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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사람들 그림으로 나오다

ARTIST REVIEW

노원희는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회화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1980년 ‘현실과 발언’ 창립동인으로 1990년 해체될 때까지 동인전에 참여했으며 1982년부터 2013년까지 동의대 교수로 재직했다. 학고재, 아트스페이스풀, 숙명여대 문신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아트선재센터, 오르후스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오타니 기념미술관, 미야코노조시립미술관 등의 단체전을 비롯해 광주비엔날레(1995), 부산비엔날레(2012, 2020)에 참여했다. 제8회 박수근미술상을 수상(2023)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2023 사진: 박홍순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는 노원희의 개인전은 1980년대 회화부터 회화 신작, 참여형 공동작업, 신문 연재소설 삽화 등 작품 95점과 함께 작가의 화업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아카이브 자료 39점을 선보인다. 전시의 제목 “거기 계셨군요”는 작가노트에서 인용한 문장으로, 사회에서 소외된 누군가의 자리를 발견하고 말을 건네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1980년대부터 이어온 지난한 투쟁의 시간 동안 사회적 억압에 의해 고통받은 익명의 인간 삶에 보내는 작가의 연민이 반영된 문구다. 노원희는 시대의 변천에 따른 역사 인식, 현실 인식을 토대로 개인과 집단이 만들어 낸 사회와 정치, 문화의 정황을 심리적인 풍경으로 포착하면서 우리 시대의 모습 이면을 표현해왔다. 전시에서는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사회적, 개인적 차원의 인간사를 회화라는 시각언어를 통해 기록하려는 작가의 예술에 대한 지향점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는 11월 19일까지.

사라진 사람들 그림으로 나오다

이선영 | 미술비평

전시 자료 아카이브
아래  〈자화상 ’95(자화상 2)〉 캔버스에 아크릴릭
73×100cm 1995 제공: 아르코미술관

‘거기 계셨군요’라는 제목으로 열린 노원희의 개인전은 현재에도 왕성하게 작업 중인 현역이자 미술사에도 회자되는 ‘전설의 작가를 총체적으로 조명한다. 전시의 리뷰이자 작품론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품이 많이든 전시 기획이 반갑다. 노원희의 첫 개인전은 1977년에 있었으며, 작가는 1980년 ‘현실과 발언’의 창립동인으로 활동했다. ‘현실과 발언’은 1990년 해체됐어도 어둡고 암울한 폭압의 시기를 용기 있게 치고 나간 역사적 아방가르드로 평가받는다. ‘현실과 발언의 다른 작가들에 비하면, 노원희의 작품은 다소간 신중하고 차분하다. 2017년 아트스페이스 풀에서의 전시 제목 <담담한 기록: 인간사, 세상살이, 그리고 사건처럼 말이다. 작가가 1980년대 초에 교수가 된 것은 작업에 좋은 영향도, 나쁜 영향도 주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작가의 공식적 위치는 작업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나 현실참여 활동에 제약적 요소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노원희는 작품을 통해 현실의 중요한 대목에서 꾸준히 발언해왔으며, 70대인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1980년에 불발된 ‘현실과 발언’ 창립전이 바로 아르코미술관 전신인 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예정돼 있었다. 40여 년이 지난 후 불발의 이유가 드러나는 작품들로 다시 입성한 사건은 후련한 대목이다. 작품 130여 점이 출품된 큰 전시임에도 <노원희: 거기 계셨군요》라는 제목은 소박하다. 민중도 민족도, 심지어는 시민도 점차 희미해지는 시대에 작가는 여전히 누군가를 호명한다. 지배적 질서가 요구하는 확실한 자리가 아니라 애써 찾아야 될 만큼 후미진 곳에 있는 누군가일 것이다. 시대와 더불어 희미해지거나 역사에 기록된 이들도 있지만, 역사와 주체가 지배하던 거대 담론의 시대가 지나고 나서도 꾸준하게 일상과 사회적 현실의 문제를 직시해왔다. 과도한 뜨거움은 식기 마련이다. 전략적으로 또는 본성적으로 설정온도를 낮추면, 여전히 할 일 많고 할 말 많은 시대에 온기를 간직할 수 있다.

