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은 Jae-Eun Choi

대지에 뿌리내린 미.완의 시간

김유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Artist

최재은/ 1953년생. 1970년대 중반 도쿄로 건너가 1980년대 도쿄 소게쓰류(Sogetsu School)에서 수학 했으며, 이케바나와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며 테시가하라 히로시(Teshigahara Hiroshi)의 어시스턴트로 활동했다. 국제갤러리(2025, 2012), 도쿄 긴자 메종 에르메스르포럼(2023~2024), 도쿄 하라미술관 (2019, 2010), 프라하국립미술관(2014), 로댕갤러리(2007)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국립현대미술관(2024, 2016), 문화역서울 284(2022, 2019), 프라하국립미술관(2008) 등 국내외 유수 기관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아트선재센터, 도쿄 하라미술관, 프라하국립미술관, 이스탄불 라미 M.콕 박물관 등 세계 주요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교토에서 거주 및 작업 중이다. 사진:안천호 제공:국제갤러리


나무를 둘러싼 거대한 철판 구조물과 갈라지고 뚫린 철판 사이를 비집고 뻗어 나온 느티나무 가지들. 이질적인 두 존재가 하나의 작품을 이루며 묘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자연과 인공 이라는 상반된 요소의 충돌과 공존을 동시에 드러내며 시각적 긴장감을 형성하는 이 작품은 1988년 국립현대미술관 야외 조각장에 설치된 최재은의 〈과거.미래(Past.Future)〉다.

거칠게 녹슨 철판은 나무를 보호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나무를 속박하고 있는 것일까. 철판 사이를 뚫고 나온 나무는 자연과 인공의 대비 속에서 강한 생명력을 드러내고, 철판은 나무의 성장과 시간의 변화에 의해 조형적 변화를 겪는 듯 보인다. 이처럼 나무와 철판이라는 이질적인 존재는 서로 다름을 보이며 대립을 넘어 상호 의존적 관계 아래에서 공생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철판과 나무는 어떤 모습일까.

수많은 질문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4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현재 철판은 낡고 녹슬었고, 나무는 세월의 흐름만큼 자라났다는 것이다. 고요히 흘러간 시간을 오롯이 담고 있는 이 작품 앞에서 작품 제목 속 과거와 미래를 떠올린다. ‘과거’와 ‘미래’는 생성과 소멸, 탄생과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시간의 흐름과 연결된다. 모든 생명을 탄생이라는 과거를 거쳐 죽음이라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자연의 시간은 나무를 비롯해 인공적 사물인 철판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동시에 이 작품은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사이에서 주변과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거듭하는 현재 진행형의 작품이다. 1988년이라는 제작 연도는 작품의 시작점일 뿐이며, 매일 변화하는 자연환경과 시간의 축적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 낸다. 대지에 깊이 뿌리내린 채 미완의 시간을 공유하는 철판과 나무를 보며, 최재은의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살펴본다.

위 왼쪽〈대지〉가변 설치 1985 도쿄 소게츠 플라자 전경 1985 사진: Shigeo Anzai
오른쪽〈과거.미래〉철판, 나무 800×400×400cm 1988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아래〈루시〉 한백옥 239.5×246×291.4cm 2007 HDC 리조트 소장
《최재은: 약속(Where Beings Be)》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전경 2025
사진: 홍철기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과거
1970년대 중반 도쿄로 건너가 주로 일본에서 활동한 최재은의 예술 활동은 일본의 전통 꽃꽂이 예술 이케바나(生け花)를 전수하던 소게츠아트센터에서시작한다. 이케바나는 꽃이나 식물을 단순히 장식하거나 조형화하는 것을 넘어 자연과 교감하며 계절의 변화, 시간의 흐름 등 생명과 자연의 순환을 배우는 과정으로, 종교와 철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한 내적 성찰과 정신적인 수행의 실천 장이라 할 수 있다. 소게츠아트센터는 이케바나를 창조적 예술로서 인식했으며, 이를 현대적 설치예술로 확장시킨 곳이다. 동시에 1960년대 일본 전위예술의 중심지로, 백남준, 오노 요코, 존 케이지 등 세계적 예술가들의 전시와 퍼포먼스가 이루어진 현대미술 실험 공간이었다. 소게츠아트센터는 전통과 전위, 자연과 매체 실험이 교차하는 복합적 예술 문법 형성에 결정적인 토대를 제공했고, 이는 최재은의 작업 전반에 깊이 녹아들어 있다. 이케바나에서 출발한 식물의 생장과 자연의 생명성에 대한 작가의 실험적 작업들은 점차 공간을 넓혀 확장되었다.

