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 SUNGPIL
ARTIST REVIEW

〈After Wildfire〉 Waterton National Park, AB. Canada 01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150×230cm 2021 

한성필은 세계 각지에서 도시와 자연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대표작 〈파사드(Façade)〉는 공사 현장의 차단막을 실제 건물처럼 연출하고, 〈폴라 에어(Polar Heir)〉는 빙하가 녹아내리는 장면을 기록한 연작이다. 두 연작의 장소는 다르지만 환상과 경이로움 이면에 존재하는 것들을, 실존과 재현의 경계에서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는 점은 같다. 최근 열린 개인전〈표면의 이면〉(8.5~10.23, 금호미술관)에서 2000년대부터 근래까지 작업을 총망라한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그라운드 클라우드 036〉(사진 왼쪽)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22×163cm 2005
〈야누스(Janus) II〉 C - 프린트 180×245cm 2008 

북극곰이 권하는 바나나 껍질 주스

안재우 | 독립 큐레이터, 문화비평가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참조하는 《표준국어 대사전(국립국어원 편찬)》에서 ‘이면’을 검색하면, 그 정의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1. 물체의 뒤쪽 면, 2.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 그리고 그 반대말이 ‘표면’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처럼 이면의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표면의 이면〉이라는 전시 제목은 동어반복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면은 언제나 어느 물체의 표면 뒤에 있는 것이거나 표면에 가려진 것이기 때문에, 즉 모든 이면은 어차피 어떤 표면의 이면이므로, 굳이 ‘표면의 이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긴 동어반복적 서술이며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이면’이라고만 말하면 된다는 논리가 타당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논하고자 하는 이면이 ‘표면 자체의 이면’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느 대상이 표면과 이면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이면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 표면 또한 표면과 이면의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이면을, 즉 말 그대로 ‘표면의 이면’을 논하고자 한다면, 이는 결코 동어반복적인 서술이라 할 수 없고, 무조건 불필요한 서술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의학에서 인간의 이면을 연구하는 내과 의사나 흉부외과 의사만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표면인 피부의 이면을 연구하는 피부과 의사 또한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유능한 피부과 의사가 피부의 시각적 형태를 보면 그 이면에 어떤 문제 또는 다양한 속성과 현상이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것처럼, 한성필은 표면의 형태를 포착하는 카메라라는 도구를 통해 표면의 이면에 존재하는 속성과 현상을 밝혀낸다.
〈표면의 이면〉은 한성필의 여러 연작 가운데 〈파사드(Façade)〉 〈폴라 에어(Polar Heir)〉 그리고 〈그라운드 클라우드(Ground Cloud)〉 중 엄선된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이다. 개보수 공사 등의 이유로 대형 가림막으로 가려진 건물들을 촬영하여 가상과 실제의 경계와 관계를 논하는 작업으로 알려진 〈파사드〉는 다른 두 연작과 달리 환경 담론에 대한 작업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얼핏 보면 ‘아, 이 연작이 빠지면 환경 문제에 대한 전시가 됐을 텐데 이 연작이 포함됨으로써 좀 더 일반적인 목적의 전시가 되었구나, 중견 작가라 할 수 있는 한성필의 회고전 성격을 지닌 전시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한데 금호미술관의 이민영 큐레이터는 이 세 연작을 묶음으로써 오히려 ‘과연 그러한가’란 질문을 가능하게 하였다. 좀 더 엄밀히 말해, 〈파사드〉를 통해서도 환경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유의미한 담론이 생성될 수 있음을 이 전시의 총체적 맥락으로, 한성필의 총체적 작업 역사로 확인시켜준다. 또한 이처럼 〈파사드〉와 다른 두 연작에 드러난 표면적 차이의 이면에 있는 공통분모에 대한 사유를 통해 관객은 〈표면의 이면〉이 갖는 기획 정신을 재차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찰하기 위해서는 우선 세 연작의 각각의 이면에 있는 창작 정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폴라 에어〉는 고산기후 지역, 북극 지방, 그리고 남극 지방의 여러 단면을 포착한 연작인데, 이 작품들이 놀라운 건 작가가 이 광활한 지역들의 수많은 부분 가운데 단순히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게 아니라 본인의 작업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면을 선택했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가령 〈시간의 무게 XI(Weight of Time XI)〉(2017)에는 만년설로 뒤덮인 산맥, 그 위의 구름, 그 앞의 바다, 그리고 바다에 떠다니는 빙산이 공존하는데, 이 아름답고 숭고한 광경은 한성필의 그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극대화하는 창작 능력을 만나 전시장의 관객을 탄성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작품으로 재현되었다. 