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FORUM

한국의 전위예술(Avant-Garde)과 구타이

《Into the Unknown World-GUTAI: Differentiation and Integration》(2022.10.22~1.9, 이하 《Into the Unknown World-GUTAI》) 전시 입구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 외경

한국의 전위예술(Avant-Garde)과 구타이
이은주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전후 폐허 속에서 꽃핀 실오라기 같은 희망
나카노시마 미술관(Nakanoshima Museum)이 작년 봄 개관했다. 1983년 미술관 설립 계획부터 개관까지 40여 년이 걸렸다. 그 기간에 근대미술 중심의 개관 전략도 재고를 거듭해 개관을 앞둔 10여 년 전 ‘신미술관 정비 방침’아래 전면적으로 뜯어고쳤다. 경영방침도 파격적이다. 공공-민간의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PFI(Private finance initiative)를 채택했다. 민간기업이 미술관 운영에 나서고, 관장을 비롯한 미술관 학예 전문 인력은 모두 오사카시에서 채용했다. 이러한 파격적 방침으로 나카노시마 미술관은 개관 후 금방 화제가 되었다. 신미술관의 취지에 따라 일본현대미술의 시초인 ‘구타이미술협회(1954~1972)’를 조명했다. 오사카의 현대미술을 이끌어왔던 국립국제미술관도 합세했다. 2013년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대규모 구타이 회고전을 연 이후 지역의 특수성이 곧바로 국제적 화두로 연결됐고 구타이는 전후 ‘아방가르드’, ‘전위예술’, ‘실험’이란 현대미술의 핵심 용어로 귀결됐다. 이는 다다정신을 계승한 까닭이다. 1957년 해외교류 차원으로 시작된 타피에(Michel Tapié)와의 교류로 인해 추상미술 운동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구타이 전시 개최 3년 뒤 독일에서 전후 전 세계 미술경향을 살필 수 있는 대규모 전시가 열렸다. 하랄드 제만을 이어 국제적인 기획자로 명성은 모은 오쿠이 엔위저가 기획한 전시였다. 《포스트 워: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의 예술(Post War: Art Beween the pacific and the Atlantic, 1945~1965)》은 전후 파괴를 딛고 재건된 세계 속에서 움튼, 국적이 다른 작가 218명의 작품을 모은 기념비적인 전시였다. 제각기 고립되듯 다른 삶의 터전에서 제작된 작품들이 전 세계의 공동 문제로 꿰매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는 구타이의 활동 시기와도 겹쳐있다. 그럼 한국현대미술은 어디쯤에 있을까? 과연 한국에서도 다다정신을 계승한 역사가 존재할까? 우리 역시 구타이처럼 ‘아방가르드’, ‘전위예술’, ‘실험’이란 용어를 동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1954년 《4인전》을 계기로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가 창립하면서 ‘전위회화’ 운동이 집단적으로 일어났다. 그 여파는 꽤나 컸다. 화단에서 주목받은 작가들이 시대의 변화를 몸소 체험하면서 추상으로 전향하게 했던 원동력이다. 현대미술의 큰 공백기를 맞게 했던 6·25전쟁 이후 갈길 잃은 화단에 새로운 길이었다. 해외교류는 그저 따라붙는 선물과도 같았다. 이 길은 당연한 성공을 담보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을 통해 서구 모더니즘을 경험했던 세대는 몰락하고, 광복 이후 설립된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세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1956년 5월 16일부터 27일까지 동방문화회관화랑에서 열린 《4인전》이 그 출발이다. 박서보는 “1956년 《4인전》으로 새로운 전위회화 운동이 시작되었고, 1957년부터는 더욱 본격적으로 확장되었다”고 보았다. 이들은 “《4인전》을 통해 국전에 반기를 들었고, 새로운 시대에 상응하게 자유로운 창조 활동이 보장되는 혁신의 사회를 향한 참여를 다짐했다”고 한다. 1
견고한 틀로 빚은 역사와 문명에 틈을 낼 수 있는 행위. 그 누구도 다다정신 계승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한국미술사에서도 기성제도를 강하게 비판했던 변곡점이 또렷이 존재했다. 1922년부터 1944년까지 개최된 조선미전은 광복 이후 국전으로 탈바꿈되었지만 그 심사체계와 방식이 거의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젊은 세대들은 일제히 반기를 들었다. 그 반기는 한국의 추상미술 전개에 활력이 되었다. 일사불란하게 시작된 추상미술 전개와 함께 현대미술의 서막도 활짝 열렸다.