최근 작업에도 우리 사회를 가로지르는 자본/노동의 근본 모순이 다루어진다. 그 매개 고리가 산업재해다. 군사독재와의 투쟁 전선이 확실했던 1980년대가 민주투사의 시대였다면, 신자유주의의 차가운 질서가 자리 잡아가는 1980년대 이후, 권력은 보다 미시적으로 작동하며 일상속 억압과 저항의 문제가 중요해졌다. 2개 전시장 중 반을 차지하는 여성 관련 작품도 그렇다. 하지만 노원희는 진보적 문화예술운동의 한편에서 당시의 민족, 민중에 내재된 주체의 남성성에 대한 근본적 대안을 추구했던 페미니즘 운동과 직접적 관련은 없었다. 작가로서는 페미니즘이라는 깃발도 버거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비판 기조의 작품들 속에서 여성은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이전부터 진보 진영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여성문제는 결국 당사자가 풀 수밖에 없다. 보편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지식인이나 분야별 전문가의 위치 또한 시대의 부침을 겪었다. 이제 누가 누구를 대변해줄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노원희는 조용한 공감의 어법을 통해 실천한다. 이 전시에 많은 인간이 등장하지만, 드물게 자신을 그린 <자화상 95>(1995)는 작가의 태도를 압축한다. 1948년생인 작가가 40대 후반경에 그린 자화상은 아래로부터 솟아오른 깃발들과 누군가의 영정, 울부짖는 살아남은 자들의 대해(海) 한가운데에서 불안하게 균형을 잡고 떠 있는 모습이다. 작가는 한 손에 그림을 들고 바다 위에 세숫대야를 배 삼아 위태롭게 서 있다. 1980년대에 이어 ‘산자여 따르라’는 외침이 있었던 시대, 파도치는 현실의 대해에서 그림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확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노원희의 작품은 현실의 모순과 갈등 때문에 희생되고 사라진 이들을 나오게 한다. 저항보다는 스스로 복종하게 하는 차가운 질서의 시대에도 유효한 방식이다.

〈과로사〉 캔버스에 아크릴릭 53×73cm 2020
아래 〈몸〉 연작 캔버스에 아크릴릭 각 30~38.5×45~46cm (30점) 2018~2019 설치 전경 제공: 아르코미술관

<과로사〉(2020)는 희미하게, 진하게, 그리고 점으로 표현된 사람들을 통해 과도한 노동에 의해 현실에서 사라져 가는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림이라는 공간적인 형식에 시간적 추이를 넣는 방식이며, 이는 삶이 죽음으로 변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거의 회고전 급에 해당하는 이번 전시에서 노원희는 몸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어두운 대륙에 속해있었던 침묵하는 몸은 이성이나 계몽보다 비중 있게 다뤄졌다. 제1전시장 입구에 <몸>(2018~2019) 연작을 가득 걸어놓았고, 제2전시장의 한 벽면에 몸을 표현한 대형 설치작품을 배치했다. 억압받고 착취되고 불구가 되고 죽는 몸이 바로 몸이다. 저항도 몸이 한다. 그림 또한 오래 그리다 보면, 몸이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몸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다. 몸은 정신도 포함하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다. 작은 캔버스에 그려진 <몸> 연작은 다양한 상황에 처한 몸을 연극적으로 표현한다. 말 없는 매체인 회화는 작가의 주의주장을 무언극처럼 전달한다. 현실의 재현은 아니기에, 몸짓 언어는 더욱 극적이다. 인간들 간의 상황에는 권력의 문제가 깔려 있다.

작가는 이 작은 무대의 등장인물의 크기를 달리했는데, 어느 한쪽은 폭력을 당한다. 가해자는 얼굴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으며 홀로여도 상황극인 것은 마찬가지다. 제2전시실의 한 벽을 가득 채운 <몸 53> (2023) 에는 세로 3.3m, 가로 9.9m 크기의 반투명한 천에 젯소로 여러 몸동작이 그려져 있다. 위에서 떨어지는 조명에 그림자도 가세해서 사람들이 북적이는 느낌이다. 하지만 유령처럼 사라지는 사람들을 자주 그려온 맥락에서 반투명 천의 하얀 형태들은 현실감이 대폭 삭감된 상태다. 하지만 여러 작품이 군집 전시된 <몸> 연작처럼 여러 몸동작이 비슷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어 잠재적 동감이 있다. 반투명한 천을 이용해서 여성들의 노동/예술인 바느질을 설치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노원희의 그림에도 희미한 막이 있다. 그것은 현실의 모순과 질곡에서 우울함과 불확실성을 전달한다. 초창기 작품 <창>(1980)은 폭발의 낙진과도 같은 미세한 입자와 결합된 막이 있다.

