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yungkoo 

ARTIST REVIEW

〈maya6199〉(부분) 스테인리스 철망 217×287×13cm 2016

박승모는 모든 사물을 알루미늄 와이어로 감쌌다. 실재 사물이 가지고 있는 기능은 삭제하고 형태만 남겼다. 이어 작가는 철망을 선택했다. 사진 픽셀과 같은 격자의 형태로, 촬영한 이미지를 여러 번 겹치고 잘라 구현해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이미지는 사라지고 어떠한 경계선에 갇혀 있는 듯하다. 개인전 〈Everything and Nothing〉(5.20~7.2, 아트스페이스 호화)에 설치된 9점의 윈도 시리즈는 작가가 맨해튼 거리를 걷다가 마주한 유리창 너머의 장면이다. 큰 철 프레임 안에 설치된 차갑고 날카로운 철망의 찰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비로소 회화적이다.

박승모는 1969년 태어났다. 부산 동아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2005년 아트사이드 개인전을 시작으로 탕컨템포러리아트(홍콩), 언플러그드 갤러리, 사스페 파빌리온(saasfee pavillon,프랑크푸르트), 갤러리베어라인(Galerieverein, 레온버그), 포스코미술관, 대만시립미술관(타이페이) 등 국내·외 주요 기관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었다. 알루미늄 작업 외에 라이프캐스팅, 한지, 레이저 프린트 등 다양한 기법을 적용한 작업을 오랜 시간 꾸준히 해왔으며 영화 기생충에서 〈maya0513〉를 선보인 이후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중층적 표면의 세계
이선영 | 미술비평

박승모의 최근 작품은 그림자를 포함한 여러 차원의 현실을 끌어들이는 하나의 면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그것을 도시인이라면 매일 스쳐 지나는 쇼윈도에서 발견했다. 최근 아트스페이스 호화의 개인전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Everything and Nothing)〉에서 집중적으로 발표된 윈도 시리즈의 출발인 거리의 통유리는 기술 발전의 산물이다. 나날이 커지는 디지털 기기의 액정화면처럼 말이다. 근대 건축 이래 유리는 그 자체가 환경이 되었다. 기술의 역사에서 유리의 발명은 전구가 발명되기 전까지 어두컴컴하던 실내의 낮을 연장시켜 주었고,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예술을 통해 자연의 빛을 신성한 빛으로 변모시키기도 했다. 물론 박승모는 유리창 그 자체가 아니라, 실내의 안과 밖, 그림자 등이 한데 얽힌 표면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기독교 신화의 전제 같은 새로움의 창조가 아니었고, 이미 있었지만 다시 발견하게 된 진리다.

조각가로서의 박승모에게는 재료에 내재하는 형상을 꺼내려 했던 미켈란젤로라는 모델이 있었다. 그가 관심 있었던 붓다도 이미 있는 것을 알기만 하는 깨달음의 진리를 설파한다. 윈도 시리즈에서 ‘maya’라는 개념어가 포함된 작품에는 동양적 철학이 깔려있다. 힌두 철학의 기본이 되는 마야는 실제와 환상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화두다.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을 주창하는 학파를 통해 알려진 마야는 현실과 환상의 관계에 대해 논한다. 하지만 경전의 교리와 별개로, 체화된 진리의 발견이 중요하고, 이는 각자의 경험과 감수성에 달려있다. 1969년생 박승모는 대학 재학 중 처음 인도에 갔고 거기에서 영적 지도자인 ‘구루’를 만나 수년간 인도 각지를 떠돌며 수행했다. 한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다시 간 곳이었을 만큼 그에게 영향을 준 나라가 인도다. 거기 가서 ‘미술’을 한 것은 아니었다. 미술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이후 현대 문화의 전쟁터 같은 뉴욕에서 수년간 활동하던 그는 고요해지는 순간을 기다려왔다. 거기에서 어느 날 본 쇼윈도는 베단타 경전에 적힌 진리와도 같은 영감을 준다. 미술에서 창은 르네상스 이후 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을 재현하는 틀로서 간주돼 왔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투명한 창에 대한 요구는 19세기에 정점을 찍은 사실주의를 거쳐 근대에 와서 도전받았다. 사진의 발명은 이러한 도전을 가속화했다. 박승모는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그가 선택한 쇼윈도를 수백 장 찍는다. 육안은 관심사에 따라 하나에 집중되지만, 카메라 렌즈나 쇼윈도라는 반사체는 다중심적이어서 눈이 놓친 것도 잡아내곤 한다. 찍은 줄도 모르고 찍힌 이미지들은 발견의 즐거움을 준다. 카메라가 육안처럼 진화하든, 육안이 기계적으로 환원되든 이미 다가온 미래에는 유기체와 기계가 수렴되는 지점이 있다.

