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REVIEW

YOON HYANGRO

윤향로는 1990년대에 가장 많이 소비된 만화 콘텐츠에서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 장면을 포착하여 발췌한다. 이를 확대 크롭하고 변형하며 여러 단계의 편집을 거친 다음 캔버스에 옮긴다. 스크린과 캔버스를 넘나들고 나면 만화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믿기 힘든 추상화가 탄생한다. 작가는 최근 〈ASPKG〉(2022)와 같은 작업에서 화면의 크기가 일정한 비율에 따라 점진적으로 커지도록 캔버스를 나열하여 이미지 규격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갔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본인이 “유사 회화”라고 명명한 개념의 경계를 끊임없이 실험한다.

1986년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한예종 조형예술과 평면조형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실린더와 Hall1, 학고재, p21, 두산갤러리 뉴욕, 인사미술공간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부산현대미술관, 아뜰리에 에르메스, 타이베이 디지털 아트센터, 아르코미술관, 국제갤러리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가했다. 한예종과 경희대에 출강하였으며, 서울시립미술관 서서울미술관, 아라리오뮤지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있다. 올해는 원앤제이와 함께 프리즈에 참여할 예정이며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개인전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미지 매핑: 표면, 입자, 규격의 포맷
추성아 | 리움미술관 큐레이터

특정 대중문화 레퍼런스가 반영된 정제되고 차가운 풍경의 얇은 표면의 회화는 지난 10년간 축적된 윤향로 작업세계의 주축이 되었다. 윤향로가 특정 세대에서 소비되었던 코믹물의 영역에서 파생된 이미지를 여러 단계로 떠내는 과정은 한동안 DC 코믹스가 갖는 만화적 요소에 비중을 두었으나, 결국에 움직임이 정제된 이미지 안에서 표현되는 한계에 부딪혔고, 시대에 따라 복제된 이미지 데이터의 영역이 회화에 놓일 위치에 대한 탐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이미지라는 말이 미끌미끌해서 쉽게 잡히지 않는 단어로 다양한 포맷(format)을 취할 수 있는 시각적 내용의 일부분이듯이, 윤향로는 지난 시간 아날로그 이미지의 디지털화 과정을 거쳐 중성적으로 표백한 양쪽의 경계를 오가고, 탈주하고, 우회하는 방식으로 데이터로 존재하는 이미지의 표면을 건져내면서 회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해왔다.
인터페이스의 위계가 스크린 혹은 캔버스 어디에 존재하는지 저울질하는 작가의 태도는, 두 개의 차원을 동시에 복제하는 듯하지만, 불완전하게 연동될 수밖에 없는 미끄러지는 이미지의 존재감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물질에서 비물질,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전환되는 형태가 다양한 포맷이나 상황을 누비듯이, 윤향로 작업에서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변신하는 스파크 장면처럼, 작가에게 데이터 이미지는 ‘힘-흐름’이 극단적인 시각화로 변환되는 순간일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지난 10년간 축적된 이미지 표면에서 작가가 ‘무엇을’ 끄집어냈는지를 언급하기보다, 회화적 프레임 안에서 데이터 이미지가 이동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고자 하는 형식이 품고 있는 힘을 향한 작가의 반복하는 의식(ritual)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Tagging–H〉 엡손 울트라크롬 잉크젯, 아크릴릭 300×500cm 2022 Hall1 전시 전경

〈Drive to the Moon and Galaxy 2, 3, 4〉 엡손 울트라크롬 잉크젯, 아크릴릭, 유채 182×123, 182×91, 182×53cm(왼쪽부터) 2022 BB&M 갤러리 전시 전경
사진 제공: BB&M