이는 사건 그 자체가 아닌 그 이전 또는 이후의 징후를 암시한다. 2006년 개인전 제목인 《남아있는 풍경: 노원희 1991년 이후> (숙명여대 문신미술관)처럼 말이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지평선 너머로 물감이 튄 자국이나 그것을 대신하는 듯한 나무의 윗부분은 폭발의 흔적처럼 보인다. 아방가르드에 대한 기대치가 있지만, 서로 떨어져 있던 세력들이 보다 빈번하게 만나고 충돌하게 된 근대가 개막된 이후, 현실은 예술보다 더 자극적인 사건들로 가득 채워진다. 차분하고 냉정해 보이는 노원희의 작품은 현실과 예술 사이의 선후관계가 있다. 물론 현실보다 나중에 온다고 해서 부족한 것은 아니다. 나중이라도 흔적을 남겨두면 그다음의 처음이 되는 것이다. ‘뜨거운’ 1980년대가 지나고 자본 및 권력의 압제가 더욱 내밀해진 시점에 은근한 작품은 더 긴 파장과 여운을 남긴다. 정지된 화면에서 서사를 끌어내기 위해서 회화는 다차원적 상징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막은 심리적 분위기를 나타낸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약간씩 방점이 달라진다. 군부독재 치하인 1980년대 작품에서는 숨막히는 시대의 공기가 얼마 전 작품에서는 자본의 이익을 위해 분해되는 자연이 있다. 특히 착취되는 자연에는 모든 타자가 포함되는데, 노동자도 거기에 속한다. <창>은 핏빛 스크린이 쳐진 듯한 화면 안에 창살 밖에 있어도 그 안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내적으로 꽁꽁 묶여 있는 인물이 있다. 같은 시기에 그려진 <한길>(1980)에서 먹구름이 가득낀, 그보다 더 어두운 지상의 검은안개는 골목길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의 모습을 수수께끼로 만든다.

〈거리에서〉 캔버스에 유채 60.6×72.7cm 1980 개인 소장
가운데 〈긴급뉴스〉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3×162.1cm 1986 개인 소장
아래 〈출몰무대〉 캔버스에 유채 130.5×162.5cm 2017 제공: 아르코미술관

<거리에서>(1980)는 노점상이 많았던 80년대에 구경꾼의 모습이 뿌연 스크린 속에 담겼다. 화면 전체에 고루 뿌려진 점들과 단색조의 화면에서 시대의 우울이 느껴진다. 1980년대에는 사회변혁의 주체를 둘러싼 전망이 지식인들에 의해 주장되었다. 노원희의 작품은 1980년대의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밝은 전망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노원희는 당시 ‘비판적 현실주의자’로 분류되면서, 변혁이라는 선명한 노선을 따르는 세력과 구별되기도 했다. 전자는 ‘소시민적’이라는 비난을 감당해야 했다. 작품 속 인물들도 긴급한 행동보다는 멈춰있는 모습이 많다. <긴급뉴스>(1986)에서 퀭한 눈빛으로 긴급뉴스를 보는 군상의 경직된 모습이 거의 좀비 수준이다. 1980년대 후반에는 소위 직장인들을 칭하는 ‘넥타이 부대’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할 만큼 시민적 공공영역이 열렸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 사회에 쌓여가는 긴장의 강도는 높았다. 빈 깡통처럼 보이는 텔레비전 화면 속 ‘긴급뉴스의 진정성 또한 의심스럽다. 정보를 소비하는 만큼 생산도 하는 시대에 텔레비전은 오랜 매체로 다가온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시점의 <출몰 무대> (2017)에는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됐다고 믿어졌던 독재자가 유령처럼 떠돈다.