다나카 아츠코 〈전자 드레스〉와 드로잉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 전시 전경 Ⓒ Kanayama Akira and Tanaka Atsuko Association

캔버스 매체의 이유있는 실험
다시 오사카로 돌아가자. 《구타이》(2022. 10.22~1.9)는 오사카 나카노시마미술관과 국제국립미술관에서 나눠 전시했다. 이 팀의 리더인 요시하라 지로(Yoshihara Jiro)는 오사카 출신이다. 1962년 구타이 피나코테카(Pinacotheca)라는 전용 전시공간이 오사카에 개관하면서 명실상부 구타이를 대표하는 도시로 거듭났다. 구타이가 전위예술 그룹으로서 표방한 것은 바로 요시하라 지로가 제시한 구타이 중심 선언에서 비롯되었다. ‘기존에 존재한 적 없는 것을 창조하기’, ‘다른 작품을 모방하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을 완성하기’는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새로운 형식을 구축해야 하는 전쟁 이후 세대의 절실한 절규였다.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행위를 위해 기존 관습을 우선 떨쳐내기 바빴다. 모든 것이 실험이었다. 임의적이고 즉흥적이며 우연성이 충만한 퍼포먼스처럼 말이다.
아방가르드는 시대에 따라 그 얼굴을 달리하여 등장하는 예술개념이다. 새로운 창조물을 탄생시키는 것이 예술행위의 원천인데 왜 아니겠는가. 그래서였을까. 이는 투쟁과 혁명에 봉사해온 만큼 기성문화와는 완벽히 담을 쌓았다. 전쟁 이후 일본에서 등장한 구타이는 기성문화와의 단절을 넘어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 제작을 표방한 다다정신을 계승했다. 전통이 유구할수록 다다의 정신은 깊이 침투한다. 여기 종이로 캔버스 프레임을 만들어 50cm 간격을 두고 일렬로 줄 세웠던 사부로 무라카미(Saburo Murakami)가 있다. 무려 42개의 캔버스 프레임을 뚫고 나오는 작품으로 제목은 〈Passing Through〉(1957)이다. 그는 다다와 초현실주의 선언을 극명히 구분했다. 다다는 ‘의미 없음’을 내세우지만 초현실주의는 문학(시)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구타이는 ‘무의미, 없던 것을 표현하기’에 절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가 종이를 뚫고 나오려면 행위가 선행돼야 한다. 매체보다 행위가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 행위에는 의미가 없다. 그곳엔 표현할 수 없는 감각, 소리, 시간이 ‘의미 없음’을 지향하며 소용돌이친다.
2013년 구겐하임 미술관 원형회랑에 설치됐던 사다마사 모토나가(Sadamasa Motonaga)의 〈Water〉가 나카노시마 미술관 로비 천장에 설치되어 있다. 해당 작품은 구타이 전시의 시작을 알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사이렌 경적이 크게 울린다. 일종의 경고음이다. 다나카 아츠코(Tanaka Atsuko)의 작품 〈Bell〉(1955/2000)에서 울려퍼지는 굉음은 전시장 전체를 뒤덮는다. 이 사이렌 장치는 10m가 넘는 전시장 바닥에 일직선으로 깔려있다. 관객이 작품을 관람하는 사이 사이렌 경적을 울리면 전시장은 또다시 굉음에 휩싸인다. 정적 뒤에 깜짝 놀라는 산만한 분위기에서 관람 행위가 지속된다.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전자드레스(Electric Dress)〉(1956) 제작 당시 작가가 착용해 화제를 모았던 흔적은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요시하라 미치오(Yoshihara Michio)는 설치와 캔버스 작업을 동시에 구현하며 평면과 공간 속에 구체화되는 시각성을 주목했다. 가즈오 시라가(Kazuo Shiraga)의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발로 두툼한 마티에르를 응축해 격렬한 추상을 제작했던 1950년대 퍼포먼스 영상도 눈길을 끈다. 전시는 1950년대 제작된, 시지각을 즉각적으로 자극하는 전자예술에 집중되지만 실제로 캔버스에 펼쳐낸 무궁무진한 실험 또한 구타이의 핵심자산이다. 전례가 없는, 한 번도 시도한 적 없었던 대상을 담아낸다. 아니 오히려 해체시킨다. 유구한 재현의 역사를 담보한 회화는 여기에 설 곳이 없다. 모두 추상이다. 기하학 추상부터 물감을 덕지덕지 바른 앵포르멜까지 캔버스 변형 오브제도 등장한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야외 전시를 비롯하여 앵포르멜을 위시한 추상미술, 해프닝, 설치미술, 전자예술이 결집되어 구타이란 용어로 통용된다. 이번 구타이 전시에서 내건 주제 역시 ‘차이와 통합’이었다. 제각기 다른 예술형식과 작가들의 실험이 한통속이다. 그 누구도 이전에 표현한 적 없던 새로운 실험이면 바로 ‘구타이’다.