그리고 좀 더 능동적인 관객이라면 그 아름다운 표면의 이면에 대해 숙고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구름-눈-바다-얼음의 조합은 온도 변화에 따른 물의 상태 변화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물리학적 보고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화석 연료의 사용 등 인간의 활동에 따른 기후 변화가 빙하의 붕괴와 해수면의 상승 등 물의 각 형태의 비율 변화를 필연적으로 야기하기에, 이미 인류에 의한 지구온난화가 상당히 진행된 시점인 2017년에 이 지역의 모습을 재현한 이 작품은 그 표면적 모습뿐만 아니라 그 이면의 인류사와 그에 따른 결과적/대응적 자연사라는 이면적 모습 또한 작품의 액자에 내재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이에 작품의 제목이 뜻하는 ‘시간의 무게’에 대해서도 재고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파사드〉 연작을 보면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이 지은 건물들이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는데, 흥미로운 건 일단 가림막에 건물의 본래 모습의 이미지가 프린트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게 한성필의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무지개떡 형태의 무늬를 지녔거나 아예 민무늬인 건축 가림막에 더 익숙한 한국인 관객에게는, 그 자체로 미학적 흥미로움을 유발하고, 그 형태적 아름다움과 철학적 논제인 가상-실제 관계에 대한 사유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전시에서는 다른 두 연작과 맺어진 관계를 통해 그 이면의, 어쩌면 가장 깊이 감춰져 있던 영감의 원천까지 드러난다.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들은 인류세의 문명 발달사의 미적, 공학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징표들이며, 그 물질적 발달은 언제나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적 관계에 의해 이뤄져 왔다는 것이다. 즉 각 건물의 개보수가 요구되지 않았던 시기의 모습, 개보수를 위해 가림막을 친 모습, 그리고 개보수를 마친 뒤 가림막을 철거한 이후의 기대되는 모습 사이의 역사는 독립적으로 선형적인 형태를 띠는 게 아니라 인간-자연 관계의 역사와 함께 이중나선의 형태를 띠고, 그 이중나선의 가장 커다란 얼룩들 가운데 자연 착취와 파괴가 있다는 통찰의 영감 또한 이 연작의 작품들이라는 가림막의 이면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라운드 클라우드〉와 재회하면 ‘원자력발전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커다란 구름 형태의 수증기 덩어리’라는 시각적 표면의 이면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좀 더 심오한 통찰 또한 가능할 것이다. 이 연작 가운데 〈표면의 이면〉에 전시된 작품들이 지닌 공통점은, 물질적으로는 모두 ‘하늘, 수증기, 그리고 발전소 주변의 자연’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숲 또는 산 등으로 인해 발전소의 모습이 가려져 있거나 관찰자가 발전소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발전소는 잘 보이지 않는 반면 그 굴뚝이 뿜는 수증기는 커다란 구름과도 같아서 명백히 잘 보이고, 이 인공 수증기 덩어리가 맑은 하늘에 침투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발전소들은 도시가 아닌 지역의 자연 속에 침투하여 존재하고 가동되고 있는 모습들이다. 즉 거리, 침투, 그리고 시야에 대한 이야기가 이 표면들의 이면에 있는 것이다: 전기의 일상적 사용자인 우리와 그 전기가 생성되는 곳인 발전소 사이의 먼 거리라는 물리적 배제의 상황, 그 먼 거리로 인한 우리 시야로부터의 벗어남이 야기하는 원자력 발전의 공학 및 생태학에 대한 이해 부족과 그 환경적 함의들의 물리적 배제와 정신적 배제, 인간의 자연 침투라는 인간-자연 관계의 정치적 역학,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여러 산물 가운데 하나인 미학적 아이러니, 즉 수증기 덩어리들이 함의하는 논제들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 그 시각적 아름다움을 즐기는, 마치 건물의 이상적 형태가 프린트된 가림막과도 같은 가짜 구름들의 아름다운 형태를 즐겁게 감상하는 아이러니까지.
그렇다, 결국 표면의 이면에는 지구온난화, 건축 디자인과 공학의 발달, 그리고 에너지의 대량 생산 등 인류세를 관통하는 인간의 실천들이 있다면, ‘이면의 이면’에는 바로 그 본질적인 아이러니가, 즉 인간의 불완전성에 의한 필연적인 아이러니가 있음을 한성필의 능동적 관찰과 창의적 재현이 보여주는 게 아닐까. 바나나의 표면과 이면은 각각 껍질과 과육인데, 선사시대부터 껍질을 버리고 과육만 섭취해온 인류는 최근이 되어서야 껍질에도 상당한 영양소가 있으며 따라서 바나나를 껍질째 섭취하는 게 건강에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비교적 최근이 되어서야 우리 문명의 발달은 우리와 물리적으로 가장 먼 곳에 서식하는 생명들에게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가령 열대우림 지역의 난개발이 북극곰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표면의 이면〉이 제시하는 인간적 아이러니의 성찰에 대한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고마움이 충만한 찬사를 표한다.

〈멜팅 글레이셔(Melting Glaciers)〉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30×150cm 2021

캐나다 레이크 루이스에서 촬영 중인 한성필 사진: Julia Lee, 2022년 7월

한성필은 1972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사진학과 학사를 졸업하고 영국 킹스턴대 & 디자인 뮤지엄의 공동 프로그램인 ‘큐레이팅 컨템포러리 디자인’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1999년 활동을 시작해 제10회 포토페스트비엔날레(텍사스), 제5회 국제사진페스티벌(크라스노다르), 아라리오갤러리(서울), 일우스페이스, Proyecto H(멕시코시티) 등 다수의 개인전과 산도메니코미술관, 서울대학교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도쿄도사진미술관, 상하이현대미술관 등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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