1985년 첫 개인전을 개최하며 이사무 노구치가 설계한 소게츠플라자 석조 정원 〈천국〉을 13톤의 검은 흙으로 덮고 씨를 뿌린 작품 〈대지〉(1985)는 이러한 실험의 시작이었다. 전시기간 동안 흙이 품어 키운 씨앗은 인위적으로 식물을 자르는 이케바나의 문법과 달리 자연스러운 식물의 시간이 담긴 푸른 잔디를 틔워냈다. 작가는〈대지〉로 탄생과 성장, 소멸이라는 생명의 시간과 자연의 순환을 시각화했다.

이듬해 시작해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장기 프로젝트〈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World Underground Project)〉 또한 흙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생명의 의미를 탐색한 작품이다. 잘 썩지 않는 특수 종이를 제작해 경주 토암산을 시작으로 7개국 11개 지역에 묻고 약 3~15년의 시간이 흐른 후 꺼내 분해와 소멸의 시간을 관찰한다. 각기 다른 땅속 환경을 흡수한 종이들은 다양한 색과 문양으로 물들었고, 한 장의 종이 위에는 시간의 흔적과 함께 흙에 사는 미생물과 생명체의 보이지 않는 활동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이 프로젝트는 작가와 자연의 공동 작업과 같다. 이처럼 최재은은 우연과 실험을 거듭하며 인간의 통제 밖에서 작동하는 대지의 시간을 자신의 조형 언어로 옮겨왔다.

흙이 품고 있는 생명의 기원과 근원의 의미는 오랜 시간 땅속에 묻혀 있던 최초의 인류 ‘루시’를 시각화한 조각 작품〈루시〉(2007)로 이어진다.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약 320만 년 전 호미니드 화석 루시는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의 종이처럼 대지에 층층이 쌓인 시간을 상징한다. 최재은은 루시를 여성의 골반뼈를 연상시키는 순백의 조각 작품으로 재해석하며 화석 안에 응축된 수많은 생명의 기억들을 ‘루시의 시간’으로 구현한다. 루시는 문명 이전의 순수한 생명성을 상징하며, 땅속에서 보존된 인류의 시간을 통해 자연과 하나된 인간을 사유하게 한다.

이처럼 최재은은 자연이 남긴 흔적과 보이지 않는 생명체의 활동을 드러내며, 과거의 시간을 감싸안은 ‘대지’를 생명의 모태로 위치시킨다. 대지는 인간과 자연의 시간, 관계를 탐구하는 매개체로 기능하며, 그 속에 존재하는 자연의 무질서한 아름다움과 시간의 비가역성은 작가만의 조형언어로 구체화된다.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가루이자와)〉아크릴 레진에 와시,
각 98.7×98.7×6.5cm 1991~1992 ©이치카와 야스시

미래
시간을 재료 삼은 미완의 작업은 오랜 시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땅, 비무장지대(DMZ)로 이어진다. 최재은은 2014년 분단과 경계의 상징이었던 비무장지대를 예술적 관점으로 해석해 온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Real DMZ Project)’에 참여하며 비무장지대의 생태계에 주목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비무장지대는 여전히 지뢰가 묻혀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자연의 생태계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자연의 힘을 통해 인간이 만든 닫힌 경계를 열린 경계로 만들고, 분단과 갈등의 장소를 생명의 힘으로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비무장지대는 과거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곳이면서도 미래의 시간이 쌓일 공간임을 최재은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무장지대의 이름 모를 식물들을 연구하고 조사하며 파편화된 생태계를 복구하기 위한 작가의 예술적 노력은 비무장지대를 가로지르는 ‘공중정원 프로젝트’로 이어진다.

