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EATURE

《일시적 개입》 &
《땅, 호흡, 소리의 교란자: 포스트 콜로니얼 미학》

아르코미술관의 《일시적 개입》(2022.11.18~1.21)과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에서 열린 《땅, 호흡, 소리의 교란자: 포스트 콜로니얼 미학》(2022.12.3~31)은 모두 지역을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지역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려는 시도로 이루어진 전시다. 《일시적 개입》은 다양한 이들의 관계 맺기에서 파생되는 지속가능한 공동체로서의 지역성을, 《포스트 콜로니얼 미학》은 포스트 콜로니얼 담론의 시각을 기조로 문화를 발굴하고 보존하며 로컬리티를 재정의하는 다양한 실천들을 보여준다.

코무니타스 구부악 코피 〈포스 론다 프로젝트〉 펜통간, 포스 론다 방 설치, 포스 론다 상징 트로피, 커뮤니티 사진, 농기구, 시계, 도미노, 게임 카드 등 (공동작업:RW 06 캄풍 자와) 아르코미술관 전시 전경 2022

엘리아 누르비스타 〈과일〉 과일 박스 및 과일 설치 스페이스 씨 전시 전경 2019

일시적인 개입과 교란을 지속하기 위한 예술 실천의 네트워크를 위해

남웅 | 미술비평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지역에 개입하며 로컬리티를 비평적으로 창안하는 예술 콜렉티브 작업에 초점을 맞춘 전시가 서울의 미술공간 두 곳에서 진행되었다. 아르코미술관의 《일시적 개입》 (2022.11.18~1.21)과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space*c에서 열린 《땅, 호흡, 소리의 교란자: 포스트 콜로니얼 미학》 (2022.12.3~31, 이하 《포스트 콜로니얼 미학》)은 공통적으로 지역을 고정된 공간과 문화로 상정하지 않는다.

일시적 개입이 상정하는 로컬리티라는 울타리
《일시적 개입》은 로컬리티를 둘러싼 다양한 방향과 방법론적 시도를 살피게 한다. 가령 데이터를 수집하고 생태계와 공동체에 참여·관찰하는 활동은 지리적 배경에 기반한다. 거제도 조선산업과 풍경의 윤곽을 좇는 거제 섬도와, 부산을 거점 삼아 작업해온 실험실C는 다분히 지리적 위치에 의존한다. 인도네시아 솔록에 기반을 둔 코무니타스 구부악 코피(Gubuak Kopi)와 한국의 젤리장×띵크케이크는 지역 커뮤니티와 공동체 생활에 감응하며 지식을 생산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관계 기반 작업을 선보인다. 김현주×조광희는 미군 부대 정착촌의 주민들과 접점을 넓히며 지역의 변화 속에서 이들이 살아온 혼종의 궤적을 훑는다. 시리아 동북부 자치행정부 로자바에서 ‘국가 없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프로젝트에 뿌리를 둔 로자바 필름 코뮨은 복원과 투쟁이라는 상반된 방향의 운동을 영화 제작으로 실천하며 로컬리티의 지리적 기반을 재정립한다.
참여한 콜렉티브 중에는 굳이 지리학적 맥락과 구성 요소들을 필수요소로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있다. 광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독립큐레이터 그룹 오버랩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덴마크 아티스트 예페 하인은 지역을 거점 삼으며 다른 지역 예술 콜렉티브와 협업하거나 전시장을 한시적으로 점거하며 관객들과 호흡을 맞춘다. 그런가 하면 지역 특정성에 국한하지 않으면서도 공동체의 민주적 의사결정을 고려하며 예술 작업뿐 아니라 제작과 감상의 환경까지 비평적으로 접근하는 작업까지도 로컬리티 예술의 관점으로 접근한다. 페미니즘을 공동의 기치로 삼는 노뉴워크와, 사회적 소수자의 감각적 재현뿐 아니라 전시 감상과 향유의 여건까지 전면화하는 다이애나 랩의 활동들은 소셜 네트워크와 메타버스 환경에서 갱신된 로컬리티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할 점은 이들의 작업 범주가 네트워크를 무한정 확장하기보다 내적 관계에 한정하여 울타리 짓는 것이다. 물리적 효용을 고려한 것이겠지만, 이들의 작업은 안전과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로서 울타리의 의미를 환기한다.
《일시적 개입》에서 로컬리티는 한시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고정된 대상으로 상정되거나, 예술 프로젝트에 의해 한시적으로 재구성하는 개념으로 접근된다. 상이한 방법론을 관통하는 것은 이들이 로컬이라는 울타리를 확인하며, 내부의 미시적인 역동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이는 지역 간 연결을 강조하고 지역 내 변화를 향하면서도, 내부의 보존과 안전을 도모하는 데 치중하고, 더러는 자조적인 기록과 연결망에 주목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역성은 무엇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지, 보호되어야 하는 지역성은 무엇인지, 그럼에도 변화를 이야기한다면 지역 자체의 위상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고찰하는 것이 다음의 단계처럼 보인다.