언제라도 그 유령은 다시 몸을 입고 나와서 활개 칠 수 있다. 만약 역사가 진보한다면 그것은 직선적이 아니라, 수많은 퇴행을 매번 다시 극복해야하는지난한 과정이다. 편한것만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 기충 노동자들의 현실은 노원희의 작품 한가운데에 있다. 보랏빛으로 창백하게 표현된 사람들이 초라한 음식이지만 밝은 표정으로 먹고 있는 라면 먹는 사람들>(2002)은 약간은 어눌하고 이상한 표현방식이 호기심을 자아낸다. 사회는 이들을 소모품 취급한다. <사발면이 든 배낭>(2016)은 지하철 역사에서 기계 수리 작업을 하다 숨진 어린 노동자 가방 안에 급하게 끼니를 때울 사발면이 있었음을 말한다. 몸통 없는 양복은 그를 사지로 몰아넣은 시스템의 상징이다.

〈화력발전소〉 캔버스에 아크릴릭, 유채 162×130cm 2022 제공: 아르코미술관

시커먼 재가 작업장으로 들어가는 노동자를 삼키는 <화력발전소(2022)는 충격적이다. 물질의 무게는 다 날려버리는 정보화 사회에서 일어난 산업화 시대의 참상이 표현된다. 인간의 몸을 둘러싼 탁한 공기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던 작가의 어법은 근래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병원 1>(2022)에서 실루엣이나 흐릿하게 표현된 부분은 현실에서 사라진 것을 암시하는 노원희의 방식이다. 사라짐을 통해 나타남을 실현하는 작가가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방식은 우회적이다. 가로 4m가 넘는 대작 <나무>(1982) 는 노원희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1980년대 폭압적 정권에 의해 재갈이 물려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외침을 나목들이 대신해주는 알레고리 풍의 작품이다. 한편 스피커나 얼굴이나 눈동자처럼도 보이는 그것은 음침한 감시사회를 상징하기도 한다. 1980년대 이후 자본의 질서는 더욱 내재화되고 억압과 저항의 구도도 차가워졌다. 뜨거웠던 1980년대와는 동떨어진 듯하지만, 이후의 시대를 예견한, 좀 더 멀리 본 ‘전망’이 있다. 작가는 그림에 주의주장을 담은 메시지를 넣음으로써, 보기뿐 아니라 읽기도 권한다.

그것은 억울한 희생이 있던 곳에는 늘 할 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념비 자리 - 불타는 망루>(2010)에서 관객이 읽을 수 있는 메시지는 물질적인 발전을 상징하는 모든 도시 구조물에는 사회적 약자의 희생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용산 참사는 불과 얼마 전 일이지만 불타는 망루는 잊히고 고층아파트만 남았다. 용산의 풍경에 삽입된 글자들은 참사에 관련되어 회자되었을 말들이다. <큰 회사> (2023)에서 발전주의의 그늘에 소리 없이 희생 당한 약자들의 주장은 허름한 짐 위에 붙어 있다. 큰 회사를 추동하는 시스템은 ‘합법적으로’ 희생자를 생산한다. 작가는 사연을 보다 정확히 전달하고 싶은지 글자가 적힌 종이만 평면적으로 표현했다.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는 사건의 책임은 합법적으로 감춰진다. 그래서 작가는 공공영역에서 소통될 예술작품을 소중한 알림판으로도 활용한다. 노원희의 작품 속 서사적 요소는 한겨레 신문에 연재된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2007) 삽화 원작들에서 잘 드러난다. 삽화에서 서사와 이미지는 상보적인 관계다. 삽화는 ‘순수한 모더니즘이 배척한 요소였지만, 1980년대는 물론, 그 이후에도 모더니즘과 현실참여 미술의 대립은 지속적이었다. 노원희는 현실의 부침과 상관없이 발언을 지속해왔다. 희생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이나 있는 운명이 아니다. 1980년대는 군사독재였지만, 이후 공고화하는 일상의 질서 속 가부장적 권력을 전면화한다. <참전 이야기 1- 밥상 깨는 남자>(2018)는 제 1세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질질 끌려간 명분 없는 전쟁이 온전치 못한 심신을 낳았으며, 이후 불행한 가정사로 이어짐을 알려준다. 참전 결정은 국가가 했지만, 불행은 오롯이 개인이 감당할 몫으로 남았다. 여성은 가정이라는 전쟁터에 참전했다.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늘 전쟁에 휩쓸릴 위험이 있는 한국은 강대국의 이해관계와 그에 따르는 국내 정치 경제학의 역학관계 때문에 극심한 분열 아래에 있으며, 지금도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위기 속에 있다.

