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CHANGWOON

반복되는 편도여행을 위한 우연한 안내서

ARTIST REVIEW

이창운(1986년 생), 홍티예술촌, 부산시민회관 등에서 7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2023), 홍티예술촌(2022), 포항시립미술관(2021), 플랫폼엘, 스페이스K (2020), 부산시립미술관(2018) 등의 기획전에 참여했으며, 쿠로시오예술제, 강원환경설치미술제, 창원아시아미술제(2015), 부산비엔날레 특별전(2014)에 초대되었다. 포항시립미술관, 국립부산과학관, 부산시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IBK 기업은행의 신진작가 지원프로그램인 ‘IBK & GMoMA 영아티스트 2023’에 선정되었다.

이창운은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반복적 유닛의 레일로 이루어진 키네틱 설치작업과 영상, 사진 등을 선보여 왔다.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얇고 유려한 스테인리스 레일 구조물에서 수직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동그란 구(球)의 여행을 만나게 된다. 이 여정은 식탁에 반복적으로 올라오는 달걀과 닭을 보며 ‘이 수많은 달걀이 어디서 왔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여, 본인의 운명을 모른 채 쳇바퀴처럼 반복적인 일생을 사는 닭과 인간 삶의 유사성으로 옮겨갔다. 반복되지만 예측 불가능성의 불규칙을 함유한 구의 여정은 도시 속 거대한 건축물 사이를 오가며 되풀이되는 삶을 살고있는 인간과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은유이다.

반복되는 편도여행을 위한 우연한 안내서

김유진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촘촘하게 설계된 레일을 따라 쇠구슬이 하나씩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이동한다. 매끈하게 가공된 쇠구슬은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데 레일의 기울기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굴러가다가 엘리베이터와 유사한 동력장치에 의해 차례대로 수직 상승한 후 또다시 하강하는 끝없는 움직임을 반복한다. 레일을 따라 이동하는 쇠구슬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명상에 빠지듯 물끄러미 그 흔적을 뒤쫓게 된다. 묵직한 무게감으로 굴러가는 쇠구슬과 레일은 자동화된 공장식 조립 라인과도 유사하고, 금속성의 재질과 반복적인 움직임은 운동 법칙을 시각적으로 실험한 “뉴턴의 진자 같은 기초과학실험 도구를 연상하게 한다. 한편 위아래로 부지런히 움직이던 쇠구슬이 갈림길에 이르러 어떤 길로 이동하게 될지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은 작품의 또 다른 묘미이다.

2023년 기업은행 본점에서 개최된 이창운의 개인전 <공간지도》(2023.10.30 ~11.24)에는 전시 제목과 동명의 작품 <공간지도 (2023)와 <레일 드로잉>2점의 작품이 설치되었다. <공간지도>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거대한 레일 위 쇠구슬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설치작품이고, <레일 드로잉>은 레일 구조를 좀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오브제 작품이다. ‘공간’과 ‘지도’라는 개별적인 단어들이 합쳐진 제목처럼 공간의 특성과 구조를 활용해 설치한 레일과 그 레일을 따라 굴러가는 쇠구슬들이 마치 비어 있는 공간에 보이지 않는 지도를 그리는 듯하다.

