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HAPE OF TIME:
KOREAN ART AFTER 1989
동시대의 역사를 발언하는 한국 현대미술
서상숙 | 미술사
한 사회의 어떤 시대에 대해서 역사적 중요성의 경중을 논할 수 없겠으나, 1980년대는 특히 한국 근현대사의 방향을 바꾼 격동의 시대라 불린다. 군사독재로 점철된 한국의 정치학적 지형은 노동 시위와 민주화 항쟁의 진통을 겪는 한편, 대중매체의 확산, 서울올림픽 개최, 해외여행 자유화라는 산업의 영역으로 확장됐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1989년 이후의 한국미술을 주목하며, 이제 막 전환기를 겨우 통과했던 당시 한국 사회를 목격한 작가들의 시선에 초점을 맞춘다. 전시는 급속한 변화를 뚫고 달려온 당시의 세대가 감내해야 했던 사회 정치적인 문제를 발언하며 이를 세계화 관점으로 풀어낸 해석을 내놓았다. 전시는 내년 2월 11일까지.
서도호 〈서울 집/ 서울 집/ 가나자와 집/ 베이징 집/ 포항 집/ 광주 집/ 필라델피아 집〉(사진 위) 실크, 금속 틀 391.4×1462.5×725.4cm 2012,
하지훈 〈자리〉(사진 아래) ABS 성형에 크롬도장 가변 크기 2023 사진: Timothy Tiebout 제공: 필라델피아 미술관
동시대의 역사를 발언하는 한국 현대미술
현재 미국에서는 한국미술이 커다란 관심을 끌고 있다. 이례적으로 필라델피아, 구겐하임, 메트로폴리탄, 샌디에이고, 덴버 등 5개 주요 미술관에서 한국미술 특별전이 일제히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시간의 형태: 1989년 이후 한국미술>은 미국에서 10여 년 만에 열린 한국 현대미술전이어서 더욱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구겐하임 미술관의 <한국의 실험미술 1960-70년대전과 같은기간에 열리면서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의 한국 현대미술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드문 전시로, 도자기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그리고 최근 국제적으로 재조명받고 있는 단색화를 넘어서 동시대 한국미술의 위상을 알리는 기회로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이 전시는 약 10년에 걸쳐 자체 기획되었고, 퓨재단(Pew Center for Arts & Heritage), 아넨버그재단(Annenberg Foundation Fund for Major Exhibitions), Andy Warhol Foundation) 등 미국의 명망 있는 기관의 기금을 바탕으로 필라델피아 지역의 뜻있는 한인들이 함께 기금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우현수 큐레이터와 엘리자베스 아그로 큐레이터는 1960년부터 1986년 사이에 태어난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작가28명을 선정, 1989년 이후의 한국미술을 점검했다. 두 큐레이터는 "확실한 콘셉트를 바탕으로 한 작품, 뛰어난 수작업으로 다양한 재료를 다루는 작가들이 2000년 이후 발표한 작품들에 관심을 두었다"고 밝히며 회화, 사진, 설치, 영상, 공예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30여 점의 작품을 골랐다. 전시 도록에는 작가들은 한국 군부 독재정권 하에서 자라난 마지막 세대로 민주주의를 경험했으며 해외여행 자유화의 혜택을 받아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하며 유럽과 미국 문화에 빠져든 세대"라고 나이 제한의 배경이 설명되어 있다. 《시간의 형태>전은 미술관에서 현대미술 특별전이 열리는 전시장인 도렌스갤러리(Dorrence Gallery)를 비롯 볼 테라스(Toll Terrace), 윌리엄스 포럼(Williams Forum) 등 전관에 작품이 흩어져 전시되고 있다. 주 전시공간은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하여 4년 동안의 리모델링 작업 후 2021년 재개관한 곳이다.