김현주×조광희 〈낭독의 방 –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들〉 멀티미디어 설치, 관객참여 퍼포먼스, 지역민의 구술이 담긴 낭독책 10권, 오디오, 마이크, 스피커, 보면대 가변크기 아르코미술관 2022

로자바 필름 코뮨 〈외로운 나무들〉 HD영상, 43분 아르코미술관 전시 전경 2017

연안과 접경으로서 로컬리티와 예술 실천
《포스트 콜로니얼 미학》은 리슨투더시티가 기획한 전시다. 전시는 2016년 말 이들이 진행한 《아시아로컬리티》를 강력하게 연상시키는데, 당시 권위적 거버넌스와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공동체를 가꿔나가는 예술 콜렉티브 활동을 소개했다면, 이번에는 아시아에서 전 세계로 확대하면서 포스트 콜로니얼 담론의 시각을 적극적으로 끌고 오는 변별점을 갖는다.
로컬리티를 논하는 기획의 저변에는 지배와 식민과 수탈, 착취의 역사와 구조가 배경처럼 있다. 이는 1세계와 3세계의 구획 아래 일방적인 지배와 억압의 구도를 경계하는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의 접근에 공명한다. 이들은 피식민지 주체들을 수동적이고 무력한 이들로 보는 것과 더불어 탈식민주의를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로 수렴시켜 해석하는 시도를 경계한다. 호미바바(Homi Bhabha)의 혼성성(hybridity)을 인용하는 서문은 신자유주의의 다국적 기업과 금융화가 노동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국가 간 이동을 빈번하게 만들어 지리적 재배치 또한 야기해왔음을, 단적으로 대도시의 과잉 집중은 도시 운용을 위해 비도시와 도시 내부 하위계급의 자원과 인력을 수탈하고 제도와 사회 서비스에서 배제하는 빈곤화를 초래함을 강조한다. 하여 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터전을 지키는 것만큼 무엇이 변화하는가를 살피는 태도와, 지역성을 주도적으로 재생산하면서도 어떤 협상 가능성이 채택되고 배제되는가를 살필 비판적 시선이 필요하다.
전시는 현장에서 문화를 발굴하고 보존과 변형을 실천하며 로컬리티를 재정의해온 작업들을 배치한다. 가령 멕시코에서 활동하는 콜렉티브 아마시호(Collective Amasijo)의 경우 수수농장의 대형화로 선인장류 식물인 마구이 재배지가 사라지는 상황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변화가 원주민의 생활토대를 근본부터 바꾸고 있음을 환기한다. 이는 인도네시아 작가 엘리아 누르비스타 또한 주목하는 바, 열대의 이국성에 대한 열광적 소비로 관광지와 과일 농장이 늘고 원주민들이 터전을 잃는 형국과 비슷하다. 세계를 누비는 열대과일 저편에는 생태계 난민이 되어 이주노동을 선택하는 원주민의 위상이 대치하는 것이다.
더불어 전시는 시작부터 이미 오염될 수밖에 없을 대항 행동을, 거꾸로 주류의 소비문화 또한 지역 정서와 감수성에 호환되고 절충되면서 침식과 변형을 겪을 수밖에 없음을 전제한다. 마이클 릉(Michel Leung)은 잭플룻을 농사짓고 살아온 홍콩 왕차우마을이 주민들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고 사라지는 상황에서 주민들의 행동을 기록하고 마을의 흔적을 보존하는데 검열과 규제를 피해 독립출판물을 제작하는 실천을 보여준다. 마을의 파괴는 저소득 시민이 거주할 공공주택 개발을 위한 것인데, 이는 또한 공익을 위한 행정이 파괴를 전제하는 딜레마를 상기시킨다. 예의 혼성적 딜레마는 아난타 인트라-악소른(Anunta Intra-Aksorn) 역시 주목하는 바, 해외에서 열대과일만큼이나 열광적으로 소비하는 태국의 새우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양식장 개발로 사라지는 맹그로브숲을 지키기 위해 빅트리(BigTrees)라는 단체가 관광산업을 차용하여 에코투어리즘 상품을 개발하여 연안의 환경적·기능적 중요성을 홍보하는 것이 그러하다.
전시는 이들의 동형적 혼성성에 주목하며 자신의 실천을 포함한 이들의 정동이 서로 간 공명하고 있음을, 단지 양태적 유사가 아니라 구조적 수탈과 위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같은 지배체제 위에 놓였을지라도 지리적·역사적으로 다른 환경과 전략의 수행은 상이한 형태의 로컬리티를 갱신한다. 예의 딜레마와 혼성적 상황은 지배이데올로기와 저항 행동을 문자 그대로 분리하는데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가령 민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포스트콜로니얼 담론의 배경에는, 외부와의 세력 불균형 속에서 제 영토에 침입하여 강제적으로 터전을 파괴하면 가족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민족과 국가를 고안하고 소환하는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역과 민족이 일방적인 파괴와 수탈에 반동적으로 생성되지만은 않을 것이며, 복잡한 협상과 경합의 정치적 긴장, 참조와 혼성 등의 문화적 수용과 오용을 통해 상이한 로컬리티를 지속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다.