요시하라 지로 〈Work〉(사진 가운데) 1962 도쿄 현대 미술관 소장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 전시 전경
요시와라 미치오의 회화 및 설치 작품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 전시 전경

구타이와 실험미술
한국 실험미술을 재조명하는 연구가 시작되면서 일본 구타이 미술이 소환된다. 일본에 구타이가 있다면 한국에는 실험미술이 있다. 과연 그럴까. 실험미술이란 용어는 1960~1970년대 특정 미술현상을 목도하여 정립되었다. 이는 기존의 회화와 조각에 국한되지 않은 오브제와 설치, 해프닝, 영화를 포함한다. 2 전후 앵포르멜 양식이 현대미술의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잡혔다. 현대미술의 경향을 선도했던 국가들의 영향도 컸다. 세대를 불문하고 전후 한국미술에는 새로운 제도가 절실했다. 1960년대 후반 젊은 세대들의 도전으로 설치, 해프닝, 영화, 전자예술 등 다양한 매체예술이 등장했다. 이러한 시도가 앵포르멜 시대의 쇠퇴를 논했지만 앵포르멜 세대의 최대성과 역시 제도권 개혁으로 꼽는다. 모두 기성문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1950년대 추상미술은 현대미술의 서막을 열었다. 앵포르멜을 통한 집단적 ‘전위회화’ 운동의 맥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가? 미술사학자 김미경은 1960~1970년대 다매체 예술형식을 ‘실험미술’로 압축했다. 그는 애초에 현대미술 연구를 위해 앵포르멜과 단색조 회화 연구에 착수했다가 1960년대 이후 제시된 미술현상 해석에 대한 관점의 빈곤을 느꼈다. 이후 그는 1960년대 후반부터 한국화단에 등장한 오브제, 설치, 해프닝, 영화작업을 묶기 위해 ‘실험미술’이란 용어를 붙였다. 3
1950년대와 1960년대 일사불란하게 일어났던 변혁은 세대간 균열을 피할 수 없었을까? 구타이가 일련의 차이들의 통합을 꿈꾼 것처럼 앵포르멜, 추상표현주의, 해프닝, 실험미술을 모두 포괄한다. 현재 ‘실험미술’은 1960년대 후반 《한국청년작가연립전》과 A.G. 그룹 활동 이후의 오브제, 설치, 해프닝, 영화, 이벤트를 수렴한다. 전위예술과 ‘실험미술’은 마치 동일한 용어처럼 사용되지만 실상 구별되어 있다. 한국 ‘실험미술’에서는 구타이에서 진행된 앵포르멜 전위회화 움직임을 찾을 수 없다.
예술은 끝없는 실험의 연속이다. 미술사는 새로운 연구 결과로 계속 재정립의 기회를 갖는다. 동시대 미술을 들여다보자. 실험미술이란 용어를 1960~1970년대 미술현상으로만 한정시킬 수도 없다. 오브제, 설치, 해프닝을 일제히 실험했던 작가들이 1970년대 후반부터 캔버스로 돌아왔다. 어쩌면 캔버스는 계속 함께했을 것이다. 매체와 장르의 구분으로 실험미술을 논할 수 없다.
전후 한국현대미술의 자생적 흐름은 언제부터로 볼 것인가? 애초 제도권 개혁을 꿈꾸며 현대미술의 서막을 알린 시기부터일까?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의 부흥이 앵포르멜의 쇠퇴를 야기할 때부터였을까?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가 창립되면서 추상미술운동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전위회화’는 기성세대의 제도를 전면적으로 봉쇄하고 새로운 흐름을 재건했다.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 세대 역시 기성문화를 거부했다. 세대가 바뀌는 10년 사이에도 제도화의 또 다른 탈출구로 전개된 추상미술운동은 지속되었다. 