미술이 창으로서의 투명성을 거부하고 조형 언어의 불투명성, 즉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그 자체의 자율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때가 근대다. 근대는 사진의 탄생, 그리고 사진의 메커니즘에 시간성을 더한 영상이 시각적 패러다임을 형성했다. 미술은 사진과의 관계 속에서 현대화됐으며, 이후에 양 매체의 대화가 끊긴 적은 없다. 실내와 실외 빛의 조건에 따라 여러 층위의 시공간을 공존하게 하는 창은 현대성 이상의 것이 잠재하는데, 박승모는 그것을 현실화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실내의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사람, 실외의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 등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그가 꾸며내거나 상상한 것이 아니라 본 것, 한 창(窓)에 들어온 이미지를 포착하여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겹쳐 보이는 중층적 이미지들을 다시 각각의 철망 평면으로 나누어 조합해 어떤 부분은 뻥 뚫려 있다. 관객이 앞뒤로 모두 볼 수 있는 작품이라 겹은 무한히 늘어날 수 있다.

보통 11~12겹 정도지만, 많을 때는 20겹까지 늘어난다. 하지만 장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나타남과 사라짐의 관계가 가능해야 한다. 그의 작품은 추상도 구상도 아니다. 반투명 재료로 구현된 거울이자 색깔 없는 그림자의 세계다. 그림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건져내 관객 앞에 내놓는 것이라면, 박승모의 도구는 밑이 숭숭 뚫린 체와 같다. 실내외의 어지러운 광선의 조건 속에서 한순간의 시점을 온전히 담아내기 힘들지만, 박승모가 창안한 형식적 장치는 투명성부터 불투명성에 이르는 여러 시점을 담는 열린 구조다. 오늘도 도시의 쇼윈도는 수많은 장면이 잠시 머물다가 사라짐을 반복하며, 단 한순간도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지 않다. 그의 작품은 앞뒤로 보는 것이라 벽이라는 단단한 지지기반은 없다. 벽에 붙이는 작품이라면 원근법의 체계가 작동하여 소실점에 상응하는 온전한 관찰지점이 있을 것이다.
중세의 다중심적인 체계가 르네상스 시대에 일점 원근법으로 통일된 것은 거대한 진보였다. 하지만 세상은 더욱 유동적으로 변해서 모든 장면을 포괄하는 하나의 전능한 지점은 신학적 관념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박승모의 윈도 시리즈는 일종의 창이면서도 깨지기 전에 이미 분열된 거울이다. 현대 정신분석학은 거울단계의 이론을 통해 분열상을 상상적으로 봉합하는 자아를 말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분열은 더욱 강조되는데, 그것은 망들 사이의 간격들로 인한 것이다. 간격들은 그 작품이 실내에 놓일지 실외에 놓일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물론 분열이 봉합되는 시점이 있지만 그 시점은 여러 순간 중 하나로 상대화된다. 허공에 단단한 재료로 ‘그린’ 그의 작품은 허상들을 다루기에 더욱 견고한 방법론이 필요했으며, 마침 금속은 그에게 친숙한 재료였다.

조각가로서 박승모는 돌을 비롯해서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왔지만, 금속을 선호하는 것은 그것이 선(禪)처럼 차갑기 때문이다. 작가에 따르면 선과 금속은 냉정하게 보고 자른다. 차가움에 대한 사유는 문화적인 차원까지 확장될 수 있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와 현대를 차가움과 뜨거움으로 대조한 바 있다. 레비 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진보를 중시하는 현대 서구사회를 과열된(hot) 또는 동적인 사회라고 표현한다. 과열된 사회는 산업혁명 시대의 증기기관이 대표하듯이 물질과 에너지를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며 새로움에 열광한다. 발전이 가능하기 위한 극도의 파편화가 낳은 인간성 상실이나 지구적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제 널리 공유되고 있지만, 잔잔한 일상적 실천은 요원하다. 하지만 역사의 대부분은 변화가 거의 없는 일상을 전제한다. 인간의 실제적
삶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러한 인류학자의 사유를 핫한 팝음악과 쿨(cool) 재즈와 비교해 볼 수도 있다.