다이애나랩×우에타 지로 〈우리는 이미 펜스를 만난 적이 있잖아요〉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2시간 39분 40초 아르코미술관 전시 전경 2022

아난타 인트라 악소른(빅트리) 〈자연의 지혜; 자연의 영혼〉 450×290cm 천 위에 프린트 스페이스 씨 전시 전경 2022

초국적 자본의 개입만큼이나 배타적인 울타리를 경계하는 태도는, 지역성에 대해 향수를 갖거나 낭만화하는 태도로부터 거리를 두며 로컬리티를 재사유하는 예술가의 위치를 드러낸다. 리슨투더시티의 〈공동체 요리:미래주방〉에 전시된 친환경 곡물마저 이미 유전자 변형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설명하는 지점은, 초국적 자본으로부터 연루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지역성을 지속적으로 재사유할 것을 보여준다. 바로 옆으로 이어지는 소울스케이프의 음악 작업과 작업적 레퍼런스는 이러한 의도와 공명한다.
그럼에도 지켜야 하는 것들, 대개는 지키는 데 실패하고 마는 것들은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을지로 재개발과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선 이야기들은 리슨투더시티가 토건 개발로 사라져가는 생태를 필사적으로 기록해온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밤의 을지로 공사 현장에 서서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중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는 구절을 홀로 낭독하는 장면은, 일방적인 개발에 스러져가는 풍경을 지키려 하면서도 이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예술가의 태도를 환기한다.
《포스트 콜로니얼 미학》은 재차 연안과 하구로서 접경과 공유지의 개념을 강조한다.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예술가의 위치와 역할에 포개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접경지역의 생태학적 기능 외에도 상이한 문화와 영토가 맞물리면서 번역과 교환 속에 문법과 질서를 창안하는 예술적 실천의 의의를 확장할 수 있다. 협상뿐 아니라 침입과 점거, 쟁투가 일어나는 장소는 순간들의 명멸 속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성을 발명할 수 있고, 또는 오랜 시간 지켜온 시간이 침식당하는 중에도 제 삶의 형식들을 고안하고 표현할 수 있다. 문화적, 인종적, 역사적, 정치적 맥락이 혼재한 장소는 언제든 경계선을 달리할 수 있다는 점에 이미 오염되어 있다. 혹은 오염과 정화의 이분법적 프레임 자체를 오염시킴으로써 보존해야 하는 시공간까지도 새롭게 갱신할 수 있다. 어쩌면 전시는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담론을 빌려 예술의 (무의미로서)의미와 (비기능으로서)기능을 다시 찾으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리슨투더시티 〈공동체 요리: 미래 주방〉 주방 설치, 음식 만들기 스페이스 씨 퍼포먼스 전경 2022

