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인 작가 이불의 초기 활동 시기였던 1987년부터 10여 년간 집중적으로 발표된 ‘소프트 조각’과 ‘퍼포먼스 기록’에 관한 전시

– 작가 이불의 시작점과 당대의 시대감각을 돌이켜보고 누락된 해석과 사회 문화적 맥락의 고찰 시도

– 기존의 조각 전통을 탈피하고 인체의 재현 방식을 실험하던 대학교 재학 시절 작품 관련 사진 기록과 미공개 드로잉 50여 점 선보여

–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미술인들이 참여, 작가의 초기 작품을 연구하는 에세이와 사진 기록 등이 수록된 모노그래프를 출간하고 전 세계에 유통하여 한국미술의 본격적인 국제화 작업 실행

▷  주요 작품 소개 ◁

1.이불, <히드라>, 1996/2021, 천 위에 사진 인화, 공기 펌프, 1000cm(높이)x약700cm(지름)

1996년 처음 등장한 [I Need You (모뉴먼트)]와 1997년 부터 시작한 <히드라 (모뉴먼트)>는 이불의 풍선 모뉴먼트 연작을 칭하는 제목입니다. 도쿄 와코루 아트센터의 스파이럴 갤러리에서 열렸던 《Join Me!》 전시에 등장한 이 작품에는 관광 상품으로 개발된 부채춤 인형, 왕비, 여신, 게이샤, 무속인, 여자 레슬러 등 복합적이면서 독창적인 아시아 여성 이미지로 분한 작가의 초상 사진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순결의 상징인 백합을 손에 쥔 이불은 성녀와 창녀, 어머니와 팜므 파탈, 아줌마와 소녀, 그리고 공주와 신데렐라와 같은 여성에 대한 통념을 비웃으며, 생물학적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단순하고 한정적인 시선과 동시에 여성들의 콤플렉스를 이중으로 질문합니다.

이 거대한 풍선 모뉴먼트 구조물 곳곳에는 펌프가 연결되어 있고, 관람객들은 펌프를 직접 밟아 바람을 불어넣어 풍선을 일으켜 세우는 참여적 조각입니다. 주로 퍼포먼스를 다루었던 이불의 초기 활동 시기의 연장에서 이 작품을 살펴보면, 퍼포먼스에서 관객의 반응이 작품의 프로세스에서 작동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우발성이 이 작품에서도 지속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미술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작품과 관객 간의 권력 구조는 이 작품 자체가 함유하는 여러 상징적인 움직임과 관객이 작품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교차하고 교란됩니다. 거기에다가 거대한 괴물 형상 위에 아시아 오리엔탈리즘을 자처한 여성의 이미지가 인쇄된 풍선 조각이 관객의 참여에 의해 부풀어 오르는 모습은 여러 층위의 사회적 권력을 유머러스하게 패러디합니다.

2. 이불, 퍼포먼스 사진, 1989. 종이에 사진 인쇄 42점, 각 42 x 29.7 cm; 29.7 x 42 cm. 사진: 마사토 나카무라. 작가 제공

1989년 촬영한 또 다른 퍼포먼스 사진에는 방독면을 쓰고, 군화를 신고, 어깨가 과장된 하얀 드레스를 입고, 한 손에는 구겨진 신문지를 쥔 작가의 여러 몸짓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부정치의 상징인 방독면과 군화, 그리고 여성의 욕망과 동시에 한정적인 역할의 상징인 드레스를 한 몸에 걸친 작가는 재래식 화장실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신문을 보는 아저씨를 연상시키는 과장된 몸짓을 취합니다. 그리고 숨통이 조이는 제스쳐와 함께 방독면을 벗으며 쓰러지는 작가의 모습은 한국의 근대 이데올로기와 권위주의에 관한 페이소스로 다가옵니다.

3. 이불, 제목 없음, 1989, 퍼포먼스, 《예술과 행위 그리고 인간 그리고 삶 그리고 사고 그리고 소통》, 나우갤러리, 서울. 작가 제공, 퍼포머: 이경, 윤영원

《예술과 행위 그리고 인간 그리고 삶 그리고 사고 그리고 소통》는 나우갤러리가 기획한 행위미술제로, 당시 활동하던 국내 행위 작가들이 대거 참여하여 주목을 받았습니다. 지난 세대의 사회적 억압과 저항 의식이 극단으로 치닫던 시기였고, 당시 초대된 작품들은 추모, 장례나 제의의 형태를 빌어 사회 분위기를 표출했다고 기록됩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이불의 퍼포먼스에는 어깨가 과장된 원피스, 방독면, 수영복 모양의 점프수트와 반짝이는 시퀸이 붙은 손이 배에서 튀어나오는 커스튬을 입은 세 명의 퍼포머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인파가 붐비는 대학로 거리에서 부터 갤러리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며 주변의 환경과 자연스럽게 조우합니다. 갤러리 내부에는 전자 즉흥음악이 시연되고 있고, 퍼포머들은 가위로 입고 있는 옷을 자르거나 머리를 풀어헤치는 등 작지만 치열한 몸짓을 벌이고, 재구성된 레슬러 복장의 작가는 하울링이 커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마이크에 대고 최승자 시인의 「나의 時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時」(1981) 구절을 낭독합니다.