신미경 〈동양의 신들이 강림하다〉 비누 높이 160~220cm 2023 사진: Timothy Tiebout 제공: 필라델피아 미술관
야외에 설치된 작품이 이번 겨울을 포함한 약 4개월의 시간을 거치며 어떻게 변화할지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바이런 킴 〈제유법〉(사진 왼쪽) 나왕합판, 자작합판에 유채, 왁스 각 25.4×20.3cm 1991~2023
인종이 다른 모델을 앉혀놓고 그린 피부색 초상화로 이번 전시에 320점이 설치됐다
오형근 〈왼쪽 얼굴〉 연작(사진 오른쪽)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40×107cm 2006~2023
임민욱 〈포터블 키퍼 시리즈〉(사진 가운데) 혼합재료 가변 크기 2022, 안세권 〈월곡동의 빛〉(사진 오른쪽)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47.3×186.1cm 2005
사진: Timothy Tiebout 제공: 필라델피아 미술관
미술관서쪽 입구의 야외공간인 볼 테라스에는 높이 2m에 이르는 신미경의 비누조각3점이 설치되어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는 명소로 떠올랐다. <동양의 신들이 강림하다> (2023)는 미술관 커미션 작품 두 점 중 하나로, 1926년 필라델피아 미술관 건물 남쪽 날개의 박공 장식으로 모형까지 만들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던 조각상에서 3명의 신을 선택해 만든 작품이다. 비누 화장품 브랜드 뉴트로지나에서 제공받은 12t에 달하는 작은 비누들을 녹여 틀에 부어 굳힌 블록을 세워놓고 깍아낸 작업으로, 작가는 필라델피아의 한 조각 스튜디오에 매일 출근하며 두 달 동안 작업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도렌스갤러리 입구에는 여선구의 3.5m 높이의 도자작업 <부모님을 위한 기념비>(2013)가 세워져 있다. 입구로 들어서면 정면에 DMZ의 을지전망대에서 연출, 촬영한 정연두의 10m 길이의 대형 사진작업 <을지극장> (2019)이 관람객들을 맞는다. 바이런 킴의 추상작업인 미국 내 다양한 인종들의 피부색 초상화 <제유법(Synecdoche)> (1991~현재)의 반대편에 한국 젊은이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오형근의 대형 사진 작업 <왼쪽 얼굴>(2006~2023) 시리즈가 전시돼 이민자인 한국인이 보는 외국인, 그리고 한국인이 보는 한국의 신세대를 비교할 수 있어 흥미롭다. 또 김계옥, 윤상희, 이수경 등 공예의 장르를 확장해가는 작가들의 작품이 다수 선보여 공예 전문 큐레이터인 아그로의 한국공예를 보는 시각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도시 혹은 집들이 천천히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김주리의 작품은 관람객 시선이 오래 머무는 작품 중 하나다. 미술관 커미션 작품인 김주리의 <소실되는 풍경-휘경 필라델피아>(2023)는 굽지 않은 진흙으로 만든 집들에 물을 부어 서서히 녹이거나 무너뜨리는 작업이다. 작가는 재건축의 바람을 타고 하루아침에 철거된 이웃집을 목격한 2010년경의 풍경을 작업에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등 도시 재개발의 폐해를 침묵 속에서 고발하는 작업이다. <휘경> 연작은 서울 휘경동과 상봉동 부근의 집들을 모델로 한 것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집들은 모두 실제 건물들이다. 집을 고르고 사진을 찍고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거쳐 석고나 실리콘으로 판을 뜬 후 진흙으로 실제와 똑같은 미니어처 집을 만들어 설치하는 노동집약적 작업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에서 7채의 집중 5채를 만들어 국제우편으로 부치고 전시 개막 3개월 전에 미국에 도착해 필라델피아 미술관 근처의 클레이 스튜디오에서 나머지 두 채를 만들어 전시장에 설치했다.
김주리 〈소실되는 풍경 – 휘경: 필라델피아〉 흙, 물 가변 크기 2023 사진: 서상숙
작가가 관람객들 앞에서 진흙 작품에 물을 붓고 있다. 집들이 서서히 무너져 폐허가 됨으로써
작업은 끝나는데, 작가는 진흙을 모아 싸두었다가 새로운 작업에 사용한다에 낙찰되었다
오인환의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곳, 필라델피아>(2023) 역시 이번 전시를 위해 현장에서 제작된 장소 특정적 작품이다. 동성애자인 작가는 필라델피아 미술관 주변 게이바들의 상호를 전시장 바닥에 빨간 가루향으로 써 내려갔다. 본래 작가는 작품을 서서히 태우며 상호가 사라지고 향만 남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시장 내에서 작품을 태우는 연출이 어렵게 되자 비디오 모니터를 설치하여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남북 분단, 군부 집권의 상황이 자아내는 긴장과 호기심 역시 이 세대 작가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남북문제 혹은 북한주민들의 삶에 관심을 가진 함경아는 우연히 집 앞에 떨어진 페라, 즉 북한의 선전물을 보고 북한주민들과의 소통을 시도했다. 작가가 그린 자수본을 중개상을 통해 북한에 전달해 주민들이 수를 놓게 하고 다시 작가에게 보내도록 한 것이다. 이번에 전시된 작업은 <당신이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섯 도시를 위한 샹들리에>(2015~2019) 연작 중 두 점으로, 작가는 광목, 비단실뿐만 아니라 중개인, 밀수, 긴장, 불안, 검열, 이데올로기 등도 재료에 포함시켰다. 기자 출신의 사진작가 노순택은 억압적인 군사정권 아래 야기되었던 정치사회적 소용돌이를 카메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번에 전시된 <망각기계>(2005~2023)는 1980년 광주민주항쟁에서 희생된 고인들의 낡은 영정사진을 촬영한 것이다.
