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모두의 하루에 안녕, 인사를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

이른 아침, 햇빛이 잘 드는 가애 작가의 작업실에는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 책을 쥐었을 때 느껴지는 크기와 도톰한 두께, 만져지는 종이의 사각거리는 질감은 작가를 행복하게 한다. 책이 가득한 서점에서 예쁜 책을 고르는 것도 그의 큰 즐거움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책을 만들고 책을 위한 그림을 그린다.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작업도 책을 그린
〈Things you believe you know well, 2022〉이다.

작가는 작업을 위해 붓보다 가위를 집어 들었다. 색종이를 오리고 조각을 이어 붙여 이야기를 구성한다. 아이가 잠든 틈에 ‘할 수 있는’ 작업 방식이었던 콜라주가 이제는 가애 작가를 대표하는 스타일이 되었다. 자연에서 뛰어놀며 조용히 공부만 하던 아이가 디자인과에 진학하고, 일러스트레이션 작가가 되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작가는 ‘좋아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고 꿋꿋이 지켜낸 소중한 애정은 오늘의 ‘가애’를 만들었다. 덕분에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작가는 작업실에서 어떤 하루를 보낼까? 매서운 한파가 찾아온 날, 온기 가득한 옥탑 작업실에서 가애 작가를 만났다.

작업실에 손때 묻은 소품과 그림들이 가득하다.

작업실 분위기가 근사합니다. 여기서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데요, 작업실에서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요?

이곳에 작업실을 꾸린지는 3년 정도 되었어요. 좋아하는 것들로 하나하나 채우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아침에 오면 우선 커피를 한잔 끓여 마셔요. 예전에는 메일 확인 같은 급한 업무들을 먼저 처리하곤 했었는데 얼마 전부터 콜라주북을 먼저 채우는 것으로 루틴을 바꿨어요.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작은 노트에 콜라주 작업을 합니다. 그러고 나면 금방 점심시간이 되고, 외주 작업을 좀 하다 보면 아이를 하원 시킬 시간이에요. 하루가 바쁘게 지나갑니다.

일의 순서를 바꾸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최근에 『작가 수업』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일과 작업 사이 균형을 고민하던 저에게 도움 되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그중에 ‘창작 활동도 결국 훈련이기에 성실한 연습이 필요하다’라는 내용이 많이 공감됐습니다. 물론 책에서 말하는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지만, 창작자라는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한 부분이 많으니까요. 오전에 일을 먼저 처리하다 보니 개인 작업의 비중이 점점 줄어들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아침에 무조건 콜라주 북을 채우는 것으로 저만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매일의 훈련이 쌓이다 보면 제가 뭘 말하고 싶은지 점점 더 선명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도러시아 브랜디가 글쓰기와 창조성의 방법에 관해 역설한 책 『작가 수업』

최근에 7번째 콜라주 노트를 완성하셨다고 들었어요. 작업 과정이 어떻게 되나요? 

그날그날 마음에 드는 색깔이나 손에 잡히는 종이 한 장으로 시작해서 어울리는 것들을 붙여나갑니다. 하고 싶은 작업이 마뜩잖을 때는 전에 해두었던 스케치 중에 하나 골라서 작업해요. 오 분 만에 끝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시간이 한참 걸리기도 합니다. 콜라주에 몰두하다 보면 약간 춤추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저의 작업 스타일도 몸의 움직임처럼 자유로우니까요. 그렇지만 영감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근육을 단련하듯 매일 노력을 쌓고 있습니다.

착실히 모으고 있는 콜라주 노트

콜라주 작업은 아이가 태어나면서 시작하게 된 거라고 들었어요.

네, 아이를 돌봐야 하다 보니 번거로운 작업을 하기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가위와 색종이를 들었어요. 자는 아이 옆에서 틈틈이 할 수 있었거든요. 제가 콜라주로 처음 완성한 게 바로 이 강아지 그림이에요. 아들 보여주려고 만든 거였는데 재밌어서 계속하다 보니 30개가 되었어요. 그러다 좋은 기회가 되어 『GO WILD』라는 이름으로 출판까지 하게 되었네요. 『방긋, 안녕!』도 아들이 볼만한 이야기를 만들다 책으로 나오게 된 거예요. 아쉽게도 출판되었을 때는 아이가 흥미를 느끼기에 너무 자라버렸지만요. 작업의 영감을 되고 원동력이 되어주는 아들은 완전 복덩이죠.