데이터에서 파티클까지
2012년부터 작가가 물질 덩어리(만화책) 각 장을 복사(스캔), 크롭, 포토샵 툴 이용, 그리고 스크린샷 하는 단계에서 조금씩 직관성이 개입되었는데, 엄밀하게는 시각적 정보를 차용하는 과정에서 데이터 이미지가 미묘하게 변형 및 왜곡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이 시대에 작가를 포함한 대부분에게 이미지를 인식하고 작업으로 끌어오는 방식이 과거와 다르게 개인적인 감각과 역사들로 전유(《Canvases》 학고재, 2020)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소비하고 생산하는 이미지는 여전히 스펙터클로서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만들어내는 데 유효하지만, 그 또한 무의미할 정도로 대량으로 빠르게 소비되고, 휘발되고, 뒤섞이는 형국에 다양한 속도로 복제되고, ‘재매개(temediation)’되면서 이동하는 새로운 형태의 ‘힘(force)’으로 작동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윤향로는 이미지 자체의 잠재된 능력을 적극 활용한다. 데이터가 갖고 있는 이동성, 즉 여러 단계로 편집과 변환을 시도하는 파생과 분류의 속성이 그의 작업 안에 회화적 형식으로 점철되었다. 이미지가 확산하는 규모와 이동하는 속도를 가늠해보면, 비물질 요소의 구심점을 유동성에서 발견하는 작가가 다시 회화적 재료와 프레임 위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건조하게 박제하려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이로써, 이미지는 단지 특정한 기호로 규정되기보다 흩어진 매개체로 재해석되고, 각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상응하는 새롭게 읽힐 유연함을 획득하게 된다.
윤향로가 제어하는 최소 단위의 픽셀은 벡터 처리를 위한 가상의 날것이다. 〈Screenshot〉(2017~2018) 연작은 지극히 가벼운 질량의 에어브러시를 축적하여 공기 중에 분사되는 입자들이 캔버스 위에 가상의 픽셀들로 고르게 현실화되었다면, 스크린샷의 연장선에서 근래에 선보인 〈Drive to the Moon and Galaxy〉(2022)와 〈Tagging -H〉(2022)는 의도적으로 깨뜨린 픽셀 이미지를 캔버스 배경 역할을 하도록 표면 위에 전사했다. 겹겹이 곱게 올라가는 입자들은 두꺼운 붓질과는 다르게 어느 한쪽이 얇게 혹은 두껍게 안착되었는지 표면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매끄럽다. 이때, 빈 영역은 계산된 작은 붓질과 오일스틱으로 채워지면서 상상의 이미지를 표출한다. 기본적으로 데이터 이미지는 픽셀로 구성되기 때문에 분절적이다. 이렇듯, 분절적인 이미지는 포토샵 툴이 개입된 편집과 저장 단계에서 화질에 변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레이어가 부여되고 이미지가 매개하는 작가의 또 다른 참조점으로 작동한다. 이같이 새로운 루프가 형성되기 시작한 근래의 요소들은 이미지가 감각적이고 개념적인 정보 형태와 결합되는 것과 유사한데, 그리기의 제스처가 작가의 신체 움직임과 밀착된 접속과 링크의 메커니즘과 같다. 〈Screenshot〉과 〈Blasted (Land) Scape〉 연작은 러그, 무빙 이미지, 라이트 박스, 실크 스크린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구현되면서 해상도를 임의로 높이므로 표면 장벽 위에서 뭉개고 추상화하는 단계를 갱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미지의 존재감이 원본 혹은 복제된 것과 후가공된 결과물 위에 공존하므로, 표면 위에 곱게 다져진 시간의 입자들이 “시각적 촉감(visual tactility)”으로 남아 판이한 감각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ASPKG(A-2, A-1, A0, A1, A2, A3, A4)〉목재에 아크릴릭 168.8×237.8×48, 118.9×168.2×34, 84×118.9×24, 59.4×84.1×17, 42×59.4×12, 29.7×42×8.5, 21×29.7×6cm(뒤쪽부터) 원앤제이 갤러리 설치 전경 2018 사진: 이의록

〈Tagging–C1, C2, C3〉 엡손 울트라크롬 잉크젯, 아크릴릭 40Ø×244cm 2022 CYLINDER 설치 전경 사진: CYLINDER