한편,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작가들과 이민을 통해 미국에 정착한 한국작가들은 또 다른 이슈인 정체성과 문화적 충격, 그리고 그리움에 천착했다. 부처 좌상의 머리를 미키 마우스 등의 만화캐릭터로 대체한 마이클 주의 <헤드리스(생산된 초상)(Headless (mfg. portrait)>(2000), 한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자란 후 다시 미국으로 이주한 유니 킴 랑이 조선시대 여성들이 머리에 썼던 가체(加)의 형태를 빌려 검은 머리라는 동양인의 신체적 특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 <컴포트 헤어(Comfort Hair)>(2013) 등의 작품들이다. 특히 랑은 오버사이즈의 가체를 머리에 쓰거나 대형 머리채의 가운데로 들어가 배 속의 태아처럼 눕는 퍼포먼스도 펼쳤다. 서도호의 <집>(2012)은 문화적 충격과 외로움을 견뎌내기 위해 어린 시절 살던 서울의 집 모형을 고운 은조사 천으로 만든 것이다. 언제라도 접어들고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만든 그리움의 작업인 것이다. 그의 작품은 층고가 높은 윌리엄스 포럼 홀의 천장에 걸렸는데 바닥에 하지훈의 <자리>(2023)가 설치되어 방문객들이 앉아서 쉬며 작품을 감상하는 편안한 공간인, 그야말로 ‘집과자리’로 연출되었다.
오인환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 필라델피아〉 향, 가루 가변 크기 2023 사진: Timothy Tiebout 제공: 필라델피아 미술관
일간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에미 로젠버그 기자는 이번 전시를 예고하는 지난 9월 12일자 기사에서 “한국미술이 필리(필라델피아의 애칭)에 온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못할지도 모른다”라는 유머 넘치는 헤드라인을 뽑았다. 야외에 설치된 비누 조각, 녹아내리는 집들, 그리고 타들어가는 가루향 등 시간을 다룬 작품들을 언급한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미술평론가 테드루스는 10월 20일자 기사에서 “지금 미국에는 (한국의) 12세기 초의 사기그릇(덴버미술관의 분청사기전부터 비누로 만든 현대미술 조각까지 선보이고 있다”며, “미술관의 주요 보직에 한국인이 속속 임명되고 있다는 사실도 미국 미술계에 한국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이번 전시에 맞추어 미술관 내 레스토랑 ‘스티어(Stir)’에서는 이훈 셰프가 한국음식 테스팅 메뉴를 아카디아대 학생들이 만든 맞춤식기들에 담아 선보여 미디어에 소개되는 등 화제가 되고 있다. 학생들은 작업 전 미술관 내 한국관에 전시된 한국도자기 등 한국미술품을 관람하였다. 최근 팝, 음식, 영화, 드라마와 함께 K-아트의 바람 역시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번 전시에 선정된 작가들은 대부분 영국 등 유럽과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만 미국에서는 아직 낯선 작가들이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때 우리나라 작가들이 미국 미술계, 나아가 국제무대로 더 활발하게 진출하기를 기대한다.
마이클 주 〈헤드리스(생산된 초상)〉(사진 오른쪽) 우레탄폼, 비닐, 스티렌 플라스틱, 스테인리스 스틸 와이어, 네오디뮴 자석 72.4×87.6×62.2cm 2000
사진: Timothy Tiebout 제공: 필라델피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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