〈탑〉(사진 가운데) 캔버스에 아크릴릭 390×162cm 2023 《노원희: 거기 계셨군요》 아르코미술관 전시 전경 2023

하지만 예술은 지역을 넘어서 인류학적으로 지평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인류의 고민> (2018)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세운 머리 없는 조각상은 거대한 페니스 또는 팔루스를 포탄 구멍처럼 앞으로 내민다. 그것은 지금도 남성 정치인들이 잘 취하는 상징적 자세다. 작가는 지배적 상징질서와 가부장제의 밀접한 관련을 암시한다. 우리 사회에서 합법 뒤에 숨은 폭력과 야만 맹목은 기시감이 있다. <포럼>(2017)은 뭔가 중요한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사람들의 크기와 실체감이 다르지만, 민주적 절차인 포럼 같은 행사에도 계급적 질서가 있음을 암시한다. 자연과 같은 약육강식이지만, 인간사회는 물리적 힘과 상징적 질서가 연동된다.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가 보편적 이익을 향한 적은 없다. 평등이나 평화는 스스로 찾아온 적이 없다. 여성은 오랫동안 잠재적인 영역에 자리해왔다. 여성작가는 그 잠재적인 힘을 일깨우고 현실화할 수 있다.

〈아이 1〉 캔버스에 아크릴릭 53.5×45.5cm 1990
아래 〈생애 2〉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5×162cm 2010
제공: 아르코미술관

이번 전시에서 새삼 느꼈지만, 노원희의 작품에는 여성이 많이 드러난다. 가령 사회적 사건의 희생자가 등장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아이는 여성적 감수성의 산물이다. 아이와 일차적 관계를 맺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여성, 즉 어머니다. 1980년대에 이어 1990년대에도 많은 민주투사의 죽음이 있었다. <아이 1〉(1990)은 이미지들이 화면 내부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경의 아이는 서사를 만들기에 충분하다. <아이 2>(1990)에서 희생자의 영정을 뒤로하고 보따리 위의 어린아이는 화면의 전경에 앉혀있다. 모성은 여성을 위대하게도 하지만 질곡에도 빠트린다. <생애 2>(2010)에서 광인이나 사자를 배에 띄워 보내던 인류학의 습속을 떠올리는 배는 바닥에 여성을 가둔다. 여성을 실은 배는 말미잘 같은 촉수로 가득한 괴물에 잡혀있다. 석탄가루 가득한 화력발전소 작업장으로 가던 남성 노동자에 상응하는 여성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여성 또한 직장, 또는 육아와 가사에 붙잡힌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산다. 옴짝달싹할수 없는 사람들의 희생이 없는 개인의 자율과 자유는 없다. <근본불안>(2022~2023)에서 특유의 침침한 화면은 등장인물을 부각시킨다. 아이들과 함께 등장하는 여성은 어머니일 것이다. 타자화된 여성의 노동을 값싸게 활용하는 사회에서 어머니/여성은 불안하다. 그러한 착취가 물질적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그녀의 불안은 근본적이다. 사회의 축소판인 가정도 총체적이다. 총체성은 보편적 지식인과 함께, 80년대적인 용어로 치부되지만, 분업화된 비인간적인 사회를 책임져 줄 대안의 세계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다면, 그 또한 다시 호명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을 책임지는 여성의 모성적 실천은 늘 총체적이었다. 노원희의 작품들은 가장 구체적인 일상의 자리로부터 사유되고 실천되는 총체성, 그 주체의 자리에 여성을 불러 세운다.

노원희는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회화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1980년 ‘현실과 발언’ 창립동인으로 1990년 해체될 때까지 동인전에 참여했으며 1982년부터 2013년까지 동의대 교수로 재직했다. 학고재, 아트스페이스풀, 숙명여대 문신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아트선재센터, 오르후스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오타니 기념미술관, 미야코노조시립미술관 등의 단체전을 비롯해 광주비엔날레(1995), 부산비엔날레(2012, 2020)에 참여했다. 제8회 박수근미술상을 수상(2023)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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