규격과 프레임
윤향로의 규격에 대한 관심은 책의 레이아웃에서부터 종이 용지의 비율과 크기를 바탕으로 반복과 전용, 점진적인 확장 등 틀형식을 기본적으로 활용하는데서 엿볼 수 있다. 일곱 점의 〈ASPKG〉(2018)와 석 점의 〈Tagging-C3, C2, C1〉(2022)은 기본 단위 아래 오브제로서 단일한 의미를 갖게 됨으로써, 각각의 입체로 구현한 방식이 사물화되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어떤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평면을 탈피한 몇몇의 작업들은 오브제로서 우선시되는 안정적인 감각보다, 작가가 고집하는 데이터 편집과 표면의 두께를 더욱 공허하게 하기 위한 상반된 전략을 내세운다. 작가가 끝없이 표면 위에 배설해내는 입자들은 인쇄, 분사, 덧칠하기, 뿌리기, 나아가, 실시간 데이터 수집-송출이라는 다양한 포맷으로 변신 중이다. 특히, 최근에 연 개인전 《태깅(Tagging)》(실린더/Hall 1, 2022)은 공간의 건축적인 형태와 크기, 그리고 구조를 또 다른 표면이라 가정하고 앞과 뒤, 안과 밖, 측면에서 생성된 의미들을 뒤섞인 표면의 이미지로 인식하는 효과로 귀결되었다. 특히, 거대한 스케일의 최근 작업은 유독 신체적 경험이 필수적으로 뒷받침되어 이미지를 보고 감각하는 것을 구체화하는 데 다다른다. 윤향로는 공간을 캔버스라 상정하고 일련의 ‘파티클’ 이미지를 투사한다. 공공 공간에 의미가 부여될 때, 거리두기를 해왔던 건조한 감각들이 조금은 느슨하게 즉흥성이 담보된 순간들을 주고받는 시도로 전환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면의 크기가 일정한 비율에 따라 점진적으로 커지는, 규격을 나열하는 방식은 2014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연 《Blasted (Land) Scape》의 시초가 된 〈GE91-3〉
(2014)에서부터 시작되어 2018년 광주비엔날레에서는 바닥에 나열한 회화 조각에서도 등장했다. 국내 특유의 캔버스 ‘호’ 단위와 종이 판형 기준에 대한 의구심은 평면에 부피를 만들어내면서 발생하는 깊이와 이미지를 감각하는 상대성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를 이끈다. 데이터 이미지를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롭게 크롭하여 스크린샷하는 과정이 갖고 있는 규격에 대한 자율성을 생각해본다면, 데이터 이미지가 조형의 여러 요소로 변주되는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가장 납작한 표면에 두께감을 줬을 때 추상성이 부각되는 역설적인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윤향로가 이미지를 인식하는 방향과 이 시대의 여러 장비가 이미지를 송출하고 디스플레이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은, 오늘날 이미지에 따라올 수밖에 없는 규격에 대한 사유로 귀결된다. 이 시대에 만들 수 있는 회화의 제작 방법에 동일한 맥락이 반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한편으로, 모두가 유사한 틀 위에 비슷한 장치로 이미지를 경험하고 제작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대량생산된 표준 크기가 이미지 혹은 동시대 회화에 영향을 주어 연동될 밖에 없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처럼, 윤향로는 표면과 입자, 그리고 규격이라는 기본 단위들의 역할을 중심으로 동시대 회화를 탐구해왔다. 데이터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데 비해 수고로운 과정이 여러 층위에 걸쳐 진행되고 그 안에서 작가만의 분류 체계가 결정되었다. 이 소스들은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기본 재료에 충실하되, 작가는 편집 툴에서 어느 정도 구획되고 계산된 표면을 구현하기 위해 그에 적합한 그리기의 방식을 택했다. 여기서 그린다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면 인쇄하고, 분사하고, 붓질하고, 짜내는 회화의 제스처라 언급해도 되겠다. 2012년을 시작으로 10년이 된 지금, 그의 작업세계에서 근래 가장 크게 변화한 소재는 캔버스 위 소립자들일 것이다. 물질을 구성하는 미세한 알갱이인 입자가 담고 있는 속성을 염두에 두자면, 크기가 없고 질량과 위치, 그리고 속도와 같은 역학 운동의 성질만 갖고 있는 기본 단위로 공간상 한 점에 위치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이때, 규격에 대한 의구심이 스케일에 대한 연작으로 이어지고, 명확한 윤곽의 형태에서 입자들이 종합적으로 뒤섞인 근래의 방식은 작가가 그동안 기피해왔던, 회화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우연과 오류들에 관대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렇듯, 흩어지고 모아진 데이터 이미지를 회화 위에 매핑하는 작가의 태도는 이미지 포맷의 변화를 의식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다. 나아가, 윤향로는 오브제에 기반한 미학으로부터 벗어나 이미지 군집에서 새로운 표면과 형태가 나타나는 것을 전제하는 데이터 기반 회화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전환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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