박승모가 청년 시절 인도의 토굴에 기거하면서 최소한의 음식만으로 버틴 수행의 궤적들, 만다라에서 시간을 되돌리는 방식에 대한 관심은 현대의 단선적 시간관에 대한 대응이다. 단선적 시간관은 모두가 가야 할 방향이 정해져 있고 시스템으로 환원 또는 강제된다. 현대는 진보로 치장된 발전주의의 열기를 식히고 자연, 밋밋함, 반복, 되돌아옴, 시간성 등등에 대한 감수성이 필요하다. 보는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그의 작품은 구찌 사옥의 파사드 작업 같은 공공미술로 구현될 때는 더욱 극적이다. 화려한 명품 매장에 대한 기대치와 달리, 평소에는 칙칙한 쇠망으로 덮여있다가 밤이 되어 실내의 조명이 들어오면 그가 철망에 ‘심어놓은’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가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을 다른 사람들도 발견하기를 바란다. 박승모의 작품은 시간적 추이에 따라 이동하는 몸의 시점이 중요하다.

현대미술사, 특히 조각사에서 연극성은 시각성을 물화시킨 모더니즘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유리 또는 사진의 얇은 평면을 몇 겹으로 분해해서 유리창에 맺힌 요소들을 개별 철망 위에 현실화하는 건축적 스케일의 프레임은 그 안에 들어와 움직이는 관객의 몸적 지각을 활성화한다. 철망과 프레임은 원근법이 잠재적으로 깔려있는 그림뿐 아니라, 유리창 또는 거울에 대한 번역이다. 이방인들이 밀집하는 현대 도시에서 멈춘 채 누군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사진을 찍는 행위는 금기시된다. 지나가면서 보는 그의 작품은 어느 한 지점에서만 전체 이미지가 확실해진다. 어떤 지점에서는 그저 철망들로 보인다. 이동하는 몸은 투명성과 불투명성이 교차하는 지점을 통과하게 된다. 마야 시리즈가 대거 전시된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전에서 양자의 대조항이 수렴되는 것은 청년 시절 인도에서 직접 본 만다라 제작과정을 반영한다.

정방형의 공간에 색깔 모래로 정교하게 제작되는 만다라 형태는 다시 모래 입자로 산산이 흩어진다. 이전에 그가 제작한 인체 상들도 같은 맥락이다. 조각의 기본 문법을 이루는 인체 상을 그는 금속 선을 감아서 만들었다. 금속 조각상이니 여전히 단단하지만, 털실 뭉치처럼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으로 연출한 것이다. 감겨있는 것은 풀릴 수 있고 구성된 것은 해체될 수 있으며, 역방향도 마찬가지다. 그는 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시 감으면 된다. 하나의 방향으로의 결정이 아니라, 유동적 과정이 중요하다. 그는 명상 기법 중에서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수행이 있다고 소개한다. 시간을 초 단위로 기억해서 역순으로 자신의 행동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역설처럼 양방향으로 논리를 펼친다. 역설의 세계에서 현실과 환상은 뫼비우스 띠처럼 수시로 그 차원을 변주한다.

벽에 박힌 탄환의 흔적을 거대하게 조형화한 그의 작품은 앞에서 보면 가해자의 시점이 되고, 뒤로 돌아가서 보면 피해자의 시점이 된다. 하나의 결정적 방향은 부정된다. 환상과 현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은 환상의 현실성, 현실의 환상성을 말한다. 예술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 몰입된 인간에게 양자의 호환성은 빈번하다. 객관적인 지표만을 현실로 간주하는 세상에 대해 환상의 몫을 크게 늘려주는 것이다. 환상만으로도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단지 꿈꾸는 사람, 또는 환자에 불과할 것이다. 환상은 또한 현실화돼야 한다. 얇은 망들이 정교하게 겹쳐져 기념비적인 구조로 서 있는 박승모의 작품은 그가 내용만큼이나 형식, 특히 금속의 물성을 활용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작가는 내용과 형식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모순을 의식한다. 그는 내용을 중시하면 물성이 사라지고, 물성을 중시하면 내용이 사라진다고 토로한다. 양자가 만나는 절묘한 지점, 또는 시점을 찾는 것은 새로운 작품이 시작될 때마다 되풀이되는 과제가 될 것이다.

〈maya9111〉 스테인리스 철망 155×263×7cm 2018

〈maya6199〉(사진 왼쪽) 스테인리스 철망 217×287×13cm 2016

〈maya9111〉(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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