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MANA MANNA
Break, Take, Erase, Tally
EXHIBITION & THEME
뉴욕 MoMA PS1에서 팔레스타인 작가 주마나 만나의 개인전 〈부서지고 빼앗기고 삭제되고 부합되고(Break, Take, Erase, Tally)〉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영상 〈야생의 채집자들(Foragers)〉(2022)을 비롯한 조각, 콜라주 작업 등 20여 점을 통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영토 분쟁과 테러로 얼룩진 현대사를 ‘식량’과 ‘씨앗’이라는 원초적인 의미에서 조명한다. 나아가 식량의 문제가 중동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인류 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환기하고 있다. 전시는 2023년 4월 17일까지.
〈묵은 빵 인터내셔널(Old Bread International)〉세라믹, 플라스틱 봉지, 신문 2022 제공: MoMA PS1. 사진: Steven Paneccasio
배고픈 누군가를 위해 문 밖에 빵을 놓아두는 레반트 지역의 풍습을 조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식량부족을 알리고 있다
씨앗이 담고있는 생존의 원초성,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적대적 공생 관계
서상숙 | 미술사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곳, 북극의 노르웨이령 스발바르(Svalbard) 군도 땅속 깊은 곳에 전 세계의 씨앗을 저장하는 금고가 있다. 스발바르 국제 종자 저장고(Svalbard Global Seed Vault).
이곳에는 남한과 북한이 보낸 씨앗 상자가 나란히 보관되어있고 현재 전쟁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씨를 담은 상자도 함께 놓여 있다. 현재 저장 중인 1억2000만여 개의 이 씨앗들은 재앙이 닥쳐 지구의 종말이 왔을 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 씨로 농사를 지어 생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저장고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 “최후의 날의 저장고”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작가 주마나 만나(Jumana Manna, 1987~)의 1시간 3분짜리 영상 〈야생의 동족들(Wild Relatives)〉(2018)은 이 스발바르 저장고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 작품은 먼저 씨앗을 들이고 내보낼 때를 제외하고는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는 (5명이 각각 5개의 열쇠를 갖고 모여야 문을 열 수 있다고 한다) 저장고 내부 시설을 촬영하고 관계자들을 인터뷰하는 등 시설의 목적과 운영 상황 등 기본적인 소개로 시작된다. 그러나 작품은 사실 이곳에서 종자를 돌려받아 농사를 지은 후 다시 씨를 받아야 했던 국제 건조지역 농업연구 센터 (ICARDA, The International Center for Agriculture Research in the Dry Area)의 예를 소개하면서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더불어 대기업화하는 세계 종자산업의 위험성, 씨앗이 담고 있는 인류 생존의 원초성을 일깨운다.
〈은닉소(Cache)〉 세라믹, 콘크리트, 석회, 피그먼트 2018~ 제공: MoMA PS1 사진: Steven Paneccasio
철조망과 벽돌로 제작된 플랫홈 위에 전시되고 있다. 레반트 지역에서는 곡식을 담아두는 용기, 즉 카브야(Khabyas)를
집 안 은밀한 곳에 두고 건축물의 일부로 포함해 지었다. 작가는 이제는 사라진 이 곡식 저장고를 조각으로 형상화했다
1975년 레바논 내전을 피해 시리아로 옮겼던 ICARDA는 2012년에는 시리아 내전으로 종자 은행을 포기하고 직원들을 대피시켜야 했다. 2015년 ICARDA는 레바논으로 본부를 옮기고 다시 씨를 모으기 위해 스발바르 저장고에 맡겼던 종자를 찾아 레바논의 베카 밸리와 모로코에 뿌렸다. 스발바르 저장고 사상 첫 인출이었다. 그리고 추수가 끝난 후 씨는 채취되어 다시 저장고로 보내졌다.
작가는 대규모 밀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 여성 불법체류 노동자들, 종자 저장고에 보내기 위해 씨앗을 채취하여 포장까지 하는 과정, 유기농법을 통해 자신들만의 씨앗을 키워 보관하고 교환하는 농부들, 농장을 피난민 캠프로 대여하여 더 많은 수익을 보자는 자식과 평생 해 온 농사를 포기할 수 없는 아버지 간 갈등, 종교인과 과학자가 당면한 환경과 기후문제에 관해 나누는 대화 등을 필름에 담고 있다. 계속되는 종교와 영토 전쟁으로 얼룩진 중동인들의 처참한 현대사를 씨앗을 통해 담담하게 드러내는 작가의 시선이 날카롭다.