정교하게 설계된 레일 위 세계
이창운은 그간 정교하고 세심하게 설계된 금속성의 레일 구조설치 작품을 일관되게 선보여왔다. 2011년 처음 시작한 레일 작업은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이어지며 이창운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매끈한 스테인리스 소재로 제작된 레일과 그 레일을 따라 굴러가는 구형(形)의 사물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편도여행>, <공간지도>, <자유낙하> 등 여러 이름을 하고 있지만 기본 구조는 동일하다. 이 작업들은 편도여행>이 유연하게 변형된 것으로, 특히 공간지도>는 개별적인 <편도여행) 작품이군집을 이룬 것이다. 작가는 <편도여행>을 다양한 형태로 변형하고 실험하는데, 새로운 장소에 작품을 설치할 때마다 규모와 형태를 달리하며 공간에 적합한 구조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작가가 레일을 작품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011년의 편도여행>부터로, 이때는 작품의 규모가 크거나 복잡한 형태를 하고 있지 않다. 레일을 지지하는 구조물이 강조되어 있고 아래에서 위로 솟은 기둥에 레일을 고정하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형태는 마치 고층 건물들이 가득한 도시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편도여행>은 획일적인 삶을 살고있는 인간에 대한이야기 레일과 쇠구슬로 가시화한 작품이다. 삶이라는 여행길에 들어선 우리들은 모두 앞을 향해 나아간다. 사회 안에서 각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시스템 안에서 정해진 방향을 향해 끝없이 이동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작품 속 레일은 동일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사회의 모습이며, 그 위에서 이동하는 원형의 사물은 인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이동은 능동적인 것이 아닌 중력이나 작품에 사용된 동력에 의한 것이다. <편도여행>이 개별적 존재들의 삶이라면 <편도여행>이 군집된 <공간지도>는 개별적 존재들이 집단을 이룬 거대한 사회의 모습을 표상한다. 작가는 2014년부터 레일을 지지하는 구조물 대신 와이어를 사용해 천장에 매다는 설치 형태로 레일 자체를 좀 더 강조하기 시작하는데, 초반의 견고함과는 달리 위태로운 공중도시를 형상화하는 듯하다.

사실 작가가 레일을 통해 사회 구조와 시스템을 표현하게 된 것은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 당시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하던 노동자의 모습을 본 이후부터이다. 아슬아슬한 크레인 위에서 목숨을 담보로 생존권을 외치는 사람의 모습은 작가에게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했다.

한편 초기 편도여행>의 특이한 점은 레일을 따라 이동하는 원형의 오브제로 달걀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타원형의 달걀은 레일을 이탈해 바닥에 떨어지기도 하며 작품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전달하는 장치가 되었고, 2014년 <편도여행>에서는 레일 아래 달걀판을 깔아 달걀의 형태를 더욱 강조하기도 했다. 닭과 달걀은 작가의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수없이 소비하는 닭과 달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는 질문에서부터 이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다. 공장식 축산현장에서 쉼 없이 달걀을 생산하는 닭의 모습은 삶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반복적인 노동행위에 불과하다. 또한 생산된 달걀은 기계의 움직임에 따라 분류되고 가공되며 옮겨지고 소비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작가는 달걀 가공 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 위 달걀을 직접 목격하며 그 모습이 결코 인간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공간지도〉 스테인리스 스틸, 스틸 볼, 동력장치, 와이어 21m 이내 가변 설치 2023
아래 〈편도여행〉 스테인리스 스틸, 동력장치, 모형계란, 계란판, 2011
사진: 김찬수 제공: 작가

1〈편도여행〉 스테인리스 스틸, 컨베이어, 모형계란 7m 이내 가변 설치 2018 제공: 부산시립미술관
2〈편도여행〉 실리콘, 동력장치, 센서 5m 이내 가변 설치 2014 제공: 부산비엔날레
3〈편도여행〉 혼합재료 180×270×140cm 2017
4〈LIFELIFE〉 혼합재료 50×50×120cm 2022
제공: 작가