『GO WILD』(단추, 2022)

아들을 위한 초점 책도 직접 만들었다.

작품을 보면 색상에 먼저 눈이 갑니다. 경쾌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색들의 하모니는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합니다. 색상 선택은 어떻게 하시는 걸까요?

보통 한 색깔이나 한 종이로 시작합니다. 전체적인 톤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어울리는 색들로 조합해봐요. 완성도를 위해서 색을 너무 많이 쓰지는 않아요. 그리고 제가 쓰는 색종이들은 미리 수작업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라 고유의 텍스처를 갖고 있는데 그게 제 작품의 개성이 되는 것 같아요.

작업 스타일이 즉흥적이시군요!

맞아요, 즉흥적으로 하는 작업이 더 많아요. 종종 노트에 해둔 스케치로부터 작업을 시작할 때도 있는데, 그 스케치가 그렇게 정교하지는 않거든요. 낙서처럼 간단해요. 결국은 색종이를 손에 들고 요리조리 가위질할 때 작업이 완성되는 것 같아요. 구체화한 스케치가 없어서 의뢰받은 일을 할 때 곤란한 때도 있어요. 그래서 고안해낸 게 색채 스케치입니다. 라인으로 정돈되어 있지는 않지만, 색상을 조합해 전체적인 느낌을 설명합니다. 대신 이런 작업 스타일 덕분에 수정도 자유로운 편이에요.

작업 중인 작가의 책상

삶의 계획도 그림처럼 즉흥적이신가요?

놀랍게도 엄청 계획적이에요. 이미 11월부터 내년(이제는 올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어요. 계획 짜는 거 되게 좋아하는데…. 만든 계획을 안 지키는 것도 좋아해요. 여행 갈 때 특히 그런데, 계획 없이 갔다가 멋진 곳을 모르고 놓치고 오면 너무 아쉽고 화가 나더라고요. 대신 열심히 조사했지만 가서 안 하는 것은 괜찮아요. 알고 한 선택이니까요. 계획 그 자체에 대한 집착은 없고 느슨한 편이에요.

작업실을 나선 후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시나요?

아이를 하원 시킨 후에는 작업하기가 어려워요. 일이 많을 때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여기서 야근할 때도 있지만 대개 집에서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요. 집에 가서 간식 주고, 씻기고, 저녁 준비하고, 같이 놀다 보면 금방 잘 시간이에요. 작업 시간이 한정되다 보니 밀도 있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아이와 어떤 놀이를?

요새는 그냥 공룡이에요. 그림을 그려도 공룡, 인형도 공룡, 책을 봐도 공룡, 만화를 봐도 공룡. 공룡의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저에게 공룡에 대해 가르쳐주는 수준이 되었어요. 대백과사전을 펼쳐 보이며 “엄마, 여기 있잖아요!”라고 알려줘요. 말 그대로 한 우물을 파는 ‘덕질’인데, 관심의 범위가 좁지만, 애정이 깊어질수록 많은 것들을 알게 되더라고요. 공룡에 몰두할수록 아이의 언어가 확장되고, 움직임을 따라 하며 신체도 발달하고, 빙하나 운석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면서 과학 공부도 하고… 아이의 세계가 나날이 넓어지고 있어요. 덕분에 저도 많이 배우고 있어요.

아이도 엄마처럼 미술을 하길 바라시는지?

그렇진 않은데요, 우리 아들이 그림에 관심이 없고 못 그리면 조금 서운할 것 같기는 해요. 뭔가 저를 닮지 않았다는 말 같아서요. (아빠는 그림을 못 그리거든요. 하하) 지금은 그림 그리는 것보다 정리하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저는 같이 그림 그리면서 더 놀고 싶은데 “엄마 이제 그만 놀자!” 하면서 정리해버려요. 그럴 때는 공룡을 그려주면 좀 흥미를 느껴서 결국 매일 공룡을 그리게 됩니다.

혹시 다음 책의 주제가 공룡인가요?

네 맞아요. 공룡 책이에요. 열심히 작업해서 너무 늦기 전에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작가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궁금해집니다. 

되게 평범한 아이였어요. 아빠 따라 낚시 다니고, 캠핑하면서 동생이랑 노는 게 전부였어요. 근데 맏이라서 그랬는지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미술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저는 그림을 그리게 되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등굣길에 우연히, 정말 영화의 한 순간처럼 미술학원 전단을 받게 된 거예요. 전단에는 ‘이런 사람이 미술을 해야 한다’라며 적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저였어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 상세히 적혀 있더라고요. 그걸 보는데 가슴이 너무 뛰었어요. 그날이 지금도 오늘처럼 너무나 선명해요.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거든요. 그렇게 ‘미술’이란걸 접하고 시각디자인과에 진학하게 되었어요.