‘공중정원 프로젝트’는 지뢰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동시에 생태를 보존하는 대나무로 된 공중 보행로와 멸종위기 식물의 종자를 보관하는 생태 도서관 등이 포함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작가는 2015년 통일부와 UN에 이 프로젝트의 제안서를 제출하기도 하고, 같은 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에서 열린 글로벌네트워크포럼에서 ‘꿈의 정원(夢의 庭園 / Dreaming of Earth)’1이라는 주제를 발표하는 등 프로젝트를 현실화하기 위해 애썼다. 이 프로젝트로 작가는 2016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본전시에 초청되었고, ‘공중정원 프로젝트’의 모형이라 할 수 있는 ‘꿈의 정원’을 전시했다.

2015년 시작된 비무장지대의 생태 복원 프로젝트는 10여 년의 시간을 지나 자연이 주권을 가진 ‘자연국가’의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지난해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자연국가》에서 작가는 비무장지대를 위한 그간의 프로젝트 경과를 공개하였다. ‘자연국가’의 실현을 위해 생태과학 전문가들과 함께 비무장지대의 식물 수종을 연구 분석하여 ‘생태 현황 분석도’를 완성하고, 파편화된 숲의 회복을 위해 점토 흙에 씨앗을 혼합한 뒤 반죽하여 경단 모양으로 빚은 종자 볼(Seed Bomb)을 공중에서 투하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했다. 이것은 비-자연적인 개입이지만 투하된 씨앗의 성장은 대지, 즉 자연의 힘에 맡기는 실험적 방식이다. 작가는 과거의 회복을 위한 현재의 노력이 미래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종자 볼 매뉴얼〉을 제작했으며, 웹사이트(naturerules.net)를 통해 누구나 종자볼을 기부할 수 있도록 설계해 참여와 유대를 강조했다.

위 왼쪽《최재은: Forest of Asoka》 도쿄 하라미술관 전시 전경 2010 사진: Shigeo Muto
오른쪽《최재은: La Vita Nuova》 도쿄 긴자 메종 에르메스르포럼 전시 전경
2023 © Nacása & Partners Inc. 제공: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아래〈종자 볼 매뉴얼〉

종자볼은 미래의 시간을 위한 씨앗이다. 그간의 작업들이 대지의 생명력과 그 속의 보이지 않는 생명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종자볼은 땅속으로 새로운 생명을 이식하는 일이다. 현재의 우리가 미래의 자연을 위해 뿌리는 종자볼에서 40여 년 전 작품 〈대지〉에서 뿌렸던 씨앗을 겹쳐 본다. 〈대지〉의 씨앗을 통해 자연의 시간을 관조했다면, 종자볼은 자연의 회복을 위한 인간의 실천적 행위이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기다리며 미완의 시간을 만들어가는 작가의 실천은 작은 의미의 씨앗이 되어 미래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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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과거.미래〉라는 작품으로 돌아가 제목 사이 마침표를 생각한다.2 ‘과거’와 ‘미래’ 사이 놓인 이 기호는 단절이라기보다는 연결이며, 현재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이어가기 위해서 현재의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질문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작가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미완의 프로젝트를 통해 인류와 자연이 공존했던 흔적을 드러내고, 동시에 인간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미래를 우리에게 보여주며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 질문한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작품의 완성과 결과를 시간과 대지(자연)에 맡겼던 작가는 이제 새로운 유대를 통해 미래의 시간을 약속하고자 한다.

2026년 3월호 (VOL.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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