4. 이불, <아토일렛>, 1990, 공중화장실 건물에 사진 설치, 가변크기, 《한국 설치미술제》, 토탈미술관, 장흥, 경기도. 작가 제공

1990년의 설치작품 <아토일렛>은 공중 화장실 내벽과 외벽에 1989년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퍼포먼스 사진과 <낙태> 퍼포먼스의 스틸 사진 등을 출력해서 붙인 설치작품입니다.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공간인 화장실은 남성용 소변기를 전시회에 출품해 현대 사회에서 예술의 의미를 역설했던 뒤샹의 <샘>(1917)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같은 해 공간 소극장에서 벌인 퍼포먼스 <아토일렛 II>에 등장하는 무대 위 변기는 이와 연장선에서 해석됩니다. 작가를 포함한 퍼포머 네 명은 서양미술사에서 여성 인체의 재현을 탐닉하고 욕망했던 오달리스크와 한국 문화에서 한 맺힌 여성상을 패러디한 캐릭터들로, 둔부를 과장한 분장이나 하얀 소복 코스튬과 더불어 기괴한 몸짓을 지속합니다.

5. <장엄한 광채>(부분), 1991/1997, 생선, 시퀸, 과망간산칼륨, 폴리에스테르백, 360 x 410 cm, 《프로젝트 57: 이불/치에 마쓰이》, 뉴욕 현대미술관, 미국. 종이에 사진 인쇄, 29.7 x 42 cm. 사진: 로버트 푸글리시. 작가 제공 <장엄한 광채>는 1991년 첫 선을 보인 설치 작품입니다. 날생선을 화려한 시퀸으로 장식한 이 작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선이 부패하면서 발생시키는 견디기 힘든 악취까지 작품의 존재 양태로 포섭합니다.
<장엄한 광채>의 설치 형태 실험은 자하문미술관에서 있었던 《혼돈의 숲에서》에서 처음 소개된 이후, 여러 전시를 통해 지속적인 설치 실험을 계속하게 됩니다. 1993년 덕원갤러리의 《성형의 봄》, 《제1회 아시아 퍼시픽 현대미술 트리엔날레》, 1995년 아트선재센터 건립부지에서 있었던 《싹》, 같은 해 제1회 광주비엔날레 《한국현대미술의 오늘》, 독일 슈투트가르트 수드베스트 란데스방크 포룸에서 열린 《제6회 트리엔날레 클라인플라스틱》, 그리고 에든버러 프루트마켓 미술관에서 열린 《정보와 현실》 전시까지 설치 형태는 계속해서 변모합니다.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프로젝트》 전시에 초청된 이불은 <장엄한 광채>를 한 번 더 감행합니다. 설치 작품에서 악취가 진동하자 미술관 측은 전시장에서 작품을 철거해 인근 호텔로 옮겨버렸고, 이 사건을 목격한 하랄트 제만은 이듬해 리옹비엔날레에서 작품의 원래 의도를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시를 감행하며 <장엄한 광채>를 서양의 대중에게 처음으로 소개합니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불은 작품 설치 방식을 고민하며 일련의 드로잉을 완성했고, 이번 전시에서 사진 기록과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6. 이불, <껍질을 벗겨라, 썅!>, 1991, 래미네이트 사진 위에 젤리, 감자가루, 과자, 식용 색소, 플라스틱 접시, 술, 물 비누통, 가변크기, 《설거지》, 소나무 갤러리, 서울. 사진: 김형태. 작가 제공

<장엄한 광채>와 함께 생명의 ‘유한성’을 다루는 작품으로 같은 해 선보였던 <껍질을 벗겨라, 썅!>을 꼽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매체를 다루는 ‘신세대’ 작가들의 그룹전 이었던 《설거지》전시 개막식에서 이불은 자신의 퍼포먼스 사진을 인쇄한 사진을 코팅한 임시 그릇 위에 다과용으로 고안한 젤라틴 케이크를, 벽에는 설거지 세제 용기에 음료를 담아 내놓습니다. 전시 기간 동안 설치된 개막식용 ‘다과’는 시간이 지나면서 먹다 남은 젤라틴이 엉겨 붙어 부패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불―시작>은 세계적인 작가 이불의 초기 활동이 있었던 10여 년 동안 집중적으로 발표된 ‘소프트 조각’과 ‘퍼포먼스 기록’에 관한 전시입니다. 20대 여성작가 이불이 활동을 시작했던 1980년대 후반부터 초기 활동을 아우르는 1990년대 한국 사회는 대중문화의 범람, 국제화의 물결, 세기말적 두려움, 그리고 세기에 대한 희망이 상충하는 역사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선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서 형성된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조각, 드로잉은 물론 작가의 예술적 사유와 탐구의 과정이 담긴 모형, 오브제 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불의 초기 작품과 자료들을 다양하게 소개합니다. 잘 알려진 대로 이불의 작품은 신체의 안과 밖, 남성 중심의 모더니즘 유산, 한국의 근대사와 지배 이데올로기 등을 관통하며 포착된 상징을 모티브로 삼아 아름다움, 추함, 삶, 죽음, 정신, 몸, 빛, 그리고 어두움 같이 충돌하는 의미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충돌의 작용은 사회, 정치, 젠더, 계층, 인종 등에 관한 외적 시선을 투영하여 기존의 경계를 가로지릅니다. 작가 이불의 시작점을 되돌아보는 이번 전시는 과거와 현재라는 두 시점 간에 긴장관계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귀환의 서사는 현재 진행 중인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해석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것은 물론, 지금의 세상을 재투영하며,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집니다.

글: 하연지
자료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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