위로 올라갈수록 감축되는 부호들이 옵티컬하고 키네틱한 진동의 미장센을 연출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증폭시켰다.
이 신종의 대형 흑백화는 2006년 LIG 손해보험 신축사옥(현재 KB손해보험으로 이관) 커미션 작품으로 처음 선보인 이래, 경기도미술관(2010), 폴란드 포즈난 공항 (2012), 도쿄 소재 한국대사관(2013)에서 대형 벽화로 재탄생했다. 공공건축물 벽화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며 이상남의 브랜드로 각인된 흑백의 벽화는 압도적 크기(경기도미술관과 포즈난 공항의 벽화는 각각 길이 46m, 74m)로 현상학적 육체인식을 고취하며 과대과장적인 포스트모던 특성을 내재화했다. ‘풍경의 알고리듬’에 배태된 포스트모던 감성은 그것의 파생적 작업들인 〈라이트+롸이트(Light+Right)〉(2012), 〈네 번 접은 풍경〉(2017), 〈감각의 요새〉(2022) 연작들에서 극대화되었다. 포스트모던 사회의 범람하는 이미지를 연상시키듯, 이 작업들은 기존의 패턴을 화면 가득 증식, 해체시키는 새로운 국면의 조형으로 발전, 그 자체가 맥시멀리즘으로 포화된 현대 알고리듬 풍경의 결정판임을 시사했다.

5. 가장 근작이자 현재진행형의 작품인 〈감각의 요새〉에서 작가는 보다 풍성해진 컬러와 다이내믹한 패턴으로 난공불락의 ‘감각의 제국’을 건설했다. 무관계의 역학으로 종횡무진하는 패턴들이 마치 탈위계적이고 탈규칙적인 리좀(Rhizome)적 모델을 연상시킨다. 이제 이상남의 패턴은 자신의 조형적 기원인 원, 직선과 같은 기하학을 넘어서 연기나 안개와 같이 얽히고 번지며 그 기원을 찾을 수 없는 신종의 기하학, 탈기하학적인 ‘새로운 유형의 기하추상’으로 전환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부계적으로 발전, 진화해온 기하학을 비껴가는 ‘젠더프리’한 기하학일지도 모른다. 이상남은 남성적 힘과 야망 뒤에 숨은 여성적 섬세함으로 체화된 남성성의 굴레를 벗어나 해방적이고 탈아적인 창조의 황홀을 만끽하는 것일까?
작가의 완숙기 기량이 총동원된 〈감각의 요새〉 연작들은 거의 폭력에 가까운 아름다움과 섬뜩할 정도의 에너지 응집을 표출하며, 실로 “3초 안에 관객의 눈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자신의 승부욕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시각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현란한 이미지 속에 알고리듬이 표상하는 현대 디지털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보하며 의미있는 추상의 끈을 놓지 않는다. 컴퓨터 아닌 순수 회화적 방식으로 알고리듬을 풍경화, 광경화하는 우회적 태도가 이를 암시한다. 그에게 회화는 알고리듬의 우화적 대안이자 처방이다. 그는 알고리듬을 뛰어넘기 위해 회화에 천착하는 동시에 그것을 의역한다. 백남준 예술의 메시지가 비디오라는 신매체의 창안에 의거했다면, 이상남은 회화를 갱신하는 새로운 기법과 방법론을 개발하고 변치 않는 주제의식으로 의미있는 추상을 고수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이다.

〈네 번 접은 풍경(L 136)〉 목재 패널에 아크릴릭 152.5×183.5cm 2016
〈네 번 접은 풍경(L 128)〉 목재 패널에 아크릴릭 152.5×183.5cm 2015

사진제공: PKM 갤러리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