이 필름은 현재 뉴욕시 소재 MoMA PS1에서 진행 중인 작가의 개인전 〈부서지고 빼앗기고 삭제되고 부합되고(Break, Take, Erase, Tally)〉에서 최근작인 영상 〈야생의 채집자들 (Foragers)〉(2022) 그리고 조각, 콜라주 작업 등 20여 점과 함께 소개되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MoMA PS1은 지난 몇 년 동안 두 명의 관장이 사임하고 5년마다 열리는 주요한 기획전인〈그레이터 뉴욕 2021(Greater New York 2021)〉이 좋지 않은 평을 받는 등 어려움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번 가을 시즌에 주마나 만나와 더불어 프리다 토랜조 예거 (Frieda Toranzo Jaeger, 1988~), 우마 라시드(Umar Rashid, 1976~) 등을 발굴, 첫 미술관 전시를 열어 신선한 기획에 참신한 작품들이라는 호평을 받으면서 그간의 우려를 깨끗이 씻어냈다는 반응을 듣고 있다.
〈은닉소(Cache)〉 세라믹, 콘크리트, 석회, 피그먼트 2018~
〈물의 팔들(Water-Arms)〉 금속, 세라믹, 석회 2019 제공: MoMA PS1 사진: Steven Paneccasio 이 파이프 작업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정착민들이 사는 서안지구의 지하수의 대부분을 통제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물부족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팔레스타인인 작가는 미국 프린스턴에서 태어나 팔레스타인에서 성장했고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미술대학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미술대학원을 나왔다. 현재 베를린에서 작업하고 있으며 팬데믹 기간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부모님과 함께 보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유목적 성장 배경을 가진 작가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끝없이 계속되는 영토 분쟁과 테러로 아직도 많은 사람이 60년 이상 난민 캠프에 살고 있는 등 나라를 빼앗긴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척박한 삶을 식량이라는 원초적 의미에서 조명한다. 그리고 그 씨로 시작하는 식량의 문제는 언젠가 전 인류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작가는 가족과 동족의 아픔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을 포함하는 레반트 지역의 역사와 고고학 그리고 식물분류학 등에 관심을 두고 깊게 연구한 자료를 바탕으로 유머와 서사가 깃든 매우 지성적인 작품을 제작해왔다.
그의 최근작 〈야생의 채집자들(Foragers)〉(2022)은 오랜 풍습대로 산과 들에서 나물을 뜯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를 금지하는 이스라엘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들을 적발하여 법정에 넘기는 감시원들의 갈등을 다루었다. 갈란 고원과 갈릴리 그리고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일부는 다큐멘터리로, 일부는 배우들을 고용해 작가가 쓴 대본대로 이미 일어났던 일을 재연해 찍은 픽션을 섞어 만들었다. 이는 작가가 자라면서 봐 온 가족과 친지, 이웃들의 이야기라고 한다.
1967년 ‘6일전쟁’ 이후 유대교 국가 이스라엘이 이슬람 국가인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고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성지(Holy Land)’를 차지하려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과 적대적 공생관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작가는 인종차별과 가난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그 땅에서 자라는 식물들(식량)까지 통제하는 이스라엘의 식민성을 고발한다. 그들이 채집하는 나물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야생 나물인 아쿠브(akkoub) 와 향신료인 자타(Za’atar)로 봄이 오면 이 나물을 뜯어 요리하고 친척 및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 일은 팔레스타인 대대로 내려오는 일종의 풍습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인들은 잘 먹지 않는 채소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한 후 이 두 가지 식물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며 채집 금지령을 내려 벌금을 물리고 구속까지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집단농장 키부스에서 기른 채소를 사다 먹으라는 것이다. 결국 2020년 이스라엘 정부는 뿌리를 다치게 하지 않는 한에서 채집할 수 있다고 법을 완화했지만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필름에서 법정에 선 한 노인이 “이 땅은 너희들 것이 아니다, (그 땅에서 자라는) 식물도 마찬가지고”라며 “산나물 뜯기를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고 자손 대대로 이어갈 것”이라고 호통치는 장면은 작품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수백 년을 이어온 그들의 풍습이 죄가 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 노인의 대사는 이 필름의 제작 의도, 나아가 작가의 작업세계를 집약한다.
〈미들 고스트(Middle Ghost)〉 세라믹, 콘크리트, 석회, 피그먼트 2022 제공: MoMA PS1 사진: Steven Paneccasio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모마 피에스원 건물 앞 공용 플라자에 설치된 조각은 2018년 이후 계속되고 있는 작가의 〈은닉소(Cache)〉 시리중 중 하나로 부드러운 곡선과 매끈한 표면처리, 그리고 유머스러운 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조각 시리즈에는 사실 빼앗긴 땅과 파괴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어 주목을 끈다
또 한 여인은 법정에서 “나물을 팔아 돈을 벌려고 채집하는 것이 아니라 아홉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고 호소한다. 또 “식물은 잘라줘야 더 잘 자란다, 채집을 금지한 이후로 아쿠브와 자타의 수가 줄었다” 며 산나물 채집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폭격으로 무너진 마을에서 혼자 살고 있는 남자가 한밤중에 플래시를 이용해 채취한 나물을 나누어 준다. 이를 받으러 온 친척 노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마을을 돌아보며 한탄하는 모습도 있다.