리슨투더시티 〈망각의 도시〉 15분 아르코미술관 전시 전경 2022

혼성의 로컬리티, 혼성의 큐레토리얼
두 전시는 지역 내부의 풍속과 산업, 풍경을 기록하고 관찰하면서 지역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개입한다. 지역의 재현과 예술의 실천을 상이한 관점으로 다루는 두 전시는 상보적인 위상을 갖는다.
전시들은 지역성을 기반으로 하는 콜렉티브의 작업이 터전을 지키면서도 배타성을 고수하지 않으며, 이미 지배 질서에 연루되었을지라도 그 장치와 자원을 전유하면서도 그에 잠식되지 않아야 함을 상기시킨다. 이들이 조명하는 로컬리티와 그 조건은 담론적 위계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원칙을 강제할 수도 없다. 그런 점에 콜렉티브의 예술적 실천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동시에 윤리적이다. 무엇보다 기득권 질서로부터 전세가 기울고 패할 수밖에 없음을 직감하는 상황에도 열패의 정념뿐 아니라 그에 파생하는 낭만적 이상화와 냉소의 유혹을 경계할 수 있는 실천의 동력까지 (어쩌면) 요청받는다.
사라지고 보호되어야 하는 이야기를, 무용한 흔적을 필사적으로 설명하고 증언하려는 시도는 발터 벤야민이 경계했던 ‘정치의 미학화’의 음화된 버전을, 다시 말해 파시즘 정치를 상찬하던 미적 수사가 쇠잔해져 가는 이들의 시간성에 대한 향수와 낭만에 안주하는 데 저항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는 예술이 그저 미적 장식으로, 무력하고 예쁜 이야기로 남는 것은 아니라는 항변이기도 할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포스트 콜로니얼 미학》은 전시 기간 기획자와 전시관계자가 상주하며 관객들을 찾아가 설명을 해주었다. 관객에게 닿으려는 친절한 설명은 망각의 경제로부터 무력하게 스러지지 않겠다는 태도로 보이지만, 더불어 전시를 설명적으로 만드는 딜레마를 반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두 전시는 콜렉티브의 작업을 배치하는데 이들이 주목하는 의제의 메시지를 오용 없이 전하는 데 초점을 두는 모습이다. 대체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이슈와 활동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는 구획된 영역마다 작업과 부스를 분리 구획한 박람회의 인상을, 전시 효과보다 의도가 앞서는 인상을 준다. 물론 로컬리티의 혼종성과 그 실천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전시의 큐레토리얼까지 연결되기 어려웠던 데에는 의제 전달에 대한 갈급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할지라도 서로 간 공명하고 개입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론은 고안하기 어려웠을까. 가령 노뉴워크와 다이애나 랩이 자신의 섹터를 확보하는 데서 나아가 메타 로컬리티적인 비평의 관점으로 전시와 로컬리티 실천에서 어떤 정상성의 질서가 고수되고 작동하는가를 역으로 접근했다면 어떠했을지 생각한다. 관객과 전시공간으로부터 협상력을 확보하며 연대의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는 어떤 기예가 필요할까. 그것은 콜렉티브 예술을 비판적으로 재배치하고 실천하는 또 다른 시도로 거듭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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