1960년대 후반 젊은 층은 캔버스에 마티에르가 풍부했던 회화 대신 옵아트, 기하학 추상에 몰두했다. 해프닝 작가들은 존 케이지, 앨런 캐프로, 잭슨 폴록으로 연결되는 추상표현주의에 매료되었다. 지금부터 조명해야 할 점은 서구미술 수용과 재해석에 관한 연구이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미술화단에 서구의 양식이 어떻게 수용되고 한국의 자생적 흐름으로 뿌리 내렸는가. “많은 논의들은 일본미술가들의 전통적인 동양적 형태의 발굴과 독특한 새로운 작업방식의 발견뿐 아니라 서구의 영향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다뤘다”4는 평을 남긴 전시 《1945년 이후의 일본미술: 하늘을 향한 절규》(1994.9.14~1995.1.8, 구겐하임미술관)은 일본 전후미술에 초점을 맞췄으며 구타이, 요미우리, 안코쿠 부토, 플럭서스, 개념미술, 모노하, 비디오, 근현대회화를 막론했다.
1957년을 되돌아보니 추상개념을 내세운 전위예술(회화)운동이 또렷이 고개를 들고 있다. 시대별, 미술표현양식으로 분석하면 1950~1960년대로 이어지는 구간에 앵포르멜과 실험미술이 있다. 구타이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를 아우른다. 한국 앵포르멜의 ‘전위회화’ 개념, 《한국청년작가연립전》, A.G.의 활동이 시기상 포함된다. 실제로 구타이는 매체와 공간의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움직였던 실험에 빠져 있었다. 구타이 실험에는 장르 구분이 없다. 한국의 ‘실험미술’은 현재 탈평면, 입체, 퍼포먼스 등을 수용하는 미술용어로 자리잡혔다. 세대의 단절과 분할을 차이로 보고 통합을 꾀한다면 전위, 아방가르드, 실험이란 용어가 하나의 문맥으로 관통한다. 1954년 전쟁 이후 세대들이 출범시킨 구타이 전시를 마주하니 한국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 시작점을 1950년대로 앞당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미술에서 전위예술의 근원은 어디서부터였나. 시대와 사조를 중첩해 기술할 수 있는 비선형적 사고가 절실한 때이다. ‘단색화’와 ‘실험미술’ 사조가 각각 해외에서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 화두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1. 박서보 「체험적 한국 전위미술」 『공간』 제1호  1966년 11월 p.85
  2. 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 시공사 2003 pp.7~9
  3. “‘좌상파 국전’이라든지, ‘국전의 문제점’ 같은 이슈로 제도권 미술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했다. 앵포르멜 세대가 이룩한 최대의 성과인 제도권 개혁과 ‘한국적’ 특성으로서 대두된 단색조 회화는 정치·사회적 격동기 현실과 여전히 괴리되어 있던 것이 아닌가. 이 시대 한국의 미술현상을 해석하는 기타 관점은 왜 보이지 않는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 시공사 2003 pp.7~9
  4. Jeung Lee Snaders 「1945년 이후의 일본미술: 하늘을 향한 절규(Japanese Art After 1945: Scream Against the Sky」 『공간』 제327호 1995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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