땅을 빼앗기고 떠도는 디아스포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 같은 개인적이고 은밀한 내적 경험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긴장하게 한다. 빼앗긴 자의 불안함, 서러움, 분노, 인종차별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는 그의 작업 전체에 놀라울 정도로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또 작가는 뛰어난 서정성으로 모든 작품에 고발과 더불어 희망을 담는다. 유기농법을 하는 농부, 법정에서의 강력한 항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끈끈한 유대관계, 농장에서 일하는 소녀들이 담배를 나누어 피거나 수다를 떠는 장면 등이 그것이다. 젊은 농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밭으로 가는 〈야생의 동족들〉 필름의 마지막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주마나 만나는 영상과 더불어 유려한 선과 둥글고 포근한 형태의 아름다운 조각과 화려한 색채의 풍경 콜라주 작업도 선보이고 있다. 세라믹 조각 〈은닉소(Cache)〉 시리즈는 작가가 2018년 이후 계속하고 있는 작업으로 레반트 지역에서 곡식을 보관하기 위해 집 안에 지었던, 이제는 사라진 곡물보관함 형태를 따라 만든 작품들이다.
돌로 연마하고 비누를 이용, 방수가 되면서도 부드러운 표면을 형성하는 모로코의 석회 석고 기술인 ‘타델라크트(Tadelakt)’로 마감을 한 작품들이다. 작가는 이 조각들에 색을 입히기도 하고 다리를 달거나 구멍을 뚫어 놓음으로써 언뜻 사람이나 짐승의 혼령이 고요히 앉아 시선을 건네는 듯 의인화한 효과를 내고 있다.
한편 미술관 밖 플라자 공원에는 〈중간의 유령(Middle Ghost)〉(2022)이 푸른 나무들 속에 설치돼 오고가는 이들을 미소짓게 하고 있다.
〈야생의 채집자들(Foragers)〉 HD 비디오 65 min 2022 제공: MoMA PS1.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오랜 풍습인 산나물 채취를 법으로 금했는데 작가는 필름 작업을 통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정치/종교적 갈등이 평범한 이들의 일상적 삶까지 식민적 통제를 당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또한 타분(taboon), 라파(laffa), 칵(Kaek) 등 중동인들이 많이 먹는 빵과 비스킷들을 세라믹으로 만든 빵 조각 시리즈 〈묵은 빵 인터내셔널(Old Bread International)〉(2022)은 남은 빵을 집 밖에 내놓아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게 하는 레반트 지역의 독특한 풍습을 언급한다. 부서지고 곰팡이가 피고, 일부는 비닐 봉투에 담긴 빵 조각들을 극사실적인 조각으로 재현해 철제 받침대나 벽돌 위에 놓아 전시하고 있다.
〈물의 팔들(Water – Arms)〉(2019)은 공사현장이나 하수도 시설 현장에 버려진 파이프들을 이용해 만든 작업이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농경에 필요한 수자원 시설에서 형태를 빌려오고 노동을 상징하는 팔에 그 의미를 연결시켰으며 이 같은 파이프 시스템은 사람 몸 안의 내장 구조까지로 그 의미를 확장한다”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청소 콜라주(The Cleaning Collages)〉(2018~2019) 시리즈는 가정에서 흔히 쓰는 청소 용품의 자연을 강조한 원색의 상표를 뜯어 모아 콜라주 기법으로 풍경화 및 정물화를 만든 작업이다. 화학 원리를 이용해 인위적인 꽃향기를 만들어 파는 청소 용품으로 가짜 풍경화와 가짜 꽃을 만든 것이어서 더욱 역설적이다.
작가는 자신의 조각을 공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조망이나 벽돌 위에 전시하는데, 이 또한 팔레스타인 나아가 중동의 전쟁과 폐허를 상징하면서도 재건축의 희망을 함께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마나 만나는 흔히 다루지 않는 씨앗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류의 생존을 묻고 있다. 총이 없어도, 전기가 없어도, 기름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먹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식량은 씨앗에서 시작하며 그마저도 빼앗아 가려는 약탈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야생의 동족들(Wild Relatives)〉 HD 비디오 64 min 2018 제공: MoMA PS1. 〈야생의 동족들〉은 씨앗의 중요성을 통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 나아가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대기업 위주의 종자 산업에 대한 위험성을 조명한다. 유기농 농법으로 채소를 기르고 씨를 받아 교환하는 농부들과 그 가족의 삶을 통해 작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강력한 삶의 의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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