작가는 레일 작업을 시작하기 전 주로 닭을 소재로 한 <여행 중에> 시리즈 작품들로 같은 메시지를 담아왔다. 손질된 닭을 캐스팅해 제작한 <여행 중에> 시리즈 작품은 머리 없는 판매용 닭이 케이지 안에 갇혀 있거나 천장에 매달려 있는 등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닭의 삶과 현실을 의미심장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의지와 달리 태어남자체가수단이 되어 정해진 시간동안 반복적인 달걀 생산노동을 반복하다 결국 고기로 팔려나가는 닭의 생애는 저항할 수 없는 수동적 삶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수동적인 삶은 닭이나 달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포식자인 인간에게도 해당되는 삶이다. 이창운은 닭과 달걀, 레일을 통해 지속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후 타원형의 달걀 대신 정형화된 형태로 제작된 쇠구슬은 좀 더 부드럽고 매끈하게 레일을 따라 굴러간다. 이것은 닭과 달걀에서 시작된 획일적인 삶에 대한 의문이 인간 전체에 대한 사회시스템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형화된 쇠구슬은 좀 더 일반화된 대중을 상징하며, 점점 복잡해지는 레일 구조는 거대한 사회시스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작품을 다양하게 변형하는 실험을 지속하며 사회와 인간의 삶에 대한 의미를 일관되게 질문하고 있다.

규칙 속에 발견되는 우연성
이창운의 작업은 움직임이 있는 키네틱 아트로도 분류할 수 있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기본적인 중력의 법칙과 동력을 통해 움직이는 과학과 예술의 만남인 것이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으로 증명하는 과학에 우연이 개입할 수 있을까.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과학에서 우연성은 줄곧 부정되는 반면 예술은 우연성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의 종합이다. 작품의 의미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개별적 우연성들이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예술의 장점인 것이다.

이창운의 작품을 통해 발견되는 것은 반복하고 순환하며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정해진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 속에서 혹은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 속에서 우연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작품 속 레일의 구조나 위치 연결지점들은 정확한 설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오랜 시간 설치를 반복하며 얻어 낸 결과값으로 점점 더 정확하고 정교한 레일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일정하고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레일에서도 우연성은 발견된다.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레일의 방향이 두 갈래로 나뉘는 갈림길을 발견할 수 있는데, 같은 방향으로 굴러가던 쇠구슬은 갈림길에 이르러 확률과 타이밍에 의해 각자 다른 경로를 향해 간다. 갈라지는 레일의 경로는 설계와 계획에 의한 것이지만 쇠구슬이 어느 쪽의 레일을 따라 나아가게 될지는 아무도
알수 없다. 두 갈래 갈림길에서 유독 한쪽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쇠구슬의 비율이 높은 것 또한 기계적인 오류가 아닌 작품이 설치된 장소에 적응해가며 만들어진 우연이다. 와이어에 매달린 레일은 쇠구슬의 움직임에 따라 미세하게 조정되며 자리를 잡아가는데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우연한 결과인 것이다.

또한 작품에서는 갈림길 외에도 쇠구슬이 정체되거나 서로 부딪치고 바닥에 떨어지는 등의 일탈이 발생하는데, 특히 달걀이 사용된 작품에서는 레일에서 이탈하는 달걀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 속 우연은 작가가 계획하지 않은 것이지만 동시에 의도한 우연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계획되지 않은 우연들은 작품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강조한다. 작가가 직접 만들어 낸 레일이라는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작동하면서 생겨나는 오류 또한 작품의 과정 혹은 더 나아가 삶의 과정인 것이다. 한 방향만을 향해 흘러가는 반복되는 일상일지라도 그 속에서 만들어진 작은 우연들은 각자만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레일에서 이탈하지 않고 제 몫의 경로를 돌아오는 것만이 성공이 아니며, 경로를 이탈했음에도 실패라고 여기지 않을 수 있는 희망적인 우연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 속 우연이 마치 새로운 희망을 주는 것처럼 이 우연성은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인 삶에 즐거움을 주는 변수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는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작품을 통해 사회의 시스템과 우리 자신을 간접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희망적인 균열의 시작이 될 테니까 말이다.

〈편도여행〉스테인리스 스틸, 아크릴 파이프, 동력장치 가변 설치 2020 제공: 작가
〈편도여행〉스테인리스 스틸, 감속모터, 스피드 컨트롤러, 플라스틱 캡슐 5m 이내 가변 설치 2019 제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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