미술학원 덕분에 스스로 원석을 발견하셨네요. 

근데 막상 가보니까 ‘디자인’ 이란 게 저랑 잘 안 맞는 것 같았어요. 처음에는 학교 적응도 쉽지 않았었고요. 저는 좋고 싫음이 명확한 사람이거든요. 고민 끝에 디자인과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일 중 싫은 걸 삭제해나가기 시작했어요. 광고, 영상, 타이포…. 꾸준히 지워나가다 대학교 3학년 때 일러스트레이션을 알게 되었어요. 혼자 작업할 수 있고, 크게 내세우지 않아도 되는 점이 좋았고, 처음으로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일이었어요.

졸업 후에도 꾸준히 작업을 했는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땅에 발을 디디는 느낌이 안 들었어요. 그렇지만 돈은 벌어야 했기에 들어오는 외주 작업을 하며 그저 버텼어요. 그 기분으로 한 10년을 보내다 내 작업을 해야겠다 생각이 들었을 때, 공황장애가 처음 왔어요. 그리고 또 벨기에에서 남편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쫓기는 마음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그만 또 퓨즈가 나가 버렸죠. 아무도 저에게 채찍질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많이 내몰았던 것 같아요. 아이 낳기 전까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아주 아팠어요. 그럼에도 내가 잘하든 못하든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원석이 깎여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돌’ 작업이 전환점이 되었다고요.

외주 작업할 때 사용하려고 만들어 놓은 텍스쳐 종이들이 있었는데 거기서 ‘돌멩이’를 찾아서 오려냈어요. 자투리 종이에서 의미를 찾아낸 거죠. 이 작업을 하면서 결과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순수한 만들기의 즐거움을 처음 깨달았어요. 그간 저를 짓누르던 답답한 마음도 해소됐습니다. 이후 콜라주 작업을 시작하고, 독립출판도 하면서 용기를 많이 얻었어요. 그게 원동력이 돼서 계속 작업을 쌓아오게 되었네요. 고통스럽던 시기가 작업에 대한 열망을 키워주었고 결국 진정성 있는 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가장 힘들 때 찾은 아름다운 돌 〈Strange & Beautiful〉

직접 만든 텍스처 종이가 가득하다

돌멩이들이 바위에서 깨져나와 제 색을 찾아가는게 작가님의 작업 인생 같기도 해요. 힘들게 버티면서 좋아하는 마음을 지켜내셨기에 지금의 ‘가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작가님의 작업을 기다립니다.

커리어 중에 제일 알찬 한 해를 보낸 것 같아요. 워크숍도 하고, 〈그림도시〉에 나가서 팬분들도 만나고 아트페어에 출품도 했어요. 앞으로 작업 규모를 좀 더 키워보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작업시간이 적어서 아쉬울 때도 있지만, 오히려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을 선택해 집중할 수 있었어요. 생각도 걱정도 많은 소심한 사람인 저에게 좋은 훈련의 시간이 된 거죠. 중요한 것은 작업을 지속하는 꾸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삼성병원에서 하게 된 전시도 꾸준함의 소산입니다. 월간미술이 기획자로서 함께해온 지 벌써 6년 차가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다른 어떤 프로젝트보다 보람이 큽니다. 관람객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저는 참 생각이 많고요, 걱정도 많고요, 많이 아프기도 했어요. 즐거움보다 생계 때문에 작업하기도 했었죠. 그렇지만 제 그림에서는, 그것을 볼 때만큼은 저의 고민이 안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자유로운 제 콜라주처럼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길, 잠깐이라도 그림 이 주는 감동을 순수하게 즐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3년을 맞이하며, 삼성병원 양성자센터에 오가는 모든 이들이 모두 안녕하기를, 그림을 보는 동안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방긋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전시 《방긋, 안녕!》은 2023년 6월까지 계속됩니다. 오늘도 내일도 즐거운 날들이 가득하길!

삼성서울병원 양성자센터 전시 전경
전시 제목은 가애 작가의 아들을 위해 만든 책, 『방긋, 안녕!』(창비, 2021)에